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4/25 – 29)

시편 89: 49절
“주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다윗과 더불어 맹세하신 그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새번역)

이 탄원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4절) 인자와 진실의 하나님/ (15-37절)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들/ (38-51절) 약속과 다른 현실 그리고 기도입니다. 서두부터 시인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 주님이심을 노래합니다(1-14). 이어 시인은 주님의 약속 즉, 다윗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를 후손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기억합니다 (15-37).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다윗의 왕가는 멸망당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은 가나안 땅에서 뽑혀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시인은 외칩니다. 비시586년 베벨론에 멸망당한 후, 이스라엘 상황이 그러하였습니다. 바벨론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후, 다윗 가문에서 결코 통치자인 왕은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탄식하며 심한 좌절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합니다. 약 550년 후,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롬1:3).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열망하는 시인에게, 그리고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고백한 시인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나도 확실한 응답을 주셨습니다(48절).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죄와 사망과 싸워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깨진 것처럼 보일 때, 시인처럼 우리도 약속을 주님 앞에 노래하고, 현실의 실망을 기도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고후1:20, 새번역)

시편90: 12절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새번역)

시편 제1권(1-41)은 개인적 차원을, 제2권과 제3권(42-89)는 국가적인 차원을, 그리고 제4권과 제5권(90-150)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의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4권은  총17편(90-106)으로 대부분 익명입니다. 과거에 이 시(모세의 기도)는 고린도전서15장과 함께 장례식에서 늘 낭독되었습니다. 그때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시는 4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2)영원하신 하나님/(3-6)덧없는 인생/(7-12)진노 하의 인생/(13-17)은혜의 하나님. 배경은 40년 동안의 광야를 방황하던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구출되어, 시내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1년 동안 머무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또 성막과 각종 제사제도를 완비하였고, 하나님은 그들 중에 거하셨습니다. 그후, 광야를 가로질러 가데스바네아에 이르자, 정탐 12명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40일 후 그들로부터 장대한 가나안 족속에 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 하여 밤새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버렸습니다. 주님 역시 그들을 버렸습니다(민14:34). 38년 동안 60만명의 장정이 죽었습니다. 모세도 이 세대와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엄정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의 테스트를 거칩니다. 주님은 성적을 매기십니다.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든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하게 됩니다. 3번 부인한 베드로와 같이 말입니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시편90:13,새번역).


잠언 17:11절
“반역만을 꾀하는 악한 사람은 마침내 잔인한 사신의 방문을 받는다.”(새번역)

본 구절은 배신을 잘한다는 악한 사람의 특성과, 그들에게 임할 엄중한 벌을 경고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받아도 교정받지 못합니다(10a). 더 나아가 이들은 하나님이나 통치자에 대하여 반역을 꾀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이르게 됩니다(11a). 당연히 잔인한 사자(messenger)가 보내지고, 결국 그들의 운명은 죽음으로 귀결될 것입니다(11b). 잠언은 고집불통의 어리석은 자를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악인과 동일시합니다. 한편, 잠언에서 왕은 하나님의 통지 대리자입니다. 따라서 왕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왕은 멸망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 왕이 그 전형입니다. 그는 사무엘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보다는 백성을 더 두려웠습니다.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영광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말렉과 그들의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은 멸망시켰으나, 짐승의 떼 중 좋은 것들은 살려두어 자신과 백성의 소유물로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가서,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15:23)고 책망한 뒤, 그의 불순종 때문에 주님께 버림받았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불순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다가, 말년에 블레셋 군대에 의하여 세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5,6).

