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2022/06/20-24)

시편 100: 1절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새번역)

이 감사의 시 짧지만(5절),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 그리고 다시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을 되풀이 함으로써, 멋진 내재율을 담아 저절로 찬양과 감사가 터져나오게 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2절) 3중의 초청; ‘환호하라, 섬겨라, 나아가라’
         B1 (3절) 3중의 확언: ‘하나님….우리를 지으신 분….그의 것’
A2 (4절) 3중의 초청: ‘들어가며…감사하며…송축하라’
          B2 (5절) 3중의 확언(하나님의 성품): ‘선하고…인자하고…성실하시다’

(1-2절)은 주님(야훼)을 찬양으로 환호하게 한 후에, 그분의 경내로 들어가 예배드리고, 끝으로 그분의 임재 안에서 안식하도록 이끕니다. 3절은 왜 우리 모두의 찬양과 예배가 합당한지를 말하는데,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는 그분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주님(야훼)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고, 4절은 터져 나오는 감사의 마음과 환호를 표시하기 위해, 다시 한번 3중의 초청을 발합니다. 5절은 3절을 더욱 발전시켜, 주님의 영원하신 성품을 열거하고 시인의 찬양의 근거를 뚜렷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시인이 아는 주님은 창조주요, 출애굽을 이루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 야훼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주신 바로 그 하나님인 것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새노래를 만들기 때문에, 찬양의 깊이와 강도는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100:5, 새번역)

시편101: 6절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이 시는 왕 다윗의 결단을 노래합니다. 특히 1절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전체 시(8절)를 지배합니다. ‘인자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다윗 자신의 통치 이념입니다. 시는 3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4) 왕 자신의 사적인 삶의 표준-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 (5-7) 신하들을 등용하는 기준- 신실하지 않은 사람은 배제하고, 충성된 신하는 등용한다/(8) 재판장으로서 정의를 확립하겠다. 유교 역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통치자의 자리나, 고위직에 오르게 되면 그 나라는 부패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한 민국은 공무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하여 아무나 공무원이 되지못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은 자신의 시처럼 온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출발선은 눈이었습니다(삼하11:2). 다윗은 눈을 통해 들어온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그의 집은 가장 비극적으로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외친 정의로운 통치 또한 좌절되었고 누적된 백성의 불만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의 온상이 되었습니다(삼하15장). 더우가 다윗을 이은 솔로몬 왕을 비롯하여, 모든 왕위 계승자가 불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다윗과 그 후의 모든 왕들이 부적합한 인물임을 폭로하며, 장차 오실 완벽한 다윗(예수 그리스도)을 기다리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사9:6).


잠언18:7절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인권을 강조하는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회원국 중 하나인 터어키의 쿠르드족 인권 탄압을 강력히 비판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놀라서 나토 가입 신청을 하였으나, 터어키의 반대로 가입이 보류된 상황입니다. 두 나라에게 이런 상황은 전혀 의외였을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삶도 같습니다. 6절은 미련한 자의 입이 매를 자청한다고 가르칩니다만, 7절은 이를 보다 심화하여 미련한 자의 언어 생활이 그의 멸망의 원인과 영혼의 그물이 된다는 치명적인 결과를 제시합니다. 바보에게는 전혀 의외일 것입니다. ‘멸망이 된다’의 원어는 ‘메힛타’로서, 본래 소멸, 폐허 혹은 경악스러운 파괴 등을 의미합니다. ‘그물이 된다’의 원어는 ‘모케쉬’이며, 사냥꾼이 짐승을 포획하기 위해 매설한 올가미 덫, 갈고리 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한자는 입 때문에  숨통을 끊어놓을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 문장은 동사가 없이 명사로만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본문의 진리가 영구불변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은 도덕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갈6:6). 이를 생각해 보면 입으로 인한 ‘멸망’과 ‘그물’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자란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무익한 말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마12:3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잠언18:8절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새번역)

잠언은 언어의 남용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넘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킨다고 경계합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험담이나 풍문을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퍼뜨리는 사람은 잠언이 말하는 또 하나의 바보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26:22).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8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험담을 회피하여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들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그런 말을 반복하지 않고 흘려보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입니다 (예레미야15:16).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18:9절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패망하는 자의 형제이다.”(현대인의성경)

