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6/24-28)


시편75:6,7절
“동녘에서도, 서녘에서도 아니요 사막에서도, 산악지대에서도 아니며  판결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 이 사람은 낮추시고, 저 사람은 높이신다.”(공동번역)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될 때도 귀는 살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 듣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 이즈음에 친인척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그분은 80 후반의 권사님으로 혈압이 ‘0’ 으로 떨어졌다가, 요양병원 목사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다시 소생하여 기도를 받고 돌아가셨다고 유족들은 간증하였습니다. 그 권사님이 두 달 동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계실 때 병원비가 5천만원이 넘었다고 합니다만, 기적과도 같은 이 은혜의 경험은 유족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만 입니다. 그분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편, 장례식을 치루고 나면, 망자에 대한 평가만 남습니다. 우리 각자도 결국 죽고, 사람들의 잠정적인 평가(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재판장으로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명받으셨음을 선포합니다(행10:42). 그러나, 현실의 삶 역시 유혹과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느헤미야의 삶은 훌륭한 모범입니다. 이방 땅 페르샤에서 믿음을 지키고, 황제의 인정을 받는 삶이란 쉽지 않지만 느헤미야는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은 느헤미야가 합법적 지위를 갖고 그 직분에 충실하게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배후에는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주님이 계심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임금의 마음도 야훼의 손에는 흐르는 물줄기 같아 당신 마음대로 이끄신다.”(잠언21:1,공동번역)

느헤미야 1:11절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제임스 홀이 평양으로 선교를 나갔을 때인 1890년 중반만 해도 조선민족은 땅이란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만약 땅을 깊이 파면 구멍이 뚫어지고 땅은 배가 가라앉듯이 바다속으로 침몰한다는 생각에 우물을 깊이 파지 못하였습니다. 제임스 홀은 간신히 설득하여 깨끗한 물을 얻고, 전염병 확산과 예방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싸움은 세계관의 싸움입니다. 느헤미야의 성서적 세계관은 철저히 신명기의 가르침에 그 기반을 두고 자신의 현재를 파악합니다(레위기26:3-13(축복)/14-39(저주)/40-46(회복)과 신명기28:1-14(축복)/15-68(저주)/30:1-10(회복)). 1천년 전에 기록된 회복에 관한 언약은, 사로잡혀 끌려간 곳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 다시 돌아오게 하여주신다는 내용이고, 비시 450년 경에는 이미 상당부분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그 회복의 와중에 자신이 페르샤 제국의 권력자의 신뢰를 얻어 왕의 술관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페르샤 제국은 자신의 조상의 영토를 지배하지만, 성서적 세계관 하에서는 결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이기에 그 지배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행동양식이 도출됩니다. 그 증거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에스더 황후였고, 재상이었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이제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들은 합법적 지위를 갖추려고 하고 그 중 하나가 느헤미야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29:26, 새번역)

잠언30:17절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언30:10 – 17절은 사회에 만연한 어리석고도 악한 행위 유형들이 열거되고, 본절에서 불효에 대한 형벌로 결론을 맺습니다. 동양 사회의 근본이념이 충효입니다. 충((忠)이란 자신의 진심을 다해 남을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데, 사람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부모이기에 ‘충’가운데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을 ‘효(孝)’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효’는 백행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은 “자녀가 효도하면 부모님이 즐거워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고 가르칩니다. 예외도 있지만,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간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단순히 인간들의 차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봅니다.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부모란 말씀과 지혜의 교사요,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불효는 주님의 진노를 받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아굴은 11절의 내용을 반복하면서, 불효자에게 무서운 벌을 선포합니다. ‘눈’은 부모를 멸시하고 불순종하는 자녀의 모습을 상징하며, ‘쪼이고’와 ‘먹히리라’는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으로 까마귀들에게 쪼이고, 이어 독수리 새끼들이 파먹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불효자가 객사한다는 의미로써 그 당시 사회의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삼하21:10). 벌을 떠나 부모님을 명예롭게 여기는 삶이 마땅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잠언30:18,19절
“기이한 일이 셋,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넷이 있으니, 곧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와, 뱀이 바위 위로 지나간 자취와,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18절은, “나에게 세 가지가 경이롭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네 가지가 있다”로 직역되고, 19절은 그 네 가지 대상을, 20절에서 교훈의 목적인 성범죄를 경고합니다. 19절에 언급된 경이로운, 그리고 깨닫지 못하는 네 가지 대상은 하늘에서 시작하여 땅으로, 이어 바다로 그리고 남녀간의 관계로 초점이 옮겨 갑니다. ‘자취’의 원어는 ‘페레크’이며, 19절에서 네 번, 20절에 한 번 사용되어 서로를 연결시킵니다. ‘페레크’의 통상의 뜻은 ‘길’(창3:24)이며, 그 밖에 ‘생의 여정’이나 ‘행동 양식’ 혹은 ‘방법’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만약 ‘방법’으로 번역하면, 독수리가 어떻게 공중에 머무르고, 뱀이 다리도 없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배가 어떻게 물에 떠서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고, 만약 ‘길’로 번역하면 독수리나 뱀, 혹은 배가 진행한 경로를 복원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글성경은 후자의 의미로 판단하여 ‘자취’라고 의역하였으나, 어떤 의미로 취하든, 도저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지칭합니다. 이어 남녀의 성적관계가 적시되는데, 남녀 관계의 미묘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나, 성적 관계의 흔적이 남지 않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는 20절의 간음한 여자(음녀)의 뻔뻔함의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자는 성적 부도덕에 물들지 않도록 세심히 경계해야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5:3).   

잠언30:20절
“간음한 여자의 자취도 그러하니, 먹고도 안 먹었다고 입을 씻듯이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 한다.”(새번역)

 ‘그러하니’의 원어는 ‘켄’이며, 원문은 서두에 위치시켜, 19절에 열거된 대상들을 ‘간음한 여자’의행태와 연관시켰습니다. 개정개역이 ‘음녀’로 번역한 ‘잇솨 메나아페트’의 문자적 의미는 ‘간음한 여자’이며, ‘간음’이란 결혼이나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 율법은 사형을 규정하고(신22:23,24) 제사로써 속죄할 수 없습니다(시51:16-19). 후단은 간음한 여자의 말을 직접 인용합니다: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 용의주도하게 간음을 행한 후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시치미 떼는 모습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더욱 명료합니다: “그녀는 먹고서 그녀의 입을 씻는다. 그리고 “나는 잘못을 한 바가 없다”고 말한다.’ ‘먹다’란 성행위의 완곡어법입니다(9:16,17). ‘씻다’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간음한 여자의 노력을 묘사하며, 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되고 뻔뻔스런 모습입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숨기려 할 바에는 처음부터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한 행동이 좋은 예입니다. 그녀는 요셉의 용모가 잘 생겼음을 보고 날마다 동침하기를 요구하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아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합니다. 거절하고 도망친 요셉의 옷을 간직하고 거짓말을 위한 증거로 남편 보디발에게 보여줍니다. 분노한 보디발의 손에 잡혀 옥에 갇힌 요셉은 수년 후 출감하여 총리의 지위에 올랐으나 보디발의 아내를 벌하거나, 보디발에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긴 행동은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하며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매일묵상(2024/6/17-21)


(언약궤와 블레셋 사람들)
사무엘상5:1절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 갔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가져온 순간부터 블레셋의 성읍들에 독종의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 독종은 아마도 농작물을 먹고, 질병을 퍼뜨리고, 심장을 멈추게 하는 쥐의 전염병으로 판단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이리저리 옮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사태만 악화시켰습니다.  7달 동안 고통을 겪은 뒤에야, 이스라엘 신을 잡아두었다는 모든 교만은 사라지고 문제해결에 집중합니다. 제사장과 복술자들은,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치유한다’ 는 마법적이자 원시적인 생각에 따라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속건제를 삼습니다. 그들은 값진 예물을 드리고 자발적으로 언약궤를 돌려보냄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나, 그 이외에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갖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헌금, 기도, 구제, 예배와 같은 종교 행위로 하나님의 호의를 조작해 내려는 욕망은 아담 만큼 오래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들은 야훼를 경외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질병을 막기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만 입니다. 더 나아가,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나 그들이 바라는 바는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분이 떠나는 것입니다. 마치 거라사의 광인으로부터 쫓겨 나간 귀신들 때문에 2천 마리의 돼지들이 죽자 그 지역 주민들이 와서 예수님께서 떠나 가시기를 구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것이 징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막12:30,새번역)

