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3/27-31)

잠언22:3절
“슬기로운 사람은 재앙을 보면 숨고 피하지만, 어수룩한 사람은 고집을 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입는다.” (새번역).

본 잠언은 “슬기로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여기서는 미성숙을 의미)과  구분짓게 하는 삶의 기본 원칙을  관찰한 내용입니다. 전자는 재앙과 그 가능성을 보면 숨거나 피하지만, 후자는 고집부리고 나아가다가 재앙에 연루되어 화를 당합니다. 잠언은 이미 7장에서 어리석은 젊은이가 문란한 여자를 만나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따라 가는 모습을 보고,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7:22)고 선언하였습니다. 결과는 범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의 종류도 다양해서 일일이 전부 열거하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 위험의 징조를 감지하고 피하거나 미리 대비책을 세웁니다. 좋은 예가 한국계 빌 황의 헤지펀드 아키고스는 고수익을 주었지만 매우 위험한 금융상품에 투자하였습니다. 결국 2021년 내재한 위험이 드러나 빌황은 파산하고 빌 황의 펀드에 투자한 많은 금융기관들이 엄청난 손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을 감지한 골드만삭스 은행만은 재빠르게 철수하여 큰 손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본 잠언이 경고하는 가장 큰 위험은 도덕의 위험이고, 더 나아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련한 위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잠언22:4절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새번역)

본 구절의 원문은 동사 없이 7 개의 명사만 있어서 번역이 갈립니다. 번역 중 하나는 “겸손의 보상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재산과 명예와 생명들이  함께 한다”로, 다른 것은 “겸손과 주님을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다”(통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기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잠언의 겸손은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담겨있어서 세상의 겸손과 다릅니다. 이들의 삶의 초점은 탐욕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요 원죄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행하는 이들을 기뻐하셔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 하는 재산, 명예, 생명들(장수, 영생 등)을 주시는 것입니다(전2:26). 왕 솔로몬이 좋은 예입니다. 그가 왕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재판할 지혜를 구하자, 이를 기뻐하신 주님은 구하지 않은 재산과 명예도 주셨으나, 생명(장수)만은 순종을 조건으로 하셨습니다.불순종한 솔로몬은 장수의 축복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세상에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더러 있지만,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경외하지는 않습니다. 잠언의 겸손(종교적 겸손)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자각’이 담겨 있고 유대인들도 여기까지는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율법(구약성경)을 통해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

잠언22:5절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으나, 자기 영혼을 지키는 사람은 그런 길을 멀리한다.”(새번역)

모든 사람들은 부, 명예, 장수를 추구합니다. 고집부리며 살아가는 어수룩한 사람(3), 주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사람(4),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5) 모두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와 명예, 장수는 주님의 선물이요 품삯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에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4). 5절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 향하여 교훈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의 길은 온갖 종류의 도덕적 장애물(‘가시들’와 ‘ 올무들’이란 복수형로 상징)로 뒤덮혀 있습니다. 여기서 ‘비뚤어진’의 원어는 ‘익케쉬- 꼬다’로서 여인이 자신의 머리를 치장한다는 의미를 지닌 아람어 ‘아카싸’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는 여인이 자신의 머리를 꼬고 뒤틀어 치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길을 비틀어 타락과 범죄의 길로 몰고 갑니다. 그러므로 어리숙한 사람처럼 비뚤어진 사람도 어리석은 자들의 한 유형입니다. 이들의 방법으로는 주님과 이웃 사이에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부와 명예와 장수를 얻지는 못합니다. 허나, 슬기로운 자는 가시와 올무가 널려 있는 길을 멀리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한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길로 달려갑니다. 그는 주님이 주시는 품삯-재산, 명예, 장수-을 받게 되며 이웃들과 함께 행복해 합니다. 중심 키는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곤경과 위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의인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욥). 그러므로 외형적으로는 같아 보이나, 악인에게는 파멸시키는 올무요, 의인에게는 영광을 위한 시련일 뿐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4,15)

