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2/10-1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로마서16:3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교회는 로마의 자생적 가정 교회 중 하나인데, 오순절,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의 전도를 듣고 믿은 자들이 로마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한 결과로 보여집니다. 목포 지역도 한국인의 자주적 선교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도착 전, 몇몇 목포 사람은 서울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아들였고, 한국인 전도자 변창연은 선교기반을 닦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편, 남장로회 선교부는 1896년 양동에 2,500평 땅의 구입을 시작으로 부지를 계속 넓혀 갔고, 1920년대에 이르면 양동 일대 1만4천여 평을 보유합니다. 양동 땅은 애들이 죽으면 몰래 와서 파묻는 ‘죽은 자의 땅’이라, 선교부는 헐값에 구입하여 언덕 꼭대기에 ‘양관(洋館)’을, 언덕 서쪽에 정명여학교를, 길 건너 서쪽으로 영흥학교(남자)를, 그 아래로 양동교회와 목사 사택을 지었습니다. 동쪽 길 건너 호남동 언덕엔 ‘프렌치병원’과 목포 고등성경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양동 언덕 일대의 ‘선교사촌’은 목포의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버려진 땅’이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물결을 타고 서구 근대화 문명이 목포 시내로 퍼져 나갔습니다. 복음은 쓸모 없어 버려진 목포 양동 땅을 생명과 근대 문명의 발원지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인간 존재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1)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신분상의 변화와, (1)신자 안에 성령께서 오심으로 일어나는 인격 상의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전도서2:9절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9절은 솔로몬이 사업과 쾌락의 추구 결과를 요약합니다. 앞의 “창성하여”의 원어는 ‘위대하게 되다’를, 뒤의 ‘창성하니’의 원어는 ‘풍성케 되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솔로몬은 사업에서 크게 성공함으로, 부귀와 권세는 풍성하게 되었음을 표현합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라는 표현은 세 번째  나오는데(1:16; 2:7), 솔로몬 자신의 사업적 성공을 강조합니다. 흔히, 성공을 맛보거나 쾌락에 탐익하면 삶의 중심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솔로몬은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는 표현을 통해 자신은 그런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말합니다. 솔로몬의 탐구는 창세기에 천지만물을 차근차근 만들어 내시면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여러 즐거움, 웃음, 술 등으로 쾌락을 시험해 보았고, 집과 포도원을 세우고. 동산, 과원, 삼림을 만들고, 각종 과수와 나무를 심고 못을 파고, 가축을 많게 하고, 남녀 노비를 증가시키고, 노래하는 남녀와 수 많은 처첩 등을 두는 등 사업과 쾌락을 하나 하나 탐구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댜. 결론은, 크게 실망하여, 자신을 위해 한 모든 것이 “무의미하여 바람을 잡는 것 같았다” 고백입니다. 그 반면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자 ‘심히 좋으셨다’고 말씀하시며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솔로몬과 같이 자아실현을 위한 실험정신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그의 결론은 소중히 간직되야 합니다. “내가 알기에, 살아 생전에 행복하고 선을 행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전3:12,쉬운성경)

전도서2: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쾌락주의’(헤도니즘)는 개인의 즐거움과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철학입니다. 쾌락은 인간 본능에 속하여 인간이 무시하기는 어렵지만, 일시적 감정일 뿐입니다. 감정은 사라지면, 더 강렬한 자극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계속적인 쾌락의 삶은, 개인의 발전은 없고 육체적,정신적, 도덕적 타락을 가져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적 삶이므로, 쾌락 중심의 삶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지혜자 솔로몬은 결코 쾌락주의에만 몰두하지 않고, 자아성취까지 도모합니다. 쾌락과 즐거움은 오직 그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물질적 업적과 쾌락 추구 과정을 요약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도서는 끊임없이 전도자(솔로몬) 자신을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일인칭 대명사 ‘나’가 일곱 번이나 등장합니다. 전도자의 자아 의식인 ‘나’라는 자아 존중 사상이, 전도자의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에게 ‘주님을 경외하라’는 지혜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하고(엡2:1-3),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쫓게 되자, 하나님의 뜻은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솔로몬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시하자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자가 되기 전에도 자신의 지혜를 우상화한 자였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1:22)

역대하12:13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르호보암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더라”

다윗과 암몬 왕 나하스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나하스의 아들 하눈은 다윗을 모욕함으로 다윗과 전쟁하다가 패배하여 속국이 됩니다(삼상10:19).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전쟁과정에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러 주님 앞에 큰 죄를 범합니다.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의 가정을 파괴한 것입니다. 다윗은 용서 받지만, 벌을 면제 받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벌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르고, 다윗은 길르앗(암몬과 경계지역)으로 피신합니다. 이때 암몬 왕 나하스의 아들 소비의 도움을 받습니다. 암몬 족속과 다윗 가문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모친에 대하여는 침묵하지만, 다윗의 조카 요압을 스루야의 아들로 소개하면서 단서를 제공합니다. 스루야와 다윗의 아버지는 나하스와 이새로서 서로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복의 관계입니다(삼하17:25; 역상2:16). 스루야의 부친 나하스가 죽자, 나하스의 아내가 이새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다윗으로 추정됩니다. ‘나하스’는 ‘뱀’이란 의미이고, 이미 암몬 왕들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기에 다윗의 모친이 암몬 여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다윗의 증조모가 모압 여인 룻이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입니다(룻4:22; 왕상11:1). 성경은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의 교훈을 버릴 염려 때문에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하나, 때때로 순종하는 이방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자격을 갖추도록 섭리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디모데전서4: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김상복 목사님은 「하나님이 꿈꾸신 가정」이란 책에서 “인간관계는 단 한 가지만 훈련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라고 합니다. 그 한 가지란 무엇일까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훈련입니다. 성경은 도처에 모범 사례가 증언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당신을 반역하여 멀리 떠난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주심으로 세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체포되어 심문과 구타를 당하는 당신을 저주하면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뒤 제일 먼저 찾아가셨고, 사도의 사명까지 재차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은혜를 가슴에 담고 목숨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박해하는 원수 사울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고 하늘에서 당신을 보여주사 사울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은혜를 각인시켰습니다.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주님의 그 은혜를 갚으려고 목숨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의 실행은 오직 은혜를 담은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당신의 아들을 따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경건,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훈련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러나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명령은,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 그리고 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매일묵상(2025/2/3-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 16: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전라도를 선교지로 할당 받은 남장로회는 목포 양동 언덕의 땅 2,500평(51달러)을 구입하였지만(1896.2), 개항장 선정은 지연으로 선교부는 나주에 먼저 설치되었습니다(1897.5). 나주 사람들은 기독교에 배타적이어서 선교부는 3개월 만에  폐지됩니다. 이와 별개로 선교부는 조사 변창연을 보내어, 양동 땅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1897.3). 복음에 대한 반응은 나주보다 좋았습니다. 양동교회는 1년 만에 50명의 신자를 얻고, 1년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1897. 10월 마침내 목포가 ‘개항장’으로 공시되자, 선교사 벨과 오웬, 여선교사 스트레퍼가 내려왔고 선교사역은 본격화 되었습니다(1898. 11). 벨이 변창연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시작한 것이 목포 양동교회의 태동입니다. 의사 오웬이 진료소를 세우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프렌치병원’의 출발입니다. 스트레퍼가 길거리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데려다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의 모태입니다. 교회-병원-학교로 이루어진 삼각 선교 전략의 효과는 컸습니다. 1978년 남장로회 선교부가 땅과 건물을 한국 교회에 이양하고 철수하기까지 목포 양동 선교부는 80년 동안 목포와 남부 섬 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선교의 모범적 사례입니다. 복음 속의 진주는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양동 선교부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한국 교회에 제대로 심어 주었다 하겠습니다.“이처럼 내가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열심히 일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십시오.”(행20:35,현대인의성경)  

