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0: 1절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새번역)
이 감사의 시 짧지만(5절),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 그리고 다시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을 되풀이 함으로써, 멋진 내재율을 담아 저절로 찬양과 감사가 터져나오게 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2절) 3중의 초청; ‘환호하라, 섬겨라, 나아가라’
B1 (3절) 3중의 확언: ‘하나님….우리를 지으신 분….그의 것’
A2 (4절) 3중의 초청: ‘들어가며…감사하며…송축하라’
B2 (5절) 3중의 확언(하나님의 성품): ‘선하고…인자하고…성실하시다’
(1-2절)은 주님(야훼)을 찬양으로 환호하게 한 후에, 그분의 경내로 들어가 예배드리고, 끝으로 그분의 임재 안에서 안식하도록 이끕니다. 3절은 왜 우리 모두의 찬양과 예배가 합당한지를 말하는데,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는 그분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주님(야훼)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고, 4절은 터져 나오는 감사의 마음과 환호를 표시하기 위해, 다시 한번 3중의 초청을 발합니다. 5절은 3절을 더욱 발전시켜, 주님의 영원하신 성품을 열거하고 시인의 찬양의 근거를 뚜렷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시인이 아는 주님은 창조주요, 출애굽을 이루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 야훼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주신 바로 그 하나님인 것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새노래를 만들기 때문에, 찬양의 깊이와 강도는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100:5, 새번역)
시편101: 6절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이 시는 왕 다윗의 결단을 노래합니다. 특히 1절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전체 시(8절)를 지배합니다. ‘인자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다윗 자신의 통치 이념입니다. 시는 3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4) 왕 자신의 사적인 삶의 표준-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 (5-7) 신하들을 등용하는 기준- 신실하지 않은 사람은 배제하고, 충성된 신하는 등용한다/(8) 재판장으로서 정의를 확립하겠다. 유교 역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통치자의 자리나, 고위직에 오르게 되면 그 나라는 부패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한 민국은 공무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하여 아무나 공무원이 되지못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은 자신의 시처럼 온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출발선은 눈이었습니다(삼하11:2). 다윗은 눈을 통해 들어온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그의 집은 가장 비극적으로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외친 정의로운 통치 또한 좌절되었고 누적된 백성의 불만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의 온상이 되었습니다(삼하15장). 더우가 다윗을 이은 솔로몬 왕을 비롯하여, 모든 왕위 계승자가 불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다윗과 그 후의 모든 왕들이 부적합한 인물임을 폭로하며, 장차 오실 완벽한 다윗(예수 그리스도)을 기다리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사9:6).
잠언18:7절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인권을 강조하는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회원국 중 하나인 터어키의 쿠르드족 인권 탄압을 강력히 비판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놀라서 나토 가입 신청을 하였으나, 터어키의 반대로 가입이 보류된 상황입니다. 두 나라에게 이런 상황은 전혀 의외였을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삶도 같습니다. 6절은 미련한 자의 입이 매를 자청한다고 가르칩니다만, 7절은 이를 보다 심화하여 미련한 자의 언어 생활이 그의 멸망의 원인과 영혼의 그물이 된다는 치명적인 결과를 제시합니다. 바보에게는 전혀 의외일 것입니다. ‘멸망이 된다’의 원어는 ‘메힛타’로서, 본래 소멸, 폐허 혹은 경악스러운 파괴 등을 의미합니다. ‘그물이 된다’의 원어는 ‘모케쉬’이며, 사냥꾼이 짐승을 포획하기 위해 매설한 올가미 덫, 갈고리 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한자는 입 때문에 숨통을 끊어놓을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 문장은 동사가 없이 명사로만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본문의 진리가 영구불변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은 도덕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갈6:6). 이를 생각해 보면 입으로 인한 ‘멸망’과 ‘그물’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자란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무익한 말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마12:3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잠언18:8절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새번역)
잠언은 언어의 남용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넘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킨다고 경계합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험담이나 풍문을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퍼뜨리는 사람은 잠언이 말하는 또 하나의 바보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26:22).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8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험담을 회피하여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들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그런 말을 반복하지 않고 흘려보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입니다 (예레미야15:16).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18:9절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패망하는 자의 형제이다.”(현대인의성경)
본 구절은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자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8)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서두에 ‘역시(also)’ 혹은 ‘심지어(even)’를 의미하는 ‘깜’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양자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부사 ‘깜’은 앞의 상황을 전제하고 그 상황과 관련된 또 다른 정보를 덧붙이고자 할 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보다 남의 말을 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한편,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 온갖 이유를 들고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유대 농경 사회에서는 거리나 밭에 사자가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핑계를 대지 말고 자신의 일은 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패망 하는 자의 형제”일 뿐입니다.” ‘패망(패가)’이란 재기 불능의 엄청난 파멸을 가리킵니다. ‘일’은 수고스럽지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어느 치과 의사 한 분은 경기도 수원시 남문에서 오랫 동안 개업을 하시면서 빌딩도 구입하는 등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나 7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환자를 맞아 진료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분은(집사님)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 만족할 줄 아는 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전3:22). 하나님은 그가 즐기는 일을 통하여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이 일을 발견하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전9:10). 그래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