시편 139편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

본시의 저자는 다윗으로, 주님의 전지 전능과 편재를 노래한 후(1-18절), 고난 당하지만, 악인과 달리 주님의 뜻을 따른 인도를 기도합니다(19-24절). 확실히 이 시는 주님의 전지(1-6), 편재(7-12), 창조의 전능(13-18)을 찬양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시인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주님은 시인 자신은 물론, 시인의 앉고 일어섬, 생각, 걸어가는 모든 길과 눕는 것, 행위, 그리고 말을 시인을 창조하기 전에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어디나 계셔서 시인이 하늘로, 스올로, 바다 끝으로 가도 거기에서도 그를 인도하십니다. 그 주님은 모태에서 그를 지으셨고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삶을 계획하셨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묵상합니다(13-16절). 동시에 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으로 시인의 복지를 위해 심혈을 쏟고 계심을 생각하고 시인은 감격해 하면서, 악을 미워하시는 그분과 같이 거룩하려는 간절한 열망을 품게 됩니다. 이 열망은 곧 자신을 감찰하사 악을 제거해 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는 간구로 변하는데(24), 이는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기도는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동일한 신학이 주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는 문맥에서 나옵니다. 심판 날에는 밝혀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으니 제자들은 주의하여야 하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시니 아무도 두려워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눅12:1-7). 따라서 우리는 주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의를 행해야 합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139:24).

시편 140편
“주님, 악인에게서 나를 건져 주시고,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호하여 주십시오.”(1절, 새번역)

시편140-143편은 모두 기도입니다. 다양한 모습의 고난-비방, 분노, 외로움, 절망- 가운데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시는 두 개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으며(1-5, 8-11) 각 기도는 확신이 따라옵니다(6-7, 12-13). 첫번째 기도(1-5)는 악인으로부터 보호를 기도하며, 주님과 다윗의 개인적 관계(6)와 과거의 경험(7)을 근거로 구원을 확신합니다. 두 번째 기도는 악인에 대한 재앙을 기도하며,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베푸시는 주님을 근거로 구원의 소망을 갖습니다(12-13). 한편, 8-11절에 나온 악인에 대한 연속적인 재앙의 표현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9),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10), “악담하는 자는…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11). 또한 우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말로 성령님을 거역한 자는 영원한 죄에 처한다는 말씀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마12:31,32). 어떤 분은 그 악인들이 정직한 시인은 물론, 하나님까지 대적한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억지로 풀지 말고 대립되는 성경말씀은 그대로 가지고 함께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기도하게 되고 적절한 해석과 행동이 가능합니다(롬8:13).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분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분이기에, 기도 없이 일반이론을 만들어 살 수는 없습니다.“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편140:13)

매일묵상(2023/3/20-24)

잠언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31절은 30절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마병’은 고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절대병기였습니다. 창이 뚫을 수 없는 철갑을 두른 마병은 하루에 100km를 주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왕들은 철병거와 마병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고(31a), 이를 잘 아는 솔로몬 왕은 이집트의 말을 힛타이트와 아람민족에게 중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왕상10:29). 그러나 솔로몬은 전쟁의 승리는 인간의 준비에 있지 않고 주님께 달려있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싸울 날을 위한 인간의 준비와 전략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정권자는 주님이시기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사사 에훗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넘겨 20년 간 심한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여선지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명령하여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다볼 산에 집결시켰고,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00대와 보병을 이끌고 기손 강에 집결하였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내려가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락은 평야전투가 불리함을 잘 알았지만 순종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기손 강 상류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그 비가 모여 홍수로 변하였고, 시스라의 철병거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진흙에 바퀴기 빠져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락의 1만군대가 도착하여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홍수는 경험칙 상 생각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2:1-16절은 ‘부와 도덕’을 주제로 한 교훈입니다. 이미 21:30-31절에서 국가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다룬 솔로몬 왕은, 주님은 재물에도 주권을 갖고 계심을 가르칩니다. 통상 금은보화 혹은 좋은 집과 차 등으로 상징되는 재물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만, 그 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훌륭한 명성(좋은 이름)입니다. 후단은 이 명예를 갖게 되는 이유를 ‘은총=은혜로움’으로써 구체화합니다. 여기서 ‘은총’의 히브리어 ‘헨’은 궁핍한 자를 보고 긍휼히 여겨 필요한 것을 주는 은혜로운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평판을 갖게 마련입니다. 실상 좋은 이름은 지혜자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는 재물은 미덕과 상관없이 획득될 수 있지만, 명예는 미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지혜는 재물과 명예 모두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그(지혜)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3:14). 얼마 전 서울 남산 도서관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인, 이시영 선생의 6형제는 조선이 망하자 수 백억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급히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1911년)를 세우는 등 독립투쟁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시영 선생을 제외하고 다른 5형제는 광복이전에, 고문사, 병사(病死), 객사(客死), 아사(餓死)했습니다.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부 재산의 환급을 제안했으나 선생은 재산을 찾겠다고 독립운동한게 아니라며 거절하였습니다.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전7:1,새번역)

