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9/2-6)

잠언31:16절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16절은 ‘현숙한 여인’의 적극적인 경제 활동을 묘사합니다. ‘살펴 보고’에 해당하는 ‘자메마’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계획하다’는 의미로써, ‘현숙한 여인’이 구입하려고 밭의 상태와 경제성 등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모든 각도에서 생각해 본 뒤, 대담하게 자금을 집행하여 구입합니다. 자금의 출처는 어디이겠습니까? ‘자기의 손으로 번 것’입니다. 원어는 ‘그녀의 손바닥의 열매’로서, 열심히 손으로 일하여 직물을 생산하고 팔아 얻은 소득을 말합니다(31:13,24). “포도원을 일구며”는 먼저 땅을 갈아 엎고, 돌을 전부 골라내어 울타리와 쓸만한 밭을 만든 후에, 최상의 포도나무를 심고, 원두막과 포도주 틀을 세우는 과정을 지칭합니다. 10년은 노력해야 좋은 포도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한 우물을 10년은 파야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표 판매원 등과 같이 노력해도 기술이 늘지 않는 일은 청년들이 택할 직업이 못 됩니다(버트란트 러셀). 노력해서 도달할 장래가 없는 것이죠! 현숙한 여인은 그 반대입니다. 한편, ‘산다’의 주어는 ‘현숙한 여인’입니다(여성 대명사). 일반적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땅의 구매와 같은 일은 가정의 중대사이기에 가장이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는 문서상으로는 가장이 밭의 소유주로 등재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에 여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회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현숙한 여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 하겠으며,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의 경제적 측면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잠언31:30,새번역)

잠언31:17절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토마스 모어의 책「유토피아」(1516년)에서는 모든 주민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생산물은 다 공동체에 귀속되며 개인은 공정한 분배를 받기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모두 부유하다고 합니다. 꿈 같은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가 없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공정한 분배를 행할 수 있는지 토마스 모어는 적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공정한 분배는 오직 정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31장 10절이하에 현숙한 여인을 등장시켜, “사랑의 모범”이 작동하는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연하게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또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에서 ‘팔’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현숙한 여인이 가정을 위해 강한 의지를 갖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표현 합니다. 사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종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고, 밭과 포도원에서 일한 뒤, 밤에도 물레질을 합니다. 그런 불굴의 동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가정 즉,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남녀 하인들을 맡겨주셨음을 알고 책임감을 갖습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단순히 자신을 치장하고 안일하게 사는 길이 아니라, 맡겨진 가정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삶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 여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지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고, 경외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그 비결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마태복음26: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인간 관계는 개방적이고 정직해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임박한 체포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와 보니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반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려 도움을 요청하는 가나안 여인의 부르짖음에, 제자들은 감정을 감추지 않고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예수께 불만을 토로합니다. 솔직함은 상담에서도 중요합니다. ‘터니어’는 대인 관계에서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나는 진찰실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의 가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타인에게 보다 개인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따뜻한 인간성을 갖도록 도와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마치 신선한 미풍처럼 우리 가운데에서 불어나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의사는 자신이 심하게 화를 낸 다음에 생겼던 변화를 말합니다: “전에는 내 직무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호메로스의 시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분노 때문에 한 인간이 되었고 호메로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그리고 그분이 친밀하게 만나셨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솔직한 대화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어떤 행동에도 주님은 언제나 현재의 모습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시는 장면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포용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갖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4,사역)

누가복음10:41,42절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체험적 가치의 실현은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또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이 방문하자 잘 대접하려는 마음에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동생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주님께 불평하였으나, 주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본문은 선한 사라미아 사람의 비유 다음에 위치합니다. 거기서 제사장, 레위인은 도움이 필요한 동포를 지나치는데, 거룩을 요구하는 제사 직분을 핑계 삼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장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향합니다. 늘 하는 제사 직분(창조적 가치 실현)과 강도당한 이웃의 간호(체험적 가치 실현) 사이에 바른 선택, 즉, ‘삶의 의미의 실현’은 무엇이겠습니까? 후자입니다. 물론 주님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 제사장의 역할, 음식 대접 등-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가치’만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닙니다. 어느 가정주부는 세 자녀를 거느린 진부한 가사일을 불평하는데, 바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와 비슷합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올바른 자아실현의 방향을 잡고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같이 “체험적 가치의 발견”은 경험이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후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어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주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로마서 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보편적 방법은 자신의 일 – 가사, 공부, 근로, 사업, 학문, 예술 등 -을 통해 ‘창조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만남, 배움, 경험(황혼의 아름다움 등) 따위를 통해 체험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어느 실내장식 화가(61살)와 상담한 내용입니다. 그 화가는 신경질환이 악화되어 자신이 사랑해왔던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체험적인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더 이상 창조적인 가치들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자신의 직업을 통해 거둔 성공, 현재도 활발한 예술적 감수성, 그리고 행복한 부부 생활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현재 추구하는 지적인 탐구- 강의, 읽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 -에 집중하면서 상담하였다.” 그 결과 손작업으로 더 이상의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삶에도 여전히 의미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자 그 화가는 강인해 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체험하는 일보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에게 마리아가 택하였던 “좋은 편”(눅10:42)이란, 마리아가 추구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주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원기회복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셨지만, 그분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필요하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롬14:19절,새번역)

매일묵상(2024/08/26-30)


잠언31:14절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본문은 ‘현숙한 아내’를 무역선에 빗대었습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은 히브리인이 아니라 페니키아 상인들이 주도하였고, 두로와 시돈은 그 때문에 번영하였습니다. 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현숙한 아내’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은, 그 만큼 진취적으로 가정 경제를 일구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라는 표현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돈을 버는 것은 남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고대에 여자가 무역을 통해 필요한 양식을 들여오는 모습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지혜를 가진 모든 여인들의 삶이 그와 비슷하였습니다. 1525년 결혼 후, 마르틴 루터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고, 경제적으로도 큰 규모의 살림을 유지하였습니다.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는 방 40개가 딸린 수도원을 루터에게 결혼 선물로 주면서, 교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고 결혼 축하금으로 140굴덴이 들어 왔지만- 소 한 마리에 2굴덴 – 살림은 빡빡하였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컸고, 루터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이었습니다. 수많은 식솔의 식사 준비와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카타리나의 몫으로, 닭과 돼지를 치고 채소를 심은 것은 물론 수녀원에서 배운 양조 기술로 맥주를 빚어 팔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재(理財)에도 능해 어려운 살림에서도 돈을 모아 부동산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면,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언31:30)

