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말씀나눔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 (2016/2/22~2/26)

하나님의 은혜와 죄인에 대한 사랑은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이 필요한 모든 증거는 성경 속에서 충분히 계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려 주는 그분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참고 히브리서 1:1-2). 즉, 하나님께서는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알려주셨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복음의 말씀이며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므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그분의 언약 백성에게 자신을 알려 주셨으며, 특히 자신의 사자인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또는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와 같은 전형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그분의 신탁을 정기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도 이러한 선지자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취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말씀들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에 대한 증거는 가히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경우들

먼저, 예수님은 삶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셨으며, 사탄의 모든 유혹을 적절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1-11; 누가 4:1-13). 둘째,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것과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으셨으며,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사명을 조명하여 해석하셨습니다(눅 4:16-21; 요 5:39). 셋째,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고 인용하셨습니다(막 12:35-37).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인 신약의 저자들 역시 구약 성경에 대해 예수님과 동일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무엇이 있을까요?

 

디모데 후서 3장 16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원어는 God-breathed란 의미로써 이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셨다의 뜻임)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감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저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입으로 그들의 말에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중 저작설에 대한 극적인 비유로, 그분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저자들의 말이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의 말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믿으셨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저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선택하고, 부르고, 준비하고, 파송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맡겨졌던 것과 유사한 사역을 사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에 나오는 이른바 다락방 강화에서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들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은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가시면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님은 오셔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사도들에게 생각나게 하여 주실 것과 사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14:16; 16:12-13). 이처럼 생각나게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보완적인 약속들은 복음서와 서신서에 두드러지게 성취되었습니다.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SBC 매일큐티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 성경읽기 (2016.2.15~2.19)

2.15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우리의 신앙이 발전하기 바란다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의 시간(Quit Time)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은 은혜의 방편 중 최소한 두 가지를 행하게 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물론 모두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시간이 언제인지를 결정해야 하지만, 이상적으로는 하나님과 거룩한 교감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할 일이자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이것을 습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들이 이러한 습관을 기르는 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1943년 윌리엄 템풀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그리스도께 제일 먼저 충성을 바쳐야만 한다. 다른 어떤 것도 매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위한 시간을 만들라.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굳건히 지키라 는 말로 경건의 시간을 확보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특히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2.16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경건의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 교회는 새벽기도라는 이름으로 오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면 통상 찬송하고, 성경읽고, 설교가 있고, 그리고 통성 기도를 한 뒤 집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벽기도는 여러가지의 은혜의 방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과 시간을 갖던 경건의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50년 이상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방법으로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나 자신이 직접 증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편, 프랭크 개벨라인은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토니브룩 학교에서 41년 동안 교장을 역임하신 분인데 그의 80번 째 생신을 맞아서 다음 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유지하십시오 내 삶을 돌아보니, 내 인생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60여년 동안 매일 지속했던 성경과의 만남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2.17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면 어떻게 균형있게 이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경읽기와 기도, 이 두가지가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처럼 우리도 그분께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10) 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던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눅10:39). 다음으로, 우리는 그분께 하고 싶은 말을 아룁니다. 특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후에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자의 운동과 같습니다. 그분과의 대화는 쌍방 간의 대화로, 이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심지어 우정)는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 이런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깊어져 가는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하게 되고 그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18 – 성경읽기
은혜의 방편의 첫 번째는 아무래도 성경입니다. 성경을 떠올리면 두 가지 질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혹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믿어야 하는가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입니다. 먼저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통상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란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개념입니다. 그 말은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목적은 그분이 베일을 벗기고 친히 보여 주시지 않는 한, 그렇게 하실 때까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고 유한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성을 어떻게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를 초월해 계셔서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19 – 성경읽기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직접 표현하신 대목이 이사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하나님의 생각과 그분의 길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높다면, 우리는 그분이 솔선해서 그것을 보여 주시지 않는 이상 결코 그분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하신 첫 번째 사건은 천지창조입니다. 즉, 창조된 우주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영광에 대한 계시일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에 대한 분에 넘치는 사랑은 창조 세계에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롭고 자비하신 성품들을 계시하였을까요?