전도서2:7절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솔로몬은 여러 형태로 노비를 소유하였습니다. 통상 노예는 전쟁, 매매, 채무, 혹은 집에서 낳게 하여 획득했습니다. 모세 율법 중 종이 된 동족 이스라엘 사람 대한 규정은 독특합니다. 이들은 6년만 일하고 7년 째는 아내와 함께 해방되지만 자녀들은 여전히 종의 신분입니다(출21:4). 집에 낳은 종들은 다른 종들보다 훨씬 주인에게 대접을 받았고 충성심도 컸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낳고 기른 종들(318명)만 인솔하여 조카 롯을 구한 것이 그 예입니다. 후단은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다”고 언급하는데,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에서 소 22,000마리, 양 120,000마리를 제물로 드렸고(왕상8:63), 매일 소 20마리, 양 100마리를 식탁에 올렸다(왕상4:23)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말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왕은 군마를 많이 두지 말라’는 규정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신17:16). 요세푸스는 솔로몬 왕이 수천 대의 병거와 이만 마리의 말을 소유했으며, 기병대들과 함께 예담에 있는 자신의 ‘낙원’으로 가서 즐기곤 했다고 하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세 율법은 왕은 아내와 군마를 많이 두지 말고, 군마를 사려고 백성을 애굽으로 보내지도 말라고 규정하였으나(신17:16,17), 그는 무시하였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 같이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에 속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시고, 통일왕국을 남북으로 분열시켰습니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잠언21:30)

전도서2:8절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8절은 ‘은 금..보배’와, 쾌락의 대명사인 명창, 처첩을 논합니다. “나를 위하여 쌓고”의 뜻은 주의해야 합니다. 솔로몬에게 재물과 쾌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무역과 조공을 통해 ‘은,금’을 획득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은이 돌같이 흔하였을 정도로(대하1:15), 솔로몬의 금은보화는 막대하였습니다. ‘보배’의 히브리어는 ‘특별히 값나가는 재물’을 의미하는데, ‘보배’ 앞에 ‘왕들이 소유한’과 12지파를 의미하는 ‘여러 지방’이란 문구로 수식되어 있습니다. 이는 솔로몬의 막강한 권세를 표현하지만, 솔로몬의 권력의 핵심에는 그의 탁월한 지혜에 대한 존경심이 놓여 있습니다. ‘솔로몬의 소프트 파워’입니다. 후단의 ‘노래하는 남녀’들은 흥을 위해 궁정 음악을 전담하는 자들의 양성을 말합니다. 예전 인사동에서 명인이 나와 북을 치고 기타 여러 가지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식사한 기억이 납니다. 솔로몬이 많은 신하들과 매일 식사할 때 공연시킨 음악과 무희들의 춤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이요, 첩이 삼백이라’(왕상11:3) 도합 일천 명의 처첩을 두었습니다.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신17:17)는 모세율법은, 이방풍습을 따라 왕권안정을 도모한 솔로몬을 세상적 성공만을 이룬 평범한 왕으로 규정합니다. 솔로몬의 지혜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요소가 사라지자, 그의 지혜는 세상 지혜의 전형은 전락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롯의 자손 암몬
신명기2:19절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암몬(수도 ‘랍바’)은, 제라쉬 같은 고대 유적지나 성경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만 알려졌습니다.  암몬 족속은 롯의 후손이며 얍복 강에서 사해 동편의 아르논 강 지역까지 퍼져 농사짓고 살았으며, 북서 셈어와 문화를 공유하였습니다. 사해와 요단 강 동쪽을 지나는 ‘왕의 대로’가 통과하는 땅이라, 그 지역 경제와 문화적 교류는 활발하였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암몬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면, 두 민족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압과 암몬의 영토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은 암몬 땅 서쪽의 아모리 족속 땅만 정복합니다(신2:19-20). 이것이 내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암몬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아모리 족속의 땅은 자신들이 빼앗긴 영토입니다(삿11:13). 영토분쟁은 필연적입니다. 두 민족은 사사시대 초기부터 충돌하였고, 모압 임금 에글론이 암몬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최초의 기룩입니다(삿3:13). 수백년 후 다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길르앗의 큰 용사 입다’가 암몬과 싸워 길르앗 땅을 지킵니다(삿10-11장). 세상의 권리는 항상 분쟁의 여지가 상존합니다. 누가 정당한 권리자일까요? 입다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쫓아내시고 우리에게 주신 땅은 우리 것이다!”(삿11:24). 암몬과 이스라엘은 모두 데라의 후손입니다. 차이는 육신이 아니라 영적이며, 그 기준은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잠언 3: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우영숙 남은영이 한국인 2천명에 대한 설문조사 내용입니다.
「질문 ‘누가 높은 지위와 경제적 부를 가져야 하는가?’  
1. 실적이 많은 사람 2. 많이 노력한 사람 3. 타고난 능력이 많은 사람 4. 자신의 필요에 따라 5.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조사 결과: 58.5%(2번), 24.6%(1번), 5.9%(3번), 4.9%(4번),3.6%(5번)
위 조사는, 한국인들은 노력과 실적을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꼽고, 실적 보다 노력을 더 중시함을 보여 줍니다. 노력이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실적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재능과 환경 등 여러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노력과 훈련’은 성공에 얼마나 기여할까?” 잭 램브리 교수는 ‘노력과 훈련’이 성공에 미치는 기여도를 밝혀냈습니다: 게임분야- 26%, 음악- 21%, 스포츠- 18%, 학업-4%, 전문직–1%미만(엔지니어, 축구심판, 영업직 등). 이를 보면, 노력과 공부를 잘 하는 사이에는 거의 관계가 없고, 전문직은 더 심해 성공에 미치는 노력의 영향은 1%라는 아주 미미한 값을 보여줍니다. 타고난 재능과 환경의 중요성에 주목할 때입니다. 김영훈 교수는 「노력의 배신」(2023)에서, 나 자신의 책임에 돌릴 수 없는 ‘운’에 속한 영역이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침을 밝히고, 노력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한국 사회를 ‘노력 신봉 공과국’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재능을 발견하여 성장시키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도덕성(정직성) 함양이 중요합니다. 꽃 피운 재능은 정직과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선을 낳기 때문입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8)

