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2023/1/25-27)

잠언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기심은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의 사이도 파괴시킵니다. 집안의 경제적 주도권을 갖고 다투는 모습이 그 예입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대비된 ‘큰 집에서 산다’는 문구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저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자는 비도 이슬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후자는 윤택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보다 풍성한 삶을 상징합니다. 상식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낫지만, 솔로몬은 ‘다투는 여인’ 때문에 전자가 낫다고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돕고 살면, 초가삼간도 천국같으나, 늘 분쟁하고 다투면 아무리 유복한 환경이더라도 남편은 오히려 떨어져 혼자 지내고자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본 잠언은 먼저 아내를 향해 교훈하고자 합니다. 즉, 가정 화목의 비결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남편의 권위를 존중해 주면서 가정을 세우는 것이지,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쓸데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면 다툼만 일어나니 삼가야 한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시편 122: 1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본 시편은 긴 순례의 여정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 내에 들어온 감회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기쁨으로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2). 시인은 메섹과 게달과 같은 ‘먼 나라’(120:5)의 ‘이방민족’들 틈에서 긴장하며 살다가, ‘형제와 친구’들(8)이 사는 ‘집’인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는 감격에 찼습니다. 그는 잘 계획되고 건설된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 각 지파가 몰려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고 다윗 가문을 통한 통치의 모습을(3-5) 보자 저절로 ‘평안과 복’을 위해 기도합니다(6-9). 예루살렘 성의 특징은 한마디로, ‘통일성’입니다. 성의 구조 자체도 그렇고(3), 각기 다른 지파들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한 분이신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아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4).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임명한 왕을 통해 사건 사건이 바로 잡혀지는 장소에 와 있습니다((5).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에, 시인은 ‘화평과 번영 그리고 복’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은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온 세상에서 아주 다양한 주의 백성이 교회로 몰려들어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갖고, 한 성령님 안에서 한 주님과 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엡4:1-16). 따라서, ‘기쁨과 일치를 위한 기도’의 부르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시편 123: 1절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본 시편은 고난에 처한 시인의 심정과 믿음의 고백을 노래합니다. 121편의 순례자는 태산과 같은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산보다 더 높은 분을 생각하고 이기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 조롱과 멸시에 둘러싸인 시인 역시 눈을 위로 돌려 같은 승리를 얻습니다. 실로, 시인의 언어와 기도는 암울한 환경을 뚫고 치솟아 올라, 오히려 그런 고난들을 충분히 포함하는 믿음의 넓이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15:3). 동일한 믿음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이어지기에,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2절에서 시인은 3중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종과 여종이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으로부터 필요한 양식, 휴식, 그리고 도움을 기대하는 간절한 눈길입니다. 신자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괴로움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한 자에게 붙어 ‘조롱과 멸시’(4)를 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신자의 길은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끝으로,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43:3). 욕은 물론 조롱과 멸시의 말은 살인과 다름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5:22).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말에는 은혜의 소금을 쳐서 맛을 내야 할 것입니다.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과 오만한 자들의 멸시가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칩니다” (시편123:4, 새번역).

매일묵상(2023/1/16-20)

잠언21:6절
“속여서 모은 재산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개처럼 사라진다.”(새번역)

악함이란 교만을 등불로 삼고(4), 폭력과 구부러진 말로 표현하며(7-8), 은혜가 없고 타인의 파멸을 갈망합니다(10). 그들은 거만하며(24), 종교적이나 위선되고(27), 뻔뻔하나 반성하지 않습니다(29). 5절의 ‘성급한 사람’은 6절에서 ‘속여서 재산을 모든 사람’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가난, 결핍’은 ‘죽음과 안개’로 귀결됩니다. 본 절은, ‘속여서 모은 재산’ 자체가 ‘속여 취한 자’를 속인다는 역설을 교훈합니다. 불의한 재물은 안개와 같이 실체가 없기에, “계획하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5절로 돌아가야 하며, 그 길은 교만을 버리고, 정의과 공평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경외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기에, 악인의 형통을 미워하시고(4), 악인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구약은,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 것 같은 섭리(6), 혹은 대리자인 왕(지도자)을 통해 집행하시거나(1), 직접 하늘에서 집행하시는 경우 등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범죄자 아간을 찾아낼 때 여호수아가 사용한 방법이고, 둘째는 페르샤 왕으로 하만을 처단하게 하신 경우이며,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멸망시킨 경우입니다. 물론, 악인이 회개하면 주님은 긍휼히 여기사 용서하시지만,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그 반면 주님이 미워하는 자는 잠시 그 형통을 더 누리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끝장입니다 (시편73:18,19). 근심은 탐욕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근심을 주님 손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공급을 신뢰한 뒤, 삶을 계획하고 부지런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12:29).  

