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10. 1-5

‘그리스도와 함께’ 이 말은 즉시 장례식과 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는 말씀이 비문으로 가장 많이 쓰이며, 때로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로 줄여서 쓰기 때문입니다. 2세기전 사셨다가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는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의 시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 주님, 제가 죽은지 사는지는 제가 걱정할 바 아니옵니다.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본분만 은혜로 저에게 허락하소서./ 제가 지날 죽음의 어두운 방 주님도 친히 지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나아오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제가 그 생을 잘 모르고 제 믿음의 눈이 침침하여도, 주께서 다 아시니 족하오며 주와 함께 있으리니 족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류를 가리킵니다. 사실 그때 누릴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에 비하면 지금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는 차라리 부재에 가깝습니다. 그 임재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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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을 입자

에베소서 4:21-24

평양 남산현 교회의 전설적인 전도왕 김세지(1865-월남?) 전도부인은 1865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한 뒤 우여곡절 끝에 1888년 재산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이자 관청에도 출입한 김종겸(金宗謙)과 재혼하였다. 한편 홀은 1893년 한국인 조사 김창식과 함께 평양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열매가 오석형이었다. 오석형은 평양에 들어와 노름꾼으로 지내다가 전도를 받고 새사람이 된 사람으로 김종겸의 팔촌 아우뻘이었다. 그 오석형으로부터 ‘예수 믿으면 남편의 외도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나가 말씀을 듣는 동안 기독교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영생’을 사모하는 동시에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믿지 않던 남편도 신비체험을 한 뒤 1895년경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갔다. 이후 김세지는 1896년 미감리회 선교사 노블(W. A. Noble)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지(世智, Sadie)라는 이름을 얻었다. 1899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소속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보호여회(保護女會, Ladies Aid Society)를 조직하였고, 1916년에는 과부회(寡婦會, Widows Relief Association)를 창설하였다. 1919년 11월 장로교와 감리교 여성들이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재무부 부부장 직책을 맡았다. 1920년 일제 경찰에 의해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921년 석방 후 보호여회를 재건하여 70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보호여회 기금으로 1923년 평양 칠성문 밖에 교회를 세웠다. 1925년 전도부인직에서 은퇴하였으며 광복 후 월남하였다. 말년에는 사위 변홍규 목사의 집에 기거하다 별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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