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7/25-29)

잠언18:22-19:7절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18:22) 
앞으로 여러 날 동안 묵상할 부분은 잠언18:22-19:22절입니다. 주제는 “재판정과 가정에서 재물과 지혜”에 관한 내용입니다. 3단락(18:22-19:7, 8-15, 16-22)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다룰 첫째 단락은 18:22-19:7절입니다. 서론으로 남편과 아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말한 뒤(22절), 부 혹은 재물이 가지는 애매모호한 도덕적 특성을 교훈합니다 (18:23-19:7). 본론은 다시 셋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째, 실패한 친구관계(18:23-24) – 가난한 자의 간구(23)와 친구관계의 실패(24). 둘째, 도덕과 재물(19:1-3)- 가난할지라도 성실하게 살아가야지(1), 성급하게 재물을 쫓지 말아라(2). 왜냐하면 주님은 어리석은 자를 벌하시기 때문이다(3). 셋째, “재물과 친구”관계의 도덕적 모호성 –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고(4a,6), 가난하면 친구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4b,7), 거짓된 자들은 벌을 면치 못한다. 이 구절들은, 눈에 보이는 친구관계는 현명하지 못한데,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다(18:24)는 의미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현명한 사람들 중에 있는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18:24b)입니다. 단락의 마지막 구절 (19:7)은 다시 한번 가난한 자의 측면에서 “가난, 부, 그리고 친구”의 역학관계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난하면 친척도 그를 싫어하는데, 하물며 친구가 그를 멀리하지 않겠느냐? 뒤따라가며 말을 붙이려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잠언19:7, 새번역). 

잠언18:22절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솔로몬은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교훈을 시작합니다. 그 첫 주제가 배우자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주목할 것은 ‘아내’ 대신 ‘지혜’를 넣으면 잠언 8:35절의 메시지가 나옵니다:“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8:35). 그러므로 “이 구절은 마치 ‘ 좋은 아내를 찾는 것은 지혜를 찾는 것과 같다’고 주석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 그런 하나님을 본받는 좋은 아내와 함께 주님을 경외하는 남자를 복주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31:10, 30). 좋은 아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처럼(2:1-6), 좋은 아내는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19:14), 당연히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보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 한 명의 여자,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남자가 풍성한 삶을 누리는 길은 한 명의 아내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복의 좋은 예시가 잠언31:10-31절에 나와 았습니다. 실로 그런 아내의 가치는 진주보다 더 귀합니다. 물론 여자의 경우에도 좋은 남편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역시 같습니다. 잠언의 예외가 신약에 나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일에 전력하기 위해 혼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권면을 합니다(고전7장). 이는 남녀의 결혼 자체도 주님과 신자의 영적 결합의 모형이고, 도래 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결혼도 없기 때문입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18:23절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사무엘상 25장에는 도망자 다윗이 마온 부자 나발에게 부하 10명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나, 나발은 거만한 말로 못주겠다고 엄히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동안 나발의 재산을 보호해주던 다윗은 격분하여, 나발을 죽이려고 하다가 지혜로운 아비가일 때문에 중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늘 보는 광경입니다. 23절의 중심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와 부자를 배치하고 바깥에는 ‘간절한 말’과 ‘엄한 말’을 대조하는 문학적 기교(교차대구법)가 들어있어 메시지를 명료하게 깨닫습니다. ‘가난하다’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 있다’는 의미로서 ‘결핍’을 묘사하는 형용사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을 나타내는 원어(루쉬)는 ‘부족함’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간절한 말’의 원어(타샤누님)는 ‘마음이 두려움에 휩사여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는 뜻입니다. 한편, ‘엄한 말’이란 통상 ‘강력한, 힘있는’을 의미하지만 현 잠언의 문맥에서는 “맹렬한, 거만한, 철면피’ 를 뜻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요청에 엄한 말로 거절하는 것은 재물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만약 부자가 자신의 삶의 안전을 주님께 두었다면,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여도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한 사람입니다. 성경 메시지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궁핍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시34:6),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을 받을 수 있다”(마5:7)고 가르치기에,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부요한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5:3,새번역).

