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2/20-24)

잠언21:19절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9절과 19절은 동일한 내용이나, 표현상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두 구절은 모두 ‘보다 낫다’란 구문, 남편과 다투는 아내의 행동, 그리고 단락 분할의 기능은 같습니다. 그러나 19절의 여인은 성까지 내며, 남편을 위해 ‘움막’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가 등장합니다. 이는 본 구절의 남편의 처지가 9절에 묘사된 남편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합니다. 광야는 황량하며 고독하며 위험하고, 삶의 수단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욥은 학대받는 가난한 자를 거친 광야의 들나귀에 비유합니다(욥24:5). 그 가난한 자는 ‘소나기에 젖고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입니다(욥24:8). 따라서, 솔로몬은 잔소리하는 아내를 둔 남편의 처지를 그 학대받는 가난한 자와 유사하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은 남편을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 여인은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지혜를 모색해야 합니다.  ‘우르사’의 광고 모델로 잘 알려진 백일섭(1944년생) 씨는 아내와 오랫동안 대화가 단절되었고, 아들에 따르면 심히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는 배우 아버지로서 집안에서 대우를 받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던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2017년에 졸혼을 선언하고 오피스텔을 얻어 별거하였습니다. 그는 혼자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생활이 자유롭고 마음이 편하다고 토로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을 주님과 교회 간의 비유임을 밝히며, 좋은 부부관계를 위한 지침을 제시하기에 유념해서 간직해야 합니다(엡5:22-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5:33).

잠언21:20절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21:20-29절의 주제는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멸망’이며, 20-23절과 24-29절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20-23절은 지혜자(의인)의 성공, 승리, 그리고 안전을 다루며, 그 중 오늘 본문(20)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비교합니다. 전단에서 ‘귀한’의 원어는 ‘네흐마드’로서 ‘기뻐하다, 열망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귀한 보배’는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보물을 뜻합니다. ‘기름’이란 손님의 머리나 의복에 부어 환대를 표시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며, 흔히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슬기로운 경제 활동을 하여야 이런 ‘귀한 보배와 기름’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반면, 미련한 자는 규모 없이 살고 당장의 쾌락과 허영에 몰두하기에, 본래 소유한 재산마저도 탕진합니다. 본문의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잘 표현해 주듯이, 미련한 자는 마치 음식을 한 입에 털어넣듯이, 순식간에 재산을 없애버립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올리며, 통상 5만달러를 친척들로부터 받습니다. 따라서 13살부터 돈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하기에, 유대인들 가운데 부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부자는 부라는 수단을 통해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운동,여행, 일과 같이 경제활동 역시 일찍 시키면서, 주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너의 재산과 땅에서 얻은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너의 포도주 통에 햇포도주가 넘칠 것이다.”(잠언3:9,10, 새번역)

잠언21:21절
“정의와 신의를 좇아서 살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새번역)

21절은 20절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자’의 경제적 축복의 원인을 밝힙니다. 전단은 지혜자의 집이 보배와 기름으로 끝없이 채워지는 이유는 그가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살기 때문이며, 후단은 그런 자는 단순한 경제적 보상을 넘어 생명, 번영 및 사회적 명예까지 얻게 됨을 가르칩니다. 이는 지혜자(의인)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재물은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주어진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22:4절은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새번역)라고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물론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정의’의 원어는 ‘체다카’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바른 삶을 말하며, ‘신의’는 ‘헷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듯이, 인내와 관용으로 이웃을 선대하는 삶을 말합니다. 또한 ‘쫓아서’의 원어는 ‘라다프’로서 ‘뒤따르다, 추적하다’를 뜻합니다. 이 동사는 흔히 전쟁이나 침략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뒤쫓을 때 사용되어, 아주 강력한 결의와 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산다’는 말의 함의는 돈을 벌듯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듯이, 그런 덕목을 실천하려고 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써, 그리스도 제자들의 삶의 기본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앞에 두고, 우리의 이익과  세상 필요는 그 다음으로 두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3). 본 잠언에 대한 훌륭한 주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시편130:1,4절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1)…..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4).”(새번역)

