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1/21-25)

잠언20:17절
“사람들은 속여서 얻은 빵이 맛있다고 하지만, 훗날에 그 입에 모래가 가득 찰 것이다.”(새번역)

히브리 본문의 직역은 “속인 빵은 사람에게 달콤하다 그러나 후에는 그의 입이 자갈로 채워질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겨납니다 : “어떤 면에서 빵이 거짓일까?”  빵은 주된 음식이나, 인간의 모든 물질적 소유를 상징할 수 있는데, 그 획득방법에 따라 그 ‘빵’이 혹은 그 ‘의복’이 혹은 그 ‘학위’가 거짓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잠언은, 거짓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얻은 소유물은 처음에는 즐겁고 유익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해가 됨을 가르쳐줍니다.  “빵인 것처럼 보여 먹었더니, 실제로는 자갈이라서 뱉어내야하다니!” 이것이 그 정확한 뉘앙스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비시 830년경)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것을 본 시종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요청인 것처럼 거짓으로 말한 뒤,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구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오히려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고 게하시의 집까지 배달해 주고 떠났습니다. 게하시는 그것들을 집에 감춘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엘리사 앞에 나아갔습니다. 엘리사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게하시야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 물었습니다.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탐욕과 거짓 행위를 지적하고는,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갈 것이고, 네 자손도 영원히 그 병을 앓을 것이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게하시가 엘리사에게서 물러나오자, 온 몸에 나병이 발병하였습니다(왕하5장). 잠언은 가르칩니다: “거짓 수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잠언20:18절
“계획은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세우고, 전쟁은 전략을 세워 놓고 하여라.”(새번역)

18절과 19절은 “그러므로 지혜를 받으라”는 결론입니다. 지혜자는 충동적이 아니라, 신중히 숙고한 후에 일에 착수합니다(15:28; 19:2). 전단은, 모든 영역에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수행하여야 할 일반원칙을, 후단은 특히 전략을 세워야 승리를 챙취할 수 있는 전쟁을 예로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전략은 매우 중요합니다(24:6). 경솔히 전쟁에 돌입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쁜 일들만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는 전략을 충분히 세우지 않고 공격한 결과,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강력한 저항에 허를 찔렸습니다. 계획은 삶의 여타 영역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본 잠언은 효과적으로 이 교훈을 가르치고 적용하도록, 뛰어난 병행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사업, 시험, 아이들의 교육, 그리고 소송에서도 먼저 조사하고 전문가들과 의논하여 중지를 모은 뒤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잘 모르며, 더구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좋은 삶을 누리도록 의도하신 창조주의 지혜입니다. 그분의 뜻을 무시하고 책 몇 권 읽고 독단적으로 결정하거나, 지식 없는 사람들과만 의논하거나,  혼자 골방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떠오르는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어리석은 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주의해야할 부분은 지혜의 존재 의미입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우리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어지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목적입니다 (고전10:31). “너는 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하지도 말아라.” (잠언24:1,새번역).

잠언20:19절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는 사람이니, 입을 벌리고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라.”(새번역)

“언어와 사업”에 관한 단락(20:12-19)의 결론인18, 19절은 서로 보완적 관계가 있습니다. 18절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의논하라’는 뜻을, 19절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만 의논해라”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11:13절,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지만, 마음이 믿음직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은 비교 구절입니다. 다만, 13절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과 ‘분별력 있게 말하는 사람”을 대조하고, 19절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과 “생각없이 말하는 사람”을 동일시하여, 같은 교훈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험담(gossip)하는 사람’은 ‘두루다니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험담’은 지혜의 부족을 보여주는데, 이는 험담 자체가  사랑의 결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사람을 헐뜯겠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마음도 없고, 또 가볍게 여기기에 별 생각없이 화제꺼리로 삼게 됩니다. 더구나, 험담은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넘어, 마치 들불과 같이 사람 사이를 파괴시키곤 합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험담이 너무나도 매력적입니다. 잠언은 험담을 구하기 힘든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는 표현을 통해 ‘험담’의 힘을 보여줍니다(18:8). 그리스도인들은 험담의 욕구가 올라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험담을 피하듯이, 험담하는 사람을 피하여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12:36,새번역).

