매일묵상(2023/12/26-29)

잠언28:1절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본절은 악인과 의인 간의 심리 상태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대조하였습니다. 악인은 사방이 적이며, 체포가 두려워서 경계의 눈초리를 거둘 수도 없습니다. 도둑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놀라 도망가는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스탈린은 암살의 공포로 자신의 주택을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지어서, 아무도 자신의 위치를 모르게 한 결과, 사망 후 3일이 지나서야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자신감은 사자에 비유될 정도인데, 이는 다가오는 어떤 공격도 방어해 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그 누구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두려워 하나, 악인은 마땅히 두려워 해야 할 주님은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위협과 약속을 신뢰하여 여하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을 가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은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을 방어하거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운명에 대하여 시편과 잠언이 선언하듯이, 하나님은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어 보호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시편1:6). 한편, 대한민국 형사소송법211조를 보면 악인의 심리 상태와 관련하여 재미 있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현행범- 범죄를 실행하고 있거나 실행하고 난 직후의 사람 -은 아무나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데, “누구냐고 묻자 도망하려고 할 때” 역시 현행범인에 준하여 체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심검문 시 당황하지 말고 먼저 상대방이 경찰인지 여부를 확인한 뒤, 사자처럼 담대히 받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3:5).

잠언28:2절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1절은 악인(불안과 초조의 삶)과 의인(안전과 평화의 삶)의 상반된 삶의 모습을, 2절은 그들 각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줍니다. ‘죄’로 번역된 원어의 기본적 의미는 ‘반역’으로, 왕이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됩니다. ‘주관자가 많아져도’란 정변이 자주 발생함을 뜻하는데, 악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의미합니다. 솔로몬 사후 여로보암에 의해 세워진 북이스라엘 왕국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하나님을 떠났고, 그 결과 200년 동안 9번 쿠데타가 발생하여 많은 혼란 끝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법과 제도, 윤리 등이 힘을 잃고 사회는 부패해가는 국가들의 공통적 현상입니다. 그에 반하여 혼란을 바로잡고 나라를 일으켜 세울 자는, 후단의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분열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장량으로 인해 한나라가 세워지고, 이순신 장군과 같은 명장이 조선을 지킨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 특히 지도자의 삶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까지도 결정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같은 원리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나, 그리스도 한 분에 의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과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고 거룩한 권위를 세우면서 이웃을 섬긴다면, 사회는 삶의 지혜를 발견하여 중심을 잡고 그 나라는 장구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 교육의 중요성이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5)

잠언28:3절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3절은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압제하여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가련한 장면을 묘사합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상황이란,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 사회적 힘을 갖춘 사람을, ‘학대 받는 가난한 자’는 물질과 사회적 힘 모두 결핍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제와 제1공화국 시대에 풍미한 거지 왕초 김춘삼을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다 같은 거지이지만, 그 거지들이 집단을 이룰 때 이끌고 갈 왕초가 필요합니다. 그 왕초는 전혀 구걸에 나서지 않지만 가장 좋은 음식과 예복 등을 공급받아 호화롭게 살아가면서,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주먹과 공포로 다스렸습니다. 사실 권력이나 힘 그리고 철을 따라 내리는 비는 좋지만, 권력이 무자비한 자의 손에 들어가서 남용되거나, 적절히 내리던 비가 변하여 폭우가 된다면 곡식은 물론 집까지 쓸어가는 재앙입니다. 특히, 힘을 가진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이 학대하는 자들과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어서, 그들의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음에도 동정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로 나가는 모습은 인간 타락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는 일만 탈란트를 빚지자 엎드려 비는 종을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둔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를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적용한다면, 그 말씀의 등불이 우리의 외식적인 면을 비추어 드러내고, 우리는 다시 빛 가운데 행하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실로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 하겠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잠언30:5)

(2023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벌써 2023년이 저물고, 2024년이 다가왔습니다. 올 한해, 매일묵상은 잠언21: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에서 출발하여, 잠언28:3절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로 맺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관점, 생각, 반응도 다채롭습니다. 이렇게 인생이란 어떤 관점을 갖고,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형형색색의 철학과 가치관이 등장하지만, “만유의 주님이 통치하시므로, 너는 잔꾀를 부리지 말아라”는 것이 잠언의 핵심적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섭리 가운데 다스리면서, 늘 사람들, 특히 하나님 백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시기에, 선지자 말라기는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 (말3:16,새번역)고 밝힙니다. 말이란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터져 나온 결과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이 경건의 첫걸음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 경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우리의 삶이 다시 세상을 비취어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목적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매일묵상(2023/12/18-22)


