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2/21 – 25)

시편77: 13절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새번역)

본 시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맞아 불안과 근심에 싸인 시인의 고백입니다. 고난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기도조차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인은 지치고 힘들어 합니다(1-3). 밤에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4). 이렇게 잠못 이루는 밤들을 지새우며, 시인은 과거에 좋았던 세월을 생각하게 되나(5-6), 그 때문에 현실은 더욱 괴롭습니다. 상황은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여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7-9).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인에게 새로운 빛이 떠올랐습니다(10). 그것은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기적들과 그분의 거룩하신 행적들, 위대한 역사, 인자하심에 대한 기억들입니다(11-13). 주님은 지난 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인도하여 내실 때 홍해를 가르심으로 큰 능력과 위엄을 민족들 가운데 알리신 분입니다(14). 더구나 주님은 자신을 주의 백성들과 동일시 하시면서 ‘속량’(고엘-친족 구속자)하여 내셨습니다(15).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지만 자신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고난 속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16-19). 그 주님은 ‘모세와 아론’과 같은 지도자를 세워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실 것입니다(20). 시인이 이렇게 회상한 위대한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려고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뒤 권능의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인보다 훨씬 나은 믿음과 고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시편77: 2절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 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새번역)

본 시편의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의 서두(1-4절)을 읽으면 시인은 고난으로 잠도 못자고 기도합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경이 멈추고, 상황이 호전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은 확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3). 즉,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 내실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불리한 상황에 반응할 때, 신자는 하나님께 그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구하는 것보다,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잡아야만 합니다(10-20). 시편 기자는 부르짖고, 끈질기게 추구하며, 잠도 자지 않고 고민하고 기도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짜증스런 거절과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 의문만 생겼습니다(7-9). 그런 의문들은 흔들리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과거를 동경하는 것(6)은 현재를 위한 해결책도, 미래를 위한 처방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보지 않고(3), 이전의 영적 경험들에 집착하지도 않고(6), 오히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행적과 거룩하신 인격, 권능과 섭리적 돌보심(19-20)을 신뢰하고 잠잠히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77:20).

잠언16:20절
“말씀에 따라 조심하며 사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새번역)

본문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새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전단은 인생 성공 비법으로 ‘말씀’ 즉, 지혜자의 가르침( 본 잠언의 교훈)에 주의하여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이런 교훈은 앞의 구절들(16-19)뿐만 아니라, 이어질 구절들( 21-24: 선한 말의 열매)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후단은 전단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된다’혹은 ‘행복하다’는 말씀 속에는 물질적 번영을 넘어 이웃 사이에서의 화평을 포함합니다. 지혜의 출발점은 주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잠언의 제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세상적인 번영과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실로 십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요 지혜자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무시하면 세상적 번영은 얻을 수도 있으나, 이웃 간에 화평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어리석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주님을 경외하여 잠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공동체로부터 명철하다고 칭찬을 받습니다(21). 북이스라엘 왕국 초대 왕 여로보암은 종교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금송아지 예배를 창안합니다. 주님은 선지자를 보내사 기적까지 보여주면서 준열히 책망하였습니다만, 여로보암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가문은 몰락하였고, 그를 추종한 북이스라엘 열 지파 역시 심판받아 역사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롬14:18,사역).

잠언16:21절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을 명철하다 한다. 말이 부드러우면, 더욱 많은 지혜를 가르친다.”(새번역)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가 마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본 잠언 교훈합니다. 지혜자를 가진 공동체는 그를 ‘명철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칭찬합니다. ‘명철’이란 히브리 원어는 ‘빈’으로 ‘분별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분별의 지혜가 있는 것은 물론, 인격이 갖추어져서 부드러운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공동체 내에서 그의 말은 더 잘 수용되고, 그의 지혜는 공동체에 선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그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존경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춘 사람은 매우 보기 힘듭니다. 흔히 공자나 소크라테스 등을 지혜자로 예를 들으나, 이들 역시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자는 심지어 70세 즈음에 자신을 찾아 온 친구를 별 볼일 없다고 정갱이를 걷어 차서 쫓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잠언은 오직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아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눅4:22) 하면서,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취하신 속죄의 대업과 그분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여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주님께 돌아선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부드러운 말을 사용함으로 더욱 많은 지혜(복음)를 가르쳐야 하겠습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

잠언16:22절

“명철한 사람에게는 그 명철함이 생명의 샘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 된다.”(새번역)

