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3/21 – 25)

시편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이 시에서 하나님은 천상의 회의를 주재하고 계십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엘로힘) 앞에 그를 모시는 존재들인 엘로힘이 도열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 때문에 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2)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며, 형태는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엘로힘’을 직역하면 ‘신들’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 유일하신 하나님을, 때로는 천사들을 지칭합니다. 또한, 복수의 형태이지만 단수로 사용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으로 여겨져왔습니다. 문맥이 중요합니다. 이 시에서는 하나님(엘로힘)께서 그 엘로힘을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사람처럼 죽는다’(7)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당연히 여러 해석(악한 천사 혹은 재판장 등)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수전절에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변증하셨습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요10:34-36). 예수님은 ‘신들’을 하나님의 말씀들을 받은 인간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이 구절 역시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속죄권과 심판권을 아버지로부터 받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요5:27).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재판하여 주십시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시편82:8,새번역).  

시편83:1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이 시는 적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이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역대하 20장은 이 시의 좋은 예입니다. 비씨840년 경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에돔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치러 올라 왔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다 왕 여호사밧은 금식을 선포하고 성전 뜰에서 백성들과 함께 간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레위 사람 아삽 자손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인데, 너희들은 싸울 것이 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가대에 예복을 입혀 군대 앞 서서 찬송하면서 행진시켰습니다. 찬송이 시작될 때 적군들은 서로 싸워 멸망당하였습니다. 전리품을 거두는데만 3흘이 걸릴 정도의 대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에돔, 이스마엘인, 모압, 하갈인,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그리고 앗수르(6-8)는 주님과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인 세상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시로부터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싸워 가야만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싫어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서(요15:18) 믿음과 기도로 맞서 싸워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결론에서 중요한 가르침으로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의 구원이 아니라, 대적하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며, 온 세상에서 주님만이 홀로 가장 높은 분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 (시편83:18,새번역)  

잠언16:32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새번역)

‘의’의 토대는 도발을 받았을 때, 야생마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훈련 없이 자신을 통제한다거나, 외부 세상을 다룬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된 행동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무력으로 적을 정복하여 성을 빼앗는 영웅보다도 자신과 사회에 더 큰 유익을 줍니다.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용사는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지만, 인내하는 사람은 냉철하게 감정을 통제함으로 자신과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자여서, 실수를 막는 동시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용사는 물론, 빼앗기 어려운 성을 점령하는 장수보다도 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인간 최고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아보드’라는 유대 문헌의 주석입니다: “누가 강하냐?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는 자이다. 혈육과 벌이는 내적인 싸움에 비교한다면, 성을 점령하는 일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을 빼앗기 위한 전투는 하루면 끝나지만, 자기와의 싸움은 피곤하고도 일평생 쉬지 않는 갈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최고의 미덕은 어떻게 얻어질까요?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절제’의 미덕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의 하나이며, 사랑의 나무에서만 열립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돌아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천 가지 변명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때서야 ‘절제’라는 미덕이 나오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16: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새번역)

본 잠언은 인내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자가 최고다(32절)는 말씀에 필요한 경고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절제력과 지혜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한 결과, 용사나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게 되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결정권자는 주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제비’라는 단어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지혜로운 촉의 제갈공명이 위의 책사 사마중달과 대치하였습니다. 제갈공명은 작은 전투에서만 약간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중달은 제갈공명의 화공 전술에 걸려 전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꺼버렸습니다. 사마중달은 도망쳤습니다. 제갈공명은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한탄하였습니다. 냉철하게 자신을 파악한 사마중달은 수비에 치중하면서, 제갈공명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측한 대로 제갈공명은 과로로 죽었습니다. 사마중달은 낙양(위의 수도)으로 돌아갔고, 구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AD249년). 손자 사마염은 제위(서진, AD265년)에 올라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구약에는 제비를 뽑아 범인도 색출하고(아간), 왕도 선출(사울 왕)하는 등 국가나 개인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할 때 이용되었느나(행1:26),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후에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제비를 통한 섭리의 인도는 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하고 지혜를 다하여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뜻입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17:1,새번역).  