잠언27:25절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23-27절은 자신의 산업을 부지런히 돌보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날씨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듯이, 경제상황은 위기와 기회를 산출하며 역동적으로 변화합니다. 만약 위기 시 우리가 잠깐 방심하면 재물과 면류관은 날개를 달아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추수시기에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 와서 일꾼들을 감독하였고, 그러는 중 믿음과 효성의 여인 룻을 만나 가정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중요 산업인 양떼를 먹이는 ‘풀’은 어느 때 그리고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에서 들풀은 늦가을의 비가 내린 후에 산에서 자라나며, 베고 나도 우기에는 계속 새롭게 싹이 돋아 나옵니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10월 중순 경 이른 비가 내려야 곡식을 파종하고 풀도 자라는데, 매 년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누가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깨우치며 그분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후단은, 새로 난 들풀이 팔레스틴의 고원지대(산)를 덮은 모습을 전제하는데, 이는 번영과 풍부의 상징입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지혜로운 농부는 산이나 광야로 가축떼를 데리고 떠납니다. 여인들은 집에서 보리 농사를 짓고 풀을 거두어 말려 여름철 가축의 먹이를 준비합니다. 본 잠언은 주님이 창조한 질서와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살아가는 인간 지혜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밝힙니다. 우리는 기도에도 열심을 내야 하지만, 이런 농부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것은 짐승의 먹이인 꼴은 산에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잠언27:26,27절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26, 27절에서, ‘양의 털’은 옷감 재료이며, 양가죽은 물주머니, 천막, 그리고 종이의 역할을 하였고, ‘염소의 젖’도 유용한데, 모두 다 농부의 일상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만 하면 생활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부는 갖기 어렵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책에서 저자는 부자 아빠인 친구 아버지가 건물과 건물을 맞바꾸면서 부를 축적하는 기술을 터득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후단에서 ‘염소’를 팔아 밭을 사라는 솔로몬의 권면과 일맥상통합니다. 염소들을 주고 밭을 사면 귀중한 작물을 재배하여 부의 원천을 만들고,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필수품을 얻으려고(노력하면 누구나 충분함), 혹은 재물과 명예를 가지려고(세상 것들임) 성전에 와서 기도하지 말고, 가축과 같은 평범한 네 산업을 근면성실히 돌보데서 시작하라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그러면,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물론, 다른 재산(밭 등)을 소유하여 부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권고입니다. 훌륭한 인생전략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과정에서 정직한 보상으로 갚아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재물을 얻게 되었을 때 내 능력이라고 교만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재물얻을 능력을 주셨음을 인정하라고 명령합니다 (신8:16,17). 주님을 경외하는 잠언의 제자들은 양 구절을 조화시키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2000년 전 성탄절,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아기로 세상에 들어 오셨습니다(사9:6). 이 당시 베들레헴의 집들은 석굴 위에 두 개의 방을 가졌습니다. 큰 방은 부엌과 침실을 위해, 작은 방은(헬라어로 ‘카탈루마’) 창고와 손님방을 겸하였고 가축들은 집 밑 석굴에 가두어 길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황제의 명을 따라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갔으나 해산 할 곳을 찾지 못하는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도 호적하러 왔서 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관’ 이란 번역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행객들을 위한 여관은 ‘판도케이온’(눅10:34)을, 손님방을 위해서는 ‘카달루마’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눅2:7), 베들레헴은 유대 산지 마을로서 여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상기 구절은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친척이나 촌장의 집에 갔지만 손님방을 구할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레위기에 따르면, 산모는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하고 (레12장), 산모가 만지는 것마다 부정하기에 집 전체가 부정하게 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손님방도 없고, 부정이 온 집에 전가되지도 않도록, 그들은 가축이 있는 석굴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해산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아기로 탄생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들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그 약속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뒤 이은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고, 마침내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장면을 포착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BC 700년 당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으로, 처녀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아직 동침하기 전에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잉태하여 출산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인간이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시자 천사들도 이 감격을 인간들에게 전하려고, 한 밤에 베들레헴의 들에서 양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목자들의 들”로 불리우는 장소가 있습니다. 여기는 성전 제사를 위한 양을 기르는 들로서, 이 양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예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특히 이곳을 택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자, 홀연히 수 많은 천군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이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마태복음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만물을 창조하시자 하나님은 “심히 좋으셨습니다”(창1:31). 그러나 아담의 반역과 그 죄의 심판으로 사망이 온 피조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선언하시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메시야의 일은 죄, 사망 그리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아담의 불순종으로 좌절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 중요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순종을 확보하셔야 합니다. ‘화목’은 당신의 몸을 속건제로 하나님 앞에 드리심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키셨고, ‘인간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섬김이란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신 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당연히 원수 마귀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포로들을 빼앗기지 않게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양자의 가치관은 확연히 틀려, 우리 마음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누구의 가치관을 따를 것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표현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용서와 이를 뒤따른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우리 모두 아기의 모습으로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

