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2023/11/20-24)

(에서와 같은 유형의 사람)
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살아갔지만, 조상의 믿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도 좋은 편으로, 귀향하는 야곱과 싸우려고 400명과 함께 갔다는 것은 그의 위치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반면 절룩거리는 야곱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을 과감하게 떨친 통 큰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믿음의 눈이 없어 자신의 가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그 결과 (1) 창세기3:15절에 예언된 여인의 씨가 자신의 혈통을 타고 오신다는 약속을 무시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넘겼습니다. (2) 또한 부모의 뜻은 고려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가나안 땅 헷족속의 두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3)셋째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여, 그는 소떼, 양떼 등으로 큰 부를 형성하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서슴없이 떠나 안전하고 비옥한 세일 산 지역으로 이주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은 대대로 세일 부근에 살면서 에돔이라는 나라를 형성하고, 다른 이방 민족과 같이 풍요의 신을 섬겼다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시지 에서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지 않은 에서와 그 후손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란 없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생의 본질이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삶의 중심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엡1:4-5).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만민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성취하시고, 그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 이들은 언약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솔로몬의 지혜와 믿음의 문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를 구하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왕이어서, 형 아도니아 세력을 단 번에 제거하고 나라를 굳건하게 세웠습니다. 문제는 성전이 준공된 이후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는 백과사전적이었습니다. 지혜,풍요, 권력을 가진 솔로몬 왕국은 평화로웠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간구할 상황이 닥쳐오지 않자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를 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지혜의 원천이 하나님이란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를 근거한 지혜와 훈계를 무시한다”(잠1:7,새번역)고 가르친 바로 그 사람이 주님 경외하기를 그치니, 그의 모든 지혜는 방향을 잃고 세상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도 그를 여인의 손에 버려두셨습니다. 자연히 후궁들의 유혹으로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내에 성전을 세우고도, 그 앞 감람산에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몰렉, 시돈의 아스다롯의 신전을 또 세워 그것들에게 절하며 함께 분향하였습니다. 여기에 지혜로 살아가는 삶의 한계가 있습니다. 지혜가 그 방향을 잃으면 무서운 해악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끼치고 맙니다. 지혜는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솔로몬은 자신만이 중요하였고, 하나님은 장식이 되었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뒷전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란 최고의 지혜자가 일반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잠언27:11절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지혜’란 단지 높은 지능과 능한 임기응변 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올바르게 행동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1:7). 따라서. 본절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 안에서 바른 삶을 영위할 때 부모를 가장 기쁘게 하며, 가문을 비웃는 사람들에게조차 아버지는 당당하게 대할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솔로몬 왕국 당시는 농경과 목축이 주업이어서 인구의 수는 곧 국방과 노동력의 척도였고, 가정의 경제와 치안 역시 자체적 해결이 중요하여 많은 자녀는 든든한 울타리와 같았습니다(시편127:4,5). 그러나 자녀가 불량하면 오히려 지탄의 대상되고, 그의 부모에게는 큰 불행이었습니다. 이에, 잠언은 올바른 자녀와 미련한 자녀가 부모에게 어떠한 존재인가를 줄곧 교훈하여 왔습니다 (23:15,24). 한편, 본절이 내포한 영적 의미를 되새겨보면, 아들은 신자들을, 아버지는 하나님으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욥은 경건하여 악에서 떠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늘 하나님의 자랑거리였습니다(욥1:8). 이때 사단은 욥의 신앙의 약점을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 참소하였습니다. 시험을 당한 욥은 인내하였고 결국 훌륭하게 이김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분”이심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약5:11). 이런 욥의 삶은 우리 주님의 경건한 삶,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승천을 상징하며, 세상 가운데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늘 염두에 두고 시험을 이겨나갈 해답지로서 역할을 합니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잠언10:1)

