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1/24 – 28)

잠언16: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의 입이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어떤 판사는 큰 범죄를 저지른 청년에게 사형이 아니라, 10년 형을 선고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출소 후에 더 큰 범죄를 저질렀고, 그 판사는 몹씨 고뇌하였다고 합니다. 재판은 실상 매우 어렵습니다. 잠언은 재판할 때에 실수 없는 왕으로서 현명한 왕을 제시합니다. 본 구절에서 주님은 당신의 정의를 행사하시되 현명한 왕에게 영감을 주심으로 오류가 없는 판결을 내리도록 하십니다. 그런 판결은 절대로 정의를 빗나가지 않습니다. 만약 이방의 왕들이 정의를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하물며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 왕의 경우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퀘셈’으로 ‘신탁(神託) oracle’ 입니다. 구약의 도처에서 ‘금지된 이방인들의 신탁’을 뜻하기도 하고, 지금 같은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신탁’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영감된 재판은, 왕이 가져야만 하는 불가양도의 권리입니다(잠8:15).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은사를 부여받은 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러나 왕이 그분의 신뢰에 반하는 재판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셨거나(사울) 아니면 최소한 징벌하셨습니다(솔로몬). 이스라엘 열왕기를 보면 그릇 행하지 않은 왕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상적인 왕을 제시하고 이를 성취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요5:19-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잠언16:11절
“정확한 저울과 천평은 주님의 것이며,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분이 만드신 것이다.”(새번역)

주님은 당신이 세우신 왕이 재판정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정의를 확립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자에서는 영감되었으며 그릇되지 않는 판결을 통해(10), 후자에서는 당신이 정하신 정확한 저울과 천평을 통해서입니다(11). ‘저울과 천평’은 왕 마다 자의적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하여졌고 다만, 공평하게 집행되도록 왕의 손에 넘겨주셨을 뿐입니다. 왕은 저울과 천평을 표준화시켜 공정한 거래를 확립시켜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거래의 배후에 서 계시며, 거래의 수단과 대상들조차 궁극적 소유자이십니다(11b). 지난 40년 간 전세계는 자유로운 무역을 강조하는 사조,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배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나, 국가나 개인 혹은 계층 사이의 부의 격차는 매우 심하게 벌어졌습니다. 더구나 소득의 증가 속도가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 가치의 증가 속도를 따르지 못하였기에, 가진 계층은 더욱 부유하게 되었고, 못 가진 계층은 더욱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정의는 이런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런 정의의 확립은 정부의 존립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와 같은 권력구조 역시 주 예수님의 창조물 중 하나입니다(골1:16). 주님은 직접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시기 보다, 국민이 뽑은 정부를 통해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계십니다. 이것이 친구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시각이요 행동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는 균형잡혀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훨씬 낫게 되어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후단)

잠언16:12절
“왕은 악행을 하는 것을 역겨워하여야 한다. 공의로만 왕위가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새번역)

12-13절은 10-11절(정의의 판결)과 14-15절(정의로운 판결의 집행)의 중간에 놓여 있어, 왕은 도덕에 민감하게 통치할 것을 교훈합니다. 12절은 왕은 의를 통하여 통치기반이 확립된다고 선언합니다. 악을 역겨워하는 도덕적 자질이야말로 왕의 중요한 자격입니다. 통상 ‘역겨워 한다, 미워한다’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토에바흐’는 악인과 교만한 자에 대한 주님의 감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왕에게 적용합니다. 왕이나 그의 관리들은 반사회적인 악한 행동들을 극히 미워하며, 정의를 수호하여야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왕의 도덕적 성향은, 지혜(8:7)와 주님(6:16;15:9)의 도덕적 성향과 동일합니다. 이집트 학자 브루너는 파라오의 보좌를 연구하여 12절 후단의 의미를 밝혀주었습니다. 파라오의 보좌를 떠 받치는 기반은 ‘정의와 적절한 신의 질서’를 나타내는 상형문자 ‘마아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기호는 히브리어로 ‘의’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마아트’의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이집트의 19, 20왕조에 이르러 왕좌의 기초는 정의, 올바른 질서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한편, 솔로몬 (왕상10:18-20)과 파라오 보좌 사이의 유사한 기록들(특히 6개의 층계)은 솔로몬이 파라오의 보좌 받침대를 본 따서 만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늙기 전까지 의에 기반을 두어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굳건하게 섰지만, 그가 늙자 여인들의 유혹을 받았고, 주님이 역겨워하는 우상숭배를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혜의 왕이 가장 우둔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공의로운 말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고, 올바른 말하기를 좋아하여야 한다.” (잠언16:13,새번역)

