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2/26-30)

잠언20:29절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입니다. ‘가르침’을 강조하는 도입부 중 첫째 구절(29)은, 젊은 자와 노인에게 각각 영광된 것을 관찰, 비교하면서 젊은 자들에게 지혜를 겸비하라고 장려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젊음과 힘을 믿고 뛰어들다가 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 이윽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지혜로서, ‘백발’로 표현되었습니다. 백발은 지혜로운 노인을 말하며, 고대 근동에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들의 일생의 경험은 지식으로 쌓였고, 그들의 인생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노인들은 백발에 이를 때까지, 역경 가운데서도 자녀들을 양육하며, 생활터전을 확립하며, 더 나아가 공동체에 덕을 끼치고 아름다운 열매를 남깁니다. 이는 힘과 지혜가 어우러진 열매이자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입니다. 젊은 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힘만 의지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르호보암 왕 같이 실패할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 왕이 된 르호보암이 왕국의 문제를 잘 아는 원로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교만하게 말하자, 북부의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으며, 남북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도, 미덕 없는 백발,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지지 못한 백발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 잠언은, “인생이란, 좋은 것(=힘)이 더 나은 것(백발=지혜)으로 바뀌어져 가는 과정이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16:31)

잠언20:30절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가르침의 중요성’의 관점에서 29절과 30절은 보완적 관계가 있습니다. 29절은 젊은 자들이 ‘백발의 지혜’를 얻을 것을 권고하나, 본 절은 권고만으로 안될 때, 신체적 징계를 통해 교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잘못에 대하여 고통을 받으면 행동을 고칠 뿐만 아니라, 성숙하게 됩니다(3:11-12). 어린 아이들이야 부모가 매를 들어 교정한다고 하나, 다 큰 청년이나 어른들의 경우 누가 회초리를 들겠습니까? 하나님 혹은 그분의 대리자로서 왕과 같은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를 사용하여 섭리 가운데 교훈하고, 왕은 직접적인 형벌이나 배상 명령을 통해 바로잡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악을 없애는 절대적인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징계할 수 없는 왕(혹은 지도자)은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은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계속 불순종하자, 블레셋 군대의 칼을 통해 죽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징계가 아니라 범죄자의 처단이었습니다. 이 반면 다윗 왕은 늘 순종하다가 간음과 살인 죄를 범하자, 낳은 아들 중 첫째, 둘째, 셋째까지 모두 살해당했고, 왕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던 솔로몬 왕이 말년에 우상숭배를 감행하자 주님의 뜻을 따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평화의 사람 솔로몬은 근심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왕기에 기록된 왕으로서, 흠이 없는 왕은 하나도 없으며, 주님은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반역과 심판의 역사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느니라” (고전10:11)

잠언21:1절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봇물’이란 ‘보에 괸 물 혹은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을 의미합니다. 가뭄 때에는 농부들 사이에 물꼬로 인한 다툼이 많이 발생합니다. 농부 자신의 논에 물을 대게 하려는 것이죠! 물론 홍수 시는 반대입니다. 이와 같이 농부는 물길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계획하듯이, 주님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역사를 관장하십니다. 즉 왕(=지도자)의 마음은 그분의 손에 좌우되며 역사는  당신의 뜻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뜻을 항거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선지자들이 밝히 기록하여 증언는데, 구약성경의 가치 중 하나입니다. 특히 역사서(여호수아, 사무엘, 열왕기, 역대,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선지서들은 역사의 배후에서 당신의 뜻을 집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명확히 묘사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굽 왕 파라오와 페르샤 왕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많은 이적과 재앙을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게 하시고, 홍해까지 따라와 주님을 대항하려는 그들을 전부 멸하셨습니다(출10:1-2). 파라오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였습니다. 또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포로로 잡혀온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하셨습니다(에스라1:1-4). 그런데 고레스 왕에 의한 바벨론 정복이나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시겠다는 선포는 이미 170년 전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바였습니다 (사44:28-45:1-6, 13). 이를 알고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지혜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  

