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0/24-28)

잠언20: 5절
“사람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새번역)

본절의 ‘사람’은 현자, 보통사람, 미련한 자를 모두 포함합니다. 물론 도덕과 경건의 요소도 그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똑똑한 바보는, 지식, 재물, 권세를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교만한 자입니다. 만약, 현자라면, 그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아 아무도 모르지만, 다른 현자는 그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왕후가 죽어 새 왕후를 뽑아야 하였지만 황제는 전혀 속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대신이 반지를 여러 개 만들되 그 중 하나를 특히 아름답게 장식하여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반지의 주인공을 찾아 황후로 천거한 고사가 있습니다. 황제나 신하 모두 현명하였습니다. 만약, ‘보통사람’의 경우 자신조차 모를 수 있지만, 현자는 그 의중을 길어내어 조언을 주거나 바른 처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두 남녀가 사귀고 있었습니다. 자매는 형제의 결혼의사 여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지혜로운 제안을 하여 형제의 마음속의 생각을 길어낸 뒤, 그를 떠났습니다. 그 자매는 그후 좋은 형제를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만약, 미련한 자(악인)라면, 그의 악한 생각은 마음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간파합니다. 두 여자가 각자 갓난아이의 어미라고 다투자, 솔로몬 왕은 칼로 그 아이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두 사람의 생각을 드러낸 재판은 유명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이 제일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물론 지혜자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고, 또 현자의 조언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잠언21:30,새번역).

잠언20: 6절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말하기는 쉽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입니다. 흔히들 자신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인 것을 자랑하나 막상 일이 터지면 그들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전7:28), 예나 지금이나 희귀합니다. 인간의 연약함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에서 전술핵 사용도 가능하다고 언급하자, 나토 회원국 사이에 전술핵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작은 전술핵도 한 발에 탱크 30대를 궤멸시키는 위력 때문에, 유럽에 배치한 전술핵의 관리는 미국(핵 자체 관리)과 나토(운반할 전투기 관리)로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40년 전에, 유럽은 미국이 임의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을 지켜줄 의지가 미국에게 있는가를 의심합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유럽과 전술핵 투하 훈련을 매년 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안심시키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한편, ‘인자’란 ‘헷세드’로서 언약관계에서 나오는 ‘변함없는 사랑’을 지칭합니다. 예컨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후, 목이 곧고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는 하셨지만, 생수와 만나를 주시는 등 이들을 신실하게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에게 늘 신실한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말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위선과 연약함을 파악할 줄 알고, 바위 같이 든든한 친구를 부지런히 찾아 인생의 길을 함께 가라고 교훈합니다.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잠언20:7,새번역)

잠언20: 7절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새번역)

7절은 6절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인자)’을 보여줄 자는,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입니다. 7절의 전, 후단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전단에서 ‘의인’이란,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이웃에게 변함없는 친절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에서 ‘의’란 주님을 경외하면서(하나님 사랑)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것이 없는 삶(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의인’은 순전(결백)합니다. 그 대표자는 욥입니다(욥1:1). 물론 의만 행하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롬3:9-20). 그러나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이란, 결코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욥9:1-2), 주님(야훼)께 순종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고 분투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윗처럼 죄를 지적받으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후단은 그들의 후손이 받는 축복을 언급합니다. 솔로몬이 의인의 일생을 자세히 관찰해 보자, 후손이 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의인이 후손에게 미친 의로운 유산과 영향력에 기인합니다. 의인은 후손들에게 영적유산(행복한 기억은 축복임)과 실질적인 유산(지혜, 명예 등) 모두를 남기면서(잠13:22), 그들의 삶의 모델이 됩니다. 그들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라는 가훈을 마음에 새기고, 겸손과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 악에 떠나게 됩니다. 신실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주십니다(잠22:4). 이것이 의인의 유산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처럼, 의인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좋은 롤 모델 자체입니다.”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5)

시편119:9-16절 ‘베트(בְּ)’ 연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9)