21절에서 묘사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은 22절에서는 생명의 샘으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명철한 사람’으로 비유됩니다. ‘명철’은 ‘지각있다, 사려깊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세켈’의 번역입니다. 사려깊은 사람들은 생명의 샘이 되고, 솟아오르는 물은 너무나도 시원하여, 공동체는 어리석은 행동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생명의 샘이 되어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있습니다(요4:14). 한편, 후단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의 교훈은 어리석음이다’로서, ‘교훈’은 풍자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막대기로 맞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의 핵심은 도덕적 오만함입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요약하면 22절은 두 종류의 교훈을 보여줍니다.(1) 지혜로운 자가 주는 생명의 가르침. (2) 어리석은 자가 받는 벌. 명철한 자는 앞의 가르침에서 생명의 샘을 발견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의 결과 고통스럽고, 쓰디쓴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죽자 르호보암이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 10지파에게 포악한 말로 자신의 도덕적 오만함을 여지 없이 드러냈습니다. 왕국은 갈라지고 오직 유다 지파만 그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는데, 그 원인은 아버지 솔로몬의 우상숭배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하고, 하는 말에 설득력이 있다.”(잠언16:23, 새번역).

매일묵상(2022/02/14 – 18)

시편76: 1절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이 시는 두 부분(1-6, 7-12)으로 된 단순한 구조입니다. 전반부(1-6)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후반부(7-12)는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합니다. 배경은 유대 왕국이 경험한 큰 승리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제국의 침공에서 유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은(열왕기하18,19장) 좋은 예입니다. 이 전쟁에서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다가 하룻밤에 185,000명이 죽었습니다. 사자(Lion)를 경시하다  사고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장막’(2절) 의 히브리 원어는 사자굴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이 땅에 두신 근거지와 거주지는 예루살렘입니다. 모든  이방 국가는 이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자와 같이 무적의 능력을 가지셨지만, 유대 백성들 가운데서 말할 수 없이 겸손한 모습으로 거하시는 주님은 원수의 모든 힘을 압도하는 무서운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할 때 베푸신 주님의 크신 권능은 이스라엘은 물론 애굽 사람들도 너무나 확실히 체험하였습니다. 또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능력은 민수기와 신명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의 역사를 개관해 보면, 약소국 유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보다 힘센 이방 민족들과 싸워 매번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변 이방 국가들은 사자를 두려워 하는 것과 같이 유대에 계시는 주님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한편, 예루살렘 성전은 신자의 모형입니다. 신자들 안에는 능력의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담대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3:16,새번역)

시편76: 10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장 전반부(1-6)는 하나님의 구원을, 후반부(7-12)는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합니다. 후반부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행동은 유대지역에 국한되지도 않고, 과거에만 있었던 사건도 아니며, 방어적 성격만 있는 것도 아님을 밝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으로서, 도처에 있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7-9). 땅의 모든 민족들은 우주의 왕으로서 야곱의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합니다(7). 그러나 심판의 목적은 경건한 자들을 구원하시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악인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9). 여기에 신자의 믿음이 요구됩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을 기다리면서 사사로운 분노를 억제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며, 공정한 판결을 내리십니다. 만약 섭리적 심판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당신의 뜻을 따라 최후심판의 날까지 미루어 두신 것입니다(10). 또한 시인은 ‘주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고 권면하혐서,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예물을 드려 경외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땅의 모든 왕들을 당신의 주권에 따라 세우거나 폐하시기 때문입니다(1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심판의 사건이자,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심판은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부르는 구원의 노래요, 감사의 노래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잠언16:17절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
(새번역)

지혜라는 단어 자체는 도덕적 색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반드시 도덕이 그 요소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첫 걸음이 주님을 경외하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지혜를 정의합니다. ‘길’ 혹은 ‘대로, 큰길’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하여, 잠언은 제자들이 ‘윤리적 완전함’을 선택하도록 동기부여 합니다. 고고학적 증거를 살펴보면, 철기 시대 이스라엘(비시1100-600)의 경우 ‘대로,큰길’은 통상 도시 옆을 지나가는 주요 간선 도로였지, 도시 가운데를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도시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대로에서 돌이켜 도시로 이어지는 길로 나갔습니다. 이 잠언에서 ‘큰길’은 정직한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을 묘사합니다. 큰길을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도시는 암묵적으로 타락과 죄악을 상징합니다. 정직한 자는 정죄받은 도시로 가지 않고 안전하고 장애물 없는 그 큰길로만 걷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생명을 지킨다’는 의미는 정직한 나그네들마다 잠언의 교훈에 깊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유혹을 뿌리치고 큰길로만 행하여 그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전형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 되사서 하나님께 드려진 주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그들의 마음에는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가 늘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35:8).

