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04/24-28)

잠언22:12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새번역)

본문에서 ‘지식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다아트’는 ‘지식’ 혹은 ‘지혜’를 의미하는 추상 명사로서, ‘지식’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주님의 눈은 ‘지식’을 보호하사,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거짓된 말로 지식을 왜곡하려 시도할 때, 오히려 그의 말을 무너뜨리고 지식을 견고히 세우십니다. 한편, ‘신의가 없는 사람’의 원어 ‘보게드’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신실하지 못한 부부 관계를 의미하며 (말2:14), 이는 주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본절의 ‘보게드’ 역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의가 없는 악인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는 어떤 말을 하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나 배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그는 패망할 것입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믿고, 30Km 떨어진 요단 강으로 가서 7번 몸을 담그자 그의 나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냥 시리아로 가지 않고 선지자에게 와서 사례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흙을 싣고 떠났습니다. 이를 분하게 여긴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가 선지자가 요청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집에 숨겨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엘리사 앞에서 여전히 거짓말을 하자, 그는 엘리사의 저주를 받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잠언의 경고가 늘 성취되지는 않지만,  최후의 심판 시에는 확연히 성취될 것을 믿고 늘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잠언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13절(게으른 자)과 14절(음녀)은,  ‘신의가 없는 사람’(12절)의 예입니다. 게으름 자체가 죄이지만,  쉽게 돈을 벌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해 죄에 빠질 우려가 큽니다. 그러나 그 게으른 자는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깁니다”(16:16). 그는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을 수  많은 핑계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13절은 그 중 하나로서,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자라는 ‘놀라운 핑계’를 밝힙니다. 물론, 그 당시 삼림에는 많은 사자가 있어, 밭이나 들에서 종종 사자를 만나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 한복판에 야생의 사자가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거리’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환상 속의 사자’이기에, 지금 잠언은 ‘게으른 자’의 말에 담긴 거짓을 폭로합니다. 만약 밭에 나가 사자를 만나는 것이 싫으면, 장사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집을 세워야만 합니다(창3:17-19). 사람의 모든 수고에는 실패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나, 위험이 클수록 보답도 큰 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핑계에 안주하고 일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수고에 의지해 살아야 하기에, 사자뿐만 아니라 전쟁, 전염병, 질병 등 일하지 않을 ‘환상적인 구실’을 계속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런 게으른 생활 방식 때문에, 그의 인생(독신)이나 공동체(지도자) 그리고 가정(결혼)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게으름은 물론, 불신앙과 두려움으로 핑계거리를 찾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언26:14)

잠언22:14절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23:27절에서는 “음녀는 깊은 구덩이다” 하여,  음녀 자신이 ‘깊은 함정’으로 묘사되나, 13절은 “음녀의 입”이 깊은 함정이라 말합니다. 이 치명적인 여자는 이미 2장, 5장, 6장,7장, 9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었으며, 본절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여사냥꾼으로 등장시키는바, ‘깊은 함정’은 바로 그녀의 입에 있습니다. 달콤한 ‘말’을 토해내는 그녀의 입은, 불길한 위험과 회복할 수 없는 파멸을 숨긴 덫입니다. 잠언 2장에서 밝힌 그녀의 정체는, 거리 거리를 다니며 청년을 유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음녀가 사람을 해친다는 사자보다 위험한 것은, 야생의 사자가 다닐 수 없는 성곽 내의 거리를 활보하는 매우 위험한 맹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는 규정을 두셨지만(출20:14), 본잠언은 간음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즉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란 표현 자체가, 주님의 명백한 심판의 색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간음자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음녀의 깊은 함정에 빠졌을 때입니다. 한편, 23:28절에 가면 그녀의 이미지는 사냥꾼에서 ‘강도’로 변합니다. 이 두 개의 묘사를 통해,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자는 모든 재산과 심지어 귀한 생명까지 빼았긴다는 경고를 듣게됩니다. 대표적인 성경의 예는 삼손과 들릴라입니다. 삼손은 음녀 들릴라의 함정에 빠져 원수에게 잡혔고, 두 눈을 잃은 것은 물론, 명예와 생명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특히 조심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2:22).