시편119:73-80절 ‘요드(יָ)’연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3)

‘요드’ 연의 주제는 ‘인생, 계명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시인은 주님이 주신 총명을 갖고 그분의 계명을 배우기 몹씨 원합니다. 계명의 원어는 ‘미추와’로서 ‘명령’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은 그분의 명령대로 존재합니다(시33:9). 그러므로, 그분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은 멸망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시인을 조성하셨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인이 인생을 통해 계명을 배우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되어야 그분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73). 이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후, 바로 가나안 땅이 아니라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사람과 달리, 신자의 마음에는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살아 움직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계명을 가르쳐 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배우게 되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유익을 토로한 시인은(7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소망’의 메시지를 되새기는데 (74), 바울의 경험과 일치합니다: 환난-인내-인격-소망-사랑(롬5:3-5). 한편, 주님의 약속이 시인의 삶에서도 증거되기를 원하는 경건한 신자들을 생각하게 되자(79), 이들을 위해서도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시인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75-77). 지금, 교만한 자들이 거짓 행동으로 시인을 괴롭히지만 (78), 시인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우리의 고백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율례들을 완전히 지켜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시편119:80,새번역).

시편119:81-88절 ‘카프(כָּ)’연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1)

‘카프’ 연의 주제는 ‘고난, 삶의 그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교만한 대적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고(85), 신실한 시인은 주의 구원을 기다리다 지쳤습니다(81). 그래서 시인은 외칩니다 :”Help me!”(86).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시인은 상황의 변화를 위해 절실히 주님께 간청합니다(81-84). 그가 당하는 고난이 너무나도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의를 당한 과부처럼, 시인은 도움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85-88). ‘카프’ 연이 ‘탄원의 기도’로 가득찬 이유입니다. 시인의 기도는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인생의 필요와 고난의 현실까지 토로하는 탄원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인내의 끝에 ‘기도’라고 불리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내의 끝에 가게 되어 절망할 때 혼자 그 고통을  안고 살지, 기도로 주님 앞에 가지 않습니다. 원죄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기도가 고난의 첫 번째 희생제사가 될 때가 정말 많지만, 반면 그 기도는 현실적으로 가장 확실한 치료제입니다. 왜냐하면 절망의 끝에는 ‘소망’(81-82)이라 불리는 방과 ‘순종’(83,87)이라는 또 다른 방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 방들로 가는 다리이자, 능력입니다. 고난은 극도로 불편할 수 있지만, 순종으로 이겨야 합니다(88). 이는 신자에게 놓여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삶의 현재 규칙 (83,87,88)이며, 장래의 소망(81-82)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증거를 지키겠습니다”(시편119:88,새번역)


매일묵상(2022/11/14-18)

잠언20:14절
“물건을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아담 스미스는 물은 효용이 큰데 교환가치가 적고, 다이아몬드는 효용은 적은데 교환가치가 높은 데서 알 수 있듯이(가치의 역설) 상품의 가치와 효용은 비례하지 않고 노동이 가치의 척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공급측 강조). 100년 후, ‘가격은 한계효용에 결정된다”고 주장한 한계효용학파가 등장하여 이 역설을 해결하였습니다(수요측 강조). 오늘날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됨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 보다 2,800년에 지어진 본잠언의 목적은 경제현상을 논하는데 있지 않고, 경제활동을 통해 나타난 인간 심리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순진하게 살아가면 안 되고, 그 이면을 꿰뚫어 볼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득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거래 현장에서, 판매자는 손님이 생각하는 ‘이익’ 혹은 ‘심리’를 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구매자는 사고 싶은 물건을 발견하면, 좀 더 싸게 사려고 여러 가지 흠을 들추어 내면서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판매자는 손님이 지불하고자 하는 금액과 판매하려는 물건의 적정가치를 비교형량하여, 할인 폭을 결정합니다. 그러면서, 손님에게는 ‘이런 가격으로는 도저히 팔 수 없지만, 당신에게만 특별히 드리겠습니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구매자는 속으로 기뻐하며 돌아가서 싸게 샀다고 자랑하지만, 판매자는 그 위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입니다. 겉모습과 실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잠언의 취지를 고려해 볼 때, 어릴 때부터 거래나 아르바이트를 시켜서 실제 삶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잠언20:5,새번역).

