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6/19-23)

잠언23:21절
“(왜냐하면)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본절에서 현자는  ‘가난’에 주목하면서 20절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술과 고기를 탐하는 자’란 방탕한 자를 말하며,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게으른 자입니다. 그들은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대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만 노력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모두 탕진하고 결국 가난에 이르게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게으른 자의 행태와 그 결과를 경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장래도 바람직한 소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잠언은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21:25) 하여, 죽음이 이들을 기다린다고 밝힙니다. ‘가난’과 ‘죽음’이란 운명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그들은 정직하지 못한 자들이며, ‘악한 자’나 ‘미련한 자’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게으른 종을 ‘악한 종’(마25:26) 이자, ‘무익한 종’(마25:30)이라고 선언하시며,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신 것입니다. 한편, 노동이란 소득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인격형성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땀을 흘린 만큼 대가를 받고 살아야, 온전한 인격을 가질 수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는 재산이 필요하나, 세상을 떠날 때는 노동의 수고를 통해 닦인 인격만이 남아 영원한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래성 있는 사람들과 사귀면서 우리 자신의 인격발전을 도모해야지 이런 자들과 함께 어두운 곳으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잠언23:22절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새번역)

제5 계명은 부모공경의 계명으로, 내용은 공경의 명령과  장수와 축복의 약속입니다(출20:12;신5:16).  22-25절은 제5계명의 잠언판으로, 22-23절은  공경의 명령과 방법, 24-25절은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너를 낳아 준 아버지’와 ‘늙은 어머니’란  부부가 자녀를 낳고  늙을 때까지 부모와 자녀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말합니다. 부모의 흰 머리는 그들의 면류관으로 지혜롭게 일생을 살아왔음을 증명하며 (16:31), 자녀들은 그 면류관을 아름답게 하는 장식이라 하겠습니다(17:6).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명령은 부모가 준 가르침을 결코 버리지 말라는 의미로서, 전단의 ‘순종’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순종’이란 부모를 존경하고 그분들의 말씀이 무겁게 여겨질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공경 恭敬- 공손히 받들어 모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베드’는 ‘무겁게 여겨라’는 뜻으로,  ‘존경하라= Honor’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와 그 가르침을  크게 중요히 여기고 행동해야 합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에 순종한 룻입니다. 그는 시모의 말에 따라 계속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고 그 결과 성공적인 이삭 줍기와 보아스와의 결혼까지 성사되었습니다. 룻의 인생 성공의 비결은 늙은 시어머니의 말을 중히 여기고 순종한 결과로서. 제5계명이 약속한 그대로입니다. 내일은, 잠언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교훈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잠언23:23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조선 시대 홀로 4형제를 키우고 있던 한 어머니는  우연히 마당에 파묻힌 금괴짝을 발견하자 파묻고 곧 바로 멀리 이사 갔습니다. 삯바느질로 자녀들을 공부시켜 모두 성공시킨 뒤, 비로소 수십 년 전에 있던 금괴짝 사건을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금과 지혜 중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깨달은 지혜자입니다. ‘진리, 지혜,훈계,명철’ 4총사는 자녀들의 바른 인생을 위한 핵심 요소들로 이와 비교될 수 있는 보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부모라면 자녀의 축복된 삶을 위해서, 이를 가르쳐 습득시킬 것입니다. 잠언의 부모 역시 같습니다. 자녀가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수 십년을 가르친 후, 부모는 이제 늙었습니다(22). 그러나 이 진리가 너무나 중요하여 부모는 ‘사고 팔다’라는 상업적 용어로 이 진리를 또 한 번 가르칩니다. 솔로몬은 잠언3:13-18절에서 같은 내용을 아름답게 말합니다:“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장수가 있고 …부귀가 있나니…즐거운 길이요… 다 평강이니라…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지혜를 얻어 진리를 행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부모는 그런 자녀를 보고 싶어할 것이며, 그런 자녀를 둔 부모는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와 진리’의 가장 중심에는 ‘주님을 경외’하는 깨달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은과 금을 구하듯, 그것을 찾으면 주님 경외하기를 터득할 것입니다(2:1-5).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님께서 친히 지식과 명철을 주시기 때문이다.”(잠언2:6,새번역).