잠언 17:12절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새번역)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이란, 미련한 일 행하기를 극도로 힘쓰는 바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미련한 사람이란 단순히 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게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잔인한 폭력성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이 새끼 빼앗긴 암곰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명백합니다. 곰은 위험한 동물이지만, 새끼 빼앗긴 암곰은 특히 더 위험합니다. 그러나 난폭하고 맹렬한 암곰과 직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바보가 내리는 결정들은 어리석어 커다란 해를 가져오기에 마땅히 피해야 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과장섞인 유모를 사용하여 미련한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왕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최고의 군대장관이자 사위인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희대의 명장인 다윗을 쫓아낸 사울 왕은 원수 블레셋 군대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매장하려 했던 고관들(렘18:20), 메시야를 제거하기 위해 유아 학살도 불사한 헤롯 대왕(마2:16), 왕이 되려고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 등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미련할 뿐만 아니라 분별 없는 분노를 품고, 짐승보다 더욱 포악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중국 고사입니다. 범려는 왕 구천을 도와 월나라가 패권을 잡게 한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대업을 달성하여 득의양양한 구천을 보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은거하였습니다. 성공한 왕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잠언17:13,새번역).

잠언 17:13절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새번역)

11절에 언급된 반역을 일삼는 바보는 이윽고 ‘악으로 선을 갚는’ 배은망덕한 행위로 나아가게 됩니다( 13a). 반역만 꾀하는 바보에게는  잔인한 죽음의 사자가 보내졌지만(11a), 배은망덕한 바보의 집에는 재앙이라는 악한 손님이 찾아와 떠나지 않습니다(13b).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배은망덕은 인류의 보편적 성품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선물을 차 버리곤 합니다. 창조주의 과수원인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고난 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내가 주인이야!”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주인처럼 행동하여 환경을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힙니다. 인간의 그런 무지한 행동 때문에, 인간에게 재앙은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실천해야 합니다.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벗어난 다윗은 충성스러운 헷 사람 우리야까지 죽였습니다. 주님은 악한 손님을 보내셨고, 그 재앙은 다윗 가문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근친상간, 살인, 반역적 행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주님께 십자가의 선고를 내리고 자신은 죄가 없다면서 손을 씻었을 때, 유대인들은 외쳤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모든 선한 일을 무시하고 악으로 갚았습니다.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져서 2천년 동안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야만 합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마3:8,새번역).

매일묵상(2022/04/18 – 22)

시편87: 4절
“내가 라합과 바빌로니아를 나를 아는 나라로 기록하겠다. 블레셋과 두로와 에티오피아도 시온에서 태어났다고 하겠다.”(새번역)

총 7절이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증거하는 시입니다. 주제는 ‘도성’, ‘탄생’, ‘책’의 세 가지입니다. 1-3절은 ‘시온’이라는 하나님의 도성을, 4-5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생’을, 마지막으로 6절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명부(책)’입니다(6). 본질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이스라엘의 장자권이 적대적인 이방 국가들(4)로 확장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계20:12). 이 시는 주님께서 생명책에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6; 눅10:20). 하나님의 도성에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의 길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35:8)라고 노래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주님의 터→ B1 (2) 주님의 사랑→ C1 (3) 하나님의 도성→ D (4) 우주적 도성→ C2 (5) 지존자의 도성→ B2 (6) 주님의 명부→ A2 (7) 나의 터들. 로마 백부장은 병든 종을 고치러 오시는 주님께 “들어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하사 낫게 하십시요’라는 말을 합니다. 그의 믿음에 놀라신 주님은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마8:11,새번역)고 하셨습니다. 본 시편의 성취를 말하신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시편88: 3
“아, 나는 고난에 휩싸이고, 내 목숨은 스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새번역).