잠언20:15절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삼국지』를 읽으면, 유비는 자신을 도울 지혜자 제갈공명을 얻고자 애를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고초려). 사업에 입문한 사람 역시, 경험 많은 상인에게 장사의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좋은 판단력을 갖고 적절한 권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희귀한 보배입니다(15). 이런 보배와 같은 사람을 얻으면,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지식과 지혜로 인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입술은 소유하기 쉽지 않습니다. 본절에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값진 금속들로 이루어진 장인의 작품들(목거리, 반지 등)은 단순한 금이나 진주 보다 훨씬 귀합니다. 귀금속이 이들의 재료인 것은 물론, 훌륭한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정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입술’도 같습니다. ‘생각이 담긴 언어’는 하나님이 확립하신 도덕질서에 맞는 지혜를 담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고된 훈련과 교육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귀금속들이나, 귀금속 장식보다 훨씬 귀중한 지혜가 나오는 ‘입술’입니다. ‘귀중한 이유는’ 지혜를 얻으면, 부, 명예, 장수 그리고 화평 모두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잠3:15). 다만, 지혜나 명철도 주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에 모사로 초청받은 아히도벨은 다윗의 진영을 파할 좋은 지략을 주었지만, 아렉 사람 훗세의 반론에 막혀 채택되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집안을 정리하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지혜자 아히도벨은 주인을 잘못 택하였고 실패하였습니다. “경우에 알맞은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이다.” (잠언25:11,새번역)

잠언20:16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공동번역)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겉옷을 담보로 제공하더라도 해질녘까지는 돌려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신24:10-13).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통은 겉옷은 담보로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외규정이 등장합니다. ‘취하라, 잡을지니라’는 명령형은 본잠언의 메시지를 잘 전달합니다. 그 방향은 채권자에게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잠언은 아무관계도 없으며 낯선 타인의 빚 보증을 서지 말라고 누차 경고하나, 이를 무시한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면 누운 침상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잘모르는 낯선 ‘타인’은 물론, 아무관계도 없는 외국인(‘외인’)의 빚보증을 서려고 하는 사람은 철이 없거나 바보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2:26,27). 잠언은 통상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하며, 그런 행위는 주님께 꾸어드리는 의로운 삶임을 밝힙니다(14:31;19:17). 그러나, 타인 혹은 외인의 빚의 보증물로 제공된 자의 의복이나 몸을 취할 경우는 아닙니다. 자기 빚도 아니고 잘모르는 남을 위해, 외국인을 위해 보증을 서는 바보의 의복이나 몸을 취하는 채권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대신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채무불이행이 있을 때, 채권자는 가차없이 의복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종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게 보증을 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열렬히 그리고 부지런히 채권자에게 가서 자비를 호소하는 길이외에는 없습니다(잠언6:1-2).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채권자, 채무자, 보증인의 관계를 잘 규율하고 있습니다만, 본잠언의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새겨야만 지혜로운 비즈니스의 삶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잠언19:29,새번역)

시편119:57-64절 – ‘헤트(חֵָ)’ 연
“주님, 주님은 나의 분깃, 내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57,새번역)

