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큐티

2016. 8.22 – 26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일이 죄와 죽음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실까요? 그분은 제일 먼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타락한 일을 구속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 죄로 인한 결과를 가리켜 즐겨 사용하였던 말은 “멀어지다 alienated” 라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서로 멀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골1:21-22)고 말씀하십니다. 즉,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의 일을 타락시킨 원인, 곧 죄악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가 치유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악으로 단절되었던 관계는 회복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의 결과로 우리가 일과 씨름해야 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실 것이며 이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은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원래의 하나님의 의도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쉴까에 대해, 즉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그 모든 것들을 염려해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 고 하신 말씀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우리 삶에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는 말씀은 “누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먹이고 입힐 책임을 질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은 그 책임을 지실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오직 한 가지 책임만을 지고 있는데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벤 패터슨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인 우리들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먹을 것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염려해 본 적이 없으며, 집세나 의료보험료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것들을 염려하느라 밤잠을 설친 적은 더 없다. 만약 내가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을 것이다.내가 걱정해야 했던 것은 오직 어린아이다운 것, 그리고 가족들의 말에 잘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유일한 책임이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마치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할을 부자연스럽게 뒤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등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우리 일이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일이 열매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채워 주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매일큐티

SBC매일큐티 8/8-12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한 대가로 보수나 수익을 바라는 마음이 잘못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타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보수나 수익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며, 잘못되면 그것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보수와 수익은 가치 있는 일을 잘 해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일을 하는 첫째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며 일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일과 여가

미국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어느 회계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고용하는 미국인 직원들은 근무시간에는 사사로운 전화 한 번 받거나 걸지 않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업무만을 한 뒤 대신 오후 5시에 업무가 종료되어 종이 울리면 글자를 쓰다가도 볼펜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퇴근한다고 합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일과 여가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가 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님을 진정 믿는다면, 우리는 일을 여가를 위해 서둘러서 끝내 버려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놀이와 휴식은 지친 삶을 재충전해 주는 생활의 속도나 리듬의 변화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과 여가의 이러한 자세, 즉 여가의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태도는 직장에서 은퇴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오랫동안 일해 온 대가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여유롭게 쉬고 즐길 수 있으며, 또 그것이야말로 모범적인 삶이라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퇴를 그런 식으로 보기보다는 바쁜 일상에 잠시 여유를 주는 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은퇴는 총력을 기울여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벤 패터슨의 장인과 장모님은 은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하던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일의 양과 속도를 알맞게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 우리의 일생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돈이 여유가 있어 일찍 일에서 은퇴하여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내와 함께 전 미국을 침대차를 끌고 다니면서 구경하고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반면 80대의 두 할머니는 간호사와 의사로서 함께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다가 그만 자동차 사고로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값진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주님 앞에서 이 문제는 분명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일의 본질이 원래 의도에서 타락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기 위해 살도록 하셨지, 살기 위해 일하도록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은 살기 위해 즉, 생계를 잇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고용주 혹은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되어 말합니다. 이를테면 낮은 봉급, 열악한 작업환경, 한심한 상관들 또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작업들 등을 열거합니다. 이런 대답이 전부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는 일의 본질을 타락시키는 장본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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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벤 패터슨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알버트슨 슈퍼마켓 체인점을 경영하는 회사가 일련의 광고물들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광고물들은 알버트 슈펴마켓의 각 체인점에 고용된 지점장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 지점에 대해 갖고 있는 긍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신선한 야채 진열대에 둘러싸여 서 있던 한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이 슈퍼마켓은 알버트슨의 것이죠 하지만 이 농산물 점포는 저의 것입니다’ 라고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청지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조 알버트슨 소유의 슈퍼마켓 체인점 중 한 지점을 인수받아 조 알버트슨과 동일한 자격으로 그 점포를 관리할 책임을 부여 받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각 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을 위해 맺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셨으며,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과 동일한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관리할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창작 활동을 하고, 가정 주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관리하고, 농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농사를 짓고, 기업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여야 하며, 학생은 주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가진 시간을 관리하여 우리의 인격 전체가 이렇듯 선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청지기의 삶을 보고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존엄성은 우리가 소유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24:1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의 시간과 건강, 능력, 경력 및 그 외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고, 그 외의 것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적 직분을 가진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못하리니”(딤전6:7)라는 말씀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신 빈손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엄성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남부 내륙의 한 작은 침례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겨우 40달러밖에 안되는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십일조로 한 달에 4달러나 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내질 말 것을 권고하였더니,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여 “목사님, 지금 제 인생을 존엄하고 의미있게 해주는 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지금 그것을 빼앗으려 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만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여 맡기신 작은 부분에서 청지기가 되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본래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에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일을 함으로써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매일큐티: 그리스도인과 일