시편 중 참회시는 7개이며, 본시는 6번째입니다. ‘깊은 물 속’에 빠진 시인은 구원을 부르짖고, 용서와 구원(속량)의 확신을 향해 착실히 나아갑니다. 시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참당한 상황에 처했습니다(1). 이제 남은 소망은 오직 하나,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부르짖습니다.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도달할 때까지 이 시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시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누구든지 깊은 고난에 처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 대신 눈에 보이는 다른 피조물(권력자, 부자, 재물 등)을 의지하기 쉬우나, 구원은커녕 그들에게 이용당할 뿐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시인은 이를 고백하며 주님의 용서를 구합니다(3,4). 죄악을 지켜보시는 주님 앞에서 누가 감히 결백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천 마디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4). 시인은 구원하실 주님을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리면서(6), 이스라엘 전체로 시선을 돌려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시는’ 주님을 소망합니다(8). 시인이 고대하는 주님은 어느 날, 대가를 지불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의 바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시편131:1절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새번역)

본시는 다윗의 시로, 모두 3절이며, 오늘은 1절만 묵상하겠습니다. 중년에 접어든 다윗 왕은 흔히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죄를 버렸습니다. 하나는 교만이요, 또 하나는 주제넘는 오만입니다. 교만은 타인을 과소평가하지만, 오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둘 다 패망의 길입니다. ‘교만’에 대한 해답은 빌립보서2:5-8절의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사 종의 형체(사람)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이렇게 타인을 배려하고 겸손합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타인을 내려다보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기실 부자만은 아니지요.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합니다(마19:26). 한편, ‘오만’에 대한 대답은 빌립보서 3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적 의, 즉 모세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자신의 의를 버렸습니다. 그 의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의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할례, 안식일, 음식규정이 대표적입니다. 이때문에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였습니다(갈3:2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 달려갔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매일묵상(2023/02/13-17)

잠언21:16절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명철(明哲)’이란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뜻입니다. 원어는 ‘분별력 또는 뛰어난 식견’’을 지칭하는 ‘세켈’로서, 지혜(호크마)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다윗이 남편 나발을 죽이려고 올라올 때 급히 떡과 포도주를 마련하여 영접을 나간 아비가일의 모습에서 ‘세켈’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명철)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9:10)이라고 교훈합니다. 그렇다면, ‘명철의 길을 떠난다’는 것은 만유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며 모든 도덕과 윤리의 원천이신 주님과 상관없이 살겠다는 의도이고, 타락한 아담의 원죄의 발현입니다. 당연히 악(자기존중)으로 치닫게 되고, 그 귀결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생명이시기에, 빛을 떠나는 순간 어둠 속을 다니게 되고, 생명을 버리는 순간 사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망의 회중에’ 살게 됩니다. 본 잠언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고 교훈한 이유입니다. 여기 역설이 있습니다. 이탈자는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서 떠났지만, 그의 마지막 도착지는 죽음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죽지만, 여기서의 죽음은 때 이른 죽음이나, 죽은 뒤 찾아 오는 영원한 죽음(심판)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이것을 밝히 선포합니다. 사망의 핵심은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삶이고, 생명의 핵심은 주님을 알아가는 명철(지혜)의 삶입니다(요17:3). 그러므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것은, 명철의 길을 떠난 신약의 예입니다(딤후4:10).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28:28).

