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13-17)


마태복음 5: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입니다. 그는 걸을 때마다 발에 가해지는 심한 통증으로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수 킬로 떨어진 작업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작업량은 많았으며 배급 식량은 적었습니다. 프랭클은 “오늘 밤 무엇을 먹게 될까?” “아껴둔 담배 한 개비로 스푸와 바꿀까?” “다른 작업반에 끼게 되었다가 짐승 같은 감독이 있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억지로 돌려 자신이 불이 환히 켜지고 아늑한 강의실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의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먼 관점에서 보고 말하게 되었고, 그 자신과 그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흥미로운 정신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정신분석학자로서 수용소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세상을 볼 때의 과정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열매 맺을 때까지 믿음으로 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주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5:5). 애굽 시위대장에게 종으로 팔린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물음을 이끌고, 그 물음은 소망과 신실한 삶을 낳습니다. 빅터 프랭클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요15:9).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전도서2:4절(1)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전도자는 지혜와 쾌락 추구의 조화를 시도하다 무의미를 발견하고(3), 본절부터 “성공을 쫓는 삶”을 묘사하며 그 얻은 결과(허무함)를 토로합니다(4-11). 인생이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도외시 하면 율법의 목적인 ‘이웃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고, 이것은 더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이루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쫒는 삶’ 즉, ‘자아 실현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장 고상하게 여깁니다. 전도자 역시 쾌락 다음에 시도한 삶이었으나, 큰 성공도 헛됨을 체험합니다(2:11). 솔로몬은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는 고백으로 4절을 시작합니다. ‘크게 하였노라’는 대목은 왕 솔로몬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노력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크게 일으켰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대표적인 사업은 집들, 포도원, 여러 동산과 과원, 각종 과목을 심고, 못들을 파고, 남녀종들을 얻고, 은금을 축적하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을 많이 둠으로써, 자신의 부, 존귀, 권세를 과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여러 번 반복됨으로 “하나님을 위한”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방법 또한 정당해서 자기를 중시 하는 세상적 관점에서는 책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하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개인주의적인 성공을 추진하고 성취하였으나, 자신조차 참된 만족과 의미를 얻지 못하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전도서2:4절(2)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솔로몬은 왕궁, 바로의 딸을 위한 건물, 그 밖의 많은 건축물을 지었는데(왕상7:1-8), 스바 여왕의넋을 뺏았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4,5). 솔로몬은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 등도 건축하는 등, 계획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다 건축하였지만(대하8:3-6), 그의 성공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중한 노역이 있었음을 볼 때, 솔로몬의 건축 사업은 지나쳤습니다. 결국 ‘중한 노역’은 솔로몬 사후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도원을 일구며’란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 농업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은 먼저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며, 잡목이나 돌로 울타리를 만들며,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짓고, 포도주틀을 만드는 작업 등이 포함됩니다. 대략 10년이 걸리니 쉬운 일은 아니나, 중요한 산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포도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 왔습니다(왕상21:3). 왕 아합 시대의 나봇도 애써 좋은 포도원을 가꾸었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탐욕 때문에 죽게 됩니다. 포도원으로 상징되는 재물과 번영은 좋은 것이나, 나봇과 그 가족의 목숨을 가져갔으니 헛되다 하겠습니다. 솔로몬도 포도원 사업을 성공시켰지만 자신을 위해 만든 많은 포도원들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필요를 넘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죠! 모든 사람은 삶의 기반을 닦아야 하나 그 당위성이 탐욕으로 이끄는 것을 보면 멈추어야 합니다. 탐욕은 달성되어도 삶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우리의 경제적 삶에 많은 가르침을 준다 하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전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18:23절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아람의 신들 중 ‘하다드’는 구약 시대에 근동지역에 바알처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윗과 싸웠던 아람 소바의 임금 하닷에셀(하다드는 도움)이나 아합을 괴롭힌 아람 임금 벤하닷(하다드의 아들)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초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의 신들을 섬겼습니다(삿10:6). 고대 근동 지역은 농업사회이므로 비의 신은 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다드는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일반적으로 한 손에는 번개, 다른 손에는 철퇴를 갖고 있으나, 황소의 형상도 자주 발견됩니다. 당시 신화를 보면, 최고의 신이 된 하다드는 바다의 신 얌(yam)을 이겼으나, 죽음의 신 못(mot)에게 죽자 온 세상은 메마르게 되고, 결국 그를 되살립니다. 아람 사람들은 하다드가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여름이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비가 오는 겨울이라 믿었습니다. 시돈과 두로 지역에서는 바알을 비의 신으로 숭배하였기에 하다드와 바알을 동일하게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은 바알 곧 하다드에게 제사 지냈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수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누가 비를 내리는 신인가를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내기를 하였고, 바알 곧 하다드 신의 제사장들과 겨루어 이겼습니다(왕상18장).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전쟁, 영적인 전쟁터로 부르심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과 다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하고 노력해야만 하나, 성령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느헤미야 13:31절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1979. 12.12 사태는 신군부가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킨 사건이며,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은 고인이 되었으나 역사의 평가는 엄중합니다. 비시 444년 느헤미야는 페르샤 황제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신군부와는 절차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그는 페르샤 왕의 술관원으로 봉직하다가 유대 땅에 일어난 비참한 사건들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하는 중 응답받아, 적법하게 유대 총독으로 부임합니다(적법절차). 총독으로 부임 후 많은 반대에 직면하나, 짧은 시일 내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예루살렘의 치안은 물론,  모세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확립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였고, 토지도 사지 않고(no 축재), 총독의 녹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식탁에는 매일 150명이 넘는 많은 동족을 초빙하여 위로하고 민정에 신경을 썼습니다. 경천애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의 속마음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상을 욕망하였습니다(13:22절과, 13:31).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소원이 자발적 희생으로 이끈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그 맡은 임무를 다한 느헤미야의 선행을 드러내시고 칭찬하시며 영생으로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주를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받을 보상이며, 생명의 부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매일묵상(2025/1/6-10)