잠언16:13절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잠언은 행위(12)와 언어(13)에 대한 교훈을 하면서, 왕은 자신의 통치 영역 전반에 걸쳐 도덕적 민감성을 가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의 행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7절을 염두에 두면, 13절은 주님은 당신의 정당한 대표자인 왕을 통해 기쁨과 사랑을 주심을 밝혀줍니다. 잠언(22:11)은 더 나아가 왕의 친구(예, 고문, 관리, 사자)가 되기 위한 자질로서 ‘정결한 마음과 은혜로운 언어’를 언급하여, 훨씬 명확하게 이 부분을 다룹니다. 왕의 친구들은 말하기 전에 정결한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은 방백들에게 계속적인 거울의 역할을 합니다.” 그의 고문들은 올바른 것을 말하는 지혜로운 여인과 같습니다(8:8). 여기에 나오는 왕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왕도 이 잠언을 한결 같이 성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죽으시고, 속죄권과 함께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이 만유의 통치자이십니다. 이 잠언은 그 주님의 통치 방식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이 잠언을 유일하게 성취하신 하늘의 왕에게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교회와 관련 하여서는 성령님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죽음입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경건한 신자로 명예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헌금하기 위해 판 밭의 대금의 일부를 감추고는 마치 전부 드린 양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사형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잠16:14).

매일묵상(2022/01/17 – 21)

잠언16:5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5절은 4절 후단의 ‘악인’을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으로 더욱 정확히 정의한 뒤, ‘악한 날’이란 ‘벌을 받는 날’로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5절은 악인이 심판받을 것을 법칙화 하고, 그런 이유는 바로 주님이 역겨워 하시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거만(교만)’이란 자신을 높이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비판은 지혜로 가는 길에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또한, 거만한 자는 자신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무시하기에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을 두려워하여 늘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낮추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데 참여하지만, 하나님은 정의를 확립시키고 찌기를 제거하십니다. 거만한 자들이 찌기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그 날에 모든 거만한 사람 위에 자신을 높이실 것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보고도 마음을 완악하게 한 파라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결국 이집트는 황폐하게 되었고, 그의 군대는 전멸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다른 메시야를 찾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거만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은 깨졌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야와 신념을 가지고 로마제국과 두 번에 걸친 독립 전쟁을 벌렸으나 멸망하였습니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잠언16:6,새번역).  

잠언 16:6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새번역).

‘어질고 진실하게’는 ‘인자와 진리’를 풀어쓴 것입니다. ‘인자’의 원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실함, 신실함’을 뜻하는 ‘에메드’의 번역입니다. 결국 ‘인자와 진리’는 합쳐서 ‘주님과의 언약에 기반을 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잠언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에게 베푸는 인간적 친절을 뜻합니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물론 회개하는 마음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용서받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잠언은 죄 용서를 위한 희생제사를 보충하는 인간의 미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레16:21).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희생제사를 드려도 소용없습니다(삼상15:22). 그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된 것입니다. 6절 후단은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당연히 공동체 속에서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를 그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고는 발생할 수 있어도, 재앙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특질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이를 열어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깨닫은 사람의 삶은 주님을 경외하는 열매로 가득차게 됩니다. 결코, 논어나 성현의 말씀을 읽고 얻어질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면, …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잠언2:1-5)

잠언 16:7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새번역).