시편119:137-144절‘차데(צַ)’ 연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7절)

‘차데’ 연의 주제는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말씀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히 표현하시며, 또 말씀 속에 와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기에, 그분이 하신 말씀(약속)은 의롭습니다(137). 따라서, 주님이 주신 ‘증거들’ 역시 의롭고(138,144), 영원합니다(142). 주님의 말씀은 그분 자신의 인격, 마음, 판단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늘 높은 곳이나, 바다 깊은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 의로운 말씀에 사로잡혔고(139),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실로,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철저하게 검증된 진실한 증거입니다(140). 주님의 약속과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에 비하면, 지위(미천)와 평판(멸시)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141). 성취되는 것은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이지, 인간의 의견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그분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얻어, 고난 속에서 살아갈 힘을 갖습니다(143). 고난이 어려운 것은 고통과 장래에 대한 절망 때문인데, 주님을 신뢰하는 시인은 오히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니다(롬5:3-5). 그러므로, 시인은 주님을 시험하지 않고, 그 대신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갖도록 기도의 과녁을 맞추고, 신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소망, 사랑의 삶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길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편119:144).   

매일묵상(2022/12/19-23)

마태복음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월 25일은 성탄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주님이 인간이 되신 목적 즉 메시야의 사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들어오셨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이 사명은 33년 후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길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좌우편에 앉게 하여달라고 어머니를 통해 간청을 드릴 때 주님이 직접 선포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고 확증하신 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고대하였지만, 제자들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조차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정도라면, 성육신은 불필요하고, 미가엘 천사만 보내면 족합니다. 아무리 로마를 몰아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죄와 사망은 물론, 이를 근거로 죄를 짓게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심판과 사망입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마태복음1:24,25절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성탄절이 오면, 우리는 두 분을 꼭 기억하게 됩니다. 모친 마리아와 양부 요셉입니다. 두 분 모두 다윗의 자손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한 동네 나사렛의 청년으로,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통상의 약혼 기간은 1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3개월 동안 유대에 갔다온 뒤, 임신한 정황이 나타나자 의로운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고자 하였습니다(1:19). 마리아 역시 설명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꿈을 통해 개입하셨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꿈은 이 당시 계시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요지는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녀가 낳을 아들은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의 성취이니 아내로 데리고 와라”(1:20-23)는 분부였습니다. 요셉은 순종하였습니다만, 일평생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같이 우리의 믿음의 삶은 이해받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의하여 초자연적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는 점이, 단순한 도덕적 순종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께서 12살 될 때까지만 나타납니다. 사람이 알기에는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만은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맏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중생).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누가복음 1:31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은 모친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정혼한 사이로서 통상의 행복을 꿈꾸었지만, 이보다 더 큰 행복을 계획하신 하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실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개입하셨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2,33).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하여도, 잉태한 사실 자체와 그 낳은 아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키울 것인가는 심각한 과제였습니다. 정혼자 요셉의 순종 역시 요구되는 순간입니다(38). 두 분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어려운 세상살이에도 메시야를 키우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 후 마리아는 요셉의 자녀를 여러 명 낳았고, 주님은 형제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자라나셨습니다. 예수가 계신 마리아의 가정이 부자나 권력자가 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들은 성전의 헌물로 드렸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엄청난 계시와 보물들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어 남편 요셉과 장남 예수의 목수의 일을 통해 평범하게 살아갔습니다(막6:1-6).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섬김. 외형적으로는 똑같아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수가 계신 사람과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요한복음 7:5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은 양부 요셉과 마리아의 소생으로 4명의 남동생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과 누이들이 있었습니다(마13:55,56; 막6:3). 물론 세상에서 보기에는 예수님조차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중 야고보(행1:14; 15:13; 21:18; 고전15:7; 갈1:19; 2:9)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수십 년 동안을 가족으로 살았고, 요한의 침례 후 행하신 많은 표적과 뛰어난 가르침을 보고 들었습니다(요7:4).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미쳤다는 말에 주님을 붙잡으러 친척들이 나섰을 때, 모친과 동생들 역시 염려되어 설교하시는 집의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막3:21, 31-32)). 어떻게 보면 수긍이 갑니다. 표적과 가르침은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언된 그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선언은 육신으로 보면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눅4:16-30). 그러나 주님은 친절하셨습니다(요7:7-9). 그들 역시 당신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목격한 모친 마리아는 물론 모든 동생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고전15:7), 승천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서 당신의 형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순교하였고, 야고보서도 썼으며, 유다서는 역시 주의 동생 유다의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두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셔야 가질 수 있습니다(고전2:12; 중생).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친절히 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식, 재산, 권력, 명예, 건강, 친구들 등이 있어도, “공연히 구체적인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행위”에 대하여는 형사상, 민사상 책임 모두 다 인정되어 처벌을 받습니다(명예훼손죄-형법307조). 그러나 이 죄는 형법전의 수백 가지 중 오직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이 수백 가지 죄 중 하나만 범해도 평생 두려움의 종이 됩니다. 벗어나는 방법은 죄값을 치루거나, 대통령이 사면·복권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면·복권의 행사가 주님이 베푸시는 속죄와 칭의로 인한 구원과 유사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요5:29;롬3:23). 인간이 참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피조물인 우상을 섬기거나 자신을 주인으로 둠으로써, 마귀의 손아귀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간질시키거나(마귀의 원어인 ‘디아볼로’ 의 의미), 욕망을 부추키거나, 죽음의 논리로 위협하여 인간으로 죄의 길, 탐욕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요일5:19). 하나님은 너무나 인간이 불쌍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진리,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요일5:20). 그리고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요3:16; 롬3:24-26).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와 같이 혈육에 함께 속하신 이유이며,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조차 내려와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매일묵상(2022/12/12-16)

