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5/6-10)


시련과 기쁨
야고보서1:2절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새번역)

야고보서는 신앙의 박해로 각 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크리스찬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참조 행8:1-3). 사도는 그런 어려움을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인내 없는 믿음은 불량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합격된 믿음을 보면 항상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인내를 만들어 내려면 시험이라는 원재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련 중 믿음이 없다면, 염려라는 독소만 생겨 삶을 뒤흔들고야 맙니다. 인내를 온전히 갖춘 신앙 인격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될 것입니다(12). 따라서, 시험이 강도처럼 들이 닥칠 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지혜입니다. 한편,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막상 여러 가지 시험이 들이닥치면 걱정 근심에 휩싸이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때 야고보서는 ‘시험을 이길 지혜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는데(5), 이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능력입니다. 구할 때 풍성히 주실 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6-8) 왜냐하면 반드시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고 있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사역). 사도 바울 역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감사가 여기서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서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으로 염려를 극복하게 되면(빌4:6-7), 하나님의 평강이 늘 우리 마음과 삶 가운데 머물도록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환경을 구축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사도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4:8,9). 첫째, 주님 앞에서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8). 사도가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4:8,쉬운성경)라고 가르친 이유입니다. 둘째, 그 생각을 행하여야 합니다(9). 사도는 빌립보에 머물러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하는데, 바울의 그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고전11:1).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어려움에 처하여 기도하고 응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평강을 맛 보면, 이웃과 다툴 이유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능력의 근원이 우리 안에 와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약4:2,3). 그래서 전에는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다면, 이제는 남을 배려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연습합니다. 그 와중에 사람의 칭찬을 받을 만한 탁월함(기림)을 보여주었더라도, 겸손하게 되는 것은 “만약 주님께서 그런 기회와 재주를 타인에게 주셨다면, 나보다 훨씬 나은 성과가 나왔을 것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8). 자연히 다툼은 사라지는데, 이것이 성령 충만한 개인·가정·교회·직장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새번역)


잠언29장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새번역)

이 잠언은 피조물 인간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한다’를 직역하면 ‘사람의 공포’이며, ‘의지한다’의 원어의 뜻은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이고, ‘안전하다’는 문자적으로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놓여지다’는 의미입니다. 25절 전단의 좋은 예가 24절에 나온 진실치 못한 증인입니다. 24절 은 재물을 탐하여 도둑과 한 패거리가 된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맹세에도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25절은 그 이유와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의 위증 이유는 함께 한 도둑 패거리의 보복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나, 그 두려움 때문에 침묵한 결과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이는 그 도둑 패거리들이 증거를 없애고자 해를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 영화의 흔한 소재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주님을 두려워 하여 진실된 증언을 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한다면, 주님은 섭리 가운데 혹은 국가의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증인을 보호함으로 안전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25절 후단의 예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노함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고 풀무와 사자굴에 던져져 죽기를 선택하였지만, 모두 주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안전히 구출 받았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지켜주심으로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함에 감사드려야 합니다(요일5:18) 다만,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요구한 바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9장26절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26절은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일의 결정권자 되심을 밝힙니다(잠언21:1). 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고 선언한 25절의 좋은 예시이자 확실한 근거입니다. 물론 26절이 법적 수단을 통한 구제를 금하라는 취지는 아닙니다. 다만, 주님에 대한 순종 없이 통치자의 환심만을 사려는 세태를 경고합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많은 사람들이 통치자의 얼굴을 구한다’입니다.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존경과 동시에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을 지적하는데, 사람의 일과 재판의 결정이 권세자에게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에 직면하면 통상 취하는 행동양식이지만, 후단을 보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후단을 직역하면 “각 사람에 대한 재판(판결)은 주님께로부터 온다”입니다. 사람의 일이 외형상 통치자나 재판관들의 결정으로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의인에게는 주님의 변호하심이 있고, 또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분이 정의 실현의 최종 책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의 얼굴을 구하다가,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게 된 사건은 그 예입니다. 하만이 밤에 왕궁으로 가는 그시각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듣다가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선행을 알게 되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37:11).

잠언29장27절
“의인은 불의한 사람을 싫어하고, 악인은 정직한 사람을 싫어한다.”(새번역)

28:1 – 29:27절은 ‘의인과 악인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결과’를 고찰하면서, 27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의인과 악인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싫어한다.’ 전단의 ‘불의한 사람’이란 범죄하고 사법제도를 남용하는 자들이며, 후단의 ‘정직한 사람’이란 타인의 사회적, 법률적, 경제적 권리를 보호하려고 확립하신 하나님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동쪽으로 이동할 때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신2장). 에돔 땅 와디 푸논을 통하면(15킬로) 쉽게 ‘왕의 대로’에 이르고, 요단 동쪽 모압평지에 집결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남동쪽으로 3백킬로미터를 돌아갑니다. “이 지역은 에서 자손에게 주었으니 전쟁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두 번에 걸친 모세의 간청에도 에돔 왕은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먼 길에 지친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불뱀들이 나타나고, 회개하는 자들을 위해 놋뱀이 만들어집니다(민21:4-9). 광야는 이 세상을,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요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간직한 신자의 삶을 각각 상징합니다. 의인과 악인이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는, 의인은 하나님과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나, 악인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갈등은 근본적인 문제요, 열정의 문제이다. 따라서 타협될 수 없고 서로 싫어하는 마음을 완화시킬 수 없다”(말빔). 잠언은 의인의 이런 비관용적 자세를 칭찬하면서, 그들의 보호자는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주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잠언18:10,새번역)

매일묵상(2024/4/29 – 5/3)

말씀과 믿음 그리고 평안
마태복음6: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주기도문의 이 대목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들을 그날 그날 공급해 주실 것을 요청하라는 내용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신자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걱정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광야로 인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 그 날 먹을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40년 뒤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길갈에 이르러 그 땅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 만나는 그쳤습니다(수5:12). 범죄한 아담에게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선고하신 뒤, 아담의 모든 후손(남자)은 일하여 가정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나’는 광야라는 예외적 상황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에 대해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합니다. 첫째, 무관심한 태도 – 자신의 재력과 능력으로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지만, ‘양식 bread’은 병, 근심, 고난 등 모든 필요를 함축하기에, 결핍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마법적 신앙- 요술 주문처럼 보는 태도로, 복권을 사고는 왜 당첨을 시켜주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사람들이죠! 본문이 위치한 문맥과 취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보물과 같이 간직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며, 이는 하나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성취의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지만, 온갖 풍파가 닥쳐도 기도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마음에 늘 평안이 있는 것이 다릅니다. 경건의 훈련은 여기서 나옵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믿음의 추론
마태복음6장24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6:24-34절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으니(24),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25). 그 근거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주인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염려해야 합니다. 주기도문 순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6:24-34)은 주기도문의 해설판이며, 주님은 믿음에 근거한 이성적 추론을 전개합니다. “하찮은 미물인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그처럼 먹을 것을 주시고, 입혀주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나라와 의를 염려하고 먼저 구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을 어떻게 돌보시지 않겠는가?” 누가복음은 한 발 더나아가,  “그런 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아라”(눅12:29)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세상 백성이 구하려고 달려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입니다(눅12:30).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차이는 노력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비행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따라 비행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좌표를 따라 비행하는 연습을 합니다. 평시에는 별 차이 없어도, 인생의 밤이 오면, 하나님을 주인 삼은 제자들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말씀을 따라 안전히 비행합니다. 조종사가 계기판만 보고 비행하는 법을 배우듯이(계기비행), 제자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믿음의 지혜).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전7:12,새번역).