5,6절은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벌과(5-6a), 앞으로 저지를 죄(6b)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을 다루었습니다. 본 구절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원수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잠언이 말하는 원수는 의인에 대하여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과거의 죄악을 회개한 야곱이 다음날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이 범주에 포함되기는 어렵습니다. 야곱은 의인이 결코 아니고, 다만 회개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본 구절이 적용된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 찾아 온 흉년이,100년 만에 이삭의 때에 일어났습니다.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이삭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터이니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던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들을 파자, 그때마다 그랄 목자들이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이삭은 양보하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습니다. 주님은 브엘세바에서 이삭에게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에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잠언 16:8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8절은 이른바 ‘..보다 낫다, better than’ 의 구문으로서, 5-7절에서 선포한 일반적 명제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5-7절은 거만한 자에게는 벌이 내리고, 미덕을 행한 자에게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명제를 가르치지만, 이 세상에서는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때 본문은 판단에 도움을 줍니다. ‘의를 겸한 적은 소득이 낫다’는 의미는, 사람이 공동체를 경건하게 섬기더라도 주님은 즉시로 물질적 보상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은 당신의 심판의 시기가 올 때까지, 악인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벌어들인 많은 소득’을 누리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본 구절을 15장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와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8절에는 ‘주님(여호와)을 경외하는’이란 어구가 생략되고, ‘의롭게 살며’로 대체되었습니다. 주님은 때가 되어 도덕적으로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기 전에는 무심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때가 믿음으로 의를 행할 시기입니다. 인천에 공장을 두고 한국의 유리 산업을 개척하여 큰 공헌을 한 고 최태섭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분은 1951년 1.4 후퇴시 모두 피난갈 때에, 오히려 은행을 찾아가 채무를 갚고 영수증을 받은 뒤 피난을 갔습니다.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받은 영수증은 그분의 신용을 증명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무담보로 2억원을 차용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돈 문제에 직면할 경우 늘 본 잠언을 마음에 두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16:9, 새번역)

잠언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16:1-9절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를 보여줍니다. 1절은 시작하고, 9절은 같은 표현을 써서 결론을 맺습니다. 양 구절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부분과 그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행동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균형 있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결정권자이시면서도, 그분의 결정은 가장 온전하십니다. ‘그 발걸음’이란 ‘그의 길’과 동의어로서 인생의 행로를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발걸음들’대신에, ‘발걸음’으로 표현하여, 단 한 걸음도 주님의 감독을 떠나 취해질 수 없음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상세하게 자신의 길을 계획할 수 있지만,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계획을 수행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거칠게 깍고 만들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이루신다.” 우리는 늘 겸허히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도적으로 삶을 해석하고, 이끌고 나가야만 합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목적을 달성하는 우리의 결정과 방법이 틀리면 주님이 바른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주시고 하란을 떠나라고 하였지 갈 지역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영화롭게 할 땅을 고민한 뒤, 가나안 지역을 선택하였고 전 재산을 이끌고 갔습니다. 세겜 모레 상수리 나무를 지날 때 주님은 나타나셔서 그의 선택이 옳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1,새번역)

매일묵상(2022/01/10 – 14)

시편73: 1-14 : 진리와 배치되는 현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1절, 새번역)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신다는 진리는 아삽의 경험과 충돌하였습니다(2-14). 늙은 아삽은 자신이 매일 겪는 명백한 고통- 질병(?) -과 악인의 번영(3-5)을 비교하며 고뇌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의 일반은총 (145:9)이 아닙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경외하며(34:8,9) 기도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된 선하심을 말합니다. 아삽은 안팎으로 정결한 삶(13)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도덕적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재앙과 벌만을 경험하자, 믿음이 흔들렸습니다(14). 욥과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반대로 악인은 번영하였으니 저절로 질투가 올라왔습니다. 아삽은 그들이 불치병도 없이 죽는 것까지도 목격하였습니다. 교만이 그들의 성품이었고 타인을 착취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6). 그들의 교만한 혀는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가졌습니다(10).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내용이었습니다(11). 그러나 그들은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였습니다(12). 여러분은 어떻게 이겨나가겠습니까?  ‘호신론 護神論’이란 신학 분야가 있습니다. ‘신이 전능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선하지 않다’, 그리고 ‘신이 선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전능하지 않다’라는 명제가 대립합니다. 좋은 설명은 신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서 악이 있는 세상을 허락하셨다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잠언16:4,새번역).

