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 그리스도인과 일

2016. 7. 18 – 22

오늘 부터는 벤 패터슨의 소책자 “그리스도인과 일”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에서는 일곱 난장이들이 일터를 향하여 줄지어 걸어가며 불렀던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호-오, 야호-오, 우리 모두 일하러 가세!” 삽과 곡괭이를 들고 광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목적 의식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만화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사회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허덕였던 대공황의 막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일하게 되어 정부의 구호품 없이도 가족을 먹이고 입힐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였고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벤 패터슨은 위 가사를 변형한 “어휴-우, 어휴-우, 나는 일하러 가네”는 말이 적혀진 스티커가 자동차에 붙여진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의 매우 많은 영역에서, 즐거운 일은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로 바뀌었고, 목적 의식을 가지고 종사했던 일들도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에게 일이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겠습니까?

 

성경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고, 그런 후에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생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을 두시고 계획하신 대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2:15) 하셨습니다. 이처럼, 일은 하나님의 낙원에서도 중요한 위치, 곧 중심부를 차지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성경이 일을 하나님의 저주 또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죄악과 형벌이 나타나기 전에,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선물이자 복이었으며 타락 후에 형벌로 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인간됨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신 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일하신 것처럼 일을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과 땅, 산과 호수, 숲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처럼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감동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이 우주 가운데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바로 청지기입니다.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달리 없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청지기란 어떤 한 사람의 모든 부와 재산을 위탁받아, 그 소유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경우 우리가 관리하도록 위탁받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과 삶에 대한 길을 찾는 [Book Talk]
‘청년, 길을 찾는다’ 시리즈
두 번째 편 : <그리스도인과 일>, 벤 패터슨 저/ivp.

SBC매일큐티

2016/7/11~7/15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깨어짐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내어 주심에 대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분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자 그를 버렸고 한 명은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의 주인이 멸시받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노력이 거부당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면 크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고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모세는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자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났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면서 40년을 보낸 모세를 하나님은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듭 거듭 사양하다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물러섰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는 그들에게 거절당한 사실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늙은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당하면 마음 속으로 “주님, 나는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제게 성취감을 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가서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시고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 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전부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앞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본을 따라 인내하면서 섬긴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질 것이며 말로만 주님을 부르고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배우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성공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과 성공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 목사님은 1971년 한스 로크마커 여사의 도움을 받아 우간다에 고아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차를 몰고 떠날 때면 다른 열 명의 고아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목사님의 차를 쫓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려와야 합니까? 주님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깊은 좌절 속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함을 배우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매일큐티

2016. 7.4 – 8

‘깨어짐’ 이라는 말은 자만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만심이 있는 곳에는 고백도 용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기꺼이 ‘항복’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분은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한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무리를 먹이도록 하셨습니다(마 14:19). 신앙부흥회의 한 형제는 이 구절을 읽고 케파 셈팡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깨뜨리시기 전까지는 결코 당신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하나의 떡덩어리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예수님이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것은, 훗날 자신을 깨뜨려 제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건을 예시 하신 것입니다(고전11:24 –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없이는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기독교 모임에 가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 깨어진 몸입니다. 저의 모든 기술과 능력과 재정을 여러분을 위해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교만해서 우리의 삶을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때입니다. 이때 비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따르고 있다면 완전한 공동체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시는 와중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따라 우리 자신을 공동체를 위해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우리가 갑자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정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으며, 우리의 장래가 있는 감람나무 같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에 교회까지 그 지경을 넓힐 수 있고 더 나아가 직장과 사회까지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너무 무능력해서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결코 모험을 감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릴 것은 아이가 가진 몇 조각의 떡, 과부가 가진 소량의 기름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이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초라한 목자의 지팡이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평범한 목자에 지나지 않음을 아셨지만, 모세를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의 약하고 천한 것들을 사용하시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약하고 늙은 모세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함께 하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요

 

케파 셈팡기는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우간다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미국에 있는 신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이로비에 피신해 있던 동료들이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피난민 가족을 돌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우리를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깨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취하여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눠 주기 시작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쓰기에도 빠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많은 피난민에게 음식과 물품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주님을 모범으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SBC매일 큐티