시편144편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13)

144편은 140-143편의 칠흙같은 밤을 지나 오래 기다렸던 여명을 노래합니다. 시편의 구조입니다: (1-4)과거의 구원, (5-11)현재의 건지심, (12-15) 미래의 번영. 먼저, 1-4절에서 다윗은 과거의 구원을 회상하며 찬양드립니다. 다윗은 드디어 왕좌에 올랐고,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잘 것 없는 자신에게 베푸신 그 선하심에 놀라워 합니다. ‘반석’은 불변성을, ‘피난처’는 보호하심을, ‘요새’는 둘러싸는 힘을, ‘산성’은 접근 불가의 안전을, ‘방패’는 공격의 순간에 보호하심을 각 의미하며, 하나님 한 분만이 구원자라는 진리를 외치고 있습니다(참고18:2). 둘째로, 5-11절에서 다윗은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건져달라고 간구합니다. 5-6절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18:9-17절과 유사합니다. 과거에 구원을 받아 찬양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만, 현재 위험은 계속되고 있으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였습니다. ‘반석과 방패’라는 믿음의 고백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은 다윗은,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서 절박하게 호소합니다. 한편, 오른 손은 맹세를 할 때 사용되었기에, ‘거짓의 오른 손’이란 원수들의 신의 없음을 표현합니다. 끝으로, 12-`15절에서 다윗은 미래의 번영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 새롭게 왕이 된 다윗은 가정, 경제, 그리고 국가의 축복을 구하면서 주님의 백성임을 생각하고 번영을 확신합니다. 이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하는 모델이자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백성이 이리 되니, 아, 복스러워라. 야훼를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백성, 참으로 복스러워라.” (시편144:15 공동번역)

시편145편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절)

본시편은 마지막 알파벹시로서(21절),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도입부(1-2),, 주님의 위대하심(3-7), 은혜로우심(8-16), 의로우심(17-20)을 노래하는 본문,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자는 결론(21)의 구조입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3-7)과 은혜로우심(8-16)을 함께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이 두 속성은 그분의 창조물에 모두 공존되어 있습니다. 태양은 매우 거대하지만, 자그마한 지구 역시 만드시고 그 태양의 빛과 열기로 생물이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16). 구속사를 보면, 홍해를 가르시는 등 위대한 능력으로  야곱의 후손들을 구속하여 내신 그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이십니다(8; 출34:6-7).  백성들의 황금송아지 예배를 참으시고, 다시 두 돌판에 십계명을 적어 주셨습니다. 다윗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신 동시에 위대하십니다(17). 그러므로,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두  보호하시지만, 악인은 다 멸하실 것입니다(18-20). 그분의 이 속성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도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과거). 한편, 왕으로 등극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불순종하는 모든 것들을 복종시키고 계시며(현재), 마지막 날 사망을 멸하시고 우리를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미래).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다서25절)

매일묵상(2023/4/17-21)

잠언22: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랍비들의 격언 모음집’은 관대함, 겸손,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3대 특질이라고 말하는 바, 본 잠언에서 ‘선한 눈’이라 함은 ‘관대한 사람’을 말합니다. 관대한 사람은 8절에 언급된 악을 뿌리는 사람과 대조됩니다. 전자는 자신의 소유조차 남에게 주는데, 후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9절 후단은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준다’는 말로 관대한 자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실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자신의 고기와 곡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푸는 모습이야말로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 잠언은 축복의 성격과 축복을 주시는 분에 대하여 상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의 장본인이시고, 겸손하며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 영광,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22:4)생명 속에는 그분과의 교제가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분이었기에 ‘주의 벗’으로 불렸습니다(사41:8).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그 가족이 포로로 잡혀가자, 가신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승리하고 일체의 재물을 되찾아 예루살렘 근처 왕곡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살렘 왕 멜기세덱이 영접하자, 그는 모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지만, 악한 소돔 왕에게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려주었습니다. 악인의 소유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14-15장). 이런 행동은 아브라함이 관대함을 넘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재물, 영광, 생명(장수)도 누렸지만, 실로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이는 우리 믿음의 삶이 지향할 목표를 보여줍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언29:7).