 ‘알레프’ 연은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망이, ‘베트’ 연에서는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라는 수사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실제적인 길은 청년의 열망을 “주님의 말씀(다바르- 말의 내용에 초점)”과 주님 자신(10,12)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청년’의 삶의 순결은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삶의 여부는, 의지의 방향, 마음과 기억의 내용, 입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들, 생각의 주제 등에 달려 있습니다. 한 마디로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가의 문제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많은 재물을 가진 것처럼 즐거워합니다(14). 이것이 시인의 경건의 비결입니다. 그에게는 ‘주의 말씀’이 재산이자 보물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주의 말씀에 향하게 되고, 그런 보물을 주신 주님께 일편단심인 동시에(10,14), 당연히 ‘주님의 말씀(이므라- 말의 소리에 초점)’을 소중히 간직합니다(11). 더 나아가 주의 모든 규례(미쉬파트- 재판 규범)를 입술로 선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법도(픽쿠드-교훈)를 늘 묵상하면서(13,15) 보물의 가치를 음미하고, 주의 증거들의 도(데레크- 길)와 율례들(훅카- 석비에 새겨진 확립된 규정)을 보물을 보듯이 즐거워 합니다(14,16). 시인은 부자가 재산을 잃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주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합니다(16). 그러나, 주님께서 도우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만 열매를 맺기에 시인은 또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찬송을 받으실 주님, 주님의 율례를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12)

시편119:17-24절 – ‘기멜(גּ)’ 연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8)


‘기멜’ 연은 두 절씩 연결됩니다. 17-18(순종을 가능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은 21-22(불순종은 벌하시고 순종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뒷받침되고, 19-20(세상의 나그네로서 시인)은 23-24(비방의 대상으로서 시인)에 의해 구체화되었습니다.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도 거룩한 삶은 쉽지 않습니다(9). 여기에 환경조차 호의적이지 않는다면(비방 등)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23).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애를 쓰는 성도들에게는 낯선 곳이며(19), 나그네처럼 배척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21).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기멜’ 연에 시인의 비결이 있습니다: 만유의 주님께 ‘필요한 것을 충분히 공급해 달라’고 요청드리는 것입니다 (17). 이중, “주의 율법(토라-가르침)”에 숨겨진 ‘놀라운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는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18). ‘주의 가르침’은 세상이 갖지 못한 우리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마7:12-황금률). 성경말씀 속에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은 물론, 그분의 구원의 행적들(출애굽, 부활의 기적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과거의 사건이고 지금 당장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려운 환경을 만나면 동일한 경이와 믿음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시면 그 생생한 의미를 깨닫고 험한 세상을 이길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재산입니다. “주님의 증거가 나에게 기쁨을 주며, 주님의 교훈이 나의 스승이 됩니다.” (시편119:24,새번역)

매일묵상(2022/10/17-21)

잠언20:2절
“왕의 노여움은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면 목숨을 잃는다.”(새번역)

술취한 자의 떠들석한 모습을 바보들의 목록(19:24-20:1)에 포함시킨 솔로몬은, 이제 그 바보를 왕의 손에 넘겨놓았습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만약 누군가 왕의 진노를 불러일으킨다면 치명적이고도 즉각적인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사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누구나 목격할 수 있는 위험한 동물로서, 사자를 만난다는 것은 죽은 목숨과도 같았습니다. 더구나 부르짖음은 사자가 먹이를 잡았을 때 하는 승리의 외침으로, 그 누구도 사자의 손에서 먹이를 구해내올 수 없습니다. 왕을 격노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와 같아, 만일 그 앞에 불경한 태도를 보이거나, 맡은 일에 신실치 못하다면 목숨이 위태하고,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잠언은 19:12절(“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에서 같은 교훈을 주었으나, 후단이 다릅니다. 19:12절은 위험과 혜택 양쪽을 다루나, 본절에서는 위험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방탕하다가 목숨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우리 각자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주인이 혼인 집을 가려고 출타하였을 때,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술먹고,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이르러 엄히 벌하신다는 교훈입니다(눅12:41-48).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는 말씀 자체여야 할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잠언20:3절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다툰다.”(새번역)

