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5/16 – 20)

시편93:1절
‘주님, 주님의 왕위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었으며,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십니다.”(새번역)


93-100편까지, 7개 시편은 주님(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93,94편은 모든 땅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5,96편은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7,98편은 주의 백성의 마음속에 계시는 왕을, 99,100편은 성품 속에서 보여지는 왕을 각각 노래합니다. 본 시편은 짧고( 5구절), 한 장면만(물과 바다의 일렁거림) 묘사하지만,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적 실재를 힘차게 선포합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1-2절에서 능력의 옷과 띠, 즉 왕복을 입으신 주님과 그분의 왕위(보좌)를 확언한 시인은 3-4절에서 혼란스러운 이 세상의 세력들의 요동침을 물과 바다의 일렁거림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주님이 행하신 많은 통치의 증거들을 묵상하면서, 시인은 영원한 평온을 갖습니다.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이유는 바로 통치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1절). 세상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역사적 사실(롬1:3-4)을 믿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학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사와 그를 신뢰하는 환자의 관계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왕 같은 제사장 지위에 있습니다(벧전2:9). 당연히 시편 기자처럼 본 시편의 메시지를 경험하여 확실한 증거들을 가져야 합니다(마14:23-34). 그런 증거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온을 주는 것은 물론,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증거는 견고하게 서 있으며, 주님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시편93:5,새번역).

잠언17:19절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
”(현대인의성경)

17절이 선한 이웃(친구와 혈육)을, 18절이 어리석은 이웃(보증을 서는 친구)을, 그리고 19절은 싸움을 좋아하는 이웃을 다룹니다. 히브리 원문의 구조입니다.
     a1 “죄를 사랑하는 자(원인)
         b1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결과)
         b2“대문을 높이는 사람”(원인)
     a2“패망을 불러들이는 자”(결과)
주부는 ‘다툼’이라는 결과로부터 ‘교만’이라는 원인으로, 술부는 “죄(죄과)’의 원인에서 ‘패망’이라는 결과로 이전합니다. 말싸움을 포함하여 다툼의 원인은 교만에서 출발합니다. 잠언은 ‘대문을 높인다’는 말로 교만한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원래 교만한 자는 사람(친척이 장관이다)이나 물건(많은 재물)을 근거로 자신을 높입니다. 그리고 높은 절벽에 둥지를 튼 독수리와 같이, 위험은 접근이 불가능하니 이제 자기는 안전하다고 믿습니다.(오바댜4절). 당연히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그 소유자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잠언은 거만한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자신의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국고를 맡은 대신 셉나(사22:15-19),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왕 여호야김(예13-19장) 그리고 페르샤의 대신 하만(에스더)이 그런 자들로서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멸망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죄인의 마음은 먼저 하나님께 비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잠언17:20)

잠언17:20절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말은 성품을 반영합니다. 악인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졌다(굽은)는 것과 거짓말(패역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혀”를 비교하는 것은 통상적인 잠언의 방법입니다. ‘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재앙을 경험한다는 말로서, 후단은 ‘재앙에 빠진다”는 직설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악인은 확실히 멸망합니다. 한편, ‘얻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므차’는 ‘마차(발견하다)’의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행위가 진행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거기에 ‘로’라는 절대부정을 나타내는 부사를 붙여, 잠언 기자는 마음이 왜곡되고 심술궂은 사람은 복이라고 부르는 좋은 것을 찾아 헤메지만 얻는 것은 고사하고, 절대로 발견조차 하지 못한다고 교훈합니다. ‘패역(히브리어 ‘하파크’)’은, ‘어떤 것을 뒤집어 엎다, 전복시키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말로서 어떤 일의 진상을 거꾸로 뒤집어 엎는 자, 즉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빠지느니라’는 ‘떨어지다, 내던져지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팔’의 미완료형으로, 악인에게는 재앙이라는 무서운 결과가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시고 당신의 뜻에 거슬려 살아가는 악인의 집에 계속하여 재앙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과의 교제를 피하여야만 합니다. 어떻게 악인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언어 생활과 삶의 결과를 주의하여 보십시요. 결국 마음의 상태와 언어의 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잠언17:21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1-25절까지는  미련한 자와 관련된 잠언입니다. 특히 21절과  25절은 어리석은 자녀 때문에 겪게 되는 부모의 불행을 말합니다. 전단의 ‘미련한 자’의 원어는 ‘케실’이며, 영적, 지적, 혹은 도덕적 일들을 어리석게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후단의 ‘미련한 자’란 ‘나발’이며, 무엇보다 신앙적인 일과 관련하여 미련한 자입니다. 그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로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좋은 예가 갈멜사람 나발입니다. 그는 사업수완이 있는 대단한 부자였지만 교만하여 다윗을 조롱하다가 공포에 질려 죽었습니다. 한편, 전단의 ‘미련한 자(케실)’는 기초적인 가족적 유대조차 무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모를 근심시킵니다(10:1). 후단의 미련한 자(나발)는  불경건한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좋은 예입니다.  실로 미련한 자의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낙이 없고 근심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가산을 탕진하여 아버지에게 커다란 부끄러움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맏아들 암논의 비도덕적인 행동, 둘째 아들 압살롬의 복수와 반역 때문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미련한 아들을 두지 않는 좋은 방법은 늘 기도하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훈계의 목적은 만유의 주님을 두려워 하는 지혜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교육을 자녀들에게 한 적이 없어 이스라엘 국가를 통일하고도, 말년에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17:22).