잠언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6-17절은 윤리적 행동을 다루고, 18-19절은 내적 태도를 다룹니다. 17절과 18절은 ‘길’이라는 은유로 연결되어 있지만, 18절은 목적지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초점을 두고 교훈합니다. 지혜의 첫 번째 원칙은 주님을 두려워 하여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잠15:33). 교만한 사람은 이 원칙에 반하여 하나님과 사람 위로 눈을 치켜뜨고 살다가 넘어져 멸망합니다. 잠언은 정직한 사람(17)과 교만한 사람(18)을 함께 기술하여, 정직한 자는 겸손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선생들에게 순종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교만한 자는 도덕 질서에서 일탈하여 어둠 속에 다니다가 넘어져 파멸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니는 길이 어둡고, 패역하며, 장애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잠언은 같은 교훈을 거듭 가르쳐 제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18절 후단에서는 ‘거만한 마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란 마음과 정신이 거만한 자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국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그들의 몸은 산산히 부수어질 것입니다. 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의 사지가 깨뜨려질 운명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 때문입니다. 영원한 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이 되려는 마음에 먼저 패역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치려고 나귀를 타고 군사들을 이끌었습니다. 전쟁터는 숲이 많았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자랑하는 머리털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매달렸고, 결국 요압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잠언16:19,새번역).

잠언16:19절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이 구절은 ‘—보다 더 낫다 : better than’는 잠언 형태로써, 비교 대상 간에 절대적 측면이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이 구조는 16:8절,‘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에서 언급되었습니다. 19절에서 ‘겸손’과 ‘재물-전리품’이 비교되었습니다. 겸손’도 중요하고, ‘재물’도 중요합니다. 이 둘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이라는 덕목을 희생해서 재물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겸손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겸손하게 되면 교만으로 가는 길은 저절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얻게 되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8절과 19절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전리품을 나눈다’는 말은 전쟁용어입니다. 그것은 승리한 자를 지칭하나, 본문은 승리자를 거만한 사람과 동일시 합니다. 무릇 인간이란 승리를 하게되면 자신의 지혜나, 탁월한 군사력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궁핍한 자”는 “전리품을 나누는 자”와 대조되면서 겸손한 자를 지칭합니다. 만약 재물이 지혜자에게 온다면, 대대손손 물려주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배분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재물은 지혜자에게도 재앙의 서곡이 될 것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1000 명 중 999명은 거만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명의 예외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드물게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전7:20, 새번역).

매일묵상(2022/02/07 – 11)

시편74:10
“우리에게는 어떤 징표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예언자도 더 이상 없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아무도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갈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새번역)

고려가 멸망한 뒤 야은 길재 선생은 망국의 한을 시조로 읊었습니다. 이 시 역시 바벨론에 의한 성전 파괴와 유대 왕국 멸망 사건(BC 586)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낸 그 위대한 솔로몬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 때처럼, 천사들을 보내셔서 바벨론 군대들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을 치고 승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황무한 예루살렘 성전을 또 다시 보면서 한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파괴들과 고함 소리에 잠겨 있습니다(3-8).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선지자들도 보내시지 않았습니다.(9). 그 멸망의 상황은 ‘영원한’ 것 같았습니다(1,10). 시편 기자는 ‘고난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세차게 몰아치나, 주님은 침묵하시는 순간’을 아주 잘 포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의 가슴에는 절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이런 어둠의 날들은 주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겪는 경험의 일부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줍니다. 이 시는 고난의 물결이 우리 삶의 배를 휩쓸어 가려고 할 때 그것을 묶을 수 있는 말뚝을 줍니다. 우리는 만유의 창조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하신 행적을 돌이켜보면서(12-17), 고난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여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견디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약1:2-4,현대인의성경)

시편75:7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만이, 이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저 사람을 높이기도 하신다.”(새번역)