2016. 7. 18 – 22

오늘 부터는 벤 패터슨의 소책자 “그리스도인과 일”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에서는 일곱 난장이들이 일터를 향하여 줄지어 걸어가며 불렀던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호-오, 야호-오, 우리 모두 일하러 가세!” 삽과 곡괭이를 들고 광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목적 의식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만화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사회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허덕였던 대공황의 막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일하게 되어 정부의 구호품 없이도 가족을 먹이고 입힐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였고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벤 패터슨은 위 가사를 변형한 “어휴-우, 어휴-우, 나는 일하러 가네”는 말이 적혀진 스티커가 자동차에 붙여진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의 매우 많은 영역에서, 즐거운 일은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로 바뀌었고, 목적 의식을 가지고 종사했던 일들도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에게 일이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겠습니까?

 

성경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고, 그런 후에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생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을 두시고 계획하신 대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2:15) 하셨습니다. 이처럼, 일은 하나님의 낙원에서도 중요한 위치, 곧 중심부를 차지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성경이 일을 하나님의 저주 또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죄악과 형벌이 나타나기 전에,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선물이자 복이었으며 타락 후에 형벌로 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인간됨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신 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일하신 것처럼 일을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과 땅, 산과 호수, 숲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처럼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감동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이 우주 가운데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바로 청지기입니다.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달리 없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청지기란 어떤 한 사람의 모든 부와 재산을 위탁받아, 그 소유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경우 우리가 관리하도록 위탁받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과 삶에 대한 길을 찾는 [Book Talk]
‘청년, 길을 찾는다’ 시리즈
두 번째 편 : <그리스도인과 일>, 벤 패터슨 저/ivp.

SBC매일큐티

2016/7/11~7/15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깨어짐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내어 주심에 대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분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자 그를 버렸고 한 명은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의 주인이 멸시받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노력이 거부당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면 크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고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모세는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자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났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면서 40년을 보낸 모세를 하나님은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듭 거듭 사양하다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물러섰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는 그들에게 거절당한 사실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늙은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당하면 마음 속으로 “주님, 나는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제게 성취감을 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가서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시고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 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전부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앞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본을 따라 인내하면서 섬긴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질 것이며 말로만 주님을 부르고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배우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성공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과 성공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 목사님은 1971년 한스 로크마커 여사의 도움을 받아 우간다에 고아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차를 몰고 떠날 때면 다른 열 명의 고아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목사님의 차를 쫓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려와야 합니까? 주님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깊은 좌절 속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함을 배우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매일큐티

