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

2016. 7.4 – 8

‘깨어짐’ 이라는 말은 자만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만심이 있는 곳에는 고백도 용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기꺼이 ‘항복’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분은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한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무리를 먹이도록 하셨습니다(마 14:19). 신앙부흥회의 한 형제는 이 구절을 읽고 케파 셈팡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깨뜨리시기 전까지는 결코 당신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하나의 떡덩어리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예수님이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것은, 훗날 자신을 깨뜨려 제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건을 예시 하신 것입니다(고전11:24 –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없이는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기독교 모임에 가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 깨어진 몸입니다. 저의 모든 기술과 능력과 재정을 여러분을 위해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교만해서 우리의 삶을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때입니다. 이때 비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따르고 있다면 완전한 공동체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시는 와중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따라 우리 자신을 공동체를 위해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우리가 갑자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정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으며, 우리의 장래가 있는 감람나무 같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에 교회까지 그 지경을 넓힐 수 있고 더 나아가 직장과 사회까지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너무 무능력해서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결코 모험을 감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릴 것은 아이가 가진 몇 조각의 떡, 과부가 가진 소량의 기름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이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초라한 목자의 지팡이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평범한 목자에 지나지 않음을 아셨지만, 모세를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의 약하고 천한 것들을 사용하시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약하고 늙은 모세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함께 하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요

 

케파 셈팡기는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우간다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미국에 있는 신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이로비에 피신해 있던 동료들이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피난민 가족을 돌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우리를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깨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취하여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눠 주기 시작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쓰기에도 빠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많은 피난민에게 음식과 물품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주님을 모범으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

베드로전서 3:1-7

이스라엘 하나님은 변덕이 심한 분이 아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사랑을 고취할 약속들과 두려움을 일으킬 위협들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율법으로 구분하시기 위하여(거룩하게 하심) 좋은 땅에서 위대한 나라로 세우셨습니다(8:30-35). 만약 당신의 백성들이 그들의 임무를 실패한다면, 그는 그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막12:1-12). 그래서 임무를 실패하고 메시야를 죽인 그들을 멸망시켜 전 세계에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최후의 심판의 한 예표입니다. 그 심판 후에는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삶이 나뉘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셨다는 사실은 성도들로 하여금 충성하도록 격려하고, 역경에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며 유혹에 있는 그들을 억제합니다 (여호수아 23:14-16). (1) 요셉은 하나님께서 종으로 팔려간 애굽 땅에서도 함께 하고 계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행하는 일에서 범사에 형통한 것을 체험하였으며, 그 주인 보디발 조차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고,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게 되었고 보디발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하니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급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체험은 청년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종으로 일하고 있는 애굽 땅에 조차 자기와 함께 한 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실이야 말로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요셉은 소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제사 문제가 터부시되던 시절 어느 믿음을 가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 청년은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교회가는 것을 반대하거나 핍밥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 청년의 집은 유교적 전통이 뿌리깊은 집안이었고 그 청년은 장손으로서 조상의 제사를 받을어 모셔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시아버지 되실 분은 제사드리는 것을 자손의 도리로 여기며 긍지를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처녀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반대하고 주례도 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축복하는 것도 거절 하였습니다. 시집을 간 이 처녀는 1년간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드리고 찬송할 것을 결심하였고 그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시아버지는 제사만 드리면 찬성이었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며느리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였습니다. 1년이 지나 교회에 나갈 것을 허락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제사만 드리면 문제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신실하게 시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자 그 가정 전체가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었고 이윽고 그 마을 전체가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김형석, 어떻게 믿을 것인가?”)  주님은 이렇게 체험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