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9/19-23)

잠언19:19절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 네가 그를 구하여 준다고 해도 그 때뿐, 구하여 줄 일이 또 생길 것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주님에게 벌받는 사람을, 아들로부터(18) 성격이 불 같은 자로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잠언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26:4), 습관적으로 맹렬히 노하는 사람은 돕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혜를 줍니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사람은 교만한 바보의 특징 중 하나로서, 훈계없이 양육된 자녀의 미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의 대상은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 곤경에서 구해준 사람입니다. 이는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습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도와준다고 고칠 수는 없으며, 벌을 받아 보아야, 비로서 행실을 바로잡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을 동정하는 것도 좋으나 그런 동정이 지혜로운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지혜 안에서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빌1:9-11). 미국에서는 아동 학대와 관련한 처벌이 엄격하기에 공개적으로 아이를 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몰에서 너무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자, 그 아이의 어머니는 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엉덩이를 꽉 물어 나쁜 버릇을 고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부모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이 확립하신 ‘벌과 치료’라는 도덕 질서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섵부르게 뛰어들었다가는, 그의 자녀들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건강한 성장은 어려울 것입니다. 한편, 자녀들이 훈계를 받아들여야 비로서 의미가 있기에, 잠언은 20절에서 교훈의 대상을 아들로 바꾸었습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잠언19:20)

잠언19:20절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마침내 지혜롭게 된다”(새번역)

지혜자는 하룻밤에 혹은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는 학식과 인품 갖추어진 스승이나, 그 분야에 지혜로운 자에게 배우고, 교정받아야만 합니다. 즉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던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 재판업무를 위임하여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학문, 인격, 신앙 모두 같습니다. 학문을 위해 한석봉의 어머니는 10년을 목표로 유학을 보냈으나, 3년만에 돌아온 아들과 세기의 대결을 펼칩니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도 고른 두께로 떡을 썰은 뒤 엉망인 글씨를 보인 석봉을 야단쳐 돌려보냅니다. 석봉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절치부심, 결국 남은 7년을 채워 조선의 명필이 되었습니다. 인격의 경우입니다.  퇴계의 제자 이함형은 전주에서 안동까지 와서 유학하고 돌아갈 때 부부간 불화를 호소하였습니다. 퇴계는 “난 두 번 장가들었지만 내내 불행했다. 그러나 부부간의 문제는 크게 보면 모두 남편에게 달려 있다”는 편지를 주었습니다. 이함형은 ‘웬만하면 남편이 참으라’는 의미임을 깨닫고 애처가로 거듭났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배운 것입니다. 한편, 신앙도 같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지만 (행18:27-28),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삶의 굴곡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각고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태초부터 계신 분을 깨닫게 되고(요일2:12-14), 마침내 아비의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고전4:15). 늘 성령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대는 배워서 확신하고 있는 진리를 따라 계속 생활하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이것을 배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딤후3:14,현대인의성경).  

잠언19:21절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새번역)

본잠언의 교훈은 삶의 현장에서 자주 목격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로마로 가려고 계획하였으나 좌절되었습니다(롬1:13; 15:21). 드디어 AD58년경,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드린 구제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착 후 얼마 안 되어 성전에서 체포되었고, 기약 모르는 연금을 당하였습니다. 2년 후 로마 황제에게 호소를 하였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하였으나 배가 난파되어 구사일생으로 도착하였습니다(행28장). 잠언 16장은 이 진리를 잘 가르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6:1,새번역)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16:2)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6:9)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6:33). 사람들은 많은 전략을 수립합니다만, 결국 하나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체험들은,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3:5)는 교훈을 탄생시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길에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사람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곧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3: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시편114: 8절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본시는 ‘애굽 할렐(찬양)”시들 중 하나로서(113-118), 유월절을 기념할 때마다 불리워졌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가나안 땅을 주시기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현현-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요단강을 가르신 역사 등 – 을 근거로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르그만은 “시편114편은 각 세대가 세상을 변혁시킨 이 사건들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함으로, 출애굽 세대의 전통과 믿음의 삶에 동참시키게 한다.”고 적절히 표현하였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언약의 백성(1-2)
          B  자연에 행하신 이적들(3-6)
      A′ 언약의 주님(7-8)
시인은 가나안 정복 후의 세대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을 믿었습니다. 믿음과 감정은 차이가 있습니다.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서 합격한 것을 믿고 기뻐하는 학생 같습니다. 시인은 성경에서 자신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과거에 르비딤에서(출애굽 당시), 그리고 가데스에서(38년 후) 바위로부터 물을 내신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맹인이나 절름발이 귀먹은 자 말 못하는 자가 고침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직접오셔서 고치신다는 약속만 있습니다(사35:4-6). 그렇게 오신 분이 주 예수입니다. 중요한 점은, 맹인 등을 치유하신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와 사망으로부터 죄인들의 구원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거지 바디매오)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10:52)