사무엘상6: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닥친 큰 재앙이 언약궤 때문인지 여부를 시험합니다. 그들은 멍에 멘 적 없는 젖 나는 두 암소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놓고, 벧세메스로 곧장 가는 여부를 확인합니다. 경험칙상, 훈련받지 않은 암소들이 젖 먹는 송아지들을 떠나 알지 못하는 벧세메스로 곧장 올라 갈 수는 없기 때문입 니다. 두 암소는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가는 길을 정확히 걸어 갔고, 블레셋 방백들은 야훼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본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암소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그분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것이지 의무 때문은 아니며, 하나님은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언약궤에 무슨 마법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고 진영에 갔다 놓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거룩한 언약궤를 적군의 손에 넘기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쓰라린 경험과 함께 언약궤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돌아온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우리가 기복신앙, 마술적 신앙, 징크스 등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주권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받습니다.. 두려움을 가졌던 욥은 시험을 통해 이 진리를 배우고, 자유와 축복을 함께 받았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신 분입니다(약5:11).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4:17)

신명기24:20절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소렉 골짜기의 남서쪽에는 에그론에서 벧세메스로 올라오는 큰길이 있습니다. 언약궤가 올라온 그 길입니다. 김상목 작가가 이스라엘 유학생 시절, 소렉 골짜기 현장 답사를 마치고 팀원들과 함께 돌아오다가 수확을 막 끝낸 오렌지 과수원을 만났습니다. 그 과수원 오렌지 나무들은 이곳 저곳에 아직도 탐스러운 오렌지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저 나무에 있는 탐스런 오렌지는 하나님이 3,500년 전 특별히 우리가 이곳을 지날 것을 아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율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니 마음껏 즐기라”라고 교수가 대답하였습니다. 헌데, 학생 김상목은 오렌지로 갈증을 풀자 집에서 먹으려고 배낭에 주워 담아 벧세메스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렀을 때 오후 늦은 시각이 되었습니다. 온 종일 걸었고 거기에 오렌지까지 한 짐 등에 짊어진 몸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는 회개합니다: “은혜를 족한 줄로 여겼어야 했건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지나는 또 다른 나그네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음을 생각해야 했는데…나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구나!” 그리고 한참을 더 걸은 경험은 모세 율법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하게된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네 이웃의 포도원의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그릇에는 담지 말라”(신23:24)고 규정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욕망은 좋은 것이나 율법의 범위를 넘어가는 순간 죄(탐심)로 정죄되고, 이 탐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롬7장). 따라서 성령께서 도와 주셔야만 하며(롬8:13),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 중 하나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베드로전서2:9a절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어제 라오스 방비엔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들려준 한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 아프리카 선교사가 선교사역 중 구겨지고 지저분한 와이샤스 칼러를 기도하여 깨끗하게 되는 기적을 몇 번 경험하였습니다. 이분이 선교대회 연설 차 미국에 가서 문제가 된 와이샤스 칼러를 위해 기도드렸으나 아무 변화도 없었습니다. 연설 후 주님께 그 이유를 묻자 “미국에는 월풀(세탁기)이 있지 않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의 선교대회였으면 “엘지나 삼성이 있지 않느냐?”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유사한 사례가 문익환 목사님이 7-80년 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장기간 수감생활 중 병든 사람들에게 파스를 붙이면 낫는 ‘파스요법’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분이 출감 후에도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대답하셨겠지요! 우주는 주님이 만드신 창조물이며, 삶의 주된 도구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상식’내지 ‘이성’은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살아계신 주님을 무시하며, 인간의 ‘이성’ 내지 ‘상식’을 우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이성’이나 ‘상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건들도 아주 많습니다. 만유의 주님을 섬기는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으며, 각 신자들은 교회에 소속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공동체나 혹은 소속된 구성원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벧전2:9b).

베드로전서2:4절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새번역)

사도 베드로는 부활 때문에 예수님을 ‘살아 있는 돌’이라 지칭합니다. 사도는 6-8절에서 구약성경(사28:26;시편118:22;사8:14)을 계속 인용하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성전 모퉁잇돌이 되셨고, 신자에게는 보배로운 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같은 메시지를 선포한 바 있습니다(행4:11). 또한 베드로의 이 가르침은 시편118:22절을 인용하여 유대지도자들의 심판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마21:33-46). 이떼 자신을 모퉁잇돌로 지칭하신 것은 역시 부활을 의미합니다. 한편, 본절에서 사도는 예수님을 버린 건축자들을 유대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 확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과 같다는 점입니다. 베드로 당시 신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택함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5절). 부활하신 그들의 주님과 같이, 고난을 견디어 낸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약1:12).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성전과 나라를 세우는 살아 있는 돌들이며, 그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자들 입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며, 우리 삶의 영적 본분을 확연히 알게 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매일묵상(2024/6/10- 14)

(마법적 신앙과 하나님)
사무엘상4장22절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구약성경이 ‘갑돌’(신2:23)이라 부르는 ‘크레타’ 섬은 해양민족 블레셋의 기원입니다. 주전1400년 경 그리스 본토의 침략 시 크레타 주민들의 일부가 이스라엘 해변에 정착하여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가드라는 다섯 도시를 형성하였고(BC1200경), 부침을 거듭하다 주전 586년 경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모든 주민은 포로로 잡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주전 1120년 경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아벡에서 충돌합니다. 아벡은 고대 해변의 길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요, 그곳을 경계로 북은 샤론평야, 남은 블레셋평야로 구분되는 전략적 도시였습니다. 첫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주의 언약궤와 제사장들을 모셔왔으나, 오히려 대패 당하고 언약궤는 빼앗깁니다(삼상4장). 이로써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법적 신앙, 즉 ‘언약궤’와 관련된 잘못된 ‘강력한(?) 믿음’내지 ‘논리’를 산산히 부수셨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기자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영영 떠났다는 충격에, 제사장 엘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두 돌판이 보관된 ‘언약궤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요 계명을 행하라는 의미이지, 인간의 뜻(승리, 번영 등)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힘쓴다면 주님의 돌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징계를 받거나 아니면 버려질 것입니다(히12:7-13). 신앙은 하나님을 부리는 마법이 아님에도, 역사는 이스라엘의 다수가 육신적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상숭배와 하나님)
사무엘상5:4절
“ …다곤이 또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다곤의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나뒹굴었고,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었다.”(새번역)

아벡의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은 아벡에 가장 가까운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주님의 궤를 안치합니다. 그러나 이틀 후, 바닥에 있는 언약궤에 의해 다곤 신상이 부수어진 것을 알자, 누구도 아스돗의 다곤에게 가지 않았습니다.(삼상5:3-5). 우리의 우상과 싸우시는 주님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는 ‘우상숭배하지 말라’인데, 고대인의 세계관에 맞게 풀어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섬기지 말라”(출20:4,5). 그리고 경고와 축복의 약속을 덧붙입니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5,경고).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6,축복). 즉,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면, 주님에게 벌을 받고, 우상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면 자신은 물론 수천 대 자손까지 은혜를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역설’이 존재합니다 : “버려야 산다!” 우상숭배의 시작은 언제이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탐내어 하나님처럼 다룰 때입니다(골3:5). 만약 우리가 탐심이란 우상을 치우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셔서 그 우상을 부수어뜨릴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8:36,새번역)