잠언22:2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인류의 역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얽혀 살아온 역사로서, 세상 끝 날까지 가난한 자는 늘 존재할 것입니다(신15:11;막14:7). 가장 부자이신 주님은 일생을 가난한 자와 어울리시면서 가난하게 사심으로 두 계층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 가운데 서로 배려하려는 사회입니다.  부자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부자가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며, 모두 피조된 인간으로서 동일한 가치와 고귀함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질투를  버려야 합니다(전10:20).  부자라고 더 행복한 것이 아니기에, 잠언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17:1)고 밝힙니다. 문제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제, 사회구조의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 때문이지 창조주 때문은 아닙니다. 따라서 2절 전단은  이들의 공동의 삶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문제점들을 전제하고, 후단은 그 해결 방법으로 주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자연히 상호존중, 배려의 태도를 갖게 되는데, 이는 모두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는 세상 지혜와의 차이입니다. 재물과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겠습니까?(27:24) 그러므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주님께서 당신의 뜻과 도덕 질서에  따라 부를 재분배하고 계심을 생각하고 그분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자족이라는 경건의 미덕은 여기서 나오는 것으로 주님을 아는 자는 인생 항해의 중심키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6:6,새번역)

시편137: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나님과 축복과 저주의 언약(모세율법)을 체결하고도 아담과 같이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벌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수였습니다(BC 586년). 이 시편을 소재로 자마이카의 레게음악 그룹 멜로디언즈는 “Rivers of Babylon(1967)”라는 히트곡을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4/4박자의 리듬과 가사의 내용이 불의에 저항하도록 힘을 줍니다. 그러나 신학적 전제가 없다면, 본 시편은 이방 땅에서 고향을 그리면서 정복자를 증오하는 힘 없는 약자의 노래입니다. 특히 시의 8-9절은 바벨론을 향한 무자비한 복수심을 보이는데, 30년 후 페르샤가 바벨론을 정복할 때도 시인이 염원한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9)-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선지자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바벨론에 대한 복수를 주님 손에 의탁한 것 뿐이라고 말하나, 시인의 증오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후세의 교훈을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말, 생각, 그리고 행동도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당연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범죄한 이들을 흩으셔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회당을 세우고 “말씀과 기도”의 삶을 이어가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죽고 부활 승천하여 복음을 완성하시자, 사도들에게 회당이야말로 복음 전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볼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시편138편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45편까지8개의 시들은 모두 다윗이 그 저자입니다. 13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감사와 신뢰를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경험하자, 비록 고난 중에 있었지만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품(1-3), 세상의 미래(4-6)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아직도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의 구원과 안전을 위해 기도로 호소합니다(7-8). 사무엘하5:17-25절이 시의 배경으로 언급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자 모든 블레셋 민족이 모여 르바임 계곡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위세를 본 다윗은 “블레세인들을 치러 올라갈까요? 주께서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까?”하고 묻자, 주님은 “올라가라 내가 확실히 네 손에 넘겨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확답을 받은 다윗은 용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도망갔고, 전쟁터는 ‘신들’의 쓰레기 더미로 변하였습니다. 기도 응답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기도의 장소는 새롭게 주님의 계시를 깨닫는 자리이며(2), 갱신의 장소이고(2-3), 세상과 그 왕들을 포용하는 비전의 자리요(4),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로 그 장소(7-8)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같습니다. 신실한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면, 주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그 후에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공급하심을 신뢰하게 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심을 힘있게 선포하게 됩니다.“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시편138:7)    