시편115: 11절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새번역)
시인은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2)라고 질문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은, 조롱하는 세상 앞에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아마 최근의 승리를 왕이나 군대에게 돌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1). 또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합니다(4). 그러나 시인은 천지만물의 창조주는 야훼라는 신앙 고백을 하고(15,16) 그분만 의지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 노래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인자와 진실의 야훼 찬양(1-3)
         B 우상과 그 추종자들(4-8)
         B′ 야훼와 그분의 백성(9-15)
      A′  창조주이신 야훼 찬양(16-18)
본시의 9,10,11절은 각각 돌림 합창 노래로서, 주제는 신뢰입니다. 신뢰의 히브리어는 ‘바타’이며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의지하면, 그 대상으로부터 평강, 복지, 안전이 온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방인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으나, 생명 없는 우상이 도와줄리 만무입니다. 시인은 그들을 조롱합니다만(4-8), 현대인은 돈이면 제일이라는 맘몬 우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 역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분은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항상 의지하여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매일묵상(2022/09/13-16)

잠언19:17절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새번역)

최근 대한민국의 원화 환율이 1,400원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미국 기준금리의 상승때문입니다. 9월 중에 그것은 3.25%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모든 투자자들이 달러를 사려고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현재 미달러 채권이 가장 안전하고 많은 금리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달러보다 안전하고, 수익률이 높은 투자자산은 하나님의 계명들입니다. 그 계명들은 누구나, 언제든지 살 수 있으며, 갚으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 이익은 정금보다 낫습니다(잠3:14).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그 환난 가운데 돌보는 것입니다(약1:27). 잠언은 이를 행하는 자를 지혜자요, 아주 현명한 투자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채무자가 된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채무자가 되시면 그 채권은 안전한 동시에 그 이익 역시 엄청날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헌금함 앞에 앉아 계신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보고,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막12:41-44). 그 헌금은 하나님 아니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였을 것이기에, 본 잠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과부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 과부가 집에 돌아갔을 때 그녀의 집 문 앞에서 세리장 삭개오가 주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자녀들에게도 돈을 포함한 경건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잠언19:18절
“네 아들을 훈계하여라. 그래야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생각은 품지 말아야 한다.”(새번역)

세상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밝혔습니다(전3:1-8). 자녀 양육에도 시의 적절한 훈계는 필수적입니다. 그런 훈계를 몸과 마음에 간직한 자녀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인생은 결정되어졌다기 보다, 오히려 패턴화 되어 있기에(코박스), “어떤 패턴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당연히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에 머물러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에서 부모의 훈계는 사랑에 근거하지, 결코 해를 가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훈계가 없다면, 그 자녀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는 영원히 단절된 삶으로 가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훈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영원한 죽음에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목격하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언어로 책망하지 않고, 적절한 체벌이라도 가하여 반복을 방지하지 않는다면, 부모 또한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만든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5:23). 형법에서도, 환자를 맡았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죽게한 의사를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의 실패한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분은 자녀들(암논,압살롬)의 범죄시 적절한 징계를 가하지 않아, 가정과 국가가 파탄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아도니야에게는 한 마디도 책망한 적이 없었습니다(열상1:6). 잘못된 행동에 적절한 훈계를 받지 못한 위 세 아들은 모두 살해당하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22:15,새번역).

시편112: 1절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전 시편은 주님을 경외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를 축복하면서 끝나는데(111:10), 본 시편은 이를 발전시켜 경건한 자의 행위를 주제로 삼았습니다(지혜시). 시는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랐고, ‘..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형식을 갖추며, 지혜 문학이 사용하는 단어와 관심을 보여주고, 의인과 악인 사이를 대조하면서 지혜의 축복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본시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행하는 신자들에게 명예, 자녀, 그리고 재물의 축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또한 고난의 존재를 분명히 받아들입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의인의 축복 선언(1)
     B  의인의 삶의 현실: 축복과 고난의 병존(2-9)
  C  악인의 말로(10)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계명을 지키라는 지혜의 교훈은 역경 속에서도 큰 유익이 있음을 3번이나 강조합니다(4, 7, 8). 그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고”(4), “나쁜 소식”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며(7),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볼 것입니다(8). 그러나 시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까?”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생각으로 꽉들어찼습니다. 이때문에, 의로운 행위들, 경건한 성품을 가꿈(은혜롭고, 자비롭고, 충성되며, 신실함), 주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이 그의 일생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이며, 이런 특질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영을 통해 형성되어집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4).

