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9/23-27)

잠언31:22절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현숙한 여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불’ ‘세마포와 자색 옷’은고대에  부자들이나 권력자들만 사용하고 입는 고가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숙한 여인’에게는 사치품이라기 보다는 품위 유지를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익힌 훌륭한 직조 기술로 침대용 이불과 아름다운 옷을 짜고 사용합니다. ‘이불’은 복수로서, 침대를 부드럽고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7:16참조). 그녀의 옷은 농업과 축산에서 나온 최고급 직물로 만들어졌습니다. 31:13에서 아마(린넨,삼)로 옷을 짓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본절로 들어오면 ‘세마포(고급 린넨)’로 발전합니다. 고급 린넨은 통상 이집트로부터 수입되었는데,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자 입었던 바로 그 옷입니다(창41:42). 또 ‘양털’(13) 대신 ‘붉은 보라색으로 염색된 양털’을 옷의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역시 전통적으로 수입품이었습니다. 이 붉은 염료는 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조개 껍질에서 추출하였기에 비쌌고, 따라서 부와 사치품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가 이 염료로 염색한 직물을 판매하였습니다. 누가는 또한 그녀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게 하셨고, 그녀와 온 가정이 침례를 받습니다(행16:14).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의 첫 번째 교회였고, 루디아는 신약판 ‘현숙한 여인’입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31:23절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당시 성문은 사람들이 모여 공적인 일을 논의하거나 재판하는 장소로 장로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정 이전에는 장로들의 권위 하에 각 공동체의 질서가 세워졌고(룻4:1-12), 또한 장로들은 외부 세계에 대하여 공동체를 대표하였습니다. ‘그 땅’이란 ‘성문’과 병행구절로서, 그들의 영향력이 공동체를 넘어 더 큰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았다”는 말은 그녀의 남편이 공동체 가운데 인정 받아 명성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 이유를 들면, ①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가정은 평안하고 번영하였습니다. ‘가화만사성’이지요. ② ‘인정을 받으며’의 원어는 ‘노다’이며, 이는 개인적 접촉을 통해 경험해 안다는 ‘야다’가 어근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은 그 남편의 명철함을 경험해 알고 있었고, 장로들과 함께 재판석에 앉을 만큼 존경받았습니다. ③ 아내된 ‘현숙한 여인’이 준비하여 입힌 ‘홍색 옷’(21b)과 같은 고귀한 의복도 명성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④ ‘현숙한 여인’은 ‘그 행한 일 때문에 성문에서 칭찬을 받는다’(31)고 한 것 같이, 그녀의 성품과 천재성은 남편의 머리에 씌여진 면류관입니다(잠언12:4). 실로 ‘현숙한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귀합니다(31:10). 한편, 어떤 의미에서 ‘현숙한 여인’은 성도들을 상징하는데,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올바른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마5:16), 주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고린도전서13: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빅터 프랭클의 우울증 환자였던 여교사의 글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울증은 “삶의 의미”를 못 찾고, 이에 따른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 하는 병입니다. 삶의 의미는 창조적 가치, 체험적 가치, 자세적 가치의 실현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프랭클). 인간이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 자체가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자세적 가치). 결국 ‘자세적 가치’는 가치괸, 철학, 혹은 신앙으로 불리워지는 정신적·영적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삽질 밖에 없고,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징벌과 굶주림과 추위뿐이었다. 그래도 인간에게 본질적인 자유가 남아 있고 자세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앞에서 인간은 자유롭다…이 자유는 어떤 조건도 부인한다. 그것은 ‘모든 상황 아래서’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되는 자유다”. 프랭클은 전문직에 종사하다 죽을 병에 든 어느 청년의 사례를 언급하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청년의 사례는 내일 묵상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 가치와 모범, 그리고 소망을 제시합니다. 복음은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침례를 받아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종들로 살아가라”는 믿음의 자세, 주님의 훌륭한 모범, 그리고 이를 본받은 사도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갖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요한일서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한 청년이 수술이 불가능한 척추종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신이 점차 마비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직업을 그만 두었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창조적 가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체험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예를 들어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으며 다른 환자들을 만나 서로 격려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활동까지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신이 마비되었을 때, 그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를 자세적 가치에서 찾았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동료 환자들을 상담해 주는 역할을 자임하였고 최선을 다해 귀감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용감하게 참아냈다. 죽음을 하루 앞둔 날, – 그는 그것을 예견하였다 – 그는 당직 의사(빅터 프랭클)가 밤중에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 오후 진료시간에 그 의사가 회진 왔을 때 청년은 저녁에 주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의사가 주사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래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도록 하는 배려였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훌륭하게 실천한 대목입니다. 물론, 이 청년이 그리스도인인 여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불신자라도 프랭클의 의미요법, 더 나아가 상기 황금률에 감탄하여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이로써 구원받지는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덕으로 칭찬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사례는 주님의 뜻을 실천할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권리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마가복음1: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자신의 불치의 병을 우연히 알게 된 저명한 한 젊은 수학자의 편지입니다: ‘나는 나의 도전적 정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되었네요. 이 투쟁에서만큼은 애초부터 승리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지요. 차라리 이 투쟁은 남은 기력의 마지막 소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이유 없는 투쟁이라고요? 우리 시대의 철학 서적에서는 이 말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투쟁 그 자체가 중요하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상실될 수 없습니다…..저녁에 우리는 안톤 부르크너의 교향곡 4번 Romantic Symphony를 감상하였지요.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우주적 장엄함이 나를 감쌌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값싼 감상주의에는 틈을 내주지 않을 겁니다”(「의사와 영혼」빅터 프랭클). 이 수학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세적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창조적 가치나 경험적 가치들도 멘토의 도움이 요청되지만, 자세적 가치의 경우는 필수적입니다. 그 만큼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의 전환이 어렵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는 38년 간 누워 있었다가 고침 받았으나, 후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는 예수님의 경고를 받자, 오히려 안식일에 자신의 병을 고친 이가 예수임을 고발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기적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세적 가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세를 바꾸는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천국도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매일묵상(2024/9/19-20)


잠언31:20절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곤고(가난)하고 궁핍한’(9) 이란 문구는, 그 당시 힘 없고 불리한 처지에 있는 가난한 자를 지칭하는 일상적 언어로 보여집니다. 왕은 법정에서 입을 열어 그들의 이익을 옹호해 주지만, ‘용맹한’ 이 여인은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려고 손을 폅니다. ‘현숙한 여인’을 용맹하다고 일컫는 것은 몸은 연약하지만, ‘도덕과 자비의 용사’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펴며’그리고 ‘손을 내밀며’ 그녀는 도움을 주려고 손짓합니다. 이 여인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하여 번 것을, 움켜쥐지 않고, 궁핍한 자에게까지 도움을 줌으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의 실천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목적은 단순히 가족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하려는 마음도 갖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사회보장이 어느 정도 정비되었지만, 흉년이 빈번히 찾아 들었던 고대에는, 가난한 자가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친척이나 부자의 자비에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고엘 – 친족구속자’를 통한 구제 제도를 확립하였고, 룻기는 이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룻기에서 보아스는 고엘이 되어, 가난한 나오미와 룻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족 구속자인 ‘고엘’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도입니다. 죄악과 마귀의 수탈에 허덕이던 인류를 고엘이신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숙한 여인’은 지혜의 화신이고, 이는 주님을 표상한다 하겠습니다. 주님을 통해 아버지께 영원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9:9)