잠언20:26절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그들 위에 타작기의 바퀴를 굴린다.”(새번역)

잠언은 사사로이 악을 갚지 말고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라고 권고하지만(22), 왕은 다릅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고 악을 제거하여야만 합니다. 본절은 농경사회에서 흔히 보는 타작의 이미지를 들어, 왕이 악인을 분별하고 그들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잠언20:8). 왕의 책임 중 첫 번째는 키질로, 두 번째는 타작으로 암시되고 있으나, 고대 중동에서는 키질하기 전에 타작합니다. 타작 시에는 가시가 달린 무거운 수레(타작기)를 곡식 줄기 위로 반복적으로 굴려, 곡식을 분리한 뒤, 키질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고, 알곡은 곡간에 쌓고 쭉정이는 태우거나 썩혀서 거름으로 썼습니다. 이것이 알곡은 선을, 쭉정이는 악을 상징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왕의 통치는 완전하지 않고 또 유한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왕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 왕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임을 선포합니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에서 추수와 타작마당은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타작마당은 일년 중 추수 때만 바쁘게 이용됨으로, 일생 동안 쌓은 선과 악을 마지막 순간에 헤아린다는 최후의 심판과도 비슷합니다. 이를 배경으로, 침례 요한은 이미 메시야가 그들 가운데 오셔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3:17)라 외쳤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모든 악을 한눈에 가려내어’ 영원히 없앨 것입니다.“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2:4,새번역)