잠언27:12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본절(22:3절과 동일)에서 ‘슬기로운 자’의 원어는 ‘아룸’으로 지혜와 연관이 있고, ‘어리석은 자’의 원어 ‘페티’는 ‘단순한, 순진한’의 뜻으로 ‘미련함’과 관련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 항해는 지혜가 필수적인데,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제대로 항해할 지혜의 구비 여부입니다. 본 잠언은 분명히 닥칠 역경을 보고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혹은 미성숙한 사람)의 삶을 관찰 후 결론을 내렸습니다: 전자는 재앙과 그 가능성을 보면 숨거나 피하지만, 후자는 고집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당합니다. 잠언은 이미 7장에서 어리석은 젊은이가 문란한 여자를 만나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따라 가는 모습을 보고,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7:22)고 탄식하였습니다. 결과는 미련한 자의 범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의 종류도 다양해서 일일이 전부 열거하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 위험의 징조가 감지된다면 회피하거나, 미리 대비책을 세웁니다. 한편, 본 잠언이 경고하는 가장 큰 위험은 도덕의 위험이고, 교만한 자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련한 위험입니다. 다윗 왕은 전쟁에서는 늘 이겼으나, 도덕의 문제에서는 넘어짐으로 큰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날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잠언27:13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

본절은 20:16절과 동일합니다. 신명기는 가난한 자가 겉옷을 담보로 제공하더라도 해질녘까지는 돌려주라고 규정하였기에(신24:10-13), 이스라엘에서는 겉옷을 담보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외규정이 등장합니다. ‘취하라, 잡을지니라’는 명령형은 본 잠언의 메시지를 잘 살리고 있으며, 메시지의 방향은 채권자에게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잠언은 아무관계도 없으며 낯선 타인의 빚 보증을 서지 말라고 누차 경고하나, 이를 무시한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면 누운 침상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잘모르는 낯선 ‘타인’은 물론, 심지어 외국인(‘외인’)의 빚보증을 섰다면 철이 없거나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22:26,27). 잠언은 통상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하며, 그런 행위는 주님께 꾸어드리는 의로운 삶임을 밝힙니다(14:31;19:17). 그러나, 타인 혹은 외인의 빚의 보증물로 제공된 자의 의복이나 몸을 취할 경우는 아닙니다. 잘모르는 남이나 외국인을 위해 보증으로 제공된 의복이나 몸을 취하는 채권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대신 수행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리석게 보증을 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열렬히 그리고 부지런히 채권자에게 가서 자비를 호소하는 길이외에는 없습니다(잠언6:1-2).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채권자, 채무자, 보증인의 관계를 잘 규율하고 있습니다만, 본 잠언의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새겨야만 지혜롭게 비즈니스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잠언19:29,새번역)

매일묵상(2023/11/13-17)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할 때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피하던 중 벧엘에 이르러 잠을 청합니다. 꿈에 야곱은 하늘까지 닿는 사닥다리와 그 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창28장). 이 사건은 75세의 야곱이 참된 신앙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전에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수년 전 최윤지 자매가 한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수원 광교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아는 언니를 만났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언니 아버지의 믿음이 강건해 지게 되는 계기를 들었습니다. 언니의 친정은 여의도 침례교회를 나가고 있었고 아버지는 약사로서 이대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였습니다. 2010년 전후로 이대 앞에 재개발이 시작되자 언니의 부친은 대형병원과 그와 관련된 약국이 입점하면 자신의 약국이 설 자리를 잃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작은 의원이 들어오게 해 주세요!” 막상 재개발이 끝나자 자신의 건물에 작은 의원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학교앞작은의원” 이었으며 현재도 운영 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아버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달은 분(A. M. Toplady)의 시가 있습니다.