본 구절은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자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8)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서두에 ‘역시(also)’ 혹은 ‘심지어(even)’를 의미하는 ‘깜’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양자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부사 ‘깜’은 앞의 상황을 전제하고 그 상황과 관련된 또 다른 정보를 덧붙이고자 할 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보다 남의 말을 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한편,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 온갖 이유를 들고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유대 농경 사회에서는 거리나 밭에 사자가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핑계를 대지 말고 자신의 일은 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패망 하는 자의 형제”일 뿐입니다.” ‘패망(패가)’이란 재기 불능의 엄청난 파멸을 가리킵니다. ‘일’은 수고스럽지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어느 치과 의사 한 분은 경기도 수원시 남문에서 오랫 동안 개업을 하시면서 빌딩도 구입하는 등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나 7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환자를 맞아 진료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분은(집사님)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 만족할 줄 아는 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전3:22). 하나님은 그가 즐기는 일을 통하여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이 일을 발견하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전9:10). 그래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26:13).

매일묵상(2022/06/13-17)

시편98:1절
“새 노래로 야훼를 찬양하여라.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셨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로 승리하셨다.(공동번역)

“칸타테 도니노”(오, 주님을 찬양하라!)로 알려진 이 시편은 ‘공동기도서’(성공회)에 삽입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저녁 구약성서 읽기와 그것의 성취를 증언하는 신약성서 사이입니다. 시는 하나님의 승리(구원)(1-3)에 대하여 인간(4-6)과 피조물(7-9)의 찬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연(1-3)을 지배하는 ‘승리’의 주된 의미는 ‘구원’입니다. ‘예수(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헬라어 발음이고, 의미는 ‘야훼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어디로부터 구원입니까? 죄로부터 구원입니다(마1:21). 시의 첫째 연에서 노래하는 이 구원/승리는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 오직 주님의 팔로만 이루신 업적(놀라운 기적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통한 심판과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형에 불과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미래에 있을  ‘주(야훼)의 팔’(사53:1)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실 것을 노래하는데, 그 ‘주(야훼)의 팔’은 다름 아닌 ‘주의 종’입니다(사53장). 신약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1:12-14), 예언된 주의 종임을 밝혀줍니다(행2:29-36; 4:30).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고 부활하셨고(히10:14),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사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히9:28). 본 시편에서 부르는 ‘새노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14:3).

시편99:4절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새번역)

시편 99편은 찬양과 예배를 명령하며, 100편은 이에 화답하여 ‘온 땅’이 찬양합니다. 99편의 주제는 ‘예배로의 초청’이고, 3번의 ‘거룩’이라는 후렴구가 등장합니다: (1-3) 거룩하신 분의 은혜, (4-5)거룩하신 분의 율법, (6-9) 거룩하신 분과의 교제. 첫 단락은 거룩하신 왕의 위대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만민이 떨고, 땅이 흔들릴 것’이지만, 그분은 ‘시온에’ 그리고 ‘그룹 사이에 좌정’해 계십니다. 이 장소들은 백성에게 말씀하시고(출29:42-46), 죄를 속하시는 곳(출25:17-22)으로, 그분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정의와 동시에 은혜도 잊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십니다. 이어 시인은 ‘야곱’을 등장시켜 공의를 행하라는 율법을 받았지만, 여전히 옛 야곱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우리를 빗대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시는 완전한 ‘율법’에 직면하면, 늘 은혜를 갈구하게 되는데, 이는 비틀거리며 걷기 때문입니다. 이 정의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 언약궤 위의 ‘시은좌’에 앉아 계시는 분의 발등상에 경배하도록 만듭니다(5). 마지막으로 시인은 ‘모세’ ‘아론’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증거와 율례’를 지키면서 주님과 동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명령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구약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결함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 주님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잠언18:4절
슬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는다.” (새번역)