잠언21:17절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사람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
(새번역)

잠언은 가난하게 되는 여러 원인을 알려 줍니다.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게으름’이지만, 17절은 과도한 지출을 또 다른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전단은, 쾌락에 사로잡혀 사치와 향락을 쫓으면, 결국 빈곤하게 된다는 일반적인 진술이며, 후단은, 그 일례로서 오늘날 우리가 ‘파티’라 부르는 여러 축하 행사를 적어 놓았습니다. ‘술과 기름’은 이 당시 사치스러운 향연을 위해 이용되는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술이야 지금도 파티에 늘 등장하는 요소이지만, ‘기름’은 손님의 머리나 의복에 부어 환대를 표시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며, 흔히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은 술을 반대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적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의인 노아도 술에 취해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왕 르무엘의 어머니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 것을 아들에게 훈계합니다. 왕의 지위에 앉아 술 때문에 법을 잊어버리고 송사를 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31:4,5). 한편, 잠언은 정당하게 모은 재산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밝혀줍니다(10:22). 다만, 그 부로 인해 교만해져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으려고 하는 그 자세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향락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없애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은 한 번 떠나면 다시 모으기 어렵습니다. 본 잠언은 전도서9:7-9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솔로몬은 향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시고,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며 열심히 일하도록 권고합니다. 성경적 삶은 고행도 방탕도 아닌 감사와 경건의 삶입니다“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딤전5:6).

잠언21:18절
“악인은 의인의 속전이 되고 사악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본 잠언은 악인의 계획과 행동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전단의 ‘악인’은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되며, 공동체에 적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자를 지칭하고, 후단의 ‘사악한 자’라 함은 악인의 한 유형으로 인간관계에서 신실치 못한 사람(배신, 속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거짓의 함정에 빠뜨려 멸망시키려는 악인의 계획을 돌려서, 의인은 구하시고 그 대신 그 악인이 자신의 덫에 걸려 멸망케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그 섭리의 집행자는 왕 같은 지도자들로서,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샤 왕 아하수에로가 그 좋은 예입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의 고관으로서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몹씨 미워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한 바 있지만, 자신의 질녀가 황후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건 진행 중에 하나님의 섭리로 모르드개의 선행이 밝혀지고, 뒤 이은 황후 에스더의 고발로 하만은 결정타를 맞습니다. 격분한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장대에 하만 자신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 기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첫째, 모르드개의 선행입니다. 그는 왕의 암살을 막았으나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에스더가 가진 왕비라는 합법적 신분입니다. 이 두 요소는 하나님의 섭리의 테이블이 돌아가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하시면서 의인을 보호하고 계심을 믿고, 우리 사회에 인정되는 합법적인 신분을 갖도록 성실히 일하면서, 묵묵히 선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4:43)    

시편128:1절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새번역)

경건한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 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확립합니다. 그의 삶에 보이는 참된 행복의 요소를 시인은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경외(하나님에 대한 바른 관계,1a)와 순종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습관들,1b), 그리고 수고한 만큼 받는 번영입니다(2). 뱀은 “너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창3:5)라며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키자, 인간은 “각기 제 길로 갔고”(사53:6),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경건한 자의 삶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어 시인은 그의 가정으로 가 보았습니다. 가정의 중심에는 신실한 아내와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장래이며(3), 경건한 가정은 공동체의 견고한 구성원입니다(127:4-5). 진실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4). 만약, 경건을 한 사람이나, 한 가정에만 맞추면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시인은 신실한 자들의 모임인 시온, 즉 이스라엘로 그 눈을 돌립니다. 그곳의 평안, 번영, 축복은 경건한 자와 그 가족의 행복 조건이기에(5), 시인은 이스라엘의 평강을 구하며 시를 맺습니다(6). 신약에 이르면, 주님을 믿는 신실한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고, 영적 이스라엘로 불리웁니다 (갈6: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간에 장벽을 쌓지않고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 영적 예루살렘의 참된 시민임을 보여줍니다 (히12:22이하). 그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한 소망과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엡4:2-6).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편128:3).  