잠언31:15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4절은 ‘현숙한 아내’가 부족한 물품을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적극적인 노력과 진취적인 자세를 묘사하였지만, 본절과 16절은 가정을 다스리고 경제활동에 주력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14절은 ‘무역선’ 의 이미지로 표현하나, 본절은 ‘먹잇감을 주는 암사자’의 이미지입니다. ‘밤이 새기 전에’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는 아직 밤인데 일어난다’입니다. 암사자는 밤에 사냥을 합니다만, ‘현숙한 아내’는 가족을 사랑하고 재산을 불리고자 모두 자는 밤중에 일어나 하루를 대비합니다. 책임감을 실천하는 근면의 화신으로, 자신의 안락보다 가정의 복지를 염려하는 그녀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근면 성실해야 하는데, 가정의 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은 ‘테레프’의 번역으로, ‘테레프’는 ‘먹잇감인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찢어 먹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현숙한 여인’을 포식동물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새끼들에게 ‘먹잇감’을 주듯이, 범접 못하는 위엄을 갖고 전투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맥그리쉬는 말합니다: “최소한 이 단어는 큰 힘과 기량과 독창성을 발휘한 후에만 얻을 수 있는 식량을 나타내며, 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아내의 특별한 능력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법을 심중에 간직하고(30), 또 지혜로워 각 여종들에게 분배할 적합한 일의 종류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생산적이고 질서 있게 돌아갑니다. 잠언을 가르치는 솔로몬과도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다.”(잠언1:4,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7: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인격적 성숙의 길은 자아실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벗어나 분명한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투신하는 것인데, 올포트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 자기 객관화(자기분리)의 길 (2) 관심사를 넓히는 길 (3)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으로 나가는 길. 첫째, 자기 객관화로서, “한국 떠나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겠다…부족한 연구비 따내려 밤낮 제안서만 써내고…” 어느 스위스 공대 교수(한국인)의 체험기가 말해 주듯이, 이는 관심사에서 멀어지거나, 타인(멘토 등)의 개입과 같은 계기가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눅7:36-50). 그의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은 기적은 행하나 배움이 없는 사람이고, 죄인인 그 여자는 구제불가능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빚 탕감의 비유를 통해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시몬의 대답을 이끌어 내신 뒤, 시몬의 잘못된 행동을 반추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손님 대접에 관련된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만 죄사함 받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아니라, 죄인인 그 여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았고, 이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인 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대화 내용은 쉽지만, 인간의 교만한 본성과 관련되어 있어 실천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복음과 함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자아를 극복하고 타인 존중이 가능합니다. 복음과 함께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입니다(롬8:4-9).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에베소서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인격성숙은 타인을 고려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이를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관심사를 넓히는 것인데, 관심사가 넓어지면 인격적 성숙, 치유,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을 받은 주님은 “이 여자를 보느냐”(눅7:44)라고 하심으로,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은 시몬에게 그녀를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온전하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선포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지만(롬3:23), 화목제물로 세워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갈3:28).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 신분, 남녀의 차별은 없고 한 형제 자매로 존중하기에 주님을 닮은 인격적 성숙에 이릅니다. 또한, 관심사를 넓히면 치유도 일어납니다. 노인들이 은퇴하여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 온갖 질병이 찾아 오나, 관심사에 몰두하면 건강한 삶을 영위합니다. 끝으로, 세상은 자아실현에 몰두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라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즉, 사람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삶을 내줄 때 자신과 타인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짐을 져야 하지만, 타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은 함께 져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해야 합니다(갈6:2). 섬김이 곧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마태복음5: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인격적 성숙에 이르는 세 번째 길은 ‘통합의 원리’입니다. 좀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여러 가치들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눅7:36-50)의 기사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자신처럼 종교적 본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 죄인인 한 여인 등-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의 관심분야인 율법규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되어 율법의 목표인 사랑과 온전함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여자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단죄한 것은(눅7:39), 그가 늘 품고 있던 불만, “왜 모세율법을 행하지 않는가?”, 을 드러낸 것이지만, 무엇인가 결여되었습니다. 사랑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사랑을 통합한 주님의 눈에는 시몬의 삶은 율법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에 미달하였습니다. 시몬이 보는 삶의 반경이 그리 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심 분야에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철저하였지만, 그 영역을 벗어난 사람들을 죄인이라 단죄하고 교제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족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한편, 주님은 회개하는 그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셨으나, 그 말씀 속에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을 통합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본받는 것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목표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매일묵상(2024/08/19-23)

잠언31:12절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새번역)

12절은 ‘현숙한 여인의 찬가’ 서론의 요약이고, 본론(13-27절)이 이어집니다. 본론은 칭찬의 구체적인 이유들인 선한 행위들을 열거하고, 각 행위에 내포된 지혜, 강인함, 자비와 같은 성품을 보여줍니다. 즉,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행위마다 묻어 나오고 있고, 그녀가 속한 대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 열매들을 맺으며, 간접적으로는 가정 경제를 일으켜 남편을 높이고, 공동체의 지도자 중 하나로 인정(23) 받게 하는 모습을 볼 때, 왜 그녀의 값이 진주 보다 귀한지 알게 됩니다. 한편, 본론의 주제, 구조 그리고 시적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면, 본론은 13-18절과 20-27절로 나뉘어 지고, 19절(부지런히 실을 뽑아내는 모습)에서 두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됩니다. ①주제의 측면에서, 13-18절은 무역과 생산을 통해 가정 경제를 일구는 모습, 20-27절은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그녀의 고귀한 인격이 생산하는 덕을 노래합니다. ②구조의 측면에서, 답관체(acrostic) 형식이 계속되면서, 13-18절, 그리고 결론인 28절은 원문의 각절 마다 동사로 시작하고(13절의 예: 구한다 그녀가 양털과 삼을…), 20-27절은 동사 이외의 품사로 시작하여 흥미를 돋굽니다. ③시적인 측면에서 주요 단어의 반복이나, 교차대구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가는 내용도 선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역시 아름답습니다. 이 같이, 우리의 삶도 선한 열매를 맺고, 그것들을 남에게 덕을 세우는 아름다운 말에 담아 내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12:10).

잠언31:13절
“양털과 삼을 구해다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한다.”(새번역)

13절부터, 현숙한 아내의 유능하고 성실한 삶, 복된 결과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가정 경제 구축을 위해 힘을 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13-19). 이는 가정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 보다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는 매우 실용적입니다. ‘양털’은 겨울 옷을 위한 재료이고, 삼은 ‘삼베’를 의미하는 여름 옷의 재료입니다. ‘구해다가’는 교역을 통해 재료를 구입하거나 혹은 직접 아마를 재배하고 양의 털을 깍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여인은 가정에게 닥쳐오는 겨울과 여름의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하되, 부지런함과 치밀함 그리고 계획성 있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가족들의 옷을 만드는 수준을 넘어 그녀는 자신이 생산한 옷들을 팔아 수입을 얻고 가정 경제를 일구어 냅니다(24). 그래서 그녀는 열정을 갖고 부지런히 일합니다. 또한, 그녀는 하녀들을 거느리며 일을 나누어 주지만(15), 자신의 손으로 일하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옷 만드는 기쁨과 그 옷을 가족에게 입히고, 또 그것을 판매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즐거움은 현숙한 아내가 부지런히 일하는 원동력입니다. 공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논어 옹야편).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한다면, 자연히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요 축복의 사람입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시편40:8,새번역).

창세기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새번역)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 한 뒤,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3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①창조적 가치의 실현 ② 체험적 가치의 실현, ③ 자세적 가치의 실현. 먼저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란,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여 무엇인가를 삶에 기여하고자 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어진 책무가 완성되면, 그에 따른 만족감과 안도감이 찾아오나, 반대로 해야 할 일이나 수행해야 할 책무 또는 자신의 잠재 능력을 발휘하게 할 임무가 없을 때 사람은 깊은 절망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조적 가치의 실현’은 인간 실존의 근저에 있다는 말은 타당합니다. 프랭클은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내던 몇 해 동안, 로고테라피의 기본 이론을 정리하여 출간하겠다는 목표가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증언합니다. 또 “빈의 정신병리학 교수이자 90살의 노인인 베르제는 읽어야 할 책들이 책상 위로 꽉 들어 차 있었다. 베르제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었다!”는 그의 말과 같이, 우울증은 흔히 수행해야 할 창조적 임무를 발견하지 못해서 오는 병입니다. 어느 화가가 가스를 틀고 죽으려 하다가, 자신의 그림의 불완전성이 눈에 띠자, 죽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작업에 뛰어들었다는 일화 역시 창조적 가치 실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란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일이 필요하나, 그 일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마4:4)