잠언29장22절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기를 잘하는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새번역)

본절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자기 절제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의 원어 ‘이쉬 아프’의 직역은 ‘분노의 사람’으로, 상습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화를 절제하지 못하면 다툼을 일으키고 죄를 많이 짓는다고 선포합니다. ‘다툼’이란 인간 관계에서 야기되는 분쟁을, ‘죄를 짓는다’는 표현은 그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실패까지 내포합니다. 이는 범죄란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율법)을 넘는 모든 행위를 일컫기 때문입니다. 왜 분노하게 될까요? 원인은 다양하지만, 상대방의 도를 넘는 행동, 급한 성격, 교만한 마음 등이 주요 동인이라 보여집니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이분이 무예와 힘이 뛰어나서, 직선적으로 사건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자로가 벼슬하는 위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공자는 자로의 급한 성격과 의기를 알기 때문에 비명횡사할 것을 예견합니다(논어). 따라서 공자는 평소에 “정직함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급하게 되는 것이다.”며 자로를 훈계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김지현 씨의 조언입니다. “일단 멈추자. 화가 났을 때는 일단 멈추어야 한다. 분노의 감정은 파도가 한번 밀려왔다 가는 정도의 시간 안에 절정에 달했다가 내려오게 된다. 그 고비만 넘기면 힘들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쥐어짤 수 있고 해결이 가능해진다. 화장실이든 욕실이든 차고든, 5분 정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옮기는 게 좋다”(오마이뉴스, 자녀양육칼럼).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잠언29장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3절은 ‘교만’과 ‘겸손’의 마음 및 각 결과를 비교하여 교훈합니다. ‘절제와 양육’이란 문맥을 감안하면, 교만하더라도 정당한 꾸지람, 징계 등을 겸허히 받아들일 경우, 높아져 영예롭게 될 수 있음을 함축합니다. ‘교만, pride’의 원어는 ‘높다, 솟아오르다’란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며, 겸손은 ‘낮음’을 뜻합니다. 교만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 재능, 힘, 지혜를 믿고 상대를 내려다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 스미스와 해밀톤은 ‘교만은 스스로 충분함을 느끼고, 겸손을 버린 뒤 마음을 높여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립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할 당위성을 거부하며, 이익추구의 사회적 한계인 도덕과 공동체 규범을 무시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혹은 공동체에 의해 낮아지게 됩니다(사회적 불명예, 재산의 상실, 범죄에 대한 형벌 등). 반면, ‘마음이 겸손하면’ 타인과 잘 지내고, 좋은 사회관계를 형성함으로 좀 더 많은 성공 기회를 잡게 됩니다. 또한 겸손한 자의 마음은 화평한데,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게 충실함으로, 맡겨진 일에 능숙하게 되어, 천한 자가 아니라 왕 앞에 서는 영예를 얻습니다. 예외는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의 법칙입니다. 전단의 예는 ‘자식인체 하는 종’(29:21)이며, 후단의 예는 ‘징계를 받아 행동을 고친 자식’(29:17)입니다. 신자는 축복을 받았을 때 본문을 마음에 새기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19).

잠언29장24절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본절은 재물보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는 자의 말로를 보여줍니다. 그는 재물을 탐하다가 도둑의 재물에 이르고, 마침내 위증죄까지 범하게 되어 불안 속에 떨며 살아갑니다. 전단에서 ‘도둑과 짝하는 자’의 직역은 ‘도둑과 함께 나누는 자’로서, 도둑의 행동에 동참하고 재물을 나누는 모습이고,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란  ‘자기의 목숨 혹은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증인 선서 후 증인이 된 자의 책임과 벌칙을 규정한 레위기(5:1)가 그 배경인데, 그는 도둑과 한 패여서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재물을 중하게 여기는 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재물에 접근하고자 하나, 이는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감찰하고 계셔서 그 죄가 폭로되든지 늦어도 죽은 후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후자는 더 나쁜 경우인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둑’이란 단순히 절도죄 등을 범한 자가 아니라 악행을 일삼는 죄인들을 총칭한다고 본다면, 본 잠언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넘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관철하려는 인간의 본질적 죄에도 적용됩니다. 이 경우, ‘재물이냐 하나님이냐’에서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로 범위를 넓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리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세상의 악한 정체를 폭로하심으로, 속고 있던 인간들이 마음의 주인을 세상(사탄)에서 하나님으로 바꾸게 하는 계시의 사건이요(요12:30), 회개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길을 여신 은혜의 사건입니다(요14:6).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1).

매일묵상(2024/4/22-26)


기도하고 감사하라
빌립보서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며 살아갈 때 종종 ‘염려’가 침입하곤 합니다. 이때 사도가 주는 두 번째 처방은, ‘기도하고 감사하라’입니다. 기도 그것도 감사를 동반한 기도가 염려를 치료합니다. 먼저, 6절의 시작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염려가 들어 왔을 때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 가짐’이 중요한데, 주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쫓는 애굽 군대와 가로막은 홍해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오늘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보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죠! 다음으로, 본문은 ‘하나님께 아뢰라(기도)’고 권면하는데, 그 기도는 “감사”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신 것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게 되는데, 바로 그 감사의 마음입니다. 또,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아닙니까?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문제를 맡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편, 심리학자는 자신을 잘 아는 동료나 가족에게 염려에 관해 대화를 나누라고 조언하는데,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면, 응답이 오고 있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당도할 때까지 마음의 긴장은 믿음의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 완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표준새번역)

하나님의 초월적 평강
빌립보서4:7절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새번역)

