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8/21-25)

잠언25:13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새번역)

‘무더운 추수 때’란 팔레스틴 지역에서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4월 중순부터 밀 추수가 시작되는 6월 초 이후의 기간을 가리키며 매우 더운 계절입니다. ‘시원한 냉수’란 북쪽 헐몬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눈이 녹은 물을 가르킵니다. 무더운 계절에 그것도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한 후에 숨이 차고 목이 마른 그 때, 눈이 녹은 차가운 물을 마신다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사자가 어려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라는 보고를 들은 왕이나 주인의 기쁨은 어떻하겠습니까? 본절은 그것을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에 비유하고 있는데, 저자인 솔로몬이 왕으로서 수 많은 사자들을 파견해 본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그는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오라고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하란으로 보냄을 받았을 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하여 리브가라는 훌륭한 신부감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렇게 시원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과업을 이루시고 부활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역시 성부께 그런 기쁨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 ‘믿음직한 심부름꾼’의 역할을 다하여, 주님께 ‘얼음 냉수’를 드려 속을 시원하게 해 드린다면,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약1:12).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1:10)

잠언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13절은 ‘충성스러운 사자’를 묘사하고,  14절은 ‘책임감 없는 사람’을 언급함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극대화 합니다. 강우량이 부족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구름과 바람이 일면 사람들은 비가 내릴 것으로 기대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름 가운데 간혹 비를 머금지 않는 구름도 있어서, 비를 내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의 실망감을 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자를 ‘비 없는 구름과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선물’이란 대목입니다. ‘선물’은 누구에게나 갖고 싶은 물건 등으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는 ‘선물한다’고 큰 소리로 자랑하는 모습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사기꾼은 선물을 주는 대신 오히려 귀한 재물이나 생명을 빼앗기에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은 은연 중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더구나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것으로,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면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비 없는 구름과 바람’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잠언25:15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15절은 1-14절의 결론적 구절로서, 궁중 관리에게 ‘온유함’이란 미덕을 교훈합니다. ‘관원’은 재판관이나 왕궁에 있는 고위 관료를 의미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권력자들은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의도한 대로의 선한 결과를 얻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온유한 모습으로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많은 갈등이 내재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솔로몬  왕의 잠언임을 감안 하건데, 본절은 단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실제 경험이 우러나온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잠언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 사례가 성경에 나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차갑고 모욕적인 말을 듣자, 오히려 인내와 겸손, 온유함을 잃지 않아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마15:21-28).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마5:5)고 하신 뒤, 검을 들고 싸우지 않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우주를 상속받으셨습니다. 한편, 온유함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롬5:5).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 노력하고, 그 결과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의 품성 중 하나로 자리잡습니다(갈5:21,22). 이같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온유할 있는 능력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15:1)

잠언25:16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16-27절은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 소재로 한 단락을 이룹니다 봉투의 윗면과 밑면을 접고 편지를 그 안에 집어 넣는 것 같이,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그 중 16-17절은 좋은 것이라도 과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는 교훈으로, 16절은 꿀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17절은 이웃과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꿀’은 신이 내린 완전식품이라 할 정도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므로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토하는 이유는 꿀의 짙은 단맛과 함께 고도로 농축된 영양성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절에 등장하는 ‘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꿀’과 같이 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치면 해가 되기에 절제의 미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돈이 그러하고 권력이 그러하며 명예 또한 그러합니다.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말처럼, 인격만큼 소유하고, 권력과 명예를 갖는 것이 실패를 방지하는 묘책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설정해 두신 한계를 넘어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 탐욕이 삶의 본질을 이루고 있고, 우리의 힘으로 이 탐욕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라!”(갈5:16). 그러면, 성령께서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그 마지막이 절제라는 열매로서 그 안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람을 살리는 과즙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잠언25: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7절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루나, 교훈의 의도는 16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꿀’이 몸에 좋아 적당히 먹는 것은 좋지만, 과식하면 해가 되듯이, 이웃집을 왕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지나치면 나타나는 부정적인 결과를 주의해야 합니다. 본절의 ‘이웃’에 해당하는 원어 ‘레에카’는 ‘친구’ ‘형제’라는 뜻도 들어 있어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포괄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서 얼마나 지혜롭고 합당하게 처신하느냐는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때, 우정은 그 한 요소로서,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두는 분별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우정은 소원해지고 더 나아가 미움의 관계로 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잠언은 ‘지나치지 말아라’는 절제를 가르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우정, 사랑, 우애 등은 지속되고, 갈등과 반목은 제거되는 삶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익숙함은 경멸을 키우고, 사흘이 지나면 썩는 생선같이 손님도 그렇다”는 말이 알려주듯이, 경험을 통해 ‘이웃의 허용 한계’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단순히 이웃의 감정만을 살피며 수동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고 주님께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는 합당한 말과 처신을 하면서, 이웃을 도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는 충성스러운 섬김이 필요합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

