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

11/14/16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맺는 의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님의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동안 성령님께서 일생에 걸쳐 맺어주시는 열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수고와 능력의 역사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는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된 모습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11/15/16

야고보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야고보는 유혹이란 우리 내면의 욕망과 외부 세계의 어떤 대상이 결합한 산물이므로,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고 그 악한 욕망에 따라 행동할 때 죄를 낳게 됩니다. 죄가 자라면 사망을 낳습니다. 로마서 6:23은 죄의 삯은 언제나 사망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가 삶 가운데 자라도록 방치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간입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에 있는 어떤 물건도 전리품으로 가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둗고도 그만 금덩어리와 페르시아산 외투를 보고 탐심이 생겼고 그 결과 그와 그 가족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의 한 모형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며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11/16/16

이기적인 필요나 욕망 그리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은 우리를 쉽게 유혹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유혹의 과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우리 삶 속에 악한 어부가 활동하도 있다고 여깁니다. 악한 어부는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과 세상을 결합시키고 그것을 활성화시킵니다. 이 악한 자는 한 번 잡은 물고기를 절대 놓아 주려 하지 않습니다.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간음 죄를 범한 다윗 왕은 이의 결과를 피할려고 애를 쓰다가 좌절되자 결국 충신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이도록 명령하기에 이릅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힘을 다하여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11/17/16

야고보는 악한 자가 한 번 잡은 물고기를 절대 놓아 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낚시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낚시 고리에 끼워져 있는 미끼는 물고기를 유혹할 것이고 한 번 걸려들게 되면 그 물고기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끌려 물밖으로 나와 죽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유혹을 받는 자는 끌려 미혹됩니다. 즉, 우리는 굶주려 있던 차에 마침 미끼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미끼에 끌리게 되고 마침내 그것을 입에 뭅니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낚싯줄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장 그리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유혹에 굴복할 때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손상됩니다. 그러므로 상습적인 죄로 굳어지기 전에 이런한 과정을 끊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11/18/16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바울이 죽기 전에 남긴 증언을 그대로 되풀이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싸움입니다. 물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강인한 성품을 키워 가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성품을 좀먹고 교회의 복음 증거를 무력하게 하려는 위협적인 유혹에 맞서 씨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이어 성령님 안에서 새로워지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의 적이 어떤 존재인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비전을 가지고 좋은 습관을 개발하는 것도 매우 도움이 됩니다. 다음 주부터는 이에 대하여 상술하도록 하겠습니다.  

SBC 매일큐티

16/10/31

어느 심리학자가 한 마을에 가서 집집마다 10달러씩을 문 앞에 두고는 관찰을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문 앞에 놓여 있는 10달러 지폐를 발견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또 지폐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똑 같은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는 조금씩 자연스러워지더니 며칠 지나서는 당연하게 자기 돈을 집듯 집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학자는 지폐를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지폐를 집으려 하다가 돈이 없는 걸 발견하고는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돈 어디 갔어?” 우리가 주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감사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는가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16/11/1

어느 나라의 왕이 백성을 사랑하여 지혜로운 신하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세상의 지혜를 정리하도록 하시오.” 신하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지혜를 모아 백성을 가르칠 수 있도록 12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왕에게 가지고 나아오니 왕이 하는 말이 “12권의 책은 너무나 많으니 그것을 더 줄여서 오시오.” 신하들은 지혜를 모아 한 권으로 줄였습니다. 왕은 또 말하기를 “아직도 많으니 더 요약해 오시오.” 세상의 지혜를 줄이고 정리한 신하들은 마침내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였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There’s No Free Lunch!)” 그렇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라는 가장 큰 대가를 치루고 확보하신 것입니다(벧전 1: 18-19). 그러므로 우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니 우리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16/11/2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사경에 헤매이는 십대 초반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자원 봉사를 나온 대학생이 이 소년의 기록을 보고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영어 문법의 동사 변화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정을 받은 이 소년의 상태가 점점 더 나아지기 시작하더니 두 주가 지나면서 완전히 고비를 넘기고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의 붕대를 풀던 날 소년에게 그 원인을 물으니 소년이 하는 말이 놀라웠습니다. “사실은 저도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는데,한 대학생 형이 들어와서 다음 학기 영어 시간에 배울 동사 변화를 가르쳐 주기 시작해서 놀랐습니다. 그 형은‘네가 나아서 학교에 돌아가게 되면 이것들을 알아 두어야 공부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야’ 라고 하여더군요. 그때 저는 확신했죠. ‘아, 의사 선생님들이 내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다음 학기 동사 변화를 가르쳐줄 리가 없지.’ 그때부터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소망은 이런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 그것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소망을 붙잡고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6/11/3