매일묵상(2023/3/13-17)

잠언21:28
거짓 증언하는 사람은 망하지만 진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다.”(공동번역)

본잠언은 거짓 증인과 진실한 증인을 대조시켜, 바른 증언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증인’이란 특정의 사실에 대하여 증명하는 사람이며, ‘증언’이란 그가 경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단의 ‘진실한 증인’의 원문은 ‘들은 자’로서, 어떤 상황을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를 가르킵니다. 목격자의 증언은 확실하기 때문에,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개정개역)로도,   ‘진실한 증인의 말’(공동번역)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한, ‘힘이 있다’는 말은 히브리어 ‘라네차흐’를 번역한 것이며, 이 단어는 ‘탁월하게’와 ‘영원히’의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문맥상 후자가 어울립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진실한 증인의 말은, 거짓 증인의 말이 탄로나고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운명과 달리 영원토록 효력이 지속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법정은 증언에 의존하였습니다. 만약 증인이 거짓으로 말한다면 판결이 그릇될 것이고, 그 해악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나봇의 살해사건).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헌법에 해당하는 십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출애굽기(23:1,2), 레위기, 신명기에도 반복하여 경계합니다. 특히 레위기24장에는 아버지는 애굽인이요, 어머니는 이스라엘 여성(슬로밋)인 어떤 자가 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자 그를 들은 증인들의 말에 근거하여, 재판하고 이스라엘 회중은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레24:10-23). 한편, 대한민국도 형법에 위증죄(152조)를 두고 처벌할 정도로, 법정에 선 증인의 말은 진실하여야 합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언19:5).

잠언21:29
악인은 자기의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자기의 행위를 삼가느니라

본절은 24절 이후 등장하는 악인의 유형들, 즉 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 중 그 마지막입니다. ‘굳게 한다’에 해당하는 원어 ‘헤에즈’는 ‘강하게 하다’입니다. 만약, 이 단어가 ‘얼굴’과 함께 사용되면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으로, 악인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강하게(굳게)한다’는 표현은 상대방을 속이려고 얼굴을 꾸미는 모습이나, 다른 사람의 현명한 충고를 무시하는 완고함을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후단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후단의 ‘삼간다’의 원어는  사본에 따라 다릅니다. 하나는 ‘케티브- 확립하다’와, 다른 하나는  ‘케레- 분별하다’입니다. ‘케티브’를 따르면, 겉과 속이 다른  악인과 달리, 의인은 신실하게 정도를 걷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경우 “악한 사람은 얼굴이 뻔뻔스러우나, 정직한 사람은 신실하게 살아간다”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케레’를 따르면, 의인은 자신의 길을 분별하기 위해 타인의 충고도 살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 ‘얼굴을 굳게 한다’는 의미는 완고함이며, 본절은 ‘악한 사람은 완고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잘 살핀다”로 번역됩니다. 악인은 완고하여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24). 이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악인의 완고함과 의인의 사려깊음을 대비시키는 것이 본절의 취지라 볼 때, ‘케레’를 따른 후자가 좀 더 낫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려깊음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므로 주님의 뜻을 먼저 고려하기 마련입니다. “귀를 기울여서 지혜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의 가르침을 너의 마음에 새겨라.”(잠언22:17,새번역)