잠언31:21절
“온 식구를 홍색 옷으로 따스하게 입히니, 눈이 와도 식구들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다.”(새번역)

잠언의 ‘현숙한 여인’의 행장에는 그녀가 만든 화려한 옷이 언급됩니다. 다만, 옷을 팔아 돈을 벌고 식탁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눈 내리는 추위에서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걱정하는 일이 없다’는 예상되는 위험을 충분히 대비하였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우기는 겨울이고(11월∼3월), 가장 큰비는 1월, 2월에 내립니다. 이때는 폭우가 쏟아지며, 예루살렘과 같은 높은 산지에는 때때로 눈이 내리고, 비는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따라서, ‘눈’은 식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혹독한 추위에 대한 환유입니다. ‘홍색’은 붉게 물들인 실로서, 아마가 아니라 값비싼 양털을 뜻합니다. 아마는 염색이 쉽지 않습니다. 염료기술이 일천했던 당시에는 물감을 들인 채색 옷은 부자나 귀족만이 입는 비싼 옷이었습니다(창37:3). 따라서 ‘현숙한 여인’이 모든 식구들을 위해 값비싼 양털로 짠 ‘홍색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녀의 재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다만 과시를 위함이 아니라 겨울의 추위 속에서 건강을 배려 한 것입니다. 그녀는 지출의 때와 대상을 알고 있으며, ‘마음도 따뜻합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과 경제생활의 상관관계를 모범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숙한 여인’은 주님이 맡기신 가정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며, 지혜롭고, 마음은 사랑으로 따뜻합니다. 열심히 일만 하면 돈은 벌겠지만, ‘현숙한 여인’처럼 모든 이웃, 특히 가족을 돌보며,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을 경외하기에 터득한 ‘사랑의 기술’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매일묵상(2024/9/9-13)


잠언31:18절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을 알고,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새번역)

18절은 “현숙한 여인”이 부지런함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을 알았다.” 즉, “현숙한 여인”은 자신이 벌어들인 경제적 이익에 고무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잠언은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음식물을 나누어 주고, 여종들에게 할 일을 맡긴다”는 15절을 고려하면, 도대체 이 여인은 언제 잠을 자고 휴식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는 해석들이 많으나, 부지런한 사업가들의 삶이 실제로 그러합니다. 사업가들은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통상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책임감을 갖고 일합니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본받아,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하였습니다(1968.2.1). 난 공사를 앞두자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호출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지도를 보면서 걱정하는 사이 작업복 차림의 정회장은 졸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현장에서 밤을 새다시피 하며 작업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언짢은 표정 대신, 잠이 깨기를 기다렸다가 죄송해 하는 정회장의 손을 잡고 “정 사장, 내가 미안하구만” 하였다고 합니다. 가난한 대한민국의 발전이란 공동 목표를 놓고 힘을 합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사업가의 덕목은 이익이 되는 분야를 누구보다 빨리 간파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이와 같이 ‘현숙한 여인’은 밤새 직물을 짜서 팔아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녀의 번영을 단적으로 알려줍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14:24).

잠언31:19절
“한 손으로는 물레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탄다.”(새번역)

19절은 “현숙한 여인”의 실 뽑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묘사합니다. 그녀가 하는 가사일의 수행은 가정의 복지와, 소득 증대까지 고려한 생산활동입니다. 그녀는 옷감을 위해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고”(13) 물레질과 실을 만드는 작업으로 발전시킵니다(19). 부지런하고 유익한 그녀의 두 손은 궁핍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손으로 변모합니다(20). 실로 가정, 공동체, 그리고 주님께도 보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현숙한 여인”의 중심에는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놓여 있고(30),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가정과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즐깁니다(시37:3). 따라서, 밤 늦도록 부지런히 옷을 만들고,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는 동시에, 일찍 일어나 각 여종들에게 가정의 일을 나누어 주고, 그 날 할 일들을 위해 준비시키는 행동은 그녀의 즐거움입니다. 가히 가정의 CEO라 하겠습니다. 그 옛날 대갓집(큰 권세와 부를 가진 큰 집) 맏며느리는 약 100명의 식솔을 섬겼으며, 하루 쌀 한 가마니로 밥을 짓고, 계절을 따라 많은 필수품들을 빈틈 없이 준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많은 지혜와 경험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거래하는 시장의 큰 손으로 존중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갓집 맏며느리와 잠언의 “현숙한 여인”는 모두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으며’(25), 그들의 가정은 다 번영하였지만, 특히 “현숙한 여인”은 인애의 법을 논하며 겸손의 덕을 갖추었습니다(26). 그 비결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모든 덕행의 근본입니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잠언31:29)

누가복음10:38절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의 열정은 불만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자신의 일에 성취를 내려고 몰두하는 분들의 공통적 특징이 책임감과 열정입니다.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임무만을 주요 목표로 내세울 때 관여된 사람들의 가치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남이나 인격적 대화 존중 등 체험적 가치의 실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마리아는 전통적 관습을 따라 언니를 도와 대접하는 일, 즉 여인의 창조적 가치의 실현을 소홀히 한 면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두 섬김은 꼭 필요하며, 모두 주님을 사랑해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한 것이지만, 서로 다른 가치의 통합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를 가볍게 꾸짖으신 것은 언니부터 이런 부분을 사랑 가운데 통합하기를 원하신 면이 있습니다. 본문의 일화는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기에’(요11:5), 창조적 가치와 체험적 가치가 사랑 안에서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야 하고, 이어 더 높은 가치 안에서 각각의 위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은 진보와 보수가 격돌하고 국민의 심판을 통해 사회가 발전해 나갑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은 사랑 안에서 통합에 이르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의 자기 희생의 사랑 가운데 가치를 통합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마태복음9:27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삶의 의미”의 발견을 위한 3번째 방법은 “자세적 가치의 실현”입니다. A는 공동 도서관에서 자발적 연구 작업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길을 건너는 공포가 있어 다른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주변의 노력들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삶의 의미는 창조적 활동(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나 사람 또는 사물을 체험함으로써(체험적 가치의 실현) 발견되나, 만약 이런 길들이 막히면,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자세적 가치의 실현”의 중요성은 바로 고통에 대한 대처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의미는 창조적 가치나 체험적 가치들을 실현함으로써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자세적 가치들의 실현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고, 자세적 가치의 실현은 고통 속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가운데서도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는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행동이나 인내를 통해서 보석으로 만들 수 없는 곤경은 없다”는 괴테의 말을 되새기게 합니다. 프랭클은 괴테의 이 말을 즐겨 인용하면서 환자들에게 “직접적으로는 정신 분석의 방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마음 자세를 바꾸게 하여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심리학, 정신의학 등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입니다. 기독교는 중생(거듭남)의 종교로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할 능력을 줍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9:29,30a)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빅터 프랭클에게 박테리아 공포증에 사로잡힌 어느 어머니가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여러 명의 어린 자녀를 두었는데, 많은 염려 끝에 병에 걸리지 않도록 외출을 삼가하였고, 어떤 방문자도 집 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손을 씻었고, 남편이 어떤 아이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이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남편과 이혼하려고 하다가 자살을 기도하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그녀의 공포를 과장하여 시연하고 그녀의 염려의 문제점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 환자를 불러 임상 치료의 청중 앞에서 내가 한 행동을 따라도록 했습니다. 강의실 마룻바닥을 손으로 쓸며 “박테리아가 이보다 더 많아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뒤, 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습니다. 물론 환자도 따라 하였습니다.” 그런 역설적 의도를 깨닫자 환자는 충격과 함께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와 함께 마음 자세도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닷새 동안 같은 치료를 받자, 3년이나 병들게 했던 강박 관념과 피해망상증이 90%이상 사라져 버렸습니다. 징크스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만유의 주님은 그 징크스에서 우리를 자유토록 하시기 위해, 그런 징크스를 통과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징크스가 생기면 그런 우스꽝스러운 현상에 대하여 웃어넘기고,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믿고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매일묵상(2024/9/2-6)