잠언22: 10
거만한 사람을 쫓아내면 다툼이 없어지고, 싸움과 욕설이 그친다.”(새번역)

‘다툼’이란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면 잘 나타나는 현상으로, 10절에서 말하는 ‘거만한 사람’이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  ‘거만한 사람’의 원어는 ‘레츠’이며 조롱을 뜻합니다. ‘거만한 사람’은 죄(잠 14:9)와 심판(잠 19:28)을 비웃으며, 자신을 위한 길을 고집하는데,  그의 분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중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의 특징적 악은 ‘교만’입니다. 그는 미련한 자임에 틀림 없지만 고칠 수가 없는 것은, 어떤 책망이나 지혜로운 말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조롱하시고 쫓아내십니다(잠3:34).  반 루엔이 말합니다: “한 공동체의 가입과 탈퇴 기준은 중요하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포함한 어떤 단체도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때때로  구성원을 추방시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거만한 백성을 심판하여 추방시키거나 멸절시킨 예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첫 번째 예로, 그들을 추방시킴으로 에덴 동산은 비로소 평화를 찾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일곱 족속들은 그들의 범죄로 거의 멸절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역시 거만하게 모세 율법을 도외시 하다가,  1천년 동안 살던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이는 또한 최후의 심판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많은 무리에게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14:2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 자신의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섬길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

잠언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개정개역)

오래 전 미국 여행 시 차량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미국 사정에 밝은 처남 가족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아니라, 권력자인  왕과 친분관계가 있다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런 관계에 호소하여 국법질서가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왕은 친구가 없고, 혹 있어도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을 친구로 삼을 것입니다. 왕의 친구는 통상 고결한 지혜자로서, 그의  입에서는 왕이 감탄할 만한 덕스러운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로 번역되나, 정결한 마음의 소유자는 자연히 품위 있게 말한다는 취지의 개정개역이 타당합니다.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기에,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는 말도 품위 있게 하기 마련입니다(16:23). 다윗 왕의 친구로 아렉 사람 후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반역 시에도  충성스럽게 예루살렘 성 내에 머물면서 당대의 모사 아히도벨의 급습 전략을 막아 다윗을 돕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도,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주저 없이 모리아 산으로 향한 것은  불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락방 강화에서 제자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요15:13-16). 그리고 그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이어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친구되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마지막 날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행하십시오! 그러면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시편143편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6절)

이 시의 저자는 다윗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시는 주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 온 시인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요청으로 시작됩니다(1). 시인은 이 고난이 혹시 내 죄로 인한 심판은 아닌가 고민합니다(2). 이는 고난 당하는 모든 사람이 갖는 갈등이며, 우리를 좀 더 경건하게 합니다. 한편, 시인은 원수의 추격을 받아 언제 발각되어 죽을지 모르기에 낙담합니다(3-4). 그러나, 시인은 믿음을 갖고 주님의 과거 구원의 행적들을 되새기며 마음을 진정시키다가(5), 드디어 6절의 기도에 이르러 비상할 준비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주님의 은총과 구원이 절실합니다. 따라서 7절부터 시인은 11개의 탄원을 쏟아내며 더욱 열정적인 기도를 드립니다(7-12).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우리의 기도가 활화산과 같이 나오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푸른 풀밭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막11:22-2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 시편의 구성입니다.

   A1 (1–2) 관계- 주님의 성품
    B1 (3–4) 위험- 낙담하기 쉬운 인간
      C1 (5–6) 신뢰- 주님의 행적들
         D (7) 절박감 – 오직 주님뿐!
      C2 (8) 신뢰- 주님이 주시는 사랑
    B2 (9–10) 위험-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
  A2 (11–12) 관계- 주님의 성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편143:10).

