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9. 3 – 7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 삶을 향하신 뜻은 진리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뜻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여기서 ‘멍에’란 소의 목에 수평으로 메우는 나무틀입니다. 지금은 쉽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시골에 가면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면서 밭이나 논을 갈아엎는 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권위, 특히 압제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자연히 멍에를 활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항복하는 것은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는” 것이었고(렘 27:1-15), 도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도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딤전6:1) 것은 곧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한다는 뜻이었습니다(사58:6). 그러나 멍에로 상징되는 권위가 언제나 폭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복종하여야 할 권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하에 놓여있는 자들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이 주님의 확언입니다. 왜 그렇까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신 그림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농부에 우리를 그분을 섬기는 소에 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위에 자신의 멍에를 두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분의 멍에를 메도록 다시 말해 그분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 짐이 가벼우며 쉬운 이유는 우리가 도덕법을 자력으로 지켜내려고 하거나 순종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우리는 결코 타인을 배려하도록 규정한 도덕법을 지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셔서 우리 죄책을 지고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뒤로는 이야기가 틀려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의 완전한 모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인도하시고 힘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구원받은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기를 즐거워 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아래’ 즉 그분의 쉬운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두 가지 영역이 포함됩니다. 하나는 우리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의지입니다. 먼저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는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랍비들은 늘 ‘토라의 멍에’, ‘율법의 멍에’를 말하였으며, 그것은 지기 어려운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도덕법 자체가 압제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롬7:12),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요일5:3). 그러나 자력으로 지키려 하거나 율법을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복잡하게 해석하여 무거운 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되라고 주신 것(시119:105)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소소한 규칙들과 계율들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압제적인 “장로들의 전통”(쇠 멍에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임)이 있던 자리에 자신이 가르치는 쉬운 멍에를 내놓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분부하심으로 주님은 은유를 바꾸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소를 거느린 농부가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으로 바뀐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학교를 세우신 셈입니다. 이 초청은 더 유명한 다른 초청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데, 다른 초청이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와 죄책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와서 쉬라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고 죄책을 제하며, 그리하여 그들의 멍에를 쉽게 하고 짐을 가볍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다른 역할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짐을 벗기는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짐을 지우는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그 둘의 차이는 우리의 짐은 무겁고 우리의 멍에는 불편한 반면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 이 점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 혹은 종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리고 겸손하고 기쁘게 그분의 가르침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고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당연히 유대교 랍비들 아래에서 배우고 자란 그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 아래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의 사고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성경의 생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7-8).

제자들이 주님의 인도와 가르침하에서 생각을 바꾸는 과정은 점진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즈음까지도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분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 교육을 그분은 친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4:25; 16:12-14). 하나님과 인간, 역사와 영원, 죄와 구원, 창조와 구속, 믿음, 사랑, 의와 소망, 성경과 성령, 삶과 죽음과 최후의 심판 및 영광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이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자라갔습니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과 함께 여러 교리와 관련하여 당대의 유대교나 세상적인 견해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이 서로 상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 이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말 멋진 비전입니다.“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수요일터예배

잠언 16: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평소 퇴계 이 황 선생은 집안 자제와 제자들에게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 貧當益可樂’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이 말은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사는 것’(貧而樂)에서 유래한 듯합니다. 당시 자공이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떠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기는 것보다는 못하다” 라고 답했습니다. 퇴계는 공자의 이 표현을 한층 더 강조해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퇴계는 아들 이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습니다.

“가난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찌 마음에 두겠느냐? 너의 아비는 평생을 이로 인해 남의 비웃음을 받아왔다. 다만 굿굿이 참고 순리대로 대처하면서 스스로를 수양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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