2016.6.20-24

깨어진 관계는 독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손해를 입힌 사람이나 입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이 정말 잘못을 한 게 맞는다면 그를 견책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그가 회개한다면 그를 용서해 줄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필요시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단지 종교적인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케라 셈팡기씨는 몬도씨를 만날 때마다 세가지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빛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까? 깨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이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970년대 이디 아민이 집권하던 당시 우간다의 어떤 자매는 케파 셈팡기씨에게 비밀리에 모이고 있는 우간다 신앙부흥회에 대해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집회를 하던 중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직한 죄들을 깨닫고 서로 그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에는 독재자 아민의 한 정보요원도 잠입해 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이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정보원이며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죄를 깨닫고 고백한 후 그는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공부하면서 형제들과 올바른 교제하고 있지 않다면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모임은 또 다른 형태의 소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성경공부나 교회 출석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단편소설 마지막 손님에서 친절을 베푼 주인공 게이꼬의 상사의 입을 통하여 상인의 길은 인간의 길이라고 외친 작가 구리 로혜리는 상인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그리고 선교단체에서 듣는 명령은 가라는데 있고 형제자매들 간의 사랑은 약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즉,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요13: 34-35)고 하셨습니다. 케파 셈팡기는 이 계명을 잘 알지 못하여 자신의 설교의 대상인 사람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의 설교를 더 사랑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사명을 수행하려는 열심과 열정 때문에 가장 먼저 주어진 계명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하면 안될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의 말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곧 숨겨진 부분들까지도 형제자매와 나눈다는 뜻임을 나는 몬도에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감춰 놓은 것들을 나눌 때 우리는 완전한 일체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상호 결속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모두 빛 가운데 행하기 시작할 때, 험담과 뒷말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미 빛 가운데 드러난 것을 수군거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뒷말은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바뀝니다. 형제 자매의 약점을 끄집어내는 대신,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감싸 주고 강한 부분은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사용하던 램프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램프의 불빛이 비치기 위해서는 램프의 유리가 투명해야 하고 잘 다듬어진 심지와 깨끗한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유리가 더러우면 불빛은 희미하게 비치게 됩니다. 심지가 잘 다듬어져 있지 않으면 불빛은 깜빡거리게 됩니다. 기름이 더러우면 불빛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꺼지고 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유리를 깨끗이 닦지도 않고 심지도 다듬지 않은 채 빛을 비추려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기름을 더럽히는 원인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음욕을 품는 것, 말다툼하는 것, 원수에게 증오를 품는 것 등입니다. 깨끗한 기름이 없으면 우리는 빛이 될 수 없고 형제 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SBC 매일 큐티

2016.6.13-17

마음의 벽장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주님이 등을 돌리심으로써 그분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로버트 멍어는 주님께 그 벽장문의 열쇠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슬픈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주님이 벽장을 여셔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십시오. 제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알고 있다. 네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열쇠만 내게 다오 그러면 내가 하마”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의 떨리는 손으로부터 열쇠를 넘겨 받으시더니 벽장 문으로 가셨습니다. 벽장을 여신 주님은 거기서 썩고 있던 물건을 다 꺼내어 저 멀리 던져 버리시고는 벽장을 깨끗이 청소하셨습니다. 그 뒤 페인트로 칠하고 수리하심으로 모든 분위기를 바꾸셨습니다. 그러자 로버트 멍어의 마음의 더러운 구석이 깨끗이 청소된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벽장을 어떻게 청소하셨으며 그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한 번 되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벽장

주님이 로버트 멍어의 마음의 벽장을 깨끗이 청소한뒤 그는 “아 그 죽은 것들을 내 삶에서 추방시켜 버렸을 때 얼마나 큰 승리와 해방을 맛보았는지요! 그 후에 불어온 바람은 정말 상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또 어떤 상처를 갖고 있든지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셔서 온전하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우리의 벽장을 청소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분에게 벽장의 열쇠를 넘겨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로버트 멍어의 경우와 같이 주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깊은 평안과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1:9).