(현대의 우상과 하나님)
로마서1:26절
“사람들은..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새번역)

‘우상숭배’란 참되신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다양하나 근원은 인간의 ‘탐욕’과 ‘두려움’입니다. 탐욕은 인간에게 좋은 것과 연결되기에 분별을 위한 ‘진리’가 요청됩니다. 야곱이 도망나올 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신(神), 즉 ‘드라빔’이라는 작은 우상을 훔칩니다. 만약 라헬이 ‘드라빔’은 단지 조각된 나무임을 알았다면 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위엄으로 충만합니다(롬1:20). 문제는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시각입니다. 태양을 숭배한 고대인들이 모두 면에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모든 생물을 살리는 열과 빛의 근원되는 복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과 태양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태양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인간은 그것의 관리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양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고대인은 이 진리를 몰라 태양을 숭배하였지만, 지식을 우상삼은 현대인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들이 이성을 통해 세상은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음을 주장하나, 러·우 전쟁에서처럼 땅, 돈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실제적인 결정은 탐욕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절대로 합리적·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현대인에게도 복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과 세대를 위한 진리이고, 그 핵심은 ‘나, 너, 우리, 너희’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님되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세상을 섬김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잠언30:15절
“거머리에게는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딸이 둘이 있다. 전혀 배부른 줄 모르는 것이 셋,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넷이 있으니,”(새번역)

11-14절에서 인간의 대표적인 범죄 4가지-불효, 교만, 위선,탐욕-를 제시한 아굴은, 15,16절을 통해 탐욕의 죄에 특히 초점을 맞춥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골3:5)이기 때문입니다. ‘거머리’의 양쪽 끝의 빨판은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두 딸로 표현됩니다. 거머리는 온 몸이 부풀어 올라도 만족을 모르고 두 빨판으로 계속 피를 빨아댑니다. 이는 결코 만족을 모르고 더 가지려는 ‘탐욕자’를 은유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피’가 생명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전단의 묘사는 타인의 희생을 개의치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냉혹한 행태를 생생히 느끼게 합니다. 본절의 경고는 16절에 열거된 네 가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들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도착되어진 것에 언제나 만족해 하고 마음도 든든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고백을 하는데, 이것이 신자의 자랑이고, 지혜이며 세속의 현인들이 부러워 하는 경지입니다: “만족하며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자족의 삶을 넘는 것이 섬기는 삶이며, 주님의 모범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하셨는데, 모든 것을 소유하신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은혜를 베푸셨고, 바울은 수고하여 일하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계22:12,새번역)

잠언30:16절
“곧 스올과 아기 못 낳는 태와 물로 갈증을 없앨 수 없는 땅과 만족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불이다.”(새번역)

15절 후단의 만족할 줄 모르는 네 가지가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열거됩니다: 멸망(죽음)-생명(자녀)-생명(곡식)-멸망(불). ‘스올’은 ‘무덤, 지옥’ 등으로 번역되지만, 선악을 불문하고 죽은 자가 거처하는 곳을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스올’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아기 못 낳는 태’란 아이를 얻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진 여인의 모습을 말합니다(창30:1), 세번 째는 메마른 중동지역을 배경으로 이슬, 비, 눈 등이 내려도 곧 흔적 없이 대지에 흡수되어 버리는 자연현상을 언급합니다. 네번 째는, 불로서, 불은 수없이 많은 물건을 태우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삼키는 특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아굴이 만족할 줄 모르는 대상으로 상기 네 가지를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숫자] 잠언은… 결코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독자가 숙고하고 삶에 적용할 여지를 남겨둔다”(아이트켄)는 말을 염두에 두고, ‘멸망과 생명’이 교차적으로 등장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도, 아굴은 아들들이 상기 네 가지를 비교하고, 땅이 존속하는 한 계속되는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의 영원한 전쟁을 깨닫게 의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실 때까지(2:20-22), 탐욕스런 자들은(11-15a)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의인은 생명과 선을 만들어 내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싸우며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0,31)

매일묵상(2024/6/3-7)

여호수아10:12절
“여호수아가 주님께 아뢰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가 외쳤다.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러라!”
(새번역)

‘아얄론 골짜기’는 기브온과 해안평야를 연결해 주는 쉐펠라(=’겸손’or’낮음’), 즉 낮은 지역의 5개 골짜기 중 가장 북쪽이며 가장 넓은 지역(평지)를 말합니다. ‘쉐펠라’는 동서 15㎞, 남북으로 60㎞에 이르며 100-400m에 이르는 산들과 골짜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지중해를 따라 뻗어있습니다. 말이 골짜기이지 낮은 산들을 가진 넓은 평야로서, 벧호론 비탈길로 연결되어 예루살렘의 북쪽 기브온에 이르는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입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아얄론 골짜기와 벧호론 비탈길은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 거민들과 격렬한 전쟁을 벌여야만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전쟁이 여호수아 9-10장입니다. 야간 행군까지 감행하면서 길갈(-250m)에서 기브온(900m)까지 가파른 산길을 단숨에 올라와야만 했던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 인천 상륙작전보다 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펼쳐졌던 이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여호수아가 기도하고 외치는 본문이며, 우박을 쏟으시고 태양과 달의 운행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자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신자들이 가나안이란 세상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전쟁입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사령관은 부활하신 예수(=여호수아)이고, 승리의 비결은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8:13,새번역).

사사기16:4절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평지’로 번역된 ‘쉐펠라’ 지역은 블레셋 평야와 이스라엘 산지 사이에 있습니다. 제일 북쪽은 아얄론 골짜기, 그 남쪽으로 소렉, 엘라,  벧 구브린, 라기스 골짜기가 차례로 동서로 달리며 각각 유명한 성경 사건의 현장들이 된 것도 이 지리적 특성 때문입니다. ‘쉐펠라’는  두 민족의 최전선이자 완충지역이었습니다. 소렉 골짜기 역시 그 중 하나로 삼손과 블레셋 여인들(들릴라)이 함께 자라고 만난 장소였습니다. 인간이 만나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내용은 언제나 사랑과 배신입니다. 삼손 사후의 ‘아벡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그 언약궤는 블레셋의 도시를 돌다가 소렉 골짜기를 통해 벧세메스로 돌아갑니다. 벧세메스는 소렉 골짜기 상단에 위치한 언덕(‘텔’이라 부름)으로 블레셋을 막는 이스라엘의 주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삼손이 살았던 소라는 텔 벧세메스의 오른쪽 널찍한 골짜기 건너편의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하였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 들릴라의 집이고(삿16:4), 좀 더 걸어가면 삼손의 첫 번째 부인 블레셋 여인의 고향 딤나(삿14:1)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사사기 13-16장의 현장입니다. 4월에 소렉 골짜기를 여행한 김상목 목사/작가는 “드넓은 소렉 골짜기는 온통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황금물결의 장관이었다… 삼손이 요염한 들릴라와의 데이트 장소가 보리밭이었다니!” 삼손은 사랑에 들떠서 달려갔던 이 길이 죽음과 파멸의 길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어쩌면 이 순간 삼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편128:1)

잠언30:12절
“더러운 것을 씻지도 않고 깨끗한 체하는 무리가 있다.”(
새번역)