SBC매일큐티

2016.2.1~2.5

10계명 & 주님께 순종하는 삶

2016.2.1 – 10계명
탐욕의 해독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무수한 고난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삶을 살아가는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을 찾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만족해야 할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바로 여기에 제10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탐욕이라 불리는, 사납게 날뛰고 파괴적인 욕망에 대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소함과 관용과 자족의 조화입니다. 

 

2016.2.2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십계명은 우리에게 대단히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절대적이고 영적이며 지속적이고 규칙적이며 순종의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우리 이웃의 삶과 가정, 재산, 그리고 명예를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이들 계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겠습니까?

 

2016.2.3 – 주님께 순종하는 삶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를 통하여 우리의 죄성을 폭로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함으로써, 죄인인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시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십계명을 통해 나타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제, 속건제, 번제 그리고 대속죄일 등과 같은 제도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는 것이지 죄를 없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방법등을 통하여 율법은 우리를 유일한 구원자이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율법이 칭의를 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보내고 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화를 위하여 다시 우리를 십계명이 중심이된 율법에게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때 오직 성령님만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히8:10). 

 

2016.2.4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은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분께 성품을 다시 열어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는 특별한 통로를 직접 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통로를 일컬어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성경 읽기, 기도, 예배, 교제 및 성만찬이 포함됩니다. 청교도들이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존스토트 목사님이 라일 감독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고통없이는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2016.2.5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의 신체적인 건강을 빗대어 은혜의 방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을 지키고 질병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행병이 돌고 세균에 감염되었을 때 부랴부랴 의약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식사와 수면 및 운동 습관을 훈련함으로써 면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에 맞서 싸우고 경건을 더욱 개발하는 진짜 비결은, 유혹이 닥치는 순간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유혹에 빠졌을 경우에 주님께 구원을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평소에 성령님 안에서 훈련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영적인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SBC 매일큐티

제 9 계명 & 제 10 계명 (2016.1.25~1.29)

2016.1.25
거짓 증언을 금하는 9계명은 진실한 증언에 대한 책임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주장하셨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혐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016.1.26
거짓 증언과 진실한 증언은 모두 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이 계명은 선이나 악을 초래 할 수 있는, 인간의 혀가 지닌 엄청난 위력을 상기시켜 줍니다.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 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1-6). 비록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너무나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약3:8)는 사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또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혀를 제어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했던 기도를 쉬지 않고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울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제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16.1.27
마지막 계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 계명을 통해서 십계명이 시민법에서 도덕법으로, 외적인 행위에 비중을 둔 법에서 내적인 경건에 관심을 둔 법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품었다고 해서 법정에 고소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도둑질의 관계는 분노와 살인, 음욕과 간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죄악, 심지어 범죄 행위로 발전할 성향이 다분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2016.1.28
이 계명은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흠이 없다고 믿었으며 외적인 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했습니다. 빌립보서에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자전적 고백을 들으면 이와 같습니다 :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고 “탐내지 말라” 고 한 율법의 10번째 계명을 접했을 때 그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몰랐다면 죄가 무엇인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계명이 그의 마음 상태를 환히 보여 주는 바람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7:7-12).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로마서 7장을 읽기를 권합니다.

 

2016.1.2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참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엡5:5). 이 말씀은 탐욕이 인간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크게 무엇인가를(혹은 누군가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그 무엇(누구)에게 내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은 이기심입니다. 사실 이 계명은 소비 사회의 탐욕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무관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만족입니다. 만족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보다 신약 성경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히13:5).
 

매일큐티

제 8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 &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18~1.22)