시편113:3절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시편113-118까지의 시는 ‘애굽의 할렐’로 불리우는 구원의 간타타로서, 출애굽기6:6-7을 노래로 주석하였습니다. ‘할렐’이란 찬양이란 뜻이고, ‘야’는 주님의 이름(야훼)의 약자입니다. 따라서 ‘할렐루야’는 ‘주(야훼)를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1) 할렐루야로 마칩니다(9). 시의 구조입니다.

A  주님을 찬양하자(1-3)
           B  주님의 주권(4-6)
      A′ 주님의 구원의 행위를 찬양하자(7-9)
본시의 주제는 우주적이고 초월하신 주님(야훼)으로서, 그분은 하늘과 땅 위에 높아지셨고, 모든 시대를 다스리시고, 모든 공간을 채우시며, 열방 위에 높으시고, 가난한 자를 들어올리시며 좌절하는 자들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만유의 주님으로부터 미천한 각 사람을 돌보시는 구원의 행위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이런 찬양에 부합한 사건은 출애굽입니다. 그 당시 가장 강한 국가인 애굽의 군사들을 홍해에서 뒤엎으시고(출14:30-31), 광야에서 주님은 백성들에게 메추라기, 만나 그리고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모형일 뿐입니다(엡2:1-10).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로서,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함께 포함됩니다(엡2:11-22).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할렐루야.” (시편113:9,새번역)

매일묵상(2022/09/5-7)

잠언19:14절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
(새번역)

좋은 것들(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지만, 좋은 아내를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선물은 주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경건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잠언은 ‘슬기로운 아내’와 ‘다투는 아내’(13)를 비교함으로써 아내에 관한 가르침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잠언은 여자를 비하하지 않습니다. 그런 여자는 가정의 조화를 깨뜨리는 여자들이고, 미덕을 갖춘 여인들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31:10-31). 실로 남자의 운명은 아내가 가진 도덕적 유능함에 달려 있습니다. 슬기로운 아내는 가정의 문제와 해법을 파악하고, 가정이 성공적으로 세워지도록 모든 힘을 다합니다(14:1). 삼손과 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내를 택할 권한은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주님 손에 맡기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섭리는 룻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아스는 중년이 되도록 아내가 없었습니다(잠31:10).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보아스를 위하여 비슷한 처지의 아내를 주셨습니다. 즉 보아스는 믿음의 이방여인 기생 라합의 아들이었으며, 룻 역시 야훼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여인 과부였습니다. 현실적 차원에서 둘 다 경건하고 마음이 착한 자들로서 그 신앙과 착한 마음이 서로 맞아서 적법한 절차(보아스보다 선 순위 친족이 있었음)를 거쳐 결혼하였습니다. 지혜란, 결혼을 포함하여 모든 삶을 주의깊게 따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가지만, 그후의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자세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16:9,새번역)

잠언19: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13절에서 유산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아들의 정체는 게으른 자입니다. 게으른 자의 도덕성은 어리석은 자보다 더 퇴보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의 결과를 알면서 거기에 눈감고 부모나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나쁜 사람입니다. 농업과 목축이 주업인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게으름이란 가업을 망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게을러서야 어떻게 짐승을 매일 먹이고, 밭에서 제초작업을 하겠습니까? 사자나 사나운 짐승들이 여기 저기 다니고 있는 중에도 핑계대지 말고 부지런히 양떼와 소떼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한 해 농사를 망치면 그 가족 전체가 굶든지 , 빌어먹든지, 아니면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은 ‘고엘’이란 ‘친족구속자’(룻기의 보아스 등)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족 개인에게 의존하는 ‘고엘’이란 제도는 불완전하였기에, 현대 국가는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의료보험, 고용보험, 실업수당, 연금제도 등. 한편, 잠언은 게으른 자를 ‘개미에게 배워야 할 자’(6:6),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하게 나고 돌담이 무너지도록 한 ‘지각이 부족한 자’(24:30,31), 바보 보다 더 비열한 자(26:12-16)로 묘사합니다. 급변하는 지식기반사회에서는 부지런함은 필수입니다. 게으르면 자신의 삶이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하여, 그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위태롭습니다. 결국 소득의 원천을 상실하여 굶주게 되고, 그의 운명은 술취한자나 탐식하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23:21). ‘주님을 경외하라’는 계명이 담긴 의미를 숙고해야만 합니다.’“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제 목숨을 지키지만, 자기 행실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 (잠언19:16,새번역)