 

명의이전

로버트 멍어는 이렇게 한 방 한 방 주님께 열어드리고 공유하는 삶을 살던 중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지만 어디까지나 손님과 도움을 주는 분으로서 또 친구로서 모셔들였지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이 주인으로 계시지 않은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풍성한 의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정중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지금까지는 당신이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서둘러 금고로 달려가서 재산과 부채 및 가옥의 부지와 매매 조건이 명시되어 있는 집문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돌아와서 간절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무릎을 꿇고 영원히 그분의 소유가 되도록 넘겨드렸습니다. 주님은 그날 로버트 멍어의 삶을 받으셨고 그의 마음에 비로서 깊은 평화가 주님으로 인해 자리잡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

오늘부터는 케파 셈팡기가 지은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IVP 소책자시리즈8)을 가지고 묵상을 나누겠습니다. 그는 1961년 회심하였고 그 직후 우간다 신앙부흥회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고(故) 몬도(Mondo)씨를 소개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종종 몬도씨를 만났는데, 빛가운데 행하는 삶을 강조하는 그에게 케파 셈팡기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몬도씨는 동아프리카 부흥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1930년대 들어 몇몇 우간다인들은, 그들이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이 지점에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멈춰서서 진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 23-24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간다의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5장2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계명을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경건 생활을 즐기기 전에, 그날 하루 동안 잘못 대했을지 모르는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있는지 확인하라” (마5:23).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경건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막대한 값을 치르고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관계가 틀어졌을 때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런 문제는 이미 전도서에서 갈파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5:1). 우리는 이점을 깨닫고 이의 해소를 위해 오늘 하루도 노력하고 있습니까?

 

수요일터예배 (6.15)

로버트 로젠탈이라는 심리학자는 1960년에 진행한 학생의 지능지수에 관한 실험을 통해 사람은 남들이 믿고 기대하는 대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냈습니다. 그는 무작위로 몇 개의 학교를 골라 학생들을 테스트 한 뒤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제자들에게 새로운 학업테스트를 해봤는데 학업 성취도가 크게 향상될 학생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결과를 알려드릴 테니 참고만 하시고 공개하지는 말아주세요. 다만 몇몇 학생들은 정말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사실 로젠탈이 실시한 새로운 테스크는 평범한 지능지수 테스트였고, 잠재력이 크게 나왔다는 학생들도 무작위로 선별한 보통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믿음이 개인의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학년이 끝날 때 로젠탈은 다시 학교를 방문하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선생님에게 잠재력이 크다고 지적한 학생들의 영어성적과 수학성적이 크게 향상된 것입니다. 그는 전 학생에 대한 지능지수 테스트를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잠재력이 크다고 알려준 학생들은 일 년 만에 지능지수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오랬동안 증가추세를 유지했습니다.”(탈 벤 샤하르 강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78-79). 결국 학생의 지능지수가 향상된 것은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의 신념이 변하면서 일어난 결과인 것입니다. 선생님의 관심과 믿음이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입니다. 이런 실험의 결과는 긍정의 심리학에서 삶의 긍정적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자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긍정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긍정의 태도가 전부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완성하실 때까지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주님 손에 맡기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뚜벅뚜벅 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SBC 매일큐티 –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3

2016/6/6~6/10

작업실

주님은 로버트 멍어에게 너희 집에 작업실이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의 마음의 집 지하실에는 작업대와 연장 몇 점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사용하여 많은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끔씩 내려가서 작은 도구들을 들고 법석을 떨곤 했지만, 실속있는 것을 만들어 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모시고 그리고 내려갔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변변찮은 그의 재능과 기술을 흩어보시고는 이 방은 설비가 참 잘된 곳이구나. 네 삶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로버트 멍어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만들어 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를 위해서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작업실로 들어오셔서 네 삶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시 준비하여야만 합니다.

 

 주님은 로버트 멍어의 마음의 작업대에 놓인 한 두개의 작은 장난감을 보시더니 그중 하나를 집어 드셨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면서 남을 위해 만들어 낸 것이 고작 이 작은 장난감들이냐? 로버트 멍어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들입니다. 저도 그것이 보잘 것없다는 것을 압니다. 부끄럽지만 서툴고 부족한 제 능력으로는 결코 그 이상을 만들지 못할 겁니다. 더 잘하고 싶으냐? 주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럼요!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좋다. 먼저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것을 기억하도록 하거라.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 자 긴장을 풀고 나의 영이 너를 통해서 일하도록 해라. 네가 기술이 서툴고 솜씨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성령님은 가장 노련한 일꾼이시니 그분이 네 손과 마음을 다스린다면 너를 통해 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하여 하고 있으면 됩니다.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올려드리시고 성령님께서 일하시도록 인내하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멍어는 주님께서 오락실에 대하여 물으셨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재미있게 놀곤 했습니다. 사실 그는 주님이 오락실에 관해서는 묻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그가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은 모임, 교제 활동과 흥미거리가 있었고 예수님이 그런 것을 즐기거나 찬성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해서 그 질문을 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시내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친구 몇 명과 함께 막 집을 나서려던 참에 주님은 그를 멈춰 세우시고는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고 대신 말씀드리기를 내일 밤에는 같이 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가 있거든요 하고는 오락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날 저녁 로버트 멍어는 비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나 같은 게 무슨 그리스도의 친구란 말인가? 로버트 멍어는 돌아와서 혼자 계시는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고백이 나와야만 하겠습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심리학자 쥐를 대상으로 유명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올즈는 쥐의 머리에 미니 전극을 심어놓고 쥐들이 전기레버를 이용해 자신의 행복(쾌감)중추에 자극을 주어 스스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더니, 쥐들은 배고픔과 갈증도 잊은 채 계속 이 단추만 눌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락실에서 찾는 행복감은 결국 이런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 없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한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함께 자신의 오락실로 내려갔습니다. 주님은 그의 삶에 진정한 기쁨, 참 행복과 참 만족, 참 우정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 후로는 내내 웃음과 음악이 집 안에서 울려 나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미소를 머금고 눈을 반짝이시며 너는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것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온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요15:11)임을 기억하거라 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마음의 오락실에 주님과 함께 내려가셨습니까? 

