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큐티

*순종하라 : 우리가 읽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성경 읽기도 그다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거부한다면, 기도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역시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견고하게 지어서 어떤 사나운 폭풍도 그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마7:24). 야고보 사도 역시 예수님이 강조하신 바를 반복하면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약 1:22). 그는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는 독자들은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얼굴을 씻거나 머리를 빗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돌아서면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예리하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이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항시 잊지말아야만 하겠습니다. 

 

기도

남자든 여자든 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가장 고귀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를 닮도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유익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인정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은혜의 방편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은 나는 기도에 힘쓰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타당한 지적입니다. 연약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필요 역시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 그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J.C. 라일 감독은 왜 어떤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보다 훨씬 더 밝고 훨씬 더 거룩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 차이는 개인적인 기도 습관의 차이로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별로 거룩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대단히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죄짓는 것은 결코 같은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죄를 소멸하거나, 죄가 기도를 막아 버릴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자면,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이(성경을 통하여) 먼저 말씀하시고, 우리가(기도를 통하여)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주제에 대하여(찬송이나 고백이나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여쭙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 대화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한 무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성경을 펼쳐 둔 채 읽고 계속 묵상한 후에 한 절 한 절 그 본문을 다시 살펴보고 그 내용과 어울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 되는데 이것은 올바른 기도일 뿐만 아니라, 읽은 말씀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는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가능한 한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중년의 요리사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일종의 비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과 그분만 아는 그런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어요”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녀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감이 그분께 불손한 태도를 취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형식을 갖추지 않고 구어체로 하나님께 기도하여도 좋지만 과거로부터 전해진 잘 쓰인 기도문을 가지고 그대로 따라 하면서 하나님께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는 미리 기도문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릭워렌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대 성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기도 순서를 맡은 어느 목사님은 마음에 생각나는대로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그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들떠서 기도하셨을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록있는 다른 목사님은 쪽지에 적은 기도문을 들고 간단 명료하게 기도하고 나니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적인 기도를 할 때 특히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SBC 매일큐티

2016. 3.7 – 11

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4가지를 제언하여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라, 생각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입니다. 이를 각자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하라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간 신문을 대하듯 되는 대로 무관심하게 읽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존 칼빈이 말한 것처럼 경외심과 겸손한 마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자세로 성경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 우리의 지성을 조명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눅24:27).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데려오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도하라 :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성령님을 통하여 하시는 작업을 로체스터의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카바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입니다. 복음서는 초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구약 성경은 거룩한 주인공을 부각시켜 주고, 초상화를 가리키는 전체적인 배치에 꼭 필요한 배경입니다. 서신서는 주인공의 의상과 액세서리 역할을 하면서 그 인물을 설명해 주고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성경을 읽기를 통하여 그 초상화를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감상하는 동안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인공이 살아나오는 것입니다! 엠마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문자로 기록된 화폭으로부터 앞으로 걸어 나오셔서 친히 우리의 성경교사가 되셔서 성경 전체에서 그분에 관한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하라 : 우리는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생각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조명을 의지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연구를 조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약간의 비용을 투자해야만 합니다. 성경에 작은 주석을 덧붙인 각종 스터디바이블(오픈, 굿뉴스등)을 구입하여 읽으면 성경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성구 사전도 구체적인 본문이나 구절을 찾는 데 편리합니다. NBC (New Bible Commentary  IVP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와 같은 신뢰할 만한 단권 주석과 성경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절 단위로 수록한 IVP 성경 배경 주석 역시 매우 유용하여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생각하라 : 여러 성경관련 주석이나 성구사전들은 어디까지나 보조 자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의무는 말씀을 읽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해석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기초가 상실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에 구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두 가지 질문이 유용하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1)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의 본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2)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즉, 그 말씀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답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운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들(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라)이 제대로 적용되야만 합니다. 

 

*기억하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억 상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이 몰락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교훈들을 계속해서 잊어버렸습니다. 기억을 위한 한 가지 자극제는 바로 기록입니다. 날마다 혹은 주제별로 혹은 성경의 권별로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구체적인 진리들을 노트에 기록하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수시로 그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고 기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특별히 감동을 준 구절들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요절 노트를 만들어서 계속 복습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일에 한 구절씩 암송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점점 쌓일 것입니다.