매일묵상(2023/8/14-18)

잠언25:9
이웃과 다툴 일이 있으면 그와 직접 변론만 하고, 그의 비밀을 퍼뜨리지 말아라.”(새번역).

8절의 ‘철저한 준비’에 대한 권면에 이어 9-10절은 ‘비밀유지’의 품격을 교훈합니다. 고귀한 인격은 승소보다 중요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은 이웃과 어떤 문제가 있어 다투거나 소송 사건 등으로 변론할 때 문제가 되는 사안을 벗어나,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 비밀 등을 들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사사건을 넘어 형사사건으로 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가까울 때는 좋게 행동하다가, 무엇인가 뒤틀려 버리면 해를 끼려는 완악한 마음을 갖습니다. 본인은 그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만, 도리어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며 그 사람의 됨됨이까지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격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툼이 있을 시 먼저 주님 손에 그 사건을 맡기고, 비밀을 누설하면서까지 보복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면 절제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 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가르칩니다(16:32).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주님의 영께서 계십니다. 얼마 전 억울하게 기독교 계통 조직의 대표의 직위에서 해제된 분이 있었습니다. 일단 변호사를 통해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였고, 이사진들을 검찰에 고발하여 형사사건화 하자고 권고받았습니다. 물론 이사진들은 여러 문제점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심히 갈등하고 있을 때 전화를 통해 함께 대화를 나눈 뒤, 형사적 고발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잠11:9)

잠언25:10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10절은 9절에서 준 경계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전반부는 소송의 내용을 듣고 비밀을 누설한 자를 신실하지 못하며, 험담을 퍼뜨린다고 정죄하는 자로 재판관이 대표적이며, 후반부는 누설한 순간부터 누설자에게 돌아오는 수치스러운 평가(악평)에 관해 말합니다. 소송 중에, 상대방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 사건의 논증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이해될 수 있지만, 인신 공격과 같이 소송과 상관 없는 상대방의 비밀을 폭로한다면 그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법정의 공의를 흐리려는 부당한 행동으로 비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듣는 자 중의 하나인 재판관과 배심원은 물론, 공의로운 판결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이 이 같은 비열한 행태에 대해 격분하고 비난할 것은 자명합니다. 그 결과 재판까지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 나오는 이유는, 그의 언행이 지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은 재판 결과도 공의로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판상 소송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리 긴박한 경우에도 논지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삼가고, 쟁점되는 문제의 핵심만을 짚어감으로써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또한, 일상의 경우에도 이웃의 허물에 대해서는 입을 무겁게 가져가면서, 오히려 듣고 보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덕스럽고 아름다운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바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잠언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쟁반에 사과니라

11,12절은 ‘적절한 말과 책망의 수용’에 관한 잠언이며, ‘은 쟁반과 금 사과’라는 비유를 갖고 효과적으로 교훈합니다. 성경학자 키드너는 이를 “멋지게 말하면, 멋지게 받아들인다”고 요약하였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상황에 알맞게 잘 표현된 말”을 의미합니다.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의 원문은 ‘은쟁반에 금사과를 새겨 놓았다”는 말인지, “은쟁반에 금사과가 담겨 있다”는 말인지 불분명합니다. 더구나 ‘사과’에 해당하는 원어 ‘탐푸헤’는 오렌지, 석류, 모과, 살구 등으로 해석되기도 하여 문장 자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는 의견이 나뉘지만, 합당한 말은 이처럼 아름답고 귀하다란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쉽지 않아서, 분별력과 인격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성경의 예는 사사 기드온입니다. 그는 경우에 합당한 말을 통해 다툼을 종식시켰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족속으로 300명의 용사만을 이끌고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뒤, 도망가는 미디안 족속을 섬멸하기 위해 에브라임지파에게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뒤늦게 전쟁에 참여한 에브라임지파는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기드온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먼저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투었습니다. 이때, 기드온은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은 너희만 못하다”(삿8:103)고 말하여 그들의 화를 가라앉혔습니다.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온유하며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 (잠15:1,새번역)