미국의 어떤 부인이 병으로 그만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실명한 아내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 이제 나도 내 일을 좀 해야 하니까 내일부터는 당신 스스로 회사를 다니도록 합시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말을 듣자 부인은 이를 악물었습니다.”긴 병에 효자 업다더니 이제 나에 대한 사랑도 식었구나. 좋다. 내 힘으로 해볼 테다.” 부인은 다음날부터 혼자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넘어지고 부딪치고 다치고 길을 헤매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2년 동안 그렇게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늘 타고 다니는 버스 기사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부인만큼 남편의 사랑을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받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께서는 매일 부인의 뒤를 조용히 따라 와서 꼭 뒷자리에 앉고는 부인이 회사의 문 안에 들어설 때까지 지켜보고는 돌아가시더군요” 부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어느새 홀로 설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혼자서 맞이하는 것 같지만 늘상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설 수 있도록 도와 주고 계십니다.

SBC매일 큐티

2016. 10.24 – 28

하나님께서 세우신 조직이 3개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입니다. 가정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이 가정은 사회의

기본이며 가정의  기본은 가족입니다. 또한 가족의 기본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다이아나 루먼스의 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음악가 브람스는 효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트럼펫주자였는데 한번은 굳이 아들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트럼펫주자를 하겠다고 우겼습니다. 브람스는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연습을 시작하였지만 워낙 아버지가 틀리니까 참다못해 연습을 중단하고 한마디 하려고 할 때 그의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하는 말 “애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 잘 아니까 제발 조용히 해다오”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배려하는 브람스는 한번은 아버지에게 악보를 주면서 “아버지 어려우시면 이 악보를 보도록 하세요”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준 악보를 그냥 보관하다가 어려움이 닥쳐 아들의 말을 기억하고 악보를 열어보니 그 속에 상당한 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지방의 작은 마을에 조그마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온 70대 노부부의 금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었지만 거실 탁자 위에 깨진 꽃병이 놓여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 세월이 참 빠릅니다. 남편과 결혼한지 벌써 50년이 되었습니다. 남편과 제가 이때까지 아무 탈 없이 결혼 생활을 지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탁자 위의 깨진 꽃병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실망을 느낄 때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빠져 괴로울 때 저 꽃병이 나를 지켜주었지요. 51년 전 늠름한 청년이었던 남편이 제 방에서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요. 감격한 나머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만 탁자 위의 꽃병을 깨고 말았답니다. 저 깨진 꽃병은 그날의 내가 느낀 감격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격을 늘 되새기기 위해 꽃병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고 있답니다.” 결혼은 가정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 결혼을 거룩하게 할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매우 슬퍼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던 4살박이 꼬마가 다가가서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무슨 말씀을 드렸냐고 물었습니다.꼬마는 대답하였습니다. “아무 말도 안했어요. 실컷 우시게 도와드렸어요.”옥한음 목사님이 목회를 하실 때 사랑의 교회 여집사의 남편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조문을 하러 장례식장에 가셨습니다. 도착했을 때 무슨 말로 위로를 하여야 할 지 모르겠더랍니다. 그래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함께 있다가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그 미망인에게 편지가 오기를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함께 계시다가 가신 옥목사님이 가장 고마웠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참된 사랑과 위로는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친족이나 이웃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1845년 영국에서 북극해를 가로지르는 뱃길을 탐험하기 위해 프랭클린 원정대가 출항하였습니다. 선원들은 두 척의 배에 항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많은 물건들을 실었습니다. 1,200권의 책들, 고급 도자기, 순은제 식기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조 연료로 사용되는 석탄은 겨우 12일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배는 얼음 바다 위에서 좌초되었고 몇 달 후 프랭클린 경우 사망했습니다. 선원들은 몇 명씩 그룹을 지어 얼음 위를 걸어서 안전 지역을 찾아나섰으나 결국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 한 그룹은 두 명의 장교로 구성되었는데 큰 썰매를 끌면서 얼음판 위를 65마일이나 이동하였습니다. 후에 수색대는 그들의 시체와 그 썰매 위에 가득 실려 있는 은식기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끌고 다니다가 자신들의 목숨과 바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쫓으면서 주님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SBC매일큐티