‘헤트’연의 주제는 ‘순종의 원천과 모습’이며, 주님(야훼)에 대한 신뢰로 시작하고(57), 주님의 신실한 사랑(헷세드)으로 맺습니다(64).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이 온 세상에 충만함을 고백합니다 (64). 그 ‘인자’ 하신 주님 자신이 시인의 분깃(한 몫으로 받은 유산)임을 고백하는데(57),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 지파와 같습니다 (수13:14,33). 이것이 시인의 순종의 원천이며, 순종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에 대한 헌신,  약속에 대한 신뢰, 율례에 일치되는 삶 등(55-56). 지금 시인은 역경 속을 헤쳐가지만, 순종은 지속됩니다. 그는 ‘주님의 증거를 따라 갔고’(59), 계명을 서둘러 지켰으며(60), ‘악인들의 줄(권모술수)이’ 두루 얽혔어도 주님의 법을 잊지 않은 것은 물론(61), 주님의 의로운 규례 때문에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감사를 드렸습니다(62). 한편, 시련 가운데서 시인은 은혜를 간구합니다만, 주님의 구원은 지체되고 있습니다(58). 그럼에도 그는 충성스러웠습니다(61).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밤에 오히려 감사의 노래를 합니다(62). 광풍이 몰아친 갈릴리 바다가 생각납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깊은 잠을 자고 계신 주님을 깨우자 비로서 일어나셨고,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즉시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시인의 순종과 믿음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인자하심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주님의 율례를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시편119:64,새번역)  

시편119:65-72절 ‘테트(ט)’연
“주님,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인 나를 잘 대해 주셨습니다.” (65,새번역)

‘테트’ 연의 주제는 ‘주님의 선하심’입니다. 5개 절이 ‘선하심, good’(토브)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은  시인을 ‘잘 대해 주셨고’(65), ‘좋은 명철과 지식’의 원천이며(66), ‘선하신 분’이며(68), 고난조차도 ‘유익이며’(71), 그분의 율법(토라)은 금은보화보다 더욱 ‘귀하다’(72)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시인의 배움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모함을 당하는 등 여러 사건 속(69,70)에서 주님의 지혜와 돌보심을 경험하자, 모두 싫어하는 고난조차 긍정적인 가치가 있음을 배웠습니다(71).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다가, 억울한 고난을 당하면 실망과 분노는 통상의 사람보다 더 합니다. 욥은 그 좋은 예입니다(욥6:1-4). 그러나 그 자체가 자신의 연약임을 깨닫게 되면, 질투와 미움에서 돌이켜 주님의 그 길을 곧장 가게 됩니다. 시인은 학교에서 국어와 산수를 배워 문장을 짓고 셈을 하게 되듯이, 삶의 길(율법)을 배우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빌4:12,13). 이것이 신자들의 보화로서, 시인은 ‘주의 입의 법이 천천 금은보다 좋습니다’ 와 같이 그 깨달음을 노래합니다(72). 그러나, 악한 세상에서 주님의 계명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good) 통찰력과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주십시오’(66)하고 기도를 드리는 바, 이 또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매일묵상(2022/11/07-11)

잠언20:11절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드러낸다’의 원어 ‘나카르’는 ‘알아내다’와 ‘가장하다’의 두 개의 뜻이 있기에,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전자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아이조차도 행동으로 자신을 알리는 것처럼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 알게 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사람의 죄된 속성을 강조하여 아이조차도 행동으로 자신을 위장하는데, 어른은 더 하기에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자의 취지를 따른 것이 개정개역이나 새번역이며, 문맥상 타당합니다. 품행은 아이의 인격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이미 마음의 깨끗함과 정직함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만약 아이가 “나는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해도, 어른은 아이의 행동을 본 뒤 판단할 것입니다. 하물며, 다 성장한 사람의 말은 행동의 증거 없이 믿을 수 없습니다(창8:21). 그러므로 잠언은 외모와 말 보다 행동이 더 나은 판단 기준임을 가르칩니다. 한편, 행동을 볼 때 재물에 대한 태도와 사용을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눅12:34). 사람의 가치관, 정직성, 품성 등이 그 사람의 재물을 대하는 태도에 모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속담에도 ‘그 사람을 알려면 금전 거래를 해 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행동에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면, 선한 행동을 위해서는 좋은 성품이 필연이고, 좋은 성품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뿌리를 잘 내릴 수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 주님 경외함을 가르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잠언9:10,새번역).

