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0/23-27)

마태복음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본절에 감동을 받은 3세기 로마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황금으로 써서 벽에 붙였습니다 (황금률). 그러나 많은 교회가 항상 사랑의 공동체는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원한을 품고, 마음에는 악의와 질투가 자라며,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조차 생각합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란 칼과 총을 들고 당신을 쫓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제거하고, 당신의 평판을 나쁘게 하려 합니다. 실로 당신을 미워하고 삼키고 짓누르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허나, 원수 사랑은 친구에 대한 사랑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친구와는 따뜻한 교류가 넘치지만, 원수에 대한 사랑은 서로 간에 주고 받는 따뜻함은 없습니다. 다만, 원수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주릴 때 먹을 것을 주는 것과 같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유익을 위해 일하는 수준입니다(롬12:20). 그리스도인은 원수의 불의에 대한 심판은 이미 주님 손에 맡겨 놓았습니다. 만약 이런 순종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우리의 소금은 그 짠 맛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고(마5:13), 우리의 빛은 환하게 비추일 것입니다(마5:16). 마귀의 방법은 선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은 선일 경우에만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법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며, 이때 황금률이 내포한 의미를 진정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111-113).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

잠언26:24-25절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23절의 “온유한 입술”이란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가장한 말’이고, ‘악한 마음’은 ‘속임을 품은 마음’임을 설명하고(24절), 이어 ‘매력적으로 보이는 말’은 ‘듣기에 좋은 말’을 의미하나, 원수의 경우 마음은 미움만 가득하니 유의하라(25절)는 교훈입니다. 먼저, 솔로몬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감정과 진의를 숨기면서 잠언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자의 특징을 서술합니다(24). 그들은 표리부동하여 입술로는 멋진 계획과 장래를 말하나, 그들의 속은 맹렬한 증오나 속임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친구,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늑대였다!’ 는 신파극과 같습니다. 25절이 지혜를 말합니다: 순진하게 믿지 말라! 우리에게 돈이 된다는 타인의 말에는 늘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심을 감추고 부정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표식을 잡아내기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범죄가 ‘사기죄’입니다. 그 만큼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범죄가 성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사업이나 투자를 요청하는 경우에, 성공만 아니라, 실패의 경우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투자란 징조입니다. 한편, ‘일곱’이란 완전수이기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란 모든 가증함(왜곡, 속임, 위선, 험당, 탐욕, 음행, 악함, 교만 등)을 의미합니다. 매사에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고,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며 노력한 만큼 받겠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55:21)

잠언26:26절
“미운 생각을 교활하게 감추고 있다 하여도, 그 악의는 회중 앞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새번역)

본절은 사람이 잠시 동안은 본심을 숨길 수 있어도 마침내 드러나고 만다는 교훈입니다. 23-25절은 ‘악한 원수’가 미움과 악을 감추고 있음을 묘사하고, 26-28절은 그들의 파멸을 말하되, 그 중 26절은 그들이 교활하게 감추고 있던 ‘미운 생각’이 드디어 회중 앞에 드러나서 파멸됨을 지적합니다. 설혹, 이 세상에서는 모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도 남김 없이 밝혀질 것입니다(눅12:2;마10:26).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으나, 심판은 우리의 행위를 대상으로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벌거벗은 듯이 드러날 그 날을 생각하면 자연히 경건하게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이지요! 한편, ‘교활’이라고 번역된 ‘맛솨온’은 친절한 언어로 사람을 속이는 자를 지칭합니다(위선자). ‘회중’의 원어 ‘카할’은 일반적인 모임이나, 또는 재판을 위한 모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라면, 조만간 그의 악함이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나고 그 어리석은 자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임을, 후자라면 재판석에서 그의 악함이 밝혀지고 그에 합당한 벌이 내려짐을 말합니다. 본절의 좋은 예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마7:15)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경계해야 됩니다.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맺는 열매, 즉 가르침과 삶의 방식, 그들의 제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6:3).