이 잠언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더러운 죄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만족해 하는 사람을 정죄합니다. ‘더러운 것’이란 ‘배설물’이나 ‘토한 것’을 의미하며, ‘씻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씻겨지다’, ‘깨끗하게 되다’라는 수동적인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의 눈에는 깨끗하고, 그의 더러움으로부터 씻겨지지 아니하였다”가 되어, 상반절과 하반절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즉, 자신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그 결과 온갖 더러움(=불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아굴은, 오물이 감지되면 곧 씻어내지만 보다 중요한 영적· 도덕적 더러움은 깨닫지 못하여 불의에 그대로 머무르는 사람의 행태를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위선과 자기 의에 대한 경고, 그리고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범죄의 우려를 함께 전달하는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 ‘참회록’ 속의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자신을 성찰한 뒤 마땅히 회개하여 주님의 피로 죄를 씻어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뒤, 1년이나 위선을 행하였습니다만, 선지자 나단이 그 죄를 폭로하자, 다윗은 즉각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다윗을 용서하셨으나, 다윗의 집안은 그 죄의 값으로 풍비박산 되었습니다. 또, 어리석어 계속 죄를 범한 대표적 인물은 삼손입니다. 결국 들릴라의 배신으로 맹인이 되었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 역시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원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잠언30:13절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교만을 경계하는 본절은 “그의 눈이 얼마나 높으며, 그의 눈꺼풀이 얼마나 높은지!”로 직역됩니다. ‘눈’과 ‘눈꺼풀’이 들린 모습을 통해 교만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영적인 어리석음과 교만에 관한 교훈(12절)의 취지를 확대하였다고 보입니다. 즉, 영적으로  의롭다고 뽑내며(12절), 재산이나 미모, 학식, 권세, 지위, 명예, 가문, 친분관계 등 남보다  좀 낫다고 하여 으시대는 자들(13절) 말입니다. 이 교만한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견해는 모두 옳고 지혜로우며 자신의 번영은 영원하다는 ‘확증편향’입니다. 그래서 공작새와 같이 자신의 것들을 드러내며 이웃을 업신여기고, 상석에 앉지 못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이들이 잠시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 같아도 실상 가장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란 본시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 재물 얻을 능력, 시기와 우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많은 재물을 벌거나 큰 학식 등을 갖게된 것 뿐입니다. 이를 깨닫고 겸손히 자신에게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자에게 지혜가 있다 하겠습니다. 주님은 만유의 창조자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사시고(고후8:9), 심지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겸손히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사53:12). 그 의를 보신 정의의 하나님은 주님을 다시 살리사 지극히 높이셨습니다(빌2:5-11). 따라서,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직한 삶을 보시고 높이시도록, 주어진 은사를 갖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십계명과 산상수훈은 훌륭한 안내자입니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잠16:18,새번역)

잠언30:14절
“사람들의 이빨이 칼 같고 턱이 작두 같은 세상이구나. 불쌍한 사람을 지상에 하나 남기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세상에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공동번역)

본절에서 아굴은 약자를 착취하여 치부하는 자들의 탐욕을 밝힙니다. 13절이 ‘눈’과 ‘눈꺼풀’이란 소재를 통해 인간의 교만함을 표현한 반면, 14절은 ‘치아’라는 소재로 인간의 탐욕과 잔인한 압제를 묘사합니다. 원문을 살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의 이들은 검들이며 그의 어금니들은 도살용 칼들이다”가 되어, 개정개역보다는 공동번역의 문구가 좀 더 매끄럽습니다. 이 악인들은 마치 야수가 강한 이로 먹잇감을 부스러뜨리고 찢어 삼키는 것처럼 가난한 자들을 희생물로 삼고 있습니다.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라고 보면 맞습니다. 춘향전의 저자는 변사또의 학정을 심판할 자로 이몽령을 상정하고, 장원급제시킨 후 당해 지역 암행어사로 내려보냅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는 그때, 이몽령은 잔치에 나가 시를 짓습니다. “금준미주천인혈 옥반가효만성고 촉루락시민누락 가성고처원성고- 금잔의 좋은 술은 천 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요, 촛물이 떨어질 때 만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더라” 그리고 곧 출도하여 변학도의 악행을 바로잡습니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조선시대 소설이라고 치부될 수 있지만, 성경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유의 주재되심을 선포합니다. 때가 왔을 때, 공정하신 주님은 악한 자를 벌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5:24,25)

매일묵상(2024/5/27-31)

요한복음 14: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스탈린의 부하들이 명령에 잘 따르자, 처칠이 부러워하여 비결을 물어보니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애굽에서 파라오의 권력 밑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그 노예들을 이끌어 내사 자유를 주시고,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셨는데, 그 두 번째는,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내용이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여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부가하셨습니다(출20:6). 40년 뒤 모세는 십계명을 재해설하면서, 이 대목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신5:10).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이유도, 십계명을 주시고, 능력으로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도,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이유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가나안 땅에서 모세율법을 행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이나,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기에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들의 순종은 공포나 이익이 동기여서, 가나안 땅(소원 성취)이 주어지자,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 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 말씀으로, 출애굽기(20:6)과 신명기(5:10)의 말씀이 그 배경입니다. 제자들은 영적 이스라엘이요, 당신은 새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켜 세상에서 주의 제자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마태복음10: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한국의 국가 GDP는 계속 성장하다가 2040년경부터 감소로 돌아서는데, 그 원인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입니다. 저출산이유와 그 해결에 대해 채상욱 작가는 도시기능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피크아웃코리아). 그에 따르면, 지방도시는 일자리, 교육(대학), 의료, 편의시설 등 도시 필수 기능이 결여되어서 20살이 넘으면 수도권으로 이주를 해야만 합니다.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상승하여 결혼과 출산률은 낮아지고, 지방은 출산률은 높지만 청년이 되면 탈출하여 고령화가 심화되고 결국 소멸합니다. 작가는 연금개혁과 재택근무의 보편화에서 해법을 모색합니다. 스웨덴 노벨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1930년대에 집값과 출생률의 관계를 언급하며 집값 통제를 경고한 바 있지만, 현실은 스웨덴조차 집값은 높아져있고 출생률은 현저히 떨어져 있습니다. 모두 다 인구소멸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다음의 삶이 존재하고 그 삶이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죽음 다음의 영생을 걱정하라’고 경고합니다. 영생은 ‘영원히 살아가는 삶’이나, 영생이 다 축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만이 축복이며, 그렇지 않은 영생은 지옥이라는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이지만, 군나르 뮈르달의 경고를 듣지 않은 스웨덴처럼, 인간은 주님의 경고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그것이 금생과 내생의 열쇠입니다(딤전4:8).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잠언30:9절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8절에서 아굴은 부와 가난을 모두 거부하고 오직 필요한 양식만을 간구하는데, 9절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의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부와 가난 그 자체는 중립적이나, 그것들이 주님과 자신의 관계에 미치는 결과를 생각해 보자 아굴은 두려웠습니다. ‘배불러서’의 원어는 ‘(질릴 정도로) 실컷 먹다’란 의미로서, ‘육체적 욕구의 만족, 인간적 행복과 번영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때 아굴이 예상하는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을 모른다’로 표현됩니다. ‘모른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거짓으로 부인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알 만한 내적·외적 증거가 있지만 모른체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아굴은 ‘여호와가 누구냐?’란 말로 다시 강조하는데, 하나님을 부인하는 태도는 어리석고 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시14:1). 또 ‘욕되게 할까’의 원어는 ‘붙잡다, 얻다’는 뜻입니다. 도적질 후, 형벌을 면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하거나,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모범은커녕 그분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동이기에, 아굴은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아굴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싶지만, 자신의 신앙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과 달리 물질적 조건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굴은 기도하는 것이며, 아굴은 응답받아 주어진 삶에 자족하며 경건히 삶을 마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잠언30:10절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아굴의 교훈의 시작은 약자의 대명사인 종에 대한 보호입니다. 이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의 일부여서,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학대받는 종들이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예는 빈번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종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라는 규정을 두어 보호합니다(신23:15). ‘비방하다’란 히브리어는 ‘은밀한 말로 헐뜯다(중상모략)’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특별한 잘못이 없는 종임을 암시합니다. ‘저주하다’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 저주가 까닭 없다면 아무에게도 미치지 못하므로 웃어넘길 수 있지만(잠26:2), 이유 있는 저주는 그렇지 않음을 아굴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수호자이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늘에서 유죄판결이 나면 하나님의 형벌이 찾아올 수 있음을 두려워 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종도 은밀히 하지만 저주할 권한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약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착취하면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기드온의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 70명을 죽일 때, 화를 피한 요담은 그리심 산에 서서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을 저주하였습니다. 사사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여 요담의 저주가 응했다고 증언합니다(삿9:57). 그 반면, 전도서는 ‘종이 너를 저주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남의 말에 신경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전7:21-22). 우리는 바르고 균형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마12:36,공동번역)

