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입니다. 그는 걸을 때마다 발에 가해지는 심한 통증으로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수 킬로 떨어진 작업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작업량은 많았으며 배급 식량은 적었습니다. 프랭클은 “오늘 밤 무엇을 먹게 될까?” “아껴둔 담배 한 개비로 스푸와 바꿀까?” “다른 작업반에 끼게 되었다가 짐승 같은 감독이 있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억지로 돌려 자신이 불이 환히 켜지고 아늑한 강의실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의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먼 관점에서 보고 말하게 되었고, 그 자신과 그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흥미로운 정신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정신분석학자로서 수용소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세상을 볼 때의 과정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열매 맺을 때까지 믿음으로 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주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5:5). 애굽 시위대장에게 종으로 팔린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물음을 이끌고, 그 물음은 소망과 신실한 삶을 낳습니다. 빅터 프랭클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요15:9).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전도서2:4절(1)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전도자는 지혜와 쾌락 추구의 조화를 시도하다 무의미를 발견하고(3), 본절부터 “성공을 쫓는 삶”을 묘사하며 그 얻은 결과(허무함)를 토로합니다(4-11). 인생이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도외시 하면 율법의 목적인 ‘이웃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고, 이것은 더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이루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쫒는 삶’ 즉, ‘자아 실현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장 고상하게 여깁니다. 전도자 역시 쾌락 다음에 시도한 삶이었으나, 큰 성공도 헛됨을 체험합니다(2:11). 솔로몬은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는 고백으로 4절을 시작합니다. ‘크게 하였노라’는 대목은 왕 솔로몬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노력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크게 일으켰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대표적인 사업은 집들, 포도원, 여러 동산과 과원, 각종 과목을 심고, 못들을 파고, 남녀종들을 얻고, 은금을 축적하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을 많이 둠으로써, 자신의 부, 존귀, 권세를 과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여러 번 반복됨으로 “하나님을 위한”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방법 또한 정당해서 자기를 중시 하는 세상적 관점에서는 책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하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개인주의적인 성공을 추진하고 성취하였으나, 자신조차 참된 만족과 의미를 얻지 못하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전도서2:4절(2)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솔로몬은 왕궁, 바로의 딸을 위한 건물, 그 밖의 많은 건축물을 지었는데(왕상7:1-8), 스바 여왕의넋을 뺏았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4,5). 솔로몬은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 등도 건축하는 등, 계획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다 건축하였지만(대하8:3-6), 그의 성공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중한 노역이 있었음을 볼 때, 솔로몬의 건축 사업은 지나쳤습니다. 결국 ‘중한 노역’은 솔로몬 사후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도원을 일구며’란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 농업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은 먼저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며, 잡목이나 돌로 울타리를 만들며,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짓고, 포도주틀을 만드는 작업 등이 포함됩니다. 대략 10년이 걸리니 쉬운 일은 아니나, 중요한 산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포도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 왔습니다(왕상21:3). 왕 아합 시대의 나봇도 애써 좋은 포도원을 가꾸었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탐욕 때문에 죽게 됩니다. 포도원으로 상징되는 재물과 번영은 좋은 것이나, 나봇과 그 가족의 목숨을 가져갔으니 헛되다 하겠습니다. 솔로몬도 포도원 사업을 성공시켰지만 자신을 위해 만든 많은 포도원들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필요를 넘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죠! 모든 사람은 삶의 기반을 닦아야 하나 그 당위성이 탐욕으로 이끄는 것을 보면 멈추어야 합니다. 탐욕은 달성되어도 삶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우리의 경제적 삶에 많은 가르침을 준다 하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전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18:23절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아람의 신들 중 ‘하다드’는 구약 시대에 근동지역에 바알처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윗과 싸웠던 아람 소바의 임금 하닷에셀(하다드는 도움)이나 아합을 괴롭힌 아람 임금 벤하닷(하다드의 아들)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초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의 신들을 섬겼습니다(삿10:6). 고대 근동 지역은 농업사회이므로 비의 신은 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다드는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일반적으로 한 손에는 번개, 다른 손에는 철퇴를 갖고 있으나, 황소의 형상도 자주 발견됩니다. 당시 신화를 보면, 최고의 신이 된 하다드는 바다의 신 얌(yam)을 이겼으나, 죽음의 신 못(mot)에게 죽자 온 세상은 메마르게 되고, 결국 그를 되살립니다. 아람 사람들은 하다드가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여름이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비가 오는 겨울이라 믿었습니다. 시돈과 두로 지역에서는 바알을 비의 신으로 숭배하였기에 하다드와 바알을 동일하게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은 바알 곧 하다드에게 제사 지냈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수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누가 비를 내리는 신인가를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내기를 하였고, 바알 곧 하다드 신의 제사장들과 겨루어 이겼습니다(왕상18장).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전쟁, 영적인 전쟁터로 부르심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과 다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하고 노력해야만 하나, 성령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느헤미야 13:31절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1979. 12.12 사태는 신군부가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킨 사건이며,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은 고인이 되었으나 역사의 평가는 엄중합니다. 비시 444년 느헤미야는 페르샤 황제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신군부와는 절차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그는 페르샤 왕의 술관원으로 봉직하다가 유대 땅에 일어난 비참한 사건들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하는 중 응답받아, 적법하게 유대 총독으로 부임합니다(적법절차). 총독으로 부임 후 많은 반대에 직면하나, 짧은 시일 내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예루살렘의 치안은 물론, 모세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확립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였고, 토지도 사지 않고(no 축재), 총독의 녹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식탁에는 매일 150명이 넘는 많은 동족을 초빙하여 위로하고 민정에 신경을 썼습니다. 경천애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의 속마음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상을 욕망하였습니다(13:22절과, 13:31).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소원이 자발적 희생으로 이끈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그 맡은 임무를 다한 느헤미야의 선행을 드러내시고 칭찬하시며 영생으로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주를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받을 보상이며, 생명의 부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