시편107:1절
“주님께 감사드려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새번역)

107편은 시편 5권(107-150)의 첫 시입니다. 감사와 지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야훼)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시는 중심부에서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4번이나 반복한(4-32) 뒤,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매듭짓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감사로의 초청 (1–3)
B     감사의 이유들(4–32)
B′     찬양의 이유들(33–42)
A′    지혜를 얻자는 호소( 43)

1-3절에서 시인은 구속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확증하면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한 형식이나 내용없는 고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구속받은 백성”들은 각 지역(바벨론, 앗시리아 등)으로 사로잡혀 가서 많은 고난을 겪는 중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시인은 주께서 다양한 방식과 장소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음을 선포하는데에 이 시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 영적, 정신적, 혹은 물질적이든지 간에 – 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 모두도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량에서 완전한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시편107:4,5절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107편은 중심(4-32절)에 성도들이 겪은 4 종류의 곤경과 각 곤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조 역시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운율을 살려놓았습니다.

A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4–9)
B   감옥에 갇힌 자들(10–16)
B′  병든 자들 (17–22)
A′   바다의 선원들(23–32)
그 첫번 째가 광야로 상징되는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들의 영상입니다. 광야는 영구히 살 곳은 전혀 아닙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거기는 짐승이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성이 없고, 음식과 물은 핍절되기 일쑤입니다(4-5). 그곳의 삶은 무의미함을 거듭 거듭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의 경험이며, 범죄한 유대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 땅에 살아가는 모습 그자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고, 바벨론에서 영적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도 종종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며(4), 주님이 지으신 참된 성에서 정착하고 싶어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그러하였습니다 (히11:9-10). 그러나 실타래 같이 얽혀 있는 삶의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바른 인도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경우, 어느듯 목적지에 도착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5-7). 이것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방법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시편107:8,새번역).

매일묵상(2022/07/18 – 22)

잠언18:19절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이 잠언은 형제나 가까운 친구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친밀했던 사이가 갈등 관계로 바뀌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 관계 보다 풀기 어렵습니다. ‘형제’란 피를 나눈 친형제나 혹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서 만약 서로 간에 이해상충, 배신 등으로 신뢰관계에 금이 갈 때 당연히 감정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이 감정과 분노의 문제는 제일 다루기 힘듭니다. 마치 통행을 막기 위해 견고한 성의 문을 닫고 문빗장을 지르는 것과 같이 마음의 문을 닫아 관계를 끝내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적의까지 생겨나기 쉽습니다. 시편55편이 이런 감정을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동거할 때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편도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133:1-3).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져 형제를 섬기고자 노력할 때 가능합니다. 이기적인 우리 자아를 우리 힘으로는 극복하기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성령님에 의해 인도받는 삶이며, 그 끝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잠언18:20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열매가 사람의 배를 채워 주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로 만족하게 된다.”(새번역)

20절과 21절은, 갈등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과 언어를 다룬 단락(18:13-21절)의 결론입니다. 언어는 좋고 나쁨을 떠나 상대방에게 확실하고도 충분한 효과를 미치는 것은 물론, 부메랑이 되어 말한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솔로몬은 열매, 먹는다, 추수와 같은 농업 시대에 익숙한 비유를 사용하여 교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배’란 ‘그의 존재와 인격’을 나타내는 제유법입니다. 후단에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의 원어는 ‘소득 income’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비유의 원천을 과수원에서 밀밭 농사로 바꾼 것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만족하게 된다’라고 끝맺음 하여, 전단의 내용을 또 한 번 반복합니다. 이는 언어 사용의 결과가 필연적임을 강조합니다. 과수원이나 밀밭에서 과일이나 곡식을 재배하여 그 열매를 따서 먹는 것처럼, 이 잠언은 자기의 입과 입술이 마치 과수원이나 밀밭과 같으며 언어는 씨요, 말하는 것은 파종하며 거름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절망에 빠진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갔습니다. 주님은 거의 모욕에 가까운 말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주여 옳습니다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칭찬과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부활하사 대권을 가지신 주님은 섭리 가운데 우리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말을 배워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8).