고린도전서15: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엘리자베스 로스는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로스 의사는 몇 해 전 병원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중환자실에 갈 때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담당 의사인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복도에서 청소하는 그 아주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도대체 내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죠?” “그냥 병실을 청소할 뿐이에요” 그 말을 들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유를 몰랐으나, 3주 정도 지나 깨닫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는 몇 해 전 여섯 아이 중 하나를 잃었습니다. 응급실로 가서 의사가 오기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폐렴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가끔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면 환자들이 몹씨 겁에 질려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다가가 그들을 쓰다듬으면서 나도 죽음을 보았는데 죽음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냥 함께 있어 줍니다….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러면서 로스는 사랑이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며 돌보아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로스는 비그리스도인입니다만, 호스피스 환자들과 같은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인간이 그 이상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면 영생이 있음과 그 영생이 우리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혜자라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 특히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전도서 2: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1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2절은 그 ‘쾌락’를 ‘웃음’과 ‘희락(=쾌락)’으로 나눈 뒤, 전자는 ‘미친 것’으로 후자는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웃음’과 ‘희락(=쾌락)’이란 두 단어는 성경에서 교차해 사용되나, ‘웃음’은 피상적인 기쁨을, ‘희락’은 좀 더 진지한 기쁨을 표시합니다. 이같은 뉘앙스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나 즐거움은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취지를 말합니다. 잠언은 ‘웃음’과 ‘희락’의 추구가 종종 ‘슬픔’과 ‘근심’을 숨기기 위함임을 지적합니다(잠언14:13). 게임, 술, 마약, 도박에 빠져 사는 현실도피의 삶이죠! 따라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그 삶에 있는지 파악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전도자의 충고를 따르려면 웃음과 쾌락 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직업을 갖고 우리 손으로 수고한 만큼 벌고 그 한도에서 살려는 태도입니다. 경건한 삶의 기초가 여기 있습니다. 경건한 삶에도 당연히 즐거움과 웃음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웃을 때가 있다’(3:4)고 선언합니다. 다만, 바보와 현자의 경우, 웃고 즐거워 하는 시기와 대상에서 차이가 납니다. 바보는 악을 행함으로(부정축채, 더러운 농담 등), 현자는 지혜(선행과 덕을 세움 등)를 행함으로 웃고 즐거워 합니다(잠10:23).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웃음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전도서2:3절(새번역)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도자는 삶의 의미 혹은 유익의 원천으로써 쾌락(즐거움)을 구체적으로 탐구합니다. 시작은 가장 감각적인 것, 즉 술입니다. 전도자는 짧은 인생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지 방탕에 몰입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툼이 있으나, 술과 관련한 실험에서 전도자는 품위를 유지하였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그래서, 루폴드는 “전도자는 술을 방탕한 자가 아니라 감정가로서 탐구했다”고 강조하는데, 근거는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개정개혁)라는 부분입니다.” 다만,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개정개역)라는 표현을 보아 전도자가 술중독은 아니지만, 술에 자신을 맡겨 본 경험은 가져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잠언은 ‘어리석음’을 지혜의 반대로, 전도서에서는 ‘악함’(7:25)의 동의어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세상이 정의하는 쾌락을 탐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지 보려고 술잔의 바닥까지 비어 본 것입니다. 물론, 그 실험은 무의미로 귀결됩니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삶에 대한 세상의 답은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의 상징인 ‘술’에 대한 탐익은 ‘절제’를 요구하시는 성령님의 뜻에 거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 하고,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성령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5:18,새번역).