잠언19:16절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제 목숨을 지키지만, 자기 행실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새번역)

잠언18:22-19:23절은 재물과 지혜에 관해 3부분- (a)18:22-19:7, (b)19:8-15, (c)19:16-22- 으로 나눠 교훈합니다. 세 번째 부분(c)은 ‘궁핍한 자에게 친절하라’는 주제를 다루며, 16절은 그 도입절로서, 무책임한 아들(15)과 책임성 있는 아들(16) 간의 대조를 그리면서, ‘목숨을 지키려면 아버지의 말씀(계명)을 준행하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말씀(계명)은 사람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13:13-14). 아비의 계명을 지키는 아들은 지혜자 중 하나이며 사망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전받습니다(전7:12). 어리석은 아들은 인생을 살며 형성된 아비의 훈계를 멸시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행실)이 가져오는 나쁜 성품, 행동 그리고 그 결과를 무시해버립니다. 그 결론은 사망이며, 이는 주님 및 그분의 백성과의 단절을 내포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경멸하고, 백성들을 억압하며, 심지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습니다. 늙은 엘리 제사장은 역시 제사장이었던 두 아들들을 불러 그 악행을 타일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보냄을 받아 엘리 집의 멸망을 선언하였고, 그 어린 사무엘의 입을 통해 그 메시지는 확증되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루 아침에 전쟁터에서 죽었고, 엘리 가문은 약 150년 뒤 후손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에서 파직됨으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삼상2-4장;열상2:26,27).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생명을 얻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잠언19:23,새번역)

매일큐티(2022/8/29-9/2)

잠언19: 11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사람 사이에 갈등은 필연입니다. 본 잠언은 분노를 포기하고 허물(페샤-죄, 선을 넘는 언행 등)을 용서할 줄 아는 사려 깊은 행동을 하라고 교훈합니다. 슬기로운(세켈-상황을 파악하여 합당한 행동을 취할 줄 아는 능력) 사람은 참을 줄 알기에, 뜨거워진 논쟁은 가라앉게 됩니다(15:18). 물론 쉽지 않습니다. 특히 타인에게 도를 넘는 말을 듣거나 처우를 받아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모두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그 분노를 그대로 발산시키면 평화로운 공존은 사라지고, 갈등과 불화만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허물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후처로 취하였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면서 그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겸손하였으나, 주님은 노하셨고 결국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립니다 (민12:1-3). 모세는 미리암을 위해 중보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만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밧단 아람에서 큰 부를 축적한 야곱은 외삼촌 라반 몰래 도망을 갔고, 라반은 불과 같이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날 밤 라반에게 현몽하여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야곱을 해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딸들과 손자들을 축복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과 라반의 기사 중 라반이 잘한 대목입니다(창31장). 이들 양자는 각기 허물이 있었기에, 이의 완벽한 모범은 당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20).