잠언20:27절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27절은 세상통치 배후에 계신 전지하신 주님을 등장시킵니다. 전단은 등불이라는 은유로 주님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고, 후단은 그 해석을 보여줍니다. ‘영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니쉬마”로 ‘숨, 호흡’을 뜻하는데,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 그 단어입니다. 따라서 직역하면, “사람의 호흡은 여호와의 등불이라…”입니다. 사람 속에서는 숨과 함께 말도 나옵니다. 따라서, ‘니쉬마’는 ‘단어 혹은 말’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사람의 말은 내면 가장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의 생각, 성향, 의지를 드러내게 하는 주님의 등불입니다. 왕(혹은, 잠언의 제자들)은 이를 통해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본절은 정의를 위한 왕의 권력(26)을 상대화합니다. 이는 왕 역시 하나님의 감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동기를 알고 계시기에, 통치 대행자인 왕를 섭리가운데 도와주고 계십니다. 즉, 왕에게 영감을 주시며(16:10, 이른바 직업적 영감), 당신의 뜻을 따라 왕을 인도하십니다(21:1). 좋은 예가 에스더서에 있습니다. 하만에 의한 유대인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어느 날 밤, 페르샤 왕 아하수에로는 잠이 오지를 않아, 역대 일기를 읽혔습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음을 알고 부지 중 그의 원수 하만으로 하여금 모르드개를 높이게 합니다. 하만의 음모가 좌절되는 섭리의 예표이었습니다 . 물론, 이는 에스더와 유대인들의 결사적인 금식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잠언은 의인을 위로하고 악인을 근신하게 만듭니다.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잠언20:22, 새번역)”

잠언20:28절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왕’이라는 주제어는 악인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26)과 힘없는 백성(22)위한 ‘인자와 진리’와 잘 어울리며, 이 단락을 자신이 아닌 주님을 신뢰하도록 결론을 맺게 합니다. 전단은 ‘인자와 진리’라는 미덕을 왕의 수호자로서 의인화시켰습니다. ‘인자’의 원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실함, 신실함’을 뜻하는 ‘에메드’의 번역입니다. 결국 ‘인자와 진리’는 합쳐서 ‘주님과의 언약에 기반을 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잠언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에게 베푸는 인간적 친절을 뜻합니다. 후단의 ‘인자’의 원어 역시 ‘헷세드’로서, 왕이 ‘언약적 사랑’에 충실하면, 사람이 음식과 보약을 먹어 몸을 튼튼하게 만들듯이, 왕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인자와 진리’라는 통치를 위한 ‘음식과 보약’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잠언14:22,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이 말합니다. 왕(지도자)이 주님을 경외하여 바른 길로 걸어가면 주님이 주십니다. 왕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때, 즉 정의를 베풀고, 백성을 돌볼 때 왕 역시 주님으로부터 언약에 기반한 신실한 사랑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모든 권력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엡1:22). 여기서 왕이란 모든 지도자의 한 예이고, 그 완전한 성취는 우리 주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나병환자와 같은 궁핍한 자의 간구를 멸시하지 않고 고쳐주심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시102:16)

시편119:121-128절‘아인(ע)’ 연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121절)

‘아인’ 연의 주제는 ‘주님이 일하실 것을 탄원함’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함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고자 한 시인의 단호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득세하게 되자, 그는 두려웠고 (121,122) 주님의 구원과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다가 지쳤습니다(123). 시인은 얼마나 더 견딜수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진리가 무시되었기에 마지막 보루는 그분이 일(행동)하시는 것뿐입니다 (126). ‘일하실’(126)이란 단어는 ‘행하였사오니’(121)와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아사’)로서, 마치 시인이 ‘내 모든 노력이 실패하였으니 이제 주께서 떠맡으소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126절은, 시인이 121-125절에서 드리는 기도의 절정을 이루고, 나머지 두 개의 절(127-128)에서 시인은 순종을 다짐하며 끝을 맺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의 말씀을 따라 ‘정의와 공의’를 행한 시인이 위험에 처하자 안전을 간구하는 자세는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기 위한 기도로 바뀝니다(125). 왜냐하면 시인에게 주의 계명(미스바)들은 순금보다도 더 귀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사랑하며(127), 모든 일에서 그 계명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지키려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배우고자 기도하며, 그분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지식), 그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합니다(128). 이런 삶의 자세가 참된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매사에 주님의 모든 법도를 어김없이 지키고, 모든 거짓행위를 미워합니다.”(시편119:128,새번역)

시편119:129-136절‘페(פֶּ)’ 연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129절)