본절은 감사와 함께 아뢴다면, 그 결과 “모든 지각(이해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그 평강(에이레네)”이 군사처럼 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그 평강”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주님의 초자연적 평강으로, 염려를 쫓아내고 강물처럼 우리 마음을 점령합니다. 그 순간은 진짜 “강 같은 평화입니다.” 재수시절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염려되어 기도하자 초월적 평강이 주어졌고 충만한 기쁨으로 버스 타고 집에 가는 중 마귀는 온갖 가정, 염려, 근심을 다 집어 넣었습니다. 저는 그것들과 투쟁으로 받았던 평강이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당면 문제 해결이 중요하나, 하나님의 뜻은 좀 더 높습니다. 하나님은 기도 전에 그 해법을 다 준비하셨습니다(마6:8-9).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인격을 갖추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된 세상에 고난과 선한 투쟁 없이 어떻게 그분의 아들의 믿음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응답을 자꾸 받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한 두번 경험한 뒤는 믿음의 추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손의 부친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후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는다’는 공포에 떨었으나, 그 아내는 그렇지 않음을 믿음의 추론 3가지를 들고 안심시켰습니다.(삿13:2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9장19절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19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합당한 조치(통제)는, 자녀, 백성 그리고 자신은 물론, 종에게도 필요함을 밝힙니다. 전단은 “종은 말로는 결코 교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치지 아니한다’의 원문은 가장 강한 부정어와 미완료 동사를 결합시켜, ‘절대로 아니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더구나, 일반어순과 달리, 솔로몬은 ‘말로만 하면’(전치사구)을 문장 서두에 두어, 부정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즉, ‘말만 가지고서’는 종들은 절대로 교정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솔로몬은 경험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잠언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아는 것은 곧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묘사된 종은 어리석어 알지만 행하지 않기에, 물리적 징계를 초래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고대 지혜문학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로 ‘회초리가 주인에게서 멀면 종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파피루스인싱거)는 격언도 그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징계를 가해야만 순종하는 종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바로 순종하라는 교훈을 내포합니다(신10:16,마음의 할례). 다락방 강화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로 여기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벗으로 여기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들으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열매를 맺고 그 맺은 열매가 항상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15:16). 주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언22:15,표준새번역)

잠언29장20절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본절은 22절과 함께 ‘자기통제력’을 위한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충동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걱정하는데, 그보다 미련한 자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이 조급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가 초래하는 도덕적 사회적 파장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바보이지요! ‘말’의 원어는 ‘따바르’이며, ‘말’ ‘사건, 일, 행적’ 등을 나타냅니다. 또, ‘조급한’에 해당하는 ‘아츠’는 ‘경솔하고 성급한 행동이나 말’을 지칭합니다. ‘조급함’의 원인은 자제심의 결여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제자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그분의 뜻에 언행심사 일체를 맞추는 것이 으뜸가는 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바보의 말은 이런 생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 천하에 드러내게 되고, 그것도 성급히 또 경솔하게 쏟아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 (28:20)나, ‘발이 급하여 잘못 가는 사람’(19:2)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원할 때 원하는 것을, 그 방법까지 합리적으로 계산한 뒤, 비로서 말과 행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후단은, 그가 바보보다 교정받기 힘들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바보는 자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다루기 힘들지만, 불경건한 자는 탐욕에 지배당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도덕조차 백안시 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는 그런 자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와 함께 “가장 최악의 바보”로 분류됩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언26:12).

잠언29장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곱게 양육하다’는 말은 ‘파나크’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오직 한 번만 등장하기에 그 의미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학자들은 ‘지나친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운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한편, ‘자식’이란 말의 원어 ‘마논’도 그와 같아, ‘풍족하게 자라 버릇없이 구는 자식’을 의미한다고 추측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이 어리다고 응석을 받아 주면 자라서 버릇없이 군다’고 한 공동번역처럼, 귀엽다고 종을 지나친 사랑으로 키우면 결국 예의도 모르는 종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사랑이나 호의를 받는다면 좋은 일이나, 그가 겸손하고 성실함을 유지할 때만 축복입니다. 만약 주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서 분수를 모르고 자식처럼 행세하면, 주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땅을 뒤흔들고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사건으로, ‘종이 임금이 되고 바보가 부자 되고 꺼림칙한 여자가 시집가고 계집종이 안주인 자리를 빼앗는 것’을 언급합니다(30:21-23,공동번역). 그러나 이런 일들은 종종 일어나는데,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죄의 속성’(원죄)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성공, 축복, 은혜를 위해서는 밤을 새워 부르짖으나, 겸손을 위해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징계로 바로잡지 않으면 은혜와 사랑이 오히려 심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극히 큰 계시와 능력을 부여한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둔 이유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매일묵상(2024/4/15-19)

빌립보서1: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진지 약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초대 목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의원 누가가 유력합니다. 누가는 빌립보까지는 바울의 전도여행의 일원(2차)이어서,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썼고(행16:10-40),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행17:1)부터 ‘그들’로 적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교에 입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행16:14). 이때 전도는 바울이 하나, 마음을 여신 분은 주님임을 밝혀, 복음 전도와 관련한 많은 함의를 던져줍니다. 이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하고, 옥터가 흔들리는 기적과 함께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합니다. 그 후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 세워졌고, 누가는 목회를 위해 남겨졌다가, 6년 후 사도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의 끝무렵 다시 합류합니다(행20:4).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가이샤라 마르티나로 압송되어 가택 연금(2년)을 당합니다. 이때 빌립보 교회가 보낸 헌금이 도착하였고, 빌립보서는 그 답신입니다(AD60년경). 편지에서 기약 없는 구금과 많은 적대자들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사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체포 당하기 직전에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신 주님을 배운 그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한 삶
빌립보서4:4,5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립보서4:4-7절은 우리의 가정, 직장, 교회 등 모든 삶에서 존재하는 염려스러운 상황을 이길 비결을 다룹니다. 우리는 환난, 곤고함,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혹은 칼이라고 표현될 정도의 상황을 직면할 경우도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평화스럽고 정상적인 삶을 적군처럼 뚫고 들어오기에 기쁨도 사라지고, 평화와 감사도 없어져, 마치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역시 외부의 위협(1:27), 교회 내의 불화(4:1-2), 궁핍에 대한 두려움(4:19)을 가졌고, 몇몇은 겸손한 태도도 결여되었습니다(2:3,4). 교인들의 삶을 잘 아는 바울은 2가지 대처법을 말합니다. 먼저, 사도는 항상 기뻐하며 관용(사랑)을 베풀라- 4절은 ‘기뻐하라’-는 명령을 반복합니다. 기쁨은 언제나 그리스도인 삶의 특징이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죄의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하시고, 부활하여 사망을 이기신 이래,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역사’(살전1:3)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이는 주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5). 따라서, 곤란에 닥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갑자기 평안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계명에 주목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여 관용을 베풀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사도는 얼마 후,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 시 박해를 받아 아덴으로 피신하였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명령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잠언29장16절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이 잠언의 전단의 직역은, “악인이 많아지면 반역도 많아진다”입니다. 악인이 전면에 나서게 될 때, 사회에는 광범위한 도덕적 부패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많아진다’는 말은 수적인 증가를 뜻하지만, 악인의 세력도 점점 강해짐을 내포합니다. 후단은 바른 길을 걷는 사람들, 즉 의인은 악인들의 멸망을 본다고 말함으로써, 악인의 권세는 항상 일시적임을 지적합니다. 결국 의인이 승리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클리포드의 말입니다: “악인이 많아지면 타인에 대한 범죄가 증가할 것이고, 이는 그들의 멸망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악한 세력의 증가 그 자체는 그들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범죄는 사회 불안과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옳은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잠언은 악인에게, “네가 지금은 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며 경고하는 일면, 불법자가 판을 치는 시기에 의인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 예는, 노아의 홍수입니다. 아담의 타락 후, 메시야를 기다리라는 약속이 아담에게 주어졌고(창3:15), 아담은 그 믿음으로 천년을 살아가는 동안, 의인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땅에는 폭력이 충만하였으며, 심지어 네피림(타락한 자)까지 살았다고 증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셨으며, 의인 노아는 그들의 멸망을 목격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한 바벨론 제국의 죄악을 신속히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를 묻자, 주님은“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하신 답변을 유의해야 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잠언29장17절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이 잠언은 15절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훈육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징계하라’의 원어 ‘얏쎄르’는 ‘훈계하라, 가르치라, 징벌하라’는 의미이며, 물리적인 수단이 포함된 적극적인 훈계를 행하여 자녀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첫째, ‘너를 펑안하게 한다.’ 잘 양육된 자녀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모의 삶에 평안을 가져옵니다. 부모공경 계명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이 계명을 배우지 못한 자녀는 그 축복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둘째,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기쁨’의 원어는 ‘진미, 진수성찬’을 의미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기쁘듯이 효를 행하는 자녀가 주는 기쁨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자녀의 성공적인 삶은 물론, 그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필요시 징계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회초리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잘못이나 실수를 보면서도 ‘뭐 이깟 일로’ 혹은 ‘아직 어리니까 좀더 큰 다음에’라는 등의 이유로 징계를 꺼리곤 합니다. 그러나 아이라도 그 안에는 이기심과 질투라는 죄의 씨가 심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원죄). 훈육의 의무를 게을리 하자,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과 왕 다윗의 세 아들은 모두 비명횡사하였고,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시고, 또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편126:5)