잠언30:11절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1절은 ‘부모님’이라는 통상의 문구 대신 ‘그들의 아버지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축복을 빌지 않는(저주하는) 저주받은 불효자식들이 부각됩니다. 모세율법은 그들에게 사형을 규정하였습니다(출21:17). 누군가 그리스 현자 솔론에게 왜 존속살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자신은 그렇게 불경건하고 잔인한 자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학자 브리짓의 말대로, “율법수여자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의 마음의 사악함은 상상초월이란 사실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렘17:9). 이 어리석은 반역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빚진 부모님들의 건강과 평강의 삶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탕자처럼 유산을 좀 더 빨리 받거나, 부양책임을 회피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합니다(마15:3-6).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장자 암논을 죽이고 장자가 되었음에도 하루빨리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첩자인 아렉사람 후세의 말을 듣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버려 파멸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음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적 통치는 이처럼 은밀합니다. 비록 그들의 부모는 지혜로울 수 있을지라도, 이 바보들은 낳고 기른 부모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정의의 주님께서 그냥 놓아두실리가 없습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똑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20:20;30:17). 그러나 자식의 행동은 부모의 책임에 귀착되는 경우가 많다는 현대적 연구결과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잠3:7,새번역)

매일묵상(2024/5/20-24)

고린도후서4:7절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새번역)

수사법 중 역설법(逆說法)이란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말합니다. 좋은 예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고린도후서에서 7개의 역설을 통해 변호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사도의 글은 매우 힘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죽었으나 살아났다”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역설법이지만, 우리 믿음은 그 역설에 기초합니다. 또한, 복음을 살아내는 힘도 자신이 아니라 바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세상의 냉혹한 평가나 많은 역경에도 사도가 늘 기뻐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비밀이지만, 세상은 이 능력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겸손히  살아가면서 종종 받는 이유 없는 비난, 박해, 오해에 온유해야 합니다. 만약 화를 내면 상대방은 걸려넘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좋은 길잡이로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힘 주시며, 좀 더 자신 있고 고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28:20).“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디모데후서2:6절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러우 전쟁(2022/2)의 발발로, 폴란드는 독일제 무기 구입을 고려하다가 돌연, 가성비와 납기가 확실한 한국 무기를 도입하였습니다(30조원). 독일은 당황하였지만 당연한 결과입니다. 1990년 통일과 냉전 종식으로 독일은 무기 개발을 등한 시 하였으나, 한국은 북한의 위협 하에 70년 간 무기개발에 노력해 왔습니다. 위협적인 남북대치 상황이 플러스로 작동한 순간입니다. 더구나, 사계절을 두루 갖춘 한국은 어떤 기후에도 적합한 전차나 자주포 등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한국민이 상황에 불평하지 않고 적응하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레오파르트 전차 보다 한국의 K-2전차의 우수성이 입증되었으나, 노르웨이는 정치적 이유로 독일을 선택한 사례처럼, 노력이 곧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한편, K-2 전차 생산에는 우연한 기회에 러시아 최신기술이 적용되었는데, 불곰사업을 통해 컵라면, 쵸코파이를 주고 러시아산 전차 T80 등을 도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의 명품 무기인 K-9자주포, K-2 전차, 천궁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노력은 인간의 몫이고 성공의 기회는 주님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노력하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바라고 뛰지만, 오직 소수만 정상에 섭니다. 신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때 낙담하거나 기복신앙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기에, 실패도 유익한 것입니다(빌1:21). 주님은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잠언30:5절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순결하며, 그분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신다.”
(새번역)

아굴은 2-4절에서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그 존재의 미미함을 수사학적 표현을 통하여 진술하였다면, 본절과 6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야금술과 군사적 은유를 동원하여 교훈합니다. ‘순결하다’로 번역된 ‘차라프’는 금속을 정련시켜 찌끼를 제거하는 것을 뜻하는데, 정련된 금이나 은에는 불순물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나 오염된 사상이 섞여 있지 않고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다윗의 신앙고백과 궤를 같이 합니다: “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시편12:6,새번역). 따라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본 사람은 순금이나 순은을 볼 때처럼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그 말씀을 통해 빛나는 진리를 삶의 등불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시119:105). 어느 칸트 철학자는 매일 아침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칸트의 저서를 읽으면 머리가 맑아져 하루를 시작하는데 힘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를 맑게 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까지 기쁘게 하며, 그 교훈을 들으면 용기가 나고, 그 깨끗함에 우리의 눈이 밝게 빛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세상에서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를 수 있는 진리는 오직 하나, ‘주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의를 행하고, 또 경고를 받아 허물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지킴으로 주님의 상을 받게 됩니다(시편19:7-11). 끝으로, 주님은 이들의 방패가 되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119:104).

잠언30:6절
“그의 말씀에 아무것도 더 보태지 마라. 거짓말쟁이라고 꾸지람을 들으리라.”
(공동번역)

본문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덧붙이는 행위는 물론, 자의적으로 빼는 행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계22:18,19). 그 기준은 말씀의 본래 취지를 존중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른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거짓되었다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 거짓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사망이 선고된 것입니다(계21:8). 의의 열매는 오직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하여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금과 은과 같이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만 맺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의 뜻이 듣는 자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해석·선포되어야 하는데, 말씀하신 환경과 말씀을 전할 때의 환경이 다르기에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다가 마침내 요단 강 동쪽 모압평지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은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 내가 받들어 너희에게 전하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계명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4:2,공동번역)고 경계한 뒤,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상황에 맞게 해설합니다(5장).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이며, 이웃 사랑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6장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이유입니다(6:4-5). 하나님을 사랑해야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고, 제대로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시편19:7,새번역).

잠언30:7-8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전의 구절에서 아굴은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한계(2-4),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신앙고백(5,6)을 하였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오직 주님의 말씀과 그 원천인 주님을 절저히 붙잡고 신뢰해야 온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계명을 따라 살아 가는 믿음과 지혜를 가질 때”부터, 온전하고 성숙한 제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것은 마치 칠흙 같은 악천후에 눈이 아니라, 계기만을 보고 목적지를 향해 바르게 비행하는 노련한 조종사와 같습니다. 만유의 주님을 알면 우리는 진실해지고,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합니다. 그것들이 내게 해가 됨을 직시하게 되어서 온갖 인간적 잔꾀는 사라지고, 우리 눈 앞에 ‘십계명의 대로’가 나타납니다. 주님 경외, 부모공경, 살인·간음·도둑질의 금지, 거짓과 탐심의 금지를 명하는 계명만 지켜도 삶은 경건으로 넘쳐납니다. 공자는 70세에 “종심소욕불유구”- 마음의 소욕대로 행하였지만, 법도를 넘지 않았다-라고 자평하였는데, 15세에 시작된 자신의 배움이 70에 성숙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갈5:24). 아굴은 본문에서 십계명 중 두 가지를 구합니다: 거짓됨과 탐욕의 금지. 이 두 계명은 물질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으므로, 연약한 자신은 주님이 정하신 몫의 양식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경건의 향기가 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매일묵상(2024/5/13-17)

민족 사랑 이야기와 복음
이사야42: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위국헌신군인본분”을 쓴 안중근 의사처럼, 최진립(1566-1636)은 병자호란 때 순국하여 군인의 본분을 다하며(69세), 300년 간 경주 부자 최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한 귀양살이를 겪어서, “사람이 왕후장상의 씨가 아니면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는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기에 위험하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는 유훈을 남깁니다. 상민으로는 부나 가문을 세우기 어렵기에 진사까지는 허락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3대 최국선에 이르자 부자가 되었지만, 큰 흉년이 들자 부자의 책임을 절감합니다. 그는 창고를 열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면서 빚문서를 불에 태웠습니다(1671). 그리고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정립합니다. 최씨 가문의 부의 끝은 일제 때 백산상회를 운영하면서 독립자금을 상해로 보내고, 전 재산을 팔아 육영사업에 힘쓴 최준 선생입니다. 경주 부자 최씨의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안중근과 최준의 이야기는 일본인이, 최진립의 이야기는 중국인이, 최국선의 이야기는 소작인들이 거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와 민족을 포괄하는 정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즉 복음입니다. 복음은 듣고 회개하여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롬1:16,17).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2).