현자의 말은 심오하며 때로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지혜를 담고 있어서, 심사숙고를 해야만 합니다(깊은 물). 잠언은 지혜자의 이 특성을. ‘물’이라는 소재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건조하여 생수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땅속 깊이 흐르고 있어 건져올리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기(겨울철)에는 비가 내리고, 말라 있던 강(와디)에 격류가 흐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스라의 철병거 900승이 말라 있던 ‘와디’인 기손 강을 통해 진격하고 있을 때, 상류인 다볼산에 비가 내렸고 이는 순식간에 기손 강을 격류로 변화시켰습니다. 철병거 900승은 물 속에서 전멸당하였습니다(사사기). 한편, 현자에게서 나오는 지혜는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아나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하기 때문에, 그 지혜에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줍니다. 잠언 3천 개를 말한 솔로몬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샘”에 비유될 수 있는 지혜자로서,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전 인류에게 주신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그 복음은 우리 모두의 깊은 갈증과 절망을 한 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 속에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요3:13-21). 아들을 보내주신 이 사랑을 깨달아야 비로서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잠언18:5절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본 잠언은 악인의 권력 남용을 경계합니다. 특히 정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재판에서 사악한 것들, 즉 뇌물 수수, 위증, 차별적 대우, 편견, 압력, 연줄 등으로 인하여 그릇된 판결이 날 경우 개인의 삶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창조주가 정하신 “의의 열매”를 산출해 내야 인간들 사이에 화평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재판정에서 이 문제는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부족하고, 재판관의 재량이 많이 작용하던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경우에도 약자 편에 서서 올바르게 내려지는 재판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으로 의역된 원문은 “악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얼굴 즉 외모, 재산, 권세, 가문 등 재판에 있어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외적인 것들을 보고 일방적으로 편들어 주는 행위(24:23; 신10:17)를 보여줍니다. 후단에 “억울하게 하는 것”의 원어는 ‘기울이다, 치우치다’입니다. 이 또한 뇌물과 위증, 권모 술수, 사회적 신분 등 외적인 것 때문에 정의가 굽어져 의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재판을 묘사합니다(출23:2).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인데(고전6:3), 하물며 세상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주님만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판단할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약1:5).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지혜, 건강)을 공급받는 삶,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2:9).


잠언18:6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바보는 언어를 남용하기 때문에 다툼(소송)을 일으키지만, 해를 당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교훈입니다. 전단을 보면, 그 바보는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열어 마구쏘아 대고는,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듣는 자는 그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말투나 인격모독적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다툼이 시작됩니다. 다툼의 결과는 미련한 자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데, 후단은,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한다”, 고 말하여 역설적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이 타인을 배려하고,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샬롬이 만들어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보가 열변(?)을 토한다면,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동정심 대신 적개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매를 자청하다”는 표현은 재판관의 명령에 의해 불법을 행한(명예 훼손, 모욕 등) 벌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19:29). 타락한 관리를 부추켜 죄 없는 자를 매질하려고 시도하다가 자신이 매질 당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10:11, 18). 이에 반하여, 현명한 사람은 갈등을 피하거나(17:1, 14),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15:18). 그러므로 잠언은 다툼을 멀리하면 영광이 된다(가정과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의미)고 합니다(20:3). 우리로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먼저 사건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시37:5-7). 그 후에야, 악한 자를 감정으로 대적하지 않고, 정의의 길만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양보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마5:40,새번역)   

매일묵상(2022/06/06 – 10)

잠언 18:1절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잠언 18:1-21절의 구성입니다.
(1)미련한 자의 반사회적 언어습관(18:1-11)
   (가)어리석은 자의 반사회적 성격, 행동과 결과(1-9)
          서론(1-3) 어리석은 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본론(4-8) 미련한 자의 왜곡된 언어습관
          결론(9) 바보는 사회를 약탈한다.
   (나)주님 안에서 의인이 가지는 방패(10-11)
(2)지혜자의 화목하게 하는 언어습관(18:12-21)

바보는 ‘사람을 싫어하며 고집불통’의 특성이 있습니다(1,2). 그래서 공동번역은 “남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사람은 외톨이가 된다”로 의역하였습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란 비사교적인 사람을 묘사하는데, 문맥 상 그는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바보입니다 . 그 바보는 자신의 갈망- 돈, 명예, 권력 등 -을 성취하려고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자신의 목표와 상관없다면 다툼(소송)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타인에게 냉담하고, 경건하지 못한 것은 물론 합리성까지 결여되었습니다. 창세기(13장)에서 롯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요단 동편을 선택하여 모든 소유를 이끌고 소돔 성을 향해 갔습니다. 소돔 땅은 풍요로운 지역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돌라오멜 왕에게 다른 소돔 사람들과 함께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이 구출해 주었고, 소돔 성이 멸망할 때 역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가족만 구원받았습니다.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 (잠언18:2,공동번역).