마태복음 25장 31-46 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매우 엄숙한 이야기를 직접 묘사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배웠는데 다시 오신 주님은 지극히 작은 형제를 돌보아 주지 않은 행위를 가지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댜고 믿는 것은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약 기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고, 살아 있으며, 구원받은 믿음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선한 행동으로 표출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미 언급된 마태복음 25:31-45에 나오는 비유에서 주님은 자신에 대한 우리들의 진정한 태도는 그의 형제들(이는 먼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고 외쳤으며, 바울은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확고하게 보여 주는 유일한 증거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믿음의 표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칭의)은 믿음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심판은 행위, 즉 선행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네가 진정으로 나를 믿었느냐 그렇다면 나를 쫓아 살았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여기서 진정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신칭의(이 말은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이며,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뜻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은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며 오직 의인이라야 바른 관계를 하나님과 가질 수 있습니다.)의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강조한 로마서에서, 또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영생을 주실 사람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롬2:7)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크 가이피어스(Mark Guypearce)가 한 어떤 사람의 믿음이 그를 이기심에서 섬김으로 구출해 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분명 그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출해 내지도 못할 것이다.라는 말은 정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의 본을 따르라고, 선을 행함으로써, 즉,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의 선행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 즉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예수님을 딸고 그의 발자취를 좇으려 한다면, 선행을 할 만한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선행은 우리 사랑이 진실됨을 보여 줄 것이며 그 사랑은 우리 믿음이 진실됨을 보여 줄 것입니다.

 

SBC 매일큐티

2016. 10. 10 – 1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한 주님의 가르침에 우리 역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람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의 유희이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때때로 다른 신앙(정령주의자,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등)을 가지거나 다른 인종 혹은 국적의 사람들을 돕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가 베푸는 도움이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 수단이 아닐 경우에는 그들을 섬기길 꺼리지는 않는가 역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과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행의 동기가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수고는 무가치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 부요함 둘 다를 나누게 하는 것이 주님이 명령한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행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 즉, 어떻게 섬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의 섬김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야만적으로 폭행을 당해 벌거벗겨지고 피를 흘리며, 기진맥진해 거의 죽게 된 그가 긴급히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상처를 치료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고, 필요한 부대 비용을 주막 주인에게 더 주었습니다. 이때 그는 유대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지만 그의 주머니에 전도지를 넣지는 않았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내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의 우선순위에 관한 논쟁이 있었는데, 사실 이 논쟁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간의 우선순위의 결정은 우리의 이웃이 처한 긴급한 필요가 무엇인가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 두가지는 모두 이웃 사랑의 진정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사랑할 이웃은 육체 없는 영혼이 아니고, 영혼없는 육체도 아니며,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격리된 한 개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적, 영적,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고, 따라서 우리 이웃은 사회 속에 있는 영적, 육체적 존재입니다. 우리 이웃의 영혼이나 육체나 사회성 중 한 측면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읏울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죄사함의 복음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의 소식을 우리의 이웃과 나누어야만 합니다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우리 할 바를 충분히 다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이 복음전도에 대하여 매우 어리석고 편협한 생각을 품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직 구세주일 뿐이며 인간의 창조주는 아닌 것처럼, 예수님이 단지 설교만 하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거나 병든 자를 치료하신 적은 결코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적이고 영원한 문제가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며 예수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두 가지를 병행하셨습니다(눅 8:1). 그리고 주님은 어느 한 가지를 한다는 것이 다른 일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나 구실이 되지않았습니다. 이 둘은 인간들을 향한 그의 깊은 동정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표현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주님은 선행을 그분의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셨는데, 이 기준이야말로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자신의 재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모일 것이며,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가 될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장 31절 이하). 이 구절은 종종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불려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비유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을 양과 염소에 비유한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최후 심판의 매우 엄숙한 이야기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SBC 매일성경