사무엘상10: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탁구 신동 신유빈 선수는 5살 이전에 탁구 재능을 발견하였으나, 처음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창조적 임무를 발견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별 의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한 안이한 생활 양식에 빠져,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모험을 거부하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창조적 임무, 삶의 의미 등을 발견하기 위해 매개자(멘토, 선생, 친구 등)의 도움이 꼭 필요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왕 사울 혹은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울은 범죄하여 가장 찌그러진 베냐민 지파 후손임을 자각하고 겸손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선택받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용감하게 싸워 이스라엘을 그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왕의 임무를 다한 것이지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백성들을 의식하여 불순종 하자, 그의 왕직은 버림 받았습니다. 백성을 두려워 한 사울은, 하나님이 금지한 아말렉의 우양을 전리품으로 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선택되나, 시글락을 불태운 아말렉 족속을 멸하고 회군할 때 군사들의 말을 듣지 않고, 피곤하여 브솔 시내에 머무른 2백명을, 끝까지 전투한 4백명과 동일한 전리품을 받도록 합니다. 다윗이 세운 공평의 도는 이스라엘 군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b-23a)

누가복음22:62절
“그리하여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비통하게 울었다.”(새번역)

세번 째 예수님을 부인 하자, 닭은 곧 울었고 심문 중의 주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는 실패를 자각하고 대제사장 뜰 바깥으로 나가서 통곡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고전15:5). 이것이 자주 실패하는 신자들의 마음에 각인된 우리 주님의 모범이자 부활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킴으로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주님의 유훈을 지켰던 것입니다. 실패를 통하여 삶을 배운다는 것은 성숙의 표지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실패로 좌절하는 대신 그 실패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실패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성공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한 학생이 심리치료를 위한 하계 수련회에 참석한 뒤, “나는 감히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말도 그런 의미입니다. 이제 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에 뛰어 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빅터 프랭클의 강의는 의미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잘못의 결과를 없앨 수는 없지만, 참회를 통해 자신을 그 행위에서,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 놓을 수 있다. 그는 이미 일어난 일을 변경시킬 수는 없지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성경의 놀라운 점은 우리와 같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실패, 용서, 회복과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꽉 들어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배움과 위로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딤전3:16,새번역)

매일묵상(2024/08/12-16)


잠언31:10절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0-31절까지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가입니다. 형식은 답관체(acrostic)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의 첫머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흥미를 유발하고 쉽게 암기하도록 사용된 문학적 장치입니다. 내용은 세 부분입니다. ① 현숙한 여인과 그 남편의 복(10-12) ② 현숙한 아내의 노력과 복된 열매(13-29) ③ 현숙한 아내의 핵심 덕목- 주님을 경외하는 삶(30-31). 본문의 ‘현숙한’의 원어 ‘하일’은 ‘강하다’라는 의미의 어원 ‘훌’에서 유래하여 ‘능력있는’ ‘힘있는’을 뜻합니다. 문맥을 감안하여, ‘현숙한’(개정개역), ‘유능한’(새번역), ‘어진’(공동번역), ‘고상한 성품의-noble character’(NIV) 등으로 번역되지만 ‘유능함-capable’이란 뜻이 핵심이나, 입으로 지혜를 말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남편을 세우는 고매한 인격도 증거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현모양처로서 ‘현명하고 정숙한’ 아내로 이해되고, 개정개역의 ‘현숙한 여인’이란 번역이 제일 좋습니다. 남편에게는 이런 아내는 귀한 보석인 ‘진주 보다’ 값이 더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은 이런 여인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여자도 이런 아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교훈입니다. 이 현숙한 여인의 삶의 원동력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그것이 이웃(남편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낳고, 그 책임감은 재물, 지혜로운 말, 홍색 옷 등 구체적인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추상적이지 않고 행위와 열매로 입증되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언19:14).

잠언31:11절
“남편은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가난을 모르고 산다.”
(새번역)

11절은 답관체 시의 형식에 따라 히브리어 두번째 알파벹인 ‘베트’로 시작됩니다. ‘믿으며’는 ‘빠다흐’의 번역이며,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인한 행복감·안도감을 나타내고,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함께 사용되어 ‘진심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로 직역됩니다. 남편의 신뢰의 구체적인 내용은 먼저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에서처럼 아내가 벌어들이는 경제적인 풍요함과 관련되어 있지만, 잠언은 인격과 자녀 교육, 그리고 결혼 관계에 대한 정절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신뢰, 그것도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내를 둔 남편은 행복하며, 그 아내 역시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기에 복되다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는 개정 개역에서는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로 번역하였는데, 직역은 ‘그리고 그는 결코 수입이 부족하지 않다’입니다. 잠언을 보면, 아내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수입을 벌어들이고, 남편의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견고하게 일구어 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의 부인 카타리나(1499-155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루터가 수도원에서 탈출하도록 도운 수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결혼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1525년 결혼 후, 카타리나는 루터의 경제생활과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실제 표상으로, 그분의 이야기를 간간이 적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잠언31:12,새번역)

누가복음7:48절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얼마 전 하마스의 지도자 하니예가 테헤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란은 책임감과 모욕감을 동시에 느껴 즉각적인 보복을 선포하였지만,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찾아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여 대접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시몬은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가 울며,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주님의 신분을 시험하는 시몬에게 주님은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르시기를,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춤도 없었고, 흔한 감람유조차 머리에 붓지 않았지만, 그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내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 그는 너보다 나를 사랑함이 많아서, 그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 하셨습니다. 여타 손님들은 귀빈으로 영접하여 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한 시몬이였지만, 오직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예수께 대한 존중과 책임감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크게 모욕감을 느끼셨으나, 내색도 않으시고 온유하게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는 메시야로서의 책임감, 즉 당신의 백성의 죄와 연약을 담당하고 바로 잡으셔야 하는 그 책임감 때문입니다(눅4:17-22). 여인의 향유 사건이 일어나자 대화를 통해 시몬의 마음속 질문에 답하시면서, 메시야의 능력과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본받아 인내하며 주님께서 행동하실 구원의 때를 온유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구원의 사건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눅7:49)

에스더 3: 2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본문의 사건은 페르샤 제국 아하수에로 왕 초기(BC 480년 경)입니다. 질녀 에스더는 이미 황후였고, 모르드개는 수산 성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 대한 암살 모의를 듣고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알려 참극을 막았습니다. 그는 상도 칭찬도 받지 못하였으나, 온유하게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런 중 제국의 2인자 하만의 행차 시 모르드개는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고, 하만은 분노하여 유대 민족까지 몰살시키려고 획책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면 행복하게 살 모르드개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다가 화를 당하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히려 페르샤 제국의 2인자가 되는 과정을 에스더서는 증거합니다. 오늘은 79번째 광복절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수양 동우회 사건(1937년)으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의 검사의 심문을 받습니다.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길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덕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 선생의 강직한 태도는 투옥과 고문, 출옥 후 순국으로 이어집니다(1938). 그분의 신념 대로 사후 7년 만에 한국은 독립되나 한국민의 힘이 아닌 미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요한복음 5:40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영어의 must, can, ought to를 심리학적(or 사회학적) 관점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Must : 강한 의무나 필요성을 나타내며, 상대방은 “강제적 의무감= I must”을 갖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동의 여부를 떠나 행위를 강요당하므로, 인간의 실존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공산당에서 사람은 목표 달성의 수단일 뿐입니다. ② Can : 능력 or 가능성을 나타내어, “성취 능력 =I can”의 관점을 갖게 합니다. 자아실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고, 인생의 의미, 가치, 이웃 등은 차 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자아실현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빌 게이츠의 결혼생활은 깨졌습니다. ③ Ought to : 상대방은 권고를 듣자 책무를 깨닫고 책임감(책임의식)을 갖게 됨을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은 “책임 의식 = I ought to”이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책임 의식’을 통해 외적인 가치 세계와 연관을 맺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그 순간, 인간 존재의 주관적인 면이 보충됩니다. 이는 ‘의미, 가치’와 같은 객관적인 요소를 발견 혹은 수용하기 때문입니다”(프랭클, 의역함). 복음의 전파 방식이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나,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생명의 회개를 얻게 하고,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책임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살았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매일묵상(2024/8/5-9)