내 손에는 드릴 아무 것도 없어요
다만 당신의 십자가를 붙뜰뿐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당신에게 가오니 입혀옵소서
힘 없어 당신을 앙망하오니 은혜주옵소서
범죄한 나, 보혈의 샘으로 날라가오니
씻어주옵소서,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창28:16,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황선우는 자유형 200미터에서 2022항조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 주인공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수영법을 터득한 뒤 이렇게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5살부터 수영을 하던 그는 고등학생시절 , 왼 팔에 30%, 오른 팔에 70%의 힘을 배분하여 리듬을 타면서 수영하는 자신만의 영법을 터득하였습니다. 이는 미국 대표 선수들이 주로 하는 ‘로핑 영법(loping stroke – 엇박자 수영)’으로, 한쪽에 힘을 더 싣는 비대칭 스트로크입니다. 그는 수영을 너무 좋아해서, 취미조차 유투브로 다른 선수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찾아보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6일을 훈련하며 – 오전에 2-3시간, 오후에 2-3시간 수영 – 저녁 후에는 2시간 정도 체력단력을 위해 운동합니다. 확실히 수영은 그의 인생이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바다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믿음의 비밀을 터득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여야 합니다.  훈련 방법은 ‘은혜의 수단’이며, 훈련 장소는 세상입니다. 은혜의 수단인 성경읽기, 기도, 예배, 교제, 성만찬 참여, 침례, 봉사와 섬김을 통해 힘과 지혜를 받고, 각팍한 현실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 실현해 나가는 삶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창조의 목적과 삶의 문법을 깨닫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고, 우리 삶의 문법은‘감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잠언27:8절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히브리 원문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처럼”이 문두에 나와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의 불안정한 처지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어미새는 둥지를 지키며 알을 품고 부화시켜 새끼를 잘 길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절의 어미새는 둥지를 떠나 홀로 애처롭게 떠돌고 있습니다. 이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떠나 헤매이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비유입니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가나안 정복 후 각 지파별 가족별로 분배받은 땅을 의미합니다.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각 개인이 임의로 사고 팔 수가 없었습니다. 혹 빚으로 넘어가면, 가까운 친족이 대신 사주어야 하였고(고엘제도), 그렇지 못할 경우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기하여 원소유주에게 돌아가도록 규정되었습니다(희년제도). 이렇게 하나님이 주셔서, 양도할 수 없는 땅을 떠나 유리한다는 것은 큰 저주입니다. 비록 지금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가 정착하였으나 성경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세속국가 중 하나입니다. 복음의 시대에는 물리적 고향 보다도 영적 고향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내세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대신 모세율법을 고수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방황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이며, 신명기는 그런 상황을 이미 예견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본절의 문맥상, 참된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교회) 가운데 머무르지 못하고, 둥지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이 영적으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3:7,새번역).

잠언27:9절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본절은 친구의 충고가 주는 즐거움을 ‘기름과 향’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기름’은 식용으로 쓰이는 기름이 아니라 감람유에 여러 향을 섞은 것으로 머리에 붓거나 피부에 바르는 화장용 기름을 의미합니다(룻3:3). 또한 ‘향’이란 침양이나 계피 등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는 물질을 가리킵니다. 당시 근동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러한 향으로 집안을 단장하고 향유를 손님에게 붓는 관습이 있었습니다(눅7:46). 한편, ‘충성된 권고’의 직역은 ‘생명의 권고’로서,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의 권면을 말합니다. 솔로몬은 친구의 이런 충성스러운 권고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하는 향과 기름과 같이 아름답다고 평가합니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재상 인상여가 조나라 환관 무현의 식객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무현은 보배 ‘화씨지벽’을 우연히 손에 넣자, 보고 싶어하는 조왕에게 거짓으로 도난당하였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 탄로나자, 무현은 연나라로 망명하려 하였고, 인상여는 그에게 충성된 권고를 합니다: “연나라는 조나라보다 약해 대인이 망명하면 곧 잡아 조왕에게 압송할 것입니다. 차라리 어깨를 드러내고 형틀에 엎드려 죄를 청하면 요행히 벌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무현은 크게 깨닫고 조왕에게 화씨지벽을 바치며 사죄하니 용서받았다는 고사입니다. 주님은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눅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전제하신 권고로써, 우리의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잠언27:10절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본절은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전단은 자신의 친구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친구도 버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아버지의 친구에 대한 봉양의 명령은 일견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솔로몬은 친구 관계가 가족 관계만큼이나 의미 있고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친구로 맺어진 관계가 중요하며, 서로에게 특별한 책임이 수반됨을 함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중단(中段)은 환난의 때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즉 재난을 피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형제를 찾지 말라는 의미로써,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해 태어났다”(17:17)는 잠언과 상반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각 잠언은 각각의 상황에 따른 권면이며, 본절은 형제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라도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위급할 때 좋은 친구가 혈육 이상으로 도움을 준 사례는 고금에 많이 있습니다. 후단은 중단과 같은 권고를 한 이유로써,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이나 형제 보다, 이웃에 있는 가깝고 친근하게 지내는 친구에게서 오히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 잠언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신앙의 박해 시기에는 친척들이 오히려 박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1795-1839) 역시 친척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순교당하였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매일묵상(2023/11/6-10)

