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 큐티

2015. 12. 28 ~ 3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고르반 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뜻은 드렸다 즉, 하나님께 드렸다 혹은 바쳤다 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 법률은 개개인이 자신의 재산에 하나님께 드린 것임 이란 표시를 하여 일상적인 용도에서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친 헌물의 성격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행하는 것은 심각한 결정이었고 거의 번복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르반 맹세를 위반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중대한 결과를 맞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는데 이는 아들이 자신의 재물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다고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 그의 부모님이 그 재산에서 혜택을 보지 못하도록 배제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은 실질상 제 5계명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에게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도다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해석이나 전통을 이용하여 실질상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있는지 여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계명은 오직 자녀가 부모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부모도 자녀들에게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해야만 하는데 이는 자녀들이 낙심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골3:21). 이러한 의무의 상호적인 속성은 부모의 행동에 확실한 점검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5계명의 범위는 부모의 차원을 넘어서 선생님, 목회자, 고용주와 우리 보다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소위 우리의 손윗사람들을 포괄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사랑하시며, 따라서 분명한 위계질서를 세우시고(특히 가족과 국가에), 자기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기 바라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인간 존재와 인간의 제도에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실 때, 그들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자유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나 제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남용한다면, 그것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곧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들의 표현한 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극적인 교육방법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일 뿐만 아니라 대조를 통해 양자를 비교하는 히브리식 표현법의 좋은 예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한 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한 분이 어떻게 다음에는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문제의 열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병행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 10:37)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로 2015년도가  끝났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고 2016년도에 주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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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25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1)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허락된 일과 금지된 일을 소소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상술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한 법을 사소한 규정들로 덮어씌우는 바람에 오히려 그 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규정들을 고의로 깨뜨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규정들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이 허기져서 곡식의 이삭들을 잘라 먹었을 때, 서기관들은 이것이 추수에 해당하는 행위이므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을 어겼다고 비난한 반면, 주님은 오히려 그들 격려하셨습니다.이를 통하여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근본 원칙을 천명하셨습니다(막2:23-28). 그러나 오늘날도 이스라엘의 근본주의자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도 누르지 못하고 에어컨도 켜거나 끄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2)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체의 행위를 금지할 것을 강요하는 안식일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안식과 경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는 성경의 원리를 확실히 받아들이셨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일들은 이러한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또한 안식일에 할 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컨데 종교적인 일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일, 마태복음 12:5)이라든가, 자선행위 (병자를 치유하는 일, 마태복음 12:9-10) 그리고 필수 불가결한 일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는 일, 마태복음 12:11)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오늘날 성직자, 의사, 농부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3)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 중 어떤 날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지켜야 하겠습니까?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이었으며, 지금도 제7일 안식교인들은 그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4계명의 신학적인 근거가 천지창조의 안식에서 출애굽의 안식으로 의미가 발전되었다는 것을 먼저 유념해야 합니다. 즉, 안식의 근거인 천지창조 후 하나님이 쉬신7번째 날(토요일)은 애굽을 탈출한 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4계명의 핵심은 날짜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1-6일 리듬에 있는 것입니다. 더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출애굽한 날입니다. 사망의 포로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근거를 주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로 흑암의 권세에서 탈출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의미있는 날을 선택하여 계속해서 예배의 날로 지켜졌다는 증거는 명백합니다(행20:7; 고전16:1-2).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

5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 것에 포함되느냐 아니면 이웃에 대한 의무의 규정에 포함되느냐에 대하여 다툼이 있습니다. 그것은 5계명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동시에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규정할 때 양쪽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공경하라 라는 국어사전의 의미는 공손히 받들어 모셔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 원어는 카베드 כַּבֵּד 로서 존경하다, 중히 여기다, 명예롭게 하다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모님께 합당한 존경과 명예를 드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5 계명은 부모님께 그 분들이 받을 합당한 권위를 드려라고 의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님은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돌보심을 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만 합니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2) 

그런데 5계명은 십계명 중 유일하게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면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 에서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동시에 5계명의 전반부는 우리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후반부의 약속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엡 6:2-3)는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5계명을 이방인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단순히 이라고 해석함으로서 5계명을 모든 민족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축복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십계명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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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7-11

제2계명

둘째, 우상 숭배자는 영으로(즉, 하나님은 영이시며 따라서 영적인 경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외형적이고 가시적이며 만져 볼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조차 형식주의에 치우치는 경향과 심지어 노골적인 외식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주전 7 -8 세기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공허한 종교성을 가차 없이 비난했으며, 예수님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7:6). 그러므로 예식, 순례 행진, 드라마, 각종 의식, 무릎을 꿇거나 두 팔을 올리는 등,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외형적인 형식을 사용하든지 간에, 영과 진리로라는 이중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우상 숭배라는 죄목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하십니다. 이 말에 혼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질투는 라이벌에 대한 분노이며,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라이벌이 상대편 자리에 있을 권리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다른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만을 섬기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고 하신 말씀은 물질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은 우리에게는 세상살이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돌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야 돈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마6:25-34). 