잠언25:12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은, 들을 아는 사람의 귀에는, 금귀고리요, 순금 목걸이이다”(새번역)

본절은 11절과 함께, 바른 행동을 위한 지혜자의 책망을 ‘금귀고리와 순금 목걸이’에, 듣고 행동을 고치는 자를 금으로 장식한 귀에 비유합니다. 슬기로운 책망을 선하게 듣고 순종할 수만 있다면, 미인이 보석으로 꾸민 것처럼 아름다고 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금고리와 금사슬’처럼 희귀합니다. 양약고구 충언역이 (良藥苦口 忠言逆耳)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로써 이런 진리를 웅변합니다. 유대 선지자의 책망과 기적을 보고도 황금송아지 예배를 그만두지 못한 북왕국 여로보암 왕은 그가 죽자 그 가문 전체가 죽임을 당하였고, 선지자 엘리야의 책망에 불순종하였던 아합의 가문도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치려고 선지자 엘리야에게 온 아람 장군 나아만은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는 선지자의 말에 분노하였으나, 그 종들의 충고를 듣고, 마음을 고쳐잡은 뒤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씻고 완전히 치유를 받았습니다. 한편, 도피 중인 다윗이 갈멜의 부자 나발의 교만하고 무지한 행동으로 격분하여 나발의 가문을 죽이고자 하였을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맞아 적절한 말로 진정시킴으로 가족도 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살인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의 교훈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맺히는 이슬이요 채소 위의 단비’(신32:2)가 됩니다. 성경은 이 보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책망과 교훈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전7:5,새번역)

매일묵상(2023/8/7-11)

잠언25:3절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하늘…땅’이란 표현은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암시합니다. 어떤 왕이나 현자도 하늘에 올라가거나 땅 속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우주의 가장 미묘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궤뚫어 본 적이 없고, 우주의 신비 중 오직 일부분만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국가를 통치하는 왕의 마음을 신하들과 백성이 헤아릴 수 없어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비유입니다. ‘헤아릴 수 없다’의 원어 ‘엔 헤케르’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었지만, 본구절은 그 단어를 ‘왕의 마음’에 적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잠언은 왕의 통치를 묘사하고 있기 보다, 통치의 방법을 처방하려는 의도가 더 크게 담겨 있습니다. 왕은 마땅히 그렇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만약 왕(지도자)의 마음이 쉽게 읽혀 예측가능하다거나, 상상력의 부족이 드러난다면 그의 통치와 권력에는 치명적입니다. 신하와 백성들은 더 이상 그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지도자)은 각 분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탁월한 통찰력을 갖추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의 통치에 구현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뛰어난 왕(지도자)의 마음이지만, 그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영적인 사람들 보다는 못합니다.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고전2:15-16).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이 행하시는 섭리를 통찰하고, 왕에게조차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11:2)