회심에는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성경의 회심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그 결과 모든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방을 치우는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섬기려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의 실화입니다.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한 후, 면담을 위해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주님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주님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주님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식사를 준비할 때도 주님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과 권고를 천진난만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 있지 못하면 그분의 믿음은 부인 당하게 됩니다. “마음의 의”(벧전3:15-17)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남을 비웃는 자들은 천국 밖에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다른 것은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삶은 사랑의 지혜가 수반되어 있습니다(고전14: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10:15)

전도서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오래 전 영화 “오염된 자식들”이 떠오릅니다. 줄거리는 병구(안성기 역)는 평범한 여자 형자와 사귀다가, 출세를 위해 배신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장의 딸(명희- 장애인)과 결혼합니다. 병구는 결혼 후 장애인 명희를 섬기며 매우 고생하나, 어떤 계기로 명희는 수술을 받아 장애인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자, 병구는 명희에게 이혼 당하고 비참한 꼴로 몰락한 뒤, 받은 위자료 3억원 모두를 고아원에 기부한다는 내용입니다. 위 영화는 유익서의 소설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극화한 것으로 물론 허구이나, 현실의 거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동과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구부러지고 모자란 인간의 본성은 고치지 못합니다.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의 모습이 그 전형입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 중 그 한 사람만 선택하여 고쳐주셨으나, 그는 안식일을 위반하였다고 추궁받자 오히려 주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고 배신한 아담과 같습니다. 복음의 역사에서 장애인이 기적의 치유를 받거나, 절박한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더라도,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행하지 못한다면 “명희”나 “38년된 병자”처럼 더 악화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시어 속죄권을 확보하신 뒤,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려고 당신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사, 먼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뒤,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살게하시는 작업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4:8)

잠언27:5절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새번역)

5,6절의 주제어는 사랑인데 사랑의 표현은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책망이 참된 사랑의 표현일 수 있고, 오히려 입맞춤은 배신을 숨기는 도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자는 드러내어 꾸짖기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런 면책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 제자, 혹 친구가 개선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만약 책망이 없다면,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 될 것이므로 책망은 드러내 놓고 해야됩니다. 표현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한편, ‘숨은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꾸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책망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가 최선의 유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도, 비겁하고, 소심하며, 심지어 게을러서, 모험을 감수하기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숨은 사랑은 어두운 밤에 청년이 처녀에게 윙크를 보내는 것과 같아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꾸지람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러나 어른의 경우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바로잡는 행동(징계)은 함께 갑니다. 구약성경에도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레19:17)에 뒤이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19:18)는 명령이 주어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로 “책망” 혹은 “징계”가 그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이것들을 통해 훈련받은 사람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히12:11). 우리는 올바른 “책망”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꾸지람은 낙심하지 말고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11).

잠언27:6절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본절은 5절과 동일한 내용이나 좀더 구체적입니다. 즉 친구의 ‘아픈 책망’은 ‘면책-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과 ‘잦은 입맞춤’은 ‘숨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5절은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 자체의 가치를 말하지만, 본절은 친구가 하는 ‘아픈 책망’의 출처가 미움이 아니라 친구의 사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숨은 의도는 친구의 권고를 받아들여 잘못된 행동을 고치라는 요청입니다. ‘아픈 책망’으로 의역된 원어는 ‘피츠에’로서 ‘외적인 상처’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상당히 강한 어투로 꾸짖는 친구의 책망이 주는 아픔을 빗대었습니다.이른바 ‘마상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사랑의 동기에서 나왔고, 또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에 선한 행동입니다. 그 반면,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가룟 유다와 같이 악한 의도를 숨기고 외적으로는 친근한 척 한다는 의미로써 후단 말미의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란 표현이 잘 말해줍니다. 그 원수는 잠언의 제자가 내심 밉지만 이용하려는 속셈 때문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위선적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뱀과 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그 사람의 인품과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 지혜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고자 하면, 우리의 분별력은 모든 사람들 보다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시편119:98-100).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119:104)