매일묵상(2023/12/11-15)

(두 가지 길)
역경이 닥쳐올 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평하며 좌절하는 길, 또 하나는 주님의 섭리를 믿고 인내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중,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이삭 대신 숫양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볼 수 있었습니다(창세기22:13-14). 따라서, 미래가 닫혀 있다 생각될 때도 주님은 이미 해결책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1957년 한국유리공업㈜를 창업하신 고 최태섭 회장은 13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세계적 수준의 판유리를 생산하였지만, 약속을 어긴 동성판유리㈜와 사활을 걸고 3년이나 덤핑 경쟁을 하였습니다. 기도하시던 최장로님은 결국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 직원에게 현실을 솔직히 알렸습니다. 이에 직원과 경영진은 혼연일체가 되어 위기를 극복하였고, 상대 회사도 인수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건설붐이 일어나 회사는 기사회생하였다고 합니다. 최장로님의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여건과 상황에 따라 일희 일비하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여건과 상황에 감추어진 뜻을 읽고 그 어려움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뜻을 쫓으면 이익도 얻을 수 있지만, 이익만 쫓는 사람은 뜻도 이루지 못하고 이익도 얻기 힘들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무언가를 포기하면 그보다 훨씬 큰 보답이 머지 않아 뒤따른다는 믿음, 그것은 바로 나의 인생체험에서 나온 것이다”(최태섭 사랑에 빚진자 99-105).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시편37:3)

(아담과 아브라함)
하나님은 지으신 천지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으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란 플랫폼을 통해 인간이 각종 선을 생산할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을 이주시키셨습니다. 에덴 동산은 생명 나무를 가진 아름다운 정원이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 나무의 열매에 관한 특별 금지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때 아담은 순종이라는 특별한 선을 창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으나, 오히려 불순종하여 세상에는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선악과 나무’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늘 존재하며, 대표적인 것이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이고 아브라함의 삶에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특별히 명령하시자, 그는 순종하여 다음날 일찍 일어나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을 통해 그 자손(그리스도)이 오신다는 말씀을 근거로, 이삭이 불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답안이자, 주님의 믿음과 순종의 예표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라는 성육신의 명령을 받아 순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그 세대에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사53:8). 그러나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고 당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들로 정의됩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37:31)

잠언27: 21절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본 잠언은 실 생활에서 많이 보는 은과 금을 제련하는 도가니와 풀무에 빗대어 칭찬을 통해 사람을 시험하고 단련함을 일깨웁니다. 전단은 17:3절과 동일하나, 후단의 작업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칭찬이라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장인은 은과 금에 열을 가하여 불순물을 제거함으로, 마침내 순금과 순은을 만들어 냅니다. 솔로몬은 칭찬과 사람의 인품도 그런 관계이기에, 칭찬이 주어졌을 때, 칭찬을 받는 그 사람은 인격적 온전함을 갖출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칭찬이 주어질 때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은 명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칭찬의 말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랑이나 교만이란 엄청난 유혹과 싸우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그런 충동을 이겨낸다면, 그 사람은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명되어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의 칭찬과 비판에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지혜자이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아니라 타인의 칭찬을 추구하고 흐뭇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타락의 전형적 증세입니다. ‘사도행전’과 요세푸스의 책 ‘유대 고대사’에는 모두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신의 소리’라는 아부를 듣고 내심 즐기다 주님께 죽임을 당한 왕 헤롯 안티파스를 증언합니다(행12장).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을 어리석음에서 구하거나 타락에서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도 바울의 몸에 아픈 가시를 두심으로, 어떤 칭찬이나 영광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늘 자신을 경계하고 겸손하도록 장치하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3)

