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8/22-26)

잠언19: 8절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언18:22-19:22절은 “재물과 지혜에 관한 교훈”을 주면서, 세 부분-(a)18:22-19:7절, (b)19:8-15절, (c)19:16-22절– 으로 나뉘어집니다. 첫 부분(18:22-19:7- ‘가난, 재물 그리고 친구’)을 이미 살펴보았으며, 지금부터 두 번째 부분(19:8-15절)을 다루겠습니다. 주제는 “사회생활에서의 지혜”입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은 형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고 당장은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지만, 잠언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고 장차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잠19:1,8). ‘지혜’로 번역된 원어는 ‘레브’로서 ‘마음’을 의미합니다. 고대인들은 마음은 지혜가 거주하는 곳이라고 여겼습니다(욥32:8). 따라서 본문에서 ‘레브’는 지혜를 의미하는 ‘호크마’와 같은 의미이며, 후단에서 ‘명철(=테부나- 분별)’과 짝을 이룹니다. 또 ‘영혼’은 ‘생명, 생물’이란 뜻도 갖는 ‘네페쉬’로서, 이 문맥에서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육체적 생명 보다 영혼의 생명을 지키라는 교훈을 주고자 한 것으로, 이는 지혜야말로 육체적 안전보다 영혼의 건강에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를 얻고..명철을 지키는’ 사람은 먼저 생명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복(=토브-좋은 것)’을 곧 얻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는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풍부한 삶을 누리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잠언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그런 생명을 주시러 오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잠언19: 9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9-12절은 거짓 증인에 대한 형벌에서 시작하여(9), 사회생활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교훈합니다. 9절과 5절은 끝의 동사를 제외하고는 구문이나 내용이 같습니다(‘피하지 못하리라’대신 ‘망할 것이니라’). ‘거짓 증인’은 십계명에서 금지된 행위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재판 상황을 대변합니다. 그 당시 재판은 증언에 거의 의존하였기 때문에, 거짓 증언은 재판상 정의 구현에 심각한 침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재판규범인 십계명은 이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대한 민국 형법에도 ‘위증, 모해위증’(152조)의 규정을 두고 형벌(5년이하 징역 등)로서 강제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재판 극화에서 잘 나오지만, 증인이 되려면 진실만을 말할 것을 ‘법률에 의해 선서’ 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거짓말을 한다면, 위증의 벌을 받게 됩니다. 모세 율법도 그에 대한 형벌을 가하고 있습니다(신19:15-21). 발각되면 당연히 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짓 증인은 아니라도 “거짓말을 뱉는 자’는 진리를 왜곡하여, 사회 규범을 어지럽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의 생명, 재산, 명예에 위해를 가하고, 정직과 진실의 가치를 허물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벌을 받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요행히 피해가도 마지막 날 심판에서는 발각되어 ‘망할 것입니다.’(눅12:2,3) 우리 중 어떤 누구도 거짓말하는 사람과 사귀려고 하지 않는 것 같이, ‘거짓말을 뱉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잠언19: 10절
“미련한 사람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도 마땅하지 않은데, 하물며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이랴?” (새번역)

자연세계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름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서리가 내린다든지, 가을 추수기에 비가 많이 내린다든지 말입니다. 날씨가 이렇다면 부적절한 것은 물론, 큰 해를 당하게 됩니다. 인간사도 같습니다. 본잠언은 솔로몬이 목격한 가장 부적절한 사회현상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란 ‘케씰’의 번역으로 지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매우 우둔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여기서는 ‘도덕적으로 우둔한 자’라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세상적으로 영악하여 법을 무시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재물을 얻은 바보말입니다. 더 나아가 남의 도움으로 자신의 재물을 보존하고 증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바보도 포함합니다. 이들이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매우 못마땅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온의 부자 나발이 그러해서, 격분한 다윗은 그를 죽일 뻔하였습니다(삼하25장). 다른 한 예는 종이 고관을 다스리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종’은 주인과의 관계라기 보다, 맡은 일의 성격에 초점이 있습니다. 종은 주어진 일만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다스리며,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처리하는 데는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적절치 않은 자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큰 혼란이 생겨나고, 자신도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에게는 영예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마치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과 같고,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과 같다.”(잠26:1,새번역)