잠언21:7 절
“악인의 폭력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니, 그가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은 ‘속이는 자’(6)와 ‘폭력을 행하는 자’(7)로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멸망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그들이 알지만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여, 정의와 공의의 주님과 원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니’는, 히브리어 동사 ‘가라르’의 번역으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역사를 보면, 주님은 악인이 재물과 권력을 위해 펼쳐놓은 그물에 악인 자신이 걸려들어 멸망당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세운 그 장대에 하만 자신이 매달려 처형된 사례나, 또, 페르샤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도록 정한 그 날에 칙령이 바뀌어, 오히려 유대인의 대적들이 집단 처형된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악인도 회개하여 바르게 살면 생명을 얻습니다. 잠언은 이점을 긍정하지만, 어떻게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야합니다.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가 오자,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칼을 가진 모든 자들은 칼로 망한다” 하신 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마26:52). 기적적 치유와 선함을 경험한 말고는 회개할 기회가 왔습니다. 다만, 선택은 말고의 몫입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격한 갈등의 세상에 남겨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4,45)

잠언21:8 절
“죄인의 길은 구부러졌지만, 깨끗한 사람의 행실은 올바르다.”(새번역)

8절은 3-7절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거만한 자(4), 성급한 자(5), 속이는 자(6), 폭력을 행하는 자(7)에 대하여 ‘죄인’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길은 이중성 때문에 ‘구부러졌습니다.’ 실로,’올바른 길’ ‘곧은 길’은 그들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누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냐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걷는 길(삶의 방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행실은 올바르고, 곧은 길을 걸어갑니다. 솔로몬은, ‘길’이란 은유 대신 ‘행실’이라고 적어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는 동시에, 그런 행실은 올바른 길을 걸어간 뒤에야 얻어지는 인격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죄인의 길’로 행한 전형이 아담이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길이었고, 그것은 다시 전 인류가 걸어간 길로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길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삶이기에 당연히 구부러질 수밖에 없고, 죄인이란 심판과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사망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로잡혀 전 세계로 흩어졌고, 모든 인류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이에 반하여, ‘깨끗한 사람’이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신실한 양심의 소유자로서 바른 길,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길, 도덕의 길로 곧장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가운데 주의깊게 보시는 하나님의 칭찬은 그들의 참된 보물이며,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은 그들의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시편120: 1절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34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가졌습니다. 시의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시의 의미입니다. 15편의 시들은, 세 편씩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각 그룹마다 다음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고통의 상황(첫째), 주님의 권능(둘째), 주님 안에서 안전(셋째). 첫 번째 그룹의 시작인 120편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서 시인을 향한 중상모략을 언급합니다.  그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진 자들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부르짖었고, 응답받았습니다(1,2). 시인은 이 경험을 통해 “환난을 당하면 기도하고 주님의 돌보심 속에 머물러라!”고 교훈합니다. 한편, 4절(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은 악인의 본질이나, 혹은 악인에 대한 확실한 보응을 의미할 수 있지만, ‘보복하지 말고 주님 손에 넘겨라’( 잠언20:22; 롬12:19)는 말씀에 귀착하는 면은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잘못, 거짓말, 속임 등으로 피해를 당하였을 경우, 사적인 복수 대신, 그 사안을 주님 손에 맡기고 거기서 떠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화를 가질 수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는(5-7) 시인에게서 인내의 모습을 보게됩니다(5). ‘메섹’은 이스라엘 북방 한계 밖에, 게셀은 아라비아 광야 남동부에 있기 때문에, 거치른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지금 시인은 평화를 원하나, 세상은 독을 머금고 싸우려 합니다(7).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심판자이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시편121: 1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순례자의 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요단 동쪽이나 팔레스틴 평야쪽에서 오르고 있다면, 가파른 산 길이 보이면서 큰 산들이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질문이 떠오릅니다. 저 산들 속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면 내가 무사히 성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혹은 인생의 큰 산들이 가로막을 때 나를 지켜주실 분은 누구인가?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1). 이때 시인은 믿음의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이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어떤 것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위협이 일어나도, 삶의 여정이 어려워도 그분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2). 심지어 하늘에 늘 떠 있는 해와 달 역시 그분의 섭리 하에 있기에 안전하게 순례의 여정, 인생의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6). 시인의 마음에는 큰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여섯 번이나 되풀이합니다(3-8).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안전만은 확실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창조주에서 시인을 돌보시고 구출하시는 구속주로 역할이 바뀌어서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영혼을 지키시는 것 뿐만 아니라, 시인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주실 ‘동반자’이십니다(8). 시인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성부), 구속주이시고(성자), 우리와 영원토록 동행하시는 분(성령)임을 듣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란 이렇게 안전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시인은 기쁨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매일묵상(2023/1/9-13)