시편84: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자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란 카피로 유명한 前제일기획 부사장 최인아 씨(1961)에게 28년 간 조직에서 살아남은 비결을 묻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분별력”이 그 비결임을 밝힙니다. 2006년 자신을 냉철히 평가하고자 산티아고의 순례자의 길(35일, 800킬로)을 걸었고, 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복귀한지 6년 후 부사장직에서 사직합니다. 디지털 물결이라는 변화의 시대에 역량 부족을 자인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최인아 책방’을 운영하면서 작가로 변신하였습니다. 최인아 씨는 재능을 기반으로 소신껏 살아왔습니다. 신자의 삶은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첫째, 만족의 삶입니다: 84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직무(성전과 제사업무)에 만족하여, 성전의 하루가 다른 날보다 천 배나 값짐을 고백합니다. 둘째 주님을 배워가는 삶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선하심을 여러 번 경험하기에, 시인은 ‘복이 있다’고 3번 말합니다: (1-4절) 주님을 갈망하여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 받는 축복/ (5-8절)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를 따라 순례의 길에 오른 자들이 받는 축복/(9-12절) 주님을 신뢰하여 그분 안에서 쉬는 자들의 축복입니다. 셋째, 주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1). 신앙의 길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갈망 때문에 시작되며, ‘눈물 골짜기’ 같이 메마른 곳을 통과할 때의 경우에는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등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입니다(6). 이것이 영생의 본질로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84:7).

잠언30:1,2절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잠언은 솔로몬이 젊은이를 위하여 말한 강화집(1-9장),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단편 경구 선집(10-29장), 그리고 아굴과 르무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주는 훈계(30,31장)의 3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를 꿰뚫는 주제어는 ‘주님(야훼)을 경외하라’입니다. 30장은 아굴의 잠언입니다. 아굴(의미: ’수집하는 자’)과 그의 아버지 야게의 정체는 모르나, 솔로몬 시대의 현인 중 한 분으로 추정되며, 대상은 이디엘과 우갈 두 아들이고, 타락한 인간의 부정적 모습에 초점을 두어 훈계합니다. 30장의 구조입니다: 전반부(1-9)는 아굴 자신의 신앙고백과, 경건한 지혜자로 살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조건을 다룹니다. 중반부(10-23)는 비방, 불효, 위선, 교만, 압제, 탐욕, 불순종 등 어리석고 악한 행동의 기본 유형을 제시합니다. 끝으로 후반부(24-33)는 인생이 귀감으로 삼을 표상들(개미,사반, 메뚜기, 도마뱀. 사자 등)을 제시하며 권면을 마칩니다. 한편, 2절에서 아굴은 이성 없는 ‘짐승’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는데, ‘참으로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자다’라고 의역되고, 후단에서 재차 강조됩니다. 그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지혜자로 알려졌을 아굴 자신의 겸손을 읽을 수 있고, 본잠언의 독자들은 참된 자아성찰을 행하여 주님을 경외하도록 이끕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하나뿐인 지혜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생각납니다. “미련한 사람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견만을 내세운다.”(잠언18:2,새번역).

잠언30:3절
“나는 지혜를 배우지도 못하였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깨우치지 못하였다.”(새번역)

아굴은 또 한 번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하는데, 지혜롭게 되려고 하는 자들은 먼저 자신의 무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최악의 바보로 평가합니다(29:12). 그러므로 아굴은 어리석은 자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는 특히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여서, 누구든지 참된 지혜를 얻으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 무지와 죄악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2절에서 아무런 이성의 빛도 없는 짐승에 자신을 비유한 아굴은, 3절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분’ 즉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혜와 지식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아굴은 잠언의 가장 큰 주제인 ‘야훼를 경외(두려움)’하는 것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시작’(1:7)임을 또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굴의 겸손어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 주는 통찰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분야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아낼 때까지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야 위험까지 대비하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바울은 베드로, 바울, 아볼로 등이 고린도 교회에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였더라도 그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의 원천되시는 주님만을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고전3:18-23). 따라서, 사람이나 직업 등을 고려할 때도, 강점은 물론 약점이나 위험성까지 반드시 찾아내어 저울질한 뒤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18).

잠언30:4절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4절의 다섯 개의 질문은 인간 지혜의 무지와 도달불가능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우치려는 수사법입니다. 질문의 의도는 두 아들이 무지를 깨닫고, 자신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을 신뢰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마지막 질문을 제외하고는 즉각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이다’는 답이 떠오르게 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하신 연속적인 하나님의 질문들이 생각납니다(욥38-39장):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욥38:2-4새번역).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그때까지, 무죄하나 고난 중의 욥은, 자신의 사건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강력히 호소하고 있었으나,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사 말씀하시자, 욥은 자신이 당한 일들을 하나도 진술하지 못합니다. 대신 하나님이 쏟아내시는 엄청난 질문들을 숨죽여 듣다가 하나님의 광대한 지혜를 깨닫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욥의 무지를 깨닫게 하사 당신을 경외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욥기의 끝은 “하나님은 욥을 기쁘시게 받으셨고 그의 곤경을 돌이키셔서 배나 축복하셨다”이지만, 결국 믿음의 이야기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특권은 믿음의 이야기, 주님을 경외하는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특권은 그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매일묵상(2024/5/6-10)


시련과 기쁨
야고보서1:2절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새번역)

야고보서는 신앙의 박해로 각 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크리스찬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참조 행8:1-3). 사도는 그런 어려움을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인내 없는 믿음은 불량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합격된 믿음을 보면 항상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인내를 만들어 내려면 시험이라는 원재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련 중 믿음이 없다면, 염려라는 독소만 생겨 삶을 뒤흔들고야 맙니다. 인내를 온전히 갖춘 신앙 인격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될 것입니다(12). 따라서, 시험이 강도처럼 들이 닥칠 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지혜입니다. 한편,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막상 여러 가지 시험이 들이닥치면 걱정 근심에 휩싸이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때 야고보서는 ‘시험을 이길 지혜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는데(5), 이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능력입니다. 구할 때 풍성히 주실 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6-8) 왜냐하면 반드시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고 있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사역). 사도 바울 역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감사가 여기서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서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으로 염려를 극복하게 되면(빌4:6-7), 하나님의 평강이 늘 우리 마음과 삶 가운데 머물도록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환경을 구축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사도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4:8,9). 첫째, 주님 앞에서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8). 사도가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4:8,쉬운성경)라고 가르친 이유입니다. 둘째, 그 생각을 행하여야 합니다(9). 사도는 빌립보에 머물러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하는데, 바울의 그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고전11:1).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어려움에 처하여 기도하고 응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평강을 맛 보면, 이웃과 다툴 이유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능력의 근원이 우리 안에 와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약4:2,3). 그래서 전에는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다면, 이제는 남을 배려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연습합니다. 그 와중에 사람의 칭찬을 받을 만한 탁월함(기림)을 보여주었더라도, 겸손하게 되는 것은 “만약 주님께서 그런 기회와 재주를 타인에게 주셨다면, 나보다 훨씬 나은 성과가 나왔을 것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8). 자연히 다툼은 사라지는데, 이것이 성령 충만한 개인·가정·교회·직장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새번역)