잠언25:4,5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4,5절은 왕이 신하들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이  두 구절의 히브리 원문은 모두 ‘제하라’를 뜻하는 ‘하고’로 시작하여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4절은 은에서 찌기를 제거할 것을 명령합니다. 은이 은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은에서 찌끼를 제거하는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5절을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왕의 통치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왕의 앞에 있는 악한 자들(간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왕의 위는 의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의는 국가 번영의 필수적인 길로서, 의로운 왕은 백성의 신뢰를 받게 되고, 그 왕위는 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간신이 자신의 유익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왕을 이용한다면, 그 나라는 멸망으로 직행하고 오히려 왕이 권좌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본잠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먼저, 우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들로서(행9:15)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찌끼와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해야 할 ‘짜끼와 불순물’은 옛사람에 속한 성품 즉, 탐심, 교만, 질투, 음란한 마음 등을 일컫는 것입니다(갈5:19-21). 또한, 우리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 행하신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할 책무가 있습니다(벧전2:9). 신실하게 살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야 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잠언25:6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25:6-15절은 궁중관리(신하)를 위한 잠언의 10계명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경계(6-10)와 교훈(11-15). 이를 통해 솔로몬은 겸손(6-7), 철저한 준비(8), 비밀유자(9-10), 적절한 말과 책망의 수용(11-12), 책임성(13-14) 그리고 온유함의 지혜(15)를 가르칩니다. 신하가 왕 앞에서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은 ‘겸손’으로, 6절은 두 가지 명령을 내리고, 7절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왕을 알현하는 신하들의 모임(조회, 잔치)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왕의 뜻에 합당한 질서를 유지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과시의 욕망을 어리석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진 왕 앞에서 드러내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는 왕궁에서 자기 보다 높은 사람이 서야할 자리에 섰다가 뒤로 물러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하로서 마땅히 능력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나, 이를 갖추었다고 교만하게 행동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행할 때 특히 하나님이 인사권이나 기타의 권한을 부여한 지도자의 앞에서 겸손하면,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아도,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하지 않아도 왕과 다른 신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7절은 6절의 명령을 간직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부끄러운 결과의 하나를 보여줌으로써, 궁중관리들이 올바른 신하의 태도를 갖추도록 교훈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한 주님을 섬기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만유의 왕과 주님의 신하입니다. 여기에 본잠언의 영적 측면이 담겨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잠언25: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본절은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고 경계한 6절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솔로몬은 ‘..보다 낫다’는 비교구문을 사용하면서, 두 가지 경우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경우이며, 둘째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켜 낮은 데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당연히 전자가 낫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왕이 그 능력과 자질을 파악하고 그를 직접 높은 위치로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겸손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벧전5:6,7). 본절의 교훈은 예수께서 청함을 받은 자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자, 혼인잔치를 상정하여 가르치신 유사한 형태의 교훈에서 반복됩니다(눅14:7-11).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고 한 마디로 요약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당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 다시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자 성부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분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뜻과 상관 없이 권세와 재물을 쌓아 스스로 높아지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려는 욕망을 미워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길입니다. 후자의 길이 지혜요 영생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잠언25:8
너는 급하게 소송하지 말아라. 훗날에 너의 이웃이 너를 이겨 부끄럽게 만들 때에, 네가 어떻게 할지가 염려된다”(새번역).

본절은 송사에서 피해야 할 태도를 교훈합니다. 여기서 ‘다투다’는 말다툼 보다도 ‘변론하다’ (사3:13)와 같이 법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기에 새번역은 ‘소송’으로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남을 성급하게 고발하지 말라는 교훈이며, 충분한 준비를 거쳐 신중하게 소송하지 않으면 패배할 뿐 아니라 명예까지 실추되기에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치는 것이 지혜로우며(17:14), 설혹 법정에 가더라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신중히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판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법관은 오직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공정한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세상의 재판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재판규범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며, 재판장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증거에 입각하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신중히 살펴보고 심판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 사함 받고 심판을 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다는 의미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주어 행동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완악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까지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5:25,26)

매일묵상(2023/7/31-8/4)

