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큐티

SBC 매일큐티 (2016/5/2~5/4)

가정에서의 사역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의 최우선순위는 사람들의 영원한 영적인 행복입니다. 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알고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써만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때 자신들의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자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항상 그분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웃의 물질적인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인 책임 사이의 상대적인 장점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전혀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증거와 섬김, 이 모두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결혼은 인간의 제도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제도라고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혼에 관하여 질문한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엑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일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에는 하나님이 고독한 자를 가족과 함께 살게하신다(68:6)라고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며 풍성하고 서로 협력하는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자선은 가정에서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는 경고의 말씀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이상은 우리가 가정에서 삶을 시작하여 부모와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에 따라) 결혼하여 우리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우리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청년이 된 자녀들이 사회에서 자기 관심사를 찾고 개발하는 것은 물론 자유이지만 자기 집을 여관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또한 부모도 자기 직업이나 교회, 지역 사회의 일원이나 여가 활동에 치우친 나머지, 자녀들이 자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느낌을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자녀 양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고, 자녀된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도 많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잠언을 통하여 균형잡힌 가정과 사회 생활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사역

직장이란 우리가 섬김, 즉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발휘해야 할 두 번째 영역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직장을 오직 복음 전도라는 측면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장을 동료나 직원들에게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회의 장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직장에서 유일한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들의 복음 증거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노동의 질에 의해서 보여진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은 복음 전도와는 거의 무관하게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한 형태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기독교적인 노동 철학이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출발점이 되는 곳은 창세기 1장입니다.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사색적이고, 창조적이며, 부지런하고, 신중한 일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고 일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감독하고 유지하며 새롭게 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을 때 그들 역시 창조적인 일꾼으로 만드셨습니다. 일하는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의 노동에 영광과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일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며, 생활비를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궁핍한 자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동에는 좀더 고상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의 직분을 주시고 이 직분이 노동을 통하여 실현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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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5- 29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불신자와 폭넓은 교제를 나누어야 마땅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한 좋은 취미생활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사우스웨스턴 신학교의 페이지 페터슨 총장님은 곰과 같은 야생맹수들을 수렵하는 클럽에 가담하여 취미생활을 즐겨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런 취미생활을 통해 여러명의 불신자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200 여명을 전도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였다고 합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불신자와의 폭 넓은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에 이런 전도의 열매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어진 상황에서 불신자들과의 교제의 폭을 넓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결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인과만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사회적, 지적으로만 결합하고 영적으로는 결합하지 않는 관계를 맺기에는 결혼은 너무나 친밀하고 성스러운 결합이기 때문입니다(고후6:14).