잠언19:24-20:11절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을 주제로 합니다. 먼저, 바보들의 목록을 열거하고(19:24-20:1), 하나님을 대리하여 이들을 교정하고 벌하는 자로 왕을 등장시킵니다(20:2-11). 그들은 게으른 자, 거만한 자, 불효막심한 자, 교훈에서 돌이키는 자, 악한 증인, 심판을 비웃는 오만한 자, 술취한 자, 다투는 자 등입니다. 본절의 전단은 다툼을 삼갈 경우 ‘지혜로운 자’라는 사회적 존경을 받지만, 후단은 모든 바보는 다툼을 시작하는 자임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왕이 미련한 자들을 노여워하고 벌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결과가 다툼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분쟁을 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쟁을 평화롭게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사람이 왜 분쟁을 시작하고, 거기에 가담하겠습니까? 자존심(교만)을 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상 자존심을 내세우는 행동에서 다툼이 시작되고, 그 사람의 덕망은 실추되고 낮아집니다. 그러므로 “명예로 가는 길은 자신의 명예를 방어하지 않는 길이다”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부수자, 전쟁 시작 전에 요청받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이 상하여 크게 다투었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인 전과를,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는 비유와 함께 말하여, 그들의 노여움을 풀고 다툼을 피하였습니다 (삿8장). 모욕을 참고 겸손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잠언의 지혜자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6:32)  

잠언20:4절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게으른 자’는 바보들의 목록 중 첫 번째(19:24)이며, 그에 대한 벌은 ‘사회적 불명예’(10:5)와 ‘빈곤’ 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늦가을(10월-3월)이 밭을 갈 시기였습니다. 게셀(솔로몬 왕의 요새)의 달력비문(BC10세기) 내용입니다: “두 달 모으기(올리브), 두 달 파종(곡물-보리와 밀), 두 달 늦게 파종(콩과 채소), 한 달 괭이질(건초를 위함), 한 달 보리 수확, 한 달 수확(밀) 그리고 (곡식)의 무게를 재면서 포도를 수확하는 두 달, 여름 과일을 거두는 한 달.” 그러므로 늦 가을의 두 달은 곡식의 씨를 뿌려야 하고, 이는 단단한 밭을 괭이로 갈 것을 요구하나, 밭 가는 일은 비가 내려 땅이 부드러워져야 가능합니다(이른 비). 만약 그 시기를 놓치면 그 해 농사는 망친 것이며, 6개월 후의 추수의 때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장의 빈곤을 넘어 다음 해를 위한 씨조차 없는 가난한 자로 전락하여, 여기 저기 도움을 요청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모든 인간은 생존을 위해 힘든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8). 이를 통해  인간의 교만은 낮아지고, 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기 때문에, 노동은 하나님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 명령을 무시하여, 부지런한 부자는 마음을 낮추지 못해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경건한 부지런함’의 덕목은 어릴 때부터 마음과 몸에 심겨야 하기에, “청년의 때란, 도덕적 지혜가 뿌리내리기 위해 인격의 모판을 준비할 시기입니다” (말빔).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잠언13:4,새번역)

시편119: 1,2절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다. (새번역)

시편 중 가장 긴 시로서(176절), 주제는 ‘주님(야훼)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서 있다는 고백과 기도”입니다. 시인은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22개 단락으로, 각 단락은 두 구절로 이루어진 8개의 행(이행연구, 二行聯句, couplets)으로 구성하여 이 주제를 22번이나 반복합니다. 이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9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다바르, 이므라, 미쉬파트, 에다, 호크, 토라, 미스바, 픽쿠드, 데렉 – 단락의 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취사선택하여 문학적 탁월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며, 각 단락은 주의 깊게 작성된 가르침이자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선생님은 주님 자신이지, 인간 멘토가 아닙니다(102). 그러므로 이 시는 ‘토라(모세 오경을 통한 야훼의 가르침) 시’이지, ‘지혜의 시’는 아니며, 묵상의 분위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곳에, 섬김은 완전한 자유가 된다’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일탈하는 순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우리 생활양식을 경건한 토대 위에서 지어올리도록 하여 죄의 쇠사슬을 부수게 하시고(105,133), 또한 우리 보다도 더 위대한 지혜를 만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71). 앞으로 시를 한 단락 씩 묵상하겠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새번역)