시인은 닥쳐온 심한 고난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는 세 단락(1-9a, 9b-12, 13-18)으로 나누어집니다. 각 단락은 간절한 인내의 기도(2,9,13절), 흑암의 경험(6,12,18절),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두려움(5,10,15절)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정말 기도에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받지 못하고 고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들, 멀어진 친구들, 병약한 몸, 그리고 자신을 보아도 공포만 보이고(16), 장래를 바라보아도 어두움은 줄어들지 않습니다(18절). 우리 역시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흑암의 시기를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 복음과 확신, 하늘과 보상 등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인과 같이 우리들은 신음하는 창조물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롬8:1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기도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께 대한 경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13,14). 인생이 늘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분의 주권을 베게 삼아 안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17:8절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잠언 8절은 뇌물에 대한 경고입니다. ‘뇌물’의 히브리어는 ‘쏘하드’이며, 선물을 뜻하나,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로운 판결이나 공정한 집행에 나쁜 영향을 미치려는 문맥에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뇌물로 번역한 것입니다. 뇌물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강도짓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미가3:11). 그러나 뇌물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로 번역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원어는 ‘에벤-헨’으로 단 한 번만 구약에 등장합니다. ‘헨’은 ‘호의’ 혹은 ‘매력’을, ‘에벤’은 ‘돌’을 의미합니다. 이는 ‘매력 혹은 호의를 만들어 내는 돌’을 뜻합니다. 실로 마법의 돌입니다. 뇌물은 마법처럼 사람의 판단력을 둔화시킵니다. 공의는 굽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도 재판장이 되었을 때 뇌물의 매력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AD60년 경 유대 로마 총독 펠릭스는 뇌물을 받고자 연금된 바울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뇌물 대신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는 두려워 하였지만,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등을 초청하여야 합니다(눅14:12-14). 왜냐하면 그들은 뇌물은 물론 그 대접조차 결코 되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숨겨져 있던 우리의 의를 주께서 모든 자들에게 드러낼 때 칭찬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잠언17:9절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랑을 받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친구를 갈라놓는다.”(새번역)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모욕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을 때, 신자는 현명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본 잠언의 교훈 방식은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비교하는 대구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관용적인 태도입니다.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은 잘못을 용인하거나 못본 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잘못을 들추어내지 않고 마음으로 긍휼히 여겨 용서주는 것입니다. ‘덮다’의 원어는 ‘메캇쎄’으로서 ‘가리다, 숨기다’의 뜻입니다. 남의 잘못을 실제적으로 용서하고 아예 잊어버림을 말합니다. 관용적인 태도는 사랑을 싹트게 합니다. 하반절은 험담이 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 도구가 됨을 언급합니다.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험담을 여러 번 들으면, 마음이 식어지게 됩니다. 이웃관계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혜자는 남의 험담을 포함하여 복수를 꾀하지 않습니다. 복수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를 금지하는 명령도 그는 숙지하고 있습니다(신32:35). 하나님께서 만민의 재판장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다루실 권한과 책임을 다 가지셨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이 계신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참고 사항이요 고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수를 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를 실험과 방정식으로 검증하여 아는 물리학자처럼 신자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며, 기쁨과 두려움으로 보석과 같이 말씀을 간직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17:10절
“미련한 사람을 백 번 매질하는 것보다 슬기로운 사람을 한 번 징계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 (새번역)

미련한 자는 완고하여 고치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교훈을 잘 받아들입니다.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이 둘을 대비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히브리어는 ‘베메빈’입니다. 빈(discerning)은 ‘분별’을 뜻합니다. 단지 두뇌의 명석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판단력을 갖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 민첩하게 수행합니다. ‘미련한 사람’의 원어는 ‘케씰’입니다. ‘케씰’은  ‘살진, 어리석은, 바보스러운’ 등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는 단지 지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판단력이나 의지, 행동 면에서 슬기로운 사람과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한편 ‘백 번 매질’은 과장법입니다. 율법에는 40대 이상의 매를 금하기 때문입니다(신25:2,3). 지금, 솔로몬은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내릴지라도 미련한 자를 교정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다 죽은 부자와 그의 형제들이 좋은 예입니다. 죽어 멀리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아직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회개하도록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지혜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할 수 있는냐에 귀착이 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할 수 있냐의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사람, 특히 어른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야 합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 (잠언17:12,새번역)  

매일묵상(고난주간 4/10 – 16)

