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9/25-27)

잠언26:8절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8절은 사리 분별 못하는 미련한 자에게 영예(높은 지위)를 부여할 때 나타날 위험성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먼저 ‘물매’란 돌을 던지기 위한 기구로서, 물매에 돌을 묶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돌을 올려놓고 빙빙 돌리다가 날려 상대를 맞추는 투석기의 일종입니다. 따라서, 물매에 돌을 맨다는 것은 물매 사용법을 전혀 모르는 자의 행동입니다. 싸움 전에 이미 그 결과는 명약관화합니다. 물매에 맨 돌은 아무리 돌려도 날라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를 믿고 맹수나 적을 맞상대하러 나간다면 재앙 그 자체입니다. 미련한 자가 중요하고 높은 자리를 맡을 때도 같습니다. “한나라의 경제를 바보한테 맡기면 그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 작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영국 채권시장 폭락사태를 보며 한 말입니다. 2022년 9월 리즈 트러스는 영국 총리에 취임하고 450억 파운드(약72조원)의 감세안을 발표하자, 영국 국채시장에서는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72조원의 감세공백 보전을 위해 국채 발행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운드화는 폭락하고 국채금리는 치솟는 등 영국의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습니다. 결국 감세안은 철회되었고 트러스 총리는 불과 44일만에 물러났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도 엄청난 세수부족(59조원)에 직면하고 있고 정부는 ‘외국환평형기금’과 ‘세계잉여금’ 에서 그 부족분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많은 비평이 뒤따르고 있기에, 현 경제팀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6:9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잠언’이란 타인을 지도하기 위한 교훈을 의미합니다. 7절은 미련한 자의 잠언(교훈)의 무익성을, 9절은 그 해악성을 언급합니다. 지혜 없는 자는 잠언을 배울 수 있으나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적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교훈은 부적절하며, 만약 그가 도덕적 바보(사악한 자)이면 의도적인 조언으로 해를 끼칩니다. 본잠언은 후자에 무게를 두어 그들의 잠언을 ‘가시나무’에 비유합니다. 가시나무는 위험합니다. 더구나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는 더더욱 위험한데,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모습은 분별력 없는 자가 상황과 처지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교훈을 주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주의해야 합니다. 제자 이용준(서예가)이 소장한 훈민정음(해례본)을 전형필에게 소개한 김태준(1905-1949)은 한국문학사를 정립한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이현상의 소개로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가 2년간(1941-43) 옥고를 치뤘고, 그 사이 노모, 아내, 아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된 남로당 활동으로 잡혀 1949년 사형 당하였습니다. 한편 김태준의 제자 이용준은 골수 사회주의자가 되었는데, 이용준은 남로당 사건 후 북으로 도주하여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두 분은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김태준은 이현상이라는 사회주의자의 인도 때문에, 이용준은 스승인 김태준의 지도로 인해 결국 큰 해를 당하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잘못된 교훈(사상)은 그 만큼 해악이 크므로 주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잠언26:10절
“미련한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궁수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쏘아대는 것과 같다.(새번역)

개정개역의 번역은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이나, 여타 한글번역은 모두 ‘궁수가 …쏘아대는 것 같다’라는 취지를 따르고 있습니다. 원문은 불확실하여, ‘장인’의 원어는 ‘활 쏘는 자(궁수)’로, ‘만들다’의 원어는 ‘상처 입다, 근심하다’ 등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본잠언은 미련한 자를 고용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라는 교훈이기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쏘아대는 궁수의 무책임한 짓에 비유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물건을 만들 때 ‘숙련된 기술자’(장인)가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관심도 없고 기술도 없는 문외한(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면, 불량품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일과 고객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그와 같기에 잠언은 이 둘을 병렬하여 놓았습니다. 사람을 쓸 때는 신중해야만 합니다. 적절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차라리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고 최태섭 회장의 젊은 시절. 만주에서 비누 공장을 설립할 때입니다. 소개로 온 비누기술자 (조선동포)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 고용하였다가 불량품만 나와 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동포는 미련한 사람은 아니어서 함께 연구하여 좋은 비누를 만들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이 잠언은 교회에서 직분을 세울 때도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감독 직분을 위해 15개, 집사 직분을 위해 13개 조건을  열거하고, 합당하지 않으면 감독과 집사로 세우지 않도록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딤전3:1-12).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