잠언31:16절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16절은 ‘현숙한 여인’의 적극적인 경제 활동을 묘사합니다. ‘살펴 보고’에 해당하는 ‘자메마’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계획하다’는 의미로써, ‘현숙한 여인’이 구입하려고 밭의 상태와 경제성 등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모든 각도에서 생각해 본 뒤, 대담하게 자금을 집행하여 구입합니다. 자금의 출처는 어디이겠습니까? ‘자기의 손으로 번 것’입니다. 원어는 ‘그녀의 손바닥의 열매’로서, 열심히 손으로 일하여 직물을 생산하고 팔아 얻은 소득을 말합니다(31:13,24). “포도원을 일구며”는 먼저 땅을 갈아 엎고, 돌을 전부 골라내어 울타리와 쓸만한 밭을 만든 후에, 최상의 포도나무를 심고, 원두막과 포도주 틀을 세우는 과정을 지칭합니다. 10년은 노력해야 좋은 포도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한 우물을 10년은 파야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표 판매원 등과 같이 노력해도 기술이 늘지 않는 일은 청년들이 택할 직업이 못 됩니다(버트란트 러셀). 노력해서 도달할 장래가 없는 것이죠! 현숙한 여인은 그 반대입니다. 한편, ‘산다’의 주어는 ‘현숙한 여인’입니다(여성 대명사). 일반적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땅의 구매와 같은 일은 가정의 중대사이기에 가장이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는 문서상으로는 가장이 밭의 소유주로 등재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에 여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회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현숙한 여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 하겠으며,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의 경제적 측면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잠언31:30,새번역)

잠언31:17절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토마스 모어의 책「유토피아」(1516년)에서는 모든 주민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생산물은 다 공동체에 귀속되며 개인은 공정한 분배를 받기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모두 부유하다고 합니다. 꿈 같은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가 없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공정한 분배를 행할 수 있는지 토마스 모어는 적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공정한 분배는 오직 정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31장 10절이하에 현숙한 여인을 등장시켜, “사랑의 모범”이 작동하는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연하게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또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에서 ‘팔’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현숙한 여인이 가정을 위해 강한 의지를 갖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표현 합니다. 사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종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고, 밭과 포도원에서 일한 뒤, 밤에도 물레질을 합니다. 그런 불굴의 동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가정 즉,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남녀 하인들을 맡겨주셨음을 알고 책임감을 갖습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단순히 자신을 치장하고 안일하게 사는 길이 아니라, 맡겨진 가정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삶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 여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지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고, 경외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그 비결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마태복음26: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인간 관계는 개방적이고 정직해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임박한 체포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와 보니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반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려 도움을 요청하는 가나안 여인의 부르짖음에, 제자들은 감정을 감추지 않고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예수께 불만을 토로합니다. 솔직함은 상담에서도 중요합니다. ‘터니어’는 대인 관계에서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나는 진찰실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의 가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타인에게 보다 개인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따뜻한 인간성을 갖도록 도와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마치 신선한 미풍처럼 우리 가운데에서 불어나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의사는 자신이 심하게 화를 낸 다음에 생겼던 변화를 말합니다: “전에는 내 직무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호메로스의 시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분노 때문에 한 인간이 되었고 호메로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그리고 그분이 친밀하게 만나셨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솔직한 대화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어떤 행동에도 주님은 언제나 현재의 모습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시는 장면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포용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갖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4,사역)

누가복음10:41,42절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체험적 가치의 실현은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또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이 방문하자 잘 대접하려는 마음에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동생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주님께 불평하였으나, 주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본문은 선한 사라미아 사람의 비유 다음에 위치합니다. 거기서 제사장, 레위인은 도움이 필요한 동포를 지나치는데, 거룩을 요구하는 제사 직분을 핑계 삼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장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향합니다. 늘 하는 제사 직분(창조적 가치 실현)과 강도당한 이웃의 간호(체험적 가치 실현) 사이에 바른 선택, 즉, ‘삶의 의미의 실현’은 무엇이겠습니까? 후자입니다. 물론 주님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 제사장의 역할, 음식 대접 등-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가치’만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닙니다. 어느 가정주부는 세 자녀를 거느린 진부한 가사일을 불평하는데, 바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와 비슷합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올바른 자아실현의 방향을 잡고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같이 “체험적 가치의 발견”은 경험이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후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어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주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로마서 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보편적 방법은 자신의 일 – 가사, 공부, 근로, 사업, 학문, 예술 등 -을 통해 ‘창조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만남, 배움, 경험(황혼의 아름다움 등) 따위를 통해 체험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어느 실내장식 화가(61살)와 상담한 내용입니다. 그 화가는 신경질환이 악화되어 자신이 사랑해왔던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체험적인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더 이상 창조적인 가치들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자신의 직업을 통해 거둔 성공, 현재도 활발한 예술적 감수성, 그리고 행복한 부부 생활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현재 추구하는 지적인 탐구- 강의, 읽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 -에 집중하면서 상담하였다.” 그 결과 손작업으로 더 이상의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삶에도 여전히 의미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자 그 화가는 강인해 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체험하는 일보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에게 마리아가 택하였던 “좋은 편”(눅10:42)이란, 마리아가 추구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주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원기회복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셨지만, 그분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필요하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롬14:19절,새번역)

매일묵상(2024/08/26-30)


잠언31:14절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본문은 ‘현숙한 아내’를 무역선에 빗대었습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은 히브리인이 아니라 페니키아 상인들이 주도하였고, 두로와 시돈은 그 때문에 번영하였습니다. 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현숙한 아내’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은, 그 만큼 진취적으로 가정 경제를 일구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라는 표현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돈을 버는 것은 남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고대에 여자가 무역을 통해 필요한 양식을 들여오는 모습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지혜를 가진 모든 여인들의 삶이 그와 비슷하였습니다. 1525년 결혼 후, 마르틴 루터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고, 경제적으로도 큰 규모의 살림을 유지하였습니다.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는 방 40개가 딸린 수도원을 루터에게 결혼 선물로 주면서, 교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고 결혼 축하금으로 140굴덴이 들어 왔지만- 소 한 마리에 2굴덴 – 살림은 빡빡하였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컸고, 루터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이었습니다. 수많은 식솔의 식사 준비와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카타리나의 몫으로, 닭과 돼지를 치고 채소를 심은 것은 물론 수녀원에서 배운 양조 기술로 맥주를 빚어 팔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재(理財)에도 능해 어려운 살림에서도 돈을 모아 부동산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면,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언31:30)