잠언 21:3절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
(새번역)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이며, 21:3절은 본론의 시작입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한 능력의 주님(2)은, 사람의 외형적 행위 보다 그 이면을 중시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온전한 제사(예배)와 마음을 쏟는 찬송과 기도를 기뻐하시지만, 이런 외형적 예배보다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정의와 공평’이라는 윤리적 행동을 더 좋아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은 이를 분별하기 어려우나, 주님은 모두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주제를 분명히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제사와 의식 규정 보다 십계명을 먼저 명령하셨습니다. 호세아서는 아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인용 마12:7)고 못 박고,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6:7)며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 구약의 제사 및 의식 규정은 폐지되었으나, 도덕규정은 단 하나도 폐지되지 않고 더욱 강화되었습니다(마517-20). 주님은 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셨습니다(22:37-39). 왜냐하면 아무리 “공평과 정의”를 행한다고 생각하여도, 그 결과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충족하지 못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을 분별할 지혜를 갖고 삶의 목적과 사명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5:14, 새번역)

잠언21:4절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본 절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과대망상자들의 삶을 말합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다’는 어구는 그들의 심인성 요소를 보여줍니다. ‘눈이 높다’는 말은 ‘눈을 치켜 뜨다’는 의미로 타인을 경멸하는 외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잠언의 지혜는 이런 눈을 미워합니다. 또한, ‘마음이 교만하다’의 원어는 ‘마음을 넓히다’로서, ‘통제되지 않는, 염치없는 마음’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생각은 도덕적 경계가 없어 마치 하나님인양 행동합니다. 한편,  ‘형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니르’는 ‘경작’과 ‘등불’이라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만약 ‘경작’의 의미라면, 악인이 수행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죄’됨을 뜻하며,  만약, ‘등불’이라면, 악인은 교만을 자신을 인도하는 빛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 반면 의인을 인도하는 등불은 주님의 말씀입니다(시편119:105). 무엇을 등불로 삼는지는 갈랫길에 접어들면 드러납니다. “모의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다”라는 모의봉격(毛義奉檄)의 고사가 있습니다. 전한 시대의 모의는 가난하였지만 학식과 효성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장봉이 흠모하여 찾아와 대화하는 중, 관청에서 갑자기 모의에게 벼슬을 내린다는 격문이 내려오자 모의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물러갔습니다, 이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의는 사직하였습니다. 장봉 역시 오해를 풀고 널리알려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효자를 인도하는 등불은 부귀나 효자라는 세간의 명성이 아니라 부모공경의 계명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야하겠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언22:4)

잠언21:5절
“부지런한 사람의 계획은 반드시 이득을 얻지만, 성급한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이란 정직한 노동과 검소함이라는 희생이란 희생 없이 부를 얻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교만을 등불로 삼는 악인’(4)의 한 종류로서, 솔로몬은 부지런히 살려고 계획하는 사람과 대비시켜 그것이 어리석은 길임을 교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혜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삶의 틀로 삼고 창조적으로 계획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행동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이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부하게 되려는 자는 주님이 세우신 세상질서에 대한 생각없이 행동하기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득과 가난이란 단어는 샬롬의 측면이 반영된 것입니다. 반 루벤은 말합니다: “돈의 문제에서 성급함이란 탐욕을 내포하고(28:20), 언어에서 성급함은 생각이 모자람을 보여준다(29:20).” 이는 게으른 사람은 행동이 결여되어 있고, 성급한 사람은 생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진실된 길로 걸어가고, 판단은 명쾌합니다. 한편, ‘반드시’와 ‘뿐이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원어는 동 일하게 ‘아크’로서, 예외 없이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함을 내포합니다. 자신들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하는 자들은 그 기대에 반하여 투자한 이상의 이득(화평 등)을 얻고, 탐욕을 갖고 성급하게 행동에 옮기는 자들은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세상의 질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길은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잠언20:7,새번역)

시편119:161-168절 “신(שַׂ)”연
“권력자는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지만, 내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새번역)

‘신’ 연의 주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신실하게 행동하실 것을 호소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신실하게 살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기자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음을 선언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만을 두려워 하는데, 이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161,168). 더 나아가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탈취물을 얻는 것’같이 즐거워하였고(162), 거짓을 미워하며 의로운 주의 율법을 사랑하였습니다(163). 이런 고백들이 나오는 이유는, 시인이 지금 이유 없이 권력자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어,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시인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지만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시인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면서(166), 그분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평화, 안전(민6:24-26), 그리고 구원을 간구합니다(165,166). 좋은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왕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보내고 정처 없는 피신생활을 택하였습니다. 한편, 161-62절에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즐거움’의 역설적인 반응이 보이는데, 신자의 올바른 정서입니다 (86: 4,11 참조).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8:31b)고 말합니다. 우리가 제자인 여부, 즉 주님의 말씀에 머무르는 여부를 알고자 한다면 시인이 고백한 정서가 우리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내가 가는 길을 주님께서 모두 아시니, 내가 주님의 증거와 법도를 지킵니다.”(시편119:168,새번역)