잠언17:1절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보다 낫다’는 잠언의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군사적 용맹이나 장수가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교훈한 것처럼(16:32), 가정으로 상징되는 삶의 영적 평화는 잔치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 권력, 명예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다툼 있는 번영보다, 검소할 수 있지만 사랑이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관의 정립과 축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부활의 주님이 가정과 일터의 중심이 되실 때 옵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 이웃, 그리고 물질의 모든 관계는 바르게 정립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난다면, 가치관은 뒤죽박죽이 되고, 우상숭배, 지적 교만, 그리고 쾌락 중심주의가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절대로 영적평화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불안초조가 여기에서 나오며, 세상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평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한 곳도, 우리가 주인도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그래서 본 잠언의 저자요 지혜자로 명성을 떨친 솔로몬도 주님 중심으로 살아갔을 때는 모든 것이 명쾌하였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주님을 떠나자 가치관의 혼란이 와서 혼합종교에 빠졌으며,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국가 간의 평화도 깨졌습니다. 그의 사후 나라는 두 동강났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지혜, 명철, 계략도,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잠21:30).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교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28:28).

매일묵상(2022/03/14 – 18)

시편80: 12절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시의 배경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보다 150년 전에 일어난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비시722년)입니다. 3연(1-3절, 4-7절, 8-19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시의 처음과 마지막은 목가적이고 평온합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 깊은 고뇌의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특히 세 번째 연은 북이스라엘의 황폐와 약탈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과 구원을 반복해서 간구합니다. 시인에게서 있어, 이스라엘 민족의 곤경은 언제나 신앙의 문제로 귀착이 됩니다. 그 곤경이 자연재해든 외적의 침입이든 아니면 내적 분열이든 관계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도 불신앙이지만, 지금 내가 겪는 고난을 전부 자신의 능력이나 운 탓으로만 돌려서도 불신앙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악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처럼 고뇌에 찬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7). 중요한 것은 기도 자체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지식도 더하지 못합니다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이 올 경우, 그 불편한 심기를 주님께 토하십시요. 그러나 계명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구원의 소망 가운데 인내하십시요. 그 믿음의 시련들은 우리의 인격에 절대 필요한 인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약1:3-4).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편80:3).

시편81: 11,12절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내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집대로 버려 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다.”(새번역)