잠언31:15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4절은 ‘현숙한 아내’가 부족한 물품을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적극적인 노력과 진취적인 자세를 묘사하였지만, 본절과 16절은 가정을 다스리고 경제활동에 주력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14절은 ‘무역선’ 의 이미지로 표현하나, 본절은 ‘먹잇감을 주는 암사자’의 이미지입니다. ‘밤이 새기 전에’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는 아직 밤인데 일어난다’입니다. 암사자는 밤에 사냥을 합니다만, ‘현숙한 아내’는 가족을 사랑하고 재산을 불리고자 모두 자는 밤중에 일어나 하루를 대비합니다. 책임감을 실천하는 근면의 화신으로, 자신의 안락보다 가정의 복지를 염려하는 그녀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근면 성실해야 하는데, 가정의 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은 ‘테레프’의 번역으로, ‘테레프’는 ‘먹잇감인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찢어 먹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현숙한 여인’을 포식동물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새끼들에게 ‘먹잇감’을 주듯이, 범접 못하는 위엄을 갖고 전투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맥그리쉬는 말합니다: “최소한 이 단어는 큰 힘과 기량과 독창성을 발휘한 후에만 얻을 수 있는 식량을 나타내며, 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아내의 특별한 능력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법을 심중에 간직하고(30), 또 지혜로워 각 여종들에게 분배할 적합한 일의 종류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생산적이고 질서 있게 돌아갑니다. 잠언을 가르치는 솔로몬과도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다.”(잠언1:4,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7: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인격적 성숙의 길은 자아실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벗어나 분명한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투신하는 것인데, 올포트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 자기 객관화(자기분리)의 길 (2) 관심사를 넓히는 길 (3)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으로 나가는 길. 첫째, 자기 객관화로서, “한국 떠나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겠다…부족한 연구비 따내려 밤낮 제안서만 써내고…” 어느 스위스 공대 교수(한국인)의 체험기가 말해 주듯이, 이는 관심사에서 멀어지거나, 타인(멘토 등)의 개입과 같은 계기가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눅7:36-50). 그의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은 기적은 행하나 배움이 없는 사람이고, 죄인인 그 여자는 구제불가능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빚 탕감의 비유를 통해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시몬의 대답을 이끌어 내신 뒤, 시몬의 잘못된 행동을 반추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손님 대접에 관련된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만 죄사함 받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아니라, 죄인인 그 여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았고, 이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인 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대화 내용은 쉽지만, 인간의 교만한 본성과 관련되어 있어 실천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복음과 함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자아를 극복하고 타인 존중이 가능합니다. 복음과 함께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입니다(롬8:4-9).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에베소서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인격성숙은 타인을 고려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이를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관심사를 넓히는 것인데, 관심사가 넓어지면 인격적 성숙, 치유,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을 받은 주님은 “이 여자를 보느냐”(눅7:44)라고 하심으로,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은 시몬에게 그녀를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온전하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선포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지만(롬3:23), 화목제물로 세워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갈3:28).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 신분, 남녀의 차별은 없고 한 형제 자매로 존중하기에 주님을 닮은 인격적 성숙에 이릅니다. 또한, 관심사를 넓히면 치유도 일어납니다. 노인들이 은퇴하여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 온갖 질병이 찾아 오나, 관심사에 몰두하면 건강한 삶을 영위합니다. 끝으로, 세상은 자아실현에 몰두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라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즉, 사람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삶을 내줄 때 자신과 타인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짐을 져야 하지만, 타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은 함께 져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해야 합니다(갈6:2). 섬김이 곧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마태복음5: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인격적 성숙에 이르는 세 번째 길은 ‘통합의 원리’입니다. 좀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여러 가치들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눅7:36-50)의 기사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자신처럼 종교적 본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 죄인인 한 여인 등-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의 관심분야인 율법규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되어 율법의 목표인 사랑과 온전함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여자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단죄한 것은(눅7:39), 그가 늘 품고 있던 불만, “왜 모세율법을 행하지 않는가?”, 을 드러낸 것이지만, 무엇인가 결여되었습니다. 사랑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사랑을 통합한 주님의 눈에는 시몬의 삶은 율법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에 미달하였습니다. 시몬이 보는 삶의 반경이 그리 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심 분야에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철저하였지만, 그 영역을 벗어난 사람들을 죄인이라 단죄하고 교제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족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한편, 주님은 회개하는 그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셨으나, 그 말씀 속에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을 통합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본받는 것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목표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매일묵상(2024/08/19-23)

잠언31:12절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새번역)

12절은 ‘현숙한 여인의 찬가’ 서론의 요약이고, 본론(13-27절)이 이어집니다. 본론은 칭찬의 구체적인 이유들인 선한 행위들을 열거하고, 각 행위에 내포된 지혜, 강인함, 자비와 같은 성품을 보여줍니다. 즉,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행위마다 묻어 나오고 있고, 그녀가 속한 대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 열매들을 맺으며, 간접적으로는 가정 경제를 일으켜 남편을 높이고, 공동체의 지도자 중 하나로 인정(23) 받게 하는 모습을 볼 때, 왜 그녀의 값이 진주 보다 귀한지 알게 됩니다. 한편, 본론의 주제, 구조 그리고 시적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면, 본론은 13-18절과 20-27절로 나뉘어 지고, 19절(부지런히 실을 뽑아내는 모습)에서 두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됩니다. ①주제의 측면에서, 13-18절은 무역과 생산을 통해 가정 경제를 일구는 모습, 20-27절은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그녀의 고귀한 인격이 생산하는 덕을 노래합니다. ②구조의 측면에서, 답관체(acrostic) 형식이 계속되면서, 13-18절, 그리고 결론인 28절은 원문의 각절 마다 동사로 시작하고(13절의 예: 구한다 그녀가 양털과 삼을…), 20-27절은 동사 이외의 품사로 시작하여 흥미를 돋굽니다. ③시적인 측면에서 주요 단어의 반복이나, 교차대구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가는 내용도 선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역시 아름답습니다. 이 같이, 우리의 삶도 선한 열매를 맺고, 그것들을 남에게 덕을 세우는 아름다운 말에 담아 내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12:10).

잠언31:13절
“양털과 삼을 구해다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한다.”(새번역)

13절부터, 현숙한 아내의 유능하고 성실한 삶, 복된 결과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가정 경제 구축을 위해 힘을 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13-19). 이는 가정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 보다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는 매우 실용적입니다. ‘양털’은 겨울 옷을 위한 재료이고, 삼은 ‘삼베’를 의미하는 여름 옷의 재료입니다. ‘구해다가’는 교역을 통해 재료를 구입하거나 혹은 직접 아마를 재배하고 양의 털을 깍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여인은 가정에게 닥쳐오는 겨울과 여름의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하되, 부지런함과 치밀함 그리고 계획성 있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가족들의 옷을 만드는 수준을 넘어 그녀는 자신이 생산한 옷들을 팔아 수입을 얻고 가정 경제를 일구어 냅니다(24). 그래서 그녀는 열정을 갖고 부지런히 일합니다. 또한, 그녀는 하녀들을 거느리며 일을 나누어 주지만(15), 자신의 손으로 일하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옷 만드는 기쁨과 그 옷을 가족에게 입히고, 또 그것을 판매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즐거움은 현숙한 아내가 부지런히 일하는 원동력입니다. 공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논어 옹야편).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한다면, 자연히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요 축복의 사람입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시편40:8,새번역).