잠언26:27절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본절은 구약성경 도처에 나오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무릇 타인을 해하려고 덫을 놓은 자들은 자신이 만든 그 덫에 걸릴 것이므로 아예 악한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합니다(시편7:15; 전10:8). 다만, 여기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인과응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돌을 굴리는 자가 도리어 그것에 치인다’는 말은 악인이 의인을 해하려고 큰 돌을 힘껏 밀어 올렸으나, 오히려 그 돌이 뒤로 굴러 악인 자신을 치는 경우입니다. 성경의 예로는 하만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차할 때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모르드개는 물론 유다 민족을 전부 몰살시키고자 하되, 특히 모르드개는 그냥 죽이는 것이 경하다고 생각하여, 높은 장대를 준비하고 거기에 매달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된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시켜 모르드개를 높이게 하고, 이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습니다 (에스더7:10). 세속 역사의 예는 로비에스삐에르입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처형하였으나 마침내 자신도 잡혀 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베푼 선행이 오히려 큰 축복으로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갈6:7), 행한 대로 받으며 (마16:27), 헤아린 그대로 헤아림을 받는 것은(마7:2) 하나님의 법칙으로, 어떤 신학자는 ‘거울의 법칙’ 혹은 ‘부메랑의 법칙’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잠언26:28절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본절의 전단은 상대방을 미워하여 끝까지 해치려는 자를 말하며, 그의 수단은 거짓말입니다. 후단은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고 있는데, 잠언의 제자들은 그런 자들에게 속지말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마7:15-223). ‘아첨하는’의 원어는 ‘할라크’로 ‘매끄러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첨하는 입’이란 진실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여 속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종말은 패망입니다. 그러면 거짓말하고 아첨하는 자와 그 상대방 중 패망하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양쪽 다 해당됩니다. 본문의 목적은 거짓말 하고 아첨하는 자를 경고하며, 또한 어리석게도 그 매끄러운 말에 속아 파멸로 들어서는 자도 경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미 국무부 과장은 미국의 맹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고 사직하면서, “끔찍한 인권 침해가 발생하면 어느 쪽이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민주주의의 체제 역시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만, 다른 정치체제 보다 낫다고 보입니다. 기타의 정치체제와 달리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권력에 대하여 소신 있게 비판할 수 있고, 자신이 행한 그 비판을 책임지는 정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명예훼손, 손해배상 등의 책임).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 역시 하나님을 떠난 세상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당연히 거짓말, 아부 등이 횡행하게 되지만, 다른 편에서는 그런 환경을 통해 주님을 중히 여기는 자를 알게 합니다. 실로 그들은 주님의 자랑거리입니다(욥1: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매일묵상(2023/10/16-20)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 중 ‘그리스도인의 좀 더 넓은 사랑’(11-113)에 관한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의 이 사랑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도 사랑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한 소녀를, 한 소녀가 한 소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또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 있으며, 친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 즉 상호적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상대방에게 잘해 준다. 상대방이 내게 친절을 베풀면, 나도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푼다. 이 상호적 사랑을 근거한 세상의 최고의 가르침은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은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배법칙은 황금률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사랑을 ‘원수와 핍박하는 자’(마5:44)까지 넗히라고 하신 주님의 요구는 바로 여기에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를 미워하는 자는 물론,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사랑은 품위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개나 돼지 같이 거룩한 것과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마7:6), 우리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거짓된 자들(마7:15-20)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잠언26: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본절에서 ‘말쟁이’란 ‘뒤에서 흠 잡고 원망, 불평한다’는 뜻의 ‘라간’의 파생어로, 나쁜 말을 옮기고 다니며 원망과 불평을 조장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는 다툼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불을 끄기 위해 더 이상 나무를 공급하지 않듯이, 말쟁이를 제거해야 다툼이 그칩니다.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은 첩자를 통해 정보를 얻고, 내부를 이간시켜 분열하도록 전략을 펴라고 합니다. 이의 대가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헬라어는 ‘디아볼로- 참소하는 자’로서, ‘사이’를 뜻하는 ‘디아’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의 합성어입니다. 즉 마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생각과 말을 던져 이간시키는 영적존재입니다. 좋은 예가 에덴 동산의 타락 사건이며, 마귀는 하나님을 참소하여 하와를 넘어뜨렸습니다. 성도들의 부르심 중 하나는 이 영적 존재들과의 전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영적 존재가 있음조차 알지 못하여, 마귀의 공격은 성도들과 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전적 방법이 교회 내 ‘말쟁이’를 통해 오해, 시비, 원망, 불평을 조장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다툼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게을러지고 ‘말쟁이’가 될 우려가 있는 60이 안된 과부를 교회의 과부 명부에 올리지 말고, 오히려 결혼하도록 하여 아이를 낳으며 집을 다스리게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딤전5:11-15). 우리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하여,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고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