매일묵상(2025/1/20-2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목포는 이별과 한과 눈물과 설움이 스며든 땅이다. 영산강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곳, 예로부터 고기 잡고 장사하는 뱃사람들의 터전이었기에, 억양이 높고 발음이 강하다. 목포 사람들은 대개 남쪽섬에서 올라와 정착했거나,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조선 시대에는 목포와 그 남쪽 진도, 무안, 신안, 해남, 강진 땅은 유배지로서, 양반 귀족들의 후손들이 많다. ‘양반 의식’과 ‘정치적 한’이 묘하게 어울려 자존심과 저항을 담은 민중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이덕주, 15,16 요약). ‘나그네 땅’ 목포의 특질을 보여줍니다. 목포는 나주 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여서, 복음은 선교사 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남장로교 선교사 에리놀즈와 드루가 선교 지역 탐색 차 전라도의 여러 지역을 거쳐 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 후, 선창가에서 전도할 때 “서울 남대문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되었다”는 목포 사람을 만난 기록이 그것입니다. 뱃길을 따라 들어온 것이죠! 그럼에도 선교사들이 목포에 정착하는 과정은 복잡했습니다. 개항장 선정 결정의 지연도 그 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지역적 특색과 떨어져 수용되거나 전파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실례입니다. 주님이 갈릴리 지역을 주로 전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인과 섞여 살고 오랜 역사를 거쳐 자주 침략을 당한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 보다 복음의 수용도가 높았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지역에 관해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2:5절
“나는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다.”(새번역)

본절은 4절에 이어 솔로몬의 구체적 사업의 면모를 기술합니다. ‘정원’의 원어 ‘깐노트’는 담이나 울타리를 둘러 외부로부터 보호, 격리된 뜰을 의미합니다. ‘과수원’의 원어 ‘파르떼스’는 열매 맺는 과수와 귀한 식물들이 있는 큰 공원 단지를 지칭합니다. ‘정원과 과수원’ 단지를 만든 목적은 솔로몬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습니다. 솔로몬은 그것들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어’ 경제적 유익을 거두면서도, 각종 꽃나무와 향나무를 갖추어 매우 아릅답고, 솔로몬의 창의성이 돋보였을 것입니다. 유홍준 박사는 정원의 돌을 놓는 법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질서의 일본인들은 10 개의 돌 중 9개는 반듯하고, 1개만 자연스럽게 놓고, 개성의 한국인들은 1개만 반듯하고 9개를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민족성이 드러나 있다.” 왕 솔로몬과 함께 그곳을 거닐었을 사람들(처첩들, 신하들)의 기쁨과 탄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후단의 ‘온갖 과일나무’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창2:9), 인간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였음을 뜻힙니다. 예로부터 왕들과 부자들은 좋은 정원을 조성코자 하였기에, 이 같은 정원을 만든 사람은 솔로몬뿐 아닙니다. 고 구본무 회장도 화담숲을 조성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습니다. 자연생태계도 보존하고 시민들은 휴식을 누리게 되어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행한 것이라 보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다면 이런 것조차 허망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2:11).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전도서2:6절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삼림’이란 ‘야아르’의 번역이며, ‘기름지고 무성한 삼림’을 의미합니다. ‘나무들’을 뜻하는 수목은 각종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과 여러 귀한 수목들을 포함합니다(5). 제가 20년 전 미국에 거주할 때 미국의 집들은 통상 과일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마트에 맛 있는 과일이 많았으며, 과일은 익어도 수확이 곤란하며, 새와 벌레들이 모이고 잔디에 뗠어지면 썩어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풍부한 미국인의 삶을 드러내는 일면이나, 팔레스틴 지역 특히 고대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각종 과목은 전쟁 시에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고(신20:19,20), 모세 또한 가나안 땅을 탐지시킬 때 토지의 비옥과 메마른 나무의 유무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지금의 산업 사외와 달리 농경 사회에는 토지의 후박, 수목의 유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민13:20). 비옥한 토지, 울창한 삼림, 풍성한 열매 등은 물을 요구하는데, 공급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팔레스틴에서 철 따라 내리는 비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 준수와 비의 축복을 결부시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장치하셨습니다(레26:4). 비가 순종에 의존하자, 솔로몬은 못들을 파서 자신의 삼림들에 항시 물을 공급해 무성하게 만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지혜이나, 인간의 성공이 하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그렇게 미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제자들은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합니다(시119:99).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두라 유로포스 유적지」
사도행전 9: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주후 1세기 경 다메섹에는 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았고 회당과 교회는 공존하였습니다. 비록다메섹과의 거리는 멀지만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발굴된 ‘두라 유로포스’가 그 증거입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AD257년 사산 왕국에 의해 폐허가 되어 약 1700년 간 잊혀졌으나(AD257), 1920년 참호를 파던 영국군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유적들이 발굴되었으나, 주후 2세기 경 건축된 회당과 교회의 유적이 중요합니다. 회당과 교회는 모두 진흙 벽돌로 지은 가정집을 종교 건물로 개조한 것입니다. 벽면들은 성경 이야기와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했으며, 거리도 가깝고 건축 구조도 유사합니다. 차이 점이라면, 벽화의 내용입니다. 회당 벽화는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예루살렘 성전, 에스더서 등을 표현하였지만, 교회 벽화는 예수의 기적이 주요 주제였습니다. 이 교회는 발굴된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초대 가정교회의 시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박해자 바울의 회심과 그로 인한 복음이 시리아에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은 회심 후 3년을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전도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만 만난 뒤, 길리기아 다소 성으로 되돌아 갑니다(갈1:15-21;행9:23-30). 바울은 바리새인이요 랍비로서, 이미 구약에 정통한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였고 이방 선교를 개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1:22-24)

