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5/22-26)

잠언 22:26,27절
“이웃의 손을 잡고 서약하거나,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아라. 너에게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네가 누운 침대까지도 빼앗기지 않겠느냐?”(새번역)

잠언은 보증을 서서, 타인의 빚에 얽혀들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고대의 보증은, 보증인이 채무자의 손을 잡고 채권자 앞에서 서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자는 경고합니다. 만약 자기가 보증을 선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야 하는데, 그때 재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침상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신은 맨 땅이나 마루에서 자게 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자신과 가족의 몸을 노예로 팔아 보증빚을 갚아야만 합니다. 이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참고 6:1–5; 11:15; 17:18; 20:16).  한편, 잠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권고하며,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선언하나(19:17), 보증은 예외입니다. ‘관대하다’는 말은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나, 보증인은 거저 주는 관대함 대신에 채무자가 변제를 하여 자신을 보증채무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보증인은 늘 불안합니다. 특히 잘모르는 낯선 사람을 위해 서는 보증이 그렇습니다(20:16). 그러나 사회에는 대출에 대한 수요와 함께 보증에 대한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상대방의 신용과 위험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이런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돈을 버는 은행업, 보증업 등은 법제화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 비상한 발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업의 영역에서는 본잠언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남의 보증을 선 사람은 자기의 옷을 잡혀야 하고, 모르는 사람의 보증을 선 사람은 자기의 몸을 잡혀야 한다” (잠언20:16,새번역).

잠언 22:28절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지계석은 토지의 경계와 그 소유주를 알려주는 경계선 돌입니다. 고대 근동은 토지가 기반이된 농업 사회로서 지계석은 중요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래 제비를 뽑아 각 지파별로 토지를 분배받았고, 영원히 팔 수 없도록 율법에 규정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나봇의 포도원).  만약 가난  등의 이유로 타인에게 귀속된다면, 모세 율법은 친족이 되사올 수 있게 하는 고엘제도와 더 나아가 희년이 되면 반드시 원 소유주에게 그대로 귀속되게 규정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토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백성들은 균일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하나님만 섬기며 상호간에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래 지파별, 가족별로 분배받은 땅은 그대로 후손에게 대물림되어 갔습니다. ‘지계석’은 이런 토지 소유권을 확정해 주는 아주 중요한 증표로서, 지계석을 옮기는 행동은 심각한 범죄였습니다(신27:17). 그러나, 악인은 지계석을 한 번에 조금씩 이동시켜 마침내 약자의 밭을 상당부분 잠식하는 묘수(?)를 발견합니다. 원한에 사로잡힌 고아와 과부를 누가 돌보아줄 것입니까? 잠언은 이런 악인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경계선을 지켜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15:25). 물론, 대행자는 왕이지만, 주님 자신도 섭리 가운데 도우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주님은 과부처럼 불의를 당하여 기도할 때 신속하게 응답하실 것을 믿고 인내하라고 가르치시셨음을 유념해야 합니다(눅18: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8).

잠언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앞에 것이요 천한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본절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맡은 일을 능숙하게 해 내어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라는 권면입니다. ‘보았느냐’는 능숙한 사람을 간파할 정도로 예리한 분별력을 지녔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능숙한’ 이란 신속하면서도 숙련된 일꾼이 지닌 뛰어난 재능을 의미하며, 그는 왕 앞에 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천한 자’앞에 선다는 말은 그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여 무시당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잠언의 이 교훈은 인간이 사는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나 참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노력하여야 합니다. 벤자민 프랭크린의 어머니는 본절을 벤자민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서  행하게 하였고, 벤자민은 그 당시 최첨단인 인쇄술에서 탁월한 기술을 갖추고  늘 이를 자랑하였지만, 그는 이신론자이지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한편, 어떤 회사의 인사팀장은 가능하면 기독교인을 신입사원으로 뽑지 않았는데, 열심인 신자일수록 회사에 대한 애정도 책임감도 없어 촌각을 다투는 일에도 교회를 핑계로 퇴근해 버리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예배도 좋고 일도 좋습니다. 이 모든 일에 균형을 잡을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나 다니엘이 이방 사회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총리가 된 것은 신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일에 능숙하고 민첩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어려움에 봉착하면 당황합니다. 그러나 ‘왕앞에’ 서도록 노력해야만 하며, 또 성경은 우리를 위해 좋은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 23:1-3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목에 칼을 것이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