1,000미터 쇼트트랙 경기에서 편파 판정으로 실격 당한 황대헌 선수는 낙담하지 않고,1,500미터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중국 선수는 한 명도 진출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언론은 한국을 맹비난합니다. 원래 심판은 공정하였는데, 한국이 심판을 압박하여 중국선수만 편파판정으로 탈락하였다는 것입니다. ‘공정한 심판의 필요성!’ 이는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시편75편은 천지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께서(3), 공정한 재판장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7). 그분은 현실의 역사속에서도 정의를 집행하고 계시지만, 궁극적인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정한 기약’이 이르러야 합니다(2). 그날은 이미 정해져 있고, 재판장으로 우리 주님이 임명되셨습니다(행17:31).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요5:27). 악을 행하면서 재물,권력,건강과 세상의 행복(?)을 누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하여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73:18,19).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주 만물, 시간과 공간 그리고 태양 등은 전 인류에게 창조주의 존재를 말없이 그러나 명백히 선포합니다(시19:1-3). 오직 성경만이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엡1:3; 벧전1:3).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만나고 사귀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요. 그러면 서로 사귐을 경험할 것입니다. “주님은 악인의 오만한 뿔은 모두 꺾어 부수시고, 의인의 자랑스러운 뿔은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다.”(시75:10새번역)


잠언16:14절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정당한 진노는 형벌의 집행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사자들’이라는 은유는 우가리트 신화를 암시합니다. 바알은 생명의 신이고 모트는 죽음의 신으로 사신들을 보냅니다. 모트의 사신들이 죽음을 선고하듯이, 왕의 진노는 죽음의 전조입니다. 주님은 악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시는 궁극적 행위자이십니다. 인간은 집행 시기를 모르지만, 집행자를 알고 있습니다. 집행자는 공의로운 왕입니다. 솔로몬은 등극 후 통치의 암적 요소인 군대장관 요압, 이복 형 아도니야, 왕 다윗을 저주하였던 베냐민 지파 시므이를 처형하였습니다. 그 뒤, 그의 왕국이 굳건하게 되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평가하였습니다 (왕상2:22-46).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향한 왕의 진노를 쉬게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겸손(15:33), 참회와 고백(28:13), 왕국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16:6), 그리고 인내하며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15:1). 좋은 예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 사건입니다. 왕은 꿈을 꾸고 그 꿈을 기억해 내지 못하여 고민하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바벨론 지혜자들-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 -은 사형집행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두려워 하지 않고 왕에게 온유하게 요청하여 시간을 허락받자,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여 꿈의 내용을 응답받았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주님의 지혜의 시작이며, 끝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새번역).

잠언16:15절
“임금의 기쁨은 봄비를 실어오는 구름과 같아 그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 모두가 살게 된다”(공동번역)

15절은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주님의 통치 대리자인 왕의 호의를 얻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는 직역하면 ‘왕의 얼굴의 빛 속에’입니다. 이 표현은 바벨론의 비유법으로, 누군가를 향한 통치자의 호의를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태양으로 불리워졌고, 그의 얼굴의 화색은 태양 빛에 비유되었습니다. 시편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관련하여 이 비유를 빈번하게 사용합니다. 따라서 그분이 임명한 왕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통치를 받는 신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듯이, 그분의 왕 역시 신하들에게 충만한 삶을 부여하는 매개적 역할을 합니다. 구름은 지면에 생명을 붘돋게 하는 봄비를 예고하기 때문에, ‘임금의 기쁨’은 구름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이른 비(가을비)는 10월 중순 경 내려서 땅을 기경할 수 있게 만들고, 늦은 비는 봄에 내려 마지막 추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생명의 저자이신 주님은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의로운 왕(지도자)를 임명하십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을, 호의는 풍성한 삶을 예고하기에 마땅히 왕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좋은 예가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의 호의를 얻어 팔레스틴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통치를 하였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주님이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잠언16:16절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16:16-30절까지는 ‘선한 말과 나쁜 말’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이 주제는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논해집니다: (1)도입부분(16-19) (2)선한 말(20-24) (3) 나쁜 말(25-30). 16절의 주제는 ‘지혜를 얻는 것’에 관한 교훈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지혜는 귀금속과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값집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물질적인 혜택과 영적인 미덕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잠3:13-18). 이 반면, 지혜가 수반되지 않는 재물은 탐욕이나 무자비한 개인주의에서 나오기에 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의 삶은 주를 경외하여 악을 떠난 삶을 말합니다(욥28:28). 그런 사람의 삶은 당연히 영적인 미덕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철학자들은 ‘소외’라는 단어를 자주 꺼냅니다. ‘소외’는 개인이 사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여 거리가 있는 상태를 말하나, 철학의 경우는 ‘인간이 자기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일’로 정의합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부조리로서, 물질(돈)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설정하여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성경은 물질보다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독정신의 핵심 요소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하나님 – 자신 – 타인 – 물질’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그 안에서 재물을 벌어들이는 것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그런 재물은 자신을 보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 16:17,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