잠언23:24,25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24,25절은 자녀들이 부모가 가르친 의와 지혜와 진리의 길로 행할 동기유인으로, 부모님의 즐거움을 언급합니다. 피상적으로 볼 때 효도의 권면(22)과 진리 추구의 권면(23)은 관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권면은 부모를 기쁘시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은 이미 살펴 본 바 있습니다. 부모의 훈계대로 참되게 살아가는 모습은 부모를 기쁘시게 하며, 이는 부모공경의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더 나아가,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측면과, 22-25절이 제5계명(부모공경)의 잠언판 해석인 점을 감안한다면, 본절은 부모공경의 계명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여기서 제5계명의 전개과정을 보겠습니다. 제5계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2백만명에게 호렙 산에서 직접 하나님이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십계명의 하나로, 주님이 주신 땅에서 ‘장수’의 약속을 담고 있으며(출20:12), 40년 뒤 광야의 신세대에 대한 설교집인 신명기에서는 ‘장수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5:16). 1500년 후 사도 바울은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에게 신명기의 약속을 적용하되, ‘하나님이 네게 준 땅’이란 표현을 삭제하여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전 세계화 우주화시켰습니다(엡6:1-3). 따라서 성경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적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에베소서6:1-3절은 그 적용 방법을 가르쳐줍니다.“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잠언23:26절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26-28절은 음녀의 위험성에 관한 아버지의 훈계입니다. 아버지는 음녀는 깊은 ‘구덩이와 좁은 함정’(27), 그리고 ‘강도’(28)이니, 그녀가 있는 길로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공자는 “아는 자(知之者)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好之者),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 하는 자(樂之者)만 못하다”(논어 옹야편)고 갈파한 바 있듯이, 부모의  교훈의 길로 행하기를 즐거워 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즐거워 하는가?”를 보면 그의 장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가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요일2:17).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적어도 10명 이상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순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적 사업의  틀을 마음에 만들어 놓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지혜는 불경건한 세상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잠언을 공부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모범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시고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이 지금 온 우주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할 때  많은 유혹과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나 기도하는 가운데 기쁘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야훼께 여쭈어라.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주시리라.”(잠언3:6, 공동번역 )

매일묵상(2023/6/12-16)

잠언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부모는 자녀가 친구들이나 어른들의 나쁜 롤 모델로 인하여 잘못될까 걱정합니다. 3천년 전 현자 역시 같은 상황을 직시하고 유혹하는 현실을 넘어서서 주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을 합니다(17). ‘부러워하지’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예칸네)는 ‘질투하다’ ‘열심을 내다’의 뜻으로, 무자한 라헬이 4명의 아들을 낳은 레아를 향해 품은 감정과 같은 매우 격렬한 감정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창30:1). 이는 다른 이와 비교하여 갖지 못한 어떤 것을  동경하고 나아가 시기함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그 부러움의 대상은 ‘죄인의 형통’입니다.  ‘형통’이란 단어는 번역자가 삽입한 것으로, 원문의 직역은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실로, 악인들의 불법적 이익은 부러워할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들에게는 항상 주님을 경외한다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표지입니다. 1885년 옥스포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의 학장 허버트 워렌(32세)이 졸업생들에게 행한 ‘모들린 사람의 사명’에 관한 연설입니다: “저명 인사가 되고, 큰 일을 이루고, 남 앞에 서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필요한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편에 서는 꼭 필요한 사람,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들린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은 18절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축복을 언급하며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내일 자세히 보겠습니다.“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3:18)    

잠언23:18절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7절은 악인의 형통을 시샘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고, 18절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경건한 자의 복은 많지만, 본절은 미래의 측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본절의 전단과 후단은 동일한 내용이며,  전단은 긍정문으로과 후단은 부정문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특히 후단의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부정어 ‘로’와 미완료 동사를 결합하여 신자의 소망이 결코 끊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장래’와 ‘소망’이란 단어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돌보심은 물론, 최후의 심판 때 주님으로부터 올 칭찬까지 포함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건강하고 축복받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숨은 선행도, 신실하게 살아간 모습도 없어서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산 일생은 헛되다 하겠습니다(전1:2,3).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 속담처럼,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 자입니다. 이 땅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들 보다 인간적인 술수를 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더 형통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장래도 소망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가장 신경을 많이 쓰나, 죽음에 임박하여 가장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던 비즈니스이며, 가장 걱정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운명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외양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만, 아삽도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할 정도로 어렵습니다(시편73). 내일 이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일2:17,새번역)