잠언26:21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본절은 20절과 같은 교훈을 다른 측면에 말합니다. 20절은 타는 불도 태울 나무가 없으면 꺼지듯이 험담하는 사람(말쟁이)이 없어지면 다툼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21절은 이미 타고 있는 불에 숯이나 나무를 더하면 더욱 타오르는 것 같이, 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다툼을 좋아하는 자가 끼어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우려가 있음을 주의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잠언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모임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추방되어야 합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의 범죄적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아가다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커어튼’입니다. 이미 5건의 살인을 부추킨 스티븐 노튼은 토비 러트렐 저택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토비가 부인 데이지의 잔소리와 히스테리에 늘상 시달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부인에 대한 토비의 열등감을 자극하였습니다. 아내에게 화가 난 토비는 술김에 토끼를 노리는 척 하면서 들판에 잠깐 나타났던 데이지를 라이플로 쏘나, 다행히 빗나가 부상만 입힙니다. 토비는 바로 후회하고 두 부부는 손을 잡고 울며 화해합니다. 결국 작가인 크리스티는 탐정 포와르를 통해 살인 교사자 스티븐 노튼을 죽이고 맙니다. 스티븐 노튼과 같은 존재가 마귀입니다. 이 적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화를 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엡5:26,27).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잠언26:22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험담(gossips)을 경계하는 본절은 18:8절과 동일합니다만, 18:8절은 어리석은 자를 다루는 문맥에 놓여 있고, 본절은 다툼에 관한 교훈(26:20-22절)의 결론입니다.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킵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아무런 배려도 없이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추방되어야 할 악인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본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별식 –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피하여야 합니다. 만약 그것에 귀 기울인다면, 그의 인격은 타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26:23절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26:17-28까지 언급되는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 중, 23-28절은 그 절정인 ‘악한 원수’를 다룹니다. 그 중 23-25절은 ‘악한 원수’의 속임을, 26-28절은 그들의 파멸을 말합니다. 남을 속이는 거짓된 말은 결국 이웃에게 해를 입힌다는 의미에서 앞 단락(속임, 험담, 다툼)과 내용이 연결되나, 본절의 초점은 위선자입니다. 솔로몬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말을 저급한 은으로 도금한 토기에 비유합니다. 이 토기는 마치 표면은 은빛 그릇 같은 착각을 갖게 하지만 실제로는 모조품(짝뚱)으로 이를 모르고 사면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매끄러운 말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특히 도덕적 혹은 종교적으로 경건을 가장하면서 속에는 악한 마음을 품는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과 행동을 비교하면, 악한 의도를 알게 됩니다. 한편, “온유한”에 해당하는 ‘똘레킴’은 ‘불타다’ ‘열렬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입술’은 ‘불타는 입술’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의 해석적 다툼이 있으나, 실제로는 악한 마음이 가득 차 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양 온유한 입술로 그 의도를 꾸민다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잡으러 많은 무리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친구인양 붙잡고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는 말과 함께 입맞춤으로 주님을 성전 경찰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본 잠언은 악인들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면 분별력을 갖출 수 았습니다.“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매일묵상(2023/10/9-13)

잠언26:14절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가다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로 덮힌 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그 게으른 자의 ‘열망’은 오직 ‘게으름’ 뿐이기에, 그 밭의 소유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24:30-34). 그런 게으른 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있는 곳은 침상입니다! 문짝은 벽이나 기둥에 고정되어 돌쩌귀(경첩)를 따라 계속 회전하지만 절대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게으른 자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구르는 모습이 마치 이와 같아 보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문짝은 돌쩌귀를 따라서 회전하여 바람과 소리를 막아주는 등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주지만, 게으른 자는 움직일 수 있지만 땀흘리기 싫어하여 아무데도 가지 않으며,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개선이나 진보도 없습니다. 그들의 밭은 잡풀과 가시덤불로 뒤덮혀 있고, 그들의 포도원의 돌담은 무너져, 동물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고, 그들의 옷은 헤어져 있으나 꿰매지도 않아 너덜거립니다. 곳간에는 전혀 양식이 없어 가족은 굶주리고, 겨울을 보낼 땔감을 준비하지 못하여 추위에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아무런 수단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하러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지혜가 없는 자로서, 이를 보는 이웃은 그들을 게으른 자, 바보들이라 비웃고 그들의 장래는 절망입니다. 실상 이들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이고 악한 자들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이들을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심판을 내리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실 것입니다(마25:30).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언21:25).

