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없는 인생의 문제 – 삶의 의미

시편127장 1-5

여자의 일생, 목걸이, 비계덩이리 등의 걸작들을 남긴 단편 소설가 모파상(1850-1893)은 본래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퇴학 당했습니다. 그는 신앙과 결별하기로 하고 자신이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후 그는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 10년 만에 유명 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말에 그는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대저택을,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를 갖고 쉴 새 없이 애인을 바꾸면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대중들은 그를 흠모했으며 그의 은행에는 넉넉히 쓸 수 있는 돈이 항상 있었지만 그는 안질과 불면증으로 시달렸습니다. 1892년1월1일 새해가 밝았지만 인생의 의미를 잃은 그는 종이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합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이미 온전하지 않은 그는 정신 병동에서 몇 달을 알 수 없는 소리로 허공을 향해 절규하다가 겨우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 묘비에는 그가 말년에 자주 외친 삶의 독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으나 실상은 가장 처절하게 가난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이동원,우리가 사모하는 건강한 교회, 27-28).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 없이 자신의 인생의 집을 세우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한자이며,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사는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의 문제는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인생의 집, 재물의 집, 명예의 집, 건강의 집을 지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집을 짓고 나면 허탈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존재로 남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인정하지 아니하니 주님이 세우시는 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집의 결과는 모파상과 같은 파멸로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우리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인생의 집을 건축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집에는 주님께서 거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이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사회적 태도는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피, 또 하나는 참여입니다. 전자는 거부하는 마음으로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며, 후자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세상 쪽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것인데, 결국에 가서는 그 책임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손을 씻는다고 해서 벗겨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느라 우리의 손을 더럽히고 아프게 하는 것으로, 이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요동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 그리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책임한 도피주의자들이었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지도 모르므로 사회 참여는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엉터리 신학으로 우리의 양심을 달래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처럼 살고 사랑하며 증거하고 고난받고 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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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시편 6장

시편 6장은 오래 병들어 고통을 당하면서 대적들에게 여러 비방을 받는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비탄시의 일종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시편기자는 다윗입니다. 그의 병의 위중함은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는 5절을 읽어 볼 때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고통이 심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시편기자의 대적들이 와서 욥을 괴롭힘과 같이 시편기자를 괴롭혔다고 생각됩니다. 즉 시편기자가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든지, 죄악을 물마시듯이 마셨다든지 하여서 하나님께 심판을 당했느니 아니면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든지 하는 정죄감을 계속 심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자신의 신실함을 굳게 믿었고 하나님의 응답을 외치면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면서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김병년 목사님은 IVF 간사를 마치고 1990년대 말에 개척을 하셨습니다. 물론 1995년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지만, 셋째를 낳는 중에 그만 사모님이 뇌경색을 일으켜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2004년). 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수술하면 잘 해야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망설이던 끝에 식물인간이라도 함께 있는 것이 더 낫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복을 위해 장모님도 목사님도 온 가정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지만 아내는 중환자실에서 손가락을 약간 움직일 수 있고 눈썹을 약간 움직일 수 있는 정도록 회복되어 일반병실로 옮긴 뒤 다시 집으로 이동하여 그때부터 2019년인 지금까지 대소변을 다 받아내면서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회복을 재촉시키기 위해 발맛사지 열기구를 사용하다가 그만 화상을 입어 아내의 발은 한 쪽을 절단하게 되는 불행이 잇따랐습니다. 장모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를 한 번 밝혀보자는 말씀까지 하셔서 죄책감에 마음이 몹씨 서글퍼졌습니다. 이런 엎친데 덮치는 고난 가운데 기도원에 가서 위로를 받아 보려고 하였으나, 기도원 강사는 오히려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였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집은 뇌경색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설교 중에 한 것이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않고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15년간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식물인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천만원 하는 수술비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었으며, 자녀들 3은 전부 잘자라 주었고, 많은 재정적인 필요들을 하나님은 그때그때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당하는 불행과 고난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끝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얼굴을 보게할 줄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주시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면,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신뢰 속에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