잠언21:30
어떠한 지혜도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새번역)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이며, 30-31절은 “주님의 절대 주권을 생각하라”는 가르침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30절은 주님을 무시한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는 일반적 선언이며, 31절은 전쟁에서의 구체화입니다. 잠언에서 통상 지혜를 말할 때, 거기에는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잠1:7). 따라서, 주님을 대항하는 지혜는 타락한 인간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30절은 29절 전단에 언급된 악인의 길, 즉 뻔뻔하게 하나님과 그분의 교훈을 무시하는 악인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고, 29절 후단의 지혜자라 할지라도 주님과 독립하여 자신의 지혜로 행한다면 실패함을 선포합니다. 북왕국과  황금송아지 예배를 동시에 창시한 여로보암 왕이 앞부분의 예이며,  반역한 압살롬에게로 돌아선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이 뒷부분의 예입니다. 두 명 모두 실패하여 몰락하였습니다. 한편,  ‘지혜-호크마’는 제사장의 옷이나 금속공예 기술 등 ‘전문적 기술’을, ‘명철-테부나’는 ‘분별’을 본질로 하는 ‘실용적 통찰력’을, ‘계획(모략)-에차’는 ‘지혜로운 계획’(출18:19)을 말하나, 이는 강조를 위한 문학적 기교일 뿐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을 부리려면 승마 기술이 필요하듯이, 본 잠언은 인간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다만, 제대로 된 시각을 갖고 모든 것을 생각하라는 경고입니다. 즉 전지전능 하신 주님 앞에 인간의 능력은 하찮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고전3:19,새번역)   

시편135: 1절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새번역)

120-134편까지 ‘순례자의 노래’가 끝나고, 이어지는 두 편의 시-135편과 136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안전하게 성전에 도착한 순례자들의 마음에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양으로. 시편은 적절하게 배열되었습니다. 135편의 구성입니다.
A1 (1–4) 선택하시는 주님(야훼) 찬양
B1 (5–7) 창조주 주님(야훼)
C (8–14) 주님(야훼)의 행적
B2 (15–18) 우상숭배의 어리석음
A1 (19–21) 함계 계시는 주님(야훼) 찬양

135편은 먼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1-4). 그런데 그 주님은 위대한 창조주이시며(5-7), 야곱의 자손들을 큰 권능으로 애굽에서 이끌어 내사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8-14). 이 같이 언약에 신실하신 권능의 주님에 비하여 이방의 우상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헛된 것들이며, 따라서,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짓입니다(15-18).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마칩니다(19-21). 본시에는 주님을 찬양하는 분명한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찬양과 순종의 메시지가 울려퍼집니다. 주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 주권자, 구속주되시기에 찬양을 받으셔야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헛된 우상들 믿고 불순종한 모든 왕과 이방은 멸망 당하였습니다. 이런 결론 하에,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배로 초청하고, 또 예배로 마치면서 일관된 찬양의 구조를 우리 삶에 구축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시편136:1절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새번역)

본시(26절)는 매 절마다 창조, 이스라엘의 구속, 그리고 온 인류의 보존에 깊이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하고, 이는 그분의 영원한 인자하심 때문임을 반복하는 일종의 돌림노래입니다. ‘인자’의 히브리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후렴을 통해, 시인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애굽에서 구속,광야의 여정, 가나안 정복 등)가 형성되는 순간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임을 깨닫고 ‘인자하심’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인류에게도 적용되기에, 시인은 양식을 주사 육체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만(25),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요3:16). 시의 구성입니다.
A (1-3)도입 찬송-신들의 하나님
B (4-9)창조를 찬송
C (10-24) 이스라엘의 구속을 찬송
B′ (25)창조를 찬송
A′ (26)맺음 찬송- 하늘의 하나님

시에서 강조되는 ‘인자=사랑’이 주님 속에 없다면, ‘신들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지위나, 창조의 경이로움, 구속의 능력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능력과 많은 지식을 갖고, 구제를 심히 많이 하여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고전13:1-3).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은사를 과시하려는 고린도교인들을 경계합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의 연단을 받을 때 고난 역시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의 한 대목임을 잊지 말고,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5:3-5).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

매일묵상(2023/3/6-10)