시편73:13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편 기자들 역시 죄인의 번영과 경건한 자의 고난이라는 현실에 당황하며, 기도로 호소하는 장면이 시편에 많이 등장합니다. 본시의 저자인 아삽도 그랬습니다.  자신은 아침마다 징벌을  당하지만,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불어났습니다. 고통스러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 경건이란 시간 낭비아닌가(13)? 악인들은 즐겁게 살 때 우리는 온 종일 재앙을 당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14)? 그렇다면 이런 삶을 포기하고 그 행복한 넓은 길에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10)?  아삽은 풀기 너무 어려웠습니다(16). 그러나 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마침내 악인의 종말을 깨닫습니다(17). 그들은 창졸 간에 멸망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아삽의 가슴은 찔린 듯이 아팠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22). 그러나 자비롭게도 주님은 자신을 붙뜰어 주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고백합니다(27,28). 주님이 함께 하시는 아삽은 부유한 사람입니다(23). 성벽처럼, 주님은 신자를 지키시기에 우리는 안전합니다(23).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은 고난 속에서도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쓴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24-26). 이는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는 피난처요, 알 수 없는 그 선하심입니다(27-28). 하늘나라는 고난 속에 보화와 지혜를 감추어 놓았으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3:17,18)

잠언23:19절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17,18절은 주를 경외하는 자는 장래와 소망이 있기에,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이어지는 19-21절은 계명을 듣고 깨달아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살아가라고 교훈한 뒤(19), 방탕한 자들의 몰락을 동기유인으로 제시합니다 (20,21). 먼저, 19절을 보면, 명령형으로 된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 ‘들으라, 지혜로우라, 인도하라’.  이 3가지 표현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의 반복으로,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돼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후단에서’길’이란 행동 양식, 삶에 대한 태도, 특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함축합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실한 제자로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 이유는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며(골1:10), 그 결과 늘 교훈을 따라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실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경건한 삶의 가장 큰 특징이며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하면 비로소 악에서 떠나게 되고, 보이는 길은 주님의 계명의 길뿐입니다. 악에서 떠난 그는 모든 연륜, 학식, 재주, 힘을 가진 자를 뛰어넘어, 원수 보다 지혜롭고,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하고, 노인 보다 분별력이 있게 됩니다(시편119:97-101). 세상이 지어진 가장 목적은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인가?’를 보시려는데 있으며, 그들만 남아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  

잠언23:20절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19절의 권면 후에, 20절은 바른 길이 아닌 대표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걷지 말아야 하는 길은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 사귀는 삶입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들’이란 술꾼을, ‘고기를 탐하는 자들’이란 식탐에 빠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술과 고기를 먹고 즐기기 위해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자들로서, 한 마디로 ‘방탕한 자들’입니다. 신명기21:18-21은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규정합니다. 즉 모세는 사람에게 아들이 있어 고집부리고 불순종하면, 그 부모가 그를 끌고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를 돌로쳐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라고 명령한 바 있습니다. 신명기의 명령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과도 관련있기 때문에, 그 벌이 특히 중하게 내려졌지만, 본절이 말하는 자들 역시 공동체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정도의 악인임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경외함이 없고, 오직 술과 음식에 대한 탐욕만이 가득차 있습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로서 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엡5:5). 따라서, 현자는 이들과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훈계하나, 원문은 더욱 강렬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한 자리에 있지도 말아라.’ 따라서, 바른 길로 행하는 삶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 죄인들의 삶의 자리 자체를 멀리해야 합니다(시1:1). 더욱이 허랑방탕한 자의 결국은 가난으로 귀결됩니다. 21절은 이를 지적하여 잘못된 길을 버리도록 동기유인을 줍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매일묵상(2023/6/5-9)