매일묵상(2023/9/18-22)

잠언26:3절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본절은 1, 2절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 2절이 앞부분에서 명백한 비유(여름의 눈, 추수시 비/ 참새와 제비의 날아감)를 주고 뒷부분에서 교훈을 주듯이,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또 주제면에서는 3-5절이 같은데, 도덕적 바보에게 어떻게 말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가르칩니다. 3절은 어떤 말도 효과가 없어 매질만이 이해받는 유일한 언어임을, 4, 5절은 대답하지 않을 때와 대답할 때를 분별하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에서 말과 나귀는 인간의 언어를 모르기에, 주인의 뜻을 이해시키려면, 말에게는 채찍을, 나귀에게는 재갈이 필수적입니다. 솔로몬은 바른 말을 듣기 거부하는 미련한 자를 이들 짐승에 비유하면서, 막대기로 표상되는 물리적 힘만이 깨우칠 수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물리적 수단을 통해 짐승들은 주인의 뜻을 행하나, 바보들은 깨우치지 못하고 결국 지혜와 선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교만, 탐욕, 비방,악한행동,게으름)으로 마음과 삶의 행동양식이 돌이킬 수 없이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잠언의 관찰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전해받지 못한 사람들은 듣고 믿는 것이 중요하나, 이미 복음을 들어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우리는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아삽은 시편 73편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이 가득한 자신을 ‘주님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만약 징계가 없다면 고침받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징계는 필수적입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잠17:10).

잠언26:4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대화를 나누는 본인도 그처럼 미련한 자가 되지 않게 하고, 더 나아가 미련한 자의 교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2절의 문맥을 통해 읽으면 지혜자의 대답 자체가 도덕적 바보에게 합당하지 않은 영예를 주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것’이란 악의적인 말, 무식함, 불경건한 삶의 자세, 예의 없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대화와 교제를 통해서 영향을 주고받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와 교제를 갖게 되면 미련한 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마음가짐, 태도, 삶의 방식과 언어 등 모든 방면에서 미련한 자를 닳아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일단 상대방을 인격적인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에, 본 잠언은 미련한 자와의 교제 자체를 금지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약 2300년 전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3번이나 이사를 갔다는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는 이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교육열에 있어 대한민국의 어머니보다 더 뛰어난 민족은 많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의 교육에서는 반드시 신앙적 요소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먼저 규칙적인 예배 참석 등 부모의 믿음의 본이 중요하고, 이어 아이의 친구들의 신앙적 면모도 살펴서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기도하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육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 하라는 지혜의 정수를 갖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잠언17:12)

잠언26:5절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5절은 4절과 배치되는 말씀이나,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구절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줌으로, 잠언의 제자를 보호하며 미련한 자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는 언행을 논어에서는 시중(時中)이라 하고 그 이상을 공자로 봅니다. 진정한 중용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상황 속에서 적절함을 추구합니다. 공자는 ‘집기양단(執其兩端)’- 양쪽 끝을 잡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음-을 그 방법으로, 순임금을 그 모델로 제시합니다(중용). 지금 솔로몬은 4,5절에서 그 비책을 말합니다. 4절은 미련한 자가 이성 대신 감정을 앞세워, 분노, 조롱, 욕설이나 저주 등을 퍼불 때 적용됩니다. 이 경우에는 온유하게 인내하거나, 잠잠히 그 자리를 떠나야 하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비둘기 같이 순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5절은 미련한 자가 논리를 갖고 공격할 때입니다. 이 경우에 침묵한다면 동의를 의미하기에, 신자들은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련한 자들의 논리 속에는 항상 궤변과 함정이 숨어 있어, 함정을 피하고 상대 논리의 모순을 논파하여 참된 진리를 들어냄으로써, 어리석은 자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각 상황에 맞는 중용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풍성히 주실 것입니다(약1:5). 다만, 믿음의 문제로 박해 당할 경우에는 염려 없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눅12:11,12).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26:6절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26:6-10절은 교차대구의 구조로서, 그 중심에 8절을 놓아,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사자, 지배인, 선생의 지위 등)를 주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아래는 그 구조입니다.