SBC 매일큐티

2016/2/29 ~ 3/4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들의 신빙성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의 저자들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글 속에서 자신의 성실함과 공평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들 스스로가 복음서 이야기를 본 목격자들이었거나(요한복음 21:24), 목격자들에게 직접 전해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 누가복음 1:1-4). 더욱이 복음서는 모두 1세기 문서이며, 요한복음만 제외하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전에 모두 출간되어졌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건들과 그것들에 대한 기록 사이의 격차가 짧아진 이유는 교회가 복음 전도와 회심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현재 수 많은 사본과 역본 그리고 원본의 인용문들을 보유하고 있기에 원문을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소한 내용만이 불확실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좀 더 말씀드리자면, 신구약 성경은 1,500여 년에 걸쳐서 40여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66개의 낱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볼 때 , 성경 저변에 흐르는 주제의 통일성은 더더욱 인상적입니다. 구약의 예언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의 교리는 심오하고 그 윤리는 고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 거의 2,0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성경의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성경은 죄인에게는 죄 용서를, 압제당하는 자에게는 자유를, 방황하는 자에게는 인도를, 죽어 가는 자에게는 위로를, 그리고 유족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열린 마음, 겸손한 심령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흔들어 놓고 위로해 주는 성경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인 증거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실천할 때 가지게 되는 우리 영혼에 메아리쳐 울리는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첫째, 평이하고 명백한 의미가 때때로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단락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그 단락의 중심적인 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본문의 원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21세기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 저자들의 생각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말하려고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되었을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본문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 본문을 해석할 때 본문이 속해 있는 장이나 책의 직접적인 문맥과 성경 전체의 좀 더 광범위한 문맥, 둘 다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주의할 점에 대하여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공회 39개 신조의 제20항에서 성경의 한 곳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다른 곳과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규정한 성공회 교회의 예를 들면서 이런 처사는 합당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함으로써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라는 직접적인 물음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본문만을 계속해서 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나비처럼 이 구절, 저 구절을 무책임하게 왔다 갔다 해서도 안됩니다. 구약과 신약을 번갈아 가면서 읽어도 좋고, 아니면 한 권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연구하여도 좋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IVP에서 출간한 BST (Bible Speak Today) 시리즈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은 한국어로 완간이 되었으나 구약은 몇 권만 번역되었고 계속 번역중에 있습니다). 

 

매일 큐티에 관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서유니온에서 발간하는 매일성경 방식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성서유니온에서는 매일 읽을 본문에 해설을 첨가한 책자를 수많은 언어로 출판하고 있는데 (한국 성서유니온에서는 한국어 번역을 담당), 독자의 연령과 경험에 따라 분류되어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자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성서유니온은 독자들이 5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일독할 수 있도록 내용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한 것은 흔히 혼자 큐티를 할 때 잘못된 해석이나, 편협한 생각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때때로 매우 좋은 깨달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구 운동하여 체중감량에 들어가는 것보다 전문적인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체중감량과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부터 성경을 읽는 4가지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SBC 말씀나눔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 (2016/2/22~2/26)

하나님의 은혜와 죄인에 대한 사랑은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이 필요한 모든 증거는 성경 속에서 충분히 계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려 주는 그분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참고 히브리서 1:1-2). 즉, 하나님께서는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알려주셨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복음의 말씀이며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므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그분의 언약 백성에게 자신을 알려 주셨으며, 특히 자신의 사자인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또는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와 같은 전형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그분의 신탁을 정기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도 이러한 선지자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취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말씀들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에 대한 증거는 가히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경우들

먼저, 예수님은 삶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셨으며, 사탄의 모든 유혹을 적절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1-11; 누가 4:1-13). 둘째,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것과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으셨으며,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사명을 조명하여 해석하셨습니다(눅 4:16-21; 요 5:39). 셋째,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고 인용하셨습니다(막 12:35-37).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인 신약의 저자들 역시 구약 성경에 대해 예수님과 동일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무엇이 있을까요?