잠언31: 6,7 절
“ 독주는 죽을 사람에게나 주어라. 포도주는 상심한 사람에게나 주어라. 그것을 마시면 가난을 잊고 괴로움을 생각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6,7절의 진의는 술로 상징되는 향락이 왕에게 부적절하다는 교훈입니다. ‘죽을 사람’이란 ‘죽음을 방불하는 극한 상황에 이른 자’이며, ‘상심한(=마르) 사람’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말합니다. 극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은 술로 위로를 삼지만, 경건한 자는 그들의 반석이신 주님께 달려갑니다. 한나를 질투한 브닌나가 아들 없는 한나의 약점을 찔러 격동시키자, 한나는 너무나 마음이 ‘쓰라려’(마르)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삼상1:10).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사무엘을 주십니다. 한편, 왕은 정의를 확립하여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요구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모세 율법’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왕의 직무를 상기시켜 ‘모세 율법’을 잊지 말라는 어머니의 통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을 위해 논어를 애독하였는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과 삶을 기록한 성경은 인간 본성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승리의 입성 시, 수 많은 사람의 환호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찬양 소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5일 후 그 백성들은 주님의 원수로 바뀝니다. 형통할 때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을 생각하고 늘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시편37:30,새번역).

잠언31:8,9절
“너는 할 말 못하는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의 송사를 위해 입을 열어라.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세워 주어라.”(공동번역)

본문에서 어머니는, 왕 르무엘이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수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라고 가르칩니다. 재판은 공정해야만 합니다. 가난하다고 두둔하고 세력 있는 자라고 하여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됩니다(레19:15). 그러므로 ‘바른 판결’이란 대목이 중요합니다. 좋은 예가, 솔로몬 왕이 어린 아이에 대한 두 창녀의 상반된 주장을 듣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별하여 바른 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판단과 집행이 쉽지 않습니다. 세력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법의 헛점을 파고 들고, 소송 시에는 많은 돈을 주고 유능한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합법적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역사를 살펴 보면, 권력자들은 힘 있는 계층의 지지를 위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억울한 사정을 알았지만 유대 지도층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에 의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등극하셨습니다. 모든 통치권력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절차를 넘어 구제받지 못한 억울한 일은 더 이상 원수 갚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진노에 맡기시기 바랍니다(롬12:.19).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시편37:9,새번역)

누가복음 5: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 베드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 극적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라는 침례 요한의 거듭된 증언을 듣자 예수께 가서 대화를 갖습니다. 그리고 형 베드로를 찾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그의 인생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흘 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경험하고서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요2:11). 얼마 후 유월절이 이르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수 많은 이적 행하심과 존귀한 공회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등을 목격하였지만, 갈릴리로 내려 왔을 때는 다시 어부라는 생업에 종사하러 갔습니다. 이 즈음 주님은 수 많은 사람과 함께 갈릴리 호수 가에 이르자 시몬의 배에 오르사 군중들을 가르치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밤새 빈손이었던 어부 베드로는 많은 고기를 잡자, 거룩하신 분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깨닫고 두려워 합니다.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심으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눅5:10). 그 사명은 사람의 영혼을 낚아 예수 중심의 인간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이죠! 이 기사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거친 빅터 프랭클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내었습니다. 내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1).

요한복음 1: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예수께 부름 받자,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나섭니다(요1:45).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삶은 수행할 가치가 있는 사명을 발견하였을 때 변화될 수 있다” 하고, 나아가 그는 누구나 그러한 사명이 있고, 그런 임무가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정신분열증 직전의 어느 젊은 여류 화가에게 준 조언입니다. “당신은 삶에서 당신에게 부딪쳐 오고 도전해 오는 어떤 목표 없이 당신의 삶을 재건할 수 없습니다. 목표가 없을까요? 화가로서 당신이 해야할 일이 없단 말인가요? 당신 안에서 숙성 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들, 창조 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그림들 등 당신이 착수해 주기를 기다리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은 힐데가드라는 화가이고 힐데가르를 기다리는 일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은 당신이 창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창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인간이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수께 기대하였으나, 부활의 주님은 그것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행1:1-9).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성령님에 의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인간들의 탄생입니다(딛3:5). 빌립은 사도가 됩니다. 그러나 다 사도이겠습니까? 삶 혹은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기대할까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


사도행전 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의 정점은 ‘자아실현’이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 발견’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아 실현에 있지 않고, 오히려 가치를 실현하고 의미의 가능성을 완성시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가치’ ‘의미’ 등과 같은 주관적 개념들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키에르케고가 도입한 실존주의 철학은 현대 인간을 합리주의 세계관에 가두어 버리고 의미·가치·하나님· 아름다움· 책임감 등 형이상학적 가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제거했다고 개탄합니다. 쉐퍼의 진단은 옳습니다. 현대인들은 생산성, 합리주의, 물질주의 등에는 탁월하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랭클은 ‘의미 요법’을 통해 사라진 사닥다리를 찾아왔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일층(합리주의, 기계적인 세상)에서 이층(의미, 하나님, 종교 등 가치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고, 무의미라는 정신병을 치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해야 할 I ought’ 것을 하려는 그 순간, 우리는 의미라는 객관적인 것을 통해 인간 실존, 곧 존재(being)의 주관적인 면을 보충하게 된다.’ 한편, ‘삶의 의미’는 종교로 가는 길입니다. 프랭클은 종교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하나님으로 가는 길인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일한 의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새번역)

매일묵상(2024/0729-8/2)

시편8:5절
“그를 하나님(엘로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동물은 환경을 갖지만 인간은 세계를 갖는다”고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양심을 갖고 자유로운 결정과 이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이기에, 마땅히 이런 인간상이 전제된 후 심리 치료에 임하도록 주장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정신요법은 보이는 세계만을 대상으로 삼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증거합니다. 두 세계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며, 보이는 세계의 통치를 위해 창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본 시편은 광대한 우주와 수 많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연약한 인간에게 맡기신 경이를 노래합니다. 엄청난 영화요 존귀입니다만, 병들고 죽는 현실과 인간의 말을 듣는 피조물이 없음을 볼 때, 성취자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황제라도 바람과 바다를 복종시킬 수 없지만, 주 예수께서는 복종시키셨고(막4:41), 부활·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받아 성취하고 계십니다(히2:6-9). 한편, 5절의 ‘하나님’이란 문구는 때때로 ‘천사들’로 번역되는데,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부활 이전의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기에 천사들보다 조금 못합니다(시82:6,7), 그럼에도 우주만물의 관리자로 세워진 인간의 영화로운 지위는 존중되어야만 합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상관 없으나, 인간이 늙고 병들어 육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 관리자로서의 존엄성을 빼앗긴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로고테라피적 ‘의미 요법’의 강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는데, 로고테라피가 미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마가복음5:9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사람이 병들면 존엄성을 빼앗긴다” 이는 개인의 중요성을 생산적 유용성과 동일시하는 문화 때문입니다. 은퇴하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결국 자기 존중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또한, 범죄자들은 사회로부터 손상된 그의 존엄성을 반사회적 방식으로 인정 받으려 하고, 정신질환자는 스스로 인격적 존엄성을 가질 수 없어 자신을 향해 분노합니다. 사실상, 정신질환자는 인격의 통일성을 상실하여 내부에는 ‘군대’가 주둔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심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한편, 성경이 말하는 거라사 광인은 악령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한 인격 억압이나, 정신질환은 병이나 죄 등 환자 내부의 요인에 기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존엄성의 상실로 정신질환에 이른다면, 그 대처 방법은 환자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치유를 가져옵니다. 좋은 예가 정신과 의사 설리반의 태도입니다. 담당 의사와 대화조차 완강히 거부하는 환자를 향해 의자를 좀 더 가까이 갖다 놓고 아주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랍게도 환자는 마음을 열고 30분이 넘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설리반의 친근한 행동이 환자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피하는 악령들린 거라사의 광인을 주님은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심으로 그의 존엄성을 인정하셨다”(브루더)는 설명은 옳습니다. ‘존엄성을 가진 정상적인 인간’은 정신의학이 추구하는 목표이나, 이 이후는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인들도 인생을 비출 가르침을 갈망하는데, 그것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마가복음5:19절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막5:19,새번역)

