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4/21-2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절간예배당
요한1서 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해방 후 소위 ‘재건파’ 교인들은 멀쩡한 예배당도 동방요배를 했다고 불태웠습니다. 하여, 이덕주 교수는 ‘절간’ 건물에서 예배 드리는 교인들의 심정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 적에 그거 생각할 겨를이 있었간디? 3백명 넘던 교인이 좁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그 배가 넘넌 넓은 공간을 얻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었제. 그리고 건물이 무슨 죄가 잇간디? 그 안에서 뭘 하느냐가 문제지…오히려 종교적으로 우리가 이긴 것 안것어?”(박성수장로). 그러나 목포중앙교회는 위기를 맞습니다. “1985년에 ‘절간’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느냐, 그대로 두고 옆에 새 건물을 짓느냐, 아예 건물을 팔고 다른 곳에서 새 건물을 짓느냐 하는 문제로 의견들이 팽팽혔제. 결국 새 건물을 짓자넌 교인들이 유달제일교회를 개척하고 나갔는디 그때 재력 있고 열심 있는 교인들이 많이 나가 타격이 컸지라.” 20년 후 절간 예배당의 ‘남은 자’들도 ‘아예 건물을 팔고’ 새 건물을 건축해 이전했습니다(옥암동, 2007). 성전 건축이란 부차적인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배처소로 인한 분리라면 세상과 똑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가운데 진리를 행하도록 가르침 받았습니다(엡4:15). 형제 사랑 보다 예수 사랑(진리)이 중요한 경우는 갈라서야 하겠지만, 예수 사랑(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한 쪽은 양보하여 형제 사랑을 성취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는 이런 부차적인 사건으로 숱하게 분열하였으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전도서 3:2절(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자는 앞에서(1절) 모든 일에는 ‘기한과 때”가 있음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 주의를 환기하고, 2~8절은 7의 배수인 14쌍의 각각 반대되는 일들을 대조하여 그 섭리가 어떻게 인간의 모든 일 가운데서 작동하는지를 부각합니다. 7이란 숫자는 천지 창조나 속죄(레16:14)와도 관련되어, 완전성 내지 총체성을 보여주고, ‘둘’은 법정에서 증언을 확증하는 증인의 숫자로서 사실을 확정합니다(신17:6).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두 번 주심으로 풍년과 기근을 작정하셨음을 알려주신 것이 그 예입니다. 또한, 대조 구문은 히브리 시의 특징으로 7의 배수인 14쌍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의 완전성을 나타냅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든 사람을 강조하고, ‘바다와 땅’은 모든 피조 세계를 지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의 처음 두 쌍은 전체 생명 주기를 포괄합니다. 먼저, 인간의 생명 주기(태어남…죽음)를 기술합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분의 뜻이 아니면 생명이 불가능하나, 생명이 떠나는 죽음의 주관자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시작부터 종결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결정 못하며 그 결정권을 지니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은 불변의 진리입니다(삼상2:6). 따라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은 생명이 주어진 기간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것이 참된 선의 열매를 맺는 비법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전도서 3:2절(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말한 전단의 범위를 확대하여, 후단은 식물의 생사를 묘사합니다. 식물을 심고 뽑는 것은 인간의 일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한 과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때(계절 등)를 무시하고 심거나 뽑으면(감자 등)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행한다고 생각되는 사소한 일조차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줍니다. 상식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상황에 따른 삶의 지혜가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심고 뽑는다’는 말은 국가나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렘24:6;겔36:36). 이때 ‘심다’는 한 국가의 발흥을, ‘뽑다’는 멸망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하찮은 식물, 개인, 국가의 존폐를 포함하여, 만물이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사44:6)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역사의 주관자되심을 뜻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체가 없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4:24). 그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사 하나님 아버지를 자세히 설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1:18).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고, 지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본문의 ‘뽑을 때’란 말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비밀 중의 비밀은 만유의 통치자, 재판장, 속죄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깨닫고 행하는 자마다 솔로몬 보다 나은 지혜자입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시편119:10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메사 석비(하)
열왕기하 3:13절
“엘리사가….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배반한 모압을 이스라엘(여호람), 유다(여호사밧), 에돔이 연합하여 치러 가던 중 물이 떨어지자, 선지자 엘리사에게 신탁을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아 엘리사는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면 물을 얻고 승리한다는 신탁을 줍니다. 연합군은 두루 개천을 팠고, 아침에 미쳐 에돔쪽에서 물이 흘러 와서 가득찼습니다. 기갈 해소는 물론 아침 햇빛으로 물이 붉게 보이자 분란이 생긴 것으로 오인한 모압은 공격하다 패퇴합니다. 절망에 빠진 메사는 장자를 죽여 그모스에게 바치자 연합군은 통분하여 철수합니다. 그러나, 메사 석비는 그모스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또한, 석비의 17행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땅에 ‘여호와의 화로’를 가지고 있었고 메사가 파괴하였다”는 어구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성경 외 자료로서,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여호와로 불렀음을 증거합니다. 31행은 다윗 가문을 언급한 “베이트 다비드”이란 문구가 있고, 최근에 발견된 텔 단 석비 역시 남왕국 유다 왕조를 “베이트 다비드”로 칭하였습니다. 성경 속 역사를 성경 외 자료가 뒷받침하는 중요한 발굴들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확실하고 하나님의 뜻과 활동을 명확히 증거하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들에 익숙하면, 믿음으로 사는 법과 온갖 선한 일에 능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 새번역)

(시험의 때)
신명기 8: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십계명)를 직접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의 시행세칙인 모세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율법)을 아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문제는, 그 율법이 돌에만 새겨진 문자냐, 아니면 내면에도 새겨졌는지 여부입니다. 그분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신 후 성서의 톤은 달라집니다. 전에는 불평과 반역적 행위를 꾸짖지 않고, 권면으로 끝났지만, 율법을 받은 후에는 책망과 벌을 내리십니다. 우상숭배자 3천명을 죽이시고(출32장), 불평하자 진 끝을 불사르고(디베라),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탐욕을 낸 자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민11장). 또한 모세를 질투한 미리암을 나병으로 치셨습니다(민12장). 불순종을 계속 경고하셨지만 깨닫지 못한 백성들은 결국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불순종하여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많은 기적을 경험하나, 그 기적이 시험을 이길 믿음을 생산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간직하는지, 아니면, 돈, 출세, 자아실현, 기타의 욕망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지를 무척 알고 싶어하십니다(눅14:25-35).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는 칭찬과 함께 믿음의 선물을 주시므로, 항상 경건에 이르도록 힘쓰시길 바랍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

매일묵상(2025/4/14-18)