  A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경우(6)
    B      미련한 자의 잠언(7)
      C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8)
    B′      미련한 자의 잠언(9)
  A′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경우(10).

6절은 통신수단을 은유한 ‘발’이 언급됩니다. 전화나 이메일을 사용하는 현대와 달리, 고대에는 인편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었기에, 소식 특히 중요한 소식을 위해서는 신뢰받는 사람을 보내야 하였습니다. 만약 미련한 자가 그 책임을 맡는다면, 그 해악은 치명적입니다. 이는 마치 자신의 두 발(복수형)을 베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임무의 경우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권한과 함께 파견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복음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이루신 아름다운 화해와 축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 복음의 전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에 주님은 약속과 심판 두 가지를 남기셨습니다. 즉,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면 모두 응답주시겠다(마7:7-11; 요일5:14,15)는 약속과, 만약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마7:19).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잠언26:7절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본문은 저는 자의 다리가 몸무게를 결코 지탱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미련한 자의 잠언 역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함을 교훈합니다. 첫째, 그들의 말은 시의적절하지 않습니다. 모든 충고나 잠언은 상황, 사람, 시기 이 세 가지가 모두 고려되어야 효과적이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직 잠언만 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잠언26:4절은 ‘미련한 자를 만날 경우 잠잠하라’, 5절은 ‘미련한 자의 말을 효과적으로 반박하라’는 상반된 교훈이기에,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바보의 유형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잠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은 도덕적으로 너무 둔감하여 언행의 불일치가 드러나는 자들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가르치지만 자신은 도둑질을 하고, 우상은 가증한 것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신사의 물건이 탐나서 훔친다면 누가 그 사람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듣겠습니까?(참조 롬2:21-22). 이같이 인격에 결함이 있는 자들이 훌륭한 잠언을 말한들, 자신의 얼굴에 침뱉기이며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한편, 가장 미련한 자는 종교적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마23:24)로서, 이들의 교훈을 실행하면 도움은커녕 오히려 심판당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전형적인 위선자들입니다(마7:21). 그렇다고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면, 무섭게 화를 내며 대들 것이기에, 잠잠히 그 자리를 떠나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4절).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잠언10:14)

매일묵상(2013/9/11-15)

잠언25:26절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 고된 여행길을 마치고 마침내 나홀성에 도착하여 우물가로 갔는데, 만약 그 우물이 흙탕물로 더러워졌다면 그의 실망감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물과 샘은 가나안 지역의 생명줄입니다. 이같이 의인은 그 공동체의 생명샘이며, 그 사회로 하여금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이요 어두움을 밝히는 빛입니다. 요사이 샌프란시스코는 범죄자로 들끓어 홀푸드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속속 그 도시를 떠나고 있다 합니다. 이같이 의인이 없는 도시나 국가는 버림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의인이 악인의 유혹이나 협박에 의해 굴복한다면 생명샘은 더러워지고 그 사회는 부패하여 온통 어두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그런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목적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모세율법을 받음으로 제사장 국가로 부름을 받았으나, 이방국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유혹과 압력에 굴복하여 우상숭배가 만연하였고, 결국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길 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마5:13). 그 반면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청년 4 명은 그 이방 땅에서도 모세율법을 지키고,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 주님은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두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7).