본절은 관원의 식사 초청 시 긴장하여  의도를 파악하라는 현자의  7번째 교훈입니다. ‘관원’이란 ‘다스리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평민이나 하급관리가 아닌 통치자를 보좌하는 궁정의 고위직을 말합니다. 이들은 사람의 생명이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대단한 권세와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말과 행동에는 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으므로, 제자들은 잔치에 초청받은 속내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화려한 대접에 마음이 팔려 경솔히 행동한다면,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자나 권세 있는 자들은 결코 공짜로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제자는 마땅히 숙고하면서 초청에 응해야 하고, 식사 시에도 ‘목에 칼을 두라’는 현자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관원의 면전에서 식탐을 부리면 관원의 속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어 올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식탐 때문에 리브가와 야곱에게 이용당하였고 결국 에서를 축복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따라서, 현자의 권고에는 음식에 대한 하찮은 식탐 때문에 정의를 그릇치기 보다는 네 목을 긋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를 상기시킵니다. (1)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 (2) 범죄하게 이끈다면 몸의 일부라도 잘라내겠다는 결의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5:30).

잠언 23:4,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본절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권면합니다. ‘애쓰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힘써 일하다’ ‘곤비하다’라는 뜻으로, 본문은 부자가 되기 위하여 지칠정도로 과도하게 노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가난이 나쁜 것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듯이, 부자와 행복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와 기회라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재물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안되고(전9:11), 하나님이 재물얻을 능력을 주셔야만 가능함을 깨닫는 것입니다(신8:18). 또한, 부자가 재물을 맡은 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 재물은 독수리처럼 날아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를 목표로 산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돈에서 안전과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 본성이기에 인간은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을 주인 삼은 뒤에, 비로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안전을 추구할 것입니다 (마6:24,25). 그러므로, 부가 현명한 노력, 즉 부지런히(10:4), 절제하며(21:17),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획득된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축복입니다(3:16).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마음으로 획득된다면, 부는 저주가 됩니다(10:2;11:4). 우리는 늘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매일묵상(2023/5/15-19)

잠언22: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73년의 인생을 살며 3000명의 제자를 둔 공자의 입학금은 “한 다발의 건육”이었고, 교과목은 ‘육례(六禮)’라는 현실교육이었습니다: 예절, 음악, 활쏘기, 말 타기, 글쓰기, 셈하기 등 6가지 전문 과목으로, 평민들도 배워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논어는 동양의 리더들을 키워냈습니다. 물론 <논어>에는 신에 대한 개념을 전제하지 않아, 성경과는 그 출발부터 확연히 다르지만, 같은 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근원에서 어떤 가르침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22절부터 나올 ‘서른 가지 교훈’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둘째는 고결한 인격입니다. 부에 대한 갈망, 부자의 호의를 받으려는 자세, 술취함, 부모에 대한 불순종, 성적인 부도덕, 기타 이 같은 행동들은 확실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서른 가지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입니다. 추가적으로, 본절은 그들을 보낸 자들( 부모나 후견인)에게 스승의 가르침에 부합된 삶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잡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갈대아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왕을 섬기도록 훈련받았습니다(단1:3-4).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은 모세율법을 아는 오직 이 네 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기도하며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잠언22: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2절과 23절은 한 쌍의 교훈으로, 22절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압제를 금지하고, 23절은  그릇 행동한 자는 재판장이신 주님께 목숨을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먼저 22절을 보겠습니다. ‘약한 자를’에 해당하는 원어는 ‘딸’이며,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인 힘이 결여되어 있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하반절의 ‘곤고한 자’란 히브리어 ‘아니’의 번역으로, 누군가에 의해 부당하게 압제와 고통 당함을 뜻합니다. ‘성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된 출입구로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현자는 경제적 측면이나 사법적 측면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약한 자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도리어 보호하고 변호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당연하나,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경제적 불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여 거래과정에서의 불공정성을 막으려고 노력하며, 재판과정에서의  불의를 막기 위해 헌법에서조차 약자 보호규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은 힘있는 자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혹시 기준이 되는 법률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고려할 때,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의 문제까지도 처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법률과 제도만으로는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담겨야만 비로서 온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존재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이들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잠언22:23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새번역)