또한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 각자에게 지우신다는 사실은 성경 후반부에 가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예, 에스겔18: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계명은 영구적이고 중대한 한 가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악의 사회적인 속성 때문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는 종종 부모가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해 고난을 받습니다. 이런 결과는 신체적으로(유전된 질병등), 사회적으로 (술과 도박으로 인한 가난), 정신적으로(불행한 가정에서의 긴장과 분쟁), 그리고 도적적으로 (자녀가 배우는 부모등의 악습) 자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망령되게의 국어사전의 뜻은 정신이 흐려 정상을 벗어나서의 뜻이나 원어의 의미는 헛되이 in vain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경우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세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명백한 경우는 나쁜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이 친히 알려주신 칭호들(, 하나님, 전능자, 그리스도, 예수등)을 가르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그 칭호들을 덧붙이는 말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맹세 같은 데 사용하는 것은 그분을 경시하는 명백한 증거이며 그분을 경배하려는 열망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영어에서 사용하는 gosh, gee 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단축해서 표현하는 변조된 용어들을 사용하지도 기억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제3계명에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약속이나 맹세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나서 그 약속을 깨뜨린다면, 그것은 곧 거짓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심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일부 사람들은 맹세할 때 올바른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는 없지만, 하늘에 두고’ 나 그 밖에 땅에 두고 혹은 그 밖의 것을 두고 맹세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5:33-37). 주님은 이에 대하여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그저 간단하게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의해야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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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15) 십계명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그리고 자연스럽게 첫 번째 계명이 이어집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요구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속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구해 주시고 시내 산에서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라 그들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셨습니다(출19:3-6).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인 통찰력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며 그리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우리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골1:13-14).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12/01/15) 제1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선포하신 것은 그분이 구원과 언약을 통해 우리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분이 유알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6), 나는 낸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고 말씀하심으로 제1계명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만을 절대적으로 섬겨야 할 근거는 바로 그분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2/02/15)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경배는 단순히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한 시간 동안 말로 표현하는 경배가 평소에 지속적이고 포괄적으로 드려 온 우리 마음의 표현일 때에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제1순위에 두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살짝 엿볼 수 있는데, 천국에 대한 환상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다(계 4-7장). 우리는 이런한 하나님 중심의 천국 생활을 지상에서 미리 실천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godliness)의 참뜻입니다.

(12/0315) 첫 번째 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예배를 요구한다면, 둘째 계명은 그 예배가 참되고 영적이어야 하며 우상 숭배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계명 자체를 적어보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12/04/15) 요한복음4장23-24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되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 2계명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을 진리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예배하지 아니하고 그분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를 그분이 만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의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행17:24-31;롬1:21-25). 우상의 형상들은 외적인 형태를 띠기 전에 이미 정신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거짓되고 무익한 모든 개념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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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15 그리스도인의 선교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로 연합하게 하시며 세우시는 동시에 세상을 복음화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선교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예수님은 ‘생수의 강’이 모든 믿는 자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사도 요한은 이것이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요7:38-39).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이 구절을 설명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오히려 성령님이 그 사람 속에 내주하실 수 있다), 그 영을 자신에게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없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곳에서부터 그분은 흘러나오신다. 만약 흘러나오는 것이 없다면 성령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라고 하였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11/10/15  그리스도인의 선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39) 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던 내용은 사도행전에서 더욱 빈번히 나타나는데, 가장 먼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성령님은 자기 백성들을 증인으로 파송하시는데,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수도인 로마로 끝이 나는 곳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원은 점점 확장됩니다. 즉, 성령님은 계속 흘러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유명한 영국 성공회 선교사 롤런드 앨런은“사도행전은 엄밀히 말해서 선교의 책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위로부터 강림하신 성령께서 ….. 사실상 선교의 영이라는 결론은 거부할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이 결론이야말로 “위대하고, 근본적이며, 틀림없는 사도행전의 교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성령)을 쉽게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 역시 선교사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11/11/15 그리스도인의 선교

일부 사람들에게 선교는 분명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소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술적으로 전문적인 의미의 ‘타문화권 선교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과 직장과 이웃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으며, 이 일을 위하여 성령님의 능력이 꼭 필요합니다(행1:8). 지역 교회도 선교에 헌신해야 합니다. 즉,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역 선교와, 전 세계를 향한 교회의 복음 전도 사역에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세계 선교, 이 두가지 선교에 모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이 많고 말도 잘 못하기 때문에 증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성경은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11/12/15 그리스도인의 선교

그 대답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행1:8). 소심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어부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담대히 증거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행 4:13, 31). 사도 바울도 동일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대단한 지식인이기도 했지만,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는 왜소하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인물됨과 말솜씨가 모두 형편없다고 비웃기도 했습니다(고후10:10). 그는 처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2:3). 결국 그는 자신의 웅변술이나 세상적인 지혜를 의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고전2:4). 다시 말해서 성령님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말씀을 전하셨으며, 위대한 능력으로 그 말씀들이 청중의 머리와 가슴과 양심과 의지 속에 평안히 자리잡도록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11/13/15 그리스도인의 선교