고난주간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5년 부활절은 4/20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의 유월절과의 관계 때문에 춘분(3/20-양력)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0일 후  첫 만월은 4/14일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4/20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4/13-19).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12),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4/13,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기적을 들은 군중들은 환호하였지만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14) 아침 성전에 가다가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심판받을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으로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묻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4)하시고, 형제를 용서해야 응답 받음을 교훈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갖고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지혜의 말씀을 듣자 침묵합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책망하신 뒤, 부활 시에는 결혼이 없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가르침을 주십니다(막12:13-27).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하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십니다(막12:28-34). 그 이상의 계명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질문하지 못하자, 오히려 주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고 백성들은 즐거워 하였습니다(막12:35-37). 주님은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자신들의 가르침조차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십니다(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선언하십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립니다(요17장). 찬미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면서, 1시간 동안 피땀의 기도와 함께 통곡합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합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주님은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임을 밝힙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시는데(마26:67-68), 베드로는 3번 부인하였습니다(눅22:54-62). 이 같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은 700년 전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사53: 7-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합니다: “네가 왕이냐?” 주님은 당신이 왕이나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당신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세상에 왔음을 밝힙니다(요18:36-37).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복음온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으나, 주 예수께서 보냄을 받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를 믿는 자는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죄가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는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입니다(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둠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12은 주님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인 것을 잘 설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5/4/7-1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마태복음 3: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목포중앙교회는 1923년에 시작되어, 성장을 거듭하다 1957년 일본 절 동본원사 건물과 대지를 5백만원에 구입, 50년 동안 예배드렸습니다. 목포 사람들은 “절간 예배당”으로 불렀는데, 구입일화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목포 남부교회와 정광사가 매매 합의에 거의 도달 하였을 때, 그 정보를 입수한 목포중앙교회는 웃돈을 주고 가로챘으며, 거절 당할 우려에 교회가 아니라 김요한 장로 2인 명의로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2007년 목포중앙교회는 ‘절간 예배당’을 매각하고 현 옥암동 새성전을 신축, 이전하였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절간 예배당’의 유래를 찾다가 보현정사 주지 정각 스님을 만났는데, 정각 스님은 1980년대 목사, 신부들과 지역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기독교에도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절간 건물 뿐 아니라 ‘문화재급’ 탱화와 부처상까지 팔아 사업 자금을 마련한 승려(등암 스님)의 소행을 비판하고, 이어 기독교에 대하여도 한 마디 하였습니다. “자유당 시절, 불교계 안에 대처승과 비구니 사이에 약간의 분쟁이 있었는디 그걸 빌미로 정부에서 법으로 불교계를 탄압하고 많은 불교 재산을 국가 재산으로 접수하였지라. 그때 기독교인들이 정부 권력을 앞세워 불교 재산을 솔찮게 가로챘는디 우리 불교계 원로들 중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도 섭섭허게 생각허는 분이 많지라. 언젠가는 밝혀야 헐 부분이제.” 한국 교회 현대사에서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대목입니다. 이웃의 계명은 원수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불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5:14) 

전도서 2:26절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본절 중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는 부분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의 통치자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믿고,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시험에 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죄인의 유형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악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불의의 재물과 권력을 잡고 으시대며 살아갑니다. 그들의 끝은 패망이란 사실은 상식입니다. 다만,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신속히 집행되지 않는다면, 경건한 사람들은 그 박탈감을 견디어 내야만 합니다. 욥, 아삽, 요셉의 인내는 좋은 모범입니다. 욥은 극한 고난 끝에 깨달음과 축복된 결말이 주어졌고, 아삽은 성소에서 예배드릴 때 고난 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시73편). 요셉은 고난 중에 지혜을 쌓고, 연마한 지혜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훌륭한 통치 업적을 남깁니다. 다음의 유형은 부지런하나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다”(딤후2:6)는 삶의 원리를 따라 부지런히 일하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없습니다. 부를 축적하면 선한 행위 보다는 자신의 창고를 넓히는데만 관심 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는 그 밤에, 그가 부지런히 모은 재물은 타인의 소유가 될 것이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로서, 그는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는 부요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전도서 3:1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1:1-2:23절은 인생의 절대 허무를, 2:24-3:22절은 허무극복 방법을 제시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 2:24-26절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라는 교훈을, (2) 3:1-15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때와 시간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앞의 교훈을 뒤받침합니다. 즉, 솔로몬은 인간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밝히고(2:24), 본단락에서는 모든 일에 때와 기한이 있으며, 하나님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시고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가장 좋다는 충고입니다. ‘범사에’는 ‘모든 것’(everything)을 뜻하는 바,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이는 피조물로서 겸허함과 창조주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한’과 ‘때’가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데는 반드시 시간질서가 담겨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일’(천하 만사)과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집니다. 솔로몬은 이어지는 2-8절, 총 7개 절에서 28개의 중요한 인생사를 예시하고, 성취의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심을 교훈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살면서 그분이 이루어 주심을 믿고 기뻐하는 신뢰의 삶은 인생이 가야할 길입니다. 노인이 된 다윗 왕은 이 진리를 강조합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시편37:3-6,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메사 석비(상)
열왕기하 3:4절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듯이 모압의 신 그모스에 대하여 모압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메사 석비는 요르단 디반에서 출토되었는데(1868년), 성경 외에 가나안 땅의 역사를 기록한 석비로서 중요합니다. 재질은 현무암(높이 1m 너비 60-68cm)이고, 언어는 모압어로써,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모압 임금 메사가 임금이 되었을 때 그는 그모스 신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고 그모스 신은 당시 모압 땅 메드바를 차지하고 있던 오므리와 그의 아들을 부수리라는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메사는 그모스 신의 자비로 이스라엘과 싸워 이겼고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에돔을 땅에서 몰아냈다.” 열왕기하 3장은 그 전쟁의 배경을 말합니다. 북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죽자(BC 852) 모압은 배반합니다(왕하3:1-5). 이스라엘(여호람), 유다(여호사밧), 에돔이 연합하여 모압을 칠 때 곤경에 처하나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다급한 모압 왕 메사는 장자를 죽여 그모스에게 바쳤고, 연합군은 통탄하면서 회군합니다(3:27). 이때 석비는 메사가 이스라엘 칠천 군사를 죽였으며, 승리는 그모스의 도움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마치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이긴 다윗 왕에 대한 성경의 진술과 비슷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정확합니다. 아합의 이름은 앗수르 살만에셀 3세의 기념비에 나와 있고(BC853),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은 메사 석비가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압 입장에서 기록하였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 책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완전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딤후3:17,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 8: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내가 늙어 싸워 이길 수는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는 말을 남기고 69세의 나이에 청군과 싸워 장렬히 전사합니다. 기록에 보면 온 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처럼 되었다 합니다 그의 가문은 단번에 명문가로 발돋음 하였고, 12대에 걸친 만석의 부를 이어갈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조상 최진립의 충군애국의 정신은 후손들의 마음에 떨어져 열매를 맺고, 그 후손들은 존경받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의의 열매를 못 맺겠습니까? 열매 맺는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뿌리를 둔 믿음이 자라서 아름다운 결실이 맺어지는 삶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갈렙의 예가 보여줍니다. 갈렙은 ‘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민14:9)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45년 간 섬길 기회를 찾다가 드디어 잡았습니다. 유대지파가 추첨하여 받은 땅 중앙에 모두가 두려워 하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한 갈렙은 85세였지만 최진립과 달리 이들을 내쫓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믿음의 열매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보물처럼 간직하여, 행동의 시기(희생의 시기)가 왔을 때 주저 없이 행동하고 말씀의 열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는 사랑이요, 믿음의 열매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4,35)