잠언23:11절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10절은 고아로 대변되는 약자의 권리를 침범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11절은 그 중요한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힘 없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확립하신 사회적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주님 자신이 친히 압제자들을 벌하사,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시기에, 그들이 믿음으로 호소하여 오면, 그들의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하실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속자’란 히브리어 ‘고알람’의 번역으로, ‘가족 보호자’라는 의미며, 본절에서는 주님 자신을 지칭합니다. 이 단어는 동사 ‘속전을 주고 구출하다(구속), 복수하다, 친족의 역할을 하다’는 동사 ‘고알’에서 파생되었고,  ‘고엘-친족 구속자’ 역시 여기서 나왔습니다. 고엘 제도가 작동하는 상황은 대략 4가지입니다. (1)가난 때문에 팔린 친족의 밭이나(레25:25), 빚으로 종이 된 사람을 되사오는 경우로(레25:48), 가까운 친족의 의무였습니다. (2)주님에게 드린 재산이나 짐승을 다시 가져오는 경우, ‘고엘’은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소유자로서 1/5을 더하여 되사야(구속)합니다. (3)친족이 살해당하였을 때 가까운 친족은 ‘피의 보복자’로서 행동하며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엘’로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역할이며,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해 내신 사례가 적절합니다. 우리가 강할 때는 공의로운 주님을 두려워 하여 행동을 삼가해야 하나, 우리가 도움을 호소할 길이 없을 때, 만유의 주님이 계심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 (잠언15:25,공동번역).

잠언23:12절
“12훈계를 너의 마음에 간직하고, 지식이 담긴 말씀에 너의 귀를 기울여라.

23:12-24:2은  ‘순종하는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잠언의 제자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단락입니다. 12절은 출발점으로 ‘훈계를 간직하라’는 당부가 먼저 오고, 이어 훈계의 내용이 각각 등장합니다: 자녀의 징계문제, 정직의 장려, 죄인의 형통에 대한 질투 금지, 음식 탐하는 자와 교제금지,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 지혜와 지식의 추구, 음녀와 술를 멀리하라는 가르침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절의 ‘마음’은 핵심 단어로서 잠언의 제자와 부모를 단단히 연결해 주는 고리입니다. 지금, 아버지는 아들이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후단으로, ‘너의 귀를 기울여라’는 표현을 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미련한 자로 생각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잠언은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라’고 이미 가르쳤기 때문입니다(23:9). 마음과 귀는 서로 협력하여 일하는데,  마음은 귀를 열고, 귀는 마음을 형성합니다. 즉, 마음이란 속사람의 기관은 신체의 귀를 열어 듣게 하고,열려진 귀는 마음 자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지식이 담긴 말씀’과 훈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어  마음 자신을 재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기 마련입니다(잠언18:15). 따라서, ‘부주의한 마음은 부주의한 귀를 만든다’는 학자 브리지의 지적은 합당합니다. 솔로몬은 부여받은 왕의 직무를 잘 수행 하기 위해 ‘듣는 마음’(왕상3:9)을 달라고 주님께 요청함으로 이 양자를 결합하고 있음은, 그가 왜 지혜자인지를 보여줍니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잠언19:27)

           
잠언23:13,14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훈계의 목적은 아이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채찍’이란 단어를 보아 잠언은 아이들에 관한 어떤 환상도 없음을 알려주지만, 그렇다고 ‘주마가편’의 고사성어와 같이 아이들에게서 최고의 능력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지혜란 무수히 반복되어 교훈된 후에만  아이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게 되며, 이 과정 중에 ‘채찍’과 같은 글자그대로의 각인도 필요한 법입니다. 만약 훈계를 멈추는 부모가 있다면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부모이며, 그들의 자녀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잠언의 최고의 교육의 방법은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갖게 하는 것으로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종종 회초리도 동원되어야, 아이의 마음에서 미련을 벗겨낼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을 경외하여 모든 것을 행하려는 마음을 품지 못하면,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거나, 패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다윗은  자녀들에게 채찍은커녕 ‘왜 이런 일을 하였느냐?”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첫째, 둘째, 셋째 모두의 비명횡사였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채찍질은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지만, 아이에게 생명의 교훈을 갖게 하고, 채찍이 없으면 일시적인 고통이 없지만,  그 아이는 죽을 운명(영원한 심판도 포함)에 처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경외하라’는 계명을 간직하지 못하면 바보입니다(욥28:28). 따라서 훈계의 상황에서는, 자녀들에게 사랑의 매라도 가하여 그들로 지혜를 얻어 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들에게 매를 들어야 희망이 있다. 그러나 들볶아 죽여서는 안 된다.” (잠언19:18,공동번역)