2016. 7.4 – 8

‘깨어짐’ 이라는 말은 자만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만심이 있는 곳에는 고백도 용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기꺼이 ‘항복’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분은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한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무리를 먹이도록 하셨습니다(마 14:19). 신앙부흥회의 한 형제는 이 구절을 읽고 케파 셈팡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깨뜨리시기 전까지는 결코 당신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하나의 떡덩어리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예수님이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것은, 훗날 자신을 깨뜨려 제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건을 예시 하신 것입니다(고전11:24 –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없이는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기독교 모임에 가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 깨어진 몸입니다. 저의 모든 기술과 능력과 재정을 여러분을 위해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교만해서 우리의 삶을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때입니다. 이때 비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따르고 있다면 완전한 공동체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시는 와중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따라 우리 자신을 공동체를 위해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우리가 갑자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정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으며, 우리의 장래가 있는 감람나무 같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에 교회까지 그 지경을 넓힐 수 있고 더 나아가 직장과 사회까지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너무 무능력해서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결코 모험을 감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릴 것은 아이가 가진 몇 조각의 떡, 과부가 가진 소량의 기름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이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초라한 목자의 지팡이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평범한 목자에 지나지 않음을 아셨지만, 모세를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의 약하고 천한 것들을 사용하시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약하고 늙은 모세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함께 하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요

 

케파 셈팡기는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우간다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미국에 있는 신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이로비에 피신해 있던 동료들이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피난민 가족을 돌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우리를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깨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취하여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눠 주기 시작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쓰기에도 빠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많은 피난민에게 음식과 물품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주님을 모범으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SBC매일 큐티

2016.6.20-24

깨어진 관계는 독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손해를 입힌 사람이나 입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이 정말 잘못을 한 게 맞는다면 그를 견책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그가 회개한다면 그를 용서해 줄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필요시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단지 종교적인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케라 셈팡기씨는 몬도씨를 만날 때마다 세가지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빛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까? 깨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이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970년대 이디 아민이 집권하던 당시 우간다의 어떤 자매는 케파 셈팡기씨에게 비밀리에 모이고 있는 우간다 신앙부흥회에 대해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집회를 하던 중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직한 죄들을 깨닫고 서로 그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에는 독재자 아민의 한 정보요원도 잠입해 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이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정보원이며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죄를 깨닫고 고백한 후 그는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공부하면서 형제들과 올바른 교제하고 있지 않다면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모임은 또 다른 형태의 소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성경공부나 교회 출석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단편소설 마지막 손님에서 친절을 베푼 주인공 게이꼬의 상사의 입을 통하여 상인의 길은 인간의 길이라고 외친 작가 구리 로혜리는 상인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그리고 선교단체에서 듣는 명령은 가라는데 있고 형제자매들 간의 사랑은 약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즉,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요13: 34-35)고 하셨습니다. 케파 셈팡기는 이 계명을 잘 알지 못하여 자신의 설교의 대상인 사람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의 설교를 더 사랑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사명을 수행하려는 열심과 열정 때문에 가장 먼저 주어진 계명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하면 안될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의 말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곧 숨겨진 부분들까지도 형제자매와 나눈다는 뜻임을 나는 몬도에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감춰 놓은 것들을 나눌 때 우리는 완전한 일체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상호 결속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모두 빛 가운데 행하기 시작할 때, 험담과 뒷말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미 빛 가운데 드러난 것을 수군거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뒷말은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바뀝니다. 형제 자매의 약점을 끄집어내는 대신,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감싸 주고 강한 부분은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사용하던 램프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램프의 불빛이 비치기 위해서는 램프의 유리가 투명해야 하고 잘 다듬어진 심지와 깨끗한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유리가 더러우면 불빛은 희미하게 비치게 됩니다. 심지가 잘 다듬어져 있지 않으면 불빛은 깜빡거리게 됩니다. 기름이 더러우면 불빛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꺼지고 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유리를 깨끗이 닦지도 않고 심지도 다듬지 않은 채 빛을 비추려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기름을 더럽히는 원인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음욕을 품는 것, 말다툼하는 것, 원수에게 증오를 품는 것 등입니다. 깨끗한 기름이 없으면 우리는 빛이 될 수 없고 형제 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SBC 매일 큐티