잠언20:12절- ‘언어와 사업’ 관련 잠언(20:12-19)
“듣는 귀와 보는 눈, 이 둘은 다 주님께서 지으셨다.”(새번역)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19:24-20:11절)의 단락 후, 솔로몬은 “언어와 사업”(20:12-19)에 관한 새 단락(20:12-19)을 시작합니다. 2 절씩 총 4쌍으로된 이 잠언의 구조입니다: 도입부(12-13), 본문(14-17, 신중하지 못한 언어와 사업), 그리고 결론(지혜를 받아들여라,18-19). 12절은 전 단락과 새 단락을 연결하면서, 지혜 가운데 성장하라고 교훈합니다. 상인은 정직이 최고 자질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두 종류의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여 고객을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20:9). 이처럼, 모든 인간은 도덕적 무능력에 빠져 있습니다. 마땅히, 주님이 지으신 두 종류의 인식의 기관- ‘듣는 귀와 보는 눈’ -을 사용하여 선을 위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12). 잠언에서 ‘귀’란 ‘듣고 순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듣겠습니까? 솔로몬과 같은 현자입니다. 한편, ‘듣는 귀’는 ‘보는 눈’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눈’이란 ‘깨어 경성하여라’는 뜻이 있습니다만, 지혜는 ‘듣는 것’을 ‘보는 것’ 위에 놓습니다. 귀는 무조건 듣게 되지만, 눈은 초점을 맞추는 동작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다’는 의미는 실질적으로 순종을 의미합니다. 창조주께서 ‘귀’와 ‘눈’을 만드신 이유는 부지런히 배우고 삶에 적용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만약 잠언의 제자들이 이 두 기관을 통해 경건한 지혜를 얻는다면, 사업에서 성공하지 실패하지 않으며, 살아나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언3:18).

잠언20:13절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

본절에서 ‘눈’은 12절과 13절을 묶는 주제어로서, ‘보는 눈’(12)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게으른 자는 잠자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의 눈이 떠 있어야만,  자신의 재물이 상실되거나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타인이, 종(17:2)이든 도둑이든 거래 상대방(20:14)이든 말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자들은 주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지혜를 갖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삶을 위한 기관(눈,귀)들을 주셨지만, 그것들을 책임 있게 사용할 의무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대신 보아주시거나,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지혜를 주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부지런히 양 기관을 사용하여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복한 삶을 찾아 가도록 디자인하셨음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현자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여 부지런히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찾지만, 게으른 자는 힘든 노동이 싫어서 혹은 세상이 두려워 침상 위에서 구르며 살아갑니다. 잠언의 제자는 자신의 사업과 집안을 보살피고, 근면하게 살아가지,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 않습니다(잠31:27).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업과 일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위험성 역시 경고합니다. 우리는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이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시127:2, 새번역).

시편119:41-48절 ‘와우(וִֽ  )’ 연
“(그리고)주님,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내게 베풀어 주십시오.” (41,새번역)

‘와우’연의 8개 절은 모두 접두사 ‘와우(그리고)’로 시작되나, 개정개역 등 한글 번역에서는 이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와우’를 매 절마다 사용하여, 간구와 결단한 내용을 순차적으로 노래합니다. 시인은 순결한 삶을 열망하지만(베트), 세상은 낯선 곳(기멜)이며 압박들로 가득차 있고(달레트), 마음 역시 탐욕 등으로 갈등을 겪습니다(헤). 이때 주님의 ‘인자하심- 헷세드’과 ‘구원’의 약속은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41). ‘헷세드’는 우리가 도움이 절실할 때마다, 그 필요를 아시고, 돌아보사 공급하시며, 구원하시되, 결코 한 번도 실패하시지 않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절하며 간구하자, 주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셔서, 손을 대시어 즉시 완치시켜주신 사건은 좋은 예입니다(막1:40-42). 따라서, 시련을 당하여 침울할 때, 시인은 ‘살아나도록’ 기도하고(40), ‘그리고 인자와 구원’도 잊지 않도록 간구합니다(41). 이어지는 42-48절은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담대함, 규례를 사모함,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운 순종, 주님을 거침없이 증거함, 율례에 대한 즐거움과 묵상 -을 순차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시인과 같이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하면 그분의 일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과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게 되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44-46). 고난의 열매 중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계명들을 내가 사랑하기에, 두 손을 들어서 환영하고, 주님의 율례들을 깊이 묵상합니다.”(시편119:48,새번역).