23절은 약자를 탈취하고, 압제하는 자를 처단하시는 우주의 재판장을 밝힙니다. 그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 지식은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만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을 통해 이방민족들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심판 집행은 섭리 가운데 숨겨져 있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진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섭리라는 도구 전에, 국가라는 질서를 세우시고 범죄를 인간이 다루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 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롬13:1)고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권력집단의 범죄는 매우 심각하나 국가 자체에서 다루기 쉽지 않아서, 심판의 섭리가 작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섭리적 심판을 통해 이들을 몰락시키시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는다는 것이 본잠언의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 통치자 아합 왕이 범죄하자, 주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범죄한 아합의 집안을 멸망시켰습니다 (왕하9장,10장). 한편, 하나님의 정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주님을 재판장으로 정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행18:31). 성도에게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약5:8,새번역).

잠언22:24
성급한 사람과 사귀지 말고, 성을 내는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말아라.”(새번역)

좋은 보금자리를 놓고 싸우다 진 바닷가재에게 세로토닌이란 호르몬을 주입하면, 다시 힘을 내어 승자에게 무모한 도전을 한다고 합니다.  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지만, 바닷가재는 호르몬의 작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도 그런 행태가 습관화 인격화 되어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현자는 제자들에게 이를 경계합니다. 현자가 보기에, ‘성급한 사람’과의 교제는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이라, 강도짓(22,23)을 하여 파멸당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은 약자를 압제하는 자를 심판하여 생명까지 몰수하시는 반면, 성을 잘내는 사람의 길에는 자기파괴의 함정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급하고,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주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교만하며 경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약1:20).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분냄’이란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하나로,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며(갈5:21), 이웃에게도 회피 대상이고, 경멸을 받습니다. 문제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래의 심판이 뻔히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과 어떻게 인생을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친구나 배우자 등을 선택할 때 신앙의 요소만큼이나 인격의 요소도 이처럼 중요합니다. 24절의 교훈은 당연하나, 25절은 좀 더 큰 이유를 알려줍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언29:1)

잠언22:25
네가  행위를 본받아서 올무에 걸려 들까 염려된다.”(새번역)

‘성을 잘내는 사람’이란 ‘히브리어에서 ‘분노의 사람’이란 뜻으로, 현자는 제자들이 그런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제자들 역시 쉽게 화를 내는 사람과 동행하면 그와 유사한 성격으로 발전해 나갈 우려와 자신을 지킨다고 하여도 타인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연류되어, 뜻하지 않는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좋지 못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악(惡)에 물들게 된다(근묵자흑)’는 교훈이나, 공자가 말한 ‘지란지교’도 같은 내용입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향기 그윽한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향기는 맡을 수 없게 되지만, 자연히 그에게 동화되어 착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치 악취가 풍기는 절인 어물을 파는 가게에 들어간 것과도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악취는 맡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에게 동화되어 악한 사람이 된다.” 성경의 사례입니다. 여호사밧은 경건한 유다 왕이지만 북왕국의 악한 왕 아합 과 연혼하여 큰 위기들을 겪습니다.먼저, 아합 왕의 요청으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 왕과 전쟁을 할 때  병사로 위장한 아합 왕은 화살에 맞아 죽었으나,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후 유다로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경책을 받았습니다. 더 문제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맏며느리로 받아들여, 그 아들 여호람은 아주 악한 왕이 되었으며, 악한 여자 아달랴의 구데타에 의해 유다 왕국은 멸망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못된 사람은 입술을 잘못 놀려 올가미에 걸리지만 착한 사람은 곤경에서 벗어난다.”(잠언12:13,공동번역)

매일묵상(2023/5/8-12)