2016. 9. 26 30

예수님은 먼저 보았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늘 주위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눈은 결코 도움이 필요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둘 다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진실로 보셨습니다. 그는 추한 실재 가운데 있는 인간의 궁핍함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반드시 그를 움직여 마음에 동정심을 일으켰고 그는 동정 어린 섬김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은 말로만 그친 적은 결코 없었고, 행동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보셨으며, 느끼셨으며, 행동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본받는다면 이웃 사랑의 핵심적인 부분을 실천하게 되고 이 경우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이 그렇게도 많이 주장하는 인(仁) 사상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동정심에 비롯한 섬김은 요한 일서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저술한 요한 일서를 보면 사도는 예수님의 교훈을 잘 배워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직접 듣고 보아 온 사도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오늘은 그가 배운 놀라운 구절을 먼저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 18).

 

어제 본 요한 일서 3:16-18은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자기 희생 때문이었다는 놀라운 주장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결코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모두가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 같은 것은 필요없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한 비난 앞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좋고 고상한 것이지만,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다른 속셈으로 얼룩져 있으며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오직 한 행동만이 더없이 순수한 사랑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주신 사건입니다. 그는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모든 것 즉,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행동입니다.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사도 요한은 골고다에서 비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미 마가 다락방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만 그분의 섬김의 절정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바로 골고다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한 우리의 목숨을 버리라는 부르심은 결코 영웅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사람은 이런 부름을 받기도 합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은 당연히 평범한 섬김의 행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도 없고 섬기는 것도 없는 곳에는 우리가 아무리 크게 나팔을 불어도 결코 사랑이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르치시기를 주님과 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도 이것 보다도 못한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핌합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력한 논조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재물을 가졌으며 그리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필요를 보는 한편, 또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든 자를 보는 한편, 약과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를 보는 한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굶주림을 보는 한편, 식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을 보는 한편,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핵심은 그가 자신이 가진 것과 본 것을 연결할 것인지, 아니면 둘을 명확히 구분할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는 병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며 병든 자를 보시자 고치셨습니다. 당신을 따라 온 군중들이 주린 것을 알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먹이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오늘부터는 존 스타트 목사님의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으며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가 역사상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종교적 사기꾼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등 형편없는 말을 하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를 좌절한 슈퍼스타나 서커스의 어릿광대 등으로 묘사하는 풍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우리는 거침없이 네 주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심판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랑의 그리스도만을 따르고, 위로의 그리스도이지만 결코 도전을 주는 그리스도는 부인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화에 대한 명령에는 무척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그리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라는 부르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그리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사역을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라는 말로 집약시켰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모든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셨습니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균형 잡힌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복음 전파와 섬김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조화가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섬김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으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심지어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등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봉사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이런 물질적인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복음 전도에만 집중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는 말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의 행동은 그가 선포하고 묘사한 천국의 모습을 나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다면 복음 전파에 큰 진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하신 선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사탄의 지배가 몰락하는 증거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동기는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종종 동정이 예수님의 속성이라고 기술합니다. 동정은 예수님의 섬김 이면에 있는 최고의 동기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적 필요를 보시고 깊이 감동하셨으며,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행동하셨습니다. 이렇게 행동하신 거의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적 조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육체적인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주변에서 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에서 병든 어머니를 둔 딸로 하여금 어머니의 육체적 필요를 돌보는데는 눈을 감기우고 오직 어머니의 신앙과 영적인 상태만을 위해 기도하도록 만들어라는 계책을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주는 대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웃이 처한 육체적, 환경적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사 고치신 개인과 무리에 대한 성경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자 그 문둥병자는 즉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인 성 근처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인 한 젊은이의 장례 행렬과 마주쳤을 때도 그들을 깊이 위로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3-14) 하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서 말을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실 때도 그 동기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우리는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보신 주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매일큐티

2016. 9.12-13

그리스도인의 종으로서 부름받은 우리는 그 소명에 따라 직업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24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로 그의 말을 맺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직업(직업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가 속한 사회적 위치일 수도 있음) 속에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책임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의 틀 속에서 갖게 되는 인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종들아 모든 일에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2-23)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상전을 섬김으로써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뜻이 여기에는 담겨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에 대한 정신입니다.