잠언27: 22절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시험하고 단련한다’(21)는 메시지가 계속됩니다. 타인의 ‘칭찬’은 양날의 검이라, 칭찬을 통해 현명하게도 되고, 혹은 ‘교만’이나 ‘자기속임’이라는 부정적 효과도 낳게 됩니다(21). 그러나, 22절은 그런 ‘시험과 단련’조차도 미련한 자를 개선시킬 수 없음을 밝혀, 그들의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교훈으로 무장하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하여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탐욕, 두려움, 또는 자기중심성이란 교만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참된 지혜를 거부하거나 무시합니다(12:15;18:2;26:11). 가룟 유다가 그렇습니다. 돈 궤를 맡은 것을 주님과 동료들을 섬기는 기회로 삼지 않고 재산축적의 수단으로 보아 헌금을 계속 훔쳐갔습니다. 마귀는 그 탐욕을 이용하여 주님을 은 30량에 팔게 하였습니다. 한편, 전단의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다”는 표현은 신체에 가하는 벌을 비유하여, 바보에게는 채찍과 고난도 효과가 없음을 말하나, 청년들처럼 개선 가능한 경우도 있기에 주의하여야 합니다(22:15; 23:13,14; 29:15,17). 또한, “사람이 선하게 바뀌려면 고난은 필수적이라는 믿음은 치명적으로 큰 착각이다”(브리지)는 말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의 회개치 않고 더 굳어지는 마음을 볼 때 좋은 통찰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이 미련한 자를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마19:26;막14:3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잠언27: 23,24절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23-27절은 이스라엘 주업 중 하나인 목축을 소재로, 근면 성실을 통해 번영을 성취하라는 교훈입니다. 23절에서 ‘형편’의 원어는 ‘얼굴,용모, 상태’를 뜻하는 ‘페네’로서 양떼 하나하나의 얼굴을 기억하듯이 각각의 상태를 주의깊게 살필 것을 명령합니다. 또 ‘마음을 두며’의 원어는 ‘너의 마음을 두라’는 의미로, 고용한 목동과 같은 타인만 믿지말고 자신이 직접 짐승떼를 돌보라는 가르침입니다(23). 부자라 해도 재물 관리를 소홀히 하면 삼대 가기 어렵고, 강력한 왕조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또 백성을 늘 마음에 두어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면류관’을 빼앗아 타인에게 주어버리십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불복종하자,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다윗에게 주셨고, 솔로몬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자 그 나라를 나누어 북쪽 10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신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마음은 자신이 보물로 여기는 곳에 머무릅니다(눅12:34). 따라서, 효자는 언제나 부모님을 생각하고, 애국자는 항상 나라의 안위에 마음을 두지만, 부자는 재물을, 권력자는 권세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주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부지런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5,6).

매일묵상(2023/12/4-8)

(부케팔로스 사건과 성경의 필요성)
기원전 344년 어느 날 마케도냐의 왕 필립2세에게 한 상인이 끌고 온 명마(부케팔로스)를 아무도 길들이지 못하였으나, 어린 알렉산더(12살)가 나서서 쉽게 제어하였습니다. 그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서 사납게 뛴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을 태양 쪽으로 돌려세운 뒤 올라타서 성공적으로 제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나운 명마 보다 훨씬 위험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도대체 우리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고,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지구가 끈도 엔진도 없이 허공에서 정해진 궤도를 계속 도는 등 수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경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창세기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나, 요한복음은 더 자세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유를 지으셨음을 선포합니다(요1:1-4). 이를 믿는 순간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올라타서 길을 제시하는 순간 그의 말이 되어 달리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만약 마귀가 공산주의 이념을 갖고 올라타면 공산주의자가 되어 자본가와 지주를 죽이는 것을 선행이라고 치하하고, 마귀가 탐욕을 갖고 올라타면, 마귀가 원하는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약 성령께서 올라타시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당연히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거부하고 성령께 순종해야만 하나 중생하지 않으면 그분의 말씀(=성경)을 간직하여 의의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책 “노예 의지”는 이 문제를 잘 논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십자가의 말씀’을 갖고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행복과 계명)
인간들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동물은 음식과 안전만 제공받는다면 행복한 것 같습니다만, 인간은 다릅니다. 관계, 존경, 자아 실현 등까지 충족되어야만 행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욕구에도 단계가 있다는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충족 행동은 여러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은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계명의 존재가 인간의 피조성과 유한성을 웅변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원리가 빌트인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절도죄나 강도죄를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 좋습니다만, 다른 사람을 방패로 내세우면 안 됩니다. 관계의 욕구 좋습니다만, 가정을 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귀면 안 됩니다. 존경의 욕구 좋습니다만, 표절하여 논문을 작성하면 안 됩니다.  자아실현욕구 좋습니다만 시인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시의 세계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이 계명은 인간이 가야만 하는 길이요, 행복의 첩경입니다. 청록파 시인이자 기독교인 박목월(1916-1978)은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교수직을 버리고 제주도에서 동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1954). 그러나 4개월 후 부인 유익순 집사님이 찾아와 추운 겨울 잘 보내라며 두 사람의 겨울옷과 돈봉투를 건네주고 서울로 돌아가자, 둘은 감격하여 관계를 끝냈습니다. 박목월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라는 이별의 시를 보내 그 아픔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라’ (엡5:33)는 말씀을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편119:105,106).