잠언22:18
“(
왜냐하면)이것을 속에 보존하며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원문은 ‘키-왜냐하면’로 시작하여, ‘지혜자의 말씀을 들어라’는 권면(17절)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약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한다면, 두 가지 유익한 결과를 낳습니다: (1)자신의 아름다운 인격, (2) 지혜를 전하는 원천. 이어 비유로 소화기관이 사용됩니다. ‘네 속’의 문자적 의미는 ‘네 창자’이며, ‘이것을 네 속(창자)에  보존한다’는 표현은, 교훈들을 잘 소화하여 인격을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또, ‘네 입술 위에 함께 있다”는 의미는 인격으로 통합된 지혜의 말씀을 표현할 능력을 힘써 갖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후단에서 ‘아름다우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17, 18절은 인격을 가꾸는 방법과 그 효과를 말합니다. 먼저, 지혜의 말씀을 귀로 잘 듣고,  마음으로 묵상하며, 더 나아가 간절히 사모하고 열망함으로써 인격화(내재화)시킨 후, 자신만의 지혜의 표현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인격이 형성되고, 타인에게 교훈을 전하는 지혜의 또 다른 원천(지혜자)이 되는 것입니다.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힘써 아름다운 말을 연구하여 잠언 3천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 중 으뜸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보배를 담기 위해 택함 받은 거룩한 질그릇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의 향기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그릇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5).

잠언22:19,20절
“이는 네가 주님을 의뢰하며 살도록 하려고 오늘 내가 너에게 특별히 알려 주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건전한 충고가 담긴 서른 가지 교훈을 써 주지 않았느냐?”(새번역)

19절은 제자들이 “주님을 의뢰하며 살도록 하는 것”을 교훈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스승은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제자들에게 자신의 비법을 ‘특별히 알려 준다’고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그분 앞에서 신실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분이자 영생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그러면, 현자의 가르침이 하는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핵심은 교훈의 궁극적 저자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마음을 다하여 의뢰하게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입니다. 현자의  교훈들, 즉 22절부터 등장하는 ‘건전한 충고가 담긴 서른 가지 교훈’은 이미 현자의 삶에서 그 가치가 검증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마음에 간직하여 행한다면 역시 큰 유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은 필수적입니다. 19절은 ‘오늘’이라고 이 사실을 힘주어 말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간직한 바로 지금 실천해야 하며, 이는 고대의 교훈을 현재와 미래 세대에 연결시켜주는 고리입니다. 잠언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주님을 능동적으로 신뢰하는 삶은 고대 근동의 현자들과 솔로몬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이란 놀라운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은 현자의 가르침을 포괄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애게 온전한 삶의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유대인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시키는 표지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시편148편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새번역)

본시는 개인과(146편) 공동체(147편)의 찬양을 넘어, 모든 창조물로부터 드려지는 창조주에 합당한 찬양이 울려퍼집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할렐루야(1a)
    B 하늘에서 찬양(1b-6)
    C 땅에서 찬양(7-14b)
 D 할렐루야(14c)
 “주님을 찬양하여라”는 동일한 명령이 하늘(1)과 땅(7)에 내려지며, 찬양의 요청마다 시인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5-6,13-14). 하늘의 찬양이 합당한 것은 주님(야훼)은 만물을 창조, 유지, 통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5-6). 또 그분은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님으로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온땅이 찬양을 드리는 것 역시 마땅합니다. 실로, 시인이 믿음의 눈을 뜨자 광풍조차도 그분의 말씀(명령)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8). 선지자 요나는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1:9)는 고백과 함께 던져졌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원되어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에 이바지 한 바 있습니다. 자연과 언약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인입니다(9-13). 이것이 신자가 갖고 있는 지혜와 특권으로서, 세상은 두려워 하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내하고, 그 영광스러운 섭리를 경험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따라서, 시인은 끝 절에서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은혜와 영광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시편148:14).