시편119: 1-8절 – 알레프(אַ)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1-8절의 첫단어는 ‘아쉬레-복이 있다’입니다. ‘알레프(אַ)‘로 시작되며, 통상 ‘복’으로 번역된 ‘에쉐르’의 복수형입니다. ‘에쉐르’는 ‘곧다’ ‘똑바로 가다’란 뜻과 ‘번영하다, 성공하다’란 파생적인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쉬레’는 바른 길을 걷기에, 누리게 되는 번영과 성공의 삶 그 자체를 나타내며, 과정과 결과가 다 포함됩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고, 그 열쇠는 ‘여호와의 율법(토라- 가르침)’에 대한 순종입니다. 일편단심 그분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은 곱절로 ‘복이 있습니다’(1-3).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4). 그러므로, 주님의 율례(호크-석비에 새긴 변함없는 법령)를 행하게 도와달라고 외친 시인의 기도(5)는 첫연의 중심축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주의 모든 계명(미추와- 명령을 뜻함)’에 주의하게 되어(6), 수치를 당하지 않고, 배울 수 있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7). 이것은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주의할 것은, ‘여호와의 율법’의 내용입니다. 시인에게 그것은 모세율법(의식법, 제사법, 도덕법 포함)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가르침)’입니다 (고전9:21). 유대인들이 부딪힌 돌이 바로 이것입니다 (롬9:32). 그들의 우상은 모세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시인에게는 올바른 순종이, 나중에는 오히려 불순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토라)’에 대한 문자적 순종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알아야하며, 그분은 아들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요5:23).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시편119:8)

매일묵상(2022/10/10-14)

잠언 19:28절
“악한 증인은 정의를 비웃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통째로 삼킨다”(새번역)

9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입니다. 본 잠언은 잘못 양육시킨 자녀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법정에서 악한 증인으로까지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도대체 없고 악한 동기로 사법 정의를 비웃으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모세율법의 ‘동해보복’ 규정(출21:22-25; 레24:16-22)은, 악한 증인을 벌할 때도 또 반복됩니다(신19: 15-21). 아간(황금과 옷), 게하시(은과 옷),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경건한 신자 명예)는 탐욕 때문에 거짓말을 하였으며, 그 벌로 돌에 맞아 죽고(아간), 문둥병자(게하시)가 되고,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생명을 거두어가셨습니다(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러나, 거짓 증인들은 그것을 넘어서, 법정에서 의인을 죽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합 왕 때 나봇의 포도원 사건, 우리 주님에 대한 재판, 스데반의 재판의 경우입니다. 이 시대는 증인의 진술이 재판을 결정지었기에, 모세율법은 반드시 두 증인 이상으로부터 진술을 듣고 재판하도록 하였습니다(신19:15).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도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모두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그 선한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 규정만 충족하였지, 목적 달성을 위해 거짓된 증인들을 내세워 “죄악을 통째로 삼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요8:44). 그리스도인들도 외형적 고백이 고백이 아니고, 진실하고 선한 열매가 맺어져야만 참된 제자입니다 (눅8:15; 롬2:28,29).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 (잠언19:29,새번역).