잠언27:19절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은 “캄마임 합파님 랍파님 켄 레브 하아담 라아담”으로 읽혀지며, 히브리시의 대표적 운율인 3+3을 유지하려고 압축된 문장이어서 작은 소리로 읍조리는 묵상에 적합합니다. 직역하면, “그 물에서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것처럼, 그 사람의 마음 도 그 사람에게 그러하다”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새번역이 취합니다 :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 또 하나는, 수면 위에 내 모습이 투영되듯이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이 투영된다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이 취합니다: “내 얼굴은 남의 얼굴에 물에 비치듯 비치고, 내 마음도 남의 마음에 물에 비치듯 비친다.” 본절이 인간 사이의 영향력을 다루는 17-19절 단락의 일부라는 점에서 후자가 좀 더 적합합니다(개정개역). 그렇다면, 본절은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투영해 줄 수 있는 타인이 필요하며, 또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하겠습니다. 황금률과 은률이 모두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근본적으로 동일한 본성과 심성, 나아가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천 년 전 성경의 사건들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교훈을 받는 것이며(고전10:1-11), 잠언의 필요성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헤아림으로써 개인적으로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고 교회적으로도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10:11).

잠언27: 20절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본잠언은 문맥상 ‘사람(=아담)’이란 주제어로 19절과 연결되어 있고, 내용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동의어이며,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무덤’과 ‘죽음’이 원래 목적한 의미입니다. 우가릭 문헌은 ‘못’(죽음)이란 탐욕의 괴물은 크게 벌린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희생자(죽은 자)를 집어삼킨다’고 합니다. 전단은 모두 잘 아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제시하고, 후단은 이를 비유로 하여 ‘사람의 눈’이란 어구를 동원 탐욕이란 인간 본능을 밝힙니다. 인간이 탐욕을 쫓는한 결코 참된 행복은 없고, 오직 허망과 파멸만이 남게 됩니다. 영국의 부유한 귀족의 집에 한 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하녀는 일을 하다가 한숨을 쉬며, “5파운드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마침 그 곁을 지나던 귀족이 그 말을 듣고 5파운드를 주면서 힘 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녀는 “이럴 줄 알았더면 10파운드라고 할 것을…”이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탐욕을 쫓아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궁핍에 처할 때는, 긍훌이 풍성하신 주님께서 기복적 기도에 자주 응답을 주시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맛들인 신자들은 이제 좀 살 만 하다 싶어도 기복신앙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응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아니라 더 많은 물질, 성공,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족’이란 덕목은 성숙한 신앙의 중심으로 기복신앙의 해독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매일묵상(2023/11/27-12/1)

(믿음과 은총의 삶)
잠언22:1절,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새번역)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만유의 주님을 알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이나 기업, 민족, 국가 등의 영광 또는 자아실현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수고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총의 삶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삶의 방법은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12:31)는 약속을 간직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늘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도 않고, 악인의 재물로 치부할 생각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분수를 알고 있으며, 또 노력한 만큼 살아가지 그 이상을 탐내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지 우리의 영원한 삶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는 불멸의 삶, 즉 영생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장래는 알지 못하나 염려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총의 삶으로 내 이익과 주님의 이익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시편37:5,새번역).
 