‘페’ 연의 주제는 ‘주의 말씀이 주는 은택’입니다. 시인은 이 혜택을 깨닫고 감사드린 후(129-131), 그가 이중의 적- 잘못된 행위와 인간의 억압-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기도(132-135)하고, 그 말씀을 버린 자들을 크게 개탄합니다(136). 주님의 말씀의 유익 중, 시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주의 증거의 놀라움입니다(129). ‘놀라움’의 원어는 ‘펠레’인데, 출애굽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므로, ‘초자연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그 증거들을 통해 시인은 주님의 초자연적 행동과 완전하심에 관한 통찰을 얻습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삶의 현실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단순한 자들도 지혜를 얻게 됩니다(130).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헐떡이면서 물을 찾듯이,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고 있습니다(131). 그 만큼 주의 말씀은 경건한 자들을 채워주고 새롭게 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주님께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분이 축복하시면 은혜를 받고(132), 죄악과 역경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해 주며, 일생동안 그분의 호의 가운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135a). 그뿐 아니라, 시인의 요청은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합니다(132a).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법도들’을 지키겠다는 헌신의 고백을 하면서,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의 뜻을 행하며 배우고, 축복의 주님을 굳게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시편119:136).

매일묵상(2022/12/5-9)

잠언 20:23절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는 주님께서 미워하신다. 속이는 저울은 나쁜 것이다.”
(새번역)

유사한 잠언 두 개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20:10);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1:1). 상거래에서 특히 정직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 잠언이 위치한 문맥은 ‘공평과 정의’라는 의미에, 독특한 교훈을 더합니다. 가렛의 통찰입니다: “이 구절은 독자가 징벌하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확신을 준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복수할 필요는 없다”  또, 말빔이란 학자는, “만약 당신이 거래 중에 속았다면, 다음에는 당신 차례라면서 그를 속여 앙갚음하려는 유혹을 받지 말아라. 여기서 주어진 예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여 물건을 파는 경우이다. 당신 역시 복수하기 위해서 거짓 저울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만, 그 유혹을 물리치라! 어쨌든, 저울을 만져 속이는 행위는 전능자에게 미움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리석은 자에게 어리석게 반응한다면, 우리 또한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26:4). 신자는 세상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주인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 그분의 판단을 두려워합니다. 16:11절에 따르면, 저울은 주님의 소유이고, 추와 돌은 그분이 만드신 것임을 천명합니다. 따라서, 저울과 관련하여 속이는 모든 행위마다 그분을 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정직하지 못한 모든 행위가 그렇지만 말입니다. 시장과 종교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잠언20:22, 새번역)

잠언 20:24절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겠느냐!” (새번역)

주님(야훼)이 등장하는 세 번째 잠언으로 그분의 주권을 다루는데, 성경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의 책임이 있습니다. 지혜를 다루는 잠언, 전도서, 욥기 등에서 전능자의 주권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인간이 책임있게 살아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슬기로운 사람의 길을 분별하게 하지만,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자를 속게 한다”(14:8)와 같은 많은 교훈이 잠언에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참된 길을 인식하고 그것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어렵지만(16:2), 우리에게는 그 길만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일과 사건의 배후에 계신 진정한 행위자이십니다. 이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두렵고, 또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중요한 것은 이 두 진리 – 주권과 책임 -는 성경에서 결코 조화를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조화될 수도 없습니다. 40년 전, 20대 비행교관 브라이언 시프는 비행학교 교장을 태우고 유망 청년 사업가 스티브 잡스와 그의 전자장비를 수송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무더운 날씨, 스티브의 짜증과 재촉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비행중량계산 후 인근 비행장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활주로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비행내내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임무를 마치자 교장실로 호출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원칙을 지킨 브라이언을 칭찬하더니 월급을 두 배나 올려 주었습니다. 현재 이분은 베테랑 조종사로 은퇴하여 비행교관과 안전 강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잠언21:32,새번역)

잠언 20:25절
“경솔하게 “이것은 거룩하다” 하여 함부로 서원하여 놓고,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이 걸리기 쉬운 올가미이다”
(새번역)

