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0:29절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입니다. ‘가르침’을 강조하는 도입부 중 첫째 구절(29)은, 젊은 자와 노인에게 각각 영광된 것을 관찰, 비교하면서 젊은 자들에게 지혜를 겸비하라고 장려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젊음과 힘을 믿고 뛰어들다가 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 이윽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지혜로서, ‘백발’로 표현되었습니다. 백발은 지혜로운 노인을 말하며, 고대 근동에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들의 일생의 경험은 지식으로 쌓였고, 그들의 인생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노인들은 백발에 이를 때까지, 역경 가운데서도 자녀들을 양육하며, 생활터전을 확립하며, 더 나아가 공동체에 덕을 끼치고 아름다운 열매를 남깁니다. 이는 힘과 지혜가 어우러진 열매이자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입니다. 젊은 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힘만 의지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르호보암 왕 같이 실패할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 왕이 된 르호보암이 왕국의 문제를 잘 아는 원로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교만하게 말하자, 북부의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으며, 남북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도, 미덕 없는 백발,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지지 못한 백발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 잠언은, “인생이란, 좋은 것(=힘)이 더 나은 것(백발=지혜)으로 바뀌어져 가는 과정이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16:31)
잠언20:30절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가르침의 중요성’의 관점에서 29절과 30절은 보완적 관계가 있습니다. 29절은 젊은 자들이 ‘백발의 지혜’를 얻을 것을 권고하나, 본 절은 권고만으로 안될 때, 신체적 징계를 통해 교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잘못에 대하여 고통을 받으면 행동을 고칠 뿐만 아니라, 성숙하게 됩니다(3:11-12). 어린 아이들이야 부모가 매를 들어 교정한다고 하나, 다 큰 청년이나 어른들의 경우 누가 회초리를 들겠습니까? 하나님 혹은 그분의 대리자로서 왕과 같은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를 사용하여 섭리 가운데 교훈하고, 왕은 직접적인 형벌이나 배상 명령을 통해 바로잡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악을 없애는 절대적인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징계할 수 없는 왕(혹은 지도자)은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은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계속 불순종하자, 블레셋 군대의 칼을 통해 죽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징계가 아니라 범죄자의 처단이었습니다. 이 반면 다윗 왕은 늘 순종하다가 간음과 살인 죄를 범하자, 낳은 아들 중 첫째, 둘째, 셋째까지 모두 살해당했고, 왕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던 솔로몬 왕이 말년에 우상숭배를 감행하자 주님의 뜻을 따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평화의 사람 솔로몬은 근심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왕기에 기록된 왕으로서, 흠이 없는 왕은 하나도 없으며, 주님은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반역과 심판의 역사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느니라” (고전10:11)
잠언21:1절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봇물’이란 ‘보에 괸 물 혹은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을 의미합니다. 가뭄 때에는 농부들 사이에 물꼬로 인한 다툼이 많이 발생합니다. 농부 자신의 논에 물을 대게 하려는 것이죠! 물론 홍수 시는 반대입니다. 이와 같이 농부는 물길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계획하듯이, 주님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역사를 관장하십니다. 즉 왕(=지도자)의 마음은 그분의 손에 좌우되며 역사는 당신의 뜻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뜻을 항거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선지자들이 밝히 기록하여 증언는데, 구약성경의 가치 중 하나입니다. 특히 역사서(여호수아, 사무엘, 열왕기, 역대,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선지서들은 역사의 배후에서 당신의 뜻을 집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명확히 묘사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굽 왕 파라오와 페르샤 왕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많은 이적과 재앙을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게 하시고, 홍해까지 따라와 주님을 대항하려는 그들을 전부 멸하셨습니다(출10:1-2). 파라오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였습니다. 또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포로로 잡혀온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하셨습니다(에스라1:1-4). 그런데 고레스 왕에 의한 바벨론 정복이나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시겠다는 선포는 이미 170년 전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바였습니다 (사44:28-45:1-6, 13). 이를 알고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지혜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
시편119:137-144절–‘차데(צַ)’ 연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7절)
‘차데’ 연의 주제는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말씀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히 표현하시며, 또 말씀 속에 와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기에, 그분이 하신 말씀(약속)은 의롭습니다(137). 따라서, 주님이 주신 ‘증거들’ 역시 의롭고(138,144), 영원합니다(142). 주님의 말씀은 그분 자신의 인격, 마음, 판단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늘 높은 곳이나, 바다 깊은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 의로운 말씀에 사로잡혔고(139),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실로,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철저하게 검증된 진실한 증거입니다(140). 주님의 약속과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에 비하면, 지위(미천)와 평판(멸시)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141). 성취되는 것은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이지, 인간의 의견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그분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얻어, 고난 속에서 살아갈 힘을 갖습니다(143). 고난이 어려운 것은 고통과 장래에 대한 절망 때문인데, 주님을 신뢰하는 시인은 오히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니다(롬5:3-5). 그러므로, 시인은 주님을 시험하지 않고, 그 대신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갖도록 기도의 과녁을 맞추고, 신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소망, 사랑의 삶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길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편119: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