매일묵상(2025/3/31-4/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6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태평양 전쟁(1941년) 이후 일제는 ‘천황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3.1운동 당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룬 선생 박연세는, 목사가 되어 시무한 교회에서 신사참배 동참을 참회하던 중, ‘천황숭배’에 직면하자 박해를 각오합니다. ‘지나사변 5주년 기념일’을 지키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보고, 특별예배 때(1942.7.7) “성전(聖戰)이 아니라 약육강식일 뿐이다”고 선포하고, 주일예배 때(8/30)는 “육으로는 천황 폐하를 제일 존경할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는 설교를 하여, 천황을 ‘현인신’(顯人神)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교인 김동만, 전태균 등이 경찰당국에 알렸고 박연세 목사는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1942.11.10). 당시 18세였던 딸 박지영 권사는 “그날 저녁상을 받으시구 몇 숫갈 뜨지 않으셨는디, 형사 서너 명이 들어와 아버님과 함께 서재로 들어가시드만요. 그리곤 얼마 있다가 나오셔서 ‘한복 좀 가져오시오’ 하시드만 한복을 입으시구 그들과 함께 나가시는디…”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직후 박연세 목사는 독방에서 ‘동사’(凍死)하였습니다(1944.2.15). 일제가 감방 마루 아래로 물을 흘려 보내 그 안에서 얼려죽였다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는 없으나, 주님의 길을 따른 그분의 믿음과 애국심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전도서2:24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1:12-2:23절까지 하나님 없는 인생의 절대 허무와 절망감을 토로하나, 2:24-3:22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허무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구체적으로, 2:24-26절은 일상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3:1-15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세를, 3:16-22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신실한 삶을 교훈합니다. 본절 전단은 축복 받은 삶의 모습을 ‘먹고 마시며 수고한다’로 표현합니다. ‘먹고 마시며’는 평화로운 일상의 삶을, ‘수고한다’는 노동의 과정과 결과를 통한 축복을 말합니다. 안락한 삶과 노동의 즐거움이란 표현은 1:12-2:23절에서 묘사된 비탄에 대한 부정입니다. 즉 인생의 매일이 괴로움이며 노동의 결과는 헛되고 그 자체는 큰 악이라고 소리친 전도자가 24절에 들어서서갑자기 긍정의 톤으로 바꾼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24절 후단에서 그 깨달음의 근거가 제시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내재돼 있던 긍정적인 측면이 부상하면서, 삶에는 통일성이 부여되고,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솔로몬은 이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저명한 곤충학자 최재천 박사는 인간을 단백질이 모여 만든 유기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삶의 의미나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서,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간지는 30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간절히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만, 주님께 돌아가면 발견할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전도서2:25,26절
“25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24절은 최선의 삶은 일상의 책임을 다하는 중에 기쁨을 누리는 것이나,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25,26절은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증언합니다. 먼저,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는 구절은 “그분 없이 누가 먹고 즐길 수 있느냐”로도 번역됩니다. 전자는 솔로몬 자신이 최상의 희락을 누렸음을 상기시키면서 다음의 진술(26)에 권위를 부여하고, 후자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합니다. 문맥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에 후자가 타당합니다. 26절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는지에 대한 솔로몬의 관찰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지혜, 지식, 희락’인데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짐을 깨달았다는 언급입니다. 잠언에서 ‘지혜, 지식, 희락’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 그리고 기쁨이 근본을 형성합니다. 반면,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힘든 일을 주시고, 그 재산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목적은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을 떠나서 삶의 의미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헛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어진 삶에 책임을 다하고, 소망은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그모스와 몰렉
열왕기하 3:27절
“그래서 모압 왕은, 자기를 대신하여 왕이 될 장자를 죽여, 성벽 위에서 번제로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여, 그 곳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새번역)


오늘 본문은 비씨 840년경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에 포위된 모압 왕 메사가 신 그모스에게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며, 암몬 신 몰렉(몰록)의 제사관습과 같습니다.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일까요? 학자들은 다투고 있습니다. 한 쪽은 구약성경은 그모스를 모압의 신으로, 몰렉을 암몬의 신으로 구별하여 부르므로 각각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쪽은, 메사 석비에 등장하는 모압 임금 메사의 아버지의 이름은 ‘케모쉬 멜렉’이며, 이는 ‘그모스는 임금이다’ 혹은 ‘그모스는 몰렉이다’로 읽힐 수 있어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이라는 주장입니다.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같이 바른 성서 이해를 위해서도 고고학은 중요합니다. 그 석비는 메사가 전쟁 중에 여인들을 죽이지 않고 ‘아쉬타르-그모스’에게 헌정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쉬타르-그모스’는 여신이며 아세라(=아쉬타르)로 부르는 바알의 배우자이지만(가나안 지경), 모압 땅에서는 최고의 신 그모스의 배우자로 보는데, 우상이란 모두 인간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철저히 인간적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저주란, “철저히 하나님과 격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사 하나님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므로, 인간적인 모든 상상을 접고 주님의 계시를 붙잡아야 합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신명기1:36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은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전심 전력으로 나를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밟은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현대인의성경)
갈렙은 40년의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 전쟁 5년 동안 이 말씀을 간직하다가, 유다지파의 땅이 제비뽑기로 확정되자, 가장 정복하기 힘든 요새 헤브론(920미터)을 요구하였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주님께 순종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차지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85세의 갈렙은 왜 헤브론을 원했을까요? 2개가 떠오릅니다. (1)역사와 전통적 측면: 헤브론(‘연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미 700년 전 갈대아 우르에서 온 아브라함의 삶의 터전이었고,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 등 조상들의 매장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헤브론은 조상들이 이방인이었지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00년을 살아간 유서깊은 지역이었습니다. (2) 유다지파 화근의 제거(수14:15): 아낙자손은 거인 중에도 가장 키가 큰 자들로서, 45년 전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두려워 한 그 거인들이었습니다. 유다지파 존속에 관하여 큰 위협 요인이라, 만약 이들을 쫓아낸다면 유다지파의 땅을 보호하며, 자신의 후손들도 안전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지파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함께 여호수아 앞으로 나갔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정탐꾼일 때나 85세의 지금이나 장군으로서 섬길 자리를 찾았습니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를 위하여 가장 힘든 일을 맡아 완수해 낼 책임으로 해석한 그 믿음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매일묵상(2025/3/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목포 양동교회의 저항과 수난 전통은 일제말기 박세연 목사님의 투옥과 순교로 이어집니다. 박목사님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군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바 있습니다. 출소 후 박연세 교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졸업하였고,이리 등에서 목회하다가 1926년 양동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10년 간 교회는 부흥하여, 죽동교회(1927년), 연동교회(1928년), 온금동교회(1929년), 중앙교회(1933년) 등이 분립 개척되었습니다. 일제말기가 다가오면서 후반 5년의 목회는 갈등과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 전남노회장으로 참석하여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임을 인식하고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 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 교회에 통지하여…”라고 ‘양심과 배치된’ 보고서를 제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동조하였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훼절한 민족주의자’와 ‘양심에 꺼림이 있는 목사’의 오명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에 이어 ‘천황숭배’를 강요하자, 조선독립을 바라는 민족주의자이며, 예수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박연세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에 인정 받을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집니다. 우리도 시험에 실패하였다고 좌절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또 한 번의 테스트를 보내실 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이겨나가면 됩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12).    