혹독한 나치 치하에서 2년 반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풀려난 한 유다 청년(17세)은 탈무드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프랭클은 그에게 “그 체험이 당신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는지 누가 압니까? 그 체험 때문에 당신은 보다 정직하고 사려 깊은 인간이 되었소 2년 반 동안 갇혀 지내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적합한 임무를 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아마 당신의 수감 생활은 그 시기의 당신 인생에 꼭 알맞은 직무였을 것이오….탈무드에 대한 당신의 연구는 깊이 나아 가서 그 지혜의 깊숙한 곳까지 이를 것이오….사실 지금 당신은 마치 순도 높은 금은처럼 정련되어 있소…” 그 청년은 결정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프랭클은 청년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여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비추어 자신의 곤경을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 “나는 그 젊은이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환자의 서글픈 현재의 상태를 지적함이 아니라 그가 지금은 정신질환에 시달려도 그가 성취해야 할 의미를 섬광처럼 볼 수 있게 함으로 그렇게 하였다.” 귀신들이 쫓겨나가자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사 광인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가장 적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2년 후 주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으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의 관점에서 오늘의 나와 현실을 보게 합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5:20)

잠언31:1-3절
“ 마싸 왕 르무엘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   아들아, 들어라. 내 속에서 나온 아들아, 들어라. 서원을 세우고 얻은 아들아, 들어라. 네 기력을 여자에게 쏟지 말아라. 임금도 그리 되면 망한다”(공동번역)

잠언은 3부로 편집되었는데, 제1부 1-9장은 강화와 설교 형식을, 제2부 10-29장은 경구와 속담 형식을, 제3부 30,31장은 부자 혹은 모자 간의 훈계 형식을 취하나 내용과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1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9절은  왕에게 여자와 술을 경계하고 공의로운 통치를 권면합니다; 10-31절은 현숙한 아내에 대한 찬가이며, 각 절의 첫문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른 답관체(踏冠體)- “머리를 밟아 가는 문체”- 입니다. 31장의 편집 의도는 분명합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도, 어머니를 공경하고 그 바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며, 현숙한 여인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삶과 행복의 안전망이고, 생명을 출산하고 태어난 생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기에, 현숙한 여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뜻인 ‘르므엘’ 왕은 솔로몬의 아명이거나 아니면 북아라비아의 지혜로 유명한 마싸의 왕이라 추정됩니다. 공동번역은 후자를 취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만약 전자로 취한다면, 1-3절의 여인에 대한 교훈은 솔로몬 왕의 삶을 반추하게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으나, 힘을 여자에게 쏟았고 현숙한 여인 대신 이방 여인들을 얻은 결과 우상숭배를 이스라엘에 도입합니다.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분열과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31:4,5절
“ 르무엘아,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이 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임금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독주를 좋아하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 법을 잊어버리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판결을 불리하게 내릴까 두렵다.”(공동번역)

4∼7절은 술에 대한 경계로서, 이는 술이 왕의 공정한 직무 수행을 막는 측면과(4,5), 고통하는 사람이 먹고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는 용도(6,7)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문자적으로 ‘왕들에게는 아니다’는 의미이며, 강조를 위해 이 표현을 두 번 반복합니다. 더 나아가 왕을 ‘통치자’로 지칭하면서 또 다시 ‘적합한 일이 아니다’라고 세 번째 반복함으로 어머니의 권면을 마음에 간직하게 합니다. 5절은 그 당시 왕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재판을 르무엘에게 상기시킵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어야 하나, 술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면 오히려 그들의 생존권마저 빼앗아 버릴 우려 때문입니다. ‘법’이란 문자적으로 ‘제정된 것’이며, 국가를 다스리는 법규에 대한 표현입니다. 신명기17:18-19에는 왕이 모세 율법을 등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라고 규정합니다. 왕이 술을 가까이 하면, 이처럼 중요한 율법, 곧 신정 왕국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를 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진 신자도 같습니다(벧전2:9). 신자가 술로 상징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두면,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는 포도나무 가지가 될 것입니다(요15:6).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매일묵상(2024.7.22-26)