잠언26: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 구절은 게으른 자에 대한 세 번째 묘사로서, 잠언 19:24절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와 같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는 어떤 형태의 일도 싫어하며 심지어 음식을 들어 올린다는 생각에도 지쳐서 괴로워 한다고 또 한 번 비웃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로워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음식을 입으로 들어 올려 먹는 것 같은 아주 간단한 일조차 힘들어 하기 때문에, 배고품도 일할 동기가 되지 못합니다. 이는 기회가 있음에도 그들은 게을러서 굶을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잠언13: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역시 본 잠언과 유사한 교훈을 말합니다. 실로, 게으른 자는 게을러서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브리지가 한 적용입니다: “희생 없는 믿음, 근면 없는 믿음은 결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할 것이다!” 타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온갖 구실을 대고 이웃을 섬기는 귀찮은 일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개미는 어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아 추운 겨울을 대비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그 미물의 지혜를 내면화 해야 합니다(잠6:6-8).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6:10-11)

잠언26:16절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본 구절은 네 번째 ‘게으른 자의 거울’을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게으른 자는 ‘게으르면서도 자신을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생존하는 자들이나 그들도 그렇게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다룬 12 개 구절(1-12)에서 그 극치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자임과 같이(12), 게으른 자도 자신의 이유를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지혜의 결정체로 여기기 때문에 게으르고 교만한 자야말로 구제 불가능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 게으른 삶을 반성하지 못하고 개선가능성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지혜롭게 여기고 있는 그 게으른 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침상입니다! 그는 침상에서 문짝처럼 돌고 있습니다. 그는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조차 두려워하므로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4). 지금까지 살핀 어리석은 자들(26:1-11), 즉 미련한 짓을 거듭하는 미련한 자라 할지라도 매질(26:3)이나 계속된 바른 대답(26:5)을 통해 그 어리석음에서 구원받을 희망이 보이지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16)나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12)는 구원의 희망조차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편,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이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신구약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본절의 ‘게으르나 교만한 자’의 삶은 파국으로 결말지어질 것이며, 이는 영원한 심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너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나, 그런 사람보다는 오히려 미련한 사람에게 더 희망이 있다.”(잠언26:12,새번역)

잠언26:17절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26:17-28까지 12구절은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나 그 강도는 점점  올라갑니다. 즉, 히스기야는 ‘남의 일에 참견하여 스스로를 해치는 자’(17), ‘이웃을 해하는 자’(18-19), ‘비방하는 자’(20-22)로 단계를 높여가다가 ‘악한 원수’ (23-28)에서 그 절정에 이르도록 편집하였습니다. 단락의 시작인 본절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개의 귀를 잡는 것에 비유합니다. ‘길로 지나가다’란 아무 상관도 없음을 강조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도미한 안창호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길을 가다가 인삼장사를 하는 두 동포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자 그들을 뜯어 말린 것은 민족의 관점에서 너무나도 자신과 상관이 있는 일입니다. 후단에 나타난 ‘개’는 광야를 떠도는 사나운 들개로 해석됩니다. 팔레스틴에는 사나운 들개가 많아(왕하9:30-37), 들판을 헤매는 하얀 들개 무리는 공포의 대상일 정도입니다. 이 들개들은 제멋대로 자라나서 사납기 짝이 없고 무리를 지어 다니기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기 충분합니다. 그런 개가 옆으로 오는 것만 해도 위험한 일인데, 그 개의 귀를 잡는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한 짓입니다. 최근에 하마스의 반인륜적인 공격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관하여 큰 이해관계가 없는 한국 중국 등은 전쟁은 좋지 않은 것임을 강조하는 선에서 논평하고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하물며 잠언의 제자들인 우리는 불필요한 분쟁에 끼어들어 시간을 낭비하고 어려움을 겪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골4:5,공동번역)

잠언26:18-19절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18-19절은 이웃을 속이고 그것이 농담이었다는 비행을 경계합니다. 18절의 ‘미친 사람’은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횃불’이란 막대기나 화살에 기름먹인 천을 감아 불을 붙인 것으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무기입니다. 미친 자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그대로 놓아 두었다가는 그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큰 혼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다’고 하는 자도 이 미친 자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속이다’는 사소한 거짓말이 아니라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중대한 거짓말이며, 외삼촌 라반이 약속된 라헬 대신 레아를 신부를 주어 야곱을 속였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29:25). 야곱은 원치 않는 레아를 얻게 되었고 외삼촌의 속임은 야곱 인생의 불행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희롱한다’는 말은 장난삼아 농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는 농담과 잔인함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본 잠언이 장난끼 있는 악인을 무기를 갖고 미쳐날뛰는 광인에 비교한 것은 압권입니다. 둘 다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으며 둘 다 사회에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친 사람은 제 정신이 나가 악한 음모를 꾸밀 수 없는 반면, 장난스러운 악인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의 문제점은 이웃의 불행을 쾌락의 근거로 삼는 점이고, 그 본질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웃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