시편110: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본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인용하셨고,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시로서 신학적 의의가 매우 큽니다. 시의 주제는 이스라엘 통치자 다윗 왕이 주님으로 부르는 위대한 주권자가 계시며, 그분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모든 원수를 정복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시는 두 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왕(1-3)과 제사장(4-7)입니다. 각각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하고, 야훼께서는 다윗의 주님을 왕과 제사장으로 선언하시고, 시온에서부터 땅의 왕들을 압도하는 주님의 통치를 약속합니다. 또한 이시는 주님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신을 민족들의 전복과 대비시키며, 왕이자 제사장인 그분 자신을 젊음이 넘치는 활력으로 늘 새롭게 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A    정복에 대한 약속 (1)
B   승리 (2–3)
A′   영원한 제사장 약속 (4)
B′  승리 (5–7)
마가복음12장에서 주 예수님은 본 시편이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지은 다윗의 시이며, 자신의 메시아직의 성격과 내용을 드러냈다고 확인해 주셨습니다(36-37). 1절에서 다윗 왕은 자신보다 더 높은 왕권을 가진 한 존재를 주님으로 부릅니다(히1:3,13). 하나님은 그분이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여 발 밑에 굴복시킬 때까지(발판의 의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신약의 기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주 예수께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시고 만유를 통치하고 계심을 증거합니다(행2:32-36/히10:12-13/엡1:20-22).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6).

시편110: 2절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2,3절은 다윗 왕의 주님, 곧 그리스도께서 현재 통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다윗의 주님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좌정하셨습니다. 그 좌정하심은 속죄의 거룩한 과업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의미하고, 이제 영원한 왕으로 앉으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고 계십니다(히10:12,13).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어보내신다’는 의미는 사도행전1장과 2장에 따른,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사도들이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죄사함과 심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는 물리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을 통한 말씀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400년 뒤 선지자 이사야는 “율법이 시온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오고”, 그 결과 모든 나라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전쟁을 그치고 평화롭게 살아가게 됨을 말합니다(사2:1-4). 또한,이사야9:6,7절은, 그분은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셔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요 평강의 왕”이라 불림을 받으며, 다윗의 왕좌에 앉아 군림하시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실 분임을 선포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부활 없이 영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섬기며 주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갈 것입니다(시110:3). ‘자발성’ 그 자체가 신약의 성도들의 섬김의 모습입니다.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너무나도 감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28:18,새번역)

매일큐티(2022/08/15-19)