요한복음4: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5번 이혼하고, 지금은 한 남자와 동거하는 사마리아 여자는 성적 쾌락을 추구한 참담한 결과에 직면합니다. 그녀는 삶의 동반자가 될 남편이 없습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 있는 위치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얻어집니다. 그런데 책임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의 은밀한 도덕적인 문제를 지적하자, 갑자기 예배 장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바꾸어 버립니다. 종교적 토론은 흔히 개인적인 문제에 깊이 들어가기를 피하는 한 가지 방편이 되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주제의 진부성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과 관련된 ‘어리석은 논쟁..율법에 관한 싸움”과 같은 무익한 일을 피하라고 명령합니다(딛3:9). 복음은 논쟁이 아니라 선한 열매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도덕한 사생활을 숨기려는 그녀를 보시자, 예배의 장소라는 새소재를 갖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제로 들어가셨습니다. 참된 예배는 계명에 따른 삶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다시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있으면 이웃 혹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자. 그러면 ‘영원한 생수(생명, 예배의 삶)’를 가질 수 있다.” 이는 부자 청년의 소유의 문제와도 같습니다. 다만, 사마리아 여인은 결단하여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생수를 얻었고, 부자 청년은 거부하고 떠남으로 생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요한복음4:29절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하갈은 술 광야로 도망 중 샘물 곁에서 주님의 사자를 만납니다(창16장). 그분은 이미 하갈의 신분과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간다는 대답에,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분은 하갈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십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약속하신 주님과 같습니다. 하갈은 그분의 신성을 깨닫고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 살아계신 감찰자의 우물’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순종하여 돌아가서 아브라함 온 집에 자신의 경험을 전하였습니다. 2100년이 흘러, 하갈과 같이 잘못된 관계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곁에 왔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듣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시고 영원한 생수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의 경우처럼 잘못된 관계를 시정토록 하십니다. 다만 이 경우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통한 온유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 여인은 하갈처럼 돌아가서 자신의 부끄러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털어놓으며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몰려 나왔습니다. 오직 죄인들만 예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쾌락의 길을 버리고, ‘영원한 샘물’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영생토록 살아계신 분’을 만남으로 의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이것은 심리학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잠언30:29-31절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29-31절은 자신의 존엄성과 권위를 지켜 당당하게 살아가는 네 가지 표상이 제시됩니다. 초점은 네 번째 제시된 왕입니다. ‘잘 걸으며’란 ‘메티베 차아르’의 번역이며, ‘메티베’는 ‘즐겁다’ ‘잘하다’의 뜻으로 두려움 없이 기쁨을 가지고 힘차게 행진하는 모습입니다. 강조를 위해 ‘위풍 있게 다니다’의 구절을 반복시킵니다. 먼저 사자가 등장하며, 사자는 아굴의 시대에 팔레스틴에 서식하던 동물로서 최강자임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냥개로 번역된 ‘자르지르’인데 문자적으로는 ‘허리에 두른’이란 의미입니다. 빨리 달리도록 준비 된 상태로 보아(왕하4:29) ‘사냥개’ 혹은 ‘얼룩말’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수탉의 자태라고 보아 ‘수탉’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자와 같이 당당하게 다니는 동물임은 분명합니다. 셋째는 ‘숫염소’로 번역된 ‘타이쉬’로서, ‘타이쉬’는 ‘머리로 받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숫염소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전투 태세를 갖추고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당할 수 없는’의 원어는 ‘알르쿰 임모’이며, ‘백성들 앞에 선’ 혹은 ‘군대와 함께 한’을 뜻합니다. 따라서, 왕이 백성이나 군대와 함께 하고 있을 때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아굴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 중 한 면이라 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30:32절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2, 33절은 30장의 결론이며, 교만과 죄악을 버리고 겸손과 경건을 취하라는 교훈입니다. ‘미련하여’의 원어는 ‘나발’이며  사무엘상 25장에 등장하는 갈멜의 어리석은 부자 ‘나발’이란 이름과 같습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에 해당하는 ‘잠모타’는 단순히 ‘계획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계획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 주체가 미련한 자여서 ‘악한 일’로 해석한 것입니다. ‘입을 막으라’는 것은  죄악을 뉘우치고 그 악한 말을 자제하라는 뜻입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은 자신을 위해서는 “왕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였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의 전령들에게는 “다윗은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라고 다윗의 처지를 비웃고는, “내 떡과 물과 고기를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는가”라는 악한 말과 함께 빈 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동안 나발의 양 떼를 지켜 준 선행에 대한 보답은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한 다윗은 나발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나발은 부를 일구었으나 인색하고 성공에 도취되어, 다윗을 과소평가했고, ‘다윗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된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신탁도 무시하였습니다. 미련한 자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늘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자이며, 교만과 미련한 짓을 깨달으면 즉시 돌이켜 그리스도의 피로 씻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본절의 제자이며, 교만과 악한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 자는 바보로서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잠언30:33절
“(왜냐하면)우유를 저으면 굳은 우유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듯, 화를 돋우면 분쟁이 일어난다.”(새번역)

33절의 시작은 접속사 ‘키’로서, ‘입을 막으라’는 권면(32절)의 타당성을 말합니다. ‘저으면’ ‘비틀면’ ‘돋우면’으로 각 번역된 원어는 ‘미츠’입니다. ‘미츠’는 ‘누름’ ‘비틀어 짬’ ‘억압’ 등을 뜻하는 낱말로 우유가 가득한 가죽부대를 삼각대에 걸어놓고 비틀어서 버터를 만드는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아굴은 ‘미츠’를 세 번 반복하는데 행동이 가져올 필연적 결과를 가르치는 의도입니다. 즉, 우유를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교만한 태도나 악한 말은 사람을 격동시키고, 이어 다툼(분쟁)을 일으킵니다. 이 피할 수 없는 귀결을 차단할 수 있는 비법이 32절에서 언급된 권면입니다. 즉 자신만을 주장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아굴의 권면을 받아들일 것이나  교만한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굴이 교훈을 마치면서 겸손과 절제를 강조한 것은 이 자세가 지혜로운 삶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입을 절제하지 못하면 쓸데 없는 말을 하여 상처를 줍니다. 결과는 미움과 분쟁이며, 물고 뜯고 하여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이 악하여 입을 열면 남은 낮추고, 자신은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입을 열면 ‘은혜’를 끼쳐야 할 것입니다. 벽돌로 건물을 쌓듯이, 상대방의 삶을 세워주려는 사랑과 지혜(잠언)는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손히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매일묵상(2024/7/15-19)


잠언30: 26절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본문은 지혜로운 두 번째 동물을 소개합니다. ‘사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쉐판님’이며, 팔레스틴이란 배경을 놓고 보면, ‘시리아 바위너구리’ 즉, 작은 토끼 크기이지만 귀와 다리가 짦은 담황갈색의 작은 포유동물을 지칭합니다. ‘바위 사이에’란 험한 바위산, 혹은 낭떠러지를 의미하며, 이는 바위 너구리가 천적이나 인간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높거나 험한 바위틈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또 바위 너구리는 군집동물로서, 보초가 위험신호를 보내면 재빠르게 바위틈으로 숨어버린다고 합니다. 실로 바위는 이들의 은신처입니다. 그 모습을 본 시편기자는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104:18)고 노래합니다. 아굴이나 시편기자가 바위너구리에 주목을 하는 이유는, 연약한 이 동물은 자신을 지킬 방어수단이 없음을 깨닫고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지혜를 갖춘 점입니다. 인간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환난날에 피할 큰 바위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한 자들이 배우거나 행할 수 없는 지혜로써, 오직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뜻 즉, 선을 행하려는 신자만이 가능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엔게디 광야로 도망을 갔고, 부하 600명과 함께 바위로 만들어진 동굴에 숨곤 하였습니다. 바위 너구리와 비슷하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사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 동굴에 사울이 용변을 보러 들어왔을 때, 다윗은 옷자락만 베고 살려줍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랑입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다.”(시편94:22,새번역)