사람은 종교적으로 흥분하게 되면 성급하게 서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쓸데없이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행동은 어리석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자신의 미래를 통제하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거나, 헌신의 열망이 생겨 서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행18:18). 만약 주님께서 그 서원을 응답하시면, 반드시 이행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가르칩니다(전5:5). 문제는, 사람이란 난관을 만나거나, 은혜(?)를 받아 거룩한 감정이 생기면 경솔히 서원을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승리하면 제일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이러석은 서원을 합니다. 이를 알리 없는 외동딸이 제일 먼저 마중나왔습니다. 입다는 두고두고 자신의 서원을 후회하면서, 참담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까지 약속받은 헌금을 모두 합해보면 5백억원은 된다고 허탈해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성소가 있는 실로로 가서 이행하였고, 그의 아내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주님께 그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뒤, 사무엘을 낳고 젖을 떼자, 황소 두 마리와 함께 실로에 가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은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낳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균형잡힌 판단력을 갖고  냉철하게 생각하는 성품을 길러가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5:4).

시편119:105-112절‘눈(נ)’연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5)

‘눈’ 연의 주제는 “등과 빛되신 주의 말씀”입니다. 시인은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면서 주의 말씀의 놀라운 효능을 알려줍니다. 잠언 6:23절,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과 같이, 시인은 어두운 길을 비취는 주님의 말씀을 목격한 것입니다(105). 주의 말씀은 손전등과 같은 존재로서, 인생의 밤을 위해 반드시 구비해 두어야 하는 필수품입니다. 우리가 낯설고 위험한 지역을, 그것도 밤에 지나가야 한다면, 등불 내지 손전등을 손에 꼭 쥐고 가듯이, 고난의 시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늘 묵상하면서 다녀야 합니다. 시인은 그 가치를 잘 알기에, 어떤 위험을 무릎쓰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결단합니다(106). 시인은 생명이 위협을 받고, 악인들이 올무를 놓은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길로만 걷겠다고 결단합니다(109,110).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시인에게 기쁨의 완전한 근거이며, 또 때가 되면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도착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107). 그러므로, 시인은 ‘입으로 드리는 자원제물’을 노래합니다(108). 이는 ‘즐거이 드리는 헌물’을 의미하며, 시인은 찬양의 기도로 승화시켰습니다. 고난이라는 밤의 노래들은 성막을 위해 드리는 자원예물(출36:3)보다,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입술의 제사’(시편19:15; 히13:15)입니다. 시인이 ‘주의 증거들’은 그의 유업이요 즐거움이라는 고백을 우리 역시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111). 순종없는 기쁨은 천박하며, 기쁨없는 순종은 도덕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편119:112)

시편119:113-120절‘사멕(ס)’ 연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3)

‘사멕’ 연의 주제는 ‘일편단심’입니다. 시인은 우유부단한 자, 행악자, 방황하는 자 그리고 악인들과 대치해 서 있습니다. 이들 사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주의 법(말씀)’인데, 그 말씀은 시인이 사랑하고(113,119), 간직하며(115), 피난처와 방패 그리고 소망의 기반(114)으로서, 한결같이 마음을 쏟는 중심점(117)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씀과 주님의 순서를 혼동하지않습니다. 시인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존재는 주님이며, 그분의 말씀은 그분을 존중하는 가장 으뜸된 수단으로서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근거로 소망을 품는 것은 주님께 피한다는 의미이며(114), 말씀은 ‘내 하나님의 계명’(115)으로, 말씀을 경외함과 주님을 경외함은 같은 뜻입니다(120). 반대로, 말씀을 거부하는 현실 타협자와 악인들은 주님께 배척당하는데(118), 그들의 마음과 삶이 그분의 말씀에 어긋나서,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멕’ 연은 ‘눈’ 연이 강조하는 ‘헌신’의 의미를 발전시킵니다. 그 헌신은 선택적도, 타협될 수도 없습니다. 실로, 시인이 드리는 헌신의 본질은 주님과 교제하고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판단을 두려워 합니다.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 솔로몬도 그분의 말씀과 어긋난 우상숭배를 시작하자 심판받았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의 삶’은 주님에 대한 사랑(그분의 계시를 사랑함으로 확인됨)이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마음에 의해 균형잡혀져만 합니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시편119:120).