이 시는 명절 특히 장막절을 축하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막절은 애굽에서 인도를 받은 뒤, 장막을 짓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역사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시는 백성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례에서 시작하여(1-5), 행위(6-7)와 말씀(8-10)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적으로 이동합니다. 이어 백성의 불순종에 따른 비참한 결과(11,12와 순종(13)할 경우 주어지는 승리와 풍요로움(14-16)을 강조하면서 순종을 택하라는 하나님의 요구(11-16)로 끝맺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속과 그에 대한 응답이 주제입니다. 노예살이를 하던 애굽에서 구원받은 백성(6)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인 백성이 됩니다(8-10). 왕이 바로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8, 13). 그 핵심되는 계명은 9절입니다 :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뒤, “내가 마음껏 먹여 주겠다”(10)고 약속하셨으나,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고집대로 가도록 버려두셨습니다. 그들은 고통의 길로 들어갔고, 승리와 축복에서 멀어졌습니다(10-12). 이 시는 이스라엘 역사의 반추이며, 우리 삶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지금 확인할 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잠언16:29절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폭력은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꾀어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친구나 연인 관계 등을 맺고 악인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범죄하려고 친구를 꾀는 모습을 잠언 1:8-19절은 잘 보여줍니다. ‘10아이들아, 악인들이 너를 꾀더라도, 따라가지 말아라….”함께 가서 숨어 기다렸다가, 이유를 묻지 말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자….우리는 온갖 값진 것을 얻게 될 것이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의 집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14너도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 사이에 돈주머니는 하나만 두자.”’ 잠언은 그런 악인들과 교제하지 말것을 잘라말합니다(잠언20:19). 비시 860년 경 북 이스라엘 왕국을 지배한 아합 왕은 남 유다 왕국의 왕 여호사밧과 결혼동맹을 맺었습니다. 북왕국은 남왕국보다 강대하였고, 그 왕 아합은 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바알 숭배자 왕비 이세벨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세벨은 강포한 여인으로 의로운 나봇을 서슴없이 죽여 포도원을 빼앗을 정도였습니다. 그 반면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의로웠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나쁜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국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남 유대 왕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권유를 받자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 결과 아합은 죽었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유다로 돌아온 여호사밧 왕은 주님이 미워하는 자를 도왔다고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탐욕을 버리고 주님의 약속에 주의해야만 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잠언16:30절
“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이미 우리가 살펴 본 27-29절은 불량한 자, 못돼먹은 자와 강포한 자들이 사회질서와 이웃을 해롭게 하는 사악한 술책에 초점이 있습니다. 30절은 이 세 가지 묘사에 대한 결론 혹은 주석입니다. 특히, 30절은 29절과 쌍을 이룹니다. 30절은 29절의 ‘강포한 사람’의 임무수행 모습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서로 눈짓을 하여 희생자를 고르고, 피해자 배후에서 굳게 입을 다물어 음흉한 결의를 다집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얼굴과 목소리 등을 통해 표출된 그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워야 미리 대처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과 삶의 경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얼마 전 부산사상경찰서 이 경장은 택시 운전사로부터 2000만원이 든 손가방을 수탁받았습니다. 분실물을 찾아 주려고 콜 택시 이용내역을 분석한 뒤, A씨에게 연락하였습니다. A씨는 그 돈이 할머니 수술비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반환절차상 통장내역 등을 확인해야 한다”는 설명에 A씨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이 경사는 즉시 현금 묶음에 날인된 인출은행이 소재한 울산 북부경찰서에 연락하였습니다. 이미 보이스피싱 피해신고가 접수되었으며, 고성경찰서에서는A씨를 보이스피싱 전달책으로 수배 중이었습니다. 이 경사는 A씨에게 경찰서 방문을 안내하고, 돈을 찾으러 오자 바로 검거하였습니다. 현금 2,000만원의 원래 주인은 울산에 거주하는 B(50)씨로, 저금리 안내에 속아 A씨를 직접 만나 현금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순진한 마음만 가지고는 생존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16:31절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16:31-17:6은 한 단락을 이룹니다. 시작은 공의로운 길을 인내하면서 간 결과 얻어지는 영화의 면류관이 백발이라는 선언입니다(16:31). 이를 위해 걸어가야만 하는 공의로운 길 7가지를 나열합니다(16:32-17:5). 마지막은 그렇게 걸어간 결과 그들이 늙었을 때 얻게 될 손자 손녀들이 영광의 면류관임을 밝힙니다(17:6). 잠언은 제자들로 하여금 노인의 권위를 존중하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아름다움, 품위, 그리고 권위를 획득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미덕이 없이 머리만 백발인 사람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 구절에서 언급된 ‘영화의 면류관’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1절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진리를 가르치나, 모든 진리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의인이 일찍 죽습니다.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유대인들의 불신의 죄악을 지적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과 같습니다(행7장). 또 노인이 되면 육체와 마음이 약해집니다(전12:1-8). 더구나 현대 사회에서는 심지어는 비도덕적인 기술을 통해 건강한 노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백발이 미덕과는 관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고 공의로운 길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건강하게 90세에 이른 사람은 모두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다”는 말은 곰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건강하게 90세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32절에서 답을 줍니다: ‘인내’입니다. 즉 백발과 인내는 암묵적 관계가 있으며, 전자는 후자를 통해 얻어집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새번역).