(세상 – 주님과 교제의 장)
하나님의 뜻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갈5:14)는 말씀에 담겨 있고, 이를 고린도교회의 사정에 맞게 해석한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사랑장)입니다. 또한, 이웃 사랑의 실천적 지침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7:12)는 황금률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선행이 물질의 축복, 명예의 축복 건강의 축복… 각종 축복을 보장하냐 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빛 바랜 양복 같아, 사탄이 참소할 틈을 갖게 만듭니다. 여기에 욥의 시험의 단초가 있었지만, 욥은 그 시험을 훌륭히 통과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욥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사랑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아담은 이 사랑이 없어 실패하였습니다. 세상이란 시험하는 장소로서,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양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 만유의 상속자와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밝히 보게 하고(마28:18), 참된 신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믿음의 삶의 핵심은 주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기대하는 삶입니다 – 승진, 결혼, 사업, 공부, 교우관계도 말입니다. 최근 아는 지인은 증권거래소를 은퇴하였으나 오히려 코스닥상장을 위한 회사들의 고문은 물론 부사장으로까지 영입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에 아픈 가시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사건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오직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불신자와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사귐은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119:1,새번역)

잠언27: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언의 제자들은 이웃에게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데, 본절은 이를 위하여 ‘이른 아침’과 ‘큰 소리’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교훈합니다. 상황은 ‘이른 아침’이어서, 그의 이웃은 잠자리에서 막 일어났거나,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크고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나 축복을 하면 당황스럽기도 하며, 진의를 몰라 의아해 할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이 오히려 저주 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참된 우정은 행함과 진실 그리고 공통분모인 상식 가운데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른 아침과 같은 상례를 넘어선 경우에는 축복의 인사를 포함한 경건한 말조차 예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상식을 잘 아는 본절의 행위자가 왜 이렇게 행동 하겠습니까? ‘진정성이 결여된 아첨의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큰 소리로 축복한다는데 그런 해석의 근거가 있습니다. 만약 이른 아침에 특히 전할 축복의 소식이 있다면, 그 이웃에게 가서 조용히 말하면 되지, 모든 이웃이 들으라는 외침에는 다분히 자기 과시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본 잠언의 교훈 역시 이웃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이웃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만약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내가 축복의 언어나 천사의 아름다운 말을 할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와 같이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 (고전13:1, 의역)는 놀라운 도덕법칙이 작동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그런 말은 진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참된 말을 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배워가야만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잠언27:15,16절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본절은 가정에서 아내의 도리와 배우자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다투는 여자”란 매사에 흠을 잡고 잔소리하면서 남편과 기싸움을 하는 아내를 말하며, 본절에서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로 비유됩니다.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란 내린 비가 지붕에 고여 떨어지는 낙숫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가옥은 지붕이 평평하므로 비가 내릴 때 물이 샐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면 방안은 엉망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다투는 여자를 둔 집안도 그와 같습니다. 16절은 그런 여인을 제어하여 순종하게 하는 노력의 헛됨을 바람과 기름을 동원해 묘사하는 바, 제 주변을 보아도 진실입니다. 가정이 늘 소란하면 그 어떤 일도 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는 것이며, ‘다투는 아내’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성격과 환경을 모두 고려해야 하지만, 대체로 한 고집하고 남편 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타락한 인간본성 때문입니다(창3:16). 조선 시대 어느 양반 가문에 결코 지지 않으려는 품성의 딸을, 시댁 어른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그 딸은 정말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남편과 시댁을 섬겨, 정경부인이라는 칭호도 받았으나, 사건의 전말을 알자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먼저 좋은 믿음의 여인을 아내로 얻고, 아내는 주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언19:14)

잠언27: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어린 염소가 어미와 형제들에게 구박받자, 할머니가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염소는 염소들과 살아야만 한다면서, 다시 염소들 사이로 되돌아 가도록 훈련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같습니다. 사람 역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훈련될 때만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독처가 선하지 않다 보시고, 하와를 만들어 가정을 형성하게 하셨듯이, 인간은 태초부터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펫이라는 성경학자는 “인간은 결코 혼자로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의 동료가 와서 언어로나 모범을 통해서 자극을 주고 각성시키면 혼자 살아갈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게 성장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경우 ‘경쟁과 협력’ 두 가지가 작용합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협력은 우리가 잘 아는 개념이고 또 올바른 행동이지만, 경쟁은 선의의 경쟁을 말합니다. 즉, 선한 목표를 두고 선한 방법으로 서로에게 자극을 주어 효율을 최고로 올리는 경쟁을 지칭합니다. 마라톤 선수 선수들이 여럿이 경쟁하면서 뛸 때 좋은 기록이 달성되는 것은 그 예이며, 심지어 친구의 마음에 열등감의 불을 지펴올려 잠재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함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루게도 합니다(격장지법).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모델의 최상단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