잠언27: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인간관계에서 상황과 때가 중요함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꿀은 ‘좋은 것’의 상징으로 본절이 위치한 문맥에서는 ‘좋은 충고’를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싫어한다’의 원어는 ‘타부쓰’로 ‘발로 밟다’는 의미인데, 강한 혐오와 멸시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교만해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충고라도 멸시한다는 뜻을, 후단은 배고픈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먹어도 단 것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충고라도 겸손하게 수용할 수 있음을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주님의 면박을 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절박한 그녀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냉담한 모습을 보이셨으나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더욱 가까이 나아가 주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마음이 좌우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다루지만, 좀 더 관찰하면 비록 풍요할지라도 거슬리는 충고에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의 예는 다윗 왕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통한 뒤, 남편 우리아를 제거하고, 밧세바를 취해들였습니다. 다윗은 아이를 낳기까지 무려 1년이나 외식하고 살았습니다. 회개를 기다리신 주님은 드디어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범죄를 추궁하였고, 이에 다윗은 큰 소리로 회개하며 애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시가 시편51편입니다. 모세율법에 따르면 살인죄와 간음죄는 제사를 통해 용서받지 못하고, 오직 사형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다윗은 왕이라 집행할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은 집행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언17:10)

매일묵상(2023/10/30-11/3)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p144-146)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면 힘든 일도 기쁘고, 의와 공평도 베풀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비밀입니다. 더비셔의 클리프 대학 학장을 역임한 사무엘 채드윅은 이 원리를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어느 주일에 콜리 목사가 아이들에게 존 뉴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만일 뉴턴이 구두닦이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구두를 닦아 동네 최고의 구두닦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요지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아버지의 신발을 모두 닦는 것이 집에서 자신이 맡은 일이었던 터라 바짝 다가앉아 귀담아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구두 닦는 일이 싫었고 아버지의 부츠는 특히 싫었다. 마침 그 기념 주일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에 구두를 닦는 일은 최악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부츠부터 먼저 닦아 내려 놓으며 한시름 놓았는데, 부츠를 보는 순간 마치 예수님이 신으실 것처럼 구두를 닦아야 한다던 목사님의 말씀이 내게 도전으로 다가왔다….이 부츠를 예수 그리스도깨서 신으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부츠를 들고 다시 닦았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것이 내 평생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장 단순한 일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께 하듯 하는 버릇이 들었다.” 고(故) 김창엽 목사/교수님은 70대 후반에, 사모님이 뇌출혈을 당하셨습니다. 돌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 주님께 기도드렸더니 “내게 하듯 하라”는 깨달음을 받아 힘이 났다고 하신 경험과 같은 취지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잠언27: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7장은 이웃 간의 우정을 다루는 1-22절과 지혜로운 경제적 활동을 촉구하는 23-27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1,2절은 자랑, 칭찬을 뜻하는 ‘할랄’이란 단어가 나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살아갈 것을 교훈합니다. 사람이란 권력, 재물, 건강, 명예 등을 가졌거나, 형통하면 자랑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한 대목입니다. 자라는 학에게 부탁하여 막대기를 물고 하늘을 나르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때 땅에서 여러 동물들이 칭찬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자, 자라는 학의 경고도 무시한 채 입을 열고 자랑하려는 순간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동일한 속담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갑옷 입은 자가 벗은 자처럼 자랑하지 말라’(왕상20:11) – 비시 8세기 중엽 아합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아람 왕 벤하닷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분노한 벤하닷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당하고 아람 왕 벤하닷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또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그 해에 소출이 풍성하자 심중에 창고를 더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부요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못한 자임이 드러났습니다(예컨데,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부자). 하나님은 그 날 밤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12:16-21). 우리는 스스로 든든히 섰다고 생각할 때조차 진실로 허사이므로, 항상 주님을 경외하며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잠언27:2절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본절 역시 부적절한 자랑에 관한 경고이지만, 그 대상이 ‘미래의 확실성’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입니다. ‘타인’의 원어는 ‘자르’로서 ‘낯선 사람’을 의미하나, 본절의 문맥에서는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실상 이해 관계 없는 타인의 판단은 좀 더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후단은 전단의 취지를 또 한 번 반복하는데, ‘타인’ 대신 ‘외인-outsider’을, ‘입’ 대신 ‘입술’로 대체함으로 문장의 아름다움을 갖추려 하였습니다. 사회에서도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경멸을 받는데, 주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할 바가 아닙니다. ‘칭찬’이란 냄새와 같아서 자신이 하면 악취가 나고 타인이 하면 향기가 나는 묘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독일속담). 한편, 누군가로부터 ‘칭찬=영광’을 받으려 하는 태도는 인간의 본성이며 양면성이 있습니다. 만약, 그 본성이 교만으로 가면 심판을 받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연설하는 중, 백성들이 큰 소리로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창자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행12:23). 그 반면, 건강한 자아상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 안에 자랑(자부심)이 필요합니다. 이때의 ‘자랑’은 ‘겸손’과 결부된 자랑이어야 하고, 그 방법은 어떤 자랑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그 방향을 돌리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고후10:17).“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