에베소서 4: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선과 화평을 만들어 내는 노동자”입니다. 목적은 화평한 의요, 방법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약3:17). 노동자(일꾼, 품꾼)는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과 보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일은 영적이며,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증거’를 지킴이 그 핵심입니다(계14:12). 도성인신 하신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일의 방식은 세상과 뚜렷히 구분됩니다. 세상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잘못을 숨기고자 하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행을 숨기고, 잘못은 고백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관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세상은 창조주를 부인하니 인생을 명예, 재산, 권력 등 육신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만물의 주관자를 믿고 알기 때문에, 던져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보상 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미 영생을 갖고 있습니다(요5:24), 보상은 하나, 주님의 칭찬입니다(마25:23).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 가족, 친구, 사업 등에 때때로 불이익을 당하곤 하지만 낙망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과 도우심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자들입니다(마6:11).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란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5:5)

매일묵상(2025/1/13-17)


마태복음 5: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입니다. 그는 걸을 때마다 발에 가해지는 심한 통증으로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수 킬로 떨어진 작업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작업량은 많았으며 배급 식량은 적었습니다. 프랭클은 “오늘 밤 무엇을 먹게 될까?” “아껴둔 담배 한 개비로 스푸와 바꿀까?” “다른 작업반에 끼게 되었다가 짐승 같은 감독이 있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억지로 돌려 자신이 불이 환히 켜지고 아늑한 강의실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의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먼 관점에서 보고 말하게 되었고, 그 자신과 그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흥미로운 정신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정신분석학자로서 수용소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세상을 볼 때의 과정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열매 맺을 때까지 믿음으로 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주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5:5). 애굽 시위대장에게 종으로 팔린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물음을 이끌고, 그 물음은 소망과 신실한 삶을 낳습니다. 빅터 프랭클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요15:9).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전도서2:4절(1)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전도자는 지혜와 쾌락 추구의 조화를 시도하다 무의미를 발견하고(3), 본절부터 “성공을 쫓는 삶”을 묘사하며 그 얻은 결과(허무함)를 토로합니다(4-11). 인생이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도외시 하면 율법의 목적인 ‘이웃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고, 이것은 더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이루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쫒는 삶’ 즉, ‘자아 실현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장 고상하게 여깁니다. 전도자 역시 쾌락 다음에 시도한 삶이었으나, 큰 성공도 헛됨을 체험합니다(2:11). 솔로몬은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는 고백으로 4절을 시작합니다. ‘크게 하였노라’는 대목은 왕 솔로몬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노력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크게 일으켰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대표적인 사업은 집들, 포도원, 여러 동산과 과원, 각종 과목을 심고, 못들을 파고, 남녀종들을 얻고, 은금을 축적하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을 많이 둠으로써, 자신의 부, 존귀, 권세를 과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여러 번 반복됨으로 “하나님을 위한”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방법 또한 정당해서 자기를 중시 하는 세상적 관점에서는 책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하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개인주의적인 성공을 추진하고 성취하였으나, 자신조차 참된 만족과 의미를 얻지 못하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전도서2:4절(2)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솔로몬은 왕궁, 바로의 딸을 위한 건물, 그 밖의 많은 건축물을 지었는데(왕상7:1-8), 스바 여왕의넋을 뺏았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4,5). 솔로몬은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 등도 건축하는 등, 계획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다 건축하였지만(대하8:3-6), 그의 성공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중한 노역이 있었음을 볼 때, 솔로몬의 건축 사업은 지나쳤습니다. 결국 ‘중한 노역’은 솔로몬 사후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도원을 일구며’란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 농업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은 먼저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며, 잡목이나 돌로 울타리를 만들며,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짓고, 포도주틀을 만드는 작업 등이 포함됩니다. 대략 10년이 걸리니 쉬운 일은 아니나, 중요한 산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포도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 왔습니다(왕상21:3). 왕 아합 시대의 나봇도 애써 좋은 포도원을 가꾸었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탐욕 때문에 죽게 됩니다. 포도원으로 상징되는 재물과 번영은 좋은 것이나, 나봇과 그 가족의 목숨을 가져갔으니 헛되다 하겠습니다. 솔로몬도 포도원 사업을 성공시켰지만 자신을 위해 만든 많은 포도원들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필요를 넘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죠! 모든 사람은 삶의 기반을 닦아야 하나 그 당위성이 탐욕으로 이끄는 것을 보면 멈추어야 합니다. 탐욕은 달성되어도 삶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우리의 경제적 삶에 많은 가르침을 준다 하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전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18:23절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아람의 신들 중 ‘하다드’는 구약 시대에 근동지역에 바알처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윗과 싸웠던 아람 소바의 임금 하닷에셀(하다드는 도움)이나 아합을 괴롭힌 아람 임금 벤하닷(하다드의 아들)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초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의 신들을 섬겼습니다(삿10:6). 고대 근동 지역은 농업사회이므로 비의 신은 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다드는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일반적으로 한 손에는 번개, 다른 손에는 철퇴를 갖고 있으나, 황소의 형상도 자주 발견됩니다. 당시 신화를 보면, 최고의 신이 된 하다드는 바다의 신 얌(yam)을 이겼으나, 죽음의 신 못(mot)에게 죽자 온 세상은 메마르게 되고, 결국 그를 되살립니다. 아람 사람들은 하다드가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여름이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비가 오는 겨울이라 믿었습니다. 시돈과 두로 지역에서는 바알을 비의 신으로 숭배하였기에 하다드와 바알을 동일하게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은 바알 곧 하다드에게 제사 지냈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수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누가 비를 내리는 신인가를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내기를 하였고, 바알 곧 하다드 신의 제사장들과 겨루어 이겼습니다(왕상18장).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전쟁, 영적인 전쟁터로 부르심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과 다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하고 노력해야만 하나, 성령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느헤미야 13:31절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1979. 12.12 사태는 신군부가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킨 사건이며,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은 고인이 되었으나 역사의 평가는 엄중합니다. 비시 444년 느헤미야는 페르샤 황제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신군부와는 절차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그는 페르샤 왕의 술관원으로 봉직하다가 유대 땅에 일어난 비참한 사건들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하는 중 응답받아, 적법하게 유대 총독으로 부임합니다(적법절차). 총독으로 부임 후 많은 반대에 직면하나, 짧은 시일 내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예루살렘의 치안은 물론,  모세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확립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였고, 토지도 사지 않고(no 축재), 총독의 녹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식탁에는 매일 150명이 넘는 많은 동족을 초빙하여 위로하고 민정에 신경을 썼습니다. 경천애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의 속마음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상을 욕망하였습니다(13:22절과, 13:31).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소원이 자발적 희생으로 이끈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그 맡은 임무를 다한 느헤미야의 선행을 드러내시고 칭찬하시며 영생으로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주를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받을 보상이며, 생명의 부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매일묵상(2025/1/6-10)