잠언17: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본문에서 ‘양약’의 원어는, ‘예티브- 좋게 만들다’와 ‘께하- 약, 치유’로 된 복합어 ‘예티브 께하”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기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치유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후단은 ‘마음의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뼈는  피를 생성해 내는 기관이기에, 잠언은 사람이 근심 때문에 육체적,정신적, 그리고 영적  생명이 마비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근심이나 스트레스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이 위치한 단락(21-25절)의 주제(미련한 자들의 삶)에 비추어 잠언은 전단은 지혜로운 자, 후단은 미련한 자의 삶를 지칭합니다. 21절이 말하듯이, 미련한 자(‘케실’과 ‘나발’)는 영적, 지적, 혹은 도적적으로 어리석게 처리하는 자들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실질적 무신론자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얻어지는 마음의 즐거움이 얼마나 크며, 다른 어떤 것보다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바보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 물질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성공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주권 안에서 안식하나, 미련한 자는 자기가 안고 온갖 근심 걱정 분노에 시달립니다. 이른바 뼈가 마르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당할 때, 마음을 굳게 하고 주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던져버리십시요. 이는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5:7,사역).

매일묵상(2022/05/09 – 13)

시편92: 5절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큽니까? 주님의 생각이 어찌 이다지도 깊습니까?”(새번역)
‘안식일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적절합니다. 안식일은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의존해 사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 힘껏 일한 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권자이신 주님께 예배드리며 안식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라는 제4계명이 주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주의할 점은, 진정한 안식을 가져온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일요일)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행20:7).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안에서 안식할 줄 아는 신자들은 복이 있습니다(마11:28).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I.      지존자를 찬양 (1–3)
    II.     감사의 노래 ( 4–14)
      A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 4–5)
         B      심판과 존귀 (주님)(6–8)
         B′      심판과 존귀(시인) ( 9–11)
      A′      의인의 번영 (12–14)
    III.      주님을 찬양 (15)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보다 크고, 깊으시며(5), 심판은 아주 공의로우시기에 악인은 멸망당하고, 의인은 높이들릴 것입니다(7-11). 따라서,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신자야말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편92:12).

시편92: 12절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새번역)
시인은 악인의 운명을 목격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나를 엿보던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가 눈으로 똑똑히 보며, 나를 거슬러서 일어서는 자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새번역). 그리고 의인의 삶을 생각하자(12), 시편1편의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92편과 1편 모두, 의인의 삶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다만, 1편에서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고 늘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였지만, 92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심긴 종려나무와 백향목,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른 거목입니다. 1편은 의인의 일상을, 92편은 성전 예배를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 살면서, 아름답게 노년을 맞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늙어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에 차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노후가 영광스러운 진정한 이유는 그가 보다 뜻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살아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노년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당신의 말씀에 정직하시고, 우리가 의지할 바위가 되시는지 그의 삶 자체가 선포합니다(15). 실로 의인의 삶은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인생의 최종평가는 우리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낸 주님의 영광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1:21, 새번역).