잠언18: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혀는 위험한 지체이기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 있다”고 경고하여 신중할 것을 권고합니다. 먼저 우리는 언어의 힘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식축구의 전설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훈련 중 여러 번 실수를 한 어떤 선수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자 빈스 감독은 락커룸으로 가서 머리를 푹 숙이고 좌절하고 있는 그 선수(제리 크래머)를 격려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너는 NFL에서 가장 뛰어난 가드가 될 것이다.” 그 말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제리 크래머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습니다. 이에 반하여 남을 배려하지 않는 언어사용은 자신과 남 모두를 파멸시키고야 맙니다. 율리우스 시저는 뛰어난 로마의 장군이자 문필가였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망과 자신의 재주에 대하여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대화시 자주 면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주위에 있던 공화파들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가인 옥타비아누스는 언어 사용에 주의하면서 모욕을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 날(최후의 심판)에는 그것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고(마12:36), 야고보는 혀를 ‘불fire’이라고 정의하고 그 불이 지옥에서 나온다고 하여(약3:6), ‘죽고 사는 것’에 영원의 의미를 가미하였습니다. ‘혀’의 조종자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가 선한 말을 하고 그 열매로서 땅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마5:5).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시편106:7절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이 시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모든 권능과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지않고 오히려 반역의 길로 걸어간 이스라엘의 어두운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찬양, 기도, 그리고 하나님을 구세주와 심판자로 바라보는 신학적 맥락 내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찬양으로 초대(1–2)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3–5)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구원(6–12) 
D         이스라엘의 불신과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13–43)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절제(44–46)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47) 
A′         찬양으로 초대(48)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기뻐 노래하였으나, 곧 어려움을 만나고 불평이 터져나옵니다. 이같이 그들의 믿음은 냄비입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기 바빴습니다. 레파토리는 늘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나았다. 왜 광야로 끌어내어 우리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사건 사건이 닥쳐왔을 때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이유를 깨닫고 순종의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요, 중생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시편106:15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습니다”(새번역) 

작고하신 조용기목사님은 “영적인 복, 물질적인 복, 건강의 복”(요한삼서 2절)이라는 이른바 3박자 구원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본성 때문에 안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이 함께 오면 교만하여져서 마음의 가난을 의미하는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복을 받아 겸손해지는 것은 좋으나, 물질이나 건강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인격만큼’ 가지면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십니다. 그분은 환경 가운데서 당신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신 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죠!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실패하였습니다 (시편106:13-14).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신뢰하는 삶 역시 인간 본성과 어긋나기에, 성령님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항상 성경의 가르침으로 욕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인 복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건강의 복 추구에 몰입하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 즉 영적인 복을 먼저 얻으려는 열망이 있습니다(중생의 결과). 각기 원하는대로 주십니다. 건강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물질을 얻고 그 물질을 우상으로 삼도록 허락하시나(마6:2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세우는 축복을 주시되, 물질은 거기에 소용되는 만큼만 주십니다. 험한 세상 주님을 신뢰하며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여야 합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히13:5-6).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매일묵상(2022/07/11 – 15)

잠언18:16절
“선물은 사람이 가는 길을 넓게 열어 주고, 그를 높은 사람 앞으로 이끌어 준다”(새번역)


잠언에서 ‘선물’ 혹은 ‘뇌물’과 관련하여 ‘맛탄’과 ‘쇼하드’가 사용됩니다. 후자는 늘 ‘뇌물’의 의미로 쓰이지만, 전자는 문맥에 따라 ‘선물’ 혹은 ‘뇌물’로 번역하여야 합니다(잠15:27). 16절에 나온 ‘선물’의 원어는 ‘맛탄’입니다만, 좋은 뜻 보다는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잠언은 공의가 뇌물에 의해 뒤틀릴 수 있다고 지적하지만(17:8, 23- ‘쇼하드’), 성경에는 감사 또는 호의를 받기 위해 선물을 보내는 경우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골리앗의 블레셋과 전쟁에 나선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다윗을 통해 열 덩이의 치즈를 천부장에게 보낸 이새입니다. 또 다윗은 사울 왕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기 직전, 아말렉을 치고 얻은 전리품을 유대 장로들에게 보내어 환심을 샀습니다(삼상30:26). 그러나 선물과 뇌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선물이어도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한 세무 공무원은 납세자로부터 촌지를 받았을 때 그 얼굴이 절대로 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L 씨가 판사로 재직 시(1960-70년대), 누군가 케이크를 그분의 가정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L 판사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그 케이크를 화장실(변소)에 버렸습니다. 아이들의 실망감은 말할 수 없었지만, 조그만 선물 하나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면 안됩니다. L 판사의 행동은 올바른 것으로 회자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세상은 영악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기로 굳게  마음 먹고 기도하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잠언 18:17절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새번역)