시편119:169-176절 ‘타우(תּ)’연
“주님,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새번역)

마지막 연인 ‘타우’ 연의 주제는 ‘방황하나 순종합니다!’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구원을 부르짖으나 몰아닥친 환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신자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신실하셔서 언약대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때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시는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69-72절로서, 주님의  행동에 대한 요청입니다. 그것은 ‘깨우침’과 ‘구원’으로서, 시인은 ‘명철’을 받아(단9:2)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역경에서 구원의 길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 드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자비를 위한 ‘부르짖음’과 ‘간구’만이 남아 있지만,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172). 왜냐하면, 말씀을 믿고 인내하는 시인에게 약속된 구원이 성취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은 진리이고, 이를 선택한 자신의 정당함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173-176절로서, 첫 부분의 주제를 반복합니다. 시인은 기도, 하나님의 말씀(율례, 계명, 법도,율법,규례 등)에 대한 헌신, 그리고 구원을 소망하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고난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에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한다는 고백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주님을 사랑하여서, 그분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은 결과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119:176).

매일묵상(2023/01/4 – 6)

잠언21: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새번역)
본 잠언은 사람의 판단이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반면, 주님의 판단은 완전하고 공의로우심을 대조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근거로 판단하기에 불완전하나, 주님은 ‘마음’의 동기까지 꿰뚫어 보시므로 공의로우십니다. 동일한 교훈이 잠언16:2절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다만 각 절이 위치한 문맥이 다릅니다. 16:2절은 사람이 계획하나, 축복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에(3). 주님을 경외하고(동기), 주님의 뜻 안에서 그 계획을 펼쳐나가야(행동) 성공한다는 가르침입니다.  21:2절은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다는 측면은 같으나, 주님은 당신의 대리자인 왕을 통해 축복한다는 교훈입니다. 왕(=지도자, 권한 있는 자)의 마음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1). 주님은 왕과 그 신하들이 옳게 여기는 가치에 맞추어 행동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기 기만’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주님을 감안하여 판단하라는 격려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삼상16:7). 장자 엘리압의 큰 키와 훌륭한 용모 때문에 사무엘은 “이 사람이 바로 사울 대신 왕이 될 자가 아닌가?” 생각하였으나, 주님은 “겉모습과 큰 키만 보지 말라. 나는 중심(마음)을 본다”고 하신 뒤, 막내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붓게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과 현자의 조언에 귀 기울이면, 분별력을 갖게될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갈6:7,새번역).

시편119:145-152절‘코프(ק)’ 연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145절)

‘코프’ 연의 주제는 “위기와 신자의 반응”입니다. ‘반응’은 기도, 고백, 결단, 헌신, 감사 등을 포함합니다. 이 연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님께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와 상응됩니다. 첫 부분(145-148)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모습입니다. 위기를 맞이한 시인은 전심으로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의 교훈을 지킬 것을 약속하며(145,146),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약속 성취를 고대합니다(147,148). 기도는 순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순종 없는 기도는 혼자 중얼거리고 외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심히 근심하며 하루 종일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들의 패배는 불순종(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순종을 위해서는 계명이 전제되며, 그렇지 않은 기도는 헛될 뿐입니다. 둘째 부분(149-152)은 가까이 오신 하나님입니다. 위기가 짙어질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계십니다. 원수는 해를 가하려고 주님은 구원을 위해 가까이 오십니다. 시인이 의지하는 주님은 약속대로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주신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기반을 두는 증거는 영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고, 지금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 증거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2절,새번역).   

시편119:153-160절‘레쉬(ר)’ 연
“내가 주님의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내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153절,새번역)

‘레쉬’ 연의 주제는 ‘신실함과 구원’입니다. 세 가지 신실한 대상이 보입니다: 주님의 법(말씀)을 잊지 않은 신실한 시인(153), 언약, 인자, 그리고 구원에 신실하신 주님(154,156,159) 그리고 결코 변치 않는 신실한 그 말씀(160). 그러나 인간의 신실함은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시인이 신실하게 살려고 하여도, 인생에는 고난이 존재하며, 악하고 신실치 못한 사람들로 인한 위협 때문에 불안정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야망을 가진 푸틴에 의해 침공당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부르짖는 것 같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약속 그리고 결정에 근거한 갱신과 구원이 계속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건지소서’ ‘살리소서’와 같이, 구원을 위한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리는데, 이는 ‘레쉬’ 연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것은 또 우리가 고난을 통과할 때 드려져야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다리고 그분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하지만,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근거는 주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적 관계이고, 이 언약적 관계는 주님의 피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이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Yes’가 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고후1:20). 끝으로, 본 연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언하면서 마칩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은 모두 영원합니다” (160절,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