잠언29장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새번역)

이 잠언은 피조물 인간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한다’를 직역하면 ‘사람의 공포’이며, ‘의지한다’의 원어의 뜻은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이고, ‘안전하다’는 문자적으로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놓여지다’는 의미입니다. 25절 전단의 좋은 예가 24절에 나온 진실치 못한 증인입니다. 24절 은 재물을 탐하여 도둑과 한 패거리가 된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맹세에도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25절은 그 이유와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의 위증 이유는 함께 한 도둑 패거리의 보복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나, 그 두려움 때문에 침묵한 결과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이는 그 도둑 패거리들이 증거를 없애고자 해를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 영화의 흔한 소재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주님을 두려워 하여 진실된 증언을 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한다면, 주님은 섭리 가운데 혹은 국가의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증인을 보호함으로 안전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25절 후단의 예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노함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고 풀무와 사자굴에 던져져 죽기를 선택하였지만, 모두 주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안전히 구출 받았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지켜주심으로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함에 감사드려야 합니다(요일5:18) 다만,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요구한 바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9장26절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26절은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일의 결정권자 되심을 밝힙니다(잠언21:1). 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고 선언한 25절의 좋은 예시이자 확실한 근거입니다. 물론 26절이 법적 수단을 통한 구제를 금하라는 취지는 아닙니다. 다만, 주님에 대한 순종 없이 통치자의 환심만을 사려는 세태를 경고합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많은 사람들이 통치자의 얼굴을 구한다’입니다.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존경과 동시에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을 지적하는데, 사람의 일과 재판의 결정이 권세자에게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에 직면하면 통상 취하는 행동양식이지만, 후단을 보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후단을 직역하면 “각 사람에 대한 재판(판결)은 주님께로부터 온다”입니다. 사람의 일이 외형상 통치자나 재판관들의 결정으로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의인에게는 주님의 변호하심이 있고, 또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분이 정의 실현의 최종 책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의 얼굴을 구하다가,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게 된 사건은 그 예입니다. 하만이 밤에 왕궁으로 가는 그시각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듣다가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선행을 알게 되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37:11).

잠언29장27절
“의인은 불의한 사람을 싫어하고, 악인은 정직한 사람을 싫어한다.”(새번역)

28:1 – 29:27절은 ‘의인과 악인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결과’를 고찰하면서, 27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의인과 악인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싫어한다.’ 전단의 ‘불의한 사람’이란 범죄하고 사법제도를 남용하는 자들이며, 후단의 ‘정직한 사람’이란 타인의 사회적, 법률적, 경제적 권리를 보호하려고 확립하신 하나님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동쪽으로 이동할 때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신2장). 에돔 땅 와디 푸논을 통하면(15킬로) 쉽게 ‘왕의 대로’에 이르고, 요단 동쪽 모압평지에 집결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남동쪽으로 3백킬로미터를 돌아갑니다. “이 지역은 에서 자손에게 주었으니 전쟁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두 번에 걸친 모세의 간청에도 에돔 왕은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먼 길에 지친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불뱀들이 나타나고, 회개하는 자들을 위해 놋뱀이 만들어집니다(민21:4-9). 광야는 이 세상을,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요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간직한 신자의 삶을 각각 상징합니다. 의인과 악인이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는, 의인은 하나님과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나, 악인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갈등은 근본적인 문제요, 열정의 문제이다. 따라서 타협될 수 없고 서로 싫어하는 마음을 완화시킬 수 없다”(말빔). 잠언은 의인의 이런 비관용적 자세를 칭찬하면서, 그들의 보호자는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주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잠언18:10,새번역)

매일묵상(2024/4/29 – 5/3)

말씀과 믿음 그리고 평안
마태복음6: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주기도문의 이 대목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들을 그날 그날 공급해 주실 것을 요청하라는 내용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신자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걱정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광야로 인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 그 날 먹을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40년 뒤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길갈에 이르러 그 땅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 만나는 그쳤습니다(수5:12). 범죄한 아담에게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선고하신 뒤, 아담의 모든 후손(남자)은 일하여 가정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나’는 광야라는 예외적 상황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에 대해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합니다. 첫째, 무관심한 태도 – 자신의 재력과 능력으로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지만, ‘양식 bread’은 병, 근심, 고난 등 모든 필요를 함축하기에, 결핍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마법적 신앙- 요술 주문처럼 보는 태도로, 복권을 사고는 왜 당첨을 시켜주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사람들이죠! 본문이 위치한 문맥과 취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보물과 같이 간직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며, 이는 하나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성취의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지만, 온갖 풍파가 닥쳐도 기도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마음에 늘 평안이 있는 것이 다릅니다. 경건의 훈련은 여기서 나옵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믿음의 추론
마태복음6장24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6:24-34절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으니(24),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25). 그 근거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주인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염려해야 합니다. 주기도문 순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6:24-34)은 주기도문의 해설판이며, 주님은 믿음에 근거한 이성적 추론을 전개합니다. “하찮은 미물인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그처럼 먹을 것을 주시고, 입혀주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나라와 의를 염려하고 먼저 구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을 어떻게 돌보시지 않겠는가?” 누가복음은 한 발 더나아가,  “그런 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아라”(눅12:29)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세상 백성이 구하려고 달려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입니다(눅12:30).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차이는 노력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비행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따라 비행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좌표를 따라 비행하는 연습을 합니다. 평시에는 별 차이 없어도, 인생의 밤이 오면, 하나님을 주인 삼은 제자들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말씀을 따라 안전히 비행합니다. 조종사가 계기판만 보고 비행하는 법을 배우듯이(계기비행), 제자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믿음의 지혜).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전7:12,새번역).

잠언29장22절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기를 잘하는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새번역)

본절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자기 절제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의 원어 ‘이쉬 아프’의 직역은 ‘분노의 사람’으로, 상습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화를 절제하지 못하면 다툼을 일으키고 죄를 많이 짓는다고 선포합니다. ‘다툼’이란 인간 관계에서 야기되는 분쟁을, ‘죄를 짓는다’는 표현은 그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실패까지 내포합니다. 이는 범죄란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율법)을 넘는 모든 행위를 일컫기 때문입니다. 왜 분노하게 될까요? 원인은 다양하지만, 상대방의 도를 넘는 행동, 급한 성격, 교만한 마음 등이 주요 동인이라 보여집니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이분이 무예와 힘이 뛰어나서, 직선적으로 사건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자로가 벼슬하는 위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공자는 자로의 급한 성격과 의기를 알기 때문에 비명횡사할 것을 예견합니다(논어). 따라서 공자는 평소에 “정직함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급하게 되는 것이다.”며 자로를 훈계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김지현 씨의 조언입니다. “일단 멈추자. 화가 났을 때는 일단 멈추어야 한다. 분노의 감정은 파도가 한번 밀려왔다 가는 정도의 시간 안에 절정에 달했다가 내려오게 된다. 그 고비만 넘기면 힘들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쥐어짤 수 있고 해결이 가능해진다. 화장실이든 욕실이든 차고든, 5분 정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옮기는 게 좋다”(오마이뉴스, 자녀양육칼럼).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잠언29장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3절은 ‘교만’과 ‘겸손’의 마음 및 각 결과를 비교하여 교훈합니다. ‘절제와 양육’이란 문맥을 감안하면, 교만하더라도 정당한 꾸지람, 징계 등을 겸허히 받아들일 경우, 높아져 영예롭게 될 수 있음을 함축합니다. ‘교만, pride’의 원어는 ‘높다, 솟아오르다’란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며, 겸손은 ‘낮음’을 뜻합니다. 교만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 재능, 힘, 지혜를 믿고 상대를 내려다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 스미스와 해밀톤은 ‘교만은 스스로 충분함을 느끼고, 겸손을 버린 뒤 마음을 높여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립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할 당위성을 거부하며, 이익추구의 사회적 한계인 도덕과 공동체 규범을 무시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혹은 공동체에 의해 낮아지게 됩니다(사회적 불명예, 재산의 상실, 범죄에 대한 형벌 등). 반면, ‘마음이 겸손하면’ 타인과 잘 지내고, 좋은 사회관계를 형성함으로 좀 더 많은 성공 기회를 잡게 됩니다. 또한 겸손한 자의 마음은 화평한데,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게 충실함으로, 맡겨진 일에 능숙하게 되어, 천한 자가 아니라 왕 앞에 서는 영예를 얻습니다. 예외는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의 법칙입니다. 전단의 예는 ‘자식인체 하는 종’(29:21)이며, 후단의 예는 ‘징계를 받아 행동을 고친 자식’(29:17)입니다. 신자는 축복을 받았을 때 본문을 마음에 새기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19).