창세기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새번역)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 한 뒤,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3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①창조적 가치의 실현 ② 체험적 가치의 실현, ③ 자세적 가치의 실현. 먼저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란,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여 무엇인가를 삶에 기여하고자 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어진 책무가 완성되면, 그에 따른 만족감과 안도감이 찾아오나, 반대로 해야 할 일이나 수행해야 할 책무 또는 자신의 잠재 능력을 발휘하게 할 임무가 없을 때 사람은 깊은 절망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조적 가치의 실현’은 인간 실존의 근저에 있다는 말은 타당합니다. 프랭클은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내던 몇 해 동안, 로고테라피의 기본 이론을 정리하여 출간하겠다는 목표가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증언합니다. 또 “빈의 정신병리학 교수이자 90살의 노인인 베르제는 읽어야 할 책들이 책상 위로 꽉 들어 차 있었다. 베르제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었다!”는 그의 말과 같이, 우울증은 흔히 수행해야 할 창조적 임무를 발견하지 못해서 오는 병입니다. 어느 화가가 가스를 틀고 죽으려 하다가, 자신의 그림의 불완전성이 눈에 띠자, 죽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작업에 뛰어들었다는 일화 역시 창조적 가치 실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란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일이 필요하나, 그 일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마4:4)

사무엘상10: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탁구 신동 신유빈 선수는 5살 이전에 탁구 재능을 발견하였으나, 처음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창조적 임무를 발견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별 의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한 안이한 생활 양식에 빠져,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모험을 거부하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창조적 임무, 삶의 의미 등을 발견하기 위해 매개자(멘토, 선생, 친구 등)의 도움이 꼭 필요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왕 사울 혹은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울은 범죄하여 가장 찌그러진 베냐민 지파 후손임을 자각하고 겸손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선택받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용감하게 싸워 이스라엘을 그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왕의 임무를 다한 것이지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백성들을 의식하여 불순종 하자, 그의 왕직은 버림 받았습니다. 백성을 두려워 한 사울은, 하나님이 금지한 아말렉의 우양을 전리품으로 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선택되나, 시글락을 불태운 아말렉 족속을 멸하고 회군할 때 군사들의 말을 듣지 않고, 피곤하여 브솔 시내에 머무른 2백명을, 끝까지 전투한 4백명과 동일한 전리품을 받도록 합니다. 다윗이 세운 공평의 도는 이스라엘 군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b-23a)

누가복음22:62절
“그리하여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비통하게 울었다.”(새번역)

세번 째 예수님을 부인 하자, 닭은 곧 울었고 심문 중의 주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는 실패를 자각하고 대제사장 뜰 바깥으로 나가서 통곡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고전15:5). 이것이 자주 실패하는 신자들의 마음에 각인된 우리 주님의 모범이자 부활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킴으로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주님의 유훈을 지켰던 것입니다. 실패를 통하여 삶을 배운다는 것은 성숙의 표지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실패로 좌절하는 대신 그 실패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실패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성공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한 학생이 심리치료를 위한 하계 수련회에 참석한 뒤, “나는 감히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말도 그런 의미입니다. 이제 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에 뛰어 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빅터 프랭클의 강의는 의미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잘못의 결과를 없앨 수는 없지만, 참회를 통해 자신을 그 행위에서,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 놓을 수 있다. 그는 이미 일어난 일을 변경시킬 수는 없지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성경의 놀라운 점은 우리와 같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실패, 용서, 회복과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꽉 들어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배움과 위로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딤전3:16,새번역)

매일묵상(2024/08/12-16)


잠언31:10절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0-31절까지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가입니다. 형식은 답관체(acrostic)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의 첫머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흥미를 유발하고 쉽게 암기하도록 사용된 문학적 장치입니다. 내용은 세 부분입니다. ① 현숙한 여인과 그 남편의 복(10-12) ② 현숙한 아내의 노력과 복된 열매(13-29) ③ 현숙한 아내의 핵심 덕목- 주님을 경외하는 삶(30-31). 본문의 ‘현숙한’의 원어 ‘하일’은 ‘강하다’라는 의미의 어원 ‘훌’에서 유래하여 ‘능력있는’ ‘힘있는’을 뜻합니다. 문맥을 감안하여, ‘현숙한’(개정개역), ‘유능한’(새번역), ‘어진’(공동번역), ‘고상한 성품의-noble character’(NIV) 등으로 번역되지만 ‘유능함-capable’이란 뜻이 핵심이나, 입으로 지혜를 말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남편을 세우는 고매한 인격도 증거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현모양처로서 ‘현명하고 정숙한’ 아내로 이해되고, 개정개역의 ‘현숙한 여인’이란 번역이 제일 좋습니다. 남편에게는 이런 아내는 귀한 보석인 ‘진주 보다’ 값이 더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은 이런 여인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여자도 이런 아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교훈입니다. 이 현숙한 여인의 삶의 원동력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그것이 이웃(남편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낳고, 그 책임감은 재물, 지혜로운 말, 홍색 옷 등 구체적인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추상적이지 않고 행위와 열매로 입증되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언19:14).

잠언31:11절
“남편은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가난을 모르고 산다.”
(새번역)

11절은 답관체 시의 형식에 따라 히브리어 두번째 알파벹인 ‘베트’로 시작됩니다. ‘믿으며’는 ‘빠다흐’의 번역이며,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인한 행복감·안도감을 나타내고,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함께 사용되어 ‘진심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로 직역됩니다. 남편의 신뢰의 구체적인 내용은 먼저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에서처럼 아내가 벌어들이는 경제적인 풍요함과 관련되어 있지만, 잠언은 인격과 자녀 교육, 그리고 결혼 관계에 대한 정절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신뢰, 그것도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내를 둔 남편은 행복하며, 그 아내 역시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기에 복되다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는 개정 개역에서는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로 번역하였는데, 직역은 ‘그리고 그는 결코 수입이 부족하지 않다’입니다. 잠언을 보면, 아내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수입을 벌어들이고, 남편의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견고하게 일구어 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의 부인 카타리나(1499-155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루터가 수도원에서 탈출하도록 도운 수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결혼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1525년 결혼 후, 카타리나는 루터의 경제생활과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실제 표상으로, 그분의 이야기를 간간이 적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잠언31:12,새번역)