전도서 2:22절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전도자는 18-21절에서 죽음 때문에 자신의 모든 수고의 결과를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수고 하지 않은 자에게 무조건 넘겨주어야 하는 삶의 부조리를 탄식합니다. 22-23절은 혹시라도 노동의 과정이나 삶의 과정이 주는 기쁨과 열매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의미가 있다는 질문에 답합니다. “무슨 소득이 있으랴?”의 직역은 “그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 입니다.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란 그 수고가 단지 육체에 한정되지 않고, 마음의 고통도 수반함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자신의 분야에 어느 정도라도 성과를 내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에 대충 대충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업적은커녕 최선을 다해도 생존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곧 패가망신입니다(잠18:9). 전도자의 삶은 달랐습니다. 지혜자인 그는 최선을 다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죽음이 임박하자 업적에 지나치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 온 자신의 잘못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때가 권력자와 부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지혜 그리고 업적을 무차별적으로 동일하게 만드는 절대 강자의 도구이며 의지의 표현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때 삶의 의미와 영생 모두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전도서2:23절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원문은 이유 접속사 ‘키’를 도입하여, 22절의 수사적 질문과 암묵적 답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일평생’이란 ‘그의 모든 날’의 의역이며,  ‘근심하며’는 속상하여 식음을 전폐한 한나와 같은 극심한 감정적 동요를 묘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사람의 매일이 고통스럽고 일은 괴롭다는데, 부귀영화를 누리는 왕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통은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와도 여러 가지 걱정 근심, 재물에 대한 집착 등으로 마음에 쉼이 없으니, ‘아, 이것도 헛됩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허무의 고백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 그의 인생관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우리야 사건이외에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관을 바른 믿음 위에 세웠기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따라서, 동일하게 수고하며 일생을 살아가도 허무하다고 외치는 솔로몬과 주님께 소망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간 다윗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과 성공 그 자체만 바라 보는 삶은, 그 모든 것을 얻어도 그림자를 붙잡는 것처럼 허무하지만(죽으면 모든 것이 타인의 소유임), 주님을 믿고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살아가면 점점 소망과 확신에 차게 됩니다. 실로 주님의 뜻을 행하면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신 그모스
신명기5:9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모압은 다윗에게 정복 당한 후 조공을 바치다가(150년 간) 왕 메사 때 벗어나지만, 모압의 문화와 신 그모스는 이스라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솔로몬은 모압 여인을 취하였고, 예루살렘 동쪽 어느 산봉우리(멸망산)에 그모스 신전을 세워주었습니다. 이 신전은 요시야 왕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300년 동안 존속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모스에게 제사 드린 장소입니다(왕하23:13). 가나안의 신 그모스는 주전2500-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에블라 문서에 가미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주전1400)와 예레미야서(주전600)에도 계속 등장하는 모압의 주요 신입니다(민21:29; 렘48:7,13). 성경은 모압을 그모스의 백성이라 부르지만(렘48:46), 그모스란 이름의 어원은 물론, 그 모습이나 종교적 역할도 어둠에 싸여 있습니다. 다만, 모압 땅에서 출토된 메사 석비가 그모스 신이 전쟁에 관여함을 보여주는데, 열왕기 3장 사건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제2계명(우상숭배금지)을 어긴 자에 대한 형벌을 말합니다. 우리의 우상이 멸망산에 있는 그모스처럼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벌이 집행될 것입니다. 속히 쳐부수어야 하지만 ‘탐심은 우상숭배다’(골3:5)라고 할 정도로 삶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우상을 인간의 힘으로 깨뜨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직접 우리 우상-재산, 명예, 권력, 건강, 자녀, 지식 등-을 깨뜨리고 계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5:10)
   
레위기18: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백성’은 출애굽의 목적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모세 율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도 그들 안에 하나님의 법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풍습을 따르던 백성의 삶은 모세율법을 받고 크게 달라집니다. 먼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의 왕입니다. 1년의 삶은 농축수 산업과 함께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등 하나님께 대한 예배 중심입니다. 결혼은 4촌이 넘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고, 모세의 부모는 고모와 조카 사이 였으나 근친혼은 금지되고 친척구제를 위해 고엘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임명하셨으니, ‘모세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6:2). 그리스도의 법이란, 일부일처 제도, 원칙적인 이혼금지, 정당한 정부의 권위에 순종 등 일반적인 명령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섬김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하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성취함으로, 모세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각 신자와 교회를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27권)은 주님의 뜻이 상세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기는 침례교인들은 “그 책의 사람”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매일묵상(2025/3/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누가복음13:32절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분봉왕 헤롯)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은 통렬히 비판하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본절이 유일합니다. 국가와 신앙은 어떤 관계일까요? “ 목포 만세 운동(1919. 4. 8)은 이경필 목사, 곽우영 장로, 서상봉, 서화일……등 양동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정명여학교의 천귀례, 곽희주, 김나열, 박음전 등 학생들이 주도했다”고 전합니다. 이들 모두는 옥고를 치렀고, 서상봉은 시위 중 일본군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어 이듬해 별세, 목포 시민들은 사회장을 치루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아들(서광조)은 수년 전 체포되어 제주도에 유배 중이었고, 부인과 며느리도 만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학생 시위를 주도한 박상렬 삼형제는 모두 체포·고문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그가 양동교회 교인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태극기를 그리던 곳이지요!”- 기도실로 사용되는 양동교회 예배당 남서쪽 모퉁이의 지하실 방(10평)을 말합니다. 일제 말기 조선의 신자들은 페르샤 치하의 유대민족(에스더)을 조선에 비유하여(구약신학), 천황의 조선지배를 인정하나 천황 숭배는 거절하였습니다(신사참배 반대). 신약 성경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모두의 주님이며, 그분에게 순종할 때 인간의 행복이 보장되며, 국가란 그 행복 보장의 수단임을 가르치고, 민주주의는 국가를 국민 행복추구의 수단으로 국민이 창설한 단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한계는 명확하고 국가의 권력은 그 한계 내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분은 세금도 잘 바쳐야 합니다. 당국자들은 이 일에 항상 힘쓰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롬13:6,현대인의성경)

전도서 2:19절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본절은 죽음이 자신의 모든 수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재산과 왕위를 계승할 자가 ‘지혜자냐 우매자냐’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자신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자신의 사후 발호할 공신세력을 염려하여 거의 모든 공신들을 숙청해버렸으나, 손자 건문제는 어리숙하여 조부의 유지를 승계하지 못합니다. 결국 연왕 주체(영락제)의 정난의 변으로 장자승계의 법은 깨지나, 죽은 주원장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죠! 솔로몬 때 전성을 이룬 다윗의 통일왕국도 믿아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처신으로 분단되고 르호보암은 남왕국 유다만 통치합니다. 다만. 성경은 이 분단은 주님의 뜻이며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벌임을 밝히면서, 르호보암의 모친(나아마)이 암몬 여인(열상14:31)임을 특별히 부기하여 알려줍니다. “다윗의 신앙유산이 르호보암에게 이어졌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부자 삼대 가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재산을 이어받을 후손의 자질에 관해서는 주님의 주권이나, 그들에게 물려줄 신앙유산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생각할 점은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신앙유산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앞의 신실한 삶과 함께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길이란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특권을 내포하며, 믿음과 이에 따른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읍니다.”(빌1:29,공동번역)