2016.1.18
8계명은 사유 재산을 보유하고 그것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질서 있고 안전한 사회는 우리의 소유와 상대방의 소유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구별을 흐리는 것은 언제나 반사회적인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재산을 맡았을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재산권을 인정해 주어야 하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런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8계명은 적용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온갖 종류의 부정직과 속임수, 음모, 부당한 과잉 요구, 암거래, 정해진 시간보다 적게 일하는 것, 탈세 및 관세를 피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실이 정직하다고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2016.1.19
한편 만약 우리가 8계명을 범했다면 당연히 우리가 취했던 것을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규례에 따르면, 손해 배상은 단순한 상환이상이었습니다. 예컨데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마리로 갚을지니라”(출22:1) 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세리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였을 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요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일제 시대에 청소년기를 지냈습니다. 어느 일본인 집에 물건을 팔러 들어갔다가 그 집 주인의 구두가 너무나 탐이나서 가지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마다 도둑질 한 것이 생각이 나서 할 수 없이 그 일본인에게 울면서 돌려주었더니 그 일본인이 놀라 그 이유를 묻고는 너무나 감격을 하여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간증을 들은 바 있습니다. 회개하는 능력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016.1.20
도둑질을 금하는 8계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장려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며,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위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부정직한 삶을 살다가 회심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도둑에서 일꾼으로 그리고 구제하는 자로 변화하는 것, 오직 복음만이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21
6,7,8 계명은 각각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고,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반면에 제9계명은 거짓 증거로부터 사람의 명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사실 좋은 평판이야말로 최상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명예를 빼앗는다면 그것은 강도짓이나 마찬가지며,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9계명이 적용되는 범위는 매우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6.1.22
제9계명이 적용되는 첫 번째 상황은 바로 법정입니다. 재판장과 배심원이 고소인과 변호인의 심리를 각가가 청취할 때, 대개 피고인의 운명은 서약하고 증언하기 위해 소환된 증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불려 나온 증인은 심문과 그에 대한 반대 심문을 받게 됩니다. 위증은 극악한 범죄 행위로 결코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거짓 증인들의 손에 고난을 당한 죄수가 어디 예수님뿐이겠습니까? 거짓 증언은 비단 법정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혹은 더 큰 공동체에서 중상모략 내지는 악의적인 험담 형태로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뒤에서 수근수근거리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망론된 폄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고 2천년전 사도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들은 별식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내려갑니다. 우리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때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매일 큐티

2016. 1. 11-15
제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2016.1.11
제 7계명은 각 사회의 결혼제도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일컫는 야곱의 경우 4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제 7계명이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을 때의 이스라엘의 상황 역시 일부 다처제였습니다. 이후 제정된 모세 율법만 보더라도 명백히 동거 목적으로 계집 종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출21:7-11). 이런 상황에서 7계명은 남편이 있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질 때만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간음의 문제를 다룬 산상수훈에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 28)고 하심으로 행위에서 마음의 문제로 이전을 하셨고, 이혼에 관해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단수)와 여자(단수)로 지으시고”(마19: 4) 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일부일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암시하셨으며,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집사와 장로의 임명 조건으로 “한 아내의 남편” (딤후3: 2, 12)을 두 번이나 강조하여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일부일처에 근거하여 제 7계명을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2016.1.12
그리스도인은 성(性)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로 태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 (창1:27) 하셨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성(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에 의해 고안된 사실과 이는 자녀 출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두 배우자가 서로 만족을 느끼도록 결혼을 제정하신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결혼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창2:24). 예수님도 앞에 언급하신 두 구절을 친히 소개하시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막10:6-9)고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바울 역시 남편과 아내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엡 5:21-33). 제7계명은 이런 진리를 배경으로 의의를 갖습니다.

 
2016.1.13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제정하신 것은 결혼이라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상황을 통해서만 우리가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밖의 다른 모든 상황에서의 성적인 쾌락은 금하시는 것입니다. 제 7계명에서는 오직 간음만을 구체적으로 정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혼자가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경우(대개는 속임으로), 배우자와 원래 약속했던 정절을 부정하고 동시에 자녀들의 성장에도 심한 타격을 줌으로써 결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성적 부도덕 행위들도 결혼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제7계명 속에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16.1.14
제7계명 속에 함축된 여타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혼외정사와 혼전동거를 먼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성관계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이 결여된 사랑을 경험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한쪽 배우자는 오랜 기간 관계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간절한 반면에 다른 쪽 배우자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이런 관계는 상대방에게 잔인한 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성 간의 결혼이 이성 간의 결혼 관계에 대한 합법적인 대안이라는 ‘동성애’ 단체의 주장을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사람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승인하신 ‘한 몸’의 체험은 오로지 이성 간의 일부일처 관계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2016.1.15
7계명과 관련하여 일생 독신으로 사시다가 90살에 소천하신 존 스타트 목사님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적인 충동이 너무 강력해 제어할 수 없다는 주장을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동물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아도, 또 그 유혹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주장하는 간증입니다 (고전10:13). 따라서 우리는 성적인 자기제어가 가능하며, “음행을 피해야” 하고, 또한 그분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고전 6:18-20).’