 

벽장

로버트 멍어는 어느 날인가 주님이 문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집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이 주위에  무엇인가 죽어 있는 것이 있어. 윗층 벽장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이 말씀을 듣자마자 그는 곧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았습니다. 층계참에는 네모지고 자그마한 벽장이 있었는데, 그는 자물쇠를 채워 둔 그 벽장 안에 보잘 것없는 개인적인 물건 몇가지를 넣어 두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고, 더구나 그리스도께는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죽은 것이고 썩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는 그것들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벽장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옛 생활의 찌꺼기들로서, 악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음에 이런 장소가 있지 않나 살펴보시고 어떻게 이런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 중에 하나입니다.

SBC 매일큐티 –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2

로버트 멍어는 서재에서 주님과 함께 나와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영적 주방으로 갔습니다. 그 곳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고 큰 방으로 그는 꽤 많은 시간을 주방에서 보냈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꽤 많은 노력을 들이면서 살았습니다. 주님은 식탁에 앉아 오늘 저녁 메뉴가 뭐지?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돈, 학위, 증권등이 주된 음식이고, 반찬으로는 명성과 행운에 관한 신문기사들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의 음식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음식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진정으로 영혼을 먹이고 영적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참된 음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식탁에 앉으신 주님은 좋아하시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로버트 멍어와 같이 우리의 영적 주방에 세상것으로 가득차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주님 앞에 차려놓아야만 하는 영적 식단들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할 영적인 식단은 균형잡힌 식단이어야 합니다. 이런 균형잡힌 식단을 차릴려면 우리의 욕구가 주님 뜻에 합당하도록 조절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식탁에 앉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네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여러분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음식을 원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야만 합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야망이나 욕망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도록 힘쓸 때 바로 그 양식이 우리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음식도 결국에는 허기를 남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영적 주방으로 갔을 때 우리의 욕구를 채워 줄 주방에는 어떤 메뉴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친구 되신 주님께 어떤 음식을 대접하고 있으며, 또 우리 자신은 어떤 음식을 먹고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과 같은 자기 중심적인 욕구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양식과 음료로 삼고 있습니까? 우리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함께 자신의 거실로 들어갔습니다.이 방은 좀더 친근하고 안락한 곳으로 그는 이 방을 좋아했습니다. 벽난로, 푹신푹신한 의자들, 책장, 소파가 있는 이 방은 매우 아늑했습니다. 주님 역시 만족하신 것 같았습니다. 여기는 정말 좋은 방이구나. 이 방에 자주 오도록하자. 은밀하고 조용하니 대화하며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겠구나.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그는 감격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단둘이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찌감치 여기에 올 테니 나와 함께 일과를 시작하자꾸나 하셔서 그는 아침마다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고 주님과 함께 성경을 읽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구원의 진리들을 펼쳐 보여 주셨으므로 그의 마음에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주님은 성경과 성령님을 통하여 그에 말씀하시고 그는 기도로 응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로버트 멍어와 같은 경건의 시간을 주님과 나누고 있습니까?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인격적인 대화로 경건의 시간을 보내면서 깊은 우정을 그분과 쌓아 갔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여러 가지 다른 일들에 시달리다 보니, 이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규칙적으로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고의는 아니고 단지 일이 그렇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시간이 줄어들다 못해, 때때로 거르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고, 또 어떤 때는 다른 급한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경건의 시간이 빈번히 밀려나게 되었으며 이틀씩 연속적으로 빼먹거나 그 이상 거른 날도 많았다고 합니다. 로버트 멍어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중요한 약속 때문에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가던 때를 이야기 합니다. 거실을 지나치다 방문이 열려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고 주님이 홀로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당황스러워지며 내가 저분을 내 마음에 모셔들이지 않았던가! 저분은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나의 구원자요 친구로 오셨는데, 내가 저분을 무시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계속 주님과 좋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무시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까? 한 번 반추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경건의 시간이나 성경 연구나 기도 시간을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이 주님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막대한 값을 치루고서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속하셔 당신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의 사귐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분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든 그렇지 않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의 시간을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혼자서 여러분의 마음의 거실에서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날마다 둘만의 시간과 장소에서 말씀과 기도로써 그분과 교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1