누가복음7:48절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얼마 전 하마스의 지도자 하니예가 테헤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란은 책임감과 모욕감을 동시에 느껴 즉각적인 보복을 선포하였지만,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찾아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여 대접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시몬은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가 울며,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주님의 신분을 시험하는 시몬에게 주님은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르시기를,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춤도 없었고, 흔한 감람유조차 머리에 붓지 않았지만, 그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내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 그는 너보다 나를 사랑함이 많아서, 그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 하셨습니다. 여타 손님들은 귀빈으로 영접하여 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한 시몬이였지만, 오직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예수께 대한 존중과 책임감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크게 모욕감을 느끼셨으나, 내색도 않으시고 온유하게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는 메시야로서의 책임감, 즉 당신의 백성의 죄와 연약을 담당하고 바로 잡으셔야 하는 그 책임감 때문입니다(눅4:17-22). 여인의 향유 사건이 일어나자 대화를 통해 시몬의 마음속 질문에 답하시면서, 메시야의 능력과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본받아 인내하며 주님께서 행동하실 구원의 때를 온유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구원의 사건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눅7:49)

에스더 3: 2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본문의 사건은 페르샤 제국 아하수에로 왕 초기(BC 480년 경)입니다. 질녀 에스더는 이미 황후였고, 모르드개는 수산 성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 대한 암살 모의를 듣고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알려 참극을 막았습니다. 그는 상도 칭찬도 받지 못하였으나, 온유하게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런 중 제국의 2인자 하만의 행차 시 모르드개는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고, 하만은 분노하여 유대 민족까지 몰살시키려고 획책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면 행복하게 살 모르드개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다가 화를 당하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히려 페르샤 제국의 2인자가 되는 과정을 에스더서는 증거합니다. 오늘은 79번째 광복절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수양 동우회 사건(1937년)으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의 검사의 심문을 받습니다.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길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덕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 선생의 강직한 태도는 투옥과 고문, 출옥 후 순국으로 이어집니다(1938). 그분의 신념 대로 사후 7년 만에 한국은 독립되나 한국민의 힘이 아닌 미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요한복음 5:40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영어의 must, can, ought to를 심리학적(or 사회학적) 관점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Must : 강한 의무나 필요성을 나타내며, 상대방은 “강제적 의무감= I must”을 갖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동의 여부를 떠나 행위를 강요당하므로, 인간의 실존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공산당에서 사람은 목표 달성의 수단일 뿐입니다. ② Can : 능력 or 가능성을 나타내어, “성취 능력 =I can”의 관점을 갖게 합니다. 자아실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고, 인생의 의미, 가치, 이웃 등은 차 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자아실현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빌 게이츠의 결혼생활은 깨졌습니다. ③ Ought to : 상대방은 권고를 듣자 책무를 깨닫고 책임감(책임의식)을 갖게 됨을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은 “책임 의식 = I ought to”이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책임 의식’을 통해 외적인 가치 세계와 연관을 맺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그 순간, 인간 존재의 주관적인 면이 보충됩니다. 이는 ‘의미, 가치’와 같은 객관적인 요소를 발견 혹은 수용하기 때문입니다”(프랭클, 의역함). 복음의 전파 방식이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나,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생명의 회개를 얻게 하고,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책임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살았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매일묵상(2024/8/5-9)


잠언31: 6,7 절
“ 독주는 죽을 사람에게나 주어라. 포도주는 상심한 사람에게나 주어라. 그것을 마시면 가난을 잊고 괴로움을 생각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6,7절의 진의는 술로 상징되는 향락이 왕에게 부적절하다는 교훈입니다. ‘죽을 사람’이란 ‘죽음을 방불하는 극한 상황에 이른 자’이며, ‘상심한(=마르) 사람’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말합니다. 극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은 술로 위로를 삼지만, 경건한 자는 그들의 반석이신 주님께 달려갑니다. 한나를 질투한 브닌나가 아들 없는 한나의 약점을 찔러 격동시키자, 한나는 너무나 마음이 ‘쓰라려’(마르)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삼상1:10).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사무엘을 주십니다. 한편, 왕은 정의를 확립하여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요구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모세 율법’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왕의 직무를 상기시켜 ‘모세 율법’을 잊지 말라는 어머니의 통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을 위해 논어를 애독하였는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과 삶을 기록한 성경은 인간 본성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승리의 입성 시, 수 많은 사람의 환호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찬양 소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5일 후 그 백성들은 주님의 원수로 바뀝니다. 형통할 때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을 생각하고 늘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시편37:30,새번역).

잠언31:8,9절
“너는 할 말 못하는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의 송사를 위해 입을 열어라.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세워 주어라.”(공동번역)

본문에서 어머니는, 왕 르무엘이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수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라고 가르칩니다. 재판은 공정해야만 합니다. 가난하다고 두둔하고 세력 있는 자라고 하여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됩니다(레19:15). 그러므로 ‘바른 판결’이란 대목이 중요합니다. 좋은 예가, 솔로몬 왕이 어린 아이에 대한 두 창녀의 상반된 주장을 듣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별하여 바른 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판단과 집행이 쉽지 않습니다. 세력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법의 헛점을 파고 들고, 소송 시에는 많은 돈을 주고 유능한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합법적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역사를 살펴 보면, 권력자들은 힘 있는 계층의 지지를 위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억울한 사정을 알았지만 유대 지도층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에 의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등극하셨습니다. 모든 통치권력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절차를 넘어 구제받지 못한 억울한 일은 더 이상 원수 갚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진노에 맡기시기 바랍니다(롬12:.19).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시편37:9,새번역)

누가복음 5: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 베드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 극적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라는 침례 요한의 거듭된 증언을 듣자 예수께 가서 대화를 갖습니다. 그리고 형 베드로를 찾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그의 인생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흘 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경험하고서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요2:11). 얼마 후 유월절이 이르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수 많은 이적 행하심과 존귀한 공회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등을 목격하였지만, 갈릴리로 내려 왔을 때는 다시 어부라는 생업에 종사하러 갔습니다. 이 즈음 주님은 수 많은 사람과 함께 갈릴리 호수 가에 이르자 시몬의 배에 오르사 군중들을 가르치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밤새 빈손이었던 어부 베드로는 많은 고기를 잡자, 거룩하신 분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깨닫고 두려워 합니다.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심으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눅5:10). 그 사명은 사람의 영혼을 낚아 예수 중심의 인간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이죠! 이 기사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거친 빅터 프랭클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내었습니다. 내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1).

요한복음 1: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예수께 부름 받자,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나섭니다(요1:45).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삶은 수행할 가치가 있는 사명을 발견하였을 때 변화될 수 있다” 하고, 나아가 그는 누구나 그러한 사명이 있고, 그런 임무가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정신분열증 직전의 어느 젊은 여류 화가에게 준 조언입니다. “당신은 삶에서 당신에게 부딪쳐 오고 도전해 오는 어떤 목표 없이 당신의 삶을 재건할 수 없습니다. 목표가 없을까요? 화가로서 당신이 해야할 일이 없단 말인가요? 당신 안에서 숙성 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들, 창조 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그림들 등 당신이 착수해 주기를 기다리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은 힐데가드라는 화가이고 힐데가르를 기다리는 일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은 당신이 창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창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인간이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수께 기대하였으나, 부활의 주님은 그것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행1:1-9).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성령님에 의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인간들의 탄생입니다(딛3:5). 빌립은 사도가 됩니다. 그러나 다 사도이겠습니까? 삶 혹은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기대할까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


