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이 시에서 하나님은 천상의 회의를 주재하고 계십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엘로힘) 앞에 그를 모시는 존재들인 엘로힘이 도열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 때문에 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2)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며, 형태는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엘로힘’을 직역하면 ‘신들’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 유일하신 하나님을, 때로는 천사들을 지칭합니다. 또한, 복수의 형태이지만 단수로 사용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으로 여겨져왔습니다. 문맥이 중요합니다. 이 시에서는 하나님(엘로힘)께서 그 엘로힘을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사람처럼 죽는다’(7)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당연히 여러 해석(악한 천사 혹은 재판장 등)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수전절에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변증하셨습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요10:34-36). 예수님은 ‘신들’을 하나님의 말씀들을 받은 인간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이 구절 역시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속죄권과 심판권을 아버지로부터 받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요5:27).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재판하여 주십시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시편82:8,새번역).
시편83:1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이 시는 적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이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역대하 20장은 이 시의 좋은 예입니다. 비씨840년 경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에돔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치러 올라 왔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다 왕 여호사밧은 금식을 선포하고 성전 뜰에서 백성들과 함께 간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레위 사람 아삽 자손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인데, 너희들은 싸울 것이 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가대에 예복을 입혀 군대 앞 서서 찬송하면서 행진시켰습니다. 찬송이 시작될 때 적군들은 서로 싸워 멸망당하였습니다. 전리품을 거두는데만 3흘이 걸릴 정도의 대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에돔, 이스마엘인, 모압, 하갈인,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그리고 앗수르(6-8)는 주님과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인 세상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시로부터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싸워 가야만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싫어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서(요15:18) 믿음과 기도로 맞서 싸워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결론에서 중요한 가르침으로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의 구원이 아니라, 대적하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며, 온 세상에서 주님만이 홀로 가장 높은 분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 (시편83:18,새번역)
잠언16:32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새번역)
‘의’의 토대는 도발을 받았을 때, 야생마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훈련 없이 자신을 통제한다거나, 외부 세상을 다룬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된 행동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무력으로 적을 정복하여 성을 빼앗는 영웅보다도 자신과 사회에 더 큰 유익을 줍니다.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용사는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지만, 인내하는 사람은 냉철하게 감정을 통제함으로 자신과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자여서, 실수를 막는 동시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용사는 물론, 빼앗기 어려운 성을 점령하는 장수보다도 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인간 최고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아보드’라는 유대 문헌의 주석입니다: “누가 강하냐?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는 자이다. 혈육과 벌이는 내적인 싸움에 비교한다면, 성을 점령하는 일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을 빼앗기 위한 전투는 하루면 끝나지만, 자기와의 싸움은 피곤하고도 일평생 쉬지 않는 갈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최고의 미덕은 어떻게 얻어질까요?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절제’의 미덕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의 하나이며, 사랑의 나무에서만 열립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돌아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천 가지 변명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때서야 ‘절제’라는 미덕이 나오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16: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새번역)
본 잠언은 인내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자가 최고다(32절)는 말씀에 필요한 경고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절제력과 지혜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한 결과, 용사나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게 되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결정권자는 주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제비’라는 단어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지혜로운 촉의 제갈공명이 위의 책사 사마중달과 대치하였습니다. 제갈공명은 작은 전투에서만 약간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중달은 제갈공명의 화공 전술에 걸려 전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꺼버렸습니다. 사마중달은 도망쳤습니다. 제갈공명은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한탄하였습니다. 냉철하게 자신을 파악한 사마중달은 수비에 치중하면서, 제갈공명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측한 대로 제갈공명은 과로로 죽었습니다. 사마중달은 낙양(위의 수도)으로 돌아갔고, 구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AD249년). 손자 사마염은 제위(서진, AD265년)에 올라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구약에는 제비를 뽑아 범인도 색출하고(아간), 왕도 선출(사울 왕)하는 등 국가나 개인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할 때 이용되었느나(행1:26),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후에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제비를 통한 섭리의 인도는 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하고 지혜를 다하여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뜻입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17:1,새번역).
잠언17:1절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보다 낫다’는 잠언의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군사적 용맹이나 장수가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교훈한 것처럼(16:32), 가정으로 상징되는 삶의 영적 평화는 잔치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 권력, 명예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다툼 있는 번영보다, 검소할 수 있지만 사랑이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관의 정립과 축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부활의 주님이 가정과 일터의 중심이 되실 때 옵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 이웃, 그리고 물질의 모든 관계는 바르게 정립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난다면, 가치관은 뒤죽박죽이 되고, 우상숭배, 지적 교만, 그리고 쾌락 중심주의가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절대로 영적평화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불안초조가 여기에서 나오며, 세상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평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한 곳도, 우리가 주인도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그래서 본 잠언의 저자요 지혜자로 명성을 떨친 솔로몬도 주님 중심으로 살아갔을 때는 모든 것이 명쾌하였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주님을 떠나자 가치관의 혼란이 와서 혼합종교에 빠졌으며,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국가 간의 평화도 깨졌습니다. 그의 사후 나라는 두 동강났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지혜, 명철, 계략도,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잠21:30).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교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2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