전도서 2:20,21절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0,21절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삶의 부조리한 구조를 보고 깊이 탄식합니다. 20절의 직역입니다: “그래서 나는 돌이켜서 나의 마음속으로 절망하게 되었다.” 현실의 한계와 허무함, 죽음 앞에 무력함을 피력하고 있던 솔로몬은 이제 절망감까지 토로합니다. 그의 말에는 “아무리 수고해도 내 몫은 없으니 도대체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라는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21절은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로 시작하여 그 근거를 말합니다. 전단은, ‘지혜와 지식과 재주’라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여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다한 사람을 등장시키고, 후단은 그렇게 이룩한 업적을 수고하지 않은 후계자에게 물려준다는 부조리를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어떤 노력도 인생을 의미 있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도자 자신으로, 솔로몬은 인생은 무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큰 악’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세상의 삶에 너무 깊은 의미를 찾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데 힘을 쏟으라는 교훈입니다(전12:12-14).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는 예수께서 주님되심을 믿고, 둘은 그분이 명령한 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요일3:23).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에 비추어 구체화시킨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사람들」
출애굽기15:15절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찬양하는 대목 중 모압 관련 부분입니다. 1930년 모압 땅 아르(민21:28)로 추정되는 유적지 ‘발루’의 발굴 과정에서 주전 3000년경 초기청동기 시대의 흔적과 이집트 왕의 모습을 조각한 석비가 출토 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는 그 석비에 그려진 왕은 람세스 2세(주전1279-1213)로 주장합니다. 이는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 있고, 거기에 새겨진 피정복 국가 중 모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에돔, 암몬, 아람 그리고 앗수르를 잇는 ‘왕의 대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이집트의 모압 정복 이유는 경제적 측면만 보아도 명백합니다. 모압은 이 도로를 통해 석회석과 사해의 소금 그리고 향유를 수출했습니다. 또한 모압은 고원(900m)이라 안전하였고, 비록 덥지만 요단 강 서편(이스라엘) 땅보다는 기온은 낮고 강우량은 높아 곡물 재배, 포도밭, 과수원과 같은 농업과 양 떼의 사육에 적합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압 족속은 주어진 풍요와 평안을 신 그모스의 축복으로 생각하였는데 하나님의 계시(율법, 복음)가 없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술사 발람은 이스라엘의 축복의 근원이 야훼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 준수에 있음을 알고,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도록 모압 왕에게 계책을 줍니다. 이 죄들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사람들 만큼도 깨닫지 못하고 24000명이 죽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히브리서 4:2절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쁜 소식을 듣지 않았읍니까?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읍니다.”(공동번역)


본절의 배경은 민수기13,14장에 나오는 가나안 정탐사건입니다. 정탐꾼 12 명 중 10명은 땅은 좋으나 장대한 거인들 때문에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부정적 결론을, 갈렙과 여호수아 2명은 그곳 거민들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약속이 있으니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긍정적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수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도 믿음의 깨달음이 없던 백성들은 전자 편에 서서 통곡하다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지만, 믿음을 가진 갈렙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85세에 헤브론의 거인들을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믿음이 결부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뇌수술로 유명한 칼 암스트롱 박사는 동생의 약국에 들렀다가,  우연히 가난한 소녀 줄리엣의 남동생 앤드류의 딱한 사정을 들었습니다. 그는 1.11달러를 받고 앤드류의 뇌수술을 행하였다는 선행이 전해집니다. 이는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현실 극복이나 믿음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신 주님의 기적 이야기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시면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겠다”(요14:14)는 약속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에게 우리의 문제들은 쉬운 일입니다. 갈렙 같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믿고 담대히 여러 문제와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


매일묵상(2025/3/10-14)


고린도전도7:21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1900년대 초, 가난한 목포 교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장로와 한국인 목사를 세우고, 1백여 평 예배당을 마련한 데는 뜨거운 신앙과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증거는 예배당 서쪽 출입문입니다. 서쪽 출입문은 남자 교인들을 위한 문으로, 문 위쪽 반원형 아치 조각돌에는 행서체 한문 글씨로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와 같이, ‘隆’자와 ‘熙’자 사이에 한말에 유행했던 좌우대칭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것이 어떻게 해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안내하시는 목사님은 “그게 저도 신기합니다. 아마 지금은 뽑아낸 큰 등나무에 글씨가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출입이 많았던 동쪽 출입문(여자교인들용)은 같은 형태이지만 “쥬강성일쳔구백십년”이란 아홉 글자만 새겨져 있지 태극 문양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은 타당해 보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한 때는 1910년으로, 그 해부터 한일합병으로 인한 일제의 무단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돌에 새긴 ‘大韓’글씨와 태극 문양에 담긴 ‘독립 정신’의 의미는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독립정신입니다. 전자는 죄와 마귀의 지배를 이기는 능력이고, 후자는 일제의 지배를 극복하게 한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지만, 현실에서 합법적으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야 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전도서2:17절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본절은 지혜자도 죽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지성은 물론 엄청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나, 그런 노력 끝에 지혜자가 되었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선악과를 따 먹고 지혜를 얻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스스로 영생하려는 인간에게 내리신 철퇴입니다. 전단은 전도자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싫어한다는 내용입니다. 후단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지혜와 업적을 오는 세대가 기억하지 못함을 직시하자, 모든 이생의 자랑이 괴로움으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지푸스 신화의 시지푸스가 받은 괴로움 같습니다. 시지푸스의 일은 돌을 밀어 산 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올려 놓은 돌은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야만 하니, 시지푸스의 괴로움은 영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상징하나, 고통을 끝내는 죽음이 없는 시지푸스와 다릅니다. 문제는, 죽은 다음에 오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전도서에는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하여 분명한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는 구절을 통해 사후 심판의 진리를 인식했다고 생각되기에, 세상과는 다른 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부인하는 세상이나 금생의 무의미를 탄식하는 전도자와 달리, 심판날에 있을 우리 행위에 대한 주님의 판단을 염려합니다. 따라서, 심판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축복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11:28,새번역)

전도서2:18절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본절에서 전도자는 상속자에게 모두 넘어가고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못하는 죽음을 생각해 보자자신의 모든 수고와 업적을 미워합니다. 잠언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지혜를 창조세계에 숨기셨으므로, 인생이란 각자의 삶에 감추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45년 동안 활동한 개그맨 이경규 씨는 집에 들어 오면 모든 OTT를 흩어 보며 그날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들을 흩어보며 흐름을 파악하고, 실패한 것들을 살펴 통찰력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는 그간의 경험을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이란 책에 담아 펴냈습니다. 아마, 개그맨으로 사는 동안 느낀 것들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이경규 씨는 예능의 관점에서 노력하여 돈도 벌었지만, 희극 보다 놀라운 삶의 희극을 많이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경규씨는 그 깨달음과 함께 수고한 부를 그대로 남겨야만 합니다. 전도자 역시 왕의 권세와 지혜로 쌓은 부와 유산의 운명을 숙고한 후,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기고, 선을 행하라고 교훈합니다(전3:12,13). 지혜, 재물, 노력, 업적 등은 생전에는 유익이 있지만, 그 자체로는 오는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따라서,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저는 자, 맹인, 몸 불편한 자를 청하라”(눅14:13)는 주님의 가르침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14: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사람들」
신명기2: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모압의 영토는 사해 해변을 끼고(서쪽), 아르논 골짜기를 경계로 암몬과 나누고(북쪽), 세렛 시냇가를 사이에 두고 에돔과 대치하였습니다(남쪽). 모압에 관한 자료는 거의 구약 성경에 의존합니만, 디몬의 메사 석비는 성경 본문 이해(왕하 3장)에 매우 중요합니다. 모압 도시들의 이름은 이사야서에 여럿이 등장하나(사 15장, 16장), 디본과 헤스본이 대표적입니다. 디본은 모압 신 그모스의 신전이 있었고(사15:2), 헤스본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시혼으로부터 정복한 땅이지만 그 전에 모압의 소유였습니다. 모압어는 히브리어와 가장 유사하고, 모압과 이스라엘은 같은 혈통입니다.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가 모압 조상 롯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과 전쟁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데,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모압 족속에게 아르 땅을 배정하셨기 때문입니다(신2:9).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재 물, 명예, 권력 등을 배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직면하면 이 사건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모압은 술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다가 실패하고, 끝내 미디안 여자들을 이용하여 타락시키자 하나님은 염병으로 백성들을 치셨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음행하는 남녀를 죽여 벌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시고(민25장), 그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십니다(민25:13). 제자들의 삶이란 의로우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잠언16:7,새번역)

여호수아14:9절
“그래서 모세는 그 날 ‘네가 주 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므로, 너의 발로 밟은 땅이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 하고 맹세하였습니다.”(새번역)