2016.6.13-17

마음의 벽장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주님이 등을 돌리심으로써 그분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로버트 멍어는 주님께 그 벽장문의 열쇠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슬픈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주님이 벽장을 여셔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십시오. 제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알고 있다. 네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열쇠만 내게 다오 그러면 내가 하마”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의 떨리는 손으로부터 열쇠를 넘겨 받으시더니 벽장 문으로 가셨습니다. 벽장을 여신 주님은 거기서 썩고 있던 물건을 다 꺼내어 저 멀리 던져 버리시고는 벽장을 깨끗이 청소하셨습니다. 그 뒤 페인트로 칠하고 수리하심으로 모든 분위기를 바꾸셨습니다. 그러자 로버트 멍어의 마음의 더러운 구석이 깨끗이 청소된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벽장을 어떻게 청소하셨으며 그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한 번 되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벽장

주님이 로버트 멍어의 마음의 벽장을 깨끗이 청소한뒤 그는 “아 그 죽은 것들을 내 삶에서 추방시켜 버렸을 때 얼마나 큰 승리와 해방을 맛보았는지요! 그 후에 불어온 바람은 정말 상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또 어떤 상처를 갖고 있든지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셔서 온전하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우리의 벽장을 청소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분에게 벽장의 열쇠를 넘겨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로버트 멍어의 경우와 같이 주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깊은 평안과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1:9).

 

명의이전

로버트 멍어는 이렇게 한 방 한 방 주님께 열어드리고 공유하는 삶을 살던 중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지만 어디까지나 손님과 도움을 주는 분으로서 또 친구로서 모셔들였지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이 주인으로 계시지 않은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풍성한 의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정중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지금까지는 당신이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서둘러 금고로 달려가서 재산과 부채 및 가옥의 부지와 매매 조건이 명시되어 있는 집문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돌아와서 간절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무릎을 꿇고 영원히 그분의 소유가 되도록 넘겨드렸습니다. 주님은 그날 로버트 멍어의 삶을 받으셨고 그의 마음에 비로서 깊은 평화가 주님으로 인해 자리잡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

오늘부터는 케파 셈팡기가 지은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IVP 소책자시리즈8)을 가지고 묵상을 나누겠습니다. 그는 1961년 회심하였고 그 직후 우간다 신앙부흥회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고(故) 몬도(Mondo)씨를 소개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종종 몬도씨를 만났는데, 빛가운데 행하는 삶을 강조하는 그에게 케파 셈팡기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몬도씨는 동아프리카 부흥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1930년대 들어 몇몇 우간다인들은, 그들이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이 지점에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멈춰서서 진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 23-24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간다의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5장2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계명을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경건 생활을 즐기기 전에, 그날 하루 동안 잘못 대했을지 모르는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있는지 확인하라” (마5:23).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경건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막대한 값을 치르고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관계가 틀어졌을 때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런 문제는 이미 전도서에서 갈파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5:1). 우리는 이점을 깨닫고 이의 해소를 위해 오늘 하루도 노력하고 있습니까?

 

수요일터예배 (6.15)

로버트 로젠탈이라는 심리학자는 1960년에 진행한 학생의 지능지수에 관한 실험을 통해 사람은 남들이 믿고 기대하는 대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냈습니다. 그는 무작위로 몇 개의 학교를 골라 학생들을 테스트 한 뒤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제자들에게 새로운 학업테스트를 해봤는데 학업 성취도가 크게 향상될 학생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결과를 알려드릴 테니 참고만 하시고 공개하지는 말아주세요. 다만 몇몇 학생들은 정말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사실 로젠탈이 실시한 새로운 테스크는 평범한 지능지수 테스트였고, 잠재력이 크게 나왔다는 학생들도 무작위로 선별한 보통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믿음이 개인의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학년이 끝날 때 로젠탈은 다시 학교를 방문하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선생님에게 잠재력이 크다고 지적한 학생들의 영어성적과 수학성적이 크게 향상된 것입니다. 그는 전 학생에 대한 지능지수 테스트를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잠재력이 크다고 알려준 학생들은 일 년 만에 지능지수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오랬동안 증가추세를 유지했습니다.”(탈 벤 샤하르 강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78-79). 결국 학생의 지능지수가 향상된 것은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의 신념이 변하면서 일어난 결과인 것입니다. 선생님의 관심과 믿음이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입니다. 이런 실험의 결과는 긍정의 심리학에서 삶의 긍정적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자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긍정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긍정의 태도가 전부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완성하실 때까지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주님 손에 맡기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뚜벅뚜벅 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SBC 매일큐티 –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3