사도행전 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의 정점은 ‘자아실현’이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 발견’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아 실현에 있지 않고, 오히려 가치를 실현하고 의미의 가능성을 완성시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가치’ ‘의미’ 등과 같은 주관적 개념들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키에르케고가 도입한 실존주의 철학은 현대 인간을 합리주의 세계관에 가두어 버리고 의미·가치·하나님· 아름다움· 책임감 등 형이상학적 가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제거했다고 개탄합니다. 쉐퍼의 진단은 옳습니다. 현대인들은 생산성, 합리주의, 물질주의 등에는 탁월하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랭클은 ‘의미 요법’을 통해 사라진 사닥다리를 찾아왔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일층(합리주의, 기계적인 세상)에서 이층(의미, 하나님, 종교 등 가치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고, 무의미라는 정신병을 치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해야 할 I ought’ 것을 하려는 그 순간, 우리는 의미라는 객관적인 것을 통해 인간 실존, 곧 존재(being)의 주관적인 면을 보충하게 된다.’ 한편, ‘삶의 의미’는 종교로 가는 길입니다. 프랭클은 종교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하나님으로 가는 길인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일한 의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새번역)

매일묵상(2024/0729-8/2)

시편8:5절
“그를 하나님(엘로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동물은 환경을 갖지만 인간은 세계를 갖는다”고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양심을 갖고 자유로운 결정과 이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이기에, 마땅히 이런 인간상이 전제된 후 심리 치료에 임하도록 주장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정신요법은 보이는 세계만을 대상으로 삼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증거합니다. 두 세계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며, 보이는 세계의 통치를 위해 창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본 시편은 광대한 우주와 수 많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연약한 인간에게 맡기신 경이를 노래합니다. 엄청난 영화요 존귀입니다만, 병들고 죽는 현실과 인간의 말을 듣는 피조물이 없음을 볼 때, 성취자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황제라도 바람과 바다를 복종시킬 수 없지만, 주 예수께서는 복종시키셨고(막4:41), 부활·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받아 성취하고 계십니다(히2:6-9). 한편, 5절의 ‘하나님’이란 문구는 때때로 ‘천사들’로 번역되는데,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부활 이전의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기에 천사들보다 조금 못합니다(시82:6,7), 그럼에도 우주만물의 관리자로 세워진 인간의 영화로운 지위는 존중되어야만 합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상관 없으나, 인간이 늙고 병들어 육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 관리자로서의 존엄성을 빼앗긴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로고테라피적 ‘의미 요법’의 강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는데, 로고테라피가 미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마가복음5:9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사람이 병들면 존엄성을 빼앗긴다” 이는 개인의 중요성을 생산적 유용성과 동일시하는 문화 때문입니다. 은퇴하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결국 자기 존중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또한, 범죄자들은 사회로부터 손상된 그의 존엄성을 반사회적 방식으로 인정 받으려 하고, 정신질환자는 스스로 인격적 존엄성을 가질 수 없어 자신을 향해 분노합니다. 사실상, 정신질환자는 인격의 통일성을 상실하여 내부에는 ‘군대’가 주둔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심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한편, 성경이 말하는 거라사 광인은 악령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한 인격 억압이나, 정신질환은 병이나 죄 등 환자 내부의 요인에 기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존엄성의 상실로 정신질환에 이른다면, 그 대처 방법은 환자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치유를 가져옵니다. 좋은 예가 정신과 의사 설리반의 태도입니다. 담당 의사와 대화조차 완강히 거부하는 환자를 향해 의자를 좀 더 가까이 갖다 놓고 아주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랍게도 환자는 마음을 열고 30분이 넘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설리반의 친근한 행동이 환자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피하는 악령들린 거라사의 광인을 주님은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심으로 그의 존엄성을 인정하셨다”(브루더)는 설명은 옳습니다. ‘존엄성을 가진 정상적인 인간’은 정신의학이 추구하는 목표이나, 이 이후는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인들도 인생을 비출 가르침을 갈망하는데, 그것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마가복음5:19절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막5:19,새번역)

혹독한 나치 치하에서 2년 반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풀려난 한 유다 청년(17세)은 탈무드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프랭클은 그에게 “그 체험이 당신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는지 누가 압니까? 그 체험 때문에 당신은 보다 정직하고 사려 깊은 인간이 되었소 2년 반 동안 갇혀 지내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적합한 임무를 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아마 당신의 수감 생활은 그 시기의 당신 인생에 꼭 알맞은 직무였을 것이오….탈무드에 대한 당신의 연구는 깊이 나아 가서 그 지혜의 깊숙한 곳까지 이를 것이오….사실 지금 당신은 마치 순도 높은 금은처럼 정련되어 있소…” 그 청년은 결정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프랭클은 청년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여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비추어 자신의 곤경을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 “나는 그 젊은이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환자의 서글픈 현재의 상태를 지적함이 아니라 그가 지금은 정신질환에 시달려도 그가 성취해야 할 의미를 섬광처럼 볼 수 있게 함으로 그렇게 하였다.” 귀신들이 쫓겨나가자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사 광인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가장 적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2년 후 주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으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의 관점에서 오늘의 나와 현실을 보게 합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5:20)

잠언31:1-3절
“ 마싸 왕 르무엘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   아들아, 들어라. 내 속에서 나온 아들아, 들어라. 서원을 세우고 얻은 아들아, 들어라. 네 기력을 여자에게 쏟지 말아라. 임금도 그리 되면 망한다”(공동번역)

잠언은 3부로 편집되었는데, 제1부 1-9장은 강화와 설교 형식을, 제2부 10-29장은 경구와 속담 형식을, 제3부 30,31장은 부자 혹은 모자 간의 훈계 형식을 취하나 내용과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1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9절은  왕에게 여자와 술을 경계하고 공의로운 통치를 권면합니다; 10-31절은 현숙한 아내에 대한 찬가이며, 각 절의 첫문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른 답관체(踏冠體)- “머리를 밟아 가는 문체”- 입니다. 31장의 편집 의도는 분명합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도, 어머니를 공경하고 그 바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며, 현숙한 여인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삶과 행복의 안전망이고, 생명을 출산하고 태어난 생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기에, 현숙한 여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뜻인 ‘르므엘’ 왕은 솔로몬의 아명이거나 아니면 북아라비아의 지혜로 유명한 마싸의 왕이라 추정됩니다. 공동번역은 후자를 취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만약 전자로 취한다면, 1-3절의 여인에 대한 교훈은 솔로몬 왕의 삶을 반추하게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으나, 힘을 여자에게 쏟았고 현숙한 여인 대신 이방 여인들을 얻은 결과 우상숭배를 이스라엘에 도입합니다.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분열과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31:4,5절
“ 르무엘아,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이 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임금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독주를 좋아하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 법을 잊어버리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판결을 불리하게 내릴까 두렵다.”(공동번역)