잠언 17:16절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새번역)

16절 이하 20절까지 5개의 구절은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친구)과 분쟁을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하는 바보를 대비시키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관점에서 교훈을 줍니다. 16절은 ‘왜’ 혹은 ‘어째서’의 뜻을 갖는 히브리어 ‘람마’로 시작되는 수사의문문의 형태입니다. 솔로몬은 기괴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손에 돈을 들고 현자에게로 가서, 지혜를 사고자 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왜’에 대한 답은 불필요합니다. 현자는 무척 화를 낼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바보란 자신을 위해서라면, 도덕적 질서를 무시하고, 현자의 바른 질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완고하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바보가 돈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고 온다면, 현자가 질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명기에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주님이 미워하기 때문에, 절대로 받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신23:18). 지혜나 참된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실로, 지혜는 돈을 지불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들음, 신중함, 겸손 등 바른 인격의 축적을 통해서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과목은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는 법 배우기입니다(1:8). 자기중심적인 바보는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줄 모르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그는 배울 마음이 없기 때문에, 타인은 물론 친구나 혈육의 가치, 그리고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바보는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습니까?(15:32).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 (잠언17:17, 새번역).

잠언 17:17절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인 친구와 형제의 가치를 교훈합니다.  친구와 형제는 늘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찾아오는 고난의 시기를 감안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악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그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친구나 혈육을 돌보지 않습니다. 친구는 좋은 시절이건 아니건 언제나 사랑하며 위해주는 관계입니다.  고난의 시기는 참된 친구를 분별하도록 합니다. 역경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의 유배 생활 중  역관 이상적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고, 세한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1844년). 한편, 본 잠언은 형제는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말합니다. 친구와 형제의 차이를 구분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고난의 시기에는 친구들은 떠나고(19:4), 혈육을 나눈 형제만이 도움을 주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친구가 역경에 처할 때나, 형제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경우, 적극적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힘든데, 어느 정도까지 도와 주어야 할까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3년 정도의 적금을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지혜롭게 접근하였습니다. 20년 전 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이들의 변화를 확인할 팰요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 테스트 후 변화를 확인한 요셉은 전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구나 형제가 곤궁해도 남의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처할 지혜가 부족하면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약1:5).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17:18).  

잠언17: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현대인의성경)

40년 전만 하여도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여야 입사가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역시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수 년이 흘렀습니다. 문제가 될 경우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분은 신원보증을 한 친지에게 손해 배상이 청구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 ‘보증’이 사업의 한 부문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개인 간의 보증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보증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였습니다. 17절이 선한 이웃(친구/형제)을 다룬다면, 18절은 어리석은 이웃(친구)의 특징을 언급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빚 때문에 매우 곤란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어리석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자신을 모르고 정에 못이겨 선뜻 보증이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쉽게 타인의 빚에 보증을 서는 사람은 지혜 없는 자라는 잠언의 말씀은 주의해야 합니다. 한편, 17절에는 역경에 처한 친구를 돌보라고 하고, 18절에는 보증 서지 말라고 합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역경에 처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아무런 계산 없이 채무, 특히 고리로 차입한 빚의 보증을 서지는 말라는 훈계입니다. 타인의 빚에 대한 보증을 섰다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묘사한 잠언6:1-5은 특히 청년들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기를 좋아 하는 이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잠언17:19, 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2/05/01 – 06)

시편91: 2절
“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새번역)

시인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할 때, 실로 많은 위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위험은 숨어서 기다리며(3), 때로는 음험하게 다가오기도 하며(3,6), 위험이 예상되어 두려워 하게도 됩니다. 더구나 위험의 연속일 때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피난처, 그것도 절대적인 피난처를 갈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확실한 피난처임을 발견하고, 자신의 피난처로 삼았음을 거듭거듭 말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시의 주제 – 확실한 보호
     B1 (2) 개인적 증언
         C1 (3–8) 시인의 확신
    B2 (9a) 개인적 증언
         C2 (9b–13) 시인의 확신
  A2 (14–16) 확증된 주제: 하나님의 보호

시를 읽어내려가면, 하나님을 우리의 요새요, 피난처로 삼았을 때 늘 안전하다는 시인의 확신에 저절로 동의하게 됩니다(9,10). 시의 저자는 알지못하나, 전쟁을 누비는 다윗이 떠오릅니다. 다윗 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또 경험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90편, 91편, 92편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90편에서 모세는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호소합니다. 91편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진술합니다. 그리고 92편에서, 경건한 시인은 찬양을 드립니다. 신약의 두 곳에서 본 시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마귀가, 또 하나는 주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내가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15절, 새번역)