잠언25:27절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을 다루는 16-27절은 ‘봉투구조’라는 수사법을 사용합니다.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권면의 핵심은 절제입니다. 꿀은 완전식품으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합니다(16). 영예도 같습니다. 잠언은 “많은 재물 보다 명예를 택하라”(22:1)고 하여 명예를 갖도록 권면합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바울은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명예롭게 여겨 이를 얻으려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칭찬하는데, 경건과 선한 일을 사모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3:1이하).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면 믿음에 큰 담력을 얻고, 자녀의 본이 되어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세상의 명예나 부 등에 신경을 쏟으면서 이런 귀한 믿음을 등한히 여기면 마지막 날은 물론, 인생 후반부에 후회하게 됩니다.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격과 능력에 합당한 영예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됨은, 꿀을 많이 먹어 토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16).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영조 때 수장가 상고당 김광수(1699-1770)는 모든 재산을 기울여 수 많은 서화, 골동품을 모았으나, 말년에 생활이 어려워지자 “평생 눈에 갖다바쳤던 것을 이제는 입에다 갖다바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며 팔았다고 합니다. 절제는 주님을 두려워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본절은 하나님과 왕이라는 우주의 통치질서 내에서(25:2) 지혜롭게 살게 하는 적절한 결론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언25:2)

잠언25: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25:28-26:28절은 7가지 유형의 ‘도덕적 바보들’을 보여줍니다: 무절제한 사람(25:28), 어리석은 자(26:1-12), 게으른 자(13-16),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17), 불선한 자(18-19), 비방하는 자(20-22), 그리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23-28). 솔로몬은 ‘봉투구조 Inclusio’(시작25:28-무너짐, 결론 26:28-패망)를 사용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의 파멸을 강조합니다. 신약에 이르면, 그것은 죽은 뒤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에 처함을 의미합니다(요5:29). 오늘 본문은 절제력을 갖지 못한 사람을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에 비유합니다. 고대 성읍의 큰 특징은 도시를 두른 성벽입니다. 만약 성벽이 허물어져 있다면, 그 도시는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되고, 적은 물론 짐승의 위협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정욕, 교만, 그리고 악한 마음이 그를 지배하여, 죄를 짓게 되며, 그 행위의 사회적 유해성이 크면 사회는 벌을 내릴 것입니다. 또한 무절제한 자는 악한 자(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더 큰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주님을 경외는 마음과 그분의 지혜(가르침)를 재료로 하여 성령님에 의해 생산됩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노력하여 끊는 방법도 있으나, 기도응답의 결과 담배를 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하시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 신자의 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26:1절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본절은 ‘미련한 자’가 지위와 명예를 탐하는 것을 ‘여름의 눈’과 ‘추수 때의 비’에 비견하면서 경계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수확기는 비가 내리지 않는 때입니다. 그런데 여름에 눈이 내리거나 추수 때 비가 내린다면 농작물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같이 영예를 가진 미련한 자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칠 우려가 있습니다. 통상 높은 지위나 명예를 얻었다면, 그에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어야 조직과 사회 공동체에 유익합니다. 만약,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지 못한 미련한 자가 지위를 얻는다면,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닥치는 폐해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잠언과 시편에서 ‘미련한 자’ ‘바보’ 혹은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할 때 그 원어는 ‘케씰’이며, 대개의 문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악을 행하는 자를 지칭합니다(시14:1).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등을 생각하면 본절이 얼마나 예리하게 그 모순과 재앙적 수준을 표현하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유럽은 전쟁이란 날벼락을 맞았고, 유대인들은 6백만명이나 처형되었습니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책을 펼쳐서 1억 명 이상을 굶어죽게 만들었습니다. 김일성 때문에 한반도는 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엄청난 폐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

잠언26:2절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까닭 없는 저주”란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있었던 말의 효력을 믿는 관습과 두려움이 그 배경입니다. 솔로몬은 분명히 말합니다: 근거 없는 저주의 말은 ‘참새가 떠돌고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저주의 내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새나 제비 같은 새는 단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 뿐 분명한 목표나 지향점이 없습니다.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 역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어떤 해악도 미치지 못하고 그냥 공중에 흩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근거가 있는 저주(악인에 대한 백성의 저주 등)는 두려워 하도록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든지 일어나 이 성을 재건하면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고 맹세시켰습니다(수6:26). 550년 뒤 아합 왕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의 기초를 놓을 때 장자를, 성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을 각각 잃어 여호수아의 말이 응하였습니다(왕상16:34). 주님의 경고를 무시한 히엘의 행동에 대한 심판은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같이 심판을 실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아무의 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저주를 받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창12:1-3).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후손들에게 미치므로, 우리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된 우리는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눅6:28).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매일묵상(2023/9/4-8)

