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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헤론은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이며 그로 인해 양화진 외인묘지가 생겼습니다. 이 분의 한국 명은 혜론(惠論)으로 1856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회중교회의 경건한 목사인 그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테네시 주에서 제일 큰 녹스빌에서 목회 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였습니다. 헤론은 메리빌 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테네시 종합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학교는 헤론에게 교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이전부터 조선의 선교사가 될 것을 꿈꿨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식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깁슨양과 결혼한 1884년 봄에 최초의 장로교파 조선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았습니다. 1885년 조선에 들어와 열심히 병자를 치료하는 등 사역을 하다가 5년만인 1890년 7월 26일 그의 나이 33세에 전염성 이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분을 먼저 정동 미국 공사관 경내에 임시 묏자리를 정해 묻고 후에 양화진을 공동묘지로 허락해 줄 것을 청원 드디어 1893년 10월 고종의 정식 허락 하에 헤론 선교사는 양화진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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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31 – 8.4

죽음을 통한 생명의 원리가 작동하는 셋째 영역은 선교입니다. 고난은 선교에 없어서는 안 될 측면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1885년 4월 5일 26세의 청년의 나이로 인천항에 내린 발걸음은 개신교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조선의 마음” 이라는 기도문을 묵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주여,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뿜 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 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하면 의심하고 화 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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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24 – 28
죽음을 통한 생명이라는 원리는 제자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생생한 상징을 사용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35). 이 말씀의 배경은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 살고 있었다면, 그리고 십자가 혹은 적어도 ‘파티불룸’ 즉, 십자가 가로대를 지고 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처형을 받으러 가는 사형수임을 바로 알았을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사형 언도를 받은 이들로 하여금 처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이 자기 부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신 극적인 이미지입니다. 무엇을 위한 극적인 이미지 이겠습니까? “수 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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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상에 들어올 때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과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간 뒤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하거나 참담한 현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체적인 본성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한 면입니다. 당시 87세의 존 스토트 목사님은 영국의 노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행복하겠어요. 짐이 되느니 죽는 게 낫죠”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고 목사님은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게 짐이 되도록,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기에 교회에서 이런 짐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짐(무거운 짐을 의미함)을 짐으로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하여야만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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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19 – 23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합니다. “젖”에 해당하는 헬라어 형용사는 ‘로기코스’(logikos)입니다. 이는 우유에 반대되는 ‘형이상학적인’ 것, 혹은 몸으로 보자면 지성을 위한 ‘이성의’ 음식, 혹은 1:23에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젖이 아기의 성장에 필수적인 것처럼,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사모 하라)” (2:3)고 권하고 있습니다. 셀윈이라는 주석가는 베드로는 여기서 “젖을 빠는 아이의 열심”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젖 맛을 보았다면 이제 갈증을 느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가 매일 젖이 필요하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포함한 매일의 경건의 훈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119: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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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12 -16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의 개념에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을 포함시켜야만 합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세대의 중요하고도 긴급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질병, 무지, 노예 제도의 해악 그리고 다른 형태의 잔인무도함과 착취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부, 고아, 난민, 죄수, 정신이상자, 굶주린 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빈곤을 역사 속으로 보내자’는 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면서, 또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면서 그분의 소유인 이 땅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들은 이 땅이 오용되는 현실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낭비와 소비의 생활 방식으로 이 땅의 오용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 창조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반영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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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5 – 9

우리는 제자도를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만 제한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더 넓은 시각으로 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창조된 환경을 돌보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관계를 세우셨다고 증언합니다. 첫째, 인간과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형상으로 그들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들 서로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복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신 선한 땅과 피조물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세 관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졌습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그들 상호간에 쫓겨난 책임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하였고,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선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속 즉, 회복 계획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 때문에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신음하는 창조 세계를 해방시키는 일 역시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들로서 회복을 위한 일꾼이 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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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종종 실패로 점철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몇 다른 이유들이 있지만, 그리고 지나친 단순화의 문제도 있겠지마,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 모습이 우리가 선포하는 그리스도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 풀톤의 저서 오늘날의 복음 전도에서 다음과 같은 통찰력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선포는 자신이 말한 바를 그대로 구현해 내는 사람들의 선포다. 그들은 곧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 그리스도인들은.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소통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지 말이나 개념이 아니다. . 진정성은.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전달된다. 잠깐의 불성실로 인해 지금까지 소통을 위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통은 진실한 인격으로 가능하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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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15 – 19

우리는 섬김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를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도중 주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일을 마치신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4-15). 이 당시 문화로는 종들도 등급이 있어 발을 씻기는 종이 가장 천하였습니다. 심지어 랍비의 학생들은 랍비를 위하여 종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였어도 발만을 씻기지 않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일일이 씻기셨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은 30량을 받고 당신을 넘길 기회를 찾고 있는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당시 문화에서 종의 역할도 마다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 역시 우리 문화에서 어떤 하찮고 굴욕적인 일도 마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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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 놓인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주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입니까? 그렇다면 교회는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면서 편집하고 조작할 자유가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6:46)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삶을 모래 위에 세우는 일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문화와 두 가치 체계와 두 기준과 두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우리 주변 세상의 방식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분별하여 살아가야만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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