잠언 19:29절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새번역)

본 잠언은 28절의 사법 정의를 농단하는 악한 증인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벌이 준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악한 증인’은 대표적인 오만한 사람 중 하나로서, 정의와 심판을 비웃지만, 오만한 사람은 곧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서 심판과 벌을 준비하고 계심을 알지 못합니다(시14:1). 하나님은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합당한 벌을 내리셔야 당신의 영원한 공의와 질서를 확립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들은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길로 행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에 대하여 질책을 받으면 통렬히 여기고 마음에 새겨 지혜를 더합니다. 단순하여 잘 속아넘어가는 자녀들은 벌(매)을 받으면 그때야 지혜를 얻어 돌이킵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아주 미련하여 100대의 매를 맞아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19:25). 이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어두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마25:41;유13). H.G. 웰즈는 『타임머신』, 『투명인간』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이를 넘어 성경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한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에 소망은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중 런던이 폭격받는 동안, 그는 공포로 몸을 떨면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폭탄이 아니라 어두움이다. 나는 일생 그 어두움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왔다”고 옆에 있는 보웬 여사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웰즈는 그 어두움만 두려워하였지, 빛되신 주님에게 갈 지혜는 없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잠언20:1절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술취한 자의 모습은 잘못 양육된 자녀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는 정신이 나가서, 절제도 없으며, 미친 것과 다름없어 분별의 한계와, 도덕 그리고 예절의 경계를 깨드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독주는 지혜와 삶을 파괴하는 악당과 다름없기에 자녀들을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으로, 잠언은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3:10).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하셨고,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포도주를 가지고 영접하였습니다 (창14:18).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지만, 남용하면 안 되며, 상황에 따라서는 그 선한 것들이 혜택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포도주 역시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출발선은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 사에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간의 지혜가 언제나 그 상황에 대한 최종 판결은 아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인간의 지성을 활용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인간 관계가 정의만큼이나 고려되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전7:16). 그래서 르무엘 왕의 모친은 포도주는 왕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괴로운 자에게 주어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도록 하라고 가르칩니다 (잠언31:6,7). 물론 미봉책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전도서7:18,새번역).     

시편118:22,23절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본 시의 ‘돌’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돌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는 구원과 심판 모두 되셨습니다 (벧전2:6-8;마21:42-44;롬9:32-33). 이스라엘의 공공건축물은 상부구조와 기초에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건축자들은 여러 돌 중 적합한 돌을 고른 뒤, 필요 없는 돌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공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돌이 후에는 꼭 필요한 돌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졌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아주 중요한 자리에 놓여 건물의 두 벽을 결합시키고 상부구조를 올리는 기초가 된 건축현장의 사례가 구원과 심판이라는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작고, 노예 처치에 있는 쓸모 없는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건축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과 약속이라는 특권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으로 가득차, 불순종하고 끝내는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쓸모 없는 돌로서 버렸습니다(행4:10-11).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시켜 구원의 주춧돌로 삼으시고, 모세율법을 폐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 위에 성전이 지어지게 하셨습니다 (엡2:11-22). 이같이 ‘버린 돌’이 이방인을 위해서는 ‘구원의 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심판의 돌’로 변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은 구원 받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8).

시편118:25,26절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새번역)

시의 배경은 축제(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24)로서, 필시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장막절 중 하나입니다. 이미 성전 안에 무리는 왕과 함께 오고 있는 다른 무리를 영접하면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 년 동안 ‘상징과 그림자들’(히10:1)로서 행하였던 그 시편이 갑자기 실재가 되었습니다 AD30년,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구원의 능하신 표적들을 본 수 많은 군중들은 주님을 영접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마21:9)를 외쳤습니다. 이들이 외친 ‘호산나’는 원래 히브리어 ‘호쉬아나’로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는 의미로서, 메시야에 대한 노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심으로 본 시편의 성취를 언급하셨습니다 (눅37-40). 물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슥9:9;마21:4,5). 이어지는 구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27)는 십자가 위에 밧줄로 매어진 주님의 팔들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제 구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고전5:7).