 

SBC 매일큐티

SBC 매일큐티 (2016/1/4~2016/1/8)

이웃을 향한 사랑: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롬13:10). 이 말씀과 같이 소극적으로 볼 때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말이나 행동으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는 황금률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며 그들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도록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남은 다섯 가지 계명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 역행하는 다섯 가지 범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이 계명을 인간 생명을 취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 조항으로 여기고 그와 같이 주장하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형제도의 폐지론자와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6계명에 대한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율법이 극단적인 경우에 형벌로써 사형을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가나안 족속과의 거룩한 전쟁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6 계명이 금하는 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불법적인 살생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거듭 정죄를 받았던 최악의 범죄 가운데 하나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과 같은 제도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동물을 포함한 일반적인 생명의 신성함보다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계명의 범위를 살인을 행하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말과 심지어 생각으로까지 확대하여 적용하셨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임)라 하는 자는 공회 (유대인 최고재판소 역할을 하는 산헤드린을 의미)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5:22). 이 말씀의 의미는 부당하게 화를 내는 것과 욕을 하는 것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 고 가르쳐 주심으로 형제를 부당히 분노하게 만드는 행위 역시 살인 죄에 해당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인 규범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이야말로 구약에서 사형이라는 형벌이 제정된 근거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9:6). 성경에 따르면, 사형이란 (살인자의 죽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자의 죽음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유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살인 사건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사형으로부터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창4:13-15). 사견으로는 국가는 생명을 취할 권위, 즉 칼을 가질 권세 (롬13:4)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들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존재함으로 이에 따른 형량의 감경을 고려해야만 하고 대다수의 국가에서 형법의 규정에 그런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동일한 원리는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문제로 대두됩니다. 태아는 적어도 곧 인간으로 만들어질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낙태의 선택권을 지지 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낙태에 의한 태아의 파괴를 극히 조심스럽게 제한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살인으로 간주하며, 태아에 대한 실험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입장이 타당합니다.

SBC 매일 큐티

2015. 12. 28 ~ 3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고르반 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뜻은 드렸다 즉, 하나님께 드렸다 혹은 바쳤다 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 법률은 개개인이 자신의 재산에 하나님께 드린 것임 이란 표시를 하여 일상적인 용도에서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친 헌물의 성격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행하는 것은 심각한 결정이었고 거의 번복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르반 맹세를 위반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중대한 결과를 맞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는데 이는 아들이 자신의 재물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다고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 그의 부모님이 그 재산에서 혜택을 보지 못하도록 배제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은 실질상 제 5계명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에게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도다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해석이나 전통을 이용하여 실질상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있는지 여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계명은 오직 자녀가 부모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부모도 자녀들에게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해야만 하는데 이는 자녀들이 낙심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골3:21). 이러한 의무의 상호적인 속성은 부모의 행동에 확실한 점검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5계명의 범위는 부모의 차원을 넘어서 선생님, 목회자, 고용주와 우리 보다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소위 우리의 손윗사람들을 포괄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사랑하시며, 따라서 분명한 위계질서를 세우시고(특히 가족과 국가에), 자기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기 바라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인간 존재와 인간의 제도에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실 때, 그들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자유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나 제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남용한다면, 그것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곧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들의 표현한 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극적인 교육방법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일 뿐만 아니라 대조를 통해 양자를 비교하는 히브리식 표현법의 좋은 예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한 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한 분이 어떻게 다음에는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문제의 열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병행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 10:37)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로 2015년도가  끝났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고 2016년도에 주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SBC 매일큐티