시편73:15-20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

주님의 통치에 대하여 번민하던 시편기자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자 깨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교만히 행동하고, 말하는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축복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멸망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속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심판으로 가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워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처한 환경이 당황스럽더라도, 다음 세대의 주의 백성들을 낙망시키는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만 합니다(15). 만약 삼가지 않으면, 주님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악한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배를 통해 주님과 가까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공자는 혼자서 하루 종일 혼자 생각해도 생산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는 것을 버렸다고 논어에서 말합니다. 혼자 너무 기를 쓰고 기도하거나, 생각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16).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병들었을 때 의사가 주는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어 낫듯이, 그분이 준비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십시요!(17) 셋째, 영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개하여 대단원을 미리 내려보십시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먼저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 주어지는 영원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자명해 집니다. 악인들의 영원은 너무나도 불안합니다(17-19). 그들은 ‘완전한 속임과 멸망’(18)의 희생물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1).

시편73:21-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28,새번역)

이 마지막 부분은 승리의 찬가입니다. 시편기자 아삽은 괴로운 생각이 가득 차고 정서적으로 땅 바닥까지 떨어지자, 잘못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삽은 고백합니다: “아, 나는 주님 앞에서 한 마리 짐승과 다름 없었구나!” 그리고 주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27,28). 궁핍한 아삽은 여전히 부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23). 주님은 늘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에 안전한 현재의 삶을 누리고(23), 하늘에 가기까지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날 때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려고 애를 쓴 자신을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24-26).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멸망하는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는 피난처요, 알 수 없는 그 선하심입니다(27-28). 여기에 신실한 신자를 위한 사중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동행(23) (2)하나님의 붙드심(23) (3)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는 미래(24- 인도해 주시고) (4)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24-내세의 확신). 악인들은 이것들을 알 수도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아삽은 지혜를 가졌고 하늘의 분깃을 강조합니다(26). 레위지파는 가나안 정복시 땅을 분배받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었습니다(수13:14,33). 주님은 공평하십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전3:13,새번역)   

잠언16:4절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새번역)

많은 성경학자들은 “악한 자들은 자신의 심판의 날(악한 날, 재앙의 날)을 위해 지음받았다(결정론은 아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들과 보디발 아내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시어, 요셉을 이집트의 권력구조의 최정상에 있는 파라오 다음 가는 위치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 목적은 단순히 요셉에게 영광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서운 기근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처와 생명을 공급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자를 요셉의 자리에 앉히셨다면, 이집트 인들은 구원받았겠지만, 야곱의 족속은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자세히 또 끝까지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멸망 당할 때(비시605-586년), 유다의 관점에서 이는 ‘재앙의 날’이었습니다. 성전이 불태워지고, 그 사회의 지배자들과 귀족의 자제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의 관점에서 이 승리는 그들의 신들이 하사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전합니다. “주님은 유다 왕 여호야김을 느브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단1: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선하신 목적들을 이루십니다. 악한 자나 그들의 악한 행동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지혜와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2/01/03 – 07)

시편72:1절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그 내용은 솔로몬의 시대에 잘 들어 맞습니다. 그는 시바 여왕을 포함하여 왕들의 존경을 받았으며(10절: 왕상10:1-13), 그의 제국은 평화와 번영이 그 질서를 이루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왕상10:14-29). 솔로몬의 제국은 메시야의 나라의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는 본 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적용한 예는 없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왕과 그의 통치에 대한 묘사는 이사야11:1-5과 이사야 60-62장의 예언들과 너무나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그 예언들이 메시아적이라면, 당연히 이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정의와 평화 그리고 번영의 언급은 솔로몬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 솔로몬의 능력이 미칠 수 없습니다. 그 소명은 오직 메시야 안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아람어로 번역한 탈쿰역을 보면, 1절에 등장하는 ‘왕’ 앞에 ‘메시야’라는 단어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그 밤, 주님은 솔로몬에게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그는 ‘듣는 마음’ 즉 판단력을 구하였습니다. 주님은 기뻐하셔서 지혜는 물론 부와 명예도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솔로몬이 다윗과 같이 주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킨다면 장수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땅의 지혜를 얻어 성전도 세우고, 부도 얻고 명성과 권력도 얻었지만, 하늘의 지혜인 주님 경외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여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는 60세로 단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시편73:13절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새번역)