매일묵상(2022/10/3-7)

잠언 19:25절
“오만한 사람을 치면, 어수룩한 사람도 깨닫는다. 명철한 사람을 꾸짖으면, 그가 지식을 얻는다.” (새번역)


‘오만한 사람’의 원어는 ‘레쉬’로서 마음이 교만하고 고칠수 없으며, 모든 책망을 거부하는 자를 지칭합니다. 술에 잔뜩 취해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주정을 부리는 사람과 같이, 그는 교만과 자아도취에 잔뜩 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25절의 ‘오만한 사람’은 그 정도가 낮아, 교훈을 받아들이는 어수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1-9장의 교훈의 대상인 ‘어리석은 자녀’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세상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잘 속아넘아가는 자녀들’이라, 징계를 받으면 지혜를 얻어 돌이킬 수 있습니다. 본 잠언의 ‘오만한 사람’ 역시, 매 백대를 맞아도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할 정도의 거만한 자는 아닙니다. 다만, 그의 미성숙 때문에 마음을 높이게 된 것이라서, 벌을 받으면 바로잡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상자가 미성숙으로 인한 오만한 자냐, 아니면 악한 자로 말할 정도의 오만함(9:7)이냐를 분별하여 합당한 훈육을 해야 합니다. 이같이 교육 혹은 훈계란 사랑과 지혜가 함께 작동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로써, 바울 역시 이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이에 반하여, 후단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길로 접어든 사람을 말하며, 그런 사람은 계속하여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깨닫고 지식을 더합니다.“더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쓰여 있습니다.” (약4:6,현대인의성경).

잠언 19:26절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내는 자식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다.” (새번역)


25절의 ‘오만한 사람’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받지 못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26), 교훈을 듣지 않고(27),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28) 3 가지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 전형적 행동이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낸다’는 본잠언의 묘사입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이 세상에 세운 질서와 권위의 가장 근본을 이룹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중종, 민재인)은, ‘효는 백행의 근본’임을 적어 놓았습니다. 출간 동기는 그 당시 풍속이 병들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동하여 금수와 가깝게 됨을 애통하게 여긴 마음입니다. 물론 이 책은 유교 질서인 임금, 신하, 부모, 자녀, 부부 등 다섯 관계의 도리(오륜)를 가르치면서,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단언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동몽선습’이 가르칠 수 없는 부모권위의 유래와 한계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도 주 안에서 해야 하며, 그 계명을 어길 경우 섭리 가운데서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징벌하십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성장한 자녀들은,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듣지만, 성장하여 부모가 늙고 힘 없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오만해집니다. 그들은 힘 없는 늙은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지경까지 타락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필연이기 때문에, 자녀의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지혜와 용기를 위해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엡6:4,새번역)     

잠언 19: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27절을 직역하면, “내 아들아 훈계(교훈)듣는 것을 중단하라, 그러면 너는 지식의 말씀들에서 떠나 방황할 것이다”, 이지만, 공동번역과 같이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을 등지려거든 꾸지람을 듣지 않아도 좋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는 동일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계속 교훈을 듣고 삶을 바꾸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은 일생을 거쳐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제자들이 더 이상의 교훈이 필요없는 지점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본 잠언의 교훈을 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장소이기에, 지혜와 지식의 추구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만약, 귀찮다고 교훈에 등을 돌리면(27a), 지혜와 지식에서 떠나게 되고(27b), 부모에게조차 범죄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26). 정상적인 경우라면,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의 인간성은 두 번 재고할 여지도 없이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반역한 아담과 하와의 품행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불효막심한 행동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표상으로 볼 수 있는 부모에게 불순종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본 잠언을 쓴 솔로몬조차 자신의 교훈에 주의하기를 그친 순간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에서 떠났고,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성전 바로 앞 감람산에 산당들을 지어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참 어리석은 왕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잠언1:7,새번역).