잠언23:15절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맹자는 군자 삼락을 말합니다: 첫째는 부모와 형제자매가 무고한 것이고, 둘째는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즐거움입니다. 첫째 즐거움은 하늘에서 내려주어야 하고, 둘째는 인격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셋째는 맹자의 지식을 나누어줌으로써 갖는 기쁨입니다. 여기 맹자와 같이 제자를 두어 가르치는 선생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즐거울 때는 제자가 배운 그대로 행하거나, 가르침을 넘는 이치를 터득하여 지혜를 보여줄 때입니다. 여기서 ‘지혜’란 남보다 빠른 두뇌회전이나 높은 IQ가 아니라,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능력을 말합니다. 잠언의 제자는 사태를 파악하여 결정할 때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님을 우선 고려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임을 선포하고(1:7), 가장 먼저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도록 교훈합니다. 그렇다고, 본절에서 말하는 지혜에  예법, 군사, 경제, 농사, 목축, 통치술 등 삶의 지식이 제외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잠언은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임을 또한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18:9). 문제는 이런 일에 탁월하여도 그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만을 도모하여 타인을 해친다는 사실입니다. 역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자신의 일은 물론, 타인의 이익까지 고려하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실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그 주된 결과는 정직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내일 살펴볼 16절은 이를 확증합니다.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잠언23:16).

잠언23:16절
“네가 옳은 말을 하면 내가 정말 즐거워할 것이다”
(새번역)

15-16절은  마음과 언어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음을 가르치는데, 지혜로운 마음은 정직한 말을 이끌어 내고, 듣는 자는 그가 지혜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생은 제자가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처럼 말하기를 바랍니다: “내 말은 건전하고 참되며 하나도 잘못되었거나 악한 것이 없다.”(8:6). 잠언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의 출세지상주의, 성공지상주의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정직한 말과 올곧은 삶을 지향하도록 교훈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추구하는 석사, 박사와 같은 ‘든 사람’이나 출세하여 입신양명을 이루는 ‘난 사람’이 아닌 잠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자녀양육의 첫 번째 목적이요 가장 우선된 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즐거워하는 일은 우리가 정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소위 하나님 사랑을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그것이 우리가 자녀 양육 시 첫째에 놓이고,  다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미가6:8). 미가서의 이 구절은 지혜의 시작이고 방법이며 목적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심오한 곳이 아니며 너무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지 말라고 전도서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발견해 내도록 구조가 짜인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혜를 갖고,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고, 늘 겸손하나 신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매일묵상(2023/5/29-6/2)

잠언23:6절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6-8절과 1-3절은 소재와 표현과 유사하지만, 1-3절은 조심성 있게 관원과의 식사자리에 나가라는 권면이나, 6-8절은 식사자리가 상징하는 마음의 교제 자체를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악한 눈’이란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불량하고 악한 마음으로,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선한 눈’과 대조됩니다(22:9). 그는 손님의 행복과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관철하고자 합니다. ‘음식을 먹지 말며’란 단순한 식사가 아닌 마음을 함께 나누는 식탁의 교제를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의  식탁 교제는 같은 계층의 가까운 사람들과만 나누었기에,  ‘음식을 먹지 말라’는 말은  교제를 중단하라는 경고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고, 악인에게 속한 것은 음식은 물론 그 어떤 것에든지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본잠언에 대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까지 쫓아가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4명의 왕을 격파하고, 조카 롯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왕곡에 이르자  소돔 왕이 나오면서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사람은 물론 의당 자신이 가져야 할 전리품조차도 악한 소돔 왕의 소유물은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악인의 재물로 치부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 해도 받지 않았지만, 계속 소돔 땅에 머물면서 악한 자와 교제를 한 롯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시141:4).               

잠언23:7절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 그가 말로는 ‘먹고 마셔라’ 하여도, 그 속마음은 너를 떠나 있다.”(새번역)