 

디모데 후서 3장 16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원어는 God-breathed란 의미로써 이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셨다의 뜻임)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감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저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입으로 그들의 말에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중 저작설에 대한 극적인 비유로, 그분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저자들의 말이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의 말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믿으셨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저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선택하고, 부르고, 준비하고, 파송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맡겨졌던 것과 유사한 사역을 사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에 나오는 이른바 다락방 강화에서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들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은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가시면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님은 오셔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사도들에게 생각나게 하여 주실 것과 사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14:16; 16:12-13). 이처럼 생각나게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보완적인 약속들은 복음서와 서신서에 두드러지게 성취되었습니다.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SBC 매일큐티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 성경읽기 (2016.2.15~2.19)

2.15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우리의 신앙이 발전하기 바란다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의 시간(Quit Time)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은 은혜의 방편 중 최소한 두 가지를 행하게 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물론 모두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시간이 언제인지를 결정해야 하지만, 이상적으로는 하나님과 거룩한 교감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할 일이자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이것을 습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들이 이러한 습관을 기르는 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1943년 윌리엄 템풀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그리스도께 제일 먼저 충성을 바쳐야만 한다. 다른 어떤 것도 매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위한 시간을 만들라.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굳건히 지키라 는 말로 경건의 시간을 확보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특히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2.16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경건의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 교회는 새벽기도라는 이름으로 오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면 통상 찬송하고, 성경읽고, 설교가 있고, 그리고 통성 기도를 한 뒤 집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벽기도는 여러가지의 은혜의 방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과 시간을 갖던 경건의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50년 이상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방법으로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나 자신이 직접 증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편, 프랭크 개벨라인은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토니브룩 학교에서 41년 동안 교장을 역임하신 분인데 그의 80번 째 생신을 맞아서 다음 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유지하십시오 내 삶을 돌아보니, 내 인생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60여년 동안 매일 지속했던 성경과의 만남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2.17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면 어떻게 균형있게 이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경읽기와 기도, 이 두가지가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처럼 우리도 그분께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10) 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던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눅10:39). 다음으로, 우리는 그분께 하고 싶은 말을 아룁니다. 특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후에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자의 운동과 같습니다. 그분과의 대화는 쌍방 간의 대화로, 이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심지어 우정)는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 이런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깊어져 가는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하게 되고 그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18 – 성경읽기
은혜의 방편의 첫 번째는 아무래도 성경입니다. 성경을 떠올리면 두 가지 질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혹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믿어야 하는가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입니다. 먼저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통상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란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개념입니다. 그 말은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목적은 그분이 베일을 벗기고 친히 보여 주시지 않는 한, 그렇게 하실 때까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고 유한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성을 어떻게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를 초월해 계셔서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19 – 성경읽기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직접 표현하신 대목이 이사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하나님의 생각과 그분의 길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높다면, 우리는 그분이 솔선해서 그것을 보여 주시지 않는 이상 결코 그분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하신 첫 번째 사건은 천지창조입니다. 즉, 창조된 우주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영광에 대한 계시일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에 대한 분에 넘치는 사랑은 창조 세계에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롭고 자비하신 성품들을 계시하였을까요?

SBC매일큐티

2016.2.1~2.5

10계명 & 주님께 순종하는 삶

2016.2.1 – 10계명
탐욕의 해독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무수한 고난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삶을 살아가는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을 찾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만족해야 할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바로 여기에 제10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탐욕이라 불리는, 사납게 날뛰고 파괴적인 욕망에 대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소함과 관용과 자족의 조화입니다. 

 

2016.2.2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십계명은 우리에게 대단히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절대적이고 영적이며 지속적이고 규칙적이며 순종의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우리 이웃의 삶과 가정, 재산, 그리고 명예를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이들 계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겠습니까?

 

2016.2.3 – 주님께 순종하는 삶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를 통하여 우리의 죄성을 폭로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함으로써, 죄인인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시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십계명을 통해 나타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제, 속건제, 번제 그리고 대속죄일 등과 같은 제도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는 것이지 죄를 없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방법등을 통하여 율법은 우리를 유일한 구원자이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율법이 칭의를 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보내고 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화를 위하여 다시 우리를 십계명이 중심이된 율법에게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때 오직 성령님만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히8:10). 

 

2016.2.4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은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분께 성품을 다시 열어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는 특별한 통로를 직접 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통로를 일컬어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성경 읽기, 기도, 예배, 교제 및 성만찬이 포함됩니다. 청교도들이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존스토트 목사님이 라일 감독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고통없이는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2016.2.5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의 신체적인 건강을 빗대어 은혜의 방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을 지키고 질병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행병이 돌고 세균에 감염되었을 때 부랴부랴 의약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식사와 수면 및 운동 습관을 훈련함으로써 면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에 맞서 싸우고 경건을 더욱 개발하는 진짜 비결은, 유혹이 닥치는 순간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유혹에 빠졌을 경우에 주님께 구원을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평소에 성령님 안에서 훈련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영적인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SBC 매일큐티