SBC 매일큐티 –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1

오늘부터는 로버트 멍어가 쓴 소책자(출판사 IVP)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을 가지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어떻게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좌정하게 하실 수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3:16-17).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기독교 진리의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정착하고 사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인간의 마음을 거처(집)로 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12시간 전 제자들에게 주신 다락방 강화에서 제자들을 위해 하늘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곧 떠날 것이다(요14:2-3) 하시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14:23, 공동번역)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53일 지나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은 물론이고 손으로 지은 어떤 성전에도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120 명의 신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인간 마음 안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후 믿는 자의 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고전3:16-17), 인간의 마음은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시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버트 멍어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의 감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영혼의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분은 내 어두운 마음에 들어오셔서 불을 켜셨습니다. 차가운 난로에 불을 지피고 냉기를 몰아내셨습니다. 그분은 정적이 흐르던 곳에 음악을 연주하셨고, 불화가 있던 곳에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놀라운 사랑으로 공허를 채워 주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문을 연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께 문을 연 첫 경험을 한 번 회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 문을 여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만드는 첫 단계입니다. 그분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실재를 알고, 우리 존재의 깊숙한 내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단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께 제 마음에 들어요서서 저의 구원자요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시고, 이런 고백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의 마음이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집의 모든 것을 당신의 것처럼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 당신께 이 집(내 마음의 집)을 안내해드리고 몇 가지 특징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저와 더 풍성한 교제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우리의 각 방으로 안내하면 주님은 우리의 작은 마음을 집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없이는 우리의 죄된 자아를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리 마음은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방마다 벽이 매우 두텁고 남을 데려오기 매우 꺼려하는 장소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마음의 서재로 가야합니다. 로버트 멍어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분은 나와 함께 책장 안의 책들, 잡지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분의 눈빛을 살피다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분이 안 좋은 안색으로 그것들을 쳐다보셔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책장 선반에는 그분의 정결한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책들이 몇 권 있었고 잡지도 그러했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들(즉 내 마음의 상상과 생각들) 몇 가지도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서재도 반드시 이럴 것입니다. 우리는 부끄럽지만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주님, 이 방은 깨끗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를 도와 주셔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당신께 복종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시작으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치열한 전쟁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 방을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2

SBC매일큐티

2016.5.16 – 20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산상수훈에서 그 이유를 밝히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마5:13-16). 이 두 가지 비유는, 소금이 고기에 배어들고 빛이 어둠을 비추듯, 그리스도인이 비기독교적인 사회 속에 스며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상징은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처럼, 또 어둠을 물리치고 환하게 밝혀 주는 빛처럼,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교회의 사명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이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해야합니다. 소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왕국의 가치와 표준을 굳게 지킴으로써 사회의 악화를 막는 일에 일익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대상에는 우리의 직접적인 이웃이 포함됩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인 가정 하나가, 그 지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역 교회 하나가, 복음을 전파하며 그 지역 생활에 건설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지역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지역 사회에 복음을 증거하는 책임을 외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각각의 교회가 ‘전도회’를 조직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활동을 교회가 주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개인이 자기 나름대로 주도권을 가지고 여가 활동이나 봉사 활동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 정부 활동에 참여하거나, 학교 후원회의 임원이 되거나, 자원 봉사를 필요로 하는 수 많은 곳에 자원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한 활동입니다.