시편119:49-56절 – ‘자인(ֽ זָ)’ 연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49)

‘자인’연의 주제는 ‘고난 속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고난의 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를” 기도하며(49), 자신은 고난 속에도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기억한다고 두 번이나 단언합니다(52,55). 시인이 고난 중에 ‘소망’을 갖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의 확실함 때문입니다(49).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근간이자, 경건의 확실한 기초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구원을 고대하는 중에 주님의 율법은 자신에게 소망의 상징이요 위로의 수단이 됨을 노래합니다(50,54). 지금 시인은 대적에게 심한 조롱과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자 다시 살아남을 경험합니다(50,51).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는 우리의 노래요, 밤에도 감사와 찬양의 근원이 되기에, 오히려 역경은 소망을 강화시킴을 깨닫게 됩니다(51). 시인은 조롱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그분의 말씀을 버린 악인 때문에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53). 그렇지만 본 시에서는 ‘율법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며, 믿음에 대한 자만심이 아니라 소망과 겸손의 마음을 가진 시인이 보입니다. 한편, ‘자인’ 연의 구체적인 예는, 빌립보에서 오해를 받아 매맞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 밤에 하나님을 찬양한 바울과 실라입니다. 주님은 옥터를 흔드시고, 그들이 당신의 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 같은 구원의 사건의 묵상은, 고난에 처한 우리의 위로이자 행복입니다 “주님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삶에서 내 행복을 찾습니다.” (시편119:56,새번역).  

매일묵상(2022/10/31-11/4)

잠언20: 8절
“재판석에 앉은 왕은 모든 악을 한눈에 가려낸다.
”(새번역)

본 잠언은 정의롭고 현명한 왕을 전제합니다. 그 왕은 냉철한 판단력과 통찰로써 그의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색출, 제거하여 정의를 구현합니다. 정조 대왕이 어느 선비의 시집간 딸이 억울하게 죽자 수사하여 범죄자들을 색출(시어머니, 조카)하여 악을 제거한 뒤, “과인이 통치하는 이 조선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한 것은 좋은 예입니다. ‘한눈’으로 의역된 ‘왕의 눈’은 어떤 불의도 왕의 심판을 피해가지 못함을. ‘가려낸다’의 원어 ‘메자레’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 내기 위해 ‘키질하다, 까부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왕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악을 제거함으로 그 세력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필요한 자질은 지혜로서, 지혜는 올바른 법적 판단을 내릴 때 특히 요구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두 창녀의 소송을 지혜로 해결한 사례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이 잠언이 적용된 예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이스라엘도 왕을 통해 정의가 달성되지 못하였는데, 인류 전체의 역사의 경우 왕권이 얼마나 남용되었겠습니까?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고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도록 제도화한 것은 역사에서 얻은 지혜라 하겠습니다. 지금은 악의 완전한 제거가 불가능하지만,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모든 악을 한눈에 가려내어’ 영원히 없앨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우리는 신실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2:4,새번역)

잠언20: 9절
“누가 “나는 마음이 깨끗하다. 나는 죄를 말끔히 씻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새번역)

9절은 지혜자를 일깨우는 잠언으로, 그들은 의롭게 살지만 때때로 자기 의와 같은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들 역시 죄와 씨름을 해야만 합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욥9:2). 그러므로 현자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늘 인식하여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주의하며 사는 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잘못 평가하여, 그의 행동과 언어 속에 미련한 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다윗 역시 잠시 경계를 늦추자,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에게 죄를 지적 받자마자,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시51:7).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회개한 후 다윗은 “주의 성신을 내게 거두어 가지 마시옵소서” (시51:11)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는 주의 제자들은 성령께서 스승이 되셔야만 탐심과 죄된 자아를 이기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연약한 본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과 함께 자신을 낮추어야 비로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롬8:13-14).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자기극복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극복을 위해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후에, 비로서 믿을 수 있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비록 우리 힘으로는 죄에서 깨끗함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 안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았음을 성경은 선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1:7,새번역).