7절은 식사자리에 초청한 주인의 위선을 벗김으로써, 6절이 말하는 권면의 실체를 알게 해줍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이란 주인의 속마음을 묘사하는데, 그는 손님을 초청해 놓고 비용을 계산하는 중입니다. 겉으로야 ‘먹고 마셔라’ ‘마음껏 즐겨라’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돈을 아까워 하고 있습니다. ‘ 사람됨’이란, 인격을 말하며, 사람의 인격은 외양보다도 속마음을 알아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후단이 연회를 상정하여, 악인의 겉모양과 속마음의 괴리를 묘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색한 주인이 음식을 차려놓고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외양을 갖춘 것은 이기적인 의도를 성취하기 위해서지,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속마음은 너를 떠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후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청년 A는, 외롭게 지내는 중 마음 따뜻한 형을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며 자신의 속마음도 털어 놓고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 형은 칼을 하나 주면서 자신을 따라 오라 하여, 간 곳은 K라는 룸살롬이었습니다. 아비규환이 일어났고, 그 범죄자는 사라졌으며, A만 모든 범죄를 뒤집어 썼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을 늘 의심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평소에 조금씩 그 속마음을 테스트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일에 마음이 드러나면, 그는 큰 일에도 그렇게 행동할 것입니다(눅16:10). 우리의 목적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행복을 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잠언23:8절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본절은 악한 자와 교제를 나누지 말라는 메시지를 위해 문학적 기교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어순입니다. 동사가 문두에 오는 통상의 히브리어 구문과 달리, 8절은 ‘핏테카- 조각, 작은 부스러기’라는 명사로 시작됩니다.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악인의 호의를 받아 진수성찬을 먹을지라도 조금의 유익도 없다.  둘째, 식사는 우정을 나누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현자는 이를 재료 삼아 악인과 교제 결과를 보여줍니다. 손님을 초대한 주인은 성심성의로 대접하기 위해 먹기에도, 보기에도, 그리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골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며, 초대받은 손님은 그 정성과 환대, 진귀한 요리에 또 감사하며, 아름다운 식탁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악인은 의도를 갖고 초대한 것입니다, 그 이기적인 의도를 알게 된 손님은 구토를 하고, 주고받은 덕담도  소용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절의 식탁의 교제의 결과는 악인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대표적인 예일뿐입니다. 따라서, 인색한 자들과는 진심으로 교제할 수 없고, 그들과 친분을 쌓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셋째, 본절은 교차대구의 기교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조금 먹은 것도) – (네가 토하겠고)-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네 말도). 악인과 교제 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조금의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잠언23:9절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가장 지혜로운 충고도, 바보의 귀에 닿으면 튕겨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런 지혜가 오히려 그들의 적의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바보들은 지혜로운 말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면, 지혜자를 대척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였고,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선지자들이 대부분 고난과 핍박을 받은 이유는, 들을 귀가 없는 미련한 백성과 통치자들에게 가장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도 이를 증언합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왕 부차는 초에서 도망 온 명장 오자서와 함께 월나라를 정복시켰습니다. 월왕 구천을 죽이자는 오자서의 건의를 오왕 부차는 무시하고 대신 소변과 똥을 먹이는 치욕을 준 후, 살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오자서는 계속 월나라를 경계하라고 여러 차례 진언을 올리다가 마침내 오왕 부차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때 월나라의 명신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기회를 엿보다가, 오자서 없는 오나라를 공격하여 부차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범려의 충언을 듣고 부차를 죽여 후환을 없앴습니다. 어느 날, 범려가 구천과 말하다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월나라를 떠나 화를 면하였습니다.그러므로 마땅히 상대방을 가려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잠언23:10,11절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10절과 11절은 열한 번째의 교훈으로, 10절은 잠언의 제자들로 하여금 고아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라는 명령이며, 11절은 그 이유로 하나님이 그들의 보호자임을 말합니다. 먼저, 10절을 보겠습니다. “ 선조가 세운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22:28)고 이미 교훈한 것처럼, 지계석은 토지의 경계와 그 소유주를 알려주는 경계선 돌입니다. 고대 근동은 토지가 기반이된 농업 사회로서 지계석은 중요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뒤, 그들이 언약을 지키는 한에 있어서, 그 거룩한 땅에서 살아갈 권리를 확보하도록 각 지파에게 밭을 제비 뽑아 분배하여 영원히 빼앗기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아로 대변되는 힘 없는 약자들부터 율법에 규정된 그들의 권한이 침범당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왕과 그 신하들의 책임이었습니다만, 강한 이들부터 그들의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 옮기지 말며…침범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은 지계석을 한 번 옮긴 후 확보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밭’의 원어는 ‘사데’로서 풀밭, 넗은 들, 그리고 땅을 의미합니다. 본절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이스라엘에서 밭으로 상징하는 토지의 소유자는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시기 위해 행동하셔야만 하고, 11절에서 그것은 ‘고아들’의 ‘고엘- 구속자’로서 표현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도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약할 때는 기도하시고, 강할 때는 두려워 해야만 합니다.다음 주에 11절을 상론하겠습니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잠언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