시편149편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새번역)

본시편은 하나님의 새 일, 즉 장래에 도래할 그분의 왕국과 성도들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쁨에 가득차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할렐루야(1a)
        B 주님의 새 일 찬양-구원(1b-4)
        C 주님의 새 일 찬양-승리(5-9b)
    D 할렐루야(9c)
시인은 주님이 행하실 새 일로 인해 ‘춤,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합니다. 그것은 구원(1-4)과 승리(5-9)로 현실화 될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1)은 성전에 모이는 ‘시온의 주민’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들(2)의 상징입니다. 신약에 오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받고 성령께서 중생시킨 자들이며, 구원에 대한 감사함을 갖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4;요1:12,13). 그들은 그들의 ‘왕’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 역사를 보면 야곱의 육신의 후손들이 세운 다윗 왕국은 이미 멸망하였으나, 그 왕국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통치 때문입니다(사9:6,7). 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시대인 현재는 복음에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면서 확장됩니다. 성도들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모두 다 응답받는 특권(요15:16)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시킬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6; 눅10:19).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사람들은 물론 악한 천사들도 심판하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마19:28). 본시는 이를 믿음으로 증거하고(6-9), 이 또한 우리 소망 중의 하나입니다..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시편149:9).

시편150편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절)

마지막 시편입니다. 세상을 이긴 성도들(149:5-9)이 ‘구속받은 자’의 찬송을 부르는 장면으로, 소리,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춤, 현약, 퉁소, 제금 등이 총 동원되었습니다. 150편은 노래하며,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0) 예언하고, 요한계시록은 그 완전한 성취를 말합니다: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계19:3; 5:8–14; 7:9–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도성인신하셨고, 죽고 부활·승천하사 지금 불복종하는 모든 것을 복종시킴으로써 구속사를 완성하고 계십니다 (사45:23;빌2:11). 그러므로, 예배 시 우리의 찬양은 이런 만유의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어야 마땅하며, 이것이 복음이 간직한 영광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과 축복에 비한다면, 애굽에서의 구원, 가나안 땅을 주심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그 사랑은 상징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두 돌판(십계명), 성막, 성전 등의 파괴, 범죄로 인해 영원히 약속된 가나안 땅에서의 추방, 또 영원한 약속을 가진 다윗 왕조의 멸망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 복음이 계시하는 여러 진리들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 부활, 마음의 할례 등 -은 이것들의 실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본시편의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찬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불려질 필요가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150:6).

매일묵상(2023/5/1-5)

잠언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본절은 이른바 ‘사랑의 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얽히다’는  ‘줄로 단단히 매다’라는 의미로,  아이의 마음에 단단히 매어진 ‘미련한 것’을 채찍으로 쳐서 제거하도록 교훈합니다. 물론, 그 전에 타이르고, 모범도 보이는 등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가르쳐야 하나, 미성숙한 아이의 몸에 가해진 충격은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징계의 채찍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징계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의 인격을 다듬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울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징계하지 않아 아이가 잘못되는 것과, 마지막 날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자녀라는 은사를 지혜롭게 교육하여 많은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가정에서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 나라의 본질은 그분의 계명이 실천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한편, 본절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성인이나, 정신적,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비추어 볼 때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격에 견고하게 묶여져 있는 영적 우둔함, 징크스에 대한 두려움, 죄의 성향들을 제거하기 위해 강한 채찍이나 회초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징계 후에는 의의 평강한 열매가 맺어질 것이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7:14).