고린도전서15: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엘리자베스 로스는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로스 의사는 몇 해 전 병원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중환자실에 갈 때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담당 의사인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복도에서 청소하는 그 아주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도대체 내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죠?” “그냥 병실을 청소할 뿐이에요” 그 말을 들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유를 몰랐으나, 3주 정도 지나 깨닫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는 몇 해 전 여섯 아이 중 하나를 잃었습니다. 응급실로 가서 의사가 오기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폐렴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가끔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면 환자들이 몹씨 겁에 질려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다가가 그들을 쓰다듬으면서 나도 죽음을 보았는데 죽음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냥 함께 있어 줍니다….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러면서 로스는 사랑이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며 돌보아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로스는 비그리스도인입니다만, 호스피스 환자들과 같은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인간이 그 이상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면 영생이 있음과 그 영생이 우리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혜자라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 특히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전도서 2: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1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2절은 그 ‘쾌락’를 ‘웃음’과 ‘희락(=쾌락)’으로 나눈 뒤, 전자는 ‘미친 것’으로 후자는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웃음’과 ‘희락(=쾌락)’이란 두 단어는 성경에서 교차해 사용되나, ‘웃음’은 피상적인 기쁨을, ‘희락’은 좀 더 진지한 기쁨을 표시합니다. 이같은 뉘앙스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나 즐거움은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취지를 말합니다. 잠언은 ‘웃음’과 ‘희락’의 추구가 종종 ‘슬픔’과 ‘근심’을 숨기기 위함임을 지적합니다(잠언14:13). 게임, 술, 마약, 도박에 빠져 사는 현실도피의 삶이죠! 따라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그 삶에 있는지 파악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전도자의 충고를 따르려면 웃음과 쾌락 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직업을 갖고 우리 손으로 수고한 만큼 벌고 그 한도에서 살려는 태도입니다. 경건한 삶의 기초가 여기 있습니다. 경건한 삶에도 당연히 즐거움과 웃음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웃을 때가 있다’(3:4)고 선언합니다. 다만, 바보와 현자의 경우, 웃고 즐거워 하는 시기와 대상에서 차이가 납니다. 바보는 악을 행함으로(부정축채, 더러운 농담 등), 현자는 지혜(선행과 덕을 세움 등)를 행함으로 웃고 즐거워 합니다(잠10:23).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웃음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전도서2:3절(새번역)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도자는 삶의 의미 혹은 유익의 원천으로써 쾌락(즐거움)을 구체적으로 탐구합니다. 시작은 가장 감각적인 것, 즉 술입니다. 전도자는 짧은 인생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지 방탕에 몰입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툼이 있으나, 술과 관련한 실험에서 전도자는 품위를 유지하였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그래서, 루폴드는 “전도자는 술을 방탕한 자가 아니라 감정가로서 탐구했다”고 강조하는데, 근거는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개정개혁)라는 부분입니다.” 다만,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개정개역)라는 표현을 보아 전도자가 술중독은 아니지만, 술에 자신을 맡겨 본 경험은 가져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잠언은 ‘어리석음’을 지혜의 반대로, 전도서에서는 ‘악함’(7:25)의 동의어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세상이 정의하는 쾌락을 탐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지 보려고 술잔의 바닥까지 비어 본 것입니다. 물론, 그 실험은 무의미로 귀결됩니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삶에 대한 세상의 답은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의 상징인 ‘술’에 대한 탐익은 ‘절제’를 요구하시는 성령님의 뜻에 거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 하고,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성령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5:18,새번역).

사도행전13:1절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의 지도층은 출신과 지역이 서로 다른 5명입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 레위인이고, 시므온은 흑인인데, 그의 별명이 ‘니게르’(라틴어 ‘검다’)이기 때문입니다. 루기오는 북아프리카(현 리비아 지역) 출신의 로마인으로 보이고,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 분봉왕과 함께 자란 인물로 높은 지위의 귀족입니다. 사울은 튀르키에 남서쪽 다소라는 큰 도시 출신의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방 선교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성령께서 이들 중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여 사도로 소아시아 지역에 보내 본격적인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후 교회는 이 모델을 따라 준비된 일꾼들을 각 나라와 지역으로 파송하였고, 1800년이 지나자 조선에도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으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겪었던 출신과 신분 사이의 갈등을 함께 겪었고, 이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해결해 왔습니다. 제1차, 2차 대전을 겪고 비로소 깨달은 앙리 베르그송처럼, 지금 대한민국은 인간이 만든 법률 보다 상위의 가르침, 즉,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웃 사랑)을 배울 때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주님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만민을 포용하고 화목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말론적 실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는 그런 갈등을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 해결한 역사 그 자체이며, 그리스도의 법의 가장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연동교회의 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갖바치(가죽신 제조) 천민 고찬익(1857)은 자신의 신분을 비관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중, 선교사 게일에게 전도 받고 회심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일화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받은 그날, 고씨는 꿈에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움에 “고…고…고”라고만 대답하자, 다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에, “내 이름은 고가이고, 싸움꾼, 술꾼에 망나니올시다. 뉘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울며 대답합니다. 그때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고씨의 몸을 치면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하고 사라집니다. 고씨는 꿈에서 깨어나 전도지를 또 읽고 게일을 찾아 갔고, 주님을 영접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게일 선교사는 고씨에게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찬익 贊翼’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1896년 무어 선교사는 천민 거주지인 종로 5가 부근에서 연동교회를 창립하고 1900년 게일 선교사가 담임 목사를 맡습니다. 고찬익은 조사로서 갖바치, 백정 등에게 전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1905년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의회가 열렸습니다. 교인들은 양반이 아니라 천민 고찬익을 첫 장로로 선출하였습니다. 일부 양반들은 교회를 떠났지만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천 이백석 되는 예배당까지 신축하였습니다(1908). 세상을 떠났을 때(1908), “고찬익 장로는 한국에서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게일 선교사)으로 평할 정도로 그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매일묵상(2025/1/2-3)