잠언21:25절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가다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로 덮힌 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그 게으른 자의 ‘열망’ 속에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일하지 않는 그가 소득과 식량이 있을리 만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밭의 소유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24:30-34). 그러므로 일하기 싫어하는 욕망이 게으른 자를 죽인다는 잠언의 교훈은 타당합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신체적 죽음은 물론, 영원한 심판까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게으름이란 잠언은 물론 성경 전체를 통해 큰 죄악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실로 게으름은 많은 죄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게으른 자도 음식과 거처에 대한 필요와 욕망은 크지만, 소득이 없어 이웃의 소유를 탐내게 되고, 그에 따른 범죄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게으름 때문에 자녀 교육 시기를 놓치게 되면,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게 됩니다. “자녀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도둑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 어느 유대 랍비의 말처럼, 교육과 기술 없이 자란 자녀의 장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게으름(나태)’이 고대의 7가지 치명적인 죄들의 목록에 들어 있고, 이를 경계하는 잠언도 20-30 구절이나 됩니다. 문제는, 게으른 자는 많은 핑계를 가지고 있으며(22:13), 지혜롭게 판단하여 부지런히 살아가는 자들보다 자신을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26:16). 심히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이 같이 큰 죄악이라, 게으른 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잠언12:24새번역).

잠언21:26절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

본 잠언에 나오는 ‘어떤 자’는 후단의 의인에 비추어 악인이고, 25절과 연관하여 보면 그 악인은 ‘게으른 자’의 원초적 모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악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어 원문을 ‘종일토록’이란 단어로 시작하고,  ‘욕망하다’는 동사 ‘아바’에 이어 ‘욕망’이란 명사를 또 써서 그 악인의 탐욕을  강조합니다. 이로써, 악인은 게으름에서 더 나아가 탐욕이라 본성을, ‘의인’은 부지런함은 물론 아낌 없이 베푸는 본성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날까요? 주님을 경외하느냐 여부입니다. 사실, 사람마다 좀 더 나은 집, 음식, 명예, 건강, 지식 등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따라 그 욕구를 재조정시켜, 자신과 이웃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할 줄 아는 덕목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의인은 지혜자입니다. 그는 빈부가 섞여 살도록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잠언22:2), 주저하지 않고 합당한 자에게 베풀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와 달리, 탐하는 자는 어리석어,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배를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의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건이 일어나 밝힙니다. 고아와 과부처럼 힘 없는 자의 법적 권리가 문제가 될 때입니다(29:7). 악인은 그들의 권리를 수탈하여 불법적 이익을 도모하지만, 의인은 자신의 사적 이익에 반하더라도,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줌으로써, 가정, 교회, 사회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잠언21:27
악인의 제물이 역겨운 것이라면, 악한 의도로 바치는 것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새번역)

이 잠언의 ‘악인’은 문맥 상 ‘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 탐하는 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성취하려고 살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제물을 역겨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악인이기에  제물조차,  남을 속이거나, 약자를 수탈하거나, 음란하고 더러운 방법 등을 통해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은 너무나도 싫어하셔서 받지 않으시겠다고 모세를 통해 못박으셨습니다 (신23:18). 하물며, 그 악인이 악한 의도로 바치는 제물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악한 의도라 함은 공동체를 해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한 계획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제사가 가능하겠습니까? 먼저 이방세계의 신 관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신’이란 인간과 같은 욕망을 가진 힘센 존재일 뿐입니다. 신은 인간으로부터 제물을 받고 싶어하니, 제물을 바치고 그 대신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달라는 일종의 거래요 뇌물입니다.  이 같은 이방의 제사 관념은 성경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헌금, 찬송 등은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배 드리는 자의 삶과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야 기도와 제사가 열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거부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창4:5).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전5:1,새번역).