매일묵상(2023/10/4-6)

잠언26: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본절은 개의 더러운 행동을 들어 미련한 자의 특성을 밝힙니다. ‘개’는 히브리인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으로, 아무 것이나 먹고 매우 사나우며 더러웠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만, 그 후 주어지는 비판을 무시하면 실수가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바른 말과 교정을 싫어하기에,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를 관찰하고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를 떠올렸습니다. 개가 토하는 이유는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아서이나, 개는 그것을 잊어 버리고 또 먹습니다. 어리석은 자 역시 저지른 죄를 혐오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일한 죄악을 거듭함으로써 심판을 자초합니다. 본 잠언은 신약에 인용되어(벧후2:22)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그 거짓 교사들은 “올바른 삶의 길; 의의 도”(벧후2:21)를 알지만 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진리에 반하는 이전 생활 방식으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개 이외에 돼지를 언급하는데, 돼지는 더러운 구덩이에서 나오면  그곳을 멀리하는 양과 달리 도로 그 구덩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본절이 적용된 성경의 대표적 예는 가룟 유다로서, 그는 맡은 헌금궤에서 돈을 훔치곤 하였습니다. 이를 유심히 본 마귀는 탐욕으로 가룟 유다를 사로잡아 예수님을 파는 도구로 사용하였음은 우리에게 큰 경고를 줍니다.“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단12:10)

잠언26: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본절(12절)은 “미련한 자들을 위한 거울”(1-12절)과 “게으른 자들을 위한 거울”(13-16절) 사이에서 야누스 역할을 합니다. 한편은 ‘미련한 자’라는 주제어를 반복하지만, 또 한편은 1-11절까지 미련한 자의 비유로 눈, 비, 동물, 물매, 가시나무, 나귀, 개 등 창조질서의 소재를 뽑아 사용해 온 흐름을 떠나, 16절처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란 구조를 도입하여 미련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비교의 기준으로 내세운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가 최고의 바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사용된 비교의 방법은 미련한 자를 밝히는 동시에 그들의 어리석음에서 구원할 방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매가 합당하다는 교훈은 동시에 미련을 탈피할 방법을 알려 주며(3),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기 전에” 반박하라는 훈계는 지혜의 문을 열어줍니다(5). 비록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지만(11), 이같은 시의 적절한 신체적, 언어적 교정을 통하여 구해줄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바보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만에 빠지지 않은 어리석은 자(1-11)보다 자만에 빠진 게으른 자(16)는 더 나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므로” 자신의 교정 가능성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의 전형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세상 지식인, 부자, 권력자들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3:18).

잠언26:13절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26:13-16절은 게으른 자들의 말도 안 되는 변명(13), 경직성(14), 나태함(15), 엄청난 자기기만(16)을 각 묘사합니다. 본절(잠언22:13과 같은 내용임)은 게으른 자의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들은 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게으른 자는 일하기 싫어는 자입니다만, 현실은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일하지 않을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합니다. 이때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자’라는 ‘놀라운 핑계’가 떠올랐습니다. 사자는 무서운 동물이지요! 그리고 그 당시 삼림에는 많은 사자가 있어 밭이나 들에서는 종종 만나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에 야생의 사자가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거리’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환상 속의 사자’이기에, ‘게으른 자’의 말에는 거짓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밭에 나가 사자를 만나는 것이 싫으면, 장사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집을 세워야만 합니다(창3:17-19). 사람의 모든 수고에는 실패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나, 위험이 클수록 보답도 큰 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핑계를 대고 일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수고에 의지해 살아가야만 합니다. 당연히 그는 사자뿐만 아니라 전쟁, 전염병, 질병 등 일하지 않을 ‘환상적인 구실’을 계속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가 인도하는 인생(독신)이나 공동체(지도자) 그리고 가정(결혼)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우리들은 게으름이외에도, 불신앙과 두려움 때문에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오직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눈으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