시편129:1절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129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4)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 (5-8)하나님의 심판을 기도. 1-4절에서 시인은 고난과 구원을 회상하고, 5-8절에서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침략을 많이 겪었으며, 매우 위협인 순간들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의로운신 주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몰아내신 구원을 여러 번 체험하였습니다 (4). 주님은 결코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은 이집트 왕국, 늘 괴롭혀온 블레셋, 무섭게 압박한 앗시리아,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시킨 바벨론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은 보존되었습니다. 지금 시인은 원수들의 심판을 위해 기도합니다(5-8).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일시적이며(6), 성공하지 못하며(7), 이웃의 호의조차 받지 못하고, 축복의 공동체로부터 배제될 것입니다(8). 물론, 여기서 시온이란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지만, 그 옛 언약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함께 모이는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이미 끊어진 옛 언약에 충실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시인이 드린 심판의 기도는 그들 위에도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 해석을 통해 영생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매일묵상(2023/2/6-10)

잠언21:13절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13절은 10절에 언급한 악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귀를 막고”라는 표현은 무자비한 자의 악한 성품을 은유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런 행동을 통해 악한 자란 의로움이 결여되어 있고, 정의와 자비에 무감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생생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악한 사람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해보복법이 작동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후단은 이 교훈을 위해 ‘부르짖다’와 ‘듣다’의 동사 둘을 사용하면서, 악인이 곤경에 빠졌을 때 이웃과 하나님에게서 모두 무시당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본 잠언의 배경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이 제일 타당합니다. 성경의 예는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마태복음18:23-35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가르침의 비유입니다. 한 임금이 종들과 결산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갚을 재산이 없어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절망한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간청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풀려난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의 간청에 귀를 막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자, 그를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야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겼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교훈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35).

잠언21:14절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품 속에 넣어 주는 뇌물은 격한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절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해석입니다.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외부에 과시하지 않고 조용히 건네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은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데, 심지어 뇌물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효과가 있기에, 잠언은 지혜로운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견해입니다. 성경의 예로, 야곱이 20년만에 돌아올 때  격분한 형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예물을 보냈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격분하자, 신하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화목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성공하여 헤롯과 화해하였으나, 헤롯은 백성 앞에 연설 후 재앙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이 ‘신의 소리’라고 크게 부르짖었을 때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유였습니다(행12장;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다음으로, 부정적인 해석입니다. 잠언은 정의를 굽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뇌물공여를, ‘품 속에 넣어 준다’는 표현을 써서, 뇌물(선물)을 건네는  은밀한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통상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선물은 분명, 뇌물로서 정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13절과 함께 생각한다면, 평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악인이, 위기의 상황을 맞아 뇌물을 써서 권력자의 분노를 잠재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두 견해 모두 타당하여, 주고 받는 사람들의 의도, 때와 장소 등을 고려하여 선악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잠언의 제자는 가장 좋은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16:7, 새번역)

잠언21:15절
“정의가 실현될 때에, 의인은 기뻐하고, 악인은 절망한다
.(새번역)

본 잠언은 정의의 실현이 의인과 악인에게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교훈합니다: 의인에게는 기쁨이요, 악인에게는 절망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은 악인에 대한 의인의 승리를 보장하시는 분으로, 재판장과 같이, 정의가 집행되도록 모든 과정을 거치게 하신 뒤 마침내 승자의 기쁨을 의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섭리의 과정에는 주로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인식 여하에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주님이 사용하시는 종(도구)들이며, 이를 위해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십니다(21:1).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29:26,새번역)는 잠언도 같은 취지입니다. 이 반면, 정의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집행될 때, 사회적 약자를 압제하고 속여서 재물을 취득한 악인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른 판결을 받으려면, 주님께 그 사건을 의뢰하고 주님이 정하신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길’은 우리가 머물러야만 하는 강력한 산성이며, 정의를 베푸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늘 와서 호소하자, 이에 괴로워하는 불의한 재판장조차 원한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하셨습니다 (눅18:1-8). 그러므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야훼의 길을 따라 곧게 살면 친히 힘이 되어주시지만 나쁜 짓을 하면 망하게 하신다.” (잠언10:29,공동번역)