시편133: 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3행으로 이루어진 본시는 다윗의 작품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형제들이 동거하며 화목한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제사장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과 옷깃에 흘러내리는 모습과,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 헐몬(2814m)에서 생성된 이슬이 바람을 타고, 240km를 날아와 시온 산(754m)에 내리는 모습에 비유합니다(2). ‘거기서’ 다윗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발견합니다(3). 본시에 나오는 ‘형제’를 좀 더 범위를 넓힌다면, 이스라엘 12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 40년은 물론 가나안 정복 후에도 이들 사이에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였지만, 다윗 왕에 이르러 질서가 잡히고 화평이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민족은 서로 반목하다가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이스라엘 민족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상징임을 아는 것입니다. 둘의 차이는 ‘마음의 할례’여부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님과 보조를 같이 하며 ‘의의 열매’(빌1:11), 혹은 ‘성령의 9가지 열매’(갈5:22-23)를 맺고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 조선인, 헬라인, 중국인, 종, 상전, 남자, 여자 모두가 모여들어 한 주님을 섬기고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요10: 28;11:25,26). 이것이 본시에서 말한 영생의 이상이 성취된 모습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시편134: 1절
“밤에 주님의 집에 서 있는 주님의 모든 종들아, 주님을 송축하여라.(새번역)

본시는 120편에서 시작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마지막 편이며, 모두 3행입니다. 순례자들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여, 밤낮으로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1). 순례자들은 그들에게 주님을 송축하라고 요청합니다(2).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으라고 화답합니다(3). 각 절마다 ‘축복을 받으라’는 단어 히브리어 ‘바락’이 등장하며, 개정개역과 새번역은 ‘송축하라’(1,2), ‘복을 내려 주시기를’(3)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말은 본시의 주제어입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송축하라’고 말하나, 3절에 이르면 인간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성경학자 키드너는 ‘하나님을 축복(송축)하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심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려면, 그를 제대로 된 존재로 만드신 후, 그에게 없는 것을 주셔야만 한다”고 말하여, 유한한 인간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한량 없이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잘 대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길과 판단을 측량할 수 없지만 축복의 발원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시온입니다.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 수 있는 특정 장소 예루살렘으로서, 참된 시온 산인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히12:22-24). 시온 신학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계명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의 입술에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축복은 심히 가깝습니다. 시편133편의 축복이 떠 오릅니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시편133:3b,새번역)

매일묵상(2023/02/27-3/3)

잠언21:22절
“지혜로운 사람은 용사들이 지키는 성에 올라가서, 그들이 든든히 믿는 요새도 무너뜨린다.”(새번역)

지혜는 힘보다 낫습니다. 용사들과 요새를 소유한 성주는 매우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이나,역사는 그렇지 않은 실례들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갈공명이나 사마중달과 같은 지략가의 탁월한 전략 앞에서는 험준한 요새도 소용없습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가, 바벨론의 함락입니다. 수 많은 용사들이 지키고, 유부라데스 강이 해자를 두르고, 길이 27.2Km, 높이 12미터의 이중의 벽으로 둘러싸인 바벨론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 벨사살은 포위하고 있는 페르샤 군대를 무시하고, 술잔치를 베풀며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를 새겼습니다. 직역하면, “세었다 세었다 무게를 달았다 그리고 나누었다”이며, 의미는 “네 시대가 끝났고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나타났으니 네 나라를 메대와 바사에게 주었다”였습니다.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단5장). 헤로도터스와 크세노폰에 따르면, 메대와 바사(페르샤)군대가 강의 흐름을 바꾼 뒤 성을 점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이후 대포와 총이 발명되자, 용사니 성이니 하는 것은 전쟁에서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기술패권 전쟁에 돌입하였습니다. 중국은 인구와 시장을 믿지만, 기술력이 월등한 미국의 승리가 예상됩니다. 그러나 기술과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지혜이며,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기도하고 노력할 사명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잠언3:21).

잠언21:23절
“입과 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새번역)

만일 누가 “막대기와 돌로는 내 뼈를 꺾을 수 있으나, 말로는 결코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을 것이다”고 장담한다면,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말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의 힘을 깨닫고 매우 조심하며, 듣는 자에게 덕을 세우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몇 가지 격언이 있습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이 주인이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당신의 주인이 된다”(스코틀랜드), “아이의 손과 바보의 입은 늘 열려 있다”(스위스), “황소는 뿔로 묶이고 사람은 혀로 묶인다”(불가리아). 야고보서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3:6)고 경고합니다. 걷는 법을 배웠듯이, 바르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른답게 말하기”(강원국)라는 책은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정신이상자(바벨론 왕)가 되거나 목숨을 잃은 왕(헤롯 아그립바1세)을 언급합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궁 위에 올라 자신이 이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자랑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신이상자가 되어 7년을 짐승과 함께 살았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왕복을 입고 연설할 때, ‘신의 소리’라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도 침묵하여 벌레가 창자를 먹어 죽었습니다 (행12:21-23). 사람의 말은 마지막 날 그 자신을 심판하는 근거가 되므로(마12:36,37), 말하기 전에 준비하고 지혜를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141:3).