잠언25:22절(1)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22절은 21절의 이유나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는데, “그리 하는 것은”이라는 번역은 결과의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즉, 원수 갚는 대신 선행을 하면, 그 결과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것과 같고, 주님의 상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4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1)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시켜, 지혜자가 선행을 베풀지만 결국 악인은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된다. (2) 선대를 받고 회개한 악인의 행태를 말한다. 고대 애굽에서는 회개한 자가 숯불을 담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고통을 느끼며 회개하였음을 알렸습니다. (3) 악인의 고통과 관련시켜 관대한 조치를 받을 때 더 크게 느끼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4)고대 애굽에서 불씨를 빌려오는 풍습과 관련하여, 불씨가 꺼진 집에 잘 핀 숯불을 빌려주는 것과 같은 대단한 호의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가르치려는 예의 하나로 제시된 것입니다. 한편, 후반절은 원수에 대한 선행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상으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상을 주시는 주체의 이름을 하나님 대신 ‘여호와/야훼’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또 ‘상을 주시리라’는 ‘갚다’의 미완료형 ‘예솰렘’으로 신실하신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상을 주고 계심을 각각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선행의 동기는 원수 사랑과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으로써, 대인관계의 궁극적 초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일은 이와 관련한 두 명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잠언25:22절(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본 잠언과 관련한 성경 이야기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17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고, 이어 주인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기약 없이 감옥에 갇히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여전히 신실하였습니다. 총리로 발탁된 후에도, 요셉은 보디발과 그 아내에게 보복하지 않았고, 양식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온 형제67, 들을 미워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요셉이 행한 용서는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형제들은 비로서 무서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납니다. 또 한 명은 다윗입니다. 엔게디의 한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자신을 치러온 사울이 들어왔습니다. 원수를 네 손에 붙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신탁과, 부하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몰래 베고 살려줍니다. 사울은 울면서 “너는 나보다 의롭다”는 고백을 하지만, 여전히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후에 사울과 그 군대가 다윗을 치려고 하길라 산에 진치고 깊은 잠이 들었을 때,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내려와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갖고 그냥 돌아갑니다. 잠이 깨자 사울은 다시 다윗에게 복을 빌고 철군하나,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은 여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습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신실하고, 다윗처럼 지혜로워야 하지만, 이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보상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요셉과 다윗 이야기는 모두 복음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잠언25:23절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팔레스틴은 지중해로 인해 서풍이 불면 비가 내리고(눅12:54), 북풍은 오히려 하늘을 맑게 합니다. 만약 북풍이 불 때 비가 내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기치 못한 현상으로 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참소하는 혀(말)’는 피해자에게 숨겨져서 예기치 못한 타격을 입히기에, 피해자가 그것을 들었다면 당연히 분노하여 보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풍이 비를 숨겼어도 마침내 쏟아져 내려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처럼, 중상모략하는 행위도 만인에게 드러날 것이므로, 자신의 참소의 은밀성을 믿는 자는 바보입니다. 이렇게 나쁜 참소의 영적 아비는 마귀(디아볼로-참소하다)입니다(계20:10).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와 하나님을 비방하고 범죄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창3:1-7). 이들이 유혹에 넘어가자, 인류 위에는 모든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우리 주님은, 타협하자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마4:1-11), 대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셔서, 인류와 하나님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인한 구속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마귀의 권세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손으로 작성한 법조문으로 된 빚문서(범죄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무효화시키고, 십자가에 못박아 완전히 찢어 제해버리셨기 때문입니다(골2:14-15). 할렐루야!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용서와 화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어, 마음에 간직한다면, 우리 마음은 늘 감사와 평화로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6)

