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양식과 그리스도(4)-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41-51절
하나님의 참된 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권한이자 의무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일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아들에게 가는 자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세상과 사망이 최종 권세를 잡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실 일은, 먼저 십자가에 높이 들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들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죄를 대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라는 말씀은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심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살을 먹은 우리 즉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한편,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유의 주로 지금 사망을 포함한 모든 불순종하는 것을 복종시키고 계십니다. 죄 문제는 이미 해결하셨고 사망이라는 최후의 원수를 철폐하셨을 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3)

요한복음 6장 35 – 40절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다음날 가버나움으로 당신을 찾아온 무리들에 게 썪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치신 후, 당신이야말로 생명의 떡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당신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심으로 듣는 자들이 자신을 통한 구원을 깨닫기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이 의미하는도 깨닫지 못하였고, 그 표적을 강해하는 주님의 말씀 역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시대에 선지자 엘리사에게 와서 나병을 고침 받은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그 기적이 의미하는 바를 잘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는 증표이었습니다. 그후 나아만 장군은 오직 주님만 섬겼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표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질 구속을 의미합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시면서 “아버지께 배운 자마다 내게 오고 있으며,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빵과 밥을 먹어 육체를 살리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점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죽으나 마지막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다시 살리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2:4-10
“기독교의 역사”를 지은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시기부터 약 400년까지를 초기 교회로 규정짓고, 초기 교회가 전 세계에 퍼지며 부흥발전한 이유를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발전의 중심 축에는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셔서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그들 모두의 죄를 위해 죽고 영원한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사건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런 복음은 듣는 사람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여자와 노예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믿어 갖는 부활신앙 때문에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순교에 직면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가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소식이며, 신자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1500년 전 레위기(23:9-14)에 규정한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이라는 절기를 통해 예표하고 있습니다. 초실절은 유월절 후 첫 번째 도래하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그해에 처음으로 추수한 보리 이삭 한 단을 제단에 드리는 제도로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제 추수를 할 것임을 고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초실절 보리 이삭 한 단을 드리는 바로 그 시간에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지만,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영원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삶을 실천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승리의 입성과 그리스도


요한복음12장 12-19절
오늘은 종려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마르다 남매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마친 다음날 오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동쪽의 가파른 길을 올라 산 정상에 이르러서는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남은 1킬로의 길을 백마는 물론 건장한 나귀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행진하셨습니다. 로마군이 감시하는 상황에서 이는 대단히 지혜로운 모습인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분의 능하신 일 때문에 수 많은 백성들이 나와 ‘호산나(지금 구원 하소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왕이시여’ 하면서 외쳤으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다가오시자 우셨습니다. 이는 순종하지 않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7일 후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만 보는 가운데 조용히 하늘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즉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실로 인간은 겸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를 부패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이 보여주신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의 모습은 우리가 늘 마음에 간직할 그림이 되어야만 합니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6장 25-36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해 일할 것을 요구하시면서, 이 양식은 주님 자신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식을 위해서는 일을 한 대가로 얻는 것에 익숙한 무리들은 무슨 일을 하여야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심으로 썩지 아니하는 양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물론 이들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모세를 통해 불같은 율법 즉 토라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림자요 참된 생명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양식, 참된 토라는 예수 자신입니다. 이를 알지 못한 군중들은 그런 양식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의 것들에만 초점을 두는 신자들과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가 이들을 위한 참된 양식임을 설교하시나 오히려 무리는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분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와 찢기신 그분의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만유의 주님으로 영원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승진도, 부를 획득하는 것도, 명예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주님의 통제 하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지혜입니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1)


요한복음 6장 22 – 27절
요한 복음의 구조는 표적 – 오해 – 강화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런 구조의 일환입니다. 군중의 오해를 지적하신 뒤,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는 26절부터 시작하는 주님의 설교는 요한복음 중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한 강화입니다. 우리는 이 강화를 통하여 오병이어 표적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가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전 날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은 다음 날 보니 제자들도 예수님도 그 현장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디베랴에서 온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로 가버나움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에 도착하니 이미 거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서 “랍비여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자신은 새벽에 물 위를 걸어 도착하였다고 하셨으면, 군중들은 더 깊은 인상을 받았겠지만, 이들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군중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육신의 필요를 채우러 온 것이지, 그 표적이 뜻하는 바 세상을 살리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저급한 동기로 주님을 찾아와 왕으로 영접한 들, 그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그리스도