이 시는 다윗 왕 시절 성가대장이었던 아삽의 저작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전능하심에 회의가 드는 사건들을 종종 만나거나, 그분의 아버지되심이 무색할 정도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 자체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들은 이런 현실에서 숨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직면합니다. 시편 1권(1-41편)은 경건한 자의 번영을 노래하면서 시작합니다(1:3). 그러나 시편2권(42-72퍈)은 인생은 미덕과 보상 간에 비례적 관계가 없다는 눈물어린 고백(42:3,5,9-10)으로 시작합니다. 시편3권은 다음과 같은 퉁명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73장) : 경건이란 시간 낭비아닌가(13)? 악인들은 즐겁게 살 때 우리는 온 종일 재앙을 당하고 벌받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14)? 그렇다면 이런 삶을 포기하고 그 행복한 넓은 길에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10)? 아삽에게 주어진 유혹을 우리 역시 느끼곤 합니다. 아삽은 몹씨 고통스러워 하였지만 마침내 성소에 들어가서 악인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17). 그들은 회개할 사이도 없이 창졸 간에 멸망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아삽의 가슴은 찔린 듯이 아팠습니다. 마치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22). 그러나 자비롭게도 주님이 자신을 붙뜰어 주심을 체험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시이기에 며칠에 걸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잠언16: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2절은 인간의 경영에 대하여 통치하시는 주님이라는 주제를 계속 다룹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음의 계획들(1절)을 평가하십니다(2절).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지만 주님은 진리를 따라 평가하시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이십니다. 주님은 속마음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정당하게 평가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부정을 인식하였을 때는 그것을 고백하고 자비를 호소해야만 합니다. ‘꿰뚫어 보신다”혹은 “감찰하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토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측정하다, 양이나 무게 등을 재다’의 뜻입니다. 이런 비유는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후에 자신의 마음이 진리를 잣대로 측정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마음 또는 동기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채, 계획하고 집행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된 기준이 있기 때문에, 동기와 행동을 달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물론, 동기의 정결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주님께 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잣대로 재고는 스스로 만족해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행동과 결과를 주님께 맡긴 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경영하여야 합니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동기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타인을 어떻게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곰곰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주님은 사람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주권을 갖고 계시며(1절), 오직 그분만이 동기의 순수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2절). 그러므로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일의 성패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형통할 것입니다(3절). 때로는 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승리 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기 마련입니다. 그 반면 2절과 3절은 경고도 줍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말과 행위에서 정결함을 보지 못하신다면, 우리의 계획은 좌초될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1절과 2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맡기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골렐’이며, 본 뜻은 ‘(돌을) 굴리다’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양들을 먹일 우물을 큰 돌로 덮었다가, 양떼들이 모이면 그 우물에서 돌을 굴려(골렐) 물을 먹입니다. ‘돌을 굴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일을 주님께 굴려서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골렐’은 의성어로서 이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은 마치 돌이 굴러가는 소리와 거의 흡사합니다. 굴러가는 상대방은 다름아닌 주님입니다. ‘일, works’은 계획된 행동이나 수행된 행위를 말합니다. 신실한 신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성취할 것인지 여부나 그들의 동기에 대하여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가나 성공여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지,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을 믿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일의 결과를,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기도와 평화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5:7).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어제는 계획하고 주님께 그 결과를 맡기면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절하실 권한도 있습니다. 사무엘하7장은 이 측면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계획을 밝히자, 나단은 즉시 승인합니다. 그 밤에 주님은 다윗이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주님은 다윗의 가문을 위해 영원한 집을 세울 것이며, 그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다윗은 계획을 바꾸어, 남은 생애를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완전히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수립되여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계획을 승인하시고 이루어주셔야 한다는 기도를 그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일의 결정권자이십니다 (1절). 오히려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김으로써, 인간적인 계획은 좌절될지라도, 우리 삶에서 이루어가시는 좀 더 깊은 주님의 계획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15:31절, 32절을 본 구절과 함께 읽으면 그 의미가 뚜렷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왜 솔로몬이,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3:11, 새번역) 교훈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책망을 들어야 비로소 우리 삶과 인격이 교정되어갑니다. 지혜는 여기서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가는 방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어놓으셨습니다(4절).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