잠언19: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거짓 증인’ 이란 재판장 앞에서 ‘거짓 증언’을 한 사람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법정은 증언에 의존하였습니다. 만약 증인이 거짓으로 말한다면 판결은 그릇내려지게 되고, 그 해악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나봇의 살해사건). 그러므로 십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본 잠언은 더나아가 거짓 증인에게 확실히 임할 부정적인 운명을 선포합니다. 십계명에도 나와 있는 금지명령을 본 잠언이 다시 한번 교훈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삶의 일반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여, 사회 규범을 어지럽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의 생명, 재산, 명예에 위해를 가하고, 정직과 진실의 가치를 허물어 버립니다. 그 시작은 사탄입니다. 창세기 3장은 사탄이 거짓말을 통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이들 모두가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율법에 규정된 죽음을 선고받았는지  상세히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귀를 거짓말쟁이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서 정죄하셨습니다(요8:44). 성경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거짓의 위험에 대하여만 설명하지만, 성경은 그 기원을 알려주면서 인간에게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따라 진실되게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진리이신 우리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요14:6).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참된 것을 사랑하시고 거짓말을 미워하시는데, 이것이 성경이 거짓말을 금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잠언19:6절
“너그럽게 주는 사람에게는 은혜 입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고, 선물을 잘 주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친구이다”(새번역)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선물과 같은 적극적인 호의를 베푸는 자는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본 잠언은 솔로몬의 관찰 결과를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솔로몬의 의도를 알기 어렵습니다. 즉, 이 잠언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호의를 얻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줄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풍자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나, 잠언 19:4절, “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새번역),을 감안하건데,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보여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 너그럽게 주거나, 뇌물에 가까운 비싼 선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는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진 통치자를 향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임을 감안하면서 관계를 맺어야지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의 모델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너그러우셨으며, 상황에 따라 적합한 가르침을 주셨고,  배반을 당하실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온유하게 대하셨습니다. 체포되시는 중에도 베드로가 베어낸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도층의 외식이나 잘못된 교훈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잡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면 그분의 온전하심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관계의 지혜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잠언19:7절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본 잠언에서 형제와 친구는 약간 다릅니다. 형제들은 운명공동체라 자신이 어려워도 더 어려운 형제를 도와 주지 않을 수 없어 미워합니다만, 친구 관계는 선택이기에 떠나면 그만입니다(17:17). 물론 관포지교, 문경지교 등과 같은 친구관계는 형제보다 친밀할 수 있지만 예외적입니다(잠18:24). 중요한 것은 형제와 친구를 포함하여 어떤 사람도 가난한 사람의 주위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는 현실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은 극복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도움을 청하려고 친척과 친구에게 가도 소용없습니다. 놀부와 같이 냉엄하게 대하거나(잠18:23), 자리를 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우려고 해도 여유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전쟁이나 코로나와 같은 재앙이 올 경우 어떻게 할까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에게 가라고 조언합니다만(잠27:10), 이것은 너무나 빈약하여 현대 국가는 여러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안전망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사망 등). 누가 우리를 도울까요? 만유의 주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견고한 망대가 되십니다(잠18:10). 기도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면 평강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는 것은 물론(빌4:6-9), 기도의 응답을 받아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보이지 않지만 늘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다윗의 체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편32:6).

시편109: 4절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50편 중 저주시는 단 세 편(58, 109, 137편)이며, 본시는 가장 길고 강력합니다. 시인은 다윗입니다. 왕 사울이 죽은 뒤, 항복하러 온 사울의 집 군대장관 아브넬을 요압이 암살합니다. 분노한 다윗 왕은 요압을 저주하나 죽이지는 않습니다(삼하3장).  35년 후 다윗은 임종 시에 솔로몬에게 요압의 처형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시의 배경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라는 표현은 물론, 그의 후손까지 생명을 끊어 달라는(10,11) 강한 저주의 문구들을 읽을 때 다윗이 큰 고통과 배신감 속에서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5절) 주님의 행동을 간구함, (6-20절) 주님의 공의를 간구함, (21-29절)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함, (30-31절) 주님의 구원을 감사 드림. 한편, 이 같은 저주의 기도가 정당성이 있을까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곤경에 처한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합니다(잠25:21-22). 다윗 자신도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 온 원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는데,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의 뜻을 모를리 없습니다. 다만, 본시는 악에 분노한 성경 기자의 성경적 현실주의를 과감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허용되나 죄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엡4:26), 이런 저주시들은 우리 삶의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은, 다윗 같은 “거룩한 분노 없이는 그것들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맥켄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시편109: 8절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신약의 기자들, 특히 누가는 본시편의 구절을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게 적용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27:3-10)과 사도행전(1:15-20)의 기사를 종합하여 보면, 은 30 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그 돈으로 밭을 샀지만, 예수께서 정죄받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절망한 그는 30 세겔을 성소에 던지고 목매달아 죽는 과정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그 밭을 아겔다마, 곧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마태복음은 은 30량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는 선지자의 예언(슥11:12,13)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한편 누가는 주님의 승천 직후, 120명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서,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시편69:25절,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가 성취되었기에, 시편109:8절에 예언된 대로 가룟 유다의 직분을 취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에 회중은 맛디아를 선출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있기 1천년 전 기록된 본 시편을, 베드로는 어떻게 바로 가룟 유다의 배반사건과 사도직분의 선출에 적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사도의 직무 중 하나로서, 우리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 수제자이고, 최초로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며,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한 ­­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베드로의 이 해석과 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사도 직분의 위대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매일큐티(2022/08/8-12)