잠언29장18절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이 잠언은 국운의 성쇠 여부를 율법과 연관하여 파악함으로, 국가와 공동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교육의 중요성을 깨우칩니다. ‘묵시’의 원어 ‘하존’은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계시(말씀)를 지혜의 측면에서 보면,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11:14a)는 교훈이 나옵니다. 개인, 공동체, 기업, 그리고 국가는 모두 달성해야 할 ‘목적-goal’이 지도자에 의해 제시되고, 그에 합당한 정책과 계획이 수립되고 집행되어야 복된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 반대의 사회는 혼란 그 자체이며,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로 묘사되었습니다. ‘방자히 행하다’의 원어 ‘파라’는 ‘굴레를 벗겨내고 느슨하게 한다’는 뜻으로, 전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도자가 없을 때, 백성들은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도자 모세가 두 돌판을 받으러 올라가자, 산 밑의 백성들은 아론을 협박하여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추며 우상숭배로 나갔습니다(출32:25). 이에 반하여, 후단은 율법을 지켜 행하면 질서와 번영이 찾아온다고 교훈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잠언은 지혜의 측면에서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잠11:14b)고 선포합니다.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이나 세종대왕 시대의 조선이 그렇습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의 대한민국도 같기 때문에, 국가가 바른 정책, 법률, 정치, 경제, 그리고 외교적 역량을 갖추도록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매일묵상(2024/4/8-1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어거스틴이 보기에 어머니 모니카는 온유한 마음을 바탕으로 서로 생각이 다르거나 불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목을 일구어 내는 큰 은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원수는 없고 친구만 있는 자리에서는, 그 원수에 대한 증오심으로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동원해서 독설을 퍼붓고 악담을 쏟아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악담을 듣게 될 때, 그들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말이외에는 어떤 말도 당사자에게 절대 옳기지 않았다는데, 사실 이런 분은 매우 드물다 할 수 있습니다. 1700년 전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원수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하여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내뱉은 말들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옮길 뿐더러 심지어 하지도 않은 말들을 덧붙이는 사람들을 부지기수로 많이 보았기에 어머니의 이런 행동은 지금의 나에게는 결코 결코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악담을 삼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선한 말을 해서 사람들의 증오심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 것이 마땅한데 어머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면서, 어거스틴은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주님은 어머니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학교에서 어머니를 붙들고 가르치신 선생이셨습니다” 중생의 결과 성령께서 모니카의 마음에 오셔서 가르치심으로 주님을 본받아 행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이 심으신 의의 나무’입니다(사61:3)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8)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모니카는 말이 아니라 행실을 통해 일생 남편을 전도하고, 마침내 삶의 끝자락에 선 그를 주님께인도하였습니다. 말씀을 실천한 반석 위에선 믿음의 여인입니다(벧전3:1-6). 또한, 모니카는 교회와 주교들을 잘 섬겼습니다. 어거스틴의 증언입니다: “어머니는 주님의 종들을 섬기는 여종이셨습니다. 어머니를 알게 된 주님의 종들은 한결같이, 어머니의 거룩한 삶의 열매라는 증거를 통해서, 주님이 어머니의 마음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어머니로 말미암아 주님을 크게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며 사랑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니카는 “한 남편의 아내”였고,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를 공경하였으며, 자신의 집안을 경건하게 이끌었으며, “선한 행실의 증거를”를 보였으며, 자녀들이 주님을 떠나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실 때마다 다시 산고를 겪는 것처럼 괴로워하며 양육하였음을 어거스틴은 고백하고, 그녀의 마지막을 기록합니다. “어머니가 주님 안에서 잠드시기 전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세례를 받게 하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종들’이라 불릴 수 있게 된 우리 모두를, 자녀가 부모를 섬기듯 그렇게 섬기셨습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과 함께 로마에서 귀국하던 중 세상을 떠납니다(54세). 모니카의 삶은 주님의 뜻을 행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매들은 그 아들 어거스틴에 의해 세상에 밝히 드러나 우리의 귀감이 됩니다.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편37:6)

잠언29:13절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표면적으로 보면, 부자-특히 재물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그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삶의 격차는 매우 커서, 부자는 안락하고 사치스럽게 살지만, 가난한 자들은 더럽고 궁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 잠언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선포합니다. 잠언의 제자들이 지혜를 얻는 대목입니다. 만약, 주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자연히 상호존중, 배려의 태도를 갖게 되어 그에 합당한 질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는 세상 지혜와의 차이입니다. 13절은 22:2절에 주어진 교훈의 변형입니다. 다만, ‘부자와 가난한 자”(22:2) 대신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로 바꾸어 공의를 근거한 통치질서를 다루는 문맥(12-14)에 적합하도록 맞추었습니다. ‘눈에 빛을 주신다’는 말은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제유법)입니다. 그러나 ‘포악한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부자는 포악한 자로 변하여 법률과 제도를 통해 가난한 자를 수탈하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포악한 자는 결국 정당한 심판을 받게 되지만, 그 전에는 ‘압제하는 자와 압제 당하는 자’ 모두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수혜자입니다(마5:44-45). 만약 포악한 자가 자신의 좋은 삶은 오직 하나님의 관용에 기인함을 안다면, 그는 압제를 버리고, 가난한 자와 가치와 몫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로써, 세리장 삭개오가 회개한 예가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는 포악한 자를 경멸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그들조차 심판이 임하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받고 있음을 깨닫고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잠언29:14절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12-14절의 주제는 공의에 근거한 통치 질서의 필요성이며, 솔로몬은 ‘가난한 자를 성실하게 판단하는’ 통치자의 긍정적 이미지(14)를,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통치자’(12절)의 부정적 모습과 병치함으로 교훈의 효과를 극대화시켰습니다. ‘신원(伸寃)’에 해당하는 원문은 재판한다는 의미를 갖는 ‘쇼페트’입니다. 이 잠언이 왕의 직무로서 재판이나 판결을 예로 든 것은, 고대에 왕의 주요직무 중 하나가 백성들에 대한 공의로운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본 구절을 통해 사회의 모든 약자를 돌보라고 임명받은 왕에게, 그 임무를 부지런히 수행한다면 강력한 통치질서를 확립하게 됨을 약속합니다. 거짓 증거를 듣는 왕과 대조적으로, 이 현명한 왕은 증인들의 성품을 주의깊게 살펴 정의와 진리를 확립하는 지혜자입니다. 또한, 14절은 ‘포악한 자에게도 빛을 주신다’(13절)는 말이 초래할 수 있는 오해를 없애고, 왕이 힘없는 자들이 압제당하는 현실에 관심을 쏟아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도록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솔로몬 통치 초기에 한 아들을 갖고 서로 다투는 두 창녀의 소송을 성실하게 재판하자 솔로몬의 왕위는 일생 견고하였지만, 통치 말년은 우상숭배라는 거짓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많은 건축과 사치를 위해 무거운 조세와 부역을 백성에게 부과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큰 불만을 갖게 되었고 왕국은 그의 사후 분열되어, 솔로몬은 자신의 잠언을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같이 세상 권세는 일시적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에 좌정하시어 공평과 정의로 영원히 보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편45:6).