 오늘부터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른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가장 잘 예언하고 있는 본문은 이사야 42-53장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언의 최종적인 성취자로서 오셨습니다. 그분 자신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말슴하셨습니다(막10:45). 그분은 가르치시고, 설교하시고, 치유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지 못할 만큼 비천한 일도, 부담스러운 일도 없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급기야 주님은 여기서 한 번 더 낮추사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자신이 실행했던 섬김의 이상들을 본받고 나아가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라고 하시면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처럼 예수님은 섬김에 대해서도 우리의 모델이 되십니다. 섬김을 통해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생명을 주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여호와의 종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분들은 바로 사도들입니다. 바울, 베드로, 야고보, 유다 이들은 모두 서신서 서두에서 자신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주저없이 불렀습니다. 이 의미는 자신들을 예수님이 피 값을 주고 사셔서 당신의 소유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주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고 말씀하심으로 이를 명백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중적인 예속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4:5). 마르틴 루터는 이런 사상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문을1520년에 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논지를 가지고 외견상 상반되나 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에 자유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봉사(섬김)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 모든 것에 자유를 받았으나 도리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면 그런 사랑의 봉사 즉, 섬김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섬김(service)과 사역(ministry) 이 두 단어는 모두 동일한 헬라어 단어인 디아코니아(diakonia) 를 한글로 번역한 말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섬김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우리의 이웃은 모두 몸과 영혼을 가지고 사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이웃의 전체적인 행복, 즉 신체적, 영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3가지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명과 은사에 따라 섬김의 중점이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이 3가지를 함께 또 균형있게 고려하지 못하고 한 곳으로 치우치는데서 우리의 섬김의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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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18 – 22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건강과 발전의 첫 번째 조건이, 매일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조건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고립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교제의 기쁨을 이미 맛보았다면 결코 교제를 끊어 버리고 살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신자의 경우는 교회의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고 기존신자들의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 신자들이 가능한 별 어려움 없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인내하라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헌신된 일원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 제자도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헌신된 일원으로 적응하고 나면 그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면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곧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 고독한 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측면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사회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하심으로 은밀하게 기도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기도할 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함께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인 것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되었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장차 도래할 영원 속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모든 나라와 문화로부터 하나로 불러 모아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수많은 생생한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거룩한 사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현저한 예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백성들을 하나님 가정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의 주춧돌(엡2:19-22)로 묘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양들로(요12: 27-28),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가지로(요15:1-7),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고전12:27) 표현하는 대목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지체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갈라놓았던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와 화해하심으로써 우리가 서로 화해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신조이자 굉장한 유익을 서로간에 가져다 줍니다. 먼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안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아이들이 사춘기라는 변혁의 시기를 통과할 때 가정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우리가 유혹, 환난, 회의에 시달리고 있을 때, 교회를 통한 거룩한 교제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지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영국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최근 주일 예배를 계속 빠지고 있는 신자를 심방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벽난로 앞에 조용히 앉아 있더니 부젓가락을 집고 불 속에서 한창 잘 타고 있는 석탄 하나를 집어서 벽난로 바깥에 꺼내 놓았습니다. 그 석탄은 얼마간 깜박이더니 불씨가 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꺼진 석탄을 들어다가 벽난로 속에서 타고 있는 다른 석탄들과 함께 두었습니다. 그러자 몇 초 만에 꺼졌던 석탄은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그는 심방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그 신자는 교회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지역교회에 소속되는 문제에 관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이렇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눈에 분명히 보이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변칙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지역교회를 찾아 교회의 완전한 일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항상 이 교회 저교회를 철새처럼 떠돌아나니면서 한 곳에 둥지를 틀지 못하는, 소위 교회 집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교회에 등록해서 정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주일 예배 때에는 항상 당신의 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환경이 허락한다면, 성경 공부나 기도회, 십여 명이 함께하는 이웃 간의 교제 모임처럼 주 중에 이루어지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를 알아 가고 주 안에서 서로 격려할 수 있으려면 소그룹 모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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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11~4/15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면 좋을까요? 먼저 우리의 창조와 보존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축복에 대하여 그 다음으로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구속하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아울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주실 그 소망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루를 마감하는 순간에 오늘 하루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하기 위해 되돌아보는 것은 필요한 습관입니다. 물론 하루 동안에 지은 죄 역시 고백하여야만 하지만 이때 반드시 우리 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원 또는 간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면서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은 기도를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알고 계시지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랑 안에서 그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싶어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분을 어르거나 조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와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실 것 그리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등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주 기도문에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외관상 서로 부딪치는 이런 말씀들을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만 하겠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기도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존 칼빈은 기도의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것들에 대하여 그분께 알려 드린다거나, 의무를 다하라고 재촉하거나, 내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억지로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신자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찾도록 그들 자신을 일깨우고,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함으로써 믿음을 발휘하며, 자신의 염려를 하나님의 품에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한마디로 기도는 하나님 한 분만이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이 모르는 정보를 알려 드리는 것도, 내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게 바꾸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갈망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불확실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일, 다음 주, 그리고 내년에 해야할 일들이 무엇이고 이와 관련된 희망과 두려움을 예상하게 됩니다. 또한 질병에 걸리는 문제, 부모님과 사별, 우리의 죽음, 재림과 부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더 멀리 응시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또 일어난다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불확실성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원, 우리의 기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 가지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며, 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한 마디로 기도 생활입니다. 이 기도 생활은 바로 성령에 의한, 성자를 통한, 성부와의 교제 체험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 삶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훈련이 익숙해질수록,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살전5:17)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요 15:1-8)이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가 사이사이의 시간 가운데 스며들어 가득 채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5장 7-8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한다면 무엇이든지 원하고 있는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희들을 위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있어서 내 제자가 되는 이 것에 의하여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원어에서 사역).