시편143편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2절)

“감옥은 의인들로 붐비고, 교회는 죄인들로 넘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범죄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억울해 하는 반면, 훌륭한 시민들은 교회에 가서 오히려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 앞에 서면 의가 아니라 죄에 대한 지식을 갖게 마련입니다(롬3:20).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 만군의 주님을 보자 자신의 입술이 부정함에 절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자, ‘주여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합니다(눅5:8). 본 시편 2절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여실히 느낀 다윗이 긍휼을 탄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 내용이 “(언약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에게 이르렀을 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는 선포가 나왔고, 갈라디아서2:16과 로마서 3:9, 20에서는 죄의 보편성을 단언하는 구약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나면, 복음의 소망을 간직하고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20대에 살인범으로 몰려 25년 간 복역하다가 DNA 감식으로 무죄가 입증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복수심으로 불타 10여년을 복역하는 중 어릴 때의 기독교 신앙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 무죄로 석방되는 날 “이제 남을 미워할 시간이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매일묵상(2023/4/10-14)

잠언22:6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클립보드의 역설적 해설입니다: “아이들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양육하라, 그러면 결코 탕자의 길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잘못된 길이 많기 때문에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일한 길을 가르치며,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로 구체화됩니다. 우리는  이 지혜의 길을 걷도록 자녀를 양육하여야만 합니다.  한편, 본문 후단의 내용이 약속이냐, 아니면  일반적 진술이냐에 관한 다툼이 있지만, 아이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된다면,  성품으로 화하여 일생 바른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를 해야 비로서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의 형상을 따라 성경과 계명을 해석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나, 그 중요성은 시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기도, 기도와 가르침은 두 손과 같이 늘 함께 가야만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17살된 아들의 잘못된 행동과 무례한 언어 사용,나쁜 친구들, 심지어는 마약 등에 대하여 걱정이 되어 시카고 데일리 신문 맵레이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더니, 그는 “17개월로 돌이켜서 훈육을 다시하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만유의 주님이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분의 손에 맡기고 바르게 가르치시기 바랍니다(빌4:6,7). 야곱의 10아들은 형제를 종으로 팔 정도로 문제가 많았지만, 주님의 손에 의해 결국 올바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 (잠언22:15,새번역)

잠언22:7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새번역)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책에서 저자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휘두르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본 잠언도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모세율법은 고대 근동의 관습을 따라  채무로 인한 종의 규정을 두고 있어서, 잠언 당시 이스라엘에서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면 채권자의 종이 되어 빚을 갚아야 하였습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BC 800년경 선지자 엘리사의 한 제자가 빚을 지고 죽자 채권자가  미망인에게 그의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알렸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기에, 선지자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기름 한 병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녀는 기적으로 생산된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였습니다(왕하4:1-7). 신실한 믿음의 축복으로, 우리가 사방에 기댈 곳이 없어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계십니다(빌4:6,7). 잠언은 전체적으로 부자를 경고하고 책망 하지만, 본 잠언은 빚지는 것보다는 채권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채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채무자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벌로 규정합니다 (신28:44). 구약의 율법은 순종과 불순종을 물질적인 효과로 규정하여, 아직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한 그들로 순종을 배우게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유의 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엡1:22). 세상 것을 염려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1).

잠언22:8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둘 것이며 그의 분노의 기세도 꺾일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이 잠언은 인과응보, 혹은 사필귀정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콩심은 데서 콩나고, 팥심은 데서 팥난다.” 따라서 악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위의 쓰디쓴 열매를 거둘 것이며, 불의에 수반되는 폭력을 지칭하는 ‘ 분노의 기세’도 결국 헛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심판과 연관이 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7,8)고 경고한 뒤, 기회를 갖는대로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기 힘쓰라고 권고합니다(갈6:9-10).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둘째와 셋째는 시므온과 레위이고 딸은 디나였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있을 때 디나가 세겜에게 욕보임을 당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세겜과 그 동네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처자들은 종으로 삼았으며, 그 나이 불과 17,8세였습니다. 약 40년 후 야곱은 임종 시 이들을 저주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흩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시므온의 자손은 번성하지도 못하고, 유명한 인물도 없었고,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레위 지파 역시 전 이스라엘 가운데로 흩어졌으나, 광야의 황금 송아지 사건 때 우상숭배를 한 3천명을 죽이고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도록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화도 복으로 변합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16:7,새번역).