d요한복음 6장 16 – 21절
갈릴리 바다 위를 걷는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마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이미 어두웠을 때 배를 타고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는 중 큰 바람을 만나 어려움을 겪던 중,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모르고 두려워 하였지만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듣고 기뻐 영접하니 곧 목적지에 도달하였다고 간단히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초점은 1500년 전 출애굽 떄의 사건을 배경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같이, 제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세찬 세파에 흔들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도우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격려하고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 처한 교회의 경우 특히 그러합니다. 기독교가 공인된 AD313년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무려 250년 간 로마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무서운 핍박과 따돌림 고난 가운데 로마 교회는 땅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200년이 넘는 기간을 땅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실상 초대 교부 이래로 수 많은 설교가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세상의 권력과 풍파에 시달리는 연약한 교회와 이를 도우시는 주님의 기적의 손길을 볼 수 있다고 설교해 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늘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과 풍랑으로부터 제자들을 구원하여 안전하게 목적지 가버나움에 도착한들, 그들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사건과 홍해의 기적을 통해 구원받은 이스라엘 모든 무리가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주님 친히 이 죄를 당신의 몸에 걸머지고 모두 청산하여야 비로서 심판의 폭풍우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을 죄와 심판의 갈고리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지셔야 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왕좌에 올라가시는 전투였고, 방법이었습니다. 만약 십자가 없이 죽으셔서 부활하신들 당신의 백성들을 죄와 심판에서 건지실 수가 없는 무력한 그리스도요, 백성이 없는 왕이실 뿐입니다. 당연히 이런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그분의 백성들의 삶은 사랑의 열매가 가득찰 수밖에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4)


요한복음 6장 1 – 15절
오병이어의 표적이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돌보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만 한다 교훈입니다.
전자와 관련하여 주님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명령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 – 직장, 건강, 성공, 명예, 음식 등 – 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 너희 천부께서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 부엌에 채워주신다” 이 약속을 오늘 본문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즉 바쁜 삶의 일상을 잠시 버려두고 말씀을 듣기 위해 멀리까지 따라와서 오랜시간 들은 2만명의 청중들에게 도시락을 공급하심으로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원동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왕으로 옹립하려는 군중들을 흩으시고 산으로 홀로 떠나가신 모습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그 목적이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일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여야만 그 속에 불의가 없습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거절하신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와 환경이 되었다고 판단하시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어 시장한 2만명의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자신의 세상적인 입지를 굳히려는 유혹은 버리셨습니다. 우리 삶에 간직해야 할 모범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무슨 기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고,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때, 보내신 분의 영광만을 구하려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3)

요한복음 6장 1-15절
 80억 명의 지혜를 다 모아도 쌀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벼는  땅 물과 햇빛 그리고 바람만 있으면 놀랍게도 맛있는 쌀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아무리 땅에 서 있고 물을 마시고 햇빛을 쐬도 쌀은 커녕 오히려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을 뿐이니 아무 의식도 없는 벼는 이미 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땅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란 늘 하나님께서 식물이나 물고기들이나 포도나무 등을 통해 공급해주시던 밀, 보리, 물고기, 포도, 무화과 등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나 당신의 아들을 통해 직접 만들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이 늘 베플어졌다면, 사람들은 의례 그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기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희소성 그것이 기적의 요체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40년 동안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의례 내려오는 만나 무엇이 그렇게 신기해! 그래서 만나에 질렸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며 오이도 호박도 부추 마늘도 없이 만나만 있는 우리는 너무나 불쌍하다고 울었습니다. 주님 역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오직 두 번만 행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죽고 부활하신 뒤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존재를 섭리 가운데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들 역시 신자들만 알도록 암암리에 베풀고 계십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 오병이어를 통해 갈비나 불고기로 만들어 주지 않으신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의 노동을 요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힘든 노동이야말로 교만한 우리를 변화시키는 신성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삶의 본질적인 요소인 ‘불안’을 누구나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겪고 함께 노동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몸으로 체득해야 비로서 온전한 제사장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것을 주님께 드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실천되도록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 6장 1-15절
사도 요한은 유월절을 다시 언급하면서 요한복음 전체가 나아가는 구성 즉 플롯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시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로 가시는 그 길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왕으로 좌정하시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이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 역사는 당신을 믿는 백성들을 하나 하나 죄와 사망 그리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구원하시는  구속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구속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과 함께 일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광야에 모인 이만 명에 이르는 군중들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요청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저녁 그리고 빈들에 가진 것은 보리 떡 5개와 생선 두 마리!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를 아시고도 주님은 제자들이 먼저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해야만 합니다. 소망은 우리가 만들어 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으로 만약 우리의 힘이 다하면 그때 주님은 그 능력의 손을 펼치사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시기 위해 천지를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창조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