누가복음13:13절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본문은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보시자 그를 앞으로 불러내 고치신 장면입니다.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나 회당장은 안식일을 강조하여 주님의 행위가 제 4계명을 깨뜨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관점과 생각도 다채롭습니다. 인생이란 어떤 관점을 갖고,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형형색색의 철학이 등장하나, “만유의 주님이 통치하시므로, 너는 잔꾀를 부리지 말아라”는 잠언의 핵심적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섭리 가운데 다스리면서, 사람들, 특히 하나님 백성의 대화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선지자 말라기는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 (말3:16,새번역)고 밝힙니다. 말이란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터져 나온 결과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첫걸음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 경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우리의 삶이 다시 세상을 비취어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해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고린도후서2: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요셉 시주(Joseph R. Sizoo)는 그의 책 「우리는 아직 소망할 수 있다, Still We Can Hope 에서 “우리는 원자의 신비를 파악했지만 산상수훈을 거절했다. 우리는 지혜없이 놀라운 일을 그리고 양심없이 힘을 얻었다. 우리는 핵에 관한한 거인이 되었으나 도덕에 관한한 어린아이들이다.” 고 한탄합니다. 인류는 양자역학을 알자 곧 바로 멸망할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지식의 나무가 아담의 마음을 드러낸 것처럼, 원자에 대한 지식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이 악한 마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마치 향수와 같습니다. 방안에 향수병을 놓으면 필연적으로 향기가 나지만, 반응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싫어합니다만, 누구도 향수 냄새가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와 아이 성을 멸망시키자, 그 소식은 가나안 땅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그러나 아모리 족속 다섯 왕은 연합하여 대적하였고, 기브온과 그 인근 3도시는 항복하였습니다. 전자는 멸망당하였고 후자는 생명을 살렸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취할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담당하겠습니까? 복음의 제사장들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 받을 유일한 방법은 마음에 악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매일묵상(2024/12/30)

(2024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시편23:5절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새번역)


벌써 2024년이 저물고, 2025년이 다가왔습니다. ‘매일묵상’은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서 출발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지혜입니다. 2024년을 되새겨 보고 우리가 연초에 계획한 것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감사한 것들과 회개할 것들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나 계획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국가에 대하여도 같습니다. 연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혼란이 대한민국의 정치를 강타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잘 정리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특히, 어제 무안공항의 대참사로 무려 179명의 탑승객이 사망하였습니다. 재발방지와 유가족 위로를 위해 주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끝맺음은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입니다. 2025년은 나만의 좋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도록 마음에 다짐하고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언3:6,새번역).

매일묵상(2024/12/23-27)


마태복음1: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나는 평생 낡은 트럭만 가지고 있어서 항상 새 트럭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소원을 이루자 이런 일이 있다니…” 해튼 씨는  빨간 색의 새 트럭을 샀지만, 바로 병원에 가서 결장암 수술을 받았고, 간호사인 로버타 메스너는 한 주에도 몇 번씩 방문하며 돌보았습니다. 둘은 자주 트럭에 앉아 그들의 믿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해튼 부인이 혼자 남게 되는 것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대화 후 로버타는 부엌으로 가서 해튼 씨의 상황을 알리면서, 해튼 부인이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해튼 씨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점점 더 평안을 얻었습니다. 해튼 씨의 병세가 악화되어 로버타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몸을 기울이자,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면서 내게 손을 내밀고 계세요. 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거예요” 속삭였습니다. 그날 저녁 해튼 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호사 로버타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방부제 가득한 병실에서 해튼 씨를 만났다면, 그의 진정한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현재 있는 곳에서 만나야 한다.” 이것은 주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21-27쪽, 참조)

「빈 구유」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성탄절이 끝난 직후, 앨리스는 남편과 세 자녀와 함께 성탄절 장식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남편 잭은 큰아들 네이트의 도움을 받아 트리를 치웠고, 사라는 다섯 살 된 둘째 아이 나탈리의 도움을 받아 예수 탄생 장면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사라와 나탈리가 부서지기 쉬운 인형을 조심스럽게 포장하는 동안, 나탈리가 외쳤습니다. “누군가 구유 속 아기 예수님을 훔쳐 갔어요!” 생각해 보니 이 번 성탄절은 주인공되신 예수님은 도난 당하여 사라졌고 빈 구유만 축하하였던 것입니다. 범인이 누군지 대략 추측이 갔지만, 남편 잭은 맏딸 사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음, 아기 예수님이 올해는 상자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가 봐.” 라는 말을 하며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 앨리스의 집에서 일어난 ‘빈 구유 사건’은 우리 믿음 생활을 되새겨 보도록 합니다. 매년 12월 25일이 되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즐거워 합니다. 성탄절 음악, 맛 있는 음식들, 포장지로 싼 선물, 그리고 캐롤을 즐깁니다만, 정작 중요한 성탄절의 의미는 잃어버립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마음에 간직한다면, 성탄절의 메시지는 연중 내내 생생한 현실이 되어, 좀 더 화평의 삶을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절은 “위로와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날로서, 먼저 천군과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누가복음 2: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누가복음의 성탄절 이야기는, 여행 중 짐승의 우리에서 해산하고,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이어 헤롯이 죽이려고 찾았고, 애굽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스럽고 심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성탄절 메시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깊은 행복과 심오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 볼 것이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눅2:26,27). 그것이 소망입니다. 시므온과 같은 소망은 자기의 문제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합니다. 따라서, 소망의 기초는 믿음이고,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주님의 백성들을 언급합니다. 첫째,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입니다. 그들은 밤낮 기도하였지만 늙기까지 자녀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체험과 함께 아들 요한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둘째,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동정녀의 잉태라는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겪을 때, 이 두 분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낳고 기르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셋째, 여선지 안나는 60년을 청상과부로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경건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이루심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도착할 때까지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사람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1:12-18절이 인간이 높이 평가하는 지혜 추구조차 허무함을 역설한 것이나, 2:1-11절은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과 성공의 헛됨을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은, 사변적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움직이는 현실에 바탕을 둔 실제적 교훈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 전도자는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을 포함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을 경험해 본 결과,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쾌락조차 무의미함을 선포합니다. 전도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의 쾌락 추구는 참된 만족 여부의 발견을 위해 절제하면서 시도한 것이지 결코 방탕이 아닙니다. 한편, “너는 낙을 누리라”에서 ‘낙’은 ‘토브=선, 좋음, 희락’의 번역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주장됩니다. ① ‘선한 것을 발견해 내라’ ② ‘쾌락을 즐겨라’ 전자는, 쾌락 탐구를 통해 의미 있는 삶의 발견을 시도하였음을, 후자는, 쾌락의 추구를 심도 있게 시도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웃음’ 혹은 ‘술’ 등과 같은 구체적 쾌락 추구 수단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후자가 타당합니다. 결론은, ‘이것도(쾌락 추구) 헛되도다!’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이미 내린 결론을 또 다시 검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쾌락’을 추구할 경우 지혜자 솔로몬과 달리 방탕으로 치닫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절제 없는 쾌락은 사망의 길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