잠언30:27절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약한 개미와 사반(바위너구리)과 달리, 메뚜기의 약점은 ‘임금(지도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가 없으므로, 구성원들 각자의 생각대로 살기 마련이고 혼란과 무질서가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굴이 본 메뚜기 떼는 놀라운 질서를 유지합니다. ‘나아간다’는 동사의 원어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나아가다, 행진하다”(민1:20)를 뜻합니다. ‘떼를 지어’는 여러 무리로 나뉘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함으로, 이를 정확히 번역하면,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분대별로 행진해 나아간다”입니다. 메뚜기 떼들이 각 부대별로 행진하는 군대와 같이 단 한 마리의 예외나 이탈 없이 무리를 이루어 질서 정연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메뚜기들에게는 ‘임금’이 없습니다. 메뚜기 떼가 지도자 없이도 공동 목표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살아가는데, 하물며 지도자가 있어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 공동체에 큰 피해를 주는 자는 미물만도 못한 자입니다. 사사기의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은 열두 지파는 왕이 없어서 자신의 소견대로 살아갔습니다(삿21:25). 그 시대 초기에 기브아 땅을 지나가던 레위 사람은 그의 첩이 집단으로 능욕받아 죽었습니다. 회개를 모르는 베냐민 지파는 정의를 수호하려는 11지파와 전쟁을 벌여 처참하게 몰락합니다(삿19-21장). 사회에는 현명한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저출산 문제와, 이에 따른 교육개혁, 노동개혁, 연금개혁, 그리고 외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잠언30:28절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마지막으로 아굴은 도마뱀을 작지만 지혜로운 동물로 손꼽습니다. 도마뱀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이빨이나 독과 같은 무기 없이, 왕궁에서 버젓이 살아갑니다. 작고 약하나 지혜로운 도마뱀이 왕궁에 거처를 둔 것처럼, 신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존엄한 삶이란, 그들의 동기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요, 수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며, 구체적인 행동양식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성결하며, 화평하며, 관용하며, 이성에 열려 있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차 있고, 거짓과 편견이 없습니다(약3:17). 그들의 자원은 모든 것의 주님과, 그분의 거듭된 약속 – “내 안에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다 행하겠다”- 입니다(요14:13,14). 다만, 제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대사이기에 세상은 그들의 메시지를 두려워 하나,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칼은 없습니다. 박해는 필연입니다! 따라서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힌 그 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고마워 찬송을 부릅니다. 이른바 ‘밤의 노래’를 드리자 옥터가 흔들리고 간수와 그 가족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아침에 관리들은 그들을 방면하려고 하나, 바울은 로마 시민임을 밝혀 관리들이 친히 와서 배웅토록 합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를 아무도 경시하지 못하도록 의도한 조치입니다. 마치 왕궁에 사는 도마뱀의 지혜를 보는 것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요한복음 4: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이란 나찌의 강제수용소의 경험이 근간이 됩니다. 사람은 삶의 의미를 확고히 파악하고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어 낸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데, 극한의 상황에서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삶에서도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연로한 의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서 두 해 동안 깊은 절망에 빠져 살았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그분의 아내가 지금 그가 겪는 이 지독한 고통을 모면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자, 그 의사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의 비탄은 희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절망은 사라졌다.” 실로 수명은 삶의 의미를 강렬하게 느낄 때에 연장됩니다. 어느 영문학과 교수로 은퇴하셨던 분은 90 고령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삶의 의미를 잃고 곡기를 끊셨으며, 얼마 안되어 돌아가신 사례가 있습니다. 의미 추구를 포기하면 삶의 공허가 생겨나고, 이 공허는 식욕, 성욕, 지위나 권력에 대한 욕구 충족 등과 같은 이차적 목표가 전면에 나서도록 합니다. 즉, 마음의 빈 자리를 채우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에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목표들이 우선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다면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로버트 레슬리 목사는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실존적 공허 existential vacuum’의 관점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풀어가나, 복음은 진리이며 영원을 포함하기에 더 적절합니다. 내일 살펴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편4:7)

요한복음4:13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존재감 상실, 즉 「실존적 공허」는 병리학적 의미에서 병(곧 비정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질병과는 다른 ‘삶의 조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때 종교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는 경우가 많습니다(전3:11).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영적차원을 본능에서 파생되는 부산물로 여겨 심리요법에만  치중한다면, 근원적인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프랭클의 어떤 환자는 정신과 의사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갈망을 이해 못하고 은근히 비웃는 태도에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프랭클의 ‘의미요법’에서 의미를 주는 대상에는 종교가 포함됩니다. 종교는 인간 존재에 큰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을 보고 마을 아낙네들과 대인 관계가 심히 결렬되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의 삶을 결정한 원인을 어린 시절의 환경이나 힘든 경제적·사회적 요인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개인의 책임감 있는 반응이 중요합니다. “자유는 조건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이지, 조건들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빅터 프랭클) 말 같이 인간은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는 성적 부도덕이었습니다. 그녀는 성적 쾌락을 통하여 행복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이제 여기서 돌아서서 올바른 삶과 참된 관계로 나아가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온유하게 지적하시면서 참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참된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치십니다.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14:23).

매일묵상(2024/7/8-12)


잠언30: 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가정 질서의 혼란이 야기되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가서, 가정이 그녀의 통제에 놓일 때입니다. ‘미움 받는 여자’란 ‘혐오스럽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사랑스럽지 않은 여성’이어서 사람들은 꺼려합니다. ‘사려깊은 여인’(31:10)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혀와 입 그리고 교만을 절제하지 못하여, 상식밖의 행동을 하게 되고 당연히 사회로부터 외면당합니다. 그런 그녀가 결혼을 통하여 지위가 높아지면 사회는 보복 당하게 됩니다.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 등 역사상 이런 경우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시돈의 왕과 제사장 옛바알의 딸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북왕국의 왕비가 되자, 바알 신앙을 도입하고 여호와 신앙을 박해하면서 남편 아합을 조종하였고, 결국, 의롭고 착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그 악한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여호사밧 왕의 아들 여호람의 부인이 되어 왕자 아하시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시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이 이어 죽자, 반란을 일으켜 다윗 가문에 속한 왕의 씨를 모두 죽이고 7년간 유다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물론, 잠언이 칭찬하는 ‘현숙하고 사려깊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이 크게 일어선 경우도 많습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그렇습니다. 한나는 경건하고 깊은 기도의 여인이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불임을 극복하고 사무엘을 낳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배우자 선택 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지 여부를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30: 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가정질서를 어지럽히는 두번 째 유형은 여종이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여종’에 해당하는 ‘쉬프하’는 ‘여자 노예’로서, 주로 결혼한 여자를 시중드는 가정의 하녀를 지칭하며, ‘이은’의 원어 ‘야라쉬’는 ‘차지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자신이 섬기던 여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여종을 말합니다. 좋은 예가, 아브라함의 아들을 잉태한 여종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한 사건입니다. 그 발단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입니다. 아직 아들이 없는 두 분이,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와야 후손이 된다”(창15장)하심으로, 사라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74세된 사라는 해석합니다: “나는 아니구나!” 그리고, 당시 관습대로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자, 하갈은 잉태하였고 여주인을 멸시하게 됩니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였고, 하갈은 도망치는 중 광야 샘물 곁에서 야훼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분은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자손번성의 약속을 주십니다(창16장). 아브라함의 가정은 질서를 되찾았고 약속을 받은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를 섬겼습니다. 그 후 16년 간 사라는 남편의 사랑으로 그 고독한 순간들을 견디어 가나, 드디어 주님은 89세된 사라를 권고하사 이삭을 낳게 하십니다(창18장). 주님은 공평하시고 가장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그녀는 믿음의 영웅 중 한 분이 되었습니다(히11:10).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마가복음10:21절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들 하나를 갑자기 잃고, 다른 하나는 전신마비에 지체장애로 태어난 아들을 둔 부인이 삶의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보자 모임에 참석시킨 뒤, 거기에 임종을 기다리는 부와 명예를 얻은 80세의 부인도 초대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나는 백만장자와 결혼했지요. 재산이 넉넉해서 평탄한 삶이었어요. 사내들과 놀아나기도 하면서 한껏 살았지요. 하지만 이제 내 나이 여든인데 슬하에 자식 하나 없네요. 결국 내 인생은 실패로 끝난 것 같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다음 지체장애를 둔 그 부인에게 삶을 돌아보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제 인생을 돌아보니 평화롭네요. 난 아이들을 갖고 싶었는데 소망을 이루었어요. 비록 대책 없는 지체장애인 아들을 두었지만 난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해 그 아들을 돌보았어요. 내 인생은 실패한 게 아닙니다. 한 아들은 죽고 나머지 아들은 내가 돌보아야만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대로 난 내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온 셈입니다” 프랭클이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그녀의 삶에서 그녀만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부자 청년에게 그만이 성취할 수 있는 고유한 책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많은 재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심리학자가 발견 못한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내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딤전6:17,18)