매일묵상(2022/3/07 – 11)

시편78: 42절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시편은 과거의 경험 속에 있는 교훈을 분명히 밝혀내어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등불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 적들의 위협(9-11)이나 자연의 위험(40-42)을 포함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셨고, 향후에도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을 믿었어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 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사랑을 자각할 줄 알아야만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그런 자각 능력은 우리를 구속하셨고, 공급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에 대하여 늘 기억을 새롭게 할 때 비로서 나옵니다. 여기서 ‘구속’(12-14,43-53)은 주님이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구출하셔서 자유를 주신 것을 말합니다. ‘공급’(15-16,54-55)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이 공급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급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17-33, 56-64)은 그분을 아버지로서 알고 있는 자들이 경건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랑’(34-39, 65-72)은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갈 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내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언제나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의 비밀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에 있는데, 그것들은 기억에 의하여 촉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1:1,2)

시편79:5절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여워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하심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입니까?”
(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고, 모든 유대 지도층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간 비시 586년 이후로 추정됩니다. 패전국 유다의 현실은 참혹하였습니다(1-4). 여기에 더하여 신앙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 백성들을 향해야 마땅하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심판의 대상이어야 할 이방인들이 ‘야곱’을 삼켰습니다(7). 그들은 ‘도대체 이스라엘이 믿는 야훼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라고 비웃고 있었습니다(10). 시인은 그 때문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자리에 주저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언약,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13). 이것은 현재가 유복해서도 아니요, 미래가 예측되서도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될 수 없는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께 먼저 조상들의 죄(8)와 당대의 죄(9)를 회개합니다. 또한 시인은 주님의 성품과 영광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현실을 바로 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역시 나의 죄나 부족함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영광과 성품을 내세우고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는 간구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 이렇게 드린 히스기야 왕의 기도는 응답되어 하루 밤에 185,000명의 앗시리아 군사가 죽었습니다. 소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79:13).

잠언 16:26절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특히 생존의 욕구-을 충족시키기고자 열심히 일합니다. 잠언26절이 관찰하는 바 입니다. 후단의 ‘입’은 전단의 ‘식욕’과 함께 생각할 때 입의 기능 중 말이 아니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는다’는 어구는 생존 욕구 충족이라는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조직체, 특히 회사의 경우, 이윤 극대화는 노동자의 복지보다 중요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자산이 없습니다. 따라서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본가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적은 급여를 제공하여 일을 시키고자 합니다. 이 잠언이 악한 목적을 위해 쉽게 뒤틀어질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칼 막스는 ‘자본론’에서 이것을 대전제로 삼아 노동자의 정당한 대가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고 공정한 경쟁과 노동자 복지를 위해 국가적 노력을 경주하여, 파국을 막고 오히려 번영하고 있습니다. ‘중대 재해 처벌법’ 제정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런 ‘식욕’도 이겨내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막스가 주장한 공산주의가 빠진 함정으로,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100년도 안되어 멸망한 이유입니다. 중국은 정치체제만 공산주의고 경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운영철학이 틀린 하이브리드 국가입니다. 많은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잠언을 전도서와 함께 읽으면 생존을 위한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허무함을 깨닫게 됩니다(전1:3). 이것은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사람이 먹으려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만, 그 식욕을 채울 길은 없다.” (전6:7,새번역).

잠언16:27절
“불량한 사람은 악을 꾀한다. 그들의 말은 맹렬한 불과 같다.”(새번역)

사람은 됨됨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27-29절은 ‘이쉬-사람’로 시작하여 ‘사람’을 강조합니다. 그 중 27절은 불량한 사람에 초점을 맞춥니다. ‘불량한’의 원어는 ‘벨리얄’로서 ‘가치 없다(worthless)’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불만이 많아 사회 질서를 뒤집어 엎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악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악은 선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선동가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작은 불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증폭시킵니다. 듣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불 같은 분노가 솟아올라옵니다. 그 결과 무질서한 행동이 나오게 되고, 약탈 방화와 같은 집단적 파괴행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롬12:19).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폭력을 써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참거나 사랑으로 감싸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선동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선동가들이 있지만 최악의 선동가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원어는 ‘디아볼로’입니다. ‘디아’는 ‘사이에’를, ‘볼로’는 ‘던지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란 ‘사이에 던져 서로를 이간질 시키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천사 1/3을 선동하여 하나님께 반역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와서 작은 불만을 발판으로 하여 분노하게 만듭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람을 지배하여 자기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들은 마귀의 전략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잠언16:28절
“못돼먹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수다쟁이는 친한 친구를 갈라 놓는다.”(현대인의성경)

