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8:12-20절
AD29년 10월 초 유대인의 명절인 장막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그 빛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장막절이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장막절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로서 여인의 뜰에서 7일 동안 매일 저녁 큰 횃불 4개를 켜놓고 유대 남녀는 노래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뻐한들 이들은 범죄 때문에 이방민족의 지배하에 있었고,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유대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구원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물리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즉 인류의 불순종의 벌을 담당하고 하나님께 순종의 길을 걷도록 빛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심으로 땅끝까지 구원하실 것을 이사야는 벌써 예언하고 있습니다(사49:6). 그것은 단순히 유대민족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온 세상의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 장막절 후 6개월이 지나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이어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해 10흘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님은 불순종하는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역사하시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창조된 인류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리스도의 속죄가 사실이었음을 믿고 주님께 돌아오고 있으며, 마지막 날 이들은 부활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해 포도와 올리브의 열매를 거두는 장막절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8장 12-20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기 6개월 전 가을에 유대인의 명절 중 하나인 장막절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축제는 약 1480년 전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머무를 때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축제였습니다. 이 축제의 행사 중 하나로 여인의 뜰에 큰 횃불을 4개를 켜놓고 매일 저녁 남녀가 춤과 노래로 구원의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횃불이 켜진 어느 저녁으로 판단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오는 13개의 나팔모양 헌금함 앞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은 인도하셨던 사실을 회상시키면서, 당신이 바로 불기둥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유대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출애굽 당시 애굽 지역에서 시내 광야로 지역만 이동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분은 세상의 빛으로서 어두움의 근본인 마귀들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와 사망로부터 구원하여 생명의 나라로 옮기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본받아 살면서 섬기는 삶으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요12:24-26). 그럼으로써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양한 반응들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40 – 52절
장막절 중간에 성전에 오르셔서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리스도로서, 당신을 믿는 자는 구약에 약속된 생명의 강물을 먹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외침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져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맞는지 여부를 확실히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요한은 50년 전을 회고하면서 오늘 본문의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될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삼고 살아가면 삶은 매우 의미가 있을 것은 틀림없다고 하여도, 지금도 살아계셔서 만유를 통치하신다고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여러 간증도 하고, 능력도 선보이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분을 만나기 전에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고 삶이 거룩하게 변하여야만 합니다. 이를 담당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죄의 문제를 지적하시고, 예수님을 믿어 의를 덧입으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마귀는 이미 심판을 받아 쫓겨났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내가 변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며, 그렇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약속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37-39절
AD29년 10월 초 장막절이 끝날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당신이 생수의 강의 공급자라는 사실을 외치셨습니다. 그 생수의 강은 다름 아닌 그분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대속의 수단을 마련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예수님의 백성들에게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께서 강림하셔야만 하겠습니까?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과 계획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속죄를 이루셔서 구원을 받을 방법을 마련하시고, 성령께서는 확보된 구원을 죄인들에게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최고 목적은 각 사람이 돌이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장막절 외침 후 약 8개월이 지나 AD30년 5월 경 돌아오는 칠칠절 즉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사 교회를 창설하시고 세상의 죄악됨과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악됨에 대하여 깨진 심령을 가진 사람들만 예수 앞에 와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으며, 성령님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충만과 권능의 느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 주님의 뜻을 행하여 여러 선한 일을 많이 이루지만 정작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표적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31-36절
장막절 중간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신 예수님을 보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민들이나 유대 당국자들과 달리 분류되는 군중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과 믿음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가져 예수를 따르는 부류, 표적을 보고 믿으나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부류, 표적을 보고 오히려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는 부류, 표적이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류 등입니다. 그러나 표적을 통한 믿음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적 자체 보다는 표적이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의 참된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표적들마다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요한복음 5장에서 보여주신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건전하게 하신 표적을 생각해 보자면, 이 사건은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하던 치유를 행하사 안식을 주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요 안식일의 주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들과 이에 따른 강화를 듣고도 적대시 하는 마음을 오히려 굳히자, 이들을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떠나심은 바로 오늘 설교를 들은 바로 그 유대인들에 잡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불과 6개월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떠나신다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서로 자문자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영적인 상태는 사람이 다녀서 반질반질하고 굳은 길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은 싹 틀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과 그리스도
요한복음7:25-30절
율법의 성취와 그리스도(2)
요한복음 7:18-24절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의 시작은 안식일 계명의 준수 여부였습니다. 주님은 여러 경우에 안식일이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불치의 질병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기 위해 200페이지나 되는 책이 만들어져 있으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숨만 쉬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선을 포함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문자적으로 계명을 지켰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의 더 중한 바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저버림으로 오히려 율법을 어겼다는데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는 모세율법 자체에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을 해설하여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한 미쉬나에는 저촉되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바로 미쉬나에 따른 규정을 예수님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여 왔는바, 할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미쉬나에서 금지하는 여러 규정들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할례가 안식일 규정 위에 있다고 해석하여 유대인들은 할례를 안식일에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겠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한편,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동안이나 불치의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은 아무리 경건하여도 그런 안식을 못 누린다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 돌보아 주셔야 한다는 언약의 취지는 무색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심으로 이 사람의 병을 치유하여 안식을 누리게 함으로, 할례의 언약은 물론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를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이는 영생에 대한 좋은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성취와 그리스도(1)
요한복음 19-24절
지금 초막절 성전에 모여 있는 유대 지도층과 수 많은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된 이유가 그들이 모세율법에 불순종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는 없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모세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들이 모세율법에 불순종한다고 예수께서 질타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논지는 첫째, 그들은 서로 간에 모세율법을 잘 수행하였다는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꽉 들어찼지, 유일하신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하는 참된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 둘째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을 죽이려는 증오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마귀의 증오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마귀의 자식들임이 뒤에 밝혀질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병자의 육신을 건전하게 하심으로 일하지 말하는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불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5:17). 그런 발단이 된 것이 바로 요한복음 5장에서 성전 북쪽성 바깥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이나 누워 있던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자, 자신을 둘러싼 같은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벌써 일년도 더 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이나 안식일 규정이 적용되지, 산짐승, 들소 등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참새가 안식일에 먹을 것을 찾아 다닌들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한 하나님 역시 안식일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우주는 존재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 안식일 규정은 적용되기도 하고 적용되지 않기도 하는 것은 그분이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는 안식일이 와도 안식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인간의 생명을 보전하시는 일을 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십계명의 구성이 이렇게 깊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마음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 7장16-18절
AD29년 10월 초 장막절 중간이 되어 돌연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시는 30 초반의 갈릴리의 청년과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율법사 등을 포함한 유대 전 지식층 사이에 관전자인 대중을 앞에 두고 흥미진진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싸움은개인이죽느냐사느냐정도가아니라, 민족의운명이달려있는토론이고, 더나아가각개인의영원한운명이달려있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들이 매일 암송하는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메시야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면서, 엄청난 구원의 표적들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에 대한 불순종 때문에 멸망받았는데, 하물며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어도, 창조주에 대한 순종을 거부한다면 그 벌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예수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유대인들은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표적이외에도, 하나님 중심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가르친 교훈을 행하면 알 수 있다고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분의 교훈을 순종하면 분별력이 얻어집니다. 그것은 좋은 요리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믿고 사랑하는 자만이 그분의 교훈을 실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자아중심적인 인간본성과는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어서, 주님이 마지막 심판의 날 모든 자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