사도행전13:1절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의 지도층은 출신과 지역이 서로 다른 5명입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 레위인이고, 시므온은 흑인인데, 그의 별명이 ‘니게르’(라틴어 ‘검다’)이기 때문입니다. 루기오는 북아프리카(현 리비아 지역) 출신의 로마인으로 보이고,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 분봉왕과 함께 자란 인물로 높은 지위의 귀족입니다. 사울은 튀르키에 남서쪽 다소라는 큰 도시 출신의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방 선교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성령께서 이들 중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여 사도로 소아시아 지역에 보내 본격적인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후 교회는 이 모델을 따라 준비된 일꾼들을 각 나라와 지역으로 파송하였고, 1800년이 지나자 조선에도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으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겪었던 출신과 신분 사이의 갈등을 함께 겪었고, 이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해결해 왔습니다. 제1차, 2차 대전을 겪고 비로소 깨달은 앙리 베르그송처럼, 지금 대한민국은 인간이 만든 법률 보다 상위의 가르침, 즉,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웃 사랑)을 배울 때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주님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만민을 포용하고 화목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말론적 실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는 그런 갈등을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 해결한 역사 그 자체이며, 그리스도의 법의 가장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연동교회의 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갖바치(가죽신 제조) 천민 고찬익(1857)은 자신의 신분을 비관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중, 선교사 게일에게 전도 받고 회심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일화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받은 그날, 고씨는 꿈에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움에 “고…고…고”라고만 대답하자, 다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에, “내 이름은 고가이고, 싸움꾼, 술꾼에 망나니올시다. 뉘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울며 대답합니다. 그때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고씨의 몸을 치면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하고 사라집니다. 고씨는 꿈에서 깨어나 전도지를 또 읽고 게일을 찾아 갔고, 주님을 영접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게일 선교사는 고씨에게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찬익 贊翼’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1896년 무어 선교사는 천민 거주지인 종로 5가 부근에서 연동교회를 창립하고 1900년 게일 선교사가 담임 목사를 맡습니다. 고찬익은 조사로서 갖바치, 백정 등에게 전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1905년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의회가 열렸습니다. 교인들은 양반이 아니라 천민 고찬익을 첫 장로로 선출하였습니다. 일부 양반들은 교회를 떠났지만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천 이백석 되는 예배당까지 신축하였습니다(1908). 세상을 떠났을 때(1908), “고찬익 장로는 한국에서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게일 선교사)으로 평할 정도로 그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매일묵상(2025/1/2-3)