잠언19: 12절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고대에는 제멋대로 통치하는 왕이 군림하고 있어, 신하들은 왕의 노여움을 피하고 그의 호의를 받는 것이 생존과 출세의 비법이었습니다. 사람의 분노의 결과는 언제나 어리석습니다만(잠14:17), 권세자 특히 왕의 분노는 먹이를 잡은 사자의 표호와 같이 두렵고 위험합니다. 당연히 조심해야 합니다. 한나라의 사가 사마천은 쓴 소리를 하여 한 무제를 격노하게 하였고, 궁형(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함)에 처해졌습니다. 너무나도 수치스러웠지만, 사마천은 굴하지 않고 역사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20여년에 걸쳐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사책 “사기”를 완성했습니다. 후에 무제는 뉘우치고 중서령의 직을 내려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상과 벌을 마음 내키는대로 주는 전제군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전제군주의 권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롬13:1-7). 그러나, 여기에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라는 지혜와 섬김의 길이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자신이 죽이고 살릴 권세가 있다고 위협하자, 주님은 오히려 위에서 그런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요19:9-11). 누가 재판장이고 피고인지 잘 모를 정도로 주님은 당당하셨지만, 그렇다고 72,000명도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외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권세라는 사실을 존중하되, 그 권세를 남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정의로운 비폭력의 자세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영광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벧전4:14).“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잠언19: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솔로몬은 사회생활의 문제에서 가정으로 눈을 돌립니다(13-15). 13-14절은 역기능 가정(미련한 아들, 다투는 아내)과 순기능 가정(유산, 슬기로운 아내)을 대조하고, 15절은 미련한 아들의 전형이 게으른 자라는 것을 밝힙니다. 가정은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고, 살아갈 물질적 터전(집, 재산)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특히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하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연로한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받아 보전하고 부모를 섬길 조력자로서의 자녀들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녀가 유능하지 못하여 가업을 몰락시키거나,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다면 그의 아비에게는 재앙 그 자체입니다. 한편, 가정의 평온 없이는 행복은 불가능하고, 아내는 그 평온으로 닻입니다. 많은 일로 걱정하는 남편을 위로하고 조언을 주어 함께 가정이라는 배를 안전하게 항진하도록 돕는 배필입니다. 그러나 지붕이 새서 빗물이 계속 떨어지는 것처럼 틈만 생기면 다투고자 하는 아내 역시 고통 그 자체입니다. 노년의 톨스토이처럼 그는 집을 나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다투는 아내’란 단순히 잔소리를 넘어 ‘미련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가정은 늘 세파에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이때 슬기롭지 못한 아내는 그에 대처하는 지혜도 없으며, 사태의 본질도 자신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감정과 생각대로 주장할 것입니다. 당연히 가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대조적인 여인이 14절의 슬기로운 아내이고 그 좋은 예가 잠언31:10-31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시편110: 4절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절은 하나님이 주님께 하신 두 번째 말씀으로, 그분은 레위 지파 제사장과는 관계 없이(출29:9),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맹세가 뒤따릅니다. 제사장 엘리의 집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영원히 제사장직을 담당할 것이 약속되었으나, 엘리의 아들들의 범죄로 그 약속은 취소되었습니다 (삼상2:30; 왕상2:26,27). 그러나 다윗 왕의 주님이 영원한 제사징직을 수행할 수 있는 까닭은, 첫째, 맹세로 보증되었고, 둘째 그분은 결코 그 제사장직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좌에 앉아 공평과 정의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림으로 영원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사9:7). 이런 영원한 왕과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죽지 않는 부활의 몸이 필연입니다. 한편, 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다스리는 제사장이자 왕으로서 적군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구약 성경에는 창세기 14장과 시편110편에만 등장합니다. 신약 히브리서에서 이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한 신학적 설명이 있습니다(히5:5-10; 6:19-7:28). 다윗 왕의 주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은 구원하시나(히5:5-10),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여.. 머리를 깨뜨리실”(5-7)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짧은 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명백히 드러나 있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닫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3:12).

시편111: 2절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시편111-113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나, 111편과 112편은 알파벹 시의 특색을 갖고 있습니다. 즉 두 시는 각각 22개의 행으로 구성된 10개의 구절로 이루어졌으며, 각 행은 히브리어 알파벹(22개)의 순서로 시작됩니다. 주제는 111편은 하나님 자신을, 112편은 하나님의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본시의 구조입니다.

A 하나님의 능하신 행위를 찬양(1-3)
         B 구속을 위한 주님의 일하심(4-9)
A′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10)

시인은 구속하신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기적)들을 연구하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정의의 실현이요(3), 그 정의는 은혜와 자비를 동시에 구현하였습니다(4).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은혜로 주시고 백성이 행할 법도를 제정하여 세우셨습니다(7-9).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법도를 지켜 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여 가나안 족속은 쫓겨났습니다. 그 길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끝은 그분의 법도를 행함으로 ‘훌륭한 지각(sense)을 가진 자’로 칭찬받는 것입니다(10). 시인은 본시에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선하심은 그분이 행하시는 일(기적) 속에서 드러남을 선포합니다(3,4). 이같이 그분의 선하심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여기에 믿음 생활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서 맺어지는 현실 속에서 세워져가기 때문입니다(빌1:10-11).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