잠언 18:2절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공동번역)

2절은 닫힌 마음과 열린 입을 가진 미련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추구하려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1절)와 동일시 됩니다. 그 바보는 ‘깨우쳐주는 말(명철)’은 싫어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성취하기는 좋아합니다. ‘깨우쳐주는 말’ 혹은 ‘명철’의 원어는 ‘테부나’이며 ‘분별’을 의미하는 ‘빈’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호크마)와 심히 많은 총명(테부나)’(열상5:9), 히람이 놋을 다루는 ‘총명(테부나)’이 이것을 말합니다 (왕상7:14). ‘기술’로도 번역되기에, 미련한 자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의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사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크게 총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제의 기술은 어설프기만 한데 도제가 도공의 지혜를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굽는다면 좋은 도자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만약 미련한 자가 현자의 깨우치는 말을 싫어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마구 말을 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입니다(10:8; 14:3). 그러나 그 바보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낼 경우 자신의 미련함이 알려져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12:23; 13:16).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깨우치는 말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행위를 논하다가 심판 받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물론 욥의 중보기도로 벌을 면하였지만, 그들의 말을 읽어 보면 욥과 하나님께 대하여 너무나도 단순하게 판단한 잘못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벌과 모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잠언18:3,새번역)    

잠언 18:3절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새번역)

본 잠언의 ‘악한 사람’은 1절의 반사회적인 분리주의자, 2절의 미련한 자가 발전된 형태입니다. 그에 대한 벌로서, ‘멸시’와 ‘모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보는 스스로를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깨우쳐 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결과 그 악인은 주님 앞에 죄를 범하여 벌 받고 공동체에 의해 멸시당합니다. 전단에서 ‘….이 오면…뒤따르고’란 원인(악인)과 결과(멸시)의 필연적 관계를 말합니다. 여리고 성 전투 시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페르샤 산 외투 한 벌과, 금 한 덩이를 숨겼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아이 성 주민에게 패배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드러났고, 그는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였습니다.  그의 수치는 씻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할 경우 ‘모욕, 망신’은 당연히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후단은 악인의 부끄러운 일이 심판을 받고. 사회의 치욕거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예24:9). 그러나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교만, 탐욕,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비시 600년 경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 왕과 백성이 그러하였습니다(예29:18-21).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계속 전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시드기야 왕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지혜와 생명이었지만, 어리석게도 왕 시드기야와 백성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얼마 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왕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감과 동시에, 다윗 왕국은 영원히 막을 내렸습니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언18:4).

시편96: 2절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이 시는 야훼께서 왕이 되심을 노래하는 시편들(93-100)에 속하고, 배경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장막에 안치시킬 때(다윗 시대)로 보입니다(역상16장). 주제는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으로서의 주님(야훼)입니다.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찬양의 선포(1–3)
B    주님의 위엄(4–6)
A′   찬양의 선포 (7–9)
B′   주님의 통치 (10–13)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매일 ‘찬양’하는데 능동적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위엄과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그분을 또 찬송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야훼의 구원(2), 기이한 행적(2), 의로운 통치(10), 만물의 창조주(5), 만유의 회복(11,12),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13)을 묵상한 뒤, 경외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같이 노래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거나, 성취될 것입니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 사건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장소만 이전하였지 여전히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주인은 바로에서 야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되신 야훼(하나님의 아들)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세와 같이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나라(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구원하고 있는 과정이 신약의 구원 사건입니다. 그 동인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방법은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요3:16).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님의 순종과 희생이 새노래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확실한 심판이 전제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13).    

시편97: 1절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뛸 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새번역)

이 시의 초점은 의롭게 심판하시는 만유의 주님(야훼)입니다. 그분은 두렵고 엄위하시며(3-5), 공의롭게 다스리십니다(2). 주님의 심판으로 세상은 자유함 받아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1).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나(6-9), 주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와 헛된 것을 추구한 모든 사람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7). 시인의 이 같은 선포는 하나님 아들에 의한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요5:27-30).  멸망당한 다윗 왕국은 하나님 나라를, 왕 다윗은 그 나라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윗 왕은 죽었지만, 그분의 후손인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재림하셔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행17:31).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인으로 부릅니다(8,12).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10). 왜냐하면 그분이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 주님의 통치는 먼저 신자의 삶 속에서 ‘의의 통치’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누구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본 시편은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는” 주님(야훼)이라는 신학적 대답을 줍니다(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주님을 기뻐하여라…감사를 드려라”고 말합니다(10-12). 세상은 험악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약속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1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매일묵상(2022/5/30 – 6/3)

시편 95: 1절
“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새번역)

본 시편의 주제는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주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 사건들을 돌이켜 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홍해를 건넌 후 2개월 즈음에 시내 산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광야의 길을 걸은 백성과 짐승 떼는 목이 말랐습니다. 모세는 위급하여 주님께 부르짖으니 호렙 산 반석을 쳐서 물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곳을 ‘맛사(시험)와 므리바(다툼)’라 이름하였습니다. 이는 백성이 자신은 물론 주님과 다투고, 주님의 임재 여부를 시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출17장). 같은 사건이 38년 후 신광야에서 또 한 번 일어났습니다. 물이 없어 목마른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자, 물을 줄 능력이 없는 모세와 아론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은 회중을 모아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를 내면서 반석을 두 번이나 쳐서 물이 나왔지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신 광야 지역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지팡이로 때리면 간혹 고여 있던 물이 나오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순종해야만 하였습니다(민20장 므리바 사건). 이 사건의 핵심은 위기가 닥치자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고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신앙 생활의 핵심은 ‘순종’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회고하여 경고하고,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본 시편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을 격려합니다. “내가 화가 나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95:11;히4:5).