38년 동안 노예의 정체성을 가졌던 갈렙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자 거듭납니다. 야곱과 그 자손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간지 430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화 속에만 존재하셨으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10가지 재앙과 유월절 예식, 홍해와 광야의 이적들을 베푸신 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현현하셨습니다. 갈렙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고 이후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믿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유다지파나 하나님께 모두 충성스러웠으며, 그의 믿음은 가나안 정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정탐 내용을 보고하면서 10명은 불신앙에 서지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전쟁하자고 외쳐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민14:24). 갈렙은 믿음의 삶, 즉 하나님의 약속에 터잡아 사는 비결을 터득하였습니다. 45년 뒤 85세의 갈렙은 “나는 모세로부터 제비뽑기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땅을 소유할 약속을 받았다. 이제 난공불락의 요새 헤브론을 배정해 달라”고 담대히 요청합니다(수14:9). 갈렙과 같은 ‘믿음의 정체성’은 주님의 인정을 받을 때 생겨 나며, ‘금생과 내생’에 보상이 따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모든 것의 주님 되심을 배워가며, 이것이 영생의 핵심입니다(요17:3). 주일예배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는 방편입니다. 우리는 물론 자녀들의 예배참석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삼가 말씀을 따라 살면 행운의 열쇠를 얻고 야훼를 믿고 살면 행복의 문이 열린다.”(잠언16:20,공동번역)

매일묵상(2025/3/3-7)


열왕기상6:1-2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480년이 지나고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가 되는 해 2월에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전 규모는 길이가 27미터, 폭이 9미터, 높이가 13.5미터였으며”(현대인의성경)

남장로회 선교부는 복음의 열매를 보고 목포 선교부를 존치시켰습니다(1907). 오웬 선교사가 별세하자 담임 목사 프레스톤은 광주로 전출되었고, 대신 군산에서 활동하던 해리슨이 내려 왔습니다(1909). 같은 해 한국인 윤식명 목사가 부임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인들이 목사 생활비를 전담한다는 의미에서 ‘자립’의 실천이며 호남 최초입니다. 목포 교인들의 ‘자립’ 신앙 열기는 새 예배당 건축으로 연결됩니다. 1898년 최초의 예배당(한옥) 9평은, 1903년 18평으로 늘렸지만, 5백명의 교인을 수용하기에는 좁았습니다. 더구나 그 한옥 예배당은 남자 교인만 예배드렸고 여자 교인들은 영흥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므로, ‘한 지붕 아래서 남녀가 함께’ 예배 드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의 보고입니다. “많은 기도와 의논을 거쳐 교인들은 62×36피트짜리 석조 예배당을 짓기로 결의하였는데 이곳 가난한 교인들 형편으론 버거운 계획이었습니다….많은 여인들이 은가락지와 비녀를 빼서 바쳤고…” 1년 후 유달산 돌로 지어진 1백평의 예배당은 솔로몬의 성전(74평) 보다 더 크고, 제사장만 들어갔던 솔로몬의 성전과 달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5)

전도서2:15절
“혼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리석은 자가 당한 일을 나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얻은 유익이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솔로몬은 본절에서 자신에게도 닥칠 죽음의 숙명 앞에서 자신의 지혜의 유익이 무엇인지 따져봅니다. 먼저, 솔로몬은 인생의 길을 잘 헤쳐나갈 지혜를 소유한 자신도, 어리석은 자와 동일한 결과, 즉 죽음을 피할 지혜의 부족을 토로합니다. 죽음이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동일하게 어리석다고 선언하는 것은, 둘 다 죽음을 이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무슨 유익을 주었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는, 이 세상에 속한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여 권세, 명예, 재산 등을 얻게 하는데는 능력이 있으나, 영생을 주지 못하고 명성과 업적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세속적 지혜는 결코 이 세상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버리니, 세속적 지혜의 한계이며, ‘이것도 역시 헛되다’고 솔로몬은 탄식합니다. 세속의 지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죽음을 오직 신체적 소멸현상만으로 이해하나, 그리스도인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신체적 죽음은 결정된 것이고, 이 세상도 없어질 것이나,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음을 알고 있습니다.(히9:27). 그들은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명성과 업적을 남기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오는 세상에서 주님께 칭찬 받을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고전3:18,현대인의성경)

전도서2:16절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현대인의성경)

15절에서는 죽음 앞에서는 지혜마저도 의미 없다는 전도자의 깊은 탄식은, 본절에서 더 깊이 증폭되어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활동이 무의하여,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참된 지혜자는 누구일까요?” 만유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죠! 16절의 전단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어, 15절의 내용, 즉 ‘죽음 앞에 지혜도 의미 없다’는 진술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어 다음 세대에게 둘다 잊혀지므로, 지혜도 의미없다는 뜻입니다. 후단은 전단의 내용을 재 진술하여,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려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군사천재 케샤르,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책사 제갈공명, 정관의 치의 당태종, 서성 왕휘지, 연개소문, 태종 무열왕 등은 모두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는 굉장하였으나 지금은 영향력도 없고 기억받지도 못합니다. 아마, 수십 억년이 지나 태양계조차 사라지면, 지구와 거기에서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문명은 잊혀지고, 그 후의 세대는 우주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부활의 나라가 도래할 때 누가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 뿐입니다(요일2:17).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카르타고의 도벳
예레미야 7:31절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몰렉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도벳 사당이라 부르는데 , 유다 왕 요시야의 종교개혁(BC620) 후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도벳의 예가 발견된 바는 없습니다. 도벳의 대표적인 모습과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관습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카르타고는 주전 9세기경부터 베니게의 식민지였기에 가나안의 문화가 침투된 곳이며, 바알 함몬과 그의 배우자 타닛이 주신입니다. 카르타고의 공동묘지는 큰 고고학적 성과로서, 50년 간(1920-70) 발굴되었습니다. 공동묘지는 주전 8세기부터 로마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BC146넌) 사용되었고, 그리스의 문헌에 등장하는 카르타고의 종교적 관습을 확인시켰습니다. 무덤에는 영아 시신을 화장하여 담은 작고 붉은 항아리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인들은 희생제물로 아이들을 바쳤는데,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희생제물로 바칠 아이들을 따로 키웠다고 합니다. 전쟁과 같은 위급한 시기에 이렇게 키운 200명의 아이들이 바쳐지기도 하였으며 제사하는 동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실제로 북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방 카르타고는 별론으로 하고, 율법을 가진 유다백성들은 인신제사의 범죄를 왜 저질렀겠습니까? 두려움, 기근, 전쟁과 전염병 등의 절박한 사정을 아이들을 바쳐 신의 도움을 받으라는 귀신의 미혹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군사를 포함한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습니다(요8:31,3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히브리서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새번역)