잠언27:3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본절에서 ‘돌’이란 나르기 힘든 무거운 바위를, ‘모래’는 해변의 모래를 의미하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움이 함축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사 현장에서 이들의 일부인 모래와 자갈을 지고 힘들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인 고통은 미련한 자가 야기 하는 ‘분노의 짐’ 보다 가볍다는 것이 잠언의 평가입니다. 잠언은 ‘분노의 짐’을 정확히 말하지 않지만, 미련한 자의 불쾌한 행동이나 미숙한 업무처리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미련한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들로서, 이들의 행위 대부분은 범죄를 구성합니다. 연예인 박수홍 씨는 친형 부부가 30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100억원 이상 횡령한 사실에 분노하여 소송 중입니다. 심지어 그의 형수 이씨(200억 대 부동산 보유)는 박씨의 돈으로 상가를 취득하고 자신들과 어머니 이름으로 등기하였으며, 박씨는 16년 후에야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데일리안, 2023/8/16). 박씨의 변호사는 “피해자가 바라는 건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이나 이들은 재판장에게만 반성하고 있다”고 개탄하였습니다. 횡령으로 상대방을 분노하게 하면 세상에서는 횡령죄이지만 성경에서는 살인죄로서(마5:22), 이의 해결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 형과 형수가 잘못을 시인하고, 동생의 재산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마5:23,24). 그러나 이것이 어려우며,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잠17:12).

잠언27:4절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본절에서 질투(투기)는 ‘분’이나 ‘노’보다 다루기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먼저 분과 노가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적어 놓아 경고합니다. 하마스로 인해 분노한 이스라엘에게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사건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분노에 삼켜서 실수 하지 말라고 충고 하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좋은 조언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분노의 힘을 넘어서서, 질투를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뼈가 썩음과 같은 고통 속에 있게 합니다(잠14:30). 또한,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나, 질투는 대부분 숨겨져 있으며, 결과를 볼 때까지 여전히 음흉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그 시발점은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가인에게 이를 경고 하였으나 질투는 그를 삼켜버리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같습니다. 사울 왕이 골리앗과 블레셋의 전투에서 승전해 돌아오자, 마중나온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라고 노래하여 사울 왕을 격분시켰습니다. 이후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여 평생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의 사위이자 군대장관이었지만, 사울이 죽기까지 10년을 광야로 도피하였다가 결국 블레셋에 망명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윗은 사울에게 선행을 베풀어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을의 왕됨을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막지 못하는 질투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4,5). 독생자를 우리에게 아낌 없이 주심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복음의 능력이 여기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