시편 126: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역사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것을 생각하며 감개무량해 합니다(1-3). 그러나 영토는 이전과 같지만 지배자는 페르샤 제국이고, 여러 이민족들의 비방과 공격, 그리고 자연재해와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였습니다(스1-6장).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1,000년 전 출애굽 당시도 그러하였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넜고, 큰 기쁨에 차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광야의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이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하니, 주님의 능력은 여전히 절실합니다. 기쁨은 과거의 사건이고, 눈물이 현재를 점령하면서, 미래가 걱정이 됩니다. 주님께서 과거와 같이 지금 행동하신다면! 그런 열망에 사로잡혀, 시인은 네게브의 와디(건천)에 물이 흐르도록 기도합니다(4). 만약 주님이 비를 내리시면 메마른 시내는 갑자기 많은 물이 흐를 것이고, 그을린 땅은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엄한 현실에 직면하자,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추수의 비유로 그것을 풀어내립니다. 일전에 큰 능력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은 씨 뿌리는 힘든 노동과 이 노동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비로서 곡식을 수확할 수 있으며, 그 때에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5-6).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 때문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126:6,새번역)

시편 127: 1절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새번역)

127편은 일의 3 분야, 즉 집, 도시(1), 그리고 가정(3-5)을 들어, 주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단언합니다. 전문가들은 여러 문제를 토론하며 해법을 제시하나,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빼놓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집, 도시, 그리고 가정에 대한 바른 이해도, 바른 세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1-2절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서, 그분이 일하시도록 하고 너는 가서 휴식 있는 삶을 즐기라”고 제안합니다. 성경에서 휴식의 반대는 일(work)이 아니라, 근심 걱정 등으로 제대로 쉬지 못함을 말합니다. 3-5절이 이런 잘못된 태도를 교정합니다. 주님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간의 활동을 정하셨기에, ‘태를 여는 것과 닫는 것’ 역시 주님이시며 (창29:31;30:2), 인간은 그분의 대행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우리의 성취물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입니다(3). 집(가정)을 세우는 것과 성을 지키는 것도 같습니다(1-2). 모든 삶은 충만히 살아야 합니다. 즉, 삶이 주는 모든 기쁨을 누리며, 성공여부에 대한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책임과 의무를 다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각 사람에게 그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군인(파수하는 일), 건축가(집짓는 일), 주부(살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즐거움, 고된 일, 그리고 근심없는 휴식으로 특징짓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매일묵상(2023/1/30-2/3)

잠언21:10절
“악인은 마음에 악한 것만을 바라니, 가까운 이웃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한다.”(새번역)

본 잠언의 악인은 습관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의 원어는 “네페쉬’이며, 생물이나 사람과 같이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잠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악인은 오직 악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생물과 같다는 색조를 전달합니다. 만약 이를 ‘욕망’이나 ‘의도’라고 표현하더라도, 악행에 몰두하는 악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강도는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개정개역은 ‘영혼’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한편, ‘가까운 이웃’은 그들의 악함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웃 사랑의 결여는 악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악인은 가족이나 친척,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악한 목적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무자비하게 대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비(햇빛, 공기, 비 등)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비를 배우지 못하니, 타인은 다만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만약, 그 타인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일 경우, 큰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 전형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반성하여 자신의 행동을 고치는 대신,  아벨만 없으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 반대가 의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그 유익을 은밀하게 행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상’은 오직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는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편1:6, 새번역).       

잠언21:11절
“오만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어수룩한 사람이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을 받으면 지식을 더 얻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오만한 자의 벌과 지혜자의 번영을 전제하면서, 이런 결과는 쉽게 흔들리는 어수룩한 사람의 교훈에 효과적임을 밝힙니다.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11절의 취지는 어수룩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특성을 대조한다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어리숙한 사람은 교훈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체험(예- 벌을 받는 오만한 자를 목격함)을 해야 비로서 배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 바로 지식을 얻는 자라고 생각합니다(잠언19:25). 다른 견해는, “어수룩한 사람은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깨달아 지혜자가 되고, 그 후에는 책망만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고 읽습니다. 이에 따르면, 어수룩한 사람은 이중의 교육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범죄와 형벌 사이의 인과관계를 배웁니다. 둘째, 그 배움은 분별력으로 이어지고, 미덕과 보상의 관계를 배우는 데까지 갑니다. 그땐 지혜자가 되어 있습니다. 한편, 잠언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를 만드는 것이며(1:8), 이는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의 정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고전1:24). 복음을 깨달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죄인은 의인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은혜에 감격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잠언의 이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없는 것은, “이 복음은….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언3:15).