2016/6/6~6/10

작업실

주님은 로버트 멍어에게 너희 집에 작업실이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의 마음의 집 지하실에는 작업대와 연장 몇 점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사용하여 많은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끔씩 내려가서 작은 도구들을 들고 법석을 떨곤 했지만, 실속있는 것을 만들어 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모시고 그리고 내려갔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변변찮은 그의 재능과 기술을 흩어보시고는 이 방은 설비가 참 잘된 곳이구나. 네 삶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로버트 멍어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만들어 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를 위해서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작업실로 들어오셔서 네 삶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시 준비하여야만 합니다.

 

 주님은 로버트 멍어의 마음의 작업대에 놓인 한 두개의 작은 장난감을 보시더니 그중 하나를 집어 드셨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면서 남을 위해 만들어 낸 것이 고작 이 작은 장난감들이냐? 로버트 멍어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들입니다. 저도 그것이 보잘 것없다는 것을 압니다. 부끄럽지만 서툴고 부족한 제 능력으로는 결코 그 이상을 만들지 못할 겁니다. 더 잘하고 싶으냐? 주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럼요!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좋다. 먼저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것을 기억하도록 하거라.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 자 긴장을 풀고 나의 영이 너를 통해서 일하도록 해라. 네가 기술이 서툴고 솜씨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성령님은 가장 노련한 일꾼이시니 그분이 네 손과 마음을 다스린다면 너를 통해 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하여 하고 있으면 됩니다.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올려드리시고 성령님께서 일하시도록 인내하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멍어는 주님께서 오락실에 대하여 물으셨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재미있게 놀곤 했습니다. 사실 그는 주님이 오락실에 관해서는 묻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그가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은 모임, 교제 활동과 흥미거리가 있었고 예수님이 그런 것을 즐기거나 찬성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해서 그 질문을 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시내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친구 몇 명과 함께 막 집을 나서려던 참에 주님은 그를 멈춰 세우시고는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고 대신 말씀드리기를 내일 밤에는 같이 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가 있거든요 하고는 오락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날 저녁 로버트 멍어는 비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나 같은 게 무슨 그리스도의 친구란 말인가? 로버트 멍어는 돌아와서 혼자 계시는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고백이 나와야만 하겠습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심리학자 쥐를 대상으로 유명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올즈는 쥐의 머리에 미니 전극을 심어놓고 쥐들이 전기레버를 이용해 자신의 행복(쾌감)중추에 자극을 주어 스스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더니, 쥐들은 배고픔과 갈증도 잊은 채 계속 이 단추만 눌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락실에서 찾는 행복감은 결국 이런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 없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한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함께 자신의 오락실로 내려갔습니다. 주님은 그의 삶에 진정한 기쁨, 참 행복과 참 만족, 참 우정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 후로는 내내 웃음과 음악이 집 안에서 울려 나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미소를 머금고 눈을 반짝이시며 너는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것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온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요15:11)임을 기억하거라 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마음의 오락실에 주님과 함께 내려가셨습니까? 