매일묵상(2022/11/28-12/2)

잠언20:20절
“부모를 저주하는 자식은 암흑 속에 있을 때에 등불이 꺼진다.”(새번역)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전 우주적 진리로서, 십계명에 규정되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5:16). 이 계명은 ‘부모공경’이라는 긍정적인 의무와 함께, ‘장수와 형통’의 약속을 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부모공경’의 계명을 ‘약속을 가진 첫 계명’으로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임을 가르칩니다(엡6:1-3).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저주하는 자녀들의 피를 그들의 손에 넘겨 놓으시고 심판하도록 규정하셨을 정도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출21:17). 잠언은 지혜라는 시각에서 그 이면을 밝힙니다. 학교가 없던 시절, 부모는 지혜의 주된 원천이었습니다 (잠언1:8,9). 따라서, 그런 부모의 말씀에 순종은커녕 저주하는 자녀들은 바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나아가, 본 잠언은 자신의 부모를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합니다. “등불”이란 사람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암흑 속에 있을 때 등불이 꺼진다”는 문구는 패륜 자식을 기다리는 무서운 결과를 말하며, 사망과 영원한 형벌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만, 부모에게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근거로 인용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경주석가 고 박윤선 목사님은 결혼한 자녀들에게 잠언30:17절을 인용하여, 부모를 비판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지만, 자녀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우리의 타산지석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언9:10,새번역).

잠언20:21절
“처음부터 빨리 모은 재산은 행복하게 끝을 맺지 못한다.”
(새번역)

흔히들 창업과 수성(지키기) 중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창업은 좋은 아이디어와 사업적 수완을 결합하여 기업을 일으키게 되는 단발적인 노력인데 비해, 수성은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맞추어 끊임없이 회사를 적응시켜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사업 시작부터, 혹은 젊은 나이에 큰 노력 들이지 않고 빨리 재산을 모은 사람은 수성의 지혜를 갖추기 어렵습니다. 좋은 예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입니다. 돈을 관리하는 법을 몰라, 가족 간의 갈등은 물론,  모르는 사업에 투자하여 당첨된 돈 전부를 잃어버렸다는 보도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 나중 형편은 처음보다 훨씬 못합니다. 왜냐하면 돈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직업, 건강, 가정 모두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 잠언은, 전 절(20절)에 등장하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식’의 행동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 불효자식은 부모의 재산을 빨리 받아내려고 패륜적인 행동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재산으로 어떻게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탕자의 비유가 잘 말해줍니다(눅15장). 물론, 주의해야 할 사례도 있습니다. 삼성 그룹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20초반에 만석의 부자인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요청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오늘의 삼성그룹을 일구어냈습니다. 정주영 회장 역시 10대에 아버지의 소 판 돈 70원을 훔치는 등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끝에 오늘날의 현대그룹을 세웠습니다. 물리법칙이 아닌 인간의 문제에 예외 없는 일반원칙은 없지만, 이분들 역시 많은 난관을 겪고 사업적 지혜를 갖춘 분들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앞길은 동틀 녘의 햇살 같아서 점점 밝아져 대낮처럼 환해진다” (잠언4:18, 새번역)

잠언 20:22절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새번역)