잠언24:28
너는 까닭 없이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28절은 위증과 거짓말에 대해 경계하는데 재판정이 그 배경입니다. ‘까닭없이’의 원어 ‘힌남’은 ‘무고히, 정당성 없이’란 의미로 아무 근거없이 무죄한 자를 해치는 그릇된 태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짓된 증언, 정당성 없는 증언을 금지하는 말로써, 26절(적당한 말로 대답하라)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 긍정문으로 권면하였다면, 본절은 부정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위증과 관련하여 모세율법은 분명히 규정합니다: 정직한 증언 의무는 레위기5:1절, 위증 금지는 출애굽기20:16(십계명 중 9번째 계명)에서 규정하고,  신명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으로 모함’할 경우 모해목적을 따라  처벌하도록 규 정합니다 (신19:18,19). 본 잠언은 단순 위증이 아니라 상대방을 해할 목적으로 사적인 이해 관계나 원한 때문에 재판석상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을 말하기에 신명기의 규정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해위증죄). 대한민국의 형법 역시 위증죄를 단순위증죄, 모해위증죄, 허위감정·통역·번역죄 등 범죄로 규정 하여 처벌합니다(형법152-154조). 다만, 형법상 위증죄는  법률에 의하여 선서한 증인에 한하여 성립하는 일종의 신분범이므로, 수사단계에서 선서하지 않은 증인이나 참고인은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한편, “네 입술로 속이지 말라”는 후단의 규정은 비단 우리가 공적인 증언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웃에 대한 무고한 험담이나 풍설을 퍼뜨리지 말고(출23:1) 사랑 가운데 참된 것들만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은)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13:5).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이솝 우화의 하나입니다. 학에게 초대받은 여우는 자신의 음식이 길다란 유리병에 담겨 있어 먹지 못하고 그만 굶고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여우는 학을 초대하고, 맛 있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학에게 주었습니다. 학은 먹지 못하고 여우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 하였습니다. 손해나 모욕을 당한 경우 되갚아주려는 인간의 욕망을 잘 묘사하는 우화입니다. 본 잠언은 이 같은  분노 본능을 참고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그 뿌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평생 법원을 출입하며 수많은 소송 사건을 지켜 본 변호사는 “인간의 내부에는 뿌리깊은 증오심이 숨어  있어 우리들 대부분은 누군가로부터 피해나 상처를 입을 경우 거의 무의식적으로 분노와 함께 복수의 마음을 품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와 복수의 심리는 자기가 당한 몇 배를 갚아주어야 마음이 풀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레24:20)라는 재판상 동해보복법을 규정하여 국가 형벌권을 제한하면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레19:18)고 규정하였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기라” (롬12:19;신32:35) “네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는 가르침은 여기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우주의 통치자요 재판장이신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금생과 내생에 천부께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내일은 본 잠언의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통상 사람들은 노력이나 지혜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은총을 믿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남방 땅으로 내려갔을 때, 큰 기근이 닥쳐왔고, 이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나 이삭의 때에 또 다시 대 기근이 덮쳤습니다. 이삭은 필사적으로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자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고, 원주민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하였습니다. 블레셋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이삭에게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을 파서 얻었습니다. 건조하여 물이 귀한 그 지역에서 우물은 매우 귀하였기 때문에 그랄 목자들은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문제는 우물을 팔 때마다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고 또 다시 물을 얻습니다. 주님은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이삭의 삶을 본 것은 주님만이 아닙니다. 블레셋 족속 역시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뒤,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자고 먼저 제의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 새번역)

잠언24:30-34
게으른 사람의 밭과 지각이 없는 사람의 포도원을 내가 지나가면서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시덤불이 널려 있고, 엉겅퀴가 지면을 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마음 깊이 생각하고, 교훈을 얻었다.”조금만 자야지, 조금만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하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새번역)

이 구절은 게으론 자에 대한 풍자로서, 6:10-11절의 반복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 중 하나가 게으른 사람입니다. 밭 일은 고되기에, 게으른 자는 일하지 않으려고  ‘거리에 사자가 있다’는 등 많은 핑계거리를 댑니다. 그러나  게으름을 방치하면 개인과 공동체는 모두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 잠언이 상징하는 게으른 자는 농부입니다. 현자가 지나가다 보니 그 농부는 게을러 밭을 돌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밭과 포도원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혀  농작물은 자라나지 못하였고, 둘러싼 돌담 역시 무너졌습니다. 교훈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자신의 일에 게으른 사람은 수확할 것이 없어 가난해질 것입니다.현자는 이를 예기치 않게  쳐들어 오는 강도나 군대에 수탈당한 것에 비유하여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한편, 본잠언의 농부는 나태로 인해 열매맺지 못한 모든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우리 역시 역시 물려 받은 유산이나 선택한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등 일하지 않을 여러 핑계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여 감사와 겸손의 태도를 갖추고  자기 일과 위치에 충실하면 이삭처럼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잠언25:1,2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25:1절은 잠언의 5번째 표제(1:1;10:1;22:17-21;24:23)로서, 이하 29:27절까지  솔로몬의 잠언을 유다 왕 히스기야(BC 715-687) 시대에 편집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히스기야는 약 250년의 차이가 있고, 히스기야는 경건한 왕으로서 후손들을 위해 편집한 것 같습니다.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왕과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숨겨 놓으시고(섭리), 왕들은 그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헤아리기 힘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수수께끼를 내주시고,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마침내 답을 찾았는데 그것은 감옥에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란 수수께끼의 답을 얻지 못하였다면 애굽은 기근으로 멸망당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왕(지도자)은 하나님의 섭리를 연구해서 알아내야만 할 책무가 있습니다. 성경학자 클립포드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넘는 수수께끼와 퍼즐로 가득차 있지만, 왕은 그것들을 풀고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야 한다.” 왕이 그 섭리를 깨닫게 되면- 오늘날로 말하면 바른 정책을 수립하면 –  백성들이 잘 살고 하나님과 왕(지도자)은 높이 존경받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지도자들 위해 기도하도록 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딤전2:2,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