2022년의 부활절은 4월17일입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2022.3. 21일 후  첫 만월은4/15일경(음력3/15)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17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4/10-4/16).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9)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낭비가 아니라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4.10), 주님은 감람산 동쪽 산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서쪽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만나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슥9:9성취).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나사로를 살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눅19:41-44). 성전에 들어가서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11)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 있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로 가셨습니다.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버림받을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셨고 이어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이 날 여러 논쟁과 교훈이 있었습니다.먼저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힐문하자,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막11:27-30). 이어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 대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상의 예를 들어 질문하였습니다. 모세율법은 한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경우 부활하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였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12:1-2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 계명의 순서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너무나도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28-37). 이어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성전의 웅장함을 감탄하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은 철지히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요한복음의 영광의 책 부분(13-21장)의 시작입니다. 큰 다락방에서 12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도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것을 축약해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 하려고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였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요 13장).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후에 믿어 제자가 될 사람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4장-17장). 이어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유다가 로마군인들을 데리고 오기를 기다리시면서,1시간 동안 큰 통곡과 함께 피 땀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서 곤욕을 당하셨고, 드디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 앞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잠잠하시다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바로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8-69).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8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사이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당신 세상에 온 이유는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이다고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다는 것과 당신이 인간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실 것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2/04/03 – 07)

시편86:8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새번역)

이 시에서 주님은 35 번 언급되어,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가난과 궁핍으로 도움이 절실 할 때(1), 환난의 날에(7), 그리고 오만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 대적할 때(14), 주님이야말로 다윗 자신이 머리를 놓을 수 있는 베개입니다. 주님은 그가 부르짖는 기도를 듣고(3-4) 구출하여(12-13) 원수들을 수치스럽게 하실(17)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난을 당할 때 능력으로 구원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8). 시를 좀 더 깊이 성찰해 보면, 다윗의 기도는 다윗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기 보다,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초점은 주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느헤9:5~31, 32~37), 우리 기도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보다 믿음을 유지시키고 굳건하게 하는 방식은 없습니다. 주님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요1:1-3). 바닷속 물고기나, 공중의 새도 그분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경외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쳐 온 고난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허락을 받고 닥친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고백하고 구원이 올 때까지 믿음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을 믿고 말입니다. 이것이 좀 어렵습니다만(히5:11-14), 이 시기야말로 주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 줄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시편86:11,새번역)

시편86:10절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기도의 자세에 관한 이 시의 3가지 교훈입니다. 먼저는 (1) 우리의 신분입니다: 주님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합니다. 그는 전하, 폐하로 불리는 왕이나, 주님 앞에서는 그저 ‘주의 종’이고 ‘주의 여종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16).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다윗이나, 늘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노예)’로 자칭한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2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시편에서 ‘가난한 사람’은 ‘억압받는 사람’과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고난이 올 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태도는 교만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온갖 경건치 못한 행태와 절망으로 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에 반하여, 신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근거입니다. 다윗처럼 신자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 속에 늘 기뻐합니다. 결국은 영생입니다. (3) 우리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증거합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과 주님의 도우심, 그리고 왕의 권력을 남용할 때 주어진 심판이 아주 잘 기록하였습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지는 신자들이 주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편86:15).

잠언 17: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의 이유는 복합적이나, 주로 개인의 귀책사유(게으름 등)로 돌리게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불의한 사회구조 등)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언도 같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10:4) 전자의 경우이며, “가난한 사람이 경작한 밭에서는 많은 소출이 날 수도 있으나, 불의가 판을 치면 그에게 돌아갈 몫이 없다.”(13:23,새번역)는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난이 그들을 비난할 수 없는 사회적 요소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급격한 기술혁명으로 산업구조가 매우 빠르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국가의 재정정책과 재교육정책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은 더 중요한 차원을 언급합니다. 가난한 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그를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조롱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인격 모독은 이래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비판이 정당한 한계를 넘어갔을 때 단순히 인간에게 미치는 문제 뿐만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영향을 받습니다. 모독이 아닌 비판 역시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삼가해야만 합니다. 가난 뿐만 아니라 재앙을 당한 사람이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는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자를 지으신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것입니다.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가 진짜 지혜자입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13:9).