 

베토벤은 한밤중에 갑자기 누군가 옆집 문을 연이어서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사람은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또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그리고 다시 네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날 밤 베토벤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네 번의 두드림이 그의 풍부한 음악적 재능 속에서 네 박자의 멜로디로 변해서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 유명한 5번 교향곡 운명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곡에는 네 박자 멜로디들이, 같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다양성을 띠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소명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소명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매순간 강한 두드림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항상 동일하면서도 항상 새롭게 우리 삶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척도는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소명 의식과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기꺼이 자족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2016. 9. 5 9

 벤 페터슨은 어느 여름 포틀랜드에서 온 내과 의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의사는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자랐으며 시카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벤 페터슨은 그에게 왜 하필이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틀랜드를 근무지로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의사는 서북부 태평양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든지, 그곳의 생활 수준 때문이라든지 또는 그곳이 자기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라든지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사가 시카고에 있을 때 어떤 한 젊은 신학생을 만났는데 그 신학생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포틀랜드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애기를 들은 후 그 의사는 자기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고 포틀랜드를 의사로서의 첫 근무지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 의사는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소명이 틀리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또 우리의 경우에 소명이 직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직업이 소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통상 가치를 판단하는 관점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이느로서는 실패했지만 소명을 수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속에서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을 위해 결코 가족을 희생하지 않으며, 비도덕적이고 부정직한 일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직업에서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소명을 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것입니다.

 

소명이 우리 삶 가운데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직업들의 성공과 실패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평가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청교도였던 윌리엄 퍼킨즈는 소명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썼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성곻하도록 허락도 하시는데 그 성공은 복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허락하심으로 무엇을 시험하신다는 말일까요? 바로 우리의 소명에 대한 순수성입니다. 소명보다는 직업을 추구하면서 자기 둥지에 더 많은 깃털을 모아들이려는 새처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하는가? 우리가 성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면 우리의 소명 의식을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공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일 속에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할 때 많은 번영과 이익, 명예등이 우리에게 주어지곤 합니다. 물론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모든 번영과 이익 그리고 명예등이 다 쓸모없는 것이므로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일을 잘한 대가로서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이나 보상을 누리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소명을 성공에 대한 모든 세상적인 척도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소명과 관련하여 생각할 중요한 점은 자족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가지고 그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들이 현재 가진 직업 안에서 자족할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을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쓰셨는데 이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도 사도는 언제나 하나의 일관된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형편없다고 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협상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매일큐티 | 2016.8.29 – 9.2

‘소명’은 일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명(vocation)과 직업(occupation)을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그 속에서 만족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만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일들도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 ‘보카레(vocare)’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부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는 헬라어 명사 ‘클레시스(klesis)’가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우리들은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은 백성이며, 소명을 가진 백성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말합니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로서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는 소명을 가진 단체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 의미에서 여러 거지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개인적으로는 석공, 건축사, 심리학자, 자동차 세일즈맨, 관리인, 가정주부등에 종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잘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사용하라”(고전7:21). 이 말은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주차장에서 밤 근무하는 일을 하다가 부름받았느냐? 지금 너의 일이 싫으냐? 염려하지 말라! 만약 네게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바꾸도록 하라. 그러나 직업을 바꾸는 데 몰두한 나머지 네게 있는 소명까지 잃어버리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수행할 때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나 이사회의 이사장직을 맡은 사람이 모두 동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고전7:22).

 

소명은 하나이지만 직업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직업들은 소명의 권위 아래에 놓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 속한 사회적 위치나 환경들이 소명 때문에 손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도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들은 소명에 비해 아주 미약합니다. 사실, 각각의 직업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명은 직업을 이끄는 주된 원리이지만 우리가 현재 담당하는 직업은 그런 소명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달성하려는 목적은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의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출석하던 교회의 주일학교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질문을 받기를 “체신부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주일학교에도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을 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비결이라니요? 주일학교야 말로 저의 비즈니스인걸요! 그 외의 모든 일들은 그저 평범한 일일 뿐이지요. 45년 전에 저는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말씀을 확신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입니다.”그는 진정으로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