잠언 21:12절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12절은 오만한 자는 물론, 모든 악인을 다루시는 주님께 눈을 돌립니다. ‘의로우신 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이는 그분이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경건한 자를 압제하는 악인을 뽑아 내시려고 최선을 다 하실 것입니다. 세속 역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활동을 포착하지 못합니다만, 성경기자들은 그것을 보고 기록하여 우리로 교훈을 얻게 합니다(고전10:1-12). 창세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 폭력이 충만하고 어릴 때부터 악한 자들로 가득차자,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어 모두 죽이셨습니다. 오직 의를 행하는 노아와 그 여덟식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어 아브라함 시대의 죄인들 소돔과 고모라 성읍 위에 불과 유황을 비오듯이 퍼부어 멸망시켰습니다. 오직 의로운 롯과 그 가족만 구원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빌립보 간수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전도와 연결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한편,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재앙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사사기부터는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어 살게 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감찰하시고, 그들이 반역의 길을 걸어 갈 때마다 이방민족을 통해 징계하시지만, 회개하면 구원자를 보내 구원하시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도 다 그런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지혜의 길입니다. “악한 사람은 얼굴이 뻔뻔스러우나,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잘 살핀다.”(잠언21:29,새번역)

시편 124: 1절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새번역)

다윗의 구원의 위대함을 4가지 큰 위험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먼저, 지진입니다. 지진은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3). 둘째는, 홍수입니다. 홍수는 모든 것을 휩쓸어 가기에 생존할 가망이 없습니다(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게 강한 원수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사나운 맹수를 만나면 산 채로 잡혀 죽습니다(6). 넷째, ‘새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도 같은 운명입니다(7).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다치지 않고 원수의 그물에서 벗어났으며, 위협 그 자체도 파괴되었습니다(7). “주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 이는 다윗의 고백이자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무엘하5장은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으로 등극하자, 분노한 모든 블레셋인들이 베들레헴 근처 르바임 골짜기에 모여 두 번 공격하였습니다. 그 위협을 본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은 처음에는 승리의 확신만을, 다음에는 구체적인 전략을 주심으로 모두 승리합니다(삼하5:17-25). 그 다윗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이르면 다윗이 드린 이 땅에서의 구원의 노래는 영원한 구원의 주제로 발전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 주님을 통해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부활의 소망, 하늘에 간직한 영원한 유업, 그리고 보호하심을 찬양합니다(벧전1:3-9). 구약과 신약의 구원이란 메시지는 동일하나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편124:8,새번역).  

시편 125: 1절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새번역)

본 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안전을 찾는 신앙 공동체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1,2). 시인이 속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선과 악이 섞여 분열되었고, 악인들의 득세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3). 시인은 주님이 악한 통치를 종식시키실 때를 소망하면서(4), 평화를 기원합니다(5).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나 여전히 페르샤 지배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잘 이해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안전의 근거 (1)
B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2)
C    악에 대한 승리의 신뢰(3)
B′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4–5a)
A′   평화의 기원 ( 5b)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은 움직일 수 없는 주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어떤 인생의 폭풍에도 안전하게 됩니다. 둘째, 신뢰는 섭리로 통치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악한 자가 득세할 때 신자는 주님의 심판을 믿고 악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인내합니다. 셋째, 신뢰가 환경에 의해 도전받을 때는 기도의 때입니다. 다만, 그 기도는 악인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을 향합니다. 즉 악인은 주님 손(섭리)에 맡기고 주님의 백성들이 악한 통치에 대항하다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환경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합니다. 요약하면, 시인은 “두려움에 솔직하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시편125: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