시편117:1절
“너희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칭송하여라.”(새번역)


이 시는 단 두 절이지만, 믿음은 위대하고, 시야는 전 세계에 미칩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온 세상의 메시야임을 전하는 근거로서 이 시를 인용하였으며(롬15:11), 그 완전한 성취를 요한계시록에서 미리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계7:9,새번역). 시인은 1절에서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라고 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의 핵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천하 만민의 복의 통로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 규정은 이 언약을 반영하여 처음부터 이방인을 언약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출12:48-49). 490년 후 드린 솔로몬 성전 건축 기도에서도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왕상8:41-43). 또한 홍해를 가르신 것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한 표적들은 동시에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표적이었음을 시편 기자들은 선언하였습니다(예:96-98편).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입니다(2). 그것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심으로 명백해졌습니다 (롬5:8).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기쁨의 외침을 드리게 됩니다(2).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주님의 진실하심은 영원하다. 할렐루야” (시편117:2,새번역).

시편118:1절 – 호산나!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새번역)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불려진, ‘애굽의 할렐’은 본 시편이 마지막 시입니다. 시를 읽어가면 성전으로 가서 예배드리려는 백성들의 행진이 있고, 그 중심에 그들을 이끄는 한 예배자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예배의 목적은 시편116편과 같이 개인적 구원 때문에 감사제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에게 합당한 승리의 찬양을 올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많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배의식(1-4), 개인적(5-14), 대중적(15f.)인 목소리들; 그리고 중심 인물과 그의 행렬이 예루살렘 성문에 접근하고 입성을 요구하고(19), 응답과 찬사를 받고(20, 26), 마침내 제단에서 순례를 마치고 있습니다(27). 시의 구조입니다.

     A  감사로의 초청(1-4)
         B 감사의 이유: 구원(5-21)
     A′ 감사 의식의 노래(22-29) – 호산나  이 시를 처음으로 노래한 사람들은 애굽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긴 역사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끝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마지막 승리의 입성과 유월절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내용을 전하는 복음서를 읽으면 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의 메아리가 본 시편의 전체에 걸쳐 울려퍼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특히 22절이하). 즉 본 시편의 절정은 신약입니다. 출애굽과 성전이 예표한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를 자세히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고, 그 기록이 복음서입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5).

매일묵상(2022/09/26-30)

잠언 19:22절
“사람이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가난함이 낫다.”(현대인의성경)


본절은 “야훼 잠언들”인 21절과 23절 사이에 놓여 있어, 자녀들로 하여금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도록 교훈합니다. 부자는 재물에는 높은 가치를, 사람, 특히 가난한 자에게는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사람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바란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헷세드’입니다. 이 단어는 ‘언약적 관계’의 핵심을 묘사합니다. ‘언약적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모두 언급할 수 있으나, 문맥상 여기서는 후자입니다.  후단은 재물보다는 인격의 온전함(고결함, 정직)이 낫기에, 인격적 고결함을 잃어버릴 바에는 가난(재물의 상실)을 선택하라는 권고입니다. 물론, 그것이 부를 비하한다는 말은 아니며, 오직 재물과 부의 가치는 상대적임을 밝혀줍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준수되어야 할 절대적 가치입니다. 후단을 전단에 비추어 생각하면, ‘헷세드-언약적 사랑’이 내포하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 사이에 신실하라는 교훈입니다. ‘헷세드’는 많은 미덕을 내포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람 사이에는 ‘신실하라‘ 혹은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며, 여기서의 주된 의미입니다.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거짓말은 신뢰를 근본적으로 깨뜨려 버리는 행동으로, 잠언은 이를 상당히 경계합니다((6:16–19; 13:5; 14:5; 25:18).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잠언 19:23절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생명을 얻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새번역)