본 구절은 송사를 다루는 재판의 경우 경솔하게 한 편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해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듣고 그에 따라 객관적이고 적합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훈입니다. 사건의 진위를 가려야 하는 재판관은 원고나 피고 어느 한쪽의 말만 일방적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도 보는 자의 관점과 이해관계 기타의 사정으로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해관계가 얽힌 재판의 경우는 불리한 사실은 숨기고 유리한 것만 골라 주장하기 때문에 한 쪽의 말만 들으면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본 잠언의 취지는 일상사에서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상대방의 말을 반드시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란 모두의 주장을 듣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살핀 뒤에 공정하게 판단하고, 적합한 조치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솔로몬 왕은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창기의 송사를 해결함으로 지혜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어머니의 일반적 심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오늘날 그렇게 해결하는 재판부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유전자 분석)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사에서의 다툼은 당사자들 사이에 잘하고 잘못한 것들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희 정승은 싸우는 두 여종이 와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너도 옳고, 너도 옳고, 아내도 옳다’는 대답을 하여 다툼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이는 지혜로운 인간관계의 모범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 18:18절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17절이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을 전부 들은 후에 진위를 가리고, 분쟁을 해결하라고 하였지만, 본절은 인간의 지혜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분쟁에 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여 제비를 뽑은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1)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삿1:3), (2)성전의 직무를 배분할 때 (대상24:1-5), (3)아이 성 전투의 패배 원인자를 가려낼 때(수7:14-26), (4)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선출할 때(삼상10:17-24) 각각 제비뽑기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2)는 공정성을 위해, (3),(4)는 이적이  뒷받침되었습니다. 즉 제비로 뽑힌 아간의 범죄 물증을 찾아냈고, 사무엘은 전 날 사울이 왕으로 뽑힐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이스라엘의 제비를 뽑는 사건에는 배후에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였습니다. 제사장이 가슴에 찬 판결흉배 속 우림과 둠밈도 비슷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선출할 때(행1:26)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제비뽑기 기록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는 더 이상 이런 제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공평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비를 뽑는 것은 지금도 합리적이고, 승복한다면 때로는 강한 자 사이의 분쟁해결을 위한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대화를 나누어 해결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

시편105: 1절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새번역)

105편과 106편은 시편 제4권을 끝맺음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두 개의 흐름 속에서, 105편은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부터 정복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찬송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음을 만민에게 선포합니다(1,2). 시의 구조입니다.

A    찬양으로 초대 (1–6)
B    언약을 세우심 (7–11)
C    주님의 보호 (12–15)
D    주님의 섭리 (16–23)
C′   주님의 보호 (24–36)
B′   언약의 성취 (37–45b)
A′   찬양으로 마침 (45c)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신 역사를 세 단계로 일괄합니다. 첫째는, 족장시대로서(창12-50장) 언약의 제정, 가나안 땅에서 유목민의 생활, 애굽에서의 요셉 이야기를 포함합니다(7-23). 둘째는, 출애굽의 시기로서 (출1-12장)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고난, 모세와 재앙들, 출애굽하는 백성을 보여줍니다(24-36). 셋째로 광야의 여정을 거쳐 가나안 입성을 언급함으로 언약의 성취를 노래합니다(37-44, 여호수아서). 언약을 이루신 이유는 당신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되기 위함입니다(45). 약 750년의 역사를 45절로 요약한 본 시편은 때로는 신비롭게 행하시지만 언제나 백성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미리 계획하시며, 필요를 언제나 충족시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의 이런 형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편105:45).  