잠언29: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5-23절은 하나님의 말씀(모세율법)을 통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대상으로 자녀, 백성, 종을 들면서, 중점은 인간의 죄성 억제입니다. 교육이 죄성을 제거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반복적인 교육은 죄성 억제에 큰 효과가 있습니다. 15절은 본능대로 살아가게 내버려둔 자녀는 하나님이 세우신 도덕질서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그 결과 부모에게 닥쳐오는 불행(욕과 수치)을 지적합니다. 어리석음을 벗어나서 지혜롭게 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교정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종종 ‘채찍과 꾸지람’이 수반되야 합니다. 잠언이 체벌의 필요성을 반복하여 언급한 근거입니다. 만약, 부모가 교정이 힘들어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자녀는 제멋대로 자라나서 가정에 욕을 끼칠 것입니다. 잠언 29장은 3절에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지혜로운 아들을, 15절에서는 ‘어머니’를 부끄럽게 하는 어리석은 아들을 대조시켜, 훈육이란 수고의 열매의 아름다움을 보게 합니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자녀들을 한 번도 꾸짖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도록 하여, 첫째, 둘째, 셋째가 모두 비명횡사하였습니다. 야곱도 12 아들을 낳고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여 그 가정에 근친상간, 집단학살, 질투, 인신매매(요셉), 불효, 속임이란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하여 순종을 배우게 하셨고, 결국 희생할 줄 아는 유다와 용서할 줄 아는 요셉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양육은 쉽지 않으니,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엡6:4,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4/4/1 – 5)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5)- 결혼 생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1700년 전 북아프리카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는 못했습니다. 고백록의 한 대목입니다: “어머니의 경우보다 더 온유하고 점잖은 남편과 같이 살면서도, 남편에게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들어 다니는 부인들도 많았는데…” 모니카는 그런 부인들과 사적으로 대화 시, 남편들의 흉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경우, “혼인 서약을 하고 성혼이 선포된 후에는, 부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종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면서 농담을 섞어 진지하게 훈계한 뒤, 그들의 혀를 꾸짖고, 그렇기 때문에 늘 자신의 처지를 명심하여, 교만해져서 주인에게 대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니카가 충동적으로 충고한 것은 아닙니다. 그 부인들은 모니카의 남편이 성질 사납고 화를 잘 내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 파트리키우스가 자기 아내를 때렸다거나, 가정불화가 단 하루라도 있었다는 소문이 나돈 적도 없었고, 그런 일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어떤 증거도 자신들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놀라워 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인지 넌지시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니카의 비결을 따라 살아간 부인들은 그녀의 말이 맞았음을 확인하고서 감사하였고, 그 비결을 따라 살지 않았던 부인들은 계속해서 남편에게 눌려서 고생하며 괴로운 삶을 살았다고 어거스틴은 기록합니다. 모니카의 비결은 사도들의 가르침(엡5:22-24;벧전3:1-6)을 그대로 실천한 열매로서, 인간 관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주님의 가르침이 해결의 비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6)- 결혼 생활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고백록에서 새삼 느낀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남에 대한 호기심과 수군거림이 존재하며, 특히 여자가 시집 가면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하다고 보여집니다. 인간의 타락을 웅변하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면서 온유한 심령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하시고 이윽고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약3:18). 모니카의 시어머니 역시 악의적인 하녀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듣자, 처음에는 며느리를 좋지 않게 보시고 화를 내었지만, 그녀가 인내와 온유함으로 잘 참아내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자 화가 누그러지셔서, 자기 아들을 불러, 하녀들이 자기와 며느리를 이간질시켜, 가정의 화평을 어지럽혔으니 벌을 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남편 파트리키우스는, 모친의 당부도 있고, 이후 집안 사람들끼지 화목하게 지내게 하려면 적절한 징계를 통해서 가정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뒤, 모친이 지목하였던 하녀들에게 매질을 하였고, 또한 시어머니는 앞으로 자기에게 잘 보이려고 며느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험담을 하면, 이 같은 벌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자 험담이 사라지고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져서, 서로를 위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니, 모니카의 지혜로운 행실은 우리의 가정 생활, 결혼 생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귀감이 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잠언29:10절
“남을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의 생명을 보살펴 준다.”(새번역)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자라도 해치는 자를, ‘흠 없는 사람’이란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흠 없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려고 매우 노력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 전형이 욥입니다. ‘미워하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상대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증오심을 갖는 감정상태로, 실제 공격하여 해를 끼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벨을 질투하여 살해한 가인의 모습입니다(창4:1-8). 이들이 왜 의인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의인의 책망과 비판은 가시 같아 불의한 이익이 침해받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잡아 죽인 이유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무슨 짓이든지 행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의인의 고난은 불가피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의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살핌과, 자신의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믿고,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행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고난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의 도망자 생활에서 오히려 원수 사울을 두 번 살려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주셨고,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신 뒤, 그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냥 거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주님의 의’를 빛 같이 드러내셨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29:11절
“어리석은 사람은 쌓인 분노를 다 터뜨려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 분노를 억제한다.”(새번역)