본절은 16절에서 시작한 “궁핍한 자에게 친절하라”는 주제를 다루는 단락(19:16-22)의 결론입니다. 16절에서 죽지 않고 생명에 이르기 위해 ‘부모의 말씀”을 지키라고 교훈하는데, 23절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라’고 교훈함으로써, 부모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표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으로부터 자녀들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계명에 머무르면 성경이 약속한 모든 축복을 다 받습니다. 계명 가운데 머무르는 자를 보시고 축복을 주시고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는 분은 결국 우리 주님입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주님이 정하신 길은 이웃 사랑의 삶으로,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게 되며, 술은 물론 도덕적으로 유해한 환경에는 가지 않기 때문에 제도적인 보호장치가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위험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도 성경은 이 가르침을 간직한 제자들은 주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결코 주리게 되거나 재앙에 빠지지 않고, 만족스럽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실례를 증언합니다. 고대에 여행은 위험하였습니다. 짐승도 많았지만, 도적 떼나 강도 그리고 불량한 사람들의 문제는 더 컸습니다. 좋은 예가, 창세기18장에서 소돔을 방문한 두 천사를 해하려고 모여든 소돔사람들과 사사기 19장에서 기브아를 지나는 레위인의 첩을 빼앗고 그를 죽이려고 한 베냐민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로운 롯을 불과 유황의 심판에서 건져주셨으나, 첩을 둔 레위인은 재앙에서 건져주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4:9).

잠언19:24절
“게으른 사람은 밥그릇에 손을 대고서도, 입에 떠 넣기를 귀찮아한다.”(새번역)

잠언19:24-20:11절은 새 단락으로 주제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입니다. 19:24-20:1절과 20:2-11절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전자는 교정이나 벌이 필요한 바보들의 목록을 나열하고, 후자는 바보들과 이들을 다스리는 의로운 왕에 관한 것입니다. 24절은 게으른 자의 행태를 아주 냉소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먹기 위해 그릇에 손을 넣을 수 있는 만큼 충분한 힘이 있지만, 배고픔조차도 음식을 입으로 들어 올려 먹는 일을 끝내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즉, 게으른 자는 기회가 있음에도 게으름 때문에 굶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13: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역시 본 잠언과 유사한 교훈을 줍니다. 게으른 자는 게으르기 때문에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브리지가 한 적용입니다: “희생 없는 믿음, 근면 없는 믿음은 결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할 것이다!” 타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온갖 구실을 대고 이웃을 섬기는 귀찮은 일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개미는 어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아 추운 겨울을 대비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그 미물의 지혜를 내면화 해야 합니다(잠6:6-8).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6:10-11)

시편115:16절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새번역)

시편115편 중 특히 16절은 세상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가 축복, 번성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15b). 주님(야훼)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능력과 통치에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 손으로 만든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3-8)? 시인은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자유를 노래하다가, 16절에 이르러 창조물의 일부인 “땅”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뜻을 밝힙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전체를 말합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짐승, 식물, 흙, 나무, 해, 달, 별 등을 그 창조 목적에 맞도록 관리할 권리와 의무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전에 주어진 인간 창조를 위한 고유 목적 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수단이 바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인간 자신의 필요를 채우도록 계획하셨기에,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고, 그분이 자신들의 아버지됨을 인식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따뜻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행14:17,새번역)        

시편116:10절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번역)

116편은 경건하고 밝게 빛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질병, 모함 등으로 사망에 처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3,8,10). 어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11), 시인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4).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은 순진한 시인을 지키셨고 그 어려움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시를 읽으면, 시인의 경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비록 쓰라린 추억이었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며, 신실하시고 위대하신 분임을 체험하는 계기였습니다. 또한 그런 긴박하였던 상황에서 구출된 후에, 시인은 자신이 누리는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히 간직되어야 하는지를 노래합니다(9). 시인의 감사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에는 영생의 축복이 포함되어야 합니다(딤후4:17-18).  시의 구조입니다.
     A  구원에 대한 감사(1-3)
         B 구원자 하나님과 신실하신 성품(4-6a)
     A′  구원에 대한 감사(6b-7)
         B′ 구원자 하나님과 신실한 믿음(8-13)
     A″ 구원에 대한 감사의 서원(14-19)

주목할 것은, 본 감사의 시는 정열적인 사랑의 노래와 같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해 기록된 성경의 진리들을 – 신실하심, 능력, 지혜 등 – 시인이 여실히 체험하여 살아움직이는 현실이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시편116:9,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