제 9 계명 & 제 10 계명 (2016.1.25~1.29)

2016.1.25
거짓 증언을 금하는 9계명은 진실한 증언에 대한 책임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주장하셨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혐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016.1.26
거짓 증언과 진실한 증언은 모두 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이 계명은 선이나 악을 초래 할 수 있는, 인간의 혀가 지닌 엄청난 위력을 상기시켜 줍니다.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 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1-6). 비록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너무나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약3:8)는 사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또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혀를 제어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했던 기도를 쉬지 않고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울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제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16.1.27
마지막 계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 계명을 통해서 십계명이 시민법에서 도덕법으로, 외적인 행위에 비중을 둔 법에서 내적인 경건에 관심을 둔 법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품었다고 해서 법정에 고소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도둑질의 관계는 분노와 살인, 음욕과 간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죄악, 심지어 범죄 행위로 발전할 성향이 다분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2016.1.28
이 계명은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흠이 없다고 믿었으며 외적인 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했습니다. 빌립보서에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자전적 고백을 들으면 이와 같습니다 :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고 “탐내지 말라” 고 한 율법의 10번째 계명을 접했을 때 그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몰랐다면 죄가 무엇인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계명이 그의 마음 상태를 환히 보여 주는 바람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7:7-12).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로마서 7장을 읽기를 권합니다.

 

2016.1.2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참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엡5:5). 이 말씀은 탐욕이 인간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크게 무엇인가를(혹은 누군가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그 무엇(누구)에게 내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은 이기심입니다. 사실 이 계명은 소비 사회의 탐욕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무관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만족입니다. 만족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보다 신약 성경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히13:5).
 

매일큐티

제 8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 &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18~1.22)

2016.1.18
8계명은 사유 재산을 보유하고 그것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질서 있고 안전한 사회는 우리의 소유와 상대방의 소유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구별을 흐리는 것은 언제나 반사회적인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재산을 맡았을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재산권을 인정해 주어야 하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런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8계명은 적용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온갖 종류의 부정직과 속임수, 음모, 부당한 과잉 요구, 암거래, 정해진 시간보다 적게 일하는 것, 탈세 및 관세를 피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실이 정직하다고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2016.1.19
한편 만약 우리가 8계명을 범했다면 당연히 우리가 취했던 것을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규례에 따르면, 손해 배상은 단순한 상환이상이었습니다. 예컨데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마리로 갚을지니라”(출22:1) 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세리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였을 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요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일제 시대에 청소년기를 지냈습니다. 어느 일본인 집에 물건을 팔러 들어갔다가 그 집 주인의 구두가 너무나 탐이나서 가지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마다 도둑질 한 것이 생각이 나서 할 수 없이 그 일본인에게 울면서 돌려주었더니 그 일본인이 놀라 그 이유를 묻고는 너무나 감격을 하여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간증을 들은 바 있습니다. 회개하는 능력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016.1.20
도둑질을 금하는 8계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장려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며,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위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부정직한 삶을 살다가 회심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도둑에서 일꾼으로 그리고 구제하는 자로 변화하는 것, 오직 복음만이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21
6,7,8 계명은 각각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고,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반면에 제9계명은 거짓 증거로부터 사람의 명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사실 좋은 평판이야말로 최상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명예를 빼앗는다면 그것은 강도짓이나 마찬가지며,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9계명이 적용되는 범위는 매우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6.1.22
제9계명이 적용되는 첫 번째 상황은 바로 법정입니다. 재판장과 배심원이 고소인과 변호인의 심리를 각가가 청취할 때, 대개 피고인의 운명은 서약하고 증언하기 위해 소환된 증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불려 나온 증인은 심문과 그에 대한 반대 심문을 받게 됩니다. 위증은 극악한 범죄 행위로 결코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거짓 증인들의 손에 고난을 당한 죄수가 어디 예수님뿐이겠습니까? 거짓 증언은 비단 법정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혹은 더 큰 공동체에서 중상모략 내지는 악의적인 험담 형태로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뒤에서 수근수근거리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망론된 폄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고 2천년전 사도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들은 별식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내려갑니다. 우리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때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매일 큐티