‘분노’의 원어는 ‘루아’입니다. ‘루아’는 ‘호흡, 바람, 영, 생각’을 뜻하며, ‘분노’는 통상 ’아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다스리며 때와 상황에 맞추어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분노의 때가 가장 마음을 통제하기 어려워 바보와 현자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구약학자 롱맨 3세의 말입니다: “바보들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기도 하지만, 확실히 말이 많다. 그들의 말은 문제를 일으키고 듣는 자들은 동요한다. 그들의 감정은 지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들의 감정은 종종 부적절하게 표현됨으로,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이에 반해, 지혜자는 냉철하기에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만 입을 연다. 그들은 또한 바보들의 말로 야기된 어지러운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 사실 어리석은 자는 환경이 조금만 어렵고 위험해져도 안절부절못합니다. 가나안 접경에 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떠오릅니다(민14:1).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깊은 호수나 바다 같아, 쉽게 동요되지 않고, 매사에 신중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과 대적하는 고라의 무리에 직면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후 행동하는 모세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지혜롭다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준비하신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인정 받은 이유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29:12절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12-14절의 주제는 공의에 근거한 통치 질서의 필요성입니다. 12절은 통치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14절은 긍정적 이미지를 각 다루며, 13절은 중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 구절은 ‘관원’으로 묘사된 통치자가 거짓말에 귀를 기울일 경우 나타날 사회적 혼란을 보여주고, 선악을 분별할 지도자의 통치 능력을 요청합니다. ‘관원’이란 ‘다스리다’는 의미를 내포하여 ‘통치자’로 번역 가능하고, ‘들으면’은 ‘듣고 따르다’는 의미입니다. ‘하인들’은 ‘섬기다’를 뜻하는 분사 형태를 번역한 것이나, 노예가 아니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관직에 있는 자들, 즉 ‘신하’를 지칭합니다. 이를 통해 솔로몬은 국가의 통치자가 거짓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며 오직 악인들만 남게 된다는 경고를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적합합니다. 잘못된 통치의 출발점은 통치자의 느슨한 윤리적 사고와 행동임이 새삼 강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에서 통치자 다윗은 자신의 왕국에서 속임과 사기를 허용하지 않을 것을 결단하고, 신실한 자를 살펴 함께 통치하려는 의사를 시로 피력합니다: “흠 없이 정직한 자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속이는 자는 내 집에 살지 못할 것이며 거짓말하는 자도 내 앞에 서지 못하리라. 내가 이 땅에서 매일 악인들을 제거할 것이니 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여호와의 성에서 추방될 것이다.”(시편101:6b-8 현대인의성경). 책임 있는 자리에 앉게 되면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의 성취를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언25:2)

매일묵상(2024/3/25-29)

고난주간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4년 부활절은 3/31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21)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1일 후  첫 만월은 3/24일(음력2/15)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3/31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3/24-3/30).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3/23),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3/24,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서쪽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앞 뒤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이윽고 성에 가까이 가신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기하시고, 오히려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3/25) 아침 성전을 향하던 중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셨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심판받을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을 향하여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질문하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다가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주님은 그들에게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답변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심으로 그들을 침묵케 하셨습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책망하신 뒤,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막12:13-27). 모든 사람이 부활하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의미하기에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막12:28-34). 그 이상의 계명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묻지 못하였고, 오히려 주님이 질문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35-37). 이어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자신들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7장).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사,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며 통곡과 함께 피땀 흘리시며 기도(1시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하였습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7-68).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은 700년 전 이사야에 의해(사53: 7-8) 미리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고 묻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이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것과, 당신이 세상 죄를 담당하실 그리스도이심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고,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기록되었으니,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4/3/18-22)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3)- 어린 시절

사려깊은 하녀로부터 엄한 교훈을 배우고 자랐지만, 모니카는 오히려 술마시는 악습에 빠졌습니다. 당시에 흔히 그랬듯이 모니카 부모님은 어린 모니카에게 술통에서 술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때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주 조금 술을 맛보다가, 점점 더 빠져 결국 습관이 되었습니다. “작은 것을 멸시하는 자는 조금씩 넘어지게 된다”는 격언이 맞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만일 주님이 준비하신 약이 우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우리의 이 은밀한 병을 고쳐 줄 수 있겠습니까?…주님은 다른 사람의 비수 같이 날카롭고 통렬한 모욕적인 말을 통해서, 어머니의 저 썩은 부분을 한 방에 도려내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당시 모니카는 곳간으로 술을 가지러 갈 때에는 한 하녀와 함께 갔습니다. 그러나 그 하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종종 다투었고 그날도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가 남몰래 술을 마시는 악행을 들추고는, “술주정뱅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지독한 모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모니카는 그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악습을 끊었습니다. “친구들의 아부하는 말들이 우리를 망쳐 놓는 것처럼, 원수들의 모욕하는 말들은 흔히 우리를 바로잡아 놓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라, 격동시키고 괴롭히기 위함이었지만, 주님은 “광분한 하녀의 말”을 통해 모니카를 고치시는 약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의 어떤 권면과 훈계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더라도, 마치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겸손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4)- 결혼생활

어머니 모니카가 조신하고 분별력 있게 성장 한 것은, 인간적인 교육의 결과로만 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말한 점은 새겨두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은 부모님을 넘어, 주님께 대한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외형상으로는 사려깊은 늙은 하녀, 모욕을 준 하녀 등을 통해 배우고 결단한 것이지만, 실상은 모니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녀에게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혼기가 찬 모니카는 비그리스도인 파트리키우스를 남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자신의 행실로써 남편에게 주님을 전하였고, 주님은 모니카의 그러한 행실을 사용하셔서, 남편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인내로써 감당하였고, 그 일로 남편을 미워하여 불화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자비가 남편에게 임하여 주님을 믿고서 그 삶이 정결하게 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믿음과 인내 그리고 기도가 모니카의 ‘절대 무기’였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아주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때론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화난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고 말도 행동도 조심하였고, 남편의 화가 가라앉고 진정되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자신의 행동과 그 이유를 조곤조곤 이야기 해서 오해를 풀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니카의 결혼 생활에 남편의 폭행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와 인품입니다. “여러분은….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벧전3:3,4)

잠언29:7절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지식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학력이나 배움의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학력이 높고 교육을 많이 받아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반면, 은혜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빨리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해 그들을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6). 즉, 그들 모두는, 주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땀 흘리며 일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고, 더나아가 당신의 몸을 죄인들을 위한 희생제물로까지 드리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독일의 여성 신학자 도로시 죌레(1929-2003)는 뉴욕 성당의 한 집회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 우아한 차림의 한 여성이 나와, 자기가 본 남미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모두 미국 백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간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과 심각한 인권유린, 극심한 빈부격차, 개발과 성장이란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가 자행되어 온 곳이었지만, 그녀는 화사한 차림으로 고급호텔과 관광명소만 드나들며 남미의 겉모습만 보고 원더풀을 외쳤습니다. 마치 문 앞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아간 부자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본받아 균형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19:17)