‘못돼먹은’ 혹은 ‘패역한(perverse)’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와 사회적 질서를 뒤집으려는 자를 말합니다. 그의 못돼먹은 행동은 마음에 근원이 있고 말과 눈짓은 그 표현입니다. 그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 진리는 잠언6:14절, “그 비뚤어진 마음으로 항상 악을 꾀하며, 싸움만 부추긴다”에서 거듭 언급됩니다. ‘악한 자는 정의를 위협한다’는 의역이 가능합니다(시리아역). 후단의 ‘수다쟁이’의 동사형은 ‘흠을 찾는다’ 혹은 ‘불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였습니다(사29:24). ‘수다쟁이’가 하는 말들은 악의적인 험담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은 왜곡된 상황 인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결과는 대단히 파괴적이어서, 가장 친밀한 관계조차 갈라지게 만듭니다. 모세가 10계명의 두 돌판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자,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예배하였습니다. 이 백성들은 며칠 전에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맹약한 자들입니다. 홍해의 기적,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의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악한 자들을 이용하여 마귀는 백성들에게 못돼먹은 생각을 집어 넣었습니다(출32:1).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모세는 내려와서 우상숭배에 가담한 3천명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세계에 흩어질 전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믿음은 마음이 할례 받은 증거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4:25).

매일묵상(2022/2/28 – 3/4)

시편78:1절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편 78편은 총 72절에 이르는 긴 시입니다. 수 일에 걸쳐 메시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12절(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과 68절(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을 볼 때 이 시의 제목으로 ‘소안에서 시온까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부터 다윗 왕의 통치까지 이스라엘의 격동기를 되새겨 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마지막 노래(신32장)처럼, 이 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만 하는 그 ‘신앙 양심’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기적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심판 가운데서도 은혜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선택된 도시와 왕을 통해 그 은혜의 징표들을 보여주셨습니다(68-72). 이 시를 읽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것과 마침내 주님이 선택하신 지파-유대지파(68)-가 선택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약속을 지키신 것은 물론, 그 이상을 행하심으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갈4:26)인 시온 산(영원한 부활의 나라)을 세우셨음을 압니다. 이 시는 다윗 왕을 언급한 뒤 돌연 끝나지만, 그 목적은 다음 세대가 그것을 완성하고 그로부터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의 이야기 역시 같습니다. 복음서에서 시작된 우리 주님의 이야기는 사도들의 전파로 이어지고 로마의 한 셋집(행28:30,31)에서 돌연 끝나버림으로, 다음 세대인 우리가 신실하게 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 우리는 그들처럼 악한 일을 즐겨하지 말라는 경고가 됩니다.”(고전10:6,쉬운성경).

시편78:6절
“미래에 태어날 자손에게도 대대로 일러주어, 그들도 그들의 자손에게 대대손손 전하게 하셨다.” (새번역)

72절이나 되는 이 시편은 도입부분(1-8)에서 목적을 밝힙니다 : 각 세대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5-6) 다음 세대로 신앙 유산을 흘려보내라. 그것은 각 세대의 거룩한 의무이다. 시편 기자 역시 전 세대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3-4). 전할 내용은 주님의 행적(4)과 말씀(5) 두 가지입니다. 출애굽 시 행하신 10가지 기적과 홍해를 가르신 구원의 행적들은 구속자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직접 선포하시고, 두 돌판에 기록하신 것은 좋은 예입니다. 전달해야 할 목표는 오는 세대들이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7), 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서 과거의 잘못들 – 신실하지 못한 삶- 을 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과거에 대한 참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참된 이해를 위해서는 ‘가르침(율법)’과 ‘지난 날의 역사’가 요구됩니다. 가르침(교훈)은 당연히 문학적 기교를 통해 전달됩니다. 잠언, 시편, 욥기 등이 그렇습니다. 에스더는 뛰어난 문학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반을 둔 우리 믿음은 ‘문학, 역사, 철학’에 기반을 둔 인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문학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신앙이 과학까지 그 대화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모든 실체보다 더 확실한 보이지 않는 실체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인문학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히11:1,2).