누가복음13:13절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본문은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보시자 그를 앞으로 불러내 고치신 장면입니다.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나 회당장은 안식일을 강조하여 주님의 행위가 제 4계명을 깨뜨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관점과 생각도 다채롭습니다. 인생이란 어떤 관점을 갖고,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형형색색의 철학이 등장하나, “만유의 주님이 통치하시므로, 너는 잔꾀를 부리지 말아라”는 잠언의 핵심적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섭리 가운데 다스리면서, 사람들, 특히 하나님 백성의 대화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선지자 말라기는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 (말3:16,새번역)고 밝힙니다. 말이란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터져 나온 결과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첫걸음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 경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우리의 삶이 다시 세상을 비취어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해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고린도후서2: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요셉 시주(Joseph R. Sizoo)는 그의 책 「우리는 아직 소망할 수 있다, Still We Can Hope 에서 “우리는 원자의 신비를 파악했지만 산상수훈을 거절했다. 우리는 지혜없이 놀라운 일을 그리고 양심없이 힘을 얻었다. 우리는 핵에 관한한 거인이 되었으나 도덕에 관한한 어린아이들이다.” 고 한탄합니다. 인류는 양자역학을 알자 곧 바로 멸망할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지식의 나무가 아담의 마음을 드러낸 것처럼, 원자에 대한 지식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이 악한 마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마치 향수와 같습니다. 방안에 향수병을 놓으면 필연적으로 향기가 나지만, 반응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싫어합니다만, 누구도 향수 냄새가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와 아이 성을 멸망시키자, 그 소식은 가나안 땅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그러나 아모리 족속 다섯 왕은 연합하여 대적하였고, 기브온과 그 인근 3도시는 항복하였습니다. 전자는 멸망당하였고 후자는 생명을 살렸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취할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담당하겠습니까? 복음의 제사장들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 받을 유일한 방법은 마음에 악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매일묵상(2024/12/30)

(2024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시편23:5절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새번역)


벌써 2024년이 저물고, 2025년이 다가왔습니다. ‘매일묵상’은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서 출발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지혜입니다. 2024년을 되새겨 보고 우리가 연초에 계획한 것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감사한 것들과 회개할 것들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나 계획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국가에 대하여도 같습니다. 연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혼란이 대한민국의 정치를 강타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잘 정리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특히, 어제 무안공항의 대참사로 무려 179명의 탑승객이 사망하였습니다. 재발방지와 유가족 위로를 위해 주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끝맺음은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입니다. 2025년은 나만의 좋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도록 마음에 다짐하고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언3:6,새번역).

매일묵상(2024/12/23-27)


마태복음1: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나는 평생 낡은 트럭만 가지고 있어서 항상 새 트럭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소원을 이루자 이런 일이 있다니…” 해튼 씨는  빨간 색의 새 트럭을 샀지만, 바로 병원에 가서 결장암 수술을 받았고, 간호사인 로버타 메스너는 한 주에도 몇 번씩 방문하며 돌보았습니다. 둘은 자주 트럭에 앉아 그들의 믿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해튼 부인이 혼자 남게 되는 것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대화 후 로버타는 부엌으로 가서 해튼 씨의 상황을 알리면서, 해튼 부인이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해튼 씨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점점 더 평안을 얻었습니다. 해튼 씨의 병세가 악화되어 로버타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몸을 기울이자,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면서 내게 손을 내밀고 계세요. 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거예요” 속삭였습니다. 그날 저녁 해튼 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호사 로버타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방부제 가득한 병실에서 해튼 씨를 만났다면, 그의 진정한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현재 있는 곳에서 만나야 한다.” 이것은 주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21-27쪽, 참조)