잠언17: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본 잠언은 16:31절,“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을 가족의 측면에서 반복하면서, 백발이라는 영화로운 면류관에 이르는 공의로운 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가족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입니다. 본 잠언은 가족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 관찰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가문의 수치가 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행동할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회라도 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은 당연히 다른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든 수치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자, 손녀를 두었다는 것은 어쨌건 오래 살았고, 다산의 축복을 받았으며, 경건한 삶이 보답(면류관)되었음을 증거합니다. 한편, ‘부모는 자식의 반팔자다’ 는 말도 있듯이, 부모는 자녀의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경건한 부모의 경우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들이 늙었을 때 역시 백발이라는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교훈하고 모범을 보여준 부모는 자식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으로 부모가 자식의 수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배우지 못하였을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한 사형수의 고백입니다. 어릴 때 이웃집의 물건을 훔쳐다 어머니를 가져다 주면 아무 말도 안하고 요리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점점 더 큰 범죄에 빠졌는데, 만약 그때 어머니께서 따끔하게 야단을 치셨다면 자신이 이런 자리에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후회하였습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16:17,새번역).

잠언17:7절
“거만한 말이 미련한 사람에게는 안 어울린다. 하물며 거짓말이 통치자에게 어울리겠느냐?”
(새번역)

17:7-28절은 바보들의 종합세트입니다. 솔로몬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분별력을 가져 어리석지 말고, 그들이 야기하는 분노를 다스려라!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7-9절) 도입부(거짓말, 뇌물, 험담)/ (10-15절) 바보들에 대한 벌/(16-20절) 바보와 친구/(21-28절) 바보들과 지혜자. 본 구절(7)은 두 개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다룹니다. 먼저, 미련한 자가 하는 ‘거만한 말’(원어-예더)입니다. ‘예더’는 ‘웅변’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남을 폄하하는 거만한 말은 듣기에 거북합니다. 그런 바보가 가르친다고 웅변하는 모습은 더욱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존귀한 자 혹은 통치자로 묘사된 지혜자에게 거짓말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친히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생축처럼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신 분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표적을 요청 받으시자,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에서 토해져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타나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이, 부활하시어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 앞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11:32).

매일묵상(2022/03/28 – 04/01)

시편84:10절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새번역)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노래입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로서 성전과 제사 업무를 맡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직무에 너무나도 만족하여, 성전의 하루가 다른 날보다 1천배 값지다고 고백합니다. 직업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면서 거듭거듭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살펴보니 동료들도 같은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4). 이 시는 ‘복이 있다’는 구절이 3번 등장합니다: (1-4절) 주님을 갈망하여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 받는 축복/ (5-8절)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를 따라 순례의 길에 오른 자들이 받는 축복/(9-12절) 주님을 신뢰하여 그분 안에서 쉬는 자들의 축복입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갈망이 없이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런 갈망 때문에 영원한 순례의 길에 접어들지만, 그 순례의 길은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목적지인 하나님 앞에 이르기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순례의 길은 ‘눈물골짜기’로 번역된 ‘바카 골짜기’를 거치게 되는데, 그곳은 물이 없어 매우 메마른 곳입니다. 어려움이 이만 저만 아닙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주님께서 샘을 준비해 놓으실 것을 믿고 나아가며 기도합니다(6). 그 결과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마침내 각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은총을 받습니다(7). 시인은 돌보시고,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늘 신뢰하면서 정직하게 살아갑니다(11). 결국 시인은 축복 받아 주님 안에 안식하게 됩니다(12). 시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시편85:7절
“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새번역)