모든 복음 전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잘못된 것들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능력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영을 소유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를 볼 때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엡5:18). 우리는 회심과 확신에 이르기 위하여 성령님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가르쳐 주며, 연합하게 하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도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를 통하여 버림받은 황무지 같은 이 세상에 사막을 변화시키는 생수의 강 같은 축복이 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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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 그리스도인의 교제
교회의 4가지 표징인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을 좀더 살펴보면, 성령님께서 교회를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하셨고, 나아가 교회를 하나로 연합하게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이며 동시에 거룩합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교회가 때때로 마땅히 고백해야 할 신앙과 추구해야 할 사명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교회는 모든 신자와 모든 진리를 포용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긍정하고 사명에 동참한다는 점에서 사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교회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라는 확신을 교회의 분열과 불순함, 분파주의와 무기력함을 묵인하는 구실로 삼아 그 가운데 안주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상적인 교회의 비전을 통해 영감을 받아 현실을 좀더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추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성도들 사이에 서로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2015/11/3 그리스도인의 섬김
성령님께서는 연합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 혹은 부흥에도 관계 하십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의 개개인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 하나이지만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수많은 지체(팔다리와 많은 내부 장기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들은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성령님 자신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과 성령의 선물들(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사들)을 구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동일한 선물인 성령님은 모두에게 주어지며, 교회의 연합을 가져옵니다. 반면에 각기 다른 은사는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며, 교회에 다양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2015/11/4 그리스도인의 섬김
성령님의 은사 (카리스마타 charismata) 를 둘러싸고 보통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첫째, 은사란 무엇일까요? 신약 성경에 보면 은사를 언급하는 목록은 모두 네가지입니다 : 로마서 12:3-8; 고린도전서 12:4-11, 27-31; 에베소서 4:7-13; 베드로전서4:10-11. 그 목록을 모두 합해 보면 약 21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목록은 모두 제각각이라서, 은사를 낱낱이 열거하였다기 보다는 선별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은사가 있을 것입니다. 일부 은사는 초자연적인(ex:기적들 고전12:10, 28) 반면, 그 밖의 것들은 그렇지 않거나 지극히 평범한 것들도 있습니다(ex: 다스리는 은사나 구제하는 은사, 긍휼울 베푸는 은사). 많은 은사가 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키는데, 이런 능력들은 오늘날 더욱 강화되고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2015/11/5  그리스도인의 섬김
둘째 은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은사는 섬김을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네가지 목록(로마서 12:3-8; 고린도전서 12:4-11, 27-31; 에베소서 4:7-13; 베드로전서 4:10-11)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사실은, 은사는 공익(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으며, 은사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교회의 유익과는 동떨어진 개개인의 사적인 목적이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11/6  그리스도인의 섬김
은사 중에서 좀더 중요한 은사는 어느 것일까요? 은사가 교회를 위해 주어진 만큼 그 목적에 맞게 은사의 등급을 정해만 합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으로 볼 때, 존 스타트 목사님은 가르치는 은사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장시키는 요소 중에 진리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목회학 박사 학위 논문에서 미국에서 성장하는 교회를 분석해 보니 가르침이 있는 교회가 가장 잘 성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은사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은사를 평가 절하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질투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멸시하거나 자신의 은사를 자랑해서도 안됩니다(고전12:14-26). 우리가 다른 어떤 은사보다 가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고전13장)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다른 은사보다 화려한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SBC 카톡 말씀 나눔

10/25/15 그리스도인의 이해
성령님께서 성경의 원 저자시라면, 그분은 또한 성경의 원 해석자이시기도 합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는 자기 백성이 점진적으로 성경의 의미를 깨닫고 적용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왜곡된 해석과 문화적인 제약을 벗어나려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던 ‘사적 판단의 권리’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령께 말씀을 조명해 달라고 겸손히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성경 이해는 의미 없는 일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존스타트 목사님은 이러한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매일 성경을 읽도록 교육 받으며 자라 왔는데 그 일은 목사님에게는 따분하고 지루한 의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마음 문을 열어 드린 후 성경은 단번에 새로운 책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에게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존 스타트 목사님 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Continue reading “SBC 카톡 말씀 나눔”

2015 하반기 기도제목


8.22.2015
잠언28:25(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1.저희 교회 시험에 들지말고 반석위에 설 수있게
2.희찬이가 지난 화요일 달라스로 갔습니다 잘 적응하고 공부할 수있게 기도해 주세요
3.돌아오는 주일 날 박기도 형제가 학교로 돌아갑니다 겨울에 졸업 잘 하고 돌아올 수 있게
4.수요 성경공부. 주일 성경공부에 은혜가 넘치기를
5.송도 영혼들을 위해 영적으로 황무지인 이땅을 불쌍히 여길 수 있게(11공구) 각 지역에 교회가 들어 올 수 없는 환경에 눌리지 말고 승리 할 수있게
5.교회 청년들을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