 

벽장

로버트 멍어는 어느 날인가 주님이 문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집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이 주위에  무엇인가 죽어 있는 것이 있어. 윗층 벽장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이 말씀을 듣자마자 그는 곧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았습니다. 층계참에는 네모지고 자그마한 벽장이 있었는데, 그는 자물쇠를 채워 둔 그 벽장 안에 보잘 것없는 개인적인 물건 몇가지를 넣어 두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고, 더구나 그리스도께는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죽은 것이고 썩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는 그것들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벽장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옛 생활의 찌꺼기들로서, 악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음에 이런 장소가 있지 않나 살펴보시고 어떻게 이런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 중에 하나입니다.

SBC 매일큐티 –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2

로버트 멍어는 서재에서 주님과 함께 나와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영적 주방으로 갔습니다. 그 곳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고 큰 방으로 그는 꽤 많은 시간을 주방에서 보냈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꽤 많은 노력을 들이면서 살았습니다. 주님은 식탁에 앉아 오늘 저녁 메뉴가 뭐지?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돈, 학위, 증권등이 주된 음식이고, 반찬으로는 명성과 행운에 관한 신문기사들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의 음식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음식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진정으로 영혼을 먹이고 영적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참된 음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식탁에 앉으신 주님은 좋아하시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로버트 멍어와 같이 우리의 영적 주방에 세상것으로 가득차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주님 앞에 차려놓아야만 하는 영적 식단들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할 영적인 식단은 균형잡힌 식단이어야 합니다. 이런 균형잡힌 식단을 차릴려면 우리의 욕구가 주님 뜻에 합당하도록 조절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식탁에 앉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네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여러분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음식을 원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야만 합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야망이나 욕망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도록 힘쓸 때 바로 그 양식이 우리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음식도 결국에는 허기를 남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영적 주방으로 갔을 때 우리의 욕구를 채워 줄 주방에는 어떤 메뉴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친구 되신 주님께 어떤 음식을 대접하고 있으며, 또 우리 자신은 어떤 음식을 먹고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과 같은 자기 중심적인 욕구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양식과 음료로 삼고 있습니까? 우리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함께 자신의 거실로 들어갔습니다.이 방은 좀더 친근하고 안락한 곳으로 그는 이 방을 좋아했습니다. 벽난로, 푹신푹신한 의자들, 책장, 소파가 있는 이 방은 매우 아늑했습니다. 주님 역시 만족하신 것 같았습니다. 여기는 정말 좋은 방이구나. 이 방에 자주 오도록하자. 은밀하고 조용하니 대화하며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겠구나.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그는 감격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단둘이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찌감치 여기에 올 테니 나와 함께 일과를 시작하자꾸나 하셔서 그는 아침마다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고 주님과 함께 성경을 읽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구원의 진리들을 펼쳐 보여 주셨으므로 그의 마음에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주님은 성경과 성령님을 통하여 그에 말씀하시고 그는 기도로 응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로버트 멍어와 같은 경건의 시간을 주님과 나누고 있습니까?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인격적인 대화로 경건의 시간을 보내면서 깊은 우정을 그분과 쌓아 갔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여러 가지 다른 일들에 시달리다 보니, 이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규칙적으로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고의는 아니고 단지 일이 그렇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시간이 줄어들다 못해, 때때로 거르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고, 또 어떤 때는 다른 급한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경건의 시간이 빈번히 밀려나게 되었으며 이틀씩 연속적으로 빼먹거나 그 이상 거른 날도 많았다고 합니다. 로버트 멍어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중요한 약속 때문에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가던 때를 이야기 합니다. 거실을 지나치다 방문이 열려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고 주님이 홀로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당황스러워지며 내가 저분을 내 마음에 모셔들이지 않았던가! 저분은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나의 구원자요 친구로 오셨는데, 내가 저분을 무시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계속 주님과 좋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무시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까? 한 번 반추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경건의 시간이나 성경 연구나 기도 시간을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이 주님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막대한 값을 치루고서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속하셔 당신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의 사귐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분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든 그렇지 않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의 시간을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혼자서 여러분의 마음의 거실에서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날마다 둘만의 시간과 장소에서 말씀과 기도로써 그분과 교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