 잠언19: 2절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새번역)

사람은 성공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고 ‘열심’(히브리 원어, ‘네페쉬’- 영혼)을 내서 일할 수 있으나, 만약 그 동기가 경건하고 바른 지식을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숙고하고 기도로 주님께 맡긴 다음에 행동해야지, 두려움, 탐욕, 분노, 성급한 성격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울 때, 백성들에게 저녁까지 일체 음식을 먹지 말 것을 저주로 맹세시켰습니다. 맹세를 두려워 한 백성들은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 격렬한 전투를 치뤘고 저녁이 되자 기진맥진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삼상14). 한편, ‘발을 헛디딘다’ 혹은 ‘잘못 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웃 사랑’의 윤리를 무시하는 생활방식을 함축합니다. 생각 없이 삶게 되면 범죄하기 마련이어서 주님을 격노하게 만들 것입니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20:2).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파산한 부자를 피하기 때문에 그 악에 물들지 않고, 결국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본 잠언은 영적인 열심에도 적용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열심이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쫓아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롬10:2).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그릇되이 이해하여 율법 안에서 영생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정작 생명을 주시러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주님을 알고 그분과 사귐이 없이는 영생도 없습니다(요17: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잠언19:3절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 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재물이 많은 바보가 거짓말이라는 죄된 행동과(1b), 좀 더 부유하려는 욕망(2b) 때문에  삶을 그릇치고, 그 잘못에 대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자 자신의 도덕적 오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원망한다는 어리석은 인간 존재의 실존(3)을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그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인양 높이고 자신의 죄된 삶에 상당한 보응을 내리신 주님(도덕의 통치자)께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적 달성을 못하고 파산하게 된 것을 분노합니다. 실패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술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음을 보아 그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손상을 입혔음은 명백합니다. 그의 교만한 자아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이라고 지혜자라고 인생에서 늘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에게도 뜻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전9:11). 하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기 때문에 신뢰합니다. 그러면 바보의 실패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실패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외양은 똑 같은 실패의 모습이나, 전자는 심판이고, 후자는 훈련입니다. 이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원망하지만, 지혜자는 자신을 되돌아 보고 거기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여 고칠 것은 고치면서 신실하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상의 성공 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결국 모든 일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롬8;28,현대인의성경)

잠언19: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18:22-19:7절은 ‘가난, 재물 그리고 친구’를 다루는 단락이며, 19:4-7절은 이 단락의 결론으로 다시 한 번 친구와 재물이 가지는 도덕적 모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친구와 재물은 도덕적으로 선악을 뚜렷히 구분짓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자의 친구로 남기 원하지, 가난한 자와 교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가난한 자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도움이나 관대한 지원을 필요로 하지만, 부유한 자는 최소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외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친구들이 참된 자들일까요? 만약 그들이 참되다면, 4절은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며, 가난하더라도 친구가 끊어지겠는가?”라고 읽어야 합니다. 어떤 뉘앙스이겠습니까? 전도서가 답을 줍니다 :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   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5:11). 즉 재물은 친구들을 불러들이지만 그들은 거머리들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의심이 많고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실로 각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줄 것인가의 관점이 아니라,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를 말합니다. 주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재물을 사용하여 친구를 사귀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보답을 받으라는 권고하십니다(눅16:1-9).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친구 사귀는 비결입니다. 받으려는 관점이 아니라, 도움/재물을 줄려는 관점 말입니다.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시편108: 4절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하늘보다 더 높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새번역)

다윗은 시편  57:7-11절(1-5)과 시편60:5-12절(6-13)을 합쳐서 새로운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편57편과 60편을 전혀 모르더라도 시편108편은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배경은 다윗이 에돔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 닥쳐온 위기 극복을 위한 기도의 관점에서 보면, 3연(1-5, 6-9, 10-13)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연은 주님의 변함없는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5). 둘째 연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6). 셋째 연은 ‘에돔’의 위기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받기를 기도합니다(12). 이것은 성서적 기도의 참된 순서로서 이 시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도움이 절실 할 때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각 연에서 이에 관한 특별한 진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a) 하나님의 ‘인자하심’(4)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진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실체인 구름(궁창)에 이르지만, 그분의 ‘인자하심(= 한결 같은 사랑)’은 하늘들보다 훨씬 높으십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지 못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떼문입니다(요3:16). 부활의 약속과 주님과의 영원한 교제(영생)를 누리게 하셨는데(영생) 기타 자잘구레한 세상사야 무슨 큰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편108:1)