잠언25:24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는 아내에 관해 교훈하는 본잠언은 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의 반복입니다. 다만 각 잠언이 놓여진 문맥과 강조점이 다릅니다. 21:3-29절은 악한 마음과 행위가 사회적 관계를 깨뜨리니 경계하라는 교훈을 주며, 21:9절은 그 한 예로 부부 사이를 말합니다. 25: 16-27절은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 소재로 다루며, 본절은 그 한 예로 예기치 못한 결혼생활의 갈등을 말합니다. 북풍으로 내리는 비나, 교활한 혀에서 나오는 말(25:23) 같이, 적의가 담긴 아내의 언어는 혼인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북풍과 움막은 비유적 연결이 있습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잠언은 “아내에게서 보호받지 못한 채 큰 집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비를 피할 수 없는 지붕의 ‘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함으로 슬기로운 아내를 얻으라는 권고를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잠언25:25절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고(구)려는 예전에 당태종도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구나.”(<고려사절요>). 1259년 고려 고종이 세자를 쿠빌라이(훗날 원 세조·재위 1260~1294)에게 보내 항복의 뜻을 전하자, 먼 고려 땅에서 온 좋은 기별을 들은 쿠빌라이는 몹씨 기뻐하며 한 말입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하였겠습니까?  당시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와 대칸을 놓고 경쟁 중이었으며, 정통성에서 약간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간 몽골에 저항하던 고려가 쿠빌라이를 택하여 항복했다는 것은 고려는 쿠빌라이 쪽이 이길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고려 사절단을 매우 환영하며 대접하는 중에 고종이 죽자 세자를 왕으로 삼아(원종) 고려로 되돌려 보내면서, 고려의 제도와 풍습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이 소위 세조구제(世祖舊制)이며, 고려가 원의 직할통치를 받지 않게 하는 장치로 역할하게 합니다. 그 만큼 고려의 외교력과 판단력은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쿠빌라이에게 전달된 고려 항복 소식은, 죄인들인 우리에게 전달된 사면과 화해의 편지인 복음의 한 모형입니다. 복음이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반역과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시켜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으로 열두 제자 등 복음의 증인들에 의해 전달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좋은 소식이 어디 있으며, 이 보다 더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기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의 소식은 얼음을 띠운 냉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매일말씀(2023/08/28-9/1)

잠언25:18절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열왕기하21장은 왕비 이세벨의 지시를 받아 성읍 장로들은 거짓 증언자들을 고용하여 나봇을 처형하고 그 포도원을 빼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집안의 멸망을 선포하셨고, 아합이 죽은 뒤 심판을 집행하였습니다. 18-20절은 이웃에 대한 3가지 악의 유형이 등장하고, ‘거짓증거’는 그 첫 번째입니다. 배경은 법정이며, 사건의 증인으로 잠언의 제자가 섰을 때, 만약 그가 위증을 한다면, 피고는 엄청난 재판상 불이익을 얻게 되고 심지어 사형을 당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유로 제시된 3 가지 전쟁무기는 용사들의 필수적 무기로서 전쟁터에서 용사의 부하가 휴대하면서 골프장의 캐디와 같이, 전투의 각 단계 마다 적합한 무기를 제공합니다. ‘방망이= 해머’는 가장 근접전을 위해, ‘칼’은 약간 떨어진 근접전을 위해, 그리고 ‘화살’은 먼 거리의 적을 공격할 때 사용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오펜하이머 청문회’(1954)가 나옵니다. 에드워드 텔러(수소폭탄 아버지)가 증인으로 나와 그의 사상적 전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증언을 하여 큰 타격을 줍니다. 후에 텔러는 페르미 상을 받고(1962년), 이어 오펜하이머를 수상자로 추천하면서(1963년) 화해의 제스처를 보냅니다. 만찬석상에서 둘은 화해의 악수를 하나, 그의 부인은 악수를 거절하는데,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복을 자제하고 주님 손에 맡기면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마지막날 주님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39)

잠언25:19절
“환난을 당할 때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믿는 것은, 마치 썩은 이와 뼈가 부러진 다리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새번역)