잠언22:16
이익을 탐해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과,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 주는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22:1-16절의 주제는 ‘부와 도덕’에 관한 교훈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재물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신8:17,18). 따라서 겸손히 그분의 뜻(도덕)을 행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15-16절은 이 단락의 결론이며, 아이들에 대한 바른 교육(15)과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주님의 주권(16)을 교훈합니다 . 만약,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많은 재물 보다’는 ‘좋은 이름’을 추구해야 합니다(22:1). 사람이 부를 증식시키고, 세력을 확대하는 두 가지 방법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그 반대의 결과를 말합니다: “가난해질 뿐이다.” 왜 이런 역설이 성립할까요? 부자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부자의 호의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아주 냉정하게 차 버립니다. 따라서,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한 그는 가난해지기 마련입니다. 또, 가난한 자를 학대하여 그들의  삶에 긴요한 재산을  빼앗는 자는 선물이 필요 없는 부자에게 주는 사람과 같은 바보입니다. 그는 주님의 심판의 칼을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31). 주님은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가난한 자를 보호하시는 ‘도덕적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입니다. 따라서 권력, 명예, 재물을 가질수록 주님을 경외해야만 한다는 교훈이,  22:1-16 단락의 결론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잠언22:17절
“17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0:1-22:16은 솔로몬  잠언의 모음집이지만, 22:17- 24:34은 익명의 현자들의  교훈집으로, 주님(야훼)을 경외하는 실천적 지혜의 삶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2:17-21), 30개의 교훈(22:22-24:22), 그리고 6개의 추가적인 교훈(24:23-34)으로 되어 있습니다. 17절의  ‘지혜있는 자의 말씀’이라는 문구는, 전통적으로 전해진 익명의 현자들의 가르침이며, 이집트를 비롯한 근동의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 기원이 외국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은 주님 중심의 이스라엘의 지혜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한편, ‘지혜자의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은 바로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집니다. 이것은 어느 현자가 전통의 교훈들을 묵상하고 실천하여 자기 것(지식)으로 만들고 제자들에게 전달하면서 순종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입니다: ‘마음을 둘지어다.’ 우리는 지혜의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그 가르침에 몰두하여야 합니다(1:8). 그러나 모든 지혜의 말씀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116). 실로,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죄인을 구원시키고 믿음으로 신실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삶이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본절을 포함한 모든 현자의 가르침의 목적이 여기(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시편146편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 새번역)

146편에서 150편까지 다섯 편의 시는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과 끝을 맺으면서, 오직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찬양(146편)이 공동체로(147편), 그리고 하늘과 땅으로 확대 되고(148편), 진정한 찬양의 주체인 영광을 얻을 성도들의 찬양(149편)에 이어, 호흡이 있는 모든 것들의 찬양(150편)의 촉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46편의 구조입니다.

A      찬양의 초대(1–4)
      B      창조주 하나님(5–6)
         C      보존하시는 하나님(7–9)
      B′      왕이신 하나님(10a)
    A′      찬양의 초대(10b)

‘할렐루야- 너희들은 야훼를 찬양하라’는 외침은 복수형이지만, 곧 단수로 바뀌어 시인의 개인적 찬양의 이유가 열거됩니다. 죽을 인간은 의지할 가치가 없으나(3-4),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변치않는 분이기에 신뢰해야 합니다(6). 주님은 긍휼과 정의를 베푸시며, 갇힌 자를 해방시키며, 맹인의 눈을 여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며, 의인을 사랑하시며,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7-9). 끝으로, 시인은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시고…대대로 통치” 하시기에 참으로 그분을 찬양하자고 초대합니다(10). 아직 현실은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지만, 마지막 부활의 새창조 때에는 이 시편의 찬양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승천하셨고,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심’(눅1:33)으로 이 찬양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146:5,새번역).

시편147편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합니다. 먼저, 주목할 표현은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입니다. 도움을 받으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마땅한 일이란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합니다. 시편기자가 창조, 보존, 구속의 사건들을 묵상해 보니,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아름다운 일을 행하신 분이시며, 그분에 대한 찬양과 찬송은 ‘마땅한 일’이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7, 12절에는 각각 찬양의 선포가 나오며, 시는 이를 중심으로 3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은 별의 수효를 세실 정도로 전지전능하고 위대하신 분인 동시에, 도덕적 분별력을 가진 백성을 돌보시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7-11절에서, 시인은 그분이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도 먹이를 공급하시는 넉넉한 분이므로, 당신의 백성들은 군대(기병과 보병)나 힘이 아니라,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의 인자를 바라고 살기 원하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12-20절은, 창조세계를 통제하는 핵심적 요소는 그분의 말씀임을 묵상한 뒤, 이방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분의 ‘법도(말씀)’를 간직하는가의 여부임을 밝히면서, ‘할렐루야’로 끝맺습니다. 본시에서 흐르는 주제는 신구약 전체를 관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적 재물, 명예, 권력, 지혜를 가진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는 자들입니다 (중생). “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전하시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다.” (시편147:19,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