시편108: 10절
 “누가 나를 견고한 성으로 데리고 가며, 누가 나를 에돔에까지 인도합니까?”(새번역)

본 시는 세 연(3연(1-5, 6-9, 10-13)으로 나누어지고, 각 연마다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진리를 강조합니다. 첫째 연(1-5)은 ‘주님의 한결 같은 그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의 모든 상상을 넘는 위대하신 그분의 인자와 진실하심을 노래합니다. 위기 시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진실하심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연(6-9)은 가나안 지역의 통치와 정복에 대한 주님의 이전 약속들을 회상합니다. 세겜과 숙곳(7)은 요단의 동서쪽에 위치하며 팔레스틴 지역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용사이며, 이스라엘(길르앗, 므낫세, 에브라임, 유대로 상징)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8). 당연이 이웃 국가들(모압, 에돔, 블레셋)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합니다(9). 시인은 이런 약속에 근거하여 도우심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Yes”가 됩니다(고후1:20). 그러므로 고난 시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연(10-13)은 에돔 정복을 위한 도움을 간구합니다. 시인은  오직 주님만이 자신들을 인도하여 견고한 에돔 성읍을 점령하게 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12). 그 권능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돌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필요로 하는 모든 도움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11-12). 실로 우리가 곤란 속에 있을 때, 그것과 맞서도록 힘을 주시는 분은 부활, 승천하여 대권을 가지신 주님 한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원수들을 짓밟을 것이다.” (시편108:13,새번역)

매일묵상(2022/08/1-5)

시편107: 10,11절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07:10-16절은 두 번째 곤경(감옥에 갇힌 죄수)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들의 불행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약속을 의도적으로 파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말씀, 율법)를 거역하였고 자발적으로 그분의 권위를 멸시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받았으나,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계명은 받았으나, 지존자의 뜻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중요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에덴 동산에서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설득하여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하고자 선악과를 금지하였다고 믿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에 속아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에야, 이들은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정의는 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속박과 수고와 저주와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창3:16-19). 세상은 원래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어졌지만 범죄로 감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인간 실존의 장벽조차 하나님의 자비로서 무너지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8:31,32). 그것이 죄사함과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13). 그러면 은혜가 이 기도에 반응하여 죄와 사망의 쇠빗장을 깨뜨리고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놋대문을 부수시고, 쇠빗장을 깨뜨리셨기 때문이다”(시편107:16,새번역).  
  

시편107: 17,18절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받아 밥맛까지 잃었으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새번역)

107:17-22절은 세 번째 곤경(죄로 병든 자)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지존자에게 반역한(11) 모든 자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또 다른 묘사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로서(잠1:7), 잘못된 길을 사랑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죽음에 다다르자 그들이 사랑한 음식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부르짖었을 때 주님은 자비로우시게도 그들에게 구원을 보내셨습니다. 그 구원은 그들이 거부하여 그들을 정죄한 바로 그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제 정죄의 말씀이 약속과 위로와 회복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그들은 당연히 주님께 감사드려야만 합니다(21). 그 감사는 빈 말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마음이 담겨 하는데, 시인은 그 구체적 표현으로 ‘감사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합니다(22). 우리 본성 가운데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뿌리 깊어,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그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롬8:13).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낮추고 사망(현재는 자기파멸과 미래에는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하는 멸망의 길입니다(17,18).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를 통해 죄에 대한 위대한 해독제인 치유의 말씀이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20).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곤경에 빠지는 것처럼(11), 영적 온전함을 되찾는 방법 역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삶에 되돌아와야 가능합니다(20).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구렁에서 끌어내어 주셨다.”(시편107:20, 새번역)

시편107: 26절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새번역)