시편95: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홍해를 건넌 후 시내 산까지  2개월 동안, 주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시내 광야에 이르자 물이 없어 다투는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출17:1-7), 시내 산에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을 불신하고, 시험하고, 불순종하여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9-11). 그들의 후손인 시인은 하나님을 구원의 반석(1), 목자(6-7), 율법의 수여자(7-11)로 규정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런 경고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표적들을 의심하고 믿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내 안식’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과 관련하여는 가나안 땅이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3:7-4:13절은 이를 상론합니다. 히브리서는95편의 의미를 이스라엘에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오늘’(95:7)은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이며, 거기에서 명령한 ‘너희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며, 약속된 ‘안식’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임을 말합니다. 이런 권면을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되돌아 가려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본 시편과 히브리서의 경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히4:14새번역)

잠언17: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본 잠언은 17:23절(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보다 한층 안 좋은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법제도 자체를 뒤집어 엎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하다’의 원어는 ‘아나쉬’로 ‘벌금을 매기다’를, ‘의인’은 문맥 상 ‘죄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넘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귀족을 매질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재자 자신을 위함입니다. 이 잠언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설립된 이래 1987년 민주화를 위한 평화시위가 성공할 때까지, 본 잠언이 글자 그대로 실현된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비시850년 경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시대에, 좋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던 나봇이 그렇습니다. 이세벨의 지시에 의하여 나봇과 그 가족은 불의의 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모두 두려워 침묵할 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린’ 전형적인 사건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시인하자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넘겨졌고, 총독 빌라도에게 쇠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사 그분의 주장이 맞다고 옹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시 때때로 주님을 의지하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17:27)

잠언17:27절
“배운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은 언제나 침착하다.”(현대인의 성경)

27절에서 ‘지혜자’란 말을 가려서 하고 감정표현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이의 근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식입니다. ‘배운 자’는 참되게 지식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호크마)’란 ‘지식(다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공기역학법칙을 먼저 숙달하였기 때문에 최초로 비행기를 날렸습니다. 자동차 기술자는 자동차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때문에 능숙하게 차를 수선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의 삶의 태도는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요, 목표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피할 길을 주님이 마련해 놓으셨다는 믿음이 있으며(고전10:13), 경험을 통해 증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침착합니다. ‘침착, 냉철함’ 이것이 두 번째 요소입니다. 성품이 냉철하지 못한 자는 지혜자(명철한 자 혹은 분별력 있는 사람)가 아닙니다. ‘침착’과 ‘지식’은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침착할 수 있고(숙달된 군인), 침착하기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으나  침묵하셨습니다(사53:7).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고난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침묵하셨고, 침착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속죄권을 받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역경을 당할 때 이 진리를 묵상하고 잠잠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8)

잠언17: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입을 열어 모든 의심을 제거시키는 것보다 입을 다물어 너를 바보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28절에서 솔로몬은 어리석음을 감추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도발을 받았을 때 입을 다물고 마음을 다스리도록 교훈합니다. 지혜로운 자라도 말을 많이 하면 허물을 면키 어렵기에, 잠언은 입을 다물고 잠잠한 사람을 슬기롭다고 칭찬합니다(10:19). 하물며 어리석은 자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어리석습니까?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26:12). 전문가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말을 조심합니다. 약 1년 전 네이버와 카카오 라는 회사의 주식이 올랐을 때, 어느 유명 애널리스트는 무조건 두 회사의 주식을 사서 5년 보유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투브 영상을 올렸습니다. 얼마 후 시장은 두 회사의 세계시장에서의 성장가능성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주식은 반토막 났고, 그는 유투브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보가 현자로 여겨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28절이 가르치는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분노를 즉시 드러내고 매를 자청하는 바보도 한 번 참으면 이렇게 지혜로워 보이는데, 슬기로운 사람의 경우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현자는 분노할 때 자신을 방어하려고 경솔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충분히 조절한 후, 신중히 처신함으로써 상대방의 실수를 우정으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런 잠언의 문맥에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