2015.12.21 25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1)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허락된 일과 금지된 일을 소소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상술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한 법을 사소한 규정들로 덮어씌우는 바람에 오히려 그 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규정들을 고의로 깨뜨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규정들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이 허기져서 곡식의 이삭들을 잘라 먹었을 때, 서기관들은 이것이 추수에 해당하는 행위이므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을 어겼다고 비난한 반면, 주님은 오히려 그들 격려하셨습니다.이를 통하여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근본 원칙을 천명하셨습니다(막2:23-28). 그러나 오늘날도 이스라엘의 근본주의자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도 누르지 못하고 에어컨도 켜거나 끄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2)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체의 행위를 금지할 것을 강요하는 안식일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안식과 경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는 성경의 원리를 확실히 받아들이셨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일들은 이러한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또한 안식일에 할 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컨데 종교적인 일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일, 마태복음 12:5)이라든가, 자선행위 (병자를 치유하는 일, 마태복음 12:9-10) 그리고 필수 불가결한 일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는 일, 마태복음 12:11)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오늘날 성직자, 의사, 농부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3)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 중 어떤 날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지켜야 하겠습니까?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이었으며, 지금도 제7일 안식교인들은 그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4계명의 신학적인 근거가 천지창조의 안식에서 출애굽의 안식으로 의미가 발전되었다는 것을 먼저 유념해야 합니다. 즉, 안식의 근거인 천지창조 후 하나님이 쉬신7번째 날(토요일)은 애굽을 탈출한 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4계명의 핵심은 날짜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1-6일 리듬에 있는 것입니다. 더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출애굽한 날입니다. 사망의 포로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근거를 주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로 흑암의 권세에서 탈출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의미있는 날을 선택하여 계속해서 예배의 날로 지켜졌다는 증거는 명백합니다(행20:7; 고전16:1-2).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

5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 것에 포함되느냐 아니면 이웃에 대한 의무의 규정에 포함되느냐에 대하여 다툼이 있습니다. 그것은 5계명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동시에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규정할 때 양쪽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공경하라 라는 국어사전의 의미는 공손히 받들어 모셔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 원어는 카베드 כַּבֵּד 로서 존경하다, 중히 여기다, 명예롭게 하다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모님께 합당한 존경과 명예를 드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5 계명은 부모님께 그 분들이 받을 합당한 권위를 드려라고 의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님은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돌보심을 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만 합니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2) 

그런데 5계명은 십계명 중 유일하게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면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 에서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동시에 5계명의 전반부는 우리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후반부의 약속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엡 6:2-3)는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5계명을 이방인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단순히 이라고 해석함으로서 5계명을 모든 민족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축복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십계명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SBC 카톡말씀 나눔

2015/12/7-11

제2계명

둘째, 우상 숭배자는 영으로(즉, 하나님은 영이시며 따라서 영적인 경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외형적이고 가시적이며 만져 볼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조차 형식주의에 치우치는 경향과 심지어 노골적인 외식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주전 7 -8 세기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공허한 종교성을 가차 없이 비난했으며, 예수님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7:6). 그러므로 예식, 순례 행진, 드라마, 각종 의식, 무릎을 꿇거나 두 팔을 올리는 등,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외형적인 형식을 사용하든지 간에, 영과 진리로라는 이중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우상 숭배라는 죄목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하십니다. 이 말에 혼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질투는 라이벌에 대한 분노이며,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라이벌이 상대편 자리에 있을 권리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다른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만을 섬기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고 하신 말씀은 물질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은 우리에게는 세상살이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돌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야 돈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마6:25-34). 

또한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 각자에게 지우신다는 사실은 성경 후반부에 가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예, 에스겔18: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계명은 영구적이고 중대한 한 가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악의 사회적인 속성 때문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는 종종 부모가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해 고난을 받습니다. 이런 결과는 신체적으로(유전된 질병등), 사회적으로 (술과 도박으로 인한 가난), 정신적으로(불행한 가정에서의 긴장과 분쟁), 그리고 도적적으로 (자녀가 배우는 부모등의 악습) 자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망령되게의 국어사전의 뜻은 정신이 흐려 정상을 벗어나서의 뜻이나 원어의 의미는 헛되이 in vain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경우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세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명백한 경우는 나쁜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이 친히 알려주신 칭호들(, 하나님, 전능자, 그리스도, 예수등)을 가르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그 칭호들을 덧붙이는 말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맹세 같은 데 사용하는 것은 그분을 경시하는 명백한 증거이며 그분을 경배하려는 열망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영어에서 사용하는 gosh, gee 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단축해서 표현하는 변조된 용어들을 사용하지도 기억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제3계명에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약속이나 맹세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나서 그 약속을 깨뜨린다면, 그것은 곧 거짓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심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일부 사람들은 맹세할 때 올바른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는 없지만, 하늘에 두고’ 나 그 밖에 땅에 두고 혹은 그 밖의 것을 두고 맹세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5:33-37). 주님은 이에 대하여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그저 간단하게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의해야할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