정체성의 형성과정 중 ‘타인의 인정’이란 요소는 청소년기에 특히 중요합니다(인정철학).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가 어릴 때입니다. 복사로 신부를 도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실수로 포도주를 흘리자 신부가 화를 내고 빰을 때리며 ‘당장 나가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마라’는 말에, 티토(1892-1980)는 울며 성당을 나갔고,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카톨릭을 탄압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폴튼 쉰(1895-1979)은 동일한 실수를 하였지만, 신부는 부드럽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단다. 너는 언젠가 좋은 사제가 될 거야.’하며 위로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훌륭한 미국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칭찬이 중요합니다. 자녀를 보물로 여기면 칭찬은 자연히 나옵니다. 어느 스님이 시주를 위해 한 집에 들어 가자, 그 집 어린 아들은 부모에게 매맞고 울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갑자기 그 아이 앞에서 절하고 일어난 뒤, 놀란 부모에게 “이 아이는 장차 정승이 될 것이니 소중히 잘 기르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후 부모는 아이를 귀히 여기고 양육하였고 후일 그는 정승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스님을 찾아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님의 말입니다: ‘세상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귀히 여기면 귀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알아맞추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남의 인정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중요한 믿음의 정체성 형성의 기회가 있는데, 신실한 믿음의 삶을 통해 받는 주님의 인정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2,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5/2/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디도서 3:5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1906년 10월 담임 목사 프레스턴(남장로교)은 남감리회 선교사 저다인을 목포로 초빙, 한 주간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300여 명이 모인 목포 부흥회에 대한 프레스턴의 증언입니다. “그(저다인)를 통해 성령께서 의로움, 절제, 심판, 죄의 악함, 죄를 씻음과 지옥 형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마치 말씀이 수술용 칼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헤쳐 깊은 곳에 감추었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영혼 깊은 곳에 들어 있던 암덩어리 같은 죄악이 드러났습니다. 수십 명이 일어나 자기 영혼을 무겁게 내려 눌렸던 죄를 자백하였고 건장한 사내들이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구주의 자비로운 사랑은 그들을 감쌌고 중생과 회개와 믿음과 헌신과 봉사의 능력과 그리스도인 됨의 기쁨이 치료하는 광선처럼 그들 속에 임했습니다. 예배당 안은 거듭남과 새로운 광명을 얻은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진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으로 가득 찼습니다.”(프레스톤, ‘놀라운 집회’, The Korea Mission Field, 1906. 10월, 228쪽).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보다 3개월 앞서 목포 교인들은 ‘회개→중생→성결’에 이르는 기독교 본질 신앙을 체험하였고, 영적 각성을 통해 윤리적 갱신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목포 사회가 갖고 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씻고, 중산층과 지식인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계기였습니다.그러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목포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해 두지만 너희 생활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의롭지 못하면 너희가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현대인의성경)

전도서2:13절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솔로몬은 12절에서 자신의 지혜와 업적을 회상하며, 후대의 왕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기술하고, 본절은 그 지혜의 탁월함을 빛과 어둠의 비유로 강조합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을 통한 세속적 지혜이며, 죽음 앞에서는 양자가 동일합니다. 솔로몬 역시 세속 지혜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히 2장을 마무리 합니다. 본문은, “어리석음이 미치지 못하는 지혜의 탁월함이 분명히 있다”는 취지입니다. 해 아래에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범사에 많습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속담과 같이, 지혜는 머리 속에 있는 ‘눈’입니다(14). 이 세상에 놓여 있는 수 많은 위험을 보고 피하며, 대응하고, 치료법을 내놓습니다. 지혜란 눈이 없다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지혜’는 때와 시기를 분별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바른 처신을 할 줄 아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좋은 예로서, 그의 언행록이 논어입니다. 공자는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그의 교훈은 ‘인(仁)’ 즉,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克己復禮)’ 사상이 핵심이나, 죄와 사망을 이길 능력은 없습니다. 반면,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십자가와 부활’에서 가르침의 정점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비할 바 없는 윤리적 지혜(십자가)와 주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부활)을 경험하므로, ‘논어’ 보다 탁월합니다. 생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자 기톨릭에 귀의하고 세상을 떠난 이유입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시편119:99).

전도서2:14절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13절은 지혜의 탁월을 밝히고, 본절은 탁월에 대한 강조와 한계를 설정합니다. 전단에서, 지혜자는 미련한 사람과 달리 눈이 세 개나 있습니다. 두 개는 얼굴에 달려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나머지 하나는 머리 속에 있어 사물과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미련한 자는 세 번째 눈, 즉 머리 속에 눈이 없는 ‘지혜의 맹인’으로, 어둠 속에서 헤매입니다. 후단은, 현격한 차이를 갖는 지혜자나 미련한 자나 모두 죽을 운명임을 한탄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은 지혜를 언급하나, 성경적 지혜는 하나님을 전제하고, 세 가지 유익을 줍니다: (1) 도덕적 차원 :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게 하나, 미련한 자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는데”(잠2:13), 어둠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상태입니다. (2) 현실의 차원: 지혜는 인생의 길을 볼 수 있게 하는 빛과 같으나, 미련한 자는 어두운 방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살아갑니다. 그는 ‘성공적인 삶의 방법’(=지혜)을 모릅니다. (3) 영적 차원: 지혜는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겨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여 축복을 받게 하나, 미련한 자는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성경적 의미의 지혜자 판정 기준입니다: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②이웃과 화목한가? ③자신의 일에 능숙한가?(잠22:29). 신약에 이르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가 진정한 지혜자인데, 그는 죄사함과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암몬 신 몰렉
예레미야32:35절
“힌놈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세워 몰렉 신에게 그들의 자녀를 제물로 바쳤다. 그들이 이런 끔찍한 일을 행하여 유다를 죄 가운데 빠지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며 내가 생각한 일도 아니다.”(현대인의성경)

암몬의 신은 밀곰(왕상11:5) 혹은 몰록(왕상11:7), 때로는 몰렉이고도 불렸는데(레18:21), 여기서는 몰렉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몰렉의 어원은 임금이란 의미의 ‘멜렉’과 같은 어원입니다. 몰렉은 바알과 유사한 신으로 암몬뿐 아니라, 베니게, 베니게의 식민지 북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뻗쳤습니다. 성경은 몰렉 숭배를 넘어, 그 종교적 관습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몰렉의 제사에는 아이들이 희생제물로 바쳐졌습니다(레18:21). 성경은 그런 인신공양의 대가는 죽음임을 선언합니다(레20:2-5). 이렇게 극명한 죄악임에도, 솔로몬은 몰렉을 위한 신전을 예루살렘 성전 바로 옆에 서 있는 감람산에 지어 암몬 여인과 함께 경배했고, 그 몰렉 신전은 300년을 존속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동쪽과 남쪽에 골짜기가 있어 마치 언덕의 형태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그중 동남쪽의 골짜기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지명이 붙었고, 골짜기 가운데 몰렉에게 제사지내는 곳을 ‘도벳’으로 불렀습니다. ‘도벳’은 ‘북’의 뜻을 가진 ‘토프’의 파생어로서, 아이들이 희생제사로 바칠 때 나오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북을 쳤던 것 같습니다. ‘도벳’은 유다 임금 요시야에 의해 파괴되었고, 어떤 사람도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왕하23:10). 정당한 국가권력은 악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2).