시편91: 11,12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1,12절에서, 주님은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명령하사 시편 기자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피난처와 반석으로 삼은 시편 기자에게 주신 약속들의 절정입니다. 천사들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 받은 영적 존재입니다(히1:14). 더 이상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와 같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은 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사자나 독사와 같은 무서운 원수들을 짓밟는 정복자들입니다(13). 정복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귀는 이와 반대입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시는 주님을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는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면서, 본문 11,12절을 안전에 대한 근거로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마4:6,7).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읽는 방식은 마귀의 특질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써보지만 너무나도 힘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40일 금식 후로 지쳤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의 주님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천사의 도움을 보내셨습니다(마4:11; 눅22:43). 요청도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특질입니다 (마26:53,54).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신약에서 인용된 또 하나는 13절입니다. 내일 보내드리겠습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시편91:13절)

시편91: 13절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사자와 독사’는 각기 힘과 교활함을 상징하며, 빈번하게 악한 사람이나 능력들의 존재를 표현합니다. 13절은  양자를 함께 등장시켜 ‘그 악한 존재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한 구체적 성취는 본 시편이 아니라, 신약 성서에 나타납니다. 신약에서 악한 존재는 사람 보다는 마귀나 귀신 등 영적인 존재를 지칭합니다. 좋은 예는  70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한 사건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주님께 보고하였습니다. 보고를 들은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시편 91:13절에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욥의 사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능력이나 존재도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은 이 진리를 잘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늘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물론, 어디까지 구원하시는지 알려고 주님을 시험하는 따위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경험한 뒤 빠지기 쉬운 교만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이때문에, 주님은 승리를 기뻐하는 70 명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교훈하셨습니다. “정녕, 주님은 너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병에서 너를 건져 주실 것이다.” (시편91:3,새번역)

잠언 17:14절
“다툼의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으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두어라.”(새번역)

14절은 12절에서 경고한 성난 바보를 만났을 때, 그의 억눌린 오만과 분노를 자극하면 싸움(소송)이 일어나니 주의하라고 권고합니다. 분노를 품은 어리석은 자와 다툼이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둑이 터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싸움의 시작을 둑(땜)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은유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둑이 터지는 과정은 물이 새어나오면서 시작됩니다. 물은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이윽고 둑이 터지게 되면 그 손해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은 한 번 시작 되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만 두다’의 원어의 뜻은 “단념하다”입니다. 만약 다툼이 조금이라도 시작된다면, 부드러운 대답으로 분노를 쉬게 하는 등  화목으로 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좋은 영향을 주어서 상호 간의 손해를 극소화하는 것은 물론, 평정을 되찾게 되어, 이성적인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다윗이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선을 악으로 되갚은 자들 앞에서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현명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 대신 다윗은 기도하면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시편38:12-20). 이와 대조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사람은 말썽꾸러기(6:12~19), 비뚤어짐(16:28), 성냄(15:28), 분노(29:22), 오만(28:25), 증오(10:12)와 같은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우리 모두 피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 (잠언16:32,새번역).

잠언 17:15절
“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주님께서 싫어하신다.”(새번역)

15절은 10절부터 시작된 “어리석은 자와 벌”이라는 주제를 끝맺음하며, ‘바보와의 싸움을 그치라’는14절의 교훈에 균형 추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정의의 확보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악인을 의롭다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 할 정도로 정의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율법은 시비를 맡은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하고 악인은 정죄하라”(신25:1)고 요구합니다. 만약 이 규정과 반대로 판결한다면, 큰 재판장이신 주님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싫어하신다”의 원어 “ 토에바”는 구역질나는 것, 혐오, 우상과 같이 가증한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토해 내치고 싶을 정도의 역겨워하고 극도로 혐오스러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불의한 판결을 내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가증한 우상과 같이 파멸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를 알면서도 그릇되이 판결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 타락한 재판관들은 죄 있는 자를 무죄방면하고, 죄 없는 자는 아예 재판정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경우가 상당히 빈번하였습니다. 속담에 한 명의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보다, 10명의 죄인을 놓아 주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잠언은 이와 관련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있습니다. 판결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사(악한 천사임)들을 판단할 것입니다(고전6:3). 당연히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지혜 중 하나는 사랑은 정의(=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우선임을 아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잠언 17:16,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