시편105 : 17절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편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이를 이루시는 섭리의 신비함을 노래합니다(16-23절).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야 절망하였겠지만, 그 사건은 야곱의 집 사람 70 명을 애굽으로 보내 민족을 만드실 계획의 출발이었습니다. 1,000년 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앞서 보내신 신비로운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그와 동시에 요셉의 인격을 도야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몰랐기 때문에, 큰 의문과 고뇌가 야곱과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요셉은 13년 간을 노예와 죄수로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너는 이 어두움과 고통 속에서 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여기서 합격한 요셉은 총리가 되어 다스렸습니다. 8년 후 큰 흉년이 닥쳤습니다. 형제들은 그 흉년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 도착한 그곳은 총리 요셉이 있는 곳입니다. 신비롭습니다. 고난이 곧 축복이라는 그 신비말입니다. 우리 역시 고난의 한 가운데서는 요셉이나 야곱, 그리고 그 형제들과 같이 같이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전혀 무관합니다. 요셉을 감옥에서 총리로, 궁핍에서 풍요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기근이라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주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말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시편105:23절).   

매일묵상(2022/07/04 – 08)

2022/7/4-8
잠언18:13절
“다 들어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를 받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짓이다.”(새번역)

18:13-21절은 새 단락을 형성하면서, 미련한 자 보다도 갈등과 언어에 초점을 맞춥니다. 잠언의 제자는 정의를 세우며, 갈등을 해결하고 언어를 힘있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단락의 구조입니다: 13-15절(서론), 16-19절(법정에서 분쟁해결), 20-21절(언어의 힘). 바보가 보여주는 교만한 태도(12a)는 무례하고 성급하게 말하도록 만들어(13a), 수모를 받게 마련입니다(13b). 이는 명예와 존귀가 겸손한 자를 찾아온다는 교훈(12b)과 대조됩니다. 본 잠언은 현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천박하게도 말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 어리석은 자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18:2참조). 바보의 그런 경솔함을 보는 모든 사람이 ‘어리석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좋은 예가, 시험을 보는 학생입니다. 자신이 다 안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함정이 들어 있는 문제를 끝까지 읽지 않고 성급하게 답을 적는 자는 ‘0’점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급히 결론을 내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교만한 바보 앞에 놓인 특별한 유혹이자, 미성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길에서도 같습니다. 지금은 작고 하신  K 목사님은 독일에서 귀국 비행기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습니다. 너무나도 당황하여 공항에서 서성일 때, 우연히 아는 집사님을 만났고, 이어 그 지역의 부흥회를 인도하여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후 그분은 “중간 결산 하지 말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인생은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성급하게 속단하는 신자는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잠언18:14절
“사람이 정신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지만, 그 정신이 꺾인다면, 누가 그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새번역)

즐거움과 근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 잠언15:13및 17:22과 같이, 이 잠언도 심리적 상태와 신체의 건강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육체-영혼이란 이원론은 없습니다. 다만, 긍정적인 태도가 개인의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상한 마음(우울증이나 불안 등)은 건강을 더 악화시킬 수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문제는 열등감이나 우울증을 가진 사람은 역경이 없더라도 패배로 향하는데, 하물며 역경 속에서 ‘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견인불발) 힘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최고의 답변은 좋은 소식이나 지혜를 듣고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지혜(좋은 소식)는 병을 이길 수 있는 정신적(영적) 생명을 낳습니다. 수용소에 갇혀 절망하는 포로들이, 은밀히 숨겨둔 단파방송 수신기로 연합군의 소식을 들었을 경우 절망은 대번에 소망으로 바뀝니다. 사도들이 전한 좋은 소식(복음)은 ‘지혜’의 정수입니다. 복음에는 환란, 역경, 궁핍, 죽음, 죄의 수용소에 있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한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신 기적,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들이 의미하는 바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만유의 주님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 지식, 희락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교제 방법입니다. 믿는 자는 이런 기대감 때문에 모든 우울증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롬8:37,새번역)