매일묵상(2024/12/16-20)


갈라디아서 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는 선행이며,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 선행을 재료 삼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레이실라 비치의 글입니다. “교직에 몸담은 첫해의 선생님은 젋고 열정적이었다. 제일 처음 부임한 학교는 쿠바 하바나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있었다. 선생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이는 아홉 살 난 여자아이로 갈색머리에 표정으로 가득찬 눈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항상 단정했으나 신발은 매우 낡아 2학기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넝마 조각 같았다. 선생님은 가죽으로 리본이 달린 새 신발을 한 켤레 사 주셨다. 너무 예뻤다. 학년 말 선생은 하바나 시의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고, 30년을 가르치신 후 은퇴하여 글을 쓰고 계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폐렴이 심하게 걸려 작은 개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병원에 종사하는 분들의 탁월한 서비스에 놀랐다. 그래서, 다른 환자에게 자신의 감동을 이야기 하자, 그 환자도 동의하면서, “특히 부인께서 입원하신 후에는 더 친절해졌습니다.” 하였다. 결론은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병원 원장이신 멘데스 박사님이 특별 돌봄을 지시하셨습니다.”고 하였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원장에게 가서 초면인데 이렇게 특별한 돌봄을 감사드린다고 하니, 멘데스 박사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에요. 선생님께서 30여년 전에 새 신발을 받은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저예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그 가죽 신발 말이에요!” 주님은 보상받지 못한 선행은 오히려 복이 되어,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 14) 하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73-75쪽, 참조)

전도서1:17절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자는 이미 긍정적인 측면(13,16)에서 지혜를 살펴보았고 본절에서는 지혜와 정반대인 ‘어리석음’을 탐구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을 모두 연구했음을 밝히지만, 둘 다 연구한 이유는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둘 중 하나에서 의미나 즐거움이 있는지 찾아본 뒤, 무엇이 참된 지혜인가를 명확히 하고자 어리석음까지도 연구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혹은, 지혜와 어리석음은 동전의 양면이므로 전체적인 그림을 얻기 위해 양 측면을 모두 살펴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실패하였음을 자인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여도 잡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섭렵하였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음을 말합니다. 더 나쁜 것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지식을 추구할수록 괴로움은 더욱 많아진다는 역설입니다(18).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잠1:8)를 전제로 하나, 본절의 지혜는 하나님이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데 전도자는 믿음의 길에서 방황 한 뒤 얻은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탄소 5개로 된 ‘리보스’의 2번 탄소에 ‘산소’가 있으면 RNA(리보스 핵산)을 구성하고, ‘산소’가 없으면 DNA(디옥시리보스 핵산)가 되어 전혀 다른 기능을 갖게 합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은총이나, 세상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합니다. 결과는 삶의 무의미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전도서1:18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본절은 지혜를 얻게 되면 근심 역시 수반된다는 점을 지적하여, 지혜도 허무하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1-11절은 세상에 사는 인간의 삶이 무의미함을, 12-18절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인 지혜와 그런 지혜의 추구조차 허무함을 선언하여, 해 아래 사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무의미함을 가르칩니다. 전도자의 선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낸 것이지, 신자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불신자를 위한 책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자신을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 밝히는데, 솔로몬은 성경의 전통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의 탐험 여정은 믿음 깊은 신자의 여정이므로, 성숙한 신자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면 방황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그 방황이 전도자와 같은 지적 방황이냐, 아니면 욥과 같은 고난의 방황인가의 차이 뿐입니다. 고난 중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롭게 살아온 자신에 대해 변호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어 괴로워 합니다. 시인 아삽은 악인은 잘 살고 건강하나, 매일 고난을 당하는 자신을 보고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보듯이 아무런 삶의 고난이 없고 풍족 하여도 방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삶의 의미나, 자아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적 방황 때문입니다. 좋은 예가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 입니다. 전도자에 따르면, 이 철학적, 신학적 주제는 해 아래 인간에게는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라고 토로합니다(13).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창세기 10:22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아르박삿, 아람 족속은 아람의 후손으로 모두 셈의 자손입니다만, 고대에 두 민족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지금 아사드 대통령이 물러난 시리아를 이스라엘은 맹폭하는데 시리아는 성경 시대의 아람 제국과 동일한 지역입니다. 갈등은 3천년이나 됐습니다. 전쟁은 아람 임금 하사엘 시대(BC842-796)에 심하였습니다. 주님은 북왕국을 징계하시려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그 후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히는 장면들이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한편,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병거용 말의 눈가리개들 중에는 아람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하다드 신께서 우리 주 하사엘에게 하사하신”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하사엘의 역사성을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텔 단 지역에서 발견된 석비이다. 여기에는 성경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역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다윗 집’이라는 유다 왕국의 호칭이 나온다’「아람 임금 하사엘,76쪽」. 주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자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셨고,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공격하고, 가드를 점령한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자(왕하12:17), 유다 왕(요아스)은 성전의 성물과 왕궁의 금을 모두 바쳐 공격을 면합니다. 하사엘이 쳐서 점령한 가드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하사엘의 공격진영과 파괴된 여러 흔적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며 유일하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록한 신앙 교훈의 보고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시편73: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예전에 본 드라마입니다. 매우 곤궁한 어느 가장이 정신 이상이 되어 방 한구석에서 종이에 백 만원, 천 만원 등의 숫자를 쓰고 돈이라고 하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치료를 받는 중 의사가 정신을 차려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침을 놓자 그는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퇴원하였으나 어려운 경제 현실에 직면하자 마음은 다시 무너졌고 이전과 같이 종이 돈을 만들어 공중에 뿌리는 장면과 함께 드라마는 끝납니다. 무너진 마음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는 아삽(다윗의 성가대장)으로, 자신은 경건하나 매일 고통 중에 살고 있는데, 악인들의 형통과 교만을 보자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아삽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고, 아삽은 늘 교훈하사 지혜롭고 바른 삶을 살게 하시면서,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계획이셨던 것이죠! 아삽은 하나님이 ‘마음의 반석’이요, ‘삶의 힘’이 되심을 깨닫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몫은 재산, 명예, 권력 등이지만, 아삽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임을 깨닫습니다. 실로 그분의 인자(신실한 사랑)는 생명 보다 낫습니다!(시편63:3). 믿음 생활은 즐겁게 주님의 뜻을 행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드린 기도가 응답받는 삶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 자신이 우리의 몫(재산, 유산)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삶은 단순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가 결합되어 선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73:28)