잠언29:8절
“거만한 사람은 성읍을 시끄럽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 절은 의인과 악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묘사합니다. 6,7절에 등장하는 ‘악인’을 ‘거만한 자’로 표현하는데, ‘거만한 자’는 히브리어 ‘라촌’의 번역입니다. ‘라촌’은 ‘입을 삐죽이다’, ‘비웃다’는 뜻이며, 권위의 멸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함을 내포합니다. ‘시끄럽게 하다’의 원어는 ‘야피후’이며, ‘불다’ ‘내뿜다’란 뜻으로, ‘불’이나 ‘거짓말’과 함께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전단은 거짓된 입술로 선동하여, 불을 일으킴과 같은 극심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하여, 사회가 불안정한 이유를 알게 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게 합니다. ‘분노’는 악인에 의해 야기된 성난 감정으로, 의인은 그런 사회적 동요를 진정시켜 사회 질서를 회복시키는 지혜자입니다. 사회질서의 안정이야말로 평화스러운 삶의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BC 990년 경 일어난 둘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 왕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 선동에 직면하였습니다. 세바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얻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벨 성에 들어갔고, 그들을 뒤쫓은 군대장관 요압은 토성을 쌓고 성을 쳐서 헐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아벨 성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나타나 요압을 진정시키고, 성읍 백성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요압에게 던짐으로 성을 보전하였습니다(삼하20:14-22). 다툼이 있을 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언15:1,새번역)

잠언29:9절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악인은 여기서 미련한 자로 등장합니다. 지혜자는 합리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만, 미련한 자는 교만과 탐욕을 버리지 않아서 그 분쟁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사이의 다툼은, 차분하게 결론으로 향하지 못하고 오직 혼란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미련한 자는 목을 곧게 하고 어떤 지혜도 무시하려는 특질을 염두에 두면서, 치밀어 오르는 노를 자제해야 합니다. 잠언이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대답하지 말아라. 너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렵다.”(26:4,새번역)라는 권고는 많은 경우 타당하므로, 그런 자와는 아예 논쟁 자체를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불가피한 다툼이 전개될 시, 본 잠언은 해결될 때까지 인내하라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같은 말로 대응하여 주어라. 그가 지혜로운 체할까 두렵다.”(26:5,새번역)는 잠언이 참고가 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창기 두 사람이 산 아기와 죽은 아기를 두고 서로 다투다가 왕 앞에 왔습니다. 악한 여인이 벌린 이 다툼이 그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어미가 자신의 아들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 앞에 온 것은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왕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무시한 미련한 여인은, 증거 없음을 확신하고 거짓으로 일관하였으나 탄로 났고, 큰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상징입니다. 마지막 날 정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므로, 미해결의 문제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매일묵상(2024/3/11-15)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1)

어거스틴(AD354-453)의 「고백록」은 전 세계와 모든 세대에서 널리 읽힌 고전으로 어거스틴은 당대 제일의 수사학자요 신학자였기에, 뛰어난 문체와 신앙에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백록」은 어거스틴이 북아프리카 히포 교구의 주교로서 교구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쓰여졌으며, 아들의 눈으로 보기에 어머니 모니카(AD332-387)성도는 훌륭한 어머니요 아내요 이웃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수사학 교사의 직을 던지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여,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오던 중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죽습니다. 이때 모니카는 자신의 기도를 너무나도 풍부하게 응답하신 주님의 선하심을 가슴에 품고 기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삶을 고백록에 적어 후세에 남기기 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니카는 육신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를 낳은 어머니여서, 그에게 육신의 빛과 영원한 빛을 모두 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니카가 훌륭한 어머니이지만 초점은 주님께 두어져서,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았고 경건함도 잃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한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지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양육한 것도 아니었으며, 조부모도 자기들에게서 어떤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오직 주님께서 어머니를 지으시고, 주님의 교회의 신실한 지체였던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주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교훈의 회초리로 양육 받게 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p284). 이 대목은 우리 모두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2)

「고백록」에 따르면, 모니카의 신실한 삶은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집안의 나이든 하녀 덕분입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부친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워낙 오랫동안 일해 온 데다가 나이도 아주 많고 성품도 훌륭해서, 그 그리스도 가정의 어른들도 그녀를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딸들(어린 모니카 자매들)을 돌보는 일도 그 하녀에게 맡겨졌고, 그녀는 성심을 다해 수행하였으며, 필요시 경건함과 엄격함으로 딸들을 엄하게 통제하면서도, 지혜롭고 사려 깊게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지금부터 17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도, 여자들이 술에 빠져 사는 문제가 심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 하녀는 술을 먹는 것과 같은 나쁜 습관이 아예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너희가 지금 물을 마시는 것은 술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너희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 마시는 것도 절제하지 못하면, 나중에 결혼하여 부엌살림을 맡고 곳간을 마음대로 출입하게 되면, 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맨 날 술을 마셔서, 술 마시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 되어 버리게 된다” 이런 교훈과 함께, 자신이 가진 권위로 명함으로써 아직 어려 자신의 욕구들을 자제하기 힘든 그녀들을, 갈증나서 목이 타들어가도 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훈련을 통해 절제와 인내심을 갖도록 양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안의 딸들은 자신이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그녀들의 몸에 배게 하였답니다”(p284). 그러나, 모니카 역시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은밀히 술 마시는 습관을 갖게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어린 모니카의 악습을 고치셨을까요? 모욕과 충격을 통한 금주의 결단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언3:15).

잠언29:4절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의(창기와 방탕)가 개인의 재산을 잃게 함을, 4절은 공적인 불의(뇌물과 중세 등)로 인한 국가의 파멸을 경고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생기는 지혜를 갖고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후단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뇌물을 받는 자,’ ‘중세를 부과하는 자’ 혹은 ‘탐욕스러운 자’등으로 번역되나, 앞의 ‘정의’와 함께 생각하면,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불의를 지칭합니다. ‘멸망시킨다’ 말은, ‘넘어뜨리다’, ‘파괴하다’란 뜻의 원어 ‘하라쓰’의 번역으로 성벽이나 건물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사회와 국가를 공격해 무너뜨리는 ‘용맹한 적국의 장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왕은 전력을 다해 그런 자를 발본색원하고, ‘정의로운 통치’를 확립해 혼란을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 교훈은 언제나 옳지만, 지혜로운 왕은 현실을 수용하는 통치기술이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태종때부터 무려 40년 간 공직에 있을 정도로 유능하고 처신에 밝았습니다. 그러나, 절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황중생의 궁중 창고 절도 사건, 처남들의 위법 행위에 대한 구차한 변명, 사위 서달이 아전을 죽인 죄를 은폐하려고 상주문을 조작한 행위 등을 알고도 세종대왕은 황희를 계속 중용하였습니다. 유능한 신하의 약점을 잡고 충성을 다하도록 한 세종의 통치기술로 생각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미워하는 자에게도 선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기술을 가져야 합니다(눅6:27).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잠언20:26).