잠언20: 10절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와 되는 모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새번역)

신명기는,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신25:13-15a)고 규정합니다. 이런 바른 상도의가 행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에,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25:15b)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정직’은  상인의 이웃사랑의 핵심입니다. 잠언은 요약합니다: ‘돌과 돌, 에바와 에바 그 둘 모두 주님이 미워하신다’(원문직역). ‘돌’은 천칭과 같은 양팔 저울로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추로 사용되었고, ‘에바’(약22L)는 밀과 같은 부피를 재는 말이나 되를 의미합니다. 만약 동일한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지 않고, 상대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한다면, 거짓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자를 미워하십니다. 물건을 파는 상인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만약 군인들이었다면 “강제로 빼앗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아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침례요한). 이런 가르침들은 십계명의 ‘탐내지 말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미 도착되어 있기 때문에,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십시오. 자족의 마음이 있으면 우리 믿음 생활은 큰 유익을 얻습니다. 그리고 속여서 남의 것을 취하기보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함을 주님께 기도드리시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b-3).

시편119:25-32절 ‘달레트(דּ)’ 연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25)

 ‘달레트’ 연은 ‘기멜’ 연이 고백한 낯선 환경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현실을 토로합니다. 굴욕감(25), 곤비함(28), 거짓 행위에 대한 유혹(29), 주님의 증거를 지키다가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는 당혹감(31) 등이 그렇습니다. ‘진토’란 죽음을 상징합니다(창3:19). 시인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경건한 신자이기에, 주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호소합니다. 경건한 신자인지 아닌지는 이때 확연히 보여집니다. 전자에게는 인생이 너무나 힘들다(28) 느껴지는 환난의 때는 절망하는 순간이 아니라, 기도의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달레트’ 연은 7 개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살아나게 하소서’(보전, 25), ‘율례를 배우게 하소서…깨닫게 하소서’(지식, 26-27), ‘나를 세우소서’(힘, 28), ‘주의 법을 은혜로이 베푸소서’(은혜, 29),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결과, 31) 등입니다. 한편, 환난의 때는 특별한 헌신의 때입니다. 시인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30)하며 헌신을 다짐합니다. 또한, 환난의 때는 안식의 때인데,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에 신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5b,28b,29b). 그래서 시인은 ‘주의 말씀대로’ 구원받아 주님의 뜻대로 살 것을 믿습니다. 여기에 신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고난의 시기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의 신실하심과, 주님의 계명의 참된 의미를 배우는 좋은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시편119:32)

시편119:33-40절 – ‘헤(ה)’ 연
“주님,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33,새번역)


‘헤’연은 선생과 지도자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주님(야훼)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3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33-35절 (전적인 헌신 다짐) 36-37절(탐욕에 흐르지 않도록 간구), 38-40절(주님의 보살핌과 공급하심을 요청함).  ‘주님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겠다는 시인의 결심(32)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적대적인 환경(‘기멜’ 연)도 아니고, 인생의 환난(‘달레트’ 연)도 아닙니다. 마음의 불순종입니다. 순종하기 원하지만(34), 탐욕이나(36), 안목의 정욕은 가장 큰 적입니다(37). 불순종하려는 마음에 의하여 순종하려는 마음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에는 늘 긴장이 감돌고 있습니다. 시인의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시인은 9 번이나 간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순종의 그 길을 지켜주시며(33), 마음을 깨닫게 하셔서 그분의 법을 준행할 수 있게 하시며(34), 우리로 참된 기쁨의 삶으로 이끄시고(35), 무가치한 것들을 추구하지 않게 막아주시고(36-37), 우리를 실망에서 건지시며(39), 의롭게 보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40). 어두운 밤에 조명을 비추면 동상이 보이는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순종으로 이끄는 깨달음을 주십니다. 어떻게요? 사도 바울 역시 그 해답은 ‘기도입니다. 그는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서 교인들 모두에게 성령님을 통해 나오는 지혜와 총명을 받아 하나님을 알도록 기도합니다 (엡1:17;빌1:9;골1:9). 이것은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편1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