잠언18:15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지식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를 말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베이컨의 말이 있지만, ‘지식’은 영적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 잠언은 지식 얻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서론(13-15절)을 매듭짓습니다. 전단의 ‘마음’ 후단의 ‘귀’는 ‘분별하는 힘’과 관련된 기관으로, 지혜자를 특징지우는 양도불가능한 자산입니다. ‘분별력’은 지식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지혜자가 되고자 하면 지식을 갖추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통상 착한 사람은 지식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보물을 얻듯이 지식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10 호의 마을에도 자신 정도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자신 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반면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인품을 갖추지 못하고 교만하기 쉬운데, 이는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8:1). 본 잠언의 ‘명철한 자’’는  양자를 다 갖추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잠언의 제자들은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욥12:13;잠8:14). 즉 지식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주신 목적은 사랑의 수고를 위함입니다. 이런 진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지식도 갖추어야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계시한 성경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7,새번역)

시편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본 시편의 각 구절마다 놀라운 감사의 탄성이 퍼져나와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104편도 같아, 두 시편은 하나님을 구세주와 창조자, 아버지와 보존자, 자비로우시며 권능을 가진 분으로 찬양드립니다. 시편의 은하계 중 이 두 개는 마치 쌍둥이 별과 같은데, 특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지신 우리 주님을 전제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다윗입니다. 이 시편은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1)로 시작해서 주의 천사들(20)과 천군들(21) 그리고 온 우주에 창조된 모든 것들에게 주님을 찬송하라는 외치고, 다시 한 번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22)는 말로 끝맺음 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개인적인 찬양 (1–2절)
B    각 인에게 베푸신 선하심을 찬양 (3–5절)
B′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의로운 통치를 찬양 ( 6–18절)
A′   우주적이며 개인적인 찬양(19–22절)

다윗은 인생의 영고성쇠를 모두 경험하였습니다. 20살에 군대장관이 되었고, 위대한 왕이자, 시인이요 음악가였습니다. 또한 인간의 심리를 통찰한 심리학자요, 하나님을 아는 신학자요, 하나님의 계시기관인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충신의 가정을 파탄시켰기에, 다윗의 가정은 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인생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강자인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눅11:28). 마지막 날 평가 기준은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는가?”입니다.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9,10).

시편104:24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새번역)

104편의 주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103편이 ‘구속자-왕’의 측면을 노래한다면, 이 시편은 ‘창조주-왕’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광대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시인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따라, 그분의 지혜, 능력, 인자하심을 묵상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창세기 1장의 서사시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1–4)
B    피조물의 다양한 존재형식(5–26)
B′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27–30)
A′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31–35)

어떤 목사님은 한려수도를 관광할 때 맑은 바다 속으로 수 많은 물고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수 없이 많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왔을 터인데, 넉넉하게 어부의 요구에 응해 준 바다는 풍요롭구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 바다를 늘 채워 놓으시는 하나님의 광대함과 너그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누구를,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하는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주님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예로 들면서 삶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장소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정, 직장, 기타 삶의 현장은 물론 여행도 영적 생활에 필수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나의 하나님께 노래할 것이다.” (시편103:33,새번역).

매일묵상(2022/06/27-07/01)