마가복음10:21절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신자 A가 죽어 하늘나라로 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반갑게 맞아주신 뒤, A를 위해 만든 처소로 안내하셨습니다. 기쁘게 따라 간 A는 멋진 맨션을 지나 조그마한 오두막 집으로 인도되는 것을 보고 실망스러워서 집을 잘못 배정하신 것은 아닌지 따졌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계산기를 두드리신 후, 지금까지 네가 지상에 있으면서 하늘나라에 저축한 것들 갖고 그 집을 건축한 것이라 네 것이 틀림없다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교훈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천국을 잘못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궁금합니다. 도대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과 하늘에 보화가 쌓이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으며, 하늘의 보화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천국은 모든 것이 충만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샬롬의 세상이며, 거기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에서 대궐 같은 집에 살며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두막 집이지만 주님의 구원으로 인한 감사를 마음에 담고 영원히 즐거워 하는 삶입니다(사25:10).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보화”란 신자가 얻는 구원이며, 생명의 부활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구원 얻은 신자의 가장 큰 보물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아버지와 아들을 배워 가는 삶으로 ‘나를 따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난도 있고, 기쁨도 있으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제자도로서, 심리학자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잠언30: 24,25절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30:24-28절은 작지만 현명하게 생존해 가는 네 가지 동물(개미,사반,메뚜기,도마뱀)을 관찰한 결과입니다. ‘작고도’의 원어는 ‘작은’이란 의미와 ‘하찮은’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작고 하찮은 미물들이 가장 큰 생존의 지혜를 갖고 있음은 경이로운 신비이며, 앞선 10-23절에서 묘사된 인간의 어리석음 및 악행과 대조됩니다. 첫 번째 열거된 지혜로운 미물은 개미이며, 일찍이 솔로몬도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지혜를 얻으라”(6:6)할 정도로 개미는 매우 작고 하잘것없지만 앞날을 예견하고 준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즉, 여름에 겨울 양식을 준비하여 겨울을 지내는 곤충입니다. 또, 개미는 군락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함께 모여사는 인간과 유사합니다. 다만, 인간은 통치자가 없으면 질서가 무너지지만, 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열심히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기 때문에 그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잠6:7,8). 아굴이 개미를 언급한 것은 자기 힘을 믿고 앞날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 때문입니다. 이 잠언을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장차 도래할 영원한 심판을 준비하는 지혜를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함께 산 부자는 가진 재물로 호화롭게 살았지, 선행을 베풀지 못해 죽은 뒤 영원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눈을 들면, 세상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필요한 수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플랫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매일묵상(2024/7/1-5)

시편37:11절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바른 성서적 세계관을 통해, 페르샤 제국이 이스라엘 징계의 도구임을 깨달은 느헤미야는 제국의 수도 수산에서 왕의 신뢰를 받는 술관원이 됩니다. 비록 페르샤의 정책이 이방인에게 관대하였지만, 수산 궁에서 왕의 측근이 된 사실은 그의 성품, 실력 등을 짐작하고 남게 합니다. 성경에는 술관원에 대한 언급이 서너 군데서 나옵니다. “당시 왕의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을 비롯 왕의 음식을 맛보는 일과 왕의 침실을 맡아 보는 일, 그리고 경호하는 일까지 하기도 했다. 그들은 술을 선별하고 술잔을 올리고 독이 들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먼저 맛보았던 것은 물론, 유쾌하고 재치있는 왕의 친구였다. 따라서 직분상 왕의 최측근이며, 왕의 행정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래서 술 관원이 군사지휘관인 총사령관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동생 하나니로부터 우연히 예루살렘의 사정을 알게 되자, 자신이 가서 그 성과 거기 유하는 동포들을 위해 성벽을 중건하려는 생각을 갖고 기도하였습니다. 왕과 좋은 친구로 지내는 당대의 권력자 느헤미야가 1,400km 떨어진 변방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가려는 생각 자체가 소명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이웃 사랑’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소명을 갖고 있기에,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나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들은 영원히 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벽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성벽 중건을 단행하였다는, 주님을 사랑한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남아 있습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일:2:17,공동번역)

마가복음 10:15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공관복음서에서 전부 언급하는 관리이자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이어갈 만큼 가치가 있는 삶을 모색하던 중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 온 것입니다. 지금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장을 얻었고, 가정도 꽤나 안정되게 꾸려나가고 있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신망을 받는 지위에 올라 섰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자신의 삶이 도대체 무엇이며 삶은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를 묻는 것이 장년층 젊은이들의 두드러진 특성입니다. 칼 융은 일찍이 그러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옴짝달싹도 못하겠다’라는 말로 표현된 느낌을 갖는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진정한 사명감을 상실하게 되면 부와 권력을 갖더라도 삶은 공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예수님의 하신 첫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청년은 회당에 나가고 십일조를 바치며 성경을 읽는 것과 같은 예배 행위들이나,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윤리 행위들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그 대답으로 찾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십계명 역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청년은 계명에 초점이 있었지 그 계명을 주신 분과의 관계가 미흡하였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10:19)

마가복음10:20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청년에게 주님은 윤리 행위의 기준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사취 등의 금지와 부모 공경”(막10:19)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긍극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본질에 놓여 있는 것이지 단순히 개개 규범의 준수여부가 그 핵심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이웃에게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청년은 십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나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의식은 결여되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막10:21a). ‘사랑’은 도움을 주는 자가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자체나 인간관계에서의 변화는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젊은 부인의 말입니다. ”남편은 내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가정을 잘 돌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집안이 깔끔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나에게 생길 때에 비로서 가능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남편에게 알려 줄 수 있을까요?” 영생은 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 사랑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계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어진 말씀은 재물을 사랑하는 그의 존재를 흔들고 그를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10:21b)

잠언30:21-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21-23절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네 가지 행태(범죄)를 , 지진과 같은 물리적 격변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공통점은 무자격자가 합당하지 않은 지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먼저, ‘종이 임금된 것”에서, ‘종’이란 노비라기 보다는 자율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권세 있는 신하로서, 그는 기회를 엿보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당연히 국가와 사회의 질서가 격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예가 200년을 존속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군대장관들입니다. 이들에 의해 9번이나 정변이 일어났고, 9개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습니다. BC722년 앗시리아 제국은 북 왕국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유브라데 강 너머로 흩었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사에는 이런 반역이나 혁명 사건이 빈번하였는데, 평화적인 권력 교체 제도가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는 국민 투표를 통한 통치권력의 교체를 제도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대한민국도 그중 하나입니다. 또, 중국 공산당 독재가 보여주듯이, 가격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는 사상, 정보 그리고 물건의 흐름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체제에 잘 어울리는 경제질서입니다. 한국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습니다. 이는 2차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들 중 유일한 경우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잠언30:21-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두번 째 유형은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입니다. ‘미련한 자’란, ‘어리석은’ ‘무감각한’ ‘분별 없는’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발’의 번역이며, 단순한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신32:6). ‘배부른’의 원어 ‘이세바으 라헴’을 직역하면 ‘떡으로 만족하다’이며, 여기서는 ‘재물의 풍성’을 나타냅니다.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가 부를 얻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어야 사회는 안정되고 번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분별 없는 악한 자가 많은 재물을 얻어 풍족하게 되면 사회 질서는 크게 흔들립니다. 사회 질서가 흔들리면, 게으르고 악한 자들은 더욱 교만· 방탕하게 되고, 지혜롭고 정직한 방법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는 많은 이들은 낙담하여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도덕이 결여된 사회는 범죄로 들끓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다윗이 피신하던 시절 갈멜의 거부 ‘나발’은 다윗이 양떼를 지켜주었지만 오히려 멸시하였습니다. 분노한 다윗이 그를 죽이려고 올라갈 때 아비가일의 영접을 받고 뜻을 돌이켰습니다. 나발 한 명을 제거한다고 악한 인간 본성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과 주님의 모범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계명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