SBC 매일 큐티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

중보 기도(intercession)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과 자신이 회심시킨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예, 롬1:8-10; 골2:1). 우리 역시 우리의 기도 속에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엡6:18). 오늘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드린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를 올려드리겠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멸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종의 기도 목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기도할 때 질서있게 하도록 도와줍니다. 아마도 그 목록에는 가족과 친구, 친척 또 주 안에서 한 식구가 된 사람, 직장동료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정부와 국회, 국민 생활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 지도자와 공무원 그리고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세계 평화와 정의에 대해서도 그리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반드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기도 목록이 너무나 길어지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집니다. 이를 질서 있게 모두 포괄하여 기도하는 방법은 매일 기도해 줄 사람과, 매 주 혹은 매 달 혹은 이따금 기도해 줄 사람의 목록을 각각 작성하여 탄력있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지 목록을 탄력있고 융통성 있게 계속 수정해 가면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사우스 웨스턴 신학교의 페이지 페터슨 총장님은 젊을 때 친구의 권유로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어느 여 성도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 분은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젊은 페터슨을 보았을 때 기도해 주겠다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에 응하여 기도를 받았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는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으며 마음에 햇살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그녀의 기도에 은혜를 받자 매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No”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유로 그녀 앞에 있는 큰 달력을 들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매 30분 단위로 일년간 중보기도할 제목과 사람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탁하기를 자신의 생일에 한 번 자기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더니 그 날이 비어있었기에 기쁘게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을 받고 거기에 기입하였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이런 중보기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의 기도생활은 도전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특별한 필요로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 이를테면 시험이나 수술을 앞둔 사람이라든가, 천국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 이제 막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거나 특별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 등을 위한 특별한 메모를 하고 기도해 주는 것을 즐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위기들이 닥치거나 지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관련된 사람들을 목록에 추가하기도 하고 그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기도는 상세하고 구체적일수록 좀 더 나은 기도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기도를 노트에 기록할 경우 응답된 것까지 체계적으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은혜의 확실한 증거자료를 갖고 힘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컴퓨터를 활용하거나 기도 노트를 작성하시기를 권유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

이것은 감사 기도로 이어지는 것으로 예배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가 하면 감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 은혜, 광야에서 돌보아 주신 그 사랑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 그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너무나도 빨리 잊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렸습니다” (시106:13). 우리는 동일한 과오를 범하면 안되겠습니다. 시편 기자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노래한 것 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배풀어 주신 모든 축복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 이 두가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되새기게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매일큐티

예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2016.3.28~4.1

예배란 하나님께 그분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애쓰는 것입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에 따르면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시편105:3)는 말씀을 예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성경적 정의로 보고 계십니다. 즉, 그분이 누구시며, 또 그분이 자신을 누구라고 계시하셨는지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야말로 우리의 자기 중심주의를 치료해 주는 모든 해독제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배는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를 치료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문제와 통상적으로 방해가 되는 우리 자아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하며 복잡한지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인되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원수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증거하시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성령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처음 3 문장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즉,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 그분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우리가 대부분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올바른 일이 없기에 끈기 있게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 중심의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의 하나로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찬송가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9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28장), 전능왕 오셔서 (34장) 등과 같이 목적이 분명한 찬송들을 부르거나 신앙 고백을 하는 가사를 음미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찬송들은 오직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신 창조사역과 구원등에 우리의 관심을 쏟게 합니다. 오늘은 주님을 찬송하는 영광송의 가사(36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를 적어보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부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1절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2절 주 예수 당한 고난을 못 잊을 죄인아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찬양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찬양 

4절 주 믿는 성도 다 함께 주 앞에 엎드려

     무궁한 노래 불러서 만유의 주 찬양

     무궁한 노래 불러서 만유의 주 찬양 아멘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이것은 고백(confession)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지나친 자기반성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 읽기는 보통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우리의 본모습으로 돌아오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와 이기심 그리고 허영과 탐욕을 가차없이 폭로하며, 그 뒤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우리 죄를 고백하도록 도전합니다. 이것을 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시편에 있는 회개의 시, 특히 시편 51편이나 130편 같은 시를 반복해서 따라 읽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시경을 한 마디로 사무사 즉, 사특함이 없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시편은 경건 그 자체인 것입니다. 오늘은 시편 130편을 적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130:1-8)

하나님을 믿지 않는 증자도 하루에 3가지를 반성하였다고 합니다. 경건 생활에서도 이렇게 자기를 들여다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루를 간단히 돌아보고 잘못한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바람직한 훈련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악용하도록 부추키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습관을 기르면, 겸허해져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더 큰 거룩을 점점 갈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사함에 대하여 계속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는 것이 즉시 외적인 행동을 살피고 나아가 다시 위를 바라보게 한다면, 우리의 내면을 살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매일큐티 (고난주간)

고난주간 (2016.3.21~25)

일요일(3.20)부터 금요일(3.25)까지는 이른바 고난주간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월절 엿새전 토요일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칫상을 받은 주님께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 아침에 감람산 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베다니를 떠나 주님은 감람산 벳바게까지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고 나귀새끼를 데려오게 하셔서 이를 타고 약 1킬로를 내려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였으니 이는 나사로를 살린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하였기에 나와서 주님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요12:17-19).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약 1백만명의 사람들이 세계각지에서 오므로 그 무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닥칠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눅19:41-44).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고 가셨으나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시자 그만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쫒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막11:12-19). 