 

환경 운동이 날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세계’라는 개념이 대중화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것은 지구가 부서지기 쉬운 귀중한 물건과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돌보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이런한 의식개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세계 인류의 단일성과 일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가 우리의 이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편협한 지역주의와 인종주의를 근절하고 세계 시민의식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적인 관심사’에 헌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선교’의 부르심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마28:19)는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자신의 보좌 우편이라는 최고 영예의 자리에 앉히심으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빌2:9-11). 이것이 하나님의 바람이시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바람이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신들로 부름을 받기도 합니다. ‘선교사’는 이들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해 주신 세계 선교에 어떤 방법으로든 기여해야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에게 예외가 없는 사명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특정 선교 단체나 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그들과 연락을 취하며, 정기적인 중보 기도등을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선교의 문제를 떠나 우리는 ‘세계적인 관심사’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세계적인 관심사’란 평화, 정의, 환경 등의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문제들은 너무나 산적해 있고 가지각색입니다만 최근의 좋은 예는 북한의 핵 개발의 문제로 인한 평화의 위협이나, 자주 일어나는 일본의 지진의 문제등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개인적이고 특정한 관심사에 따라서 한두 가지를 선택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고 하나님께 이 문제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관심 분야 단체에 가입하여 연구하고 또 거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아와 무주택,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지질학, 인간 생명의 신성함, 인종간의 조화, 인권등의 분야가 있습니다. 비록 세계적인 관심사는 거창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계 시민의 일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등안히 여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SBC매일큐티

2016. 5. 9- 13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나무를 나게 하시고 창조하신 아담을 거기에 두시고 그것들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창2:8, 15). 하나님은 환경을 보호하고 그 속에 있는 자원을 개발할 책임을 인간 관리인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청지기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지주이시고 우리는 관리인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점에서 그것은 진정한 동역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우리는 경작합니다. 또한 그분은 심으시고 우리는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신 것은 자연이라고 불리우고, 우리가 기여하고 있는 것은 문화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문화는 자연없이는 생길 수 없으며, 자연도 문화가 없이는 그 가치가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천연 자원을 주시고 그것들을 유용한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일도 남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노동이든, 정신적 노동이든, 혹은 둘 다이든 간에, 또 임금을 받는 일이든 아니면 자원 봉사든 간에 그리고 아무리 낮고 비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노동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관리를 위임하신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분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공업과 무역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또 공공 서비스와 전문 직종, 전임 가사 노동과 어머니의 육아 활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일부 사람들이 이러한 특권을 부인당하고 있는 현실은 실업의 커다란 해악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느냐 즉, 어떤 일을 할 것인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질과 재능, 교육과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일(직업)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좌절되지 않고 성취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대개는 교회 사역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일, 특히 성직자의 사역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역은 성직자와 교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지역 교회도 그리스도인의 사역에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정식 교인은 자기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활동 주로 교회 청소, 꽃꽃이, 좌석 안내, 주일 학교 봉사, 성가대 찬양, 청년 모임 인도와 교회의 각종 위원회 섬김등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여러가지 일들은 모든 교회가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들이지만 평신도의 교회 사역 비전이 흔히 여기서 멈춘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으며 어떻게 바로 잡아야 올바르겠습니까?

 

흔히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를 너무나 엄격하게 구별하고, 나아가 이차적으로 목회 사역(성직자의 분야)과 실제 사역(평신도가 할 수 있는 분야)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목회자의 주된 역할을 회중 설교를 포함한 가르치는 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런 사역들 역시 은사를 지니고 있으며 훈련을 받고 임명받은 평신도들과 공유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교회들이 장로 권사와 집사를 선출하여 성직자와 밀접하게 협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들은 때로 설교도 하고 각종 봉사 활동을 지도하며, 특히 중보 사역과 성만찬을 돕는 일 그리고 심방, 상담을 하며 침례와 교회등록을 원하는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결혼을 앞둔 커플들을 준비시키며 교회 생활의 다양한 분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를 인식하고 합당하게 구성된 지도자 팀을 개발하여서 그들의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발휘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직장 외에도 두 개의 특별한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역 교회와 지역의 이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모든 제자는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어졌습니다(요17:18).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를 보내신 세상은 무엇일까요? 성경적 표현 특히 요한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속 사회라고 부르는 곳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일부 지역 속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교회 건물이라는 보호막이나 서로 마음이 통하는 교제권 속에 안주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직장이 비기독교적인 환경이라면 우리는 이미 날마다 세상 속으로 이미 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가정과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왜 세상 속으로 보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