잠언29장24절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본절은 재물보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는 자의 말로를 보여줍니다. 그는 재물을 탐하다가 도둑의 재물에 이르고, 마침내 위증죄까지 범하게 되어 불안 속에 떨며 살아갑니다. 전단에서 ‘도둑과 짝하는 자’의 직역은 ‘도둑과 함께 나누는 자’로서, 도둑의 행동에 동참하고 재물을 나누는 모습이고,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란  ‘자기의 목숨 혹은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증인 선서 후 증인이 된 자의 책임과 벌칙을 규정한 레위기(5:1)가 그 배경인데, 그는 도둑과 한 패여서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재물을 중하게 여기는 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재물에 접근하고자 하나, 이는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감찰하고 계셔서 그 죄가 폭로되든지 늦어도 죽은 후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후자는 더 나쁜 경우인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둑’이란 단순히 절도죄 등을 범한 자가 아니라 악행을 일삼는 죄인들을 총칭한다고 본다면, 본 잠언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넘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관철하려는 인간의 본질적 죄에도 적용됩니다. 이 경우, ‘재물이냐 하나님이냐’에서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로 범위를 넓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리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세상의 악한 정체를 폭로하심으로, 속고 있던 인간들이 마음의 주인을 세상(사탄)에서 하나님으로 바꾸게 하는 계시의 사건이요(요12:30), 회개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길을 여신 은혜의 사건입니다(요14:6).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1).

매일묵상(2024/4/22-26)


기도하고 감사하라
빌립보서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며 살아갈 때 종종 ‘염려’가 침입하곤 합니다. 이때 사도가 주는 두 번째 처방은, ‘기도하고 감사하라’입니다. 기도 그것도 감사를 동반한 기도가 염려를 치료합니다. 먼저, 6절의 시작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염려가 들어 왔을 때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 가짐’이 중요한데, 주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쫓는 애굽 군대와 가로막은 홍해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오늘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보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죠! 다음으로, 본문은 ‘하나님께 아뢰라(기도)’고 권면하는데, 그 기도는 “감사”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신 것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게 되는데, 바로 그 감사의 마음입니다. 또,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아닙니까?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문제를 맡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편, 심리학자는 자신을 잘 아는 동료나 가족에게 염려에 관해 대화를 나누라고 조언하는데,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면, 응답이 오고 있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당도할 때까지 마음의 긴장은 믿음의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 완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표준새번역)

하나님의 초월적 평강
빌립보서4:7절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새번역)

본절은 감사와 함께 아뢴다면, 그 결과 “모든 지각(이해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그 평강(에이레네)”이 군사처럼 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그 평강”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주님의 초자연적 평강으로, 염려를 쫓아내고 강물처럼 우리 마음을 점령합니다. 그 순간은 진짜 “강 같은 평화입니다.” 재수시절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염려되어 기도하자 초월적 평강이 주어졌고 충만한 기쁨으로 버스 타고 집에 가는 중 마귀는 온갖 가정, 염려, 근심을 다 집어 넣었습니다. 저는 그것들과 투쟁으로 받았던 평강이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당면 문제 해결이 중요하나, 하나님의 뜻은 좀 더 높습니다. 하나님은 기도 전에 그 해법을 다 준비하셨습니다(마6:8-9).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인격을 갖추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된 세상에 고난과 선한 투쟁 없이 어떻게 그분의 아들의 믿음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응답을 자꾸 받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한 두번 경험한 뒤는 믿음의 추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손의 부친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후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는다’는 공포에 떨었으나, 그 아내는 그렇지 않음을 믿음의 추론 3가지를 들고 안심시켰습니다.(삿13:2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9장19절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19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합당한 조치(통제)는, 자녀, 백성 그리고 자신은 물론, 종에게도 필요함을 밝힙니다. 전단은 “종은 말로는 결코 교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치지 아니한다’의 원문은 가장 강한 부정어와 미완료 동사를 결합시켜, ‘절대로 아니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더구나, 일반어순과 달리, 솔로몬은 ‘말로만 하면’(전치사구)을 문장 서두에 두어, 부정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즉, ‘말만 가지고서’는 종들은 절대로 교정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솔로몬은 경험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잠언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아는 것은 곧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묘사된 종은 어리석어 알지만 행하지 않기에, 물리적 징계를 초래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고대 지혜문학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로 ‘회초리가 주인에게서 멀면 종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파피루스인싱거)는 격언도 그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징계를 가해야만 순종하는 종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바로 순종하라는 교훈을 내포합니다(신10:16,마음의 할례). 다락방 강화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로 여기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벗으로 여기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들으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열매를 맺고 그 맺은 열매가 항상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15:16). 주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언22:15,표준새번역)

잠언29장20절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본절은 22절과 함께 ‘자기통제력’을 위한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충동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걱정하는데, 그보다 미련한 자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이 조급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가 초래하는 도덕적 사회적 파장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바보이지요! ‘말’의 원어는 ‘따바르’이며, ‘말’ ‘사건, 일, 행적’ 등을 나타냅니다. 또, ‘조급한’에 해당하는 ‘아츠’는 ‘경솔하고 성급한 행동이나 말’을 지칭합니다. ‘조급함’의 원인은 자제심의 결여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제자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그분의 뜻에 언행심사 일체를 맞추는 것이 으뜸가는 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바보의 말은 이런 생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 천하에 드러내게 되고, 그것도 성급히 또 경솔하게 쏟아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 (28:20)나, ‘발이 급하여 잘못 가는 사람’(19:2)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원할 때 원하는 것을, 그 방법까지 합리적으로 계산한 뒤, 비로서 말과 행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후단은, 그가 바보보다 교정받기 힘들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바보는 자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다루기 힘들지만, 불경건한 자는 탐욕에 지배당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도덕조차 백안시 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는 그런 자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와 함께 “가장 최악의 바보”로 분류됩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언26:12).

잠언29장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곱게 양육하다’는 말은 ‘파나크’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오직 한 번만 등장하기에 그 의미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학자들은 ‘지나친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운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한편, ‘자식’이란 말의 원어 ‘마논’도 그와 같아, ‘풍족하게 자라 버릇없이 구는 자식’을 의미한다고 추측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이 어리다고 응석을 받아 주면 자라서 버릇없이 군다’고 한 공동번역처럼, 귀엽다고 종을 지나친 사랑으로 키우면 결국 예의도 모르는 종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사랑이나 호의를 받는다면 좋은 일이나, 그가 겸손하고 성실함을 유지할 때만 축복입니다. 만약 주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서 분수를 모르고 자식처럼 행세하면, 주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땅을 뒤흔들고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사건으로, ‘종이 임금이 되고 바보가 부자 되고 꺼림칙한 여자가 시집가고 계집종이 안주인 자리를 빼앗는 것’을 언급합니다(30:21-23,공동번역). 그러나 이런 일들은 종종 일어나는데,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죄의 속성’(원죄)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성공, 축복, 은혜를 위해서는 밤을 새워 부르짖으나, 겸손을 위해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징계로 바로잡지 않으면 은혜와 사랑이 오히려 심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극히 큰 계시와 능력을 부여한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둔 이유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