2016. 1. 11-15
제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2016.1.11
제 7계명은 각 사회의 결혼제도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일컫는 야곱의 경우 4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제 7계명이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을 때의 이스라엘의 상황 역시 일부 다처제였습니다. 이후 제정된 모세 율법만 보더라도 명백히 동거 목적으로 계집 종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출21:7-11). 이런 상황에서 7계명은 남편이 있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질 때만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간음의 문제를 다룬 산상수훈에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 28)고 하심으로 행위에서 마음의 문제로 이전을 하셨고, 이혼에 관해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단수)와 여자(단수)로 지으시고”(마19: 4) 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일부일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암시하셨으며,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집사와 장로의 임명 조건으로 “한 아내의 남편” (딤후3: 2, 12)을 두 번이나 강조하여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일부일처에 근거하여 제 7계명을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2016.1.12
그리스도인은 성(性)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로 태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 (창1:27) 하셨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성(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에 의해 고안된 사실과 이는 자녀 출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두 배우자가 서로 만족을 느끼도록 결혼을 제정하신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결혼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창2:24). 예수님도 앞에 언급하신 두 구절을 친히 소개하시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막10:6-9)고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바울 역시 남편과 아내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엡 5:21-33). 제7계명은 이런 진리를 배경으로 의의를 갖습니다.

 
2016.1.13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제정하신 것은 결혼이라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상황을 통해서만 우리가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밖의 다른 모든 상황에서의 성적인 쾌락은 금하시는 것입니다. 제 7계명에서는 오직 간음만을 구체적으로 정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혼자가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경우(대개는 속임으로), 배우자와 원래 약속했던 정절을 부정하고 동시에 자녀들의 성장에도 심한 타격을 줌으로써 결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성적 부도덕 행위들도 결혼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제7계명 속에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16.1.14
제7계명 속에 함축된 여타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혼외정사와 혼전동거를 먼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성관계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이 결여된 사랑을 경험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한쪽 배우자는 오랜 기간 관계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간절한 반면에 다른 쪽 배우자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이런 관계는 상대방에게 잔인한 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성 간의 결혼이 이성 간의 결혼 관계에 대한 합법적인 대안이라는 ‘동성애’ 단체의 주장을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사람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승인하신 ‘한 몸’의 체험은 오로지 이성 간의 일부일처 관계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2016.1.15
7계명과 관련하여 일생 독신으로 사시다가 90살에 소천하신 존 스타트 목사님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적인 충동이 너무 강력해 제어할 수 없다는 주장을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동물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아도, 또 그 유혹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주장하는 간증입니다 (고전10:13). 따라서 우리는 성적인 자기제어가 가능하며, “음행을 피해야” 하고, 또한 그분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고전 6:18-20).’

 

SBC 매일큐티

SBC 매일큐티 (2016/1/4~2016/1/8)

이웃을 향한 사랑: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롬13:10). 이 말씀과 같이 소극적으로 볼 때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말이나 행동으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는 황금률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며 그들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도록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남은 다섯 가지 계명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 역행하는 다섯 가지 범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이 계명을 인간 생명을 취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 조항으로 여기고 그와 같이 주장하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형제도의 폐지론자와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6계명에 대한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율법이 극단적인 경우에 형벌로써 사형을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가나안 족속과의 거룩한 전쟁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6 계명이 금하는 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불법적인 살생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거듭 정죄를 받았던 최악의 범죄 가운데 하나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과 같은 제도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동물을 포함한 일반적인 생명의 신성함보다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계명의 범위를 살인을 행하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말과 심지어 생각으로까지 확대하여 적용하셨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임)라 하는 자는 공회 (유대인 최고재판소 역할을 하는 산헤드린을 의미)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5:22). 이 말씀의 의미는 부당하게 화를 내는 것과 욕을 하는 것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 고 가르쳐 주심으로 형제를 부당히 분노하게 만드는 행위 역시 살인 죄에 해당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인 규범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이야말로 구약에서 사형이라는 형벌이 제정된 근거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9:6). 성경에 따르면, 사형이란 (살인자의 죽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자의 죽음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유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살인 사건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사형으로부터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창4:13-15). 사견으로는 국가는 생명을 취할 권위, 즉 칼을 가질 권세 (롬13:4)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들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존재함으로 이에 따른 형량의 감경을 고려해야만 하고 대다수의 국가에서 형법의 규정에 그런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동일한 원리는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문제로 대두됩니다. 태아는 적어도 곧 인간으로 만들어질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낙태의 선택권을 지지 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낙태에 의한 태아의 파괴를 극히 조심스럽게 제한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살인으로 간주하며, 태아에 대한 실험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입장이 타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