잠언 18:10절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10절과 11절 모두 보호와 안전에 관한 내용이나, 10절은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의인의 안전을, 11절은 재물을 의지하는 부자의 거짓된 안전을 다룹니다. 9절은 ‘패망하는 자’란 단어로 끝나고, 10절의 첫 단어는 ‘견고한 망대’입니다. 이로써 잠언은 어떤 경우에도 패망하지 않고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견고한 망대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제자들이 묵상하도록 합니다. 게으르지 않는 정도 갖고는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확실한 안전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의지하는 미국 달러, 국가(재정파탄 가능), 은행(5천만원만 보호), 부동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위기 때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안전 자산, 피난처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여호와)의 이름’은 솔로몬의 잠언이나 주님과 사도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3:5), 출애굽 사건, 십자가와 부활 등을 통해 본질과 속성을 보여주신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의인(그리스도인)은 바로 주님께 달려가서 참된 안전을 누립니다. 10절이 위치한 문맥이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지금 신실하게 살아가는 의인이 불의와 험담 그리고 풍문으로 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55:22)는 약속과 노아, 아브라함, 욥, 다윗 등의 구원 사건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견고한 망루 안에 들어가게 되고, 만유의 주님을 믿고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잠4:23).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잠언 18:11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11절은 의인의 참된 안전보장책에 대비되는 부자의 거짓된 안전보장책(재물)을 말합니다. 부자는 어리석게도 속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이아말로 ‘견고한 성’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많은 재물을 쌓아둡니다. 고대에는 적이 공격할 때를 대비하여 성벽을 높이 쌓습니다. 헬라의 도시국가들도 모두 아크로폴리스라는 산 위의 요새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서 살다가, 전쟁이 터지면 모두 아크로 폴리스로 들어가서 적과 대치합니다. 실제로 아테네에 가서 본 아크로폴리스는 점령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포의 발명은  그런 방비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부자가 쌓아논 재물도 이와 같습니다. 물론 가난한 자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10:15). 그러나 재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크게 당황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지혜보다 못합니다. 재물로는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나, 지혜는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의사의 권고를 따르는 환자가 아무래도 더 빨리 회복하여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없지만,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주님의 돌보심을 받다가,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의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이는 재물을 안전책으로 삼는 부자의 생각은 망상입니다만(말기 암 환자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는 의인의 안전은 확실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잠언18: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요사이 전세계는 물가상승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전혀 물가가 오르지 않던 일본에서도 바나나 한 상자가 1,800엔에서 올해 2,700엔으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언제 물가가 잡힐까요? 한 경제 전문가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연준)가 기준금리 인상을 멈춘 시점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1.75%이나, 연말에는 3.5%로 예측됩니다. 그러나 물가가 잡히더라도 내년에는 경기침체가 우려됩니다. 우리는 이를 대비하면서 경기 연착륙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여 할 것입니다. 이같이 경기는 금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의 교만 여부입니다. 교만한 사람이나 국가는 반드시 패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은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고 교훈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눈밖에 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좋은 예로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바벨론 제국과 도시 건설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자마자 정신병자가 되어 7년이나 밖에서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그 후 겸손한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 보자, 주님은 다시 이성을 주셔서 그는 인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와 반대로 존귀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겸손이 먼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요셉입니다. 바로가 해몽을 요청하였을 때, 요셉의 첫 마디는 “해석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하면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만백성의 생명을 구함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11:2).

시편102:3절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있을 때만큼 우리의 진정한 믿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없습니다. 응답이 없다고 생각될 때, 주님의 완전한 지혜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말 없는 ‘대답’은 ‘NO’이며, 이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응답입니다. 물론 ‘아직 아니다’라는 결론도 주시는데, 이는 우리와 주님의 시간표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고(24), 병들고 쇠약한 상태에서 적들로부터 계속된 비방을 받아 너무나도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3-9). 그는 이 모든 일은 자신에 대한 ‘주님의 분노와 진노”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10). 자신의 날은 이미 기울어졌습니다(11). 그래서 시인은 서두부터 부르짖었습니다. 주님께서 귀를 기울여 속히 응답하여 달라고 말입니다(1-2). 그러나 시인은 영원하시며 만유를 창조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는 주님의 위대함과 그분의 목적하신 영광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본 시의 중심축입니다(12-22). 우리가 고난에 처하나 낙담하지 않는 근본적인 힘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만약 이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에 대한 신뢰가 우리 믿음의 중핵을 이루지 않으면,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시인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편, 본 시편 25-27절에 나오는 영원하신 주님을 히브리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히1:10-12).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시편102:26절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새번역)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큰 채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국가가 법으로 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만 행사가능합니다. 이에 위반시 국가의 벌이 두렵기 때문에 채권자는 행동을 삼가합니다. 지혜자란 자신의 한계를 잘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겸손이 나오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만유의 주님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온 우주 만물이 모두 사라질 것이고, 새롭게 변화될 대상일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한 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영존하시는 주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살아가야만 합니다. 본 시편에 등장하시는 영원하신 주님의 정체를 히브리서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0-12절은 본 시편을 인용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온 우주의 옷을 바꾸시는 주님”으로 선포하십니다. 마치 물리학자가 소립자 세계의 놀라운 존재와 법칙을 발견하고 실험하여 확신을 얻은 뒤 학회에 보고하듯이,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3년 6개월 동안 주목하여 자세히 관찰하고 그분이 죽고 부활 승천하신 것과 그 의미를 확인한 후(요2:22), 목숨 걸고 증언한 내용이 복음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님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시고, 각 사람의 마음에 당신과 복음을 증거하고 계십니다(요15:2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