인생에서 맞닥드리는 고난이 항상 하나님의 징벌이나 진노의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언제나 혹시라도 고백되지 않은 죄나, 바로 잡지 못한 잘못의 여부를 스스로 성찰하여야만 합니다.  이 시편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기억(1-3), 간구(4-7), 경청(8), 소망(9-13).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단지 기억 속에만 있을 정도로 아련한 과거였습니다(1-3). 현재의 삶은 그분의 진노로 충만하였습니다(4-7).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시인은 고난으로 가득찬 현실을 보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고뇌 하던 선지자 하박국은 악한 바벨론 때문에 격는 불의한 상황을 불평하며, 하나님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합2:1). 시인 역시 같습니다(8).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영적, 도덕적, 물질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하고 있습니다(9-13). 성경에서는 고난이 오면 소망도 함께 주어져 인내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야의 약속을 주셔서 소망의 인내를 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낯선 가나안 땅에서 200년을 이방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소망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 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경험함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소망의 인내를 하십시요.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잠언17:2절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을 다스리고, 그 집 자녀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16:32b)와 짝을 이루는 이 잠언은 슬기로운 종이 수치스러운 아들을 다스리는 경우를 언급하여, 가족의 리더쉽은 타고난 혈통보다는 성품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수치스러운 아들은 추수 때에 잠을 자는 아들입니다(10:5). 어리석습니다. 추수 때 부지런히 거두는 것은, 농경 사회에서 슬기로운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만약 주인집 아들이 게으르고 집을 관리할 줄 모른다면, 그는 슬기로운 종의 지시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종은 그 집의 보배와 같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유산을 함께 나누어 받는 지위까지 갖게됩니다. 이는 그 당시 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갖지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종이, 법과 관습을 넘어 그의 미덕 때문에 성공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역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자면,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 의하여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렸지만,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섭리로 가정총무가 됩니다.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스렸습니다. 그 출세의 순간에 유혹이 왔으나 뿌리칩니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이때 역시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돌보심으로 감옥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수년 후,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신 지혜에 의하여 애굽의 총리로 발탁됩니다. 총리로서 아버지 가정은 물론 만 백성의 생명을 기근으로부터 건져냅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새번역).

잠언17: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hearts)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은 은과 금의 순도를 시험하는 도가니와 풀무의 두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가식을 벗기시고, 마음의 진실함과 순결함을 판단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구분하시는 방법은 외모나 말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입니다. 도가니나 풀무는 테스트 뿐만 아니라, 순은과 정금을 만들어 내는 도구입니다. 주님 역시 시련의 과정을 통해 입증된 참된 인격을 갖추게 합니다. 우리는 평안한 삶을 원하지, 시련과 역경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전지전능하신 주님은 온전한 신앙 인격을 갖춘 신자를 원하십니다. 테스트 없이는 온전한 인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테스트, 특히 도덕 테스트는 주님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또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든 시험-도덕, 고통, 빈곤 등 -을 다 거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순전하게 살아도  타인과 동일한 시련을 받는 것은, 제사장의 역할은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 기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와 같이 천상의 존재들에게 자랑하시려는 것도 주님이 가지신 즐거움이십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 인내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십시요!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욥2:3,새번역)

잠언17:4절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17:4,5절은 두 종류의 악인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거짓말 하는 자로서(4), 그는 말로 공동체에 불행을 초래합니다. 또 한 명은 가난한 자를 조롱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입니다(5). 전능하신 주님은 이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인 백발은 이들을 피할 것입니다. 특히 4절은 사악한 말을 듣는 자는 바로 악인이고,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 사람이 바로 거짓말쟁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전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이치입니다. 혀와 입술 그리고 귀는 모두 한 인격에 속한 기능들입니다. 인격이 거짓되고 악한 데 어떻게 이 기관들이 다르게 사용되겠습니까? 거짓말하는 자와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자는 모두, 진실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악한 말은 환영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어 없어지나, 환영하게 되면 우리가 사라진다”는 경구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이적으로 고치시자, 둘러싼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지 아니하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AD70년 로마에게 크게 패배한 바 있었습니다. 그 후 60년이 흘러 바르코흐바가 나타나 유대인들을 선동하자 그를 메시야로 따랐고, 이어 로마와 전쟁하다 민족은 전멸당하고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