잠언16:23절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이 잠언은 사려깊은 자에게 생명샘이 되는 가르침(22)은 지혜자의 마음에서 발원됨을 강조합니다. 이는 우리가 잠언의 교훈을 받아들여 ‘지혜자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도전적인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우리 입술에 올바른 가르침들을 끊임없이 둘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설득력 있게 말하는 지혜자의 입술을 통해,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가게할 것입다. 그런 지혜자를 가진 공동체나 사회는 복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OECD에서 4번째로 심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탑의 위치에 있습니다. 국민소득은 높으나 행복 지수는 밑바닥입니다. 정부는 고성장의 시대에서 저성장의 시대로 진입한 것을 인지하여, 성장과 분배라는 문제를 사회 전체적 관점에서 논의하여야 합니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상당한 진통과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적 과정은 푸틴이나 시진핑과 같은 권위적인 정치가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타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데, 인간의 본성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지혜의 샘인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를 섬기신 그리스도로부터 자기부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게 하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 때 우리 사회에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16:24절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고, 쑤시는 뼈를 낫게 하여 준다.”(새번역)
선하면서도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이 되라는 주제의 결론으로 24절이 기록되었습니다. 선하고 지혜로운 말은 즐거움을 주며, 엄청난 치료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본 잠언은 이를 꿀송이에 비유합니다. ‘선한 말’은 ‘친절한, 은혜로운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고, 이 ‘은혜로운 말’은 ‘악한 생각들’과 대조될 경우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악한 사람의 꾀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친절한 사람의 말은 정결한 제물처럼 받으신다. (15:26,새번역). 여기서 ‘선한 말’에는 순결하며, 아름다움의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꿀송이’의 히브리 원어는 ‘넘쳐흐르는 꿀덩어리’를 말합니다. 그렇게 비유한 것은 꿀만이 유일하게 달콤하기도 하며 치료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24절후단). ‘마음에 달콤하다’는 뜻은 그 말을 듣는 자들을 기쁘게 하고 또 매력적임을 표시합니다. 또한, ‘낫게 하여 준다’는 표현은, ‘선한 말’의 치유능력을 알려줍니다. 선한 말은 어리석은 자가 쏟아내는 말로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약은 입에 쓰며, 달콤한 것은 약이 아니나 ‘뼈’로 표현된 전 인격을 회복 시키기 위해서는, ‘선한 말’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만 합니다. 이는 조언자의 말이 듣는 자를 거북하게 만든다면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꿀을 너무 많이 먹으면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25:16), 선한 말은 아무리 들어도 문제가 없기 때문에, 본 잠언이 ‘선한 말’을 꿀송이에 비유한 한계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잠언16:25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16:16-30절의 주제는 ‘선한 말과 나쁜 말’의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선한 말(20-24)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25절부터는 ‘나쁜 말’(25-30)에 대한 교훈이 시작됩니다. 25절은 야누스적 구절로, ‘선한 말’의 주제를 이어가면서, 파괴적인 언어 사용의 주제로 넘어가도록 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 내용은 네 자신만의 의견을 고집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행할 것을 권면합니다. 같은 교훈이 이미 14:12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거기서는 여행길에 나서는 사람이 여정을 살펴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활방식이 초래할 결과를 생각해 볼 것을 교훈합니다. 요사이 모든 운전자는 네비게이션의 인도를 받아 목적지로 갑니다. 네비게이션이 보여주는 경로로 가다가는 골목길로 다녀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늦게, 불편하게 가게됩니다. 그래서 미리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경험, 철학, 그리고 신념으로 만든 네비게이션은 자신이 보기에는 바르지만, 잘못된 경로와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사망으로 귀결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는 특히 교만한 사람에게 적절한 교훈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바르다고 여기나 거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숨겨있을 여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교만에 속게 되는 것입니다. 본 잠언은 이 교훈을 언어 사용에 적용합니다. 다른 이를 대할 때는 늘 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경우에 맞는 ‘선한 말’을 하여야지 ‘나쁜 말’로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