매일묵상(2024/12/9 – 13)


「참 기특한 실수」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켄디 챈드의 성탄절이야기입니다. “그 해 아들 니콜라스는 여섯 살 유치원생이었고 성탄절 학예발표회 최종 연습을 구경하러 갔다. 이윽고 담임 선생님들의 인솔에 따라 들어온 학생들은 모두 식당 바닥에 앉아 청중이 되었다가, 발표 순서가 되면 무대에 올라갔다. 예상 대로 아기 예수, 구유, 그리스도의 귀중한 생명의 선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니콜라스 반은 ‘크리스마스의 사랑, Christmas Love’이란 노래를 불렀다. 맨 앞줄에 서 있는 아이들은 각각 큰 글자를 갖고 있었고, 하나씩 들어서 노래 제목을 만들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C는 크리스마스의 C”라고 노래하면 한 아이가 글자 C를 들었고, 또 “H는 해피의 H”라고 노래하면 다른 아이가 글자 H를 들었다. 이렇게 계속하면 마지막에는 노래 제목인 “Christmas Love”라는 메시지가 연출되는 것이었다. 발표는 매끄럽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한 여학생이 글자 M을 거꾸로 들어 ‘W’자가 되었다. 실수였다. 게다가 그 학생은 조금씩 움직여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옆으로 서는 통에 글자 간격이 이상하게 벌어졌다. 청중석의 아이들은 그 실수에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지만, 순진한 아이는 당당하게 ‘W’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글자가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다함께 보았고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전체 글자와 메시지는 “Christ was Love”(그리스도는 사랑이셨습니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270-73쪽, 참조)

전도서 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본절은 속담체로, 인간의 무능력을 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구부러진 것’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고쳐지기 바라는 모든 잘못된 상태이나, 문맥상 도덕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특히, 유사한 구절인 7:13절(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과 비교할 때 자명합니다. ‘구부러진 것’의 예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요9:1)으로, 그는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인간은 마음대로 세상을 다룰 수 없음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또 ‘모자란 것’이란, ‘필요하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단은 ‘인간이 원하고 필요하지만 없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해석됩니다. 예로서, 모든 병을 치료하고, 죽지 않게 하는 ‘생명나무 열매’ 혹은 ‘생명의 떡’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본절에서 전도자는 이런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고 절망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복음의 전제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이제 만유를 회복하사, 사망을 철폐하실 것입니다(롬8:17-25). 그러므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즉 맹인, 귀먹은 사람, 말 못하는 사람, 절름발이, 중풍병자, 문둥병자 등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은 새 창조의 예표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생명나무’(요일5:13)와 ‘생명의 떡’(요6:35)이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전도서 1:16절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2-15절은 세상 모든 일의 허무함을 밝히나, 16,17절은 그런 지혜 추구 과정 자체도 허무하고 무의미함을 기술합니다. 본절은 두 번째 성찰의 문구로서, 전도자는 자신의 신임장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전대미문의 탁월한 지혜자’로 자칭하는 것 같아 다소 주제넘게 들리지만, 그것이 본절의 초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그런 지혜를 갖고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와 역대서를 보면,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 위에 등극하자 정적- 아도니야, 요압, 시므이-을 지혜롭고 과감하게 처단합니다. 나라가 자신의 손에 굳게 세워지자, 비로소 기브온에 갔고, 직접 일천번제를 드려 주님을 감동시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감동하신 주님이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맡은 왕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재판의 지혜(‘듣는 마음’)를 구합니다. 주님은 기뻐하사, 판결의 지혜는 물론, 지식과 재물까지 주십니다. 솔로몬은 정말 현명한 왕이 되었고, 그 지혜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우상숭배로 전락하였고, 이스라엘 왕국 분열의 모든 씨앗을 뿌립니다. 그는 단명은 아니지만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지혜가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솔로몬 같이, 사람은 주님에 대한 순종을 떠나면 행복도 또한 떠나버립니다. 행복은 주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만이 가지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시편84:1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람 사람들”
사도행전 17: 26절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온 인류의 조상은 노아이며,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그중 한 명이 ‘아람(=고지대)’으로, 적어도 BC1200년경부터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 유프라테스 강까지 펼쳐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셈의 아들 아르박삿의 후손이나, 신명기는 야곱을 ‘방랑하는 아람 사람’(신26:5)이라 하였는데, 리브가나 레아와 라헬이 아람 사람이고, 야곱 역시 20년을 아람에서 지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람 왕국은 다윗 시대 이후 적대적이 되었고, 특히 벤하닷과 하사엘 왕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왕상20:26;왕하6:24). 그러나 두 나라는 필요에 따라 무역을 하거나 왕래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말을 이집트에서 사서 아람 임금들에게 되팔았고(왕상10:29),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나병 치료를 위해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한 것이 그 예입니다(왕하5장). 아람이 고대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앗수르 왕 디슬랏 빌레셀1세(BC1114)의 연대기이며, 그는 아람 사람들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람은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BC720). 또한, 1966년 텔 단에서 출토된 석비는 다윗 가문과 하사엘 아람 왕에 관해 기록하여 성경을 뒷받침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특히 유다 왕국은 약소국이었습니다. 이들은 강대국의 침략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간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지금 비상계엄사태로 어지럽습니다. 적법절차를 따라 조속한 정국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잠언3:5절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새번역)

즐겁게, 그리고 고된 노동 후에는 그 결과는 하나님 손에 맡겨야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맡겨주신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수고는 여기까지이며, 나머지는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후, 잠을 자야 합니다. 온갖 감정이 요동칠 수 있으나, 주님이 맡으셨음을 생각하고 근심을 몰아내는 연습은 경건의 훈련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모순어법 같지만, 온갖 염려·불안으로 마음은 무거우나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근거로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 정직하게 살고 염려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면 이렇게 해결되는구나!”는 삶의 경험은 우리에게 믿음의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롬8:32)이니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따라서, 신자는 주님을 본받아 안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으로 배에 물이 가득하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로 가득찼으나, 주님은 고물에서 깊히 주무셨습니다. 열심히 가르치신 날 저녁이라 피곤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 맡깁니다” 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죽음 이후의 일을 맡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눅23:46). 그 결과는 부활이었고, 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