잠언21:24절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을 오만한 자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우쭐대며 무례하게 행동한다.”(새번역)

21:20-29절의 주제는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멸망’이며, 20-23절과 24-29절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자(20-23절)는 지혜자(의인)의 성공과 안전을 다루고, 후자( 24-29절)는 악인의 4 유형-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과 운명을 교훈합니다. 24절은 악인의 첫째 유형인 ‘오만한 자’를 등장시킵니다. ‘오만한 자’의 원어는 ‘레츠’로서 ‘입을 삐죽거리다’ ‘업신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을 업신여기며 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오만한 자’가 우쭐대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중요감’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지혜자, 계시된 진리를 무시하는데, 하나님 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며, 자신의 판단은 지혜자나  진리 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의 ‘육신에 속한 사람’의 전형으로, 그의 종말은 ‘사망’입니다(롬8:5-8). 이에 반해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 인자, 사랑, 겸손, 근면과 같은 덕을 쌓아가고, 이웃과 화목합니다. 이솝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닭장에 있는 두 마리 수탉이 암탉들을 놓고 서로 싸워 한 놈이 승리하였습니다. 승리한 수탉은 기쁨에 젖어 ‘꼬끼오’를 외치며 고개를 쳐들었을 때, 마침 공중에 배회하던 독수리가 내려와 채어갔습니다. 이제 암탉들은 패배한 수탉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 베푸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벧전5:5).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잠언15:33,새번역)

시편131:2절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새번역)

시인 다윗은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어린아이에 비유하였습니다. 특히 ‘젖뗀 아이’를 두 번 반복하여 그 평온에는 만족이 들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먹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시인 역시 같았습니다. 다윗이 이런 만족의 경지에 이른 것은 왕이었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범죄하여 왕국과 가정에는 많은 풍파가 있었습니다. 압살롬에게 쫓겨 그는 울며 맨 발로 걸어 길르앗으로 도망쳤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전쟁의 지혜, 그리고 용감한 부하들을 통해 반란을 진압한 쓰라린 경험도 있습니다. 인생의 영욕을 모두 다 겪은 다윗은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1절이 그 비결을 말합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라는 이기적인 잔소리나, 초조와 두려움이 주는 기만적 속박으로부터 자유이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때 나오는 능력입니다(3). 신약에서는 바울이 그런 은혜를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2:3절은 “이기심이나 자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고 명령하며, 4:11절은 “내가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빌4:13). 부, 지식, 권력, 지위, 명예, 건강 등을 자랑하는 이 세상은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약4:14). 따라서 우리는 주신 은혜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시편131:3,새번역).

시편132:12절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본시는 그 옛날 다윗 왕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를 옮겨 안치한 역사적 사건(1-9)과 주님이 다윗에게 한 영원한 왕위의 언약이 배경입니다(10-18). 먼저 100년 이상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시온에 안치한 왕 다윗과 이스라엘은 매우 기뻤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삼하6:13-15). 다윗 왕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전 건축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주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선지자 나단을 보내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다윗의 언약이며(삼하7:11-14), 본시의11,12절에 요약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온은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이며, 예루살렘의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를 맺습니다(13-18). 다윗이 죽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습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 자손은 “다윗의 언약”과 “시온 신학”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성전을 우상화하다가 성전과 함께 멸망 당하였습니다. 성전은 메시야를 상징하는 건물일 뿐이며(요2:19-22), ‘다윗 언약’의 요건은 주님의 뜻을 행해야 하며, ‘시온 신학’의 참 뜻은 다윗이 상징하는 참된 왕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시편110:1-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갈4:4). 할렐루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