4∼7절은 술에 대한 경계로서, 이는 술이 왕의 공정한 직무 수행을 막는 측면과(4,5), 고통하는 사람이 먹고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는 용도(6,7)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문자적으로 ‘왕들에게는 아니다’는 의미이며, 강조를 위해 이 표현을 두 번 반복합니다. 더 나아가 왕을 ‘통치자’로 지칭하면서 또 다시 ‘적합한 일이 아니다’라고 세 번째 반복함으로 어머니의 권면을 마음에 간직하게 합니다. 5절은 그 당시 왕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재판을 르무엘에게 상기시킵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어야 하나, 술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면 오히려 그들의 생존권마저 빼앗아 버릴 우려 때문입니다. ‘법’이란 문자적으로 ‘제정된 것’이며, 국가를 다스리는 법규에 대한 표현입니다. 신명기17:18-19에는 왕이 모세 율법을 등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라고 규정합니다. 왕이 술을 가까이 하면, 이처럼 중요한 율법, 곧 신정 왕국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를 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진 신자도 같습니다(벧전2:9). 신자가 술로 상징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두면,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는 포도나무 가지가 될 것입니다(요15:6).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매일묵상(2024.7.22-26)


요한복음4: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5번 이혼하고, 지금은 한 남자와 동거하는 사마리아 여자는 성적 쾌락을 추구한 참담한 결과에 직면합니다. 그녀는 삶의 동반자가 될 남편이 없습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 있는 위치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얻어집니다. 그런데 책임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의 은밀한 도덕적인 문제를 지적하자, 갑자기 예배 장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바꾸어 버립니다. 종교적 토론은 흔히 개인적인 문제에 깊이 들어가기를 피하는 한 가지 방편이 되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주제의 진부성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과 관련된 ‘어리석은 논쟁..율법에 관한 싸움”과 같은 무익한 일을 피하라고 명령합니다(딛3:9). 복음은 논쟁이 아니라 선한 열매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도덕한 사생활을 숨기려는 그녀를 보시자, 예배의 장소라는 새소재를 갖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제로 들어가셨습니다. 참된 예배는 계명에 따른 삶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다시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있으면 이웃 혹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자. 그러면 ‘영원한 생수(생명, 예배의 삶)’를 가질 수 있다.” 이는 부자 청년의 소유의 문제와도 같습니다. 다만, 사마리아 여인은 결단하여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생수를 얻었고, 부자 청년은 거부하고 떠남으로 생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요한복음4:29절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하갈은 술 광야로 도망 중 샘물 곁에서 주님의 사자를 만납니다(창16장). 그분은 이미 하갈의 신분과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간다는 대답에,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분은 하갈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십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약속하신 주님과 같습니다. 하갈은 그분의 신성을 깨닫고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 살아계신 감찰자의 우물’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순종하여 돌아가서 아브라함 온 집에 자신의 경험을 전하였습니다. 2100년이 흘러, 하갈과 같이 잘못된 관계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곁에 왔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듣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시고 영원한 생수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의 경우처럼 잘못된 관계를 시정토록 하십니다. 다만 이 경우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통한 온유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 여인은 하갈처럼 돌아가서 자신의 부끄러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털어놓으며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몰려 나왔습니다. 오직 죄인들만 예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쾌락의 길을 버리고, ‘영원한 샘물’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영생토록 살아계신 분’을 만남으로 의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이것은 심리학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잠언30:29-31절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29-31절은 자신의 존엄성과 권위를 지켜 당당하게 살아가는 네 가지 표상이 제시됩니다. 초점은 네 번째 제시된 왕입니다. ‘잘 걸으며’란 ‘메티베 차아르’의 번역이며, ‘메티베’는 ‘즐겁다’ ‘잘하다’의 뜻으로 두려움 없이 기쁨을 가지고 힘차게 행진하는 모습입니다. 강조를 위해 ‘위풍 있게 다니다’의 구절을 반복시킵니다. 먼저 사자가 등장하며, 사자는 아굴의 시대에 팔레스틴에 서식하던 동물로서 최강자임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냥개로 번역된 ‘자르지르’인데 문자적으로는 ‘허리에 두른’이란 의미입니다. 빨리 달리도록 준비 된 상태로 보아(왕하4:29) ‘사냥개’ 혹은 ‘얼룩말’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수탉의 자태라고 보아 ‘수탉’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자와 같이 당당하게 다니는 동물임은 분명합니다. 셋째는 ‘숫염소’로 번역된 ‘타이쉬’로서, ‘타이쉬’는 ‘머리로 받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숫염소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전투 태세를 갖추고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당할 수 없는’의 원어는 ‘알르쿰 임모’이며, ‘백성들 앞에 선’ 혹은 ‘군대와 함께 한’을 뜻합니다. 따라서, 왕이 백성이나 군대와 함께 하고 있을 때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아굴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 중 한 면이라 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30:32절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2, 33절은 30장의 결론이며, 교만과 죄악을 버리고 겸손과 경건을 취하라는 교훈입니다. ‘미련하여’의 원어는 ‘나발’이며  사무엘상 25장에 등장하는 갈멜의 어리석은 부자 ‘나발’이란 이름과 같습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에 해당하는 ‘잠모타’는 단순히 ‘계획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계획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 주체가 미련한 자여서 ‘악한 일’로 해석한 것입니다. ‘입을 막으라’는 것은  죄악을 뉘우치고 그 악한 말을 자제하라는 뜻입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은 자신을 위해서는 “왕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였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의 전령들에게는 “다윗은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라고 다윗의 처지를 비웃고는, “내 떡과 물과 고기를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는가”라는 악한 말과 함께 빈 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동안 나발의 양 떼를 지켜 준 선행에 대한 보답은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한 다윗은 나발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나발은 부를 일구었으나 인색하고 성공에 도취되어, 다윗을 과소평가했고, ‘다윗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된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신탁도 무시하였습니다. 미련한 자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늘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자이며, 교만과 미련한 짓을 깨달으면 즉시 돌이켜 그리스도의 피로 씻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본절의 제자이며, 교만과 악한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 자는 바보로서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잠언30:33절
“(왜냐하면)우유를 저으면 굳은 우유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듯, 화를 돋우면 분쟁이 일어난다.”(새번역)

33절의 시작은 접속사 ‘키’로서, ‘입을 막으라’는 권면(32절)의 타당성을 말합니다. ‘저으면’ ‘비틀면’ ‘돋우면’으로 각 번역된 원어는 ‘미츠’입니다. ‘미츠’는 ‘누름’ ‘비틀어 짬’ ‘억압’ 등을 뜻하는 낱말로 우유가 가득한 가죽부대를 삼각대에 걸어놓고 비틀어서 버터를 만드는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아굴은 ‘미츠’를 세 번 반복하는데 행동이 가져올 필연적 결과를 가르치는 의도입니다. 즉, 우유를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교만한 태도나 악한 말은 사람을 격동시키고, 이어 다툼(분쟁)을 일으킵니다. 이 피할 수 없는 귀결을 차단할 수 있는 비법이 32절에서 언급된 권면입니다. 즉 자신만을 주장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아굴의 권면을 받아들일 것이나  교만한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굴이 교훈을 마치면서 겸손과 절제를 강조한 것은 이 자세가 지혜로운 삶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입을 절제하지 못하면 쓸데 없는 말을 하여 상처를 줍니다. 결과는 미움과 분쟁이며, 물고 뜯고 하여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이 악하여 입을 열면 남은 낮추고, 자신은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입을 열면 ‘은혜’를 끼쳐야 할 것입니다. 벽돌로 건물을 쌓듯이, 상대방의 삶을 세워주려는 사랑과 지혜(잠언)는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손히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