잠언29:5절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5,6절은 ‘그물’과 ‘올무’라는 표현을 각 사용하여 악인은 타인과 자신을 멸망하게 하나, 의인은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린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영원한 심판과 생명까지 함축되어 있음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첨하는’에 해당하는 원어 ‘할라크’는 ‘매끄럽다’,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진실을 외면하고 이웃의 환심을 사려고 거짓된 칭찬의 말, 즉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 놓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물’에 해당하는 ‘레쉐트’는 새와 같은 사냥감을 잡는 도구로서, 누군가를 파멸에 이르게 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문제는, 파멸의 대상인 ‘그’가 아첨하는 자 본인인지, 아첨을 받는 자인지 확실하지 않은 점입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면, 남을 해하려는 악인의 아첨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멸망케 한다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견해를 따르면, 아첨을 받은 이웃이 올바른 상황 판단을 못하여 파멸한다는 뜻입니다. 6절이 전자의 사례를 다루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가 좀 더 타당합니다. 좋은 예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국과 전투 중 죽은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악한 왕 아합의 승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부추켜서 아합은 확신을 갖고 전쟁터로 갔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합은 전사하였습니다. 악행을 보고도 책망치 않는다면, 파멸을 방조하는 행위입니다. 2001년 영화 ‘친구’에서, 친구 동수를 죽인 죄를 자백한 준석은 법정에서, “어릴 때 ‘너 그런 짓 하면 안돼!’ 라는 말 한 마디만 들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는 최후의 진술은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언13:14).

잠언29:6절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는 것이지만,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한다”(새번역)

전단을 직역하면, “악인의 범죄에는 올무가 있다”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두기에, 숨겨져 있는 파멸의 덫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바로 그 올무에 잡혀 파멸하는 악인입니다. 이른바 반전의 반전입니다만, 역사는 어느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인 사례들을 수 없이 증언해 왔습니다.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은 수십억원의 교회 돈을 제멋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노후와 신혼집을 위해 ‘평화의 궁전’(가평)을 짓고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가, 서둘러 신천지 교회의 명의로 바꾸는 등 여러 경제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리석은 노인입니다. 대법원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확정하였습니다(2022.8.12). 현재 이만희 씨는 조심하지 않으면 집행유예가 취소되어, 90 고령에 수감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하는데, 자신을 잡으려고 악인이 설치한 ‘올무’를 하나님의 은혜로 피하게 된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장대를 만들어 놓고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대궐로 들어 가고 있을 때,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읽다가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왕국에 도착한 악한 하만에게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혀 수산 성 전체를 다니며 높여주라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섭리로 악인의 올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이며, 의인은 밤에도 발뻗고 잠을 잘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28:1)

매일묵상(2024/03/4-8)

누가복움6:29b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원수되는 둘째 예는 옷을 빼앗는 경우입니다. 누가복음은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고 기록한 반면, 마태복음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적어, 옷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겉옷의 전당을 금지하는 모세율법과 미쉬나를 가진 유대인 독자를, 누가복음은 그런 규정이 없는 이방인 독자를 각각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 역시 관대함에 관한 주님의 거룩한 명령을 전달해야만 합니다. 누가는 겉옷을 강탈당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겉옷을 빼앗길 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속옷까지 주라고 변형시켰습니다.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세관에서 일을 보고 있던 레위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듯이, 기꺼이 자신의 것을 주라는 교훈을 말입니다. 매우 훌륭한 성경 해석 방법입니다. 작고하신 송기식 목사님은 어느날 교회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 칼을 대면서 돈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목사인데 무슨 돈이 있겠냐?’ 하시면서 칼을 내려놓고 사정을 말해보라고 타일렀습니다. 도둑은 칼을 내려놓고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사정을 털어놓았고, 목사님은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현자는 남의 경험에서 배우고, 보통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고, 미련한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서양의 고전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감된 지혜로 넘쳐납니다. 읽고, 묵상하고, 행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시119:99).

마태복음6: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하셨는데, ‘중생’의 여부는 단순히 우리의 고백이나 느낌보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첫째 시금석이,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보물의 소재입니다. 하나님도 내세도 없는 이방인의 삶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어떤 집에 살며, 어떤 차를 살까’ ‘어떻게 해야 재물을 더 많이 모을까’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들의 보화는 ‘의식주’로 대변되는 생존, 부귀영화, 혹은 ‘자기실현’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논어의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들은 인생의 전부나 목적이 아닙니다. 이는 지나갈 세상에 속한 것이라,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칭찬과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에 있습니다. 이 같이 참된 재산, 명예요 만족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지, 세상의 소유는 단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정도, 혹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정도면 족합니다. 만약 필요 이상의 소유가 주어졌다면, 재단법인을 세우든지, 선한 사업을 위해 기부하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소유의 문제를 쉽게 해결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만이 채워지기 때문에, ‘자기실현’이라는 인본주의적 목표의 도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잠언29: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이 잠언은 건설적인 비판을 무시하는 자에게 갑자기 닥쳐올 파멸을 경고합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에 해당하는 ‘토카호트’는 명사 ‘토케하=책망’의 복수형이며, ‘이쉬=사람’와 연계되어 ‘책망들의 사람’으로 직역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충분히 깨달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견책과 책망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목이 곧은’이란 대목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약하고 못된 짐승이 멍에를 지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책망과 경고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완악함과 교만함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악인의 자세를 연상케 합니다. 일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목이 곧은 백성’(출32:9)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후단은 이처럼 책망을 귀담아듣지 않는 패역한 악인의 비참한 운명을 다루는데, 그들에 대한 멸망은 ‘갑자기’ 닥쳐오나 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솔로몬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을 나타내는 ‘페타으= 눈을 뜨다’라는 부사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잇솨베르’를 함께 사용하여. 악인이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심판이 도래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릇이 한번 깨어져 산산조각 나면 다시 복구할 수 없듯이 악인도 홀연히 닥치는 심판을 받고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죽자마자 들이닥치는 영원한 심판은 본 잠언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잠언29:2절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본 구절은 28:12, 28과 동일한 내용이며, 의인과 악인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대조합니다. 전단의 ‘의인이 많아지면’은 후단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이라는 표현에 비추어, 숫자의 증가 보다는 ‘의인이 권세를 잡거나 뜻이 관철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의인 자신의 삶도 모범적일 뿐만 아니라, 지혜와 정의로 공동체를 이끌게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내릴 어리석은 결정이나, 착취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의와 지혜, 악과 미련함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1:8). 지혜자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고,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의인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자로서,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고, 백성들은 행복을 누리며, 열방 가운데서도 영광을 얻게 됩니다.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히스기야 시대의 통치는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에서도 드러나듯이 완전한 의인과 지혜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7).

잠언29:3절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2절이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의인과 악인의 영향력을 관찰하였다면, 이 구절은 개인적 차원에서 양자를 묘사합니다. 전단에서 ‘지혜를 사모한다’는 말은 주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1:7). 그는 지혜자로서, 잠언은 부귀와 장수가 있다고 하니(3:16),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는다’ 하였는데, 재물은 물론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귀한 생명조차 빼앗깁니다. 방종한 삶에는 늘 병이 따라 다니고 그 결과 단명한 사례는 아주 많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6:26)고 엄히 경고합니다. 한편, 좀 더 넓게 보면 창기는 사단의 지배 하의 음란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5:11-32). 그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아 멀리 타국으로 가서 창기와 함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바닥에 떨어지자 아버지 집이 생각나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자 달려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하나,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 그리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하며 즐거워 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를 깨달은 인간의 반응에 대한 아름다운 글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마음에 품으면, 사이가 소원한 사람들을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