이 잠언은 바보들의 나쁜 말을 듣고 어리석게 대응하지 말고,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신뢰함으로써, 지혜롭게 반응하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심판자 되신 주님은, 당신을 믿고 기다리는 경건한 백성의 손해를 보상해주시며, 그에게 잘못 행한 자에게 공정한 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언제 이루어질까요? 마지막 날 내려질 최후의 심판 전까지, 모든 상과 벌은 섭리를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이 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겸손히 기다려야만 합니다(합2:3). 시편25:3, 27:14, 37:14, 그리고 마태복음5:38-48, 누가복음18:7,8 등을 보면 같은 취지입니다. 물론 로마서 12:17-21도 빼놓을 수 없는데, 사도 바울 역시 믿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같은 명령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복수의 감정이 치솟으면, 오판은 물론, 죄에 비하여 지나친 보복이 가해지는 사례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1963년 한국 사회를 떠들석하게 한 고재봉 상병이 죄 없는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의 명령이 율법이나 형법 등에 형벌이 규정된 범죄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범죄들은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나 재판부의 권한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잠언의 명령이 적용되는 범위는, 참을 수 있는 사소한 모욕이나 부당한 조치들, 잘못은 분명하나 규정된 벌칙이 없는 경우, 그리고 네로와 같이 너무나 권력이 강하여 법률이 집행될 수 없는 경우 등이라 하겠습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5:41,새번역).

시편119:89-96절‘라메드(לְ )’연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하늘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89,새번역)

‘라메드’ 연의 주제는 ‘주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첫째 행(89)에서 출발하여 전체 연을 이끌고 나가다가, 마지막 행(96)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영원히’라는 단어는 주님이 한결같이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심을 뜻합니다. 그 증거는 그분의 말씀이 창조한 하늘이 굳건하고 영속적인데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더욱 확실합니다. 하늘을 지배하는 그 말씀은 하늘 아래의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권위를 행사할 위치에 있습니다(90).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성품과 뜻을 표현합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들- 하늘, 땅, 인간 등 -은 그분의 뜻을 준행하는 종들입니다(91). 시인 역시 주님의 종인 것은 피조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분의 영원한 말씀을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증언합니다(92). 고난이 닥칠 때 사람들은 재물이나 권세 있는 사람을 의지하지만, 시인은 주님의 영원한 말씀을 보화처럼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의 경험은 헌신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굳건한 말씀이 시인을 멸망에서 지켜준 것처럼, 이제 갱신도 가져왔습니다(93). 이같이, ‘말씀에 대한 헌신’ 은 주님께 속한 자들을 구분하는 특징이며(94), 고난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적대적인 악인들은 아직 시인을 엿보고 있지만, 시인은 신실하게 주님의 증거를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95). 이것이 바로 시인이 살면서 발견한 생명의 길이며, 우리의 길입니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시편119:96).

시편119:97-104절‘멤(מְָ)’연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멤’ 연의 주제는 “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간청은 없지만, 시인은 희열에 차서 참된 지혜의 원천인 ‘주의 법’(토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기에 종일 묵상하였고, 이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멤’ 연은 97-103절과 104절로 구분됩니다. 앞부분(97-103)은 두 개의 ‘어찌’로 묶여집니다: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97)와 ‘어찌 그리 단지요’(103). 뒷부분(104)은 결론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종일 묵상하는 시인은, 원수보다 우월하며(98), 인간 스승보다 더 크고(99), 전통을 능가하는 지혜를 얻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로써 지성의 훈련은 말씀 묵상을 통해 주어짐을 깨닫게 합니다. 더욱이, 시인이 사랑하는 말씀은 그의 삶을 지도합니다(101-103). 즉, 그것은 시인을 가르쳐서 악한 길을 피하게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 말씀은 주님 자신이 가르치는 음성이며  본질적으로 즐거움의 원천입니다(103). 요컨데, “말씀에 대한 사랑”은 건전한 마음(명철-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믿을 수 있는 감정(‘미워하다’)과 바른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묵상과 순종의 순서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일관된 묵상의 삶(97,98,99)은 순종의 삶을 낳기에(100), 말씀은 삶을 바꾸는 능력의 원천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깨닫고, 꿀보다 더한 기쁨을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101). 따라서, 신자의 순종에는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공존합니다. “주님의 법도로 내가 슬기로워지니, 거짓된 길은 어떤 길이든지 미워합니다.” (시편119:10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