여호수아14:12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개’란 의미)은 민수기13:6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유대 지파의 대표로서(40세), 40일 동안 적지를 탐지한 용감한 스파이였습니다. 갈렙의 혈통에 관해서는 쟁론이 있습니다. (1)에돔 족장 그나스(창36:11) 후손이라는 설. (2)가나안의 그니스 족속(창15:19)설, (3) 유대지파에 속한 사람의 이름이 그니스였다는 설 등이 있지만, 유대지파의 대표로 선출된 것으로 보아 정통 유대인으로 판단됩니다. 아마, 그니스 족속의 여자가 조상 중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상 야곱의 12아들의 아내는 요셉만 제외하고 모두 가나안 여인입니다. 갈렙 앞에는 늘 ‘여분네의 아들’이란 수식어가 붙는데, 동명이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갈렙의 명성은 혈통(가문)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처럼, 가나안 정복 시 보여준 충성과 용기 때문입니다. 다만, 갈렙의 영웅적 행동의 근거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야훼께서는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려고 이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킨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갈렙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갈렙의 순종은 믿음의 정체성에서 나왔고,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따른 경험(이적)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옳은 일을 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받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습니다.”(히11:33,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5/2/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 4: 31절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새번역)

1903년 광주가 새로운 도청 소재지가 되자 남장로회 선교부는 목포에 있던 벨, 오웬, 변창인과 김윤수를 광주로 보냅니다(1904. 12). 노련한 복음전도자들이 떠나고, 내한한 지 두 달밖에 안된 프레스턴이 목포 선교를 맡게 되자 고민이 컸습니다. 프레스턴의 1905년 선교 보고입니다. “…벨과 오웬 가족이 광주로 떠난 후 목포와 남쪽 지방 사업은 제 몫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다음 주일 저는 처음으로 한국말로 설교했습니다….저로서는 최선을 다해 설교하였으나, 교인들은 능숙한 선교사의 설교를 듣다가 제 설교를 들으며 ‘이젠 글렀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때부터 교인들은 마음의 불안을 씻고자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목사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기 시작했고 자발적으로 모여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영적으로 각성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였고, 지금까지 그런 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인이 지난 해 보다 배가 늘어(현재 2, 3백 명) 예배당을 확장해야 할  형편입니다”(1905. 9월, 프레스턴). 위기가 기회가 되었으며, 그런 열기는 계속되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보다 3개월 앞서 영적 각성을 통한 윤리적 갱신을 이루면서 호남지역 최초로 교회 자립을 달성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한국 선교는 ‘교회-병원-학교’ 라는 삼각 선교와 네비우스 박사(1890년)의 자치, 자전(自傳), 자립을 중심한 토착화 전략의 열매라 하겠습니다.“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24:6)

전도서2: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전술한 4-10절에서, 사업적 성공과 번창, 많은 쾌락과 즐거움을 누렸다고 진술하나, 본절에서 그런 삶을 돌아보면서 곰씹고 성찰합니다. 성찰의 결과는 가장 흔한 세 가지 문구 – ‘무의미함, 유익이 없음, 해 아래’-로 표현되며, 매우 부정적입니다. 솔로몬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발견했지만, 그의 탐구 목적인 ‘의미’와 ‘유익’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즉 그는 열심히 일하여 얻은 성과가 영원한 결과를 낳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이 온갖 지혜를 쏟아 만든 성전, 낙성식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하늘의 인정을 받은 그 성전조차 지금 누가 기억합니까? 이와 같은 성찰은 솔로몬을 지혜자로 만들고,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구별시키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자신에게 형과 유업을 나누게 해 달라는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신 뒤, 탐심의 헛됨을 한 부자의 비유로 알려줍니다. 그 부자는 풍년이 들어 곡식 등으로 재산이 더욱 불어나자 부족한 창고를 탄식합니다. 그는 창고를 넓히려는 생각에 골몰하며, 자신의 부요를 즐거워 하나, 하나님은 부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그의 어리석음을 탄식하십니다. 부자는 마땅히 그 재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등 하나님을 부요하도록 만들었어야 합니다. 다만, 솔로몬의 성찰의 지혜는 행함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역시 헛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2:12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2:12-23절의 단락은 죽음 앞에서, 지혜(12-17)와 수고(18-23)도 무의미함을 말합니다. “내가 돌이켜”란 어구를 사용하여, 솔로몬은 즐거움과 쾌락으로부터 이미 다룬 지혜와 어리석음의 주제로 돌아갑니다(1:12-18절). 전단에서 지혜, 망령됨, 어리석음 세 낱말이 등장합니다. 통상 성경에서 지혜(호크마)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혜’(시111:10)를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 지혜, 즉 하나님을 배제한 이성의 통찰을 뜻합니다. ‘망령됨’의 뜻은 ‘도에 지나친 상태’  혹은 ‘미친 짓’입니다. ‘어리석음’은 지혜와 대척 관계에 있는 낱말로서, 성경은 영적·도덕적으로 미련하고 악한 행동을 지칭하나, 여기서는 인간의 이성조차 따르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후단은 ‘그 왕의 후계자가 행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무엇이 있는가?’(NIV)를 묻고,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보아 솔로몬의 지혜, 권세, 부를 능가하는 왕은 없습니다. 그는 전무후무한 지혜와 권세, 업적을 갖추었으나, 미련한 자의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었으니 애통해 할 만합니다(15).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 그 자체입니다. 솔로몬 보다 더 큰 분이 오셔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켜야 하는데,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믿음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앗수르와 암몬

열왕기상 11:7절
“(솔로몬이)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아브라함의 시대에 바벨론 유역의 4개의 왕국은, 사해 부근의 왕국들(소돔, 고모라 등)이 조공을 중단하자, 1,800km를 원정하였다는 기사처럼(창14장).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간의 항쟁의 역사는 깊습니다. 암몬 왕국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습니다.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쟁이 발발합니다. 성경에 언급은 없지만, 아람, 이스라엘, 암몬을 포함한 12개의 가나안 지역 왕국이 연합하여 제국 앗수르(살만에셀 왕 3세)와 싸워 패배한 전쟁으로, 쿠르크 석비(1861년 출토)에 전모가 적혀 있습니다. 그 석비는 북왕국 아합이 2,000대의 병거를, 암몬 임금 루후비의 아들 바아사도 병사를 보냈다고 밝히는데, 그 암몬 임금의 이름은 암몬 연대기 작성의 기초입니다. 120년이 지나서, 앗수르는 아람과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남왕국 유다와 암몬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주전722 경). 디글랏 빌레셀 3세의 기록은, 당시 암몬 임금은 사니푸, 그의 아들은 푸두-일루였고, 암몬의 조공액은 유다의 5분의 1임을 보여줍니다. 암몬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멸망당합니다(주전259년). 최약체인 암몬 왕국은 가증한 우상 몰렉(밀곰)을 믿었으나, 북왕국 이스라엘(주전722년 멸망)이나 남왕국 유다(주전586년) 보다 오래 생존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북왕국은 벌써 주님을 떠났고, 남왕국은 모세율법, 선지자들(이사야, 예레미야), 성전을 가졌으나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12:47,48a).


여호수아14:9절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도박’은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대는 것’이고, ‘투자’는 ‘이익을 얻으려고 어떤 일이나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음’으로 정의됩니다.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도박은 오로지 돈만 벌려고 하는 행태로 도파민 쾌감을 갖게 하지만, 투자는 몰입의 ‘여정’을 즐기게 함으로 게임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둘다 현재에 시간, 돈, 노력을 희생하고 장래의 보답을 받으려는 외형을 갖고 있으나, 차이는 ‘자기 철학’의 존재 여부입니다. 만약 투자에 대한 자기 철학이 없다면 끝까지 도박에 불과합니다. ‘자기 철학’의 핵심은 스토리텔링입니다. 사람은 여정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인천에서 부산을 갈 때, 중간 중간의 휴게소, 경치좋은 곳 등을 감상하고, 함께 탄 가족, 친구들과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산까지 가는 여정을 즐기는 중에 사람은 성장하며, 돈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모든 것-공부,직장,결혼,교육,자녀출산 등-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살아가는 신앙 생활은 어떻습니까? 기복신앙은 과정은 신경 안쓰고 오직 복이라는 보상만 바라기 때문에, 도박에 가깝고.,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신경을 쓰지, 보상은 주님께서 주심을 믿기 때문에 투자에 가깝습니다. 신자의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재생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휼륭한 예가 믿음의 사람 갈렙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1,2 현대인의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