 

이튿날 화요일에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니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물었고 주님은 침례 요한의 일로 역공을 하시고는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여부를 가지고 헤롯당원과 바리새인들이 와서 묻는 것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어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주님은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는 답변을 주셨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진리를 알려주었습니다(막12:1-27). 

 

화요일에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는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니 주님은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이 답변 후에 감히 주님께 와서 묻는 사람들이 없자 주님은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28-37). 이어 7 화를 말씀하시면서 서기관등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저녁에 성전에 나가사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대하여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시의 징조를 물었고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신 것이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성전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목요일: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사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시고는12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다시 자리에 앉으사 옷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어 가룟 유다가 밀고 하기 위해 식사자리에서 일어나 나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공언하였으며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셨습니다(요 13장). 이 저녁에 주님은 이른바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당신이 죽고 부활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는 남은 제자들과 세상에서 당신을 믿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요14장-17장). 식사를 마친 뒤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1시간 동안 피 땀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마음을 정하시고 체포하러 온 로마와 유대관리들에게 잡혀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차례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혔으며 그 때문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도하는 산헤드린 공회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밤에 이루어진 불법 재판이었으며 이때가 금요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이 밤새 심문을 받는 동안 베드로는 1 시간 이상을 지켜보는 가운데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 7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금요일: 아침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주님을 예루살렘에 와 있는 분봉왕 헤롯에게 보냈고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눅23:6-12). 심문하는 빌라도에게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악하여 하나님께 멀리 떠났으며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과 이런 심판에서 세상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오후 3시 운명하실 즈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체를 요청하여 자기 묘실에 장례를 지냄으로써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 삼일 후 부활하실 때까지 주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서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SBC 매일큐티

*순종하라 : 우리가 읽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성경 읽기도 그다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거부한다면, 기도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역시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견고하게 지어서 어떤 사나운 폭풍도 그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마7:24). 야고보 사도 역시 예수님이 강조하신 바를 반복하면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약 1:22). 그는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는 독자들은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얼굴을 씻거나 머리를 빗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돌아서면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예리하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이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항시 잊지말아야만 하겠습니다. 

 

기도

남자든 여자든 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가장 고귀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를 닮도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유익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인정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은혜의 방편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은 나는 기도에 힘쓰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타당한 지적입니다. 연약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필요 역시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 그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J.C. 라일 감독은 왜 어떤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보다 훨씬 더 밝고 훨씬 더 거룩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 차이는 개인적인 기도 습관의 차이로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별로 거룩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대단히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죄짓는 것은 결코 같은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죄를 소멸하거나, 죄가 기도를 막아 버릴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자면,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이(성경을 통하여) 먼저 말씀하시고, 우리가(기도를 통하여)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주제에 대하여(찬송이나 고백이나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여쭙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 대화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한 무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성경을 펼쳐 둔 채 읽고 계속 묵상한 후에 한 절 한 절 그 본문을 다시 살펴보고 그 내용과 어울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 되는데 이것은 올바른 기도일 뿐만 아니라, 읽은 말씀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는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가능한 한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중년의 요리사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일종의 비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과 그분만 아는 그런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어요”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녀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감이 그분께 불손한 태도를 취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형식을 갖추지 않고 구어체로 하나님께 기도하여도 좋지만 과거로부터 전해진 잘 쓰인 기도문을 가지고 그대로 따라 하면서 하나님께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는 미리 기도문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릭워렌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대 성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기도 순서를 맡은 어느 목사님은 마음에 생각나는대로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그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들떠서 기도하셨을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록있는 다른 목사님은 쪽지에 적은 기도문을 들고 간단 명료하게 기도하고 나니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적인 기도를 할 때 특히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SBC 매일큐티