18절은 적극적인 위증자를 다루었다면, 19절은 평소에는 친구이나 위기 시에는 진실하지 못하여 파괴적인 타격을 입히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갖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본절에서 ‘썩은 이’와 ‘부러진 다리’가 진실하지 못한 사람의 생생한 비유로 등장합니다. ‘이’와 ‘다리’는 먹을 때와 걸을 때 꼭 필요하지만, 썩었거나 부러졌다면 도움은커녕 고통만 줄 뿐입니다. 환난이 덮칠 때 진실하지 못한 친구는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우리와 교제하는 친구나 지인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따질수록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은 분별력을 뛰어넘어,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제자들 모두 주님이 걸어가고 계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몰라 결정적인 순간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부활하시자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찾아가셔서 사도로 다시 부르시고 파송하셨습니다(요21장). 바울의 마지막은 아시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었고, 그 중 특히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언급됩니다. 아마 열심으로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 같습니다(딤후1:15).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릅니다 (딤후4:16,17). 잠언의 이상이 여기에 있으며, 주님이 먼저 성취하셨고, 이어 사도들이 갔으며, 지금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25:21).

잠언25:20절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새번역)

잠언은 치명적인 거짓말쟁이(18)와 침묵의 배반자(19)로부터 상황판단을 못하고 부적절하게 말하는 자(20)로 대상을 옮겨 교훈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엘가나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는 자식들은 가졌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브닌나는 질투하였고 드디어 실로의 매년 제사 때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이를 보고 엘가나는 “내가 그대에게 열 명의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위로하였으나, 한나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런 한나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면 더욱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솔로몬은 두 가지 비유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 같다”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배경에는 과부의 옷을 전당잡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율법이 있습니다(신24:17). 의도 여부에 불구하고 그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금지된 행위입니다. 두번째 비유는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입니다. 부드러운 기름으로 고통을 완화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초를 부어 더 아프게 하는 모습이야말로 미련의 극치이지만, 위로에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주님에게는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경건한 한나는 그 괴로움을 주님 앞에 토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고, 한나는 서원한대로 젖을 떼자 수소 세 마리를 데리고 실로의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와 주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의 행위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잠언25:21절(1)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21-22절은 16-22절에 언급된 인간관계의 갈등을 풀어주는 잠언의 해법으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의 한 적용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롬12:7-21에서 본구절을 인용하나,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이미 교회 내에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잠언은 “보복을 버리고 주님 손에 맡기라”(20:22),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라”(24:17-18), “노하기를 천천히 하고 허물을 용서하라”(19:11) 등, 이 교훈을 가르친 바 있습니다. 21-22절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곤경에 빠진 원수를 동정하여 먹이라”고 명령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 (레19:18)는 계명의 범주에 원수를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개인 차원의 선행이란 의미를 넘어,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익의 침해가 있을 때, 사적인 강제나 보복은 마땅히 공동체에서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모세율법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이 종료될 때까지 무시되어, 사사시대에는 개인의 소견대로, 왕정시대에는 왕의 자의적 통치만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었고 모세율법의 언약대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바벨론 포수에서 돌아온 이래 모세율법이 중시되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자리에 모세율법이 들어섬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끔직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모세율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지지 않아 헌법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은 본절의 구체적 내용을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5:21절(2)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보복의 본능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어, 모세율법에도 친족구속자(고엘)제도를 두었으며 친족구속자의 책무 중 하나가 ‘피의 보복’입니다. 그러나 고대 부족 사회에서는 보복이 극단적으로 확대되는 경향 때문에, 모세율법에는 ‘도피성’(수20장)제도나, ‘눈은 눈으로’라는 동해보복의 원리(출21:23-24)를 규정하여 과도한 보복을 제한시켰습니다. 본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원수가 곤경에 있을 때 해악 대신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행동은 실질적으로 보복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음으로 화가 잔뜩 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 잠언을 인용한 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박해 받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합니다. D. 제레마이어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햄버거를 사러 갔을 때 뒤에서 기다리는 차를 못보고 껴들게 되었습니다. 뒷차의 운전자는 화가 나서 여러 번 크락션을 울려댔으나, 목사님은 오히려 그녀의 햄버거와 음료수 값을 치루고 나갔습니다. 백밀러에는 그 운전자의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비쳐졌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는 등 사울에게 베풀었던 여러 선행은 베냐민 지파의 충성을 이끌어 내었고 다윗은 피 없이 통일합니다. 이 같이 하나님은 선행을 근거로 섭리를 진행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22절에서 잠언은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내일 이에 관해 보겠습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2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