시편141편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2)

본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외로부터 오는 심각한 악의 유혹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부르짖습니다(1-2). 그 내용은 악의 유혹들에서, 자신, 즉 자신의 마음, 입 그리고 행동을 지켜달라는 간구이며(3-6), 또한 하나님께 피신하니 악인의 함정으로부터 자신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7-10).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살게 됩니다. 서로가 돕고 의지하는 관계가 되면 때론 타인의 죄에 연류되거나,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못해 함께 불법을 저지를 유혹도 받게 됩니다.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은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 비행을 저질렀고, 그 후에는 명예와 결혼과 돈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욕망의 힘을 끊어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간구하였고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 간증은 고백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시인인 다윗은 주님의 많은 사랑을 입었지만, 잠깐 방심하자 치명적인 도덕적 실패에 이르렀습니다. 그 만큼 인간은 연약합니다. 주기도문이 떠오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 우리는 주님께 신실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은 물론,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랑과 진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갈5:22-23).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편11:8)

시편142편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5)


시편 57편과 142편은 모두 다윗이 원수를 피하여 굴에 숨었을 때 지은 시이나 내용은 대조적입니다. 57편은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믿음이 지배합니다. 그 반면 지금(142편) 시인은 두려워 하고 절망과 비탄에 젖어 부르짖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적뿐이며 피난처는 없고, 오히려 원수의 올무만 설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4). 그러나 시인의 믿음은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서 “주는 나의 피난처….나의 분깃”이라는 고백과 함께 시인의 믿음은 날개짓을 시작하였고, 주님께 구원을 요청함과 동시에 그 믿음의 날개를 충만하게 펼칩니다(6). 끝 절에서 그의 믿음이 구원의 소망과 결부되자, 격동하는 마음은 평온을 되찾습니다 (7). 믿음은 소망과 결부되어야 힘을 발휘합니다. 한편 시인은 주님을 ‘나의 분깃’리고 부릅니다. 원래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 땅 대신 당신 자신을 그들의 분깃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기반은 땅을 분배 받은 각 지파가 주님께 드리는 제물과 헌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분배받은 지파들 역시 궁극적 삶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므로, 같은 믿음에 도달하였고, 시편 도처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믿음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73:26). 이는 신약에 이어져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징합니다. 신자에게는 주님이 피난처요 분깃으로, 직업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잊지 말고 늘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매일묵상(2023/4/3-7)-고난주간

2023년의 부활절은 4월 9일입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2023.3. 21일 후  첫 만월은 4/5일(음력2/15)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이 4/9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4/2-4/8).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1)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4.2),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서쪽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만나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고(마21:1-11/ 슥9:9성취),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나사로를 살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눅19:41-44). 성전에 들어가서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3) 아침 성전을 향하던 중 시장하시자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로 가셨습니다.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버림받을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이 날 여러 논쟁과 교훈이 있었습니다.먼저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힐문하자,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 와서 가이사에 대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고, 모세율법은 한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두개인들은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경우 부활하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크게 오해 하였다고 책망하신 뒤,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12:13-2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8-34). 너무나도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35-37). 이어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성전의 웅장함을 감탄하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은 철저히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요한복음13-20장은 영광의 책으로 불리웁니다. 큰 다락방에서 12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도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을 축약하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려고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은 경고하시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뒤(요14:16,17,26;15:26;16:7-15), 후에 믿을 자를 포함하여 모든 제자들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7장). 이어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는 1시간 동안 큰 통곡과 함께 피 땀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서 곤욕을 당하셨고,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잠잠하시다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7-68). 그 동안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은 700년 전 이사야에 의해(사53: 7-8) 기록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사이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는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다는 것과 당신이 인간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실 것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고,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