107:23-32절은 네 번째 곤경(폭풍을 맞이한 바다의 선원/상인들)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같은 곤경이지만 광야와 바다는 종류가 다릅니다. 부를 찾아 바다를 항해하는 상인들은 그 큰 배를 너무나도 쉽게 뒤 엎어버리는 바다의 위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주님은 쉽게 폭풍을 일으키시기도 하고(25-27) 잔잔하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29-30). 그러므로 고난 중에 선원들은 기도하게 되고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사 바다를 잔잔하게 하십니다. 그 기쁨이 너무커서 선원과 상인들은 예배와 장로들의 모임에서 주님의 행사를 선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31,32). 여기서 바다는 적대적인 세상을, 항해는 그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완벽한 상징들입니다. 청명한 하늘에 돈을 벌기 위해 승선하지만 예기치 않게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폭풍이 불어닥쳐 위기에 놓이게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폭풍은 기도를 촉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폭풍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탄의 책략이나 우리의 실수와 범죄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적 지능입니다. 아무리 바다가 뛰어 노는 것처럼 위기가 닥쳐도 그분에게 의뢰하면 잔잔하게 하실 것이고(시편32:5-7), 기도의 문은 평화로 들어가는 입구임이 증명될 것입니다(29-30).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우리들은 주님의 행사를 교회와 일터에서 감사드리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시편107:31,새번역)

잠언18:24절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친구 선택의 기준은 양이 아니라 질에 있습니다. 본 잠언은 통상의 친구들(복수)과 참된 친구(단수) 사이를 구별하고, 전자는 결국 “해를 당하게” 만들고, 후자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친밀하다”는 분별의 지혜를 제공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적 생존은 쉽지 않았기에, 한 명이라도 진실된 친구는 ‘보험’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좋을 때만 모여드는 통상의 친구들만 있고 진실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는 사람은 역경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한편, 자기 일에 열심인 자는 기술을 얻게 마련입니다(22:29). 이와 같이 신실한 사람이 지혜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전2:26). 미련한 르호보암 왕은, 원로들의 지혜로운 충고를 무시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교만한 친구들의 조언을 선택하여 국가 분단이라는 큰 해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의 혈육을 넘는 친밀함과 신실함을 나누었습니다. 혈육이라도 가난하고 실패한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진실입니다만(19:7),  요나단이 죽은 지 10년이 넘은 후에도 왕 다윗은 비천한 그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돌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재물을 쫓는 것과 유사 친구나 그런 동료에 속하는 것을 경계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현명한 자들 중 친구를 선택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러나 신실함이 혈육의 연대감을 넘어서는 친구라는 잠언의 이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요15:12-15), 교회는 주님께 힘을 공급받아 사랑 가운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잠언19: 1절
“거짓말을 하며 미련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가난해도 흠 없이 사는 사람이 낫다.”

“19:1-3절”의 단락은 친구 없는 가난한 사람에서 거짓말하는 비윤리적인 부자(1), 그의 탐욕(2) 그리고 완고함(3)을 다룹니다. 잠언은 가난한 자는 성공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렵지만(18:23,24), 그렇더라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고, 그것은 비윤리적인 부자보다 더 낫다고 교훈합니다(19:1). ‘낫다 better than’는 말은 반드시 그런 길로 가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여 사회적으로 존중받지는 못하지만 주님이나 현자의 가르침 안에서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미련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가난하겠습니까? 주님의 때까지입니다(전3:1). 거짓말하여 남으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예금 구좌를 채운 자들은 꿀벌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부지런히 꿀을 모아 벌집에 채우면 양봉업자는 때가 되면 그 꿀을 모두 값을 받고 사람에게 팔아버립니다. 꿀벌은 이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이와 같습니다. 역경 가운데서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생은 물론 재물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은 그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악인이 열심히 모아들인 재물을 주님을 기뻐하여 그분의 가르침에 머무르는 자에게 몰아 주시기 때문입니다(전2:26). 물론 그 의인은 받은 지혜로 주님이 맡기신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를 보고 탐욕을 내어 재물을 모으는 행위가 헛되다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3:2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