2016. 3.7 – 11

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4가지를 제언하여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라, 생각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입니다. 이를 각자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하라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간 신문을 대하듯 되는 대로 무관심하게 읽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존 칼빈이 말한 것처럼 경외심과 겸손한 마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자세로 성경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 우리의 지성을 조명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눅24:27).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데려오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도하라 :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성령님을 통하여 하시는 작업을 로체스터의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카바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입니다. 복음서는 초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구약 성경은 거룩한 주인공을 부각시켜 주고, 초상화를 가리키는 전체적인 배치에 꼭 필요한 배경입니다. 서신서는 주인공의 의상과 액세서리 역할을 하면서 그 인물을 설명해 주고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성경을 읽기를 통하여 그 초상화를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감상하는 동안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인공이 살아나오는 것입니다! 엠마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문자로 기록된 화폭으로부터 앞으로 걸어 나오셔서 친히 우리의 성경교사가 되셔서 성경 전체에서 그분에 관한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하라 : 우리는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생각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조명을 의지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연구를 조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약간의 비용을 투자해야만 합니다. 성경에 작은 주석을 덧붙인 각종 스터디바이블(오픈, 굿뉴스등)을 구입하여 읽으면 성경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성구 사전도 구체적인 본문이나 구절을 찾는 데 편리합니다. NBC (New Bible Commentary  IVP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와 같은 신뢰할 만한 단권 주석과 성경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절 단위로 수록한 IVP 성경 배경 주석 역시 매우 유용하여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생각하라 : 여러 성경관련 주석이나 성구사전들은 어디까지나 보조 자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의무는 말씀을 읽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해석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기초가 상실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에 구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두 가지 질문이 유용하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1)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의 본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2)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즉, 그 말씀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답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운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들(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라)이 제대로 적용되야만 합니다. 

 

*기억하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억 상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이 몰락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교훈들을 계속해서 잊어버렸습니다. 기억을 위한 한 가지 자극제는 바로 기록입니다. 날마다 혹은 주제별로 혹은 성경의 권별로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구체적인 진리들을 노트에 기록하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수시로 그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고 기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특별히 감동을 준 구절들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요절 노트를 만들어서 계속 복습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일에 한 구절씩 암송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점점 쌓일 것입니다.

SBC 매일큐티

2016/2/29 ~ 3/4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들의 신빙성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의 저자들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글 속에서 자신의 성실함과 공평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들 스스로가 복음서 이야기를 본 목격자들이었거나(요한복음 21:24), 목격자들에게 직접 전해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 누가복음 1:1-4). 더욱이 복음서는 모두 1세기 문서이며, 요한복음만 제외하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전에 모두 출간되어졌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건들과 그것들에 대한 기록 사이의 격차가 짧아진 이유는 교회가 복음 전도와 회심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현재 수 많은 사본과 역본 그리고 원본의 인용문들을 보유하고 있기에 원문을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소한 내용만이 불확실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좀 더 말씀드리자면, 신구약 성경은 1,500여 년에 걸쳐서 40여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66개의 낱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볼 때 , 성경 저변에 흐르는 주제의 통일성은 더더욱 인상적입니다. 구약의 예언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의 교리는 심오하고 그 윤리는 고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 거의 2,0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성경의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성경은 죄인에게는 죄 용서를, 압제당하는 자에게는 자유를, 방황하는 자에게는 인도를, 죽어 가는 자에게는 위로를, 그리고 유족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열린 마음, 겸손한 심령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흔들어 놓고 위로해 주는 성경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인 증거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실천할 때 가지게 되는 우리 영혼에 메아리쳐 울리는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첫째, 평이하고 명백한 의미가 때때로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단락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그 단락의 중심적인 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본문의 원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21세기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 저자들의 생각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말하려고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되었을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본문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 본문을 해석할 때 본문이 속해 있는 장이나 책의 직접적인 문맥과 성경 전체의 좀 더 광범위한 문맥, 둘 다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주의할 점에 대하여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공회 39개 신조의 제20항에서 성경의 한 곳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다른 곳과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규정한 성공회 교회의 예를 들면서 이런 처사는 합당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함으로써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라는 직접적인 물음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본문만을 계속해서 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나비처럼 이 구절, 저 구절을 무책임하게 왔다 갔다 해서도 안됩니다. 구약과 신약을 번갈아 가면서 읽어도 좋고, 아니면 한 권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연구하여도 좋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IVP에서 출간한 BST (Bible Speak Today) 시리즈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은 한국어로 완간이 되었으나 구약은 몇 권만 번역되었고 계속 번역중에 있습니다). 

 

매일 큐티에 관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서유니온에서 발간하는 매일성경 방식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성서유니온에서는 매일 읽을 본문에 해설을 첨가한 책자를 수많은 언어로 출판하고 있는데 (한국 성서유니온에서는 한국어 번역을 담당), 독자의 연령과 경험에 따라 분류되어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자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성서유니온은 독자들이 5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일독할 수 있도록 내용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한 것은 흔히 혼자 큐티를 할 때 잘못된 해석이나, 편협한 생각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때때로 매우 좋은 깨달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구 운동하여 체중감량에 들어가는 것보다 전문적인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체중감량과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부터 성경을 읽는 4가지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