「빈 구유」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성탄절이 끝난 직후, 앨리스는 남편과 세 자녀와 함께 성탄절 장식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남편 잭은 큰아들 네이트의 도움을 받아 트리를 치웠고, 사라는 다섯 살 된 둘째 아이 나탈리의 도움을 받아 예수 탄생 장면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사라와 나탈리가 부서지기 쉬운 인형을 조심스럽게 포장하는 동안, 나탈리가 외쳤습니다. “누군가 구유 속 아기 예수님을 훔쳐 갔어요!” 생각해 보니 이 번 성탄절은 주인공되신 예수님은 도난 당하여 사라졌고 빈 구유만 축하하였던 것입니다. 범인이 누군지 대략 추측이 갔지만, 남편 잭은 맏딸 사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음, 아기 예수님이 올해는 상자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가 봐.” 라는 말을 하며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 앨리스의 집에서 일어난 ‘빈 구유 사건’은 우리 믿음 생활을 되새겨 보도록 합니다. 매년 12월 25일이 되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즐거워 합니다. 성탄절 음악, 맛 있는 음식들, 포장지로 싼 선물, 그리고 캐롤을 즐깁니다만, 정작 중요한 성탄절의 의미는 잃어버립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마음에 간직한다면, 성탄절의 메시지는 연중 내내 생생한 현실이 되어, 좀 더 화평의 삶을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절은 “위로와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날로서, 먼저 천군과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누가복음 2: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누가복음의 성탄절 이야기는, 여행 중 짐승의 우리에서 해산하고,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이어 헤롯이 죽이려고 찾았고, 애굽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스럽고 심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성탄절 메시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깊은 행복과 심오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 볼 것이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눅2:26,27). 그것이 소망입니다. 시므온과 같은 소망은 자기의 문제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합니다. 따라서, 소망의 기초는 믿음이고,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주님의 백성들을 언급합니다. 첫째,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입니다. 그들은 밤낮 기도하였지만 늙기까지 자녀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체험과 함께 아들 요한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둘째,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동정녀의 잉태라는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겪을 때, 이 두 분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낳고 기르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셋째, 여선지 안나는 60년을 청상과부로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경건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이루심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도착할 때까지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사람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1:12-18절이 인간이 높이 평가하는 지혜 추구조차 허무함을 역설한 것이나, 2:1-11절은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과 성공의 헛됨을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은, 사변적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움직이는 현실에 바탕을 둔 실제적 교훈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 전도자는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을 포함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을 경험해 본 결과,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쾌락조차 무의미함을 선포합니다. 전도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의 쾌락 추구는 참된 만족 여부의 발견을 위해 절제하면서 시도한 것이지 결코 방탕이 아닙니다. 한편, “너는 낙을 누리라”에서 ‘낙’은 ‘토브=선, 좋음, 희락’의 번역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주장됩니다. ① ‘선한 것을 발견해 내라’ ② ‘쾌락을 즐겨라’ 전자는, 쾌락 탐구를 통해 의미 있는 삶의 발견을 시도하였음을, 후자는, 쾌락의 추구를 심도 있게 시도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웃음’ 혹은 ‘술’ 등과 같은 구체적 쾌락 추구 수단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후자가 타당합니다. 결론은, ‘이것도(쾌락 추구) 헛되도다!’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이미 내린 결론을 또 다시 검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쾌락’을 추구할 경우 지혜자 솔로몬과 달리 방탕으로 치닫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절제 없는 쾌락은 사망의 길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

매일묵상(2024/12/16-20)


갈라디아서 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는 선행이며,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 선행을 재료 삼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레이실라 비치의 글입니다. “교직에 몸담은 첫해의 선생님은 젋고 열정적이었다. 제일 처음 부임한 학교는 쿠바 하바나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있었다. 선생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이는 아홉 살 난 여자아이로 갈색머리에 표정으로 가득찬 눈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항상 단정했으나 신발은 매우 낡아 2학기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넝마 조각 같았다. 선생님은 가죽으로 리본이 달린 새 신발을 한 켤레 사 주셨다. 너무 예뻤다. 학년 말 선생은 하바나 시의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고, 30년을 가르치신 후 은퇴하여 글을 쓰고 계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폐렴이 심하게 걸려 작은 개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병원에 종사하는 분들의 탁월한 서비스에 놀랐다. 그래서, 다른 환자에게 자신의 감동을 이야기 하자, 그 환자도 동의하면서, “특히 부인께서 입원하신 후에는 더 친절해졌습니다.” 하였다. 결론은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병원 원장이신 멘데스 박사님이 특별 돌봄을 지시하셨습니다.”고 하였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원장에게 가서 초면인데 이렇게 특별한 돌봄을 감사드린다고 하니, 멘데스 박사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에요. 선생님께서 30여년 전에 새 신발을 받은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저예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그 가죽 신발 말이에요!” 주님은 보상받지 못한 선행은 오히려 복이 되어,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 14) 하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73-75쪽, 참조)

전도서1:17절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자는 이미 긍정적인 측면(13,16)에서 지혜를 살펴보았고 본절에서는 지혜와 정반대인 ‘어리석음’을 탐구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을 모두 연구했음을 밝히지만, 둘 다 연구한 이유는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둘 중 하나에서 의미나 즐거움이 있는지 찾아본 뒤, 무엇이 참된 지혜인가를 명확히 하고자 어리석음까지도 연구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혹은, 지혜와 어리석음은 동전의 양면이므로 전체적인 그림을 얻기 위해 양 측면을 모두 살펴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실패하였음을 자인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여도 잡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섭렵하였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음을 말합니다. 더 나쁜 것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지식을 추구할수록 괴로움은 더욱 많아진다는 역설입니다(18).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잠1:8)를 전제로 하나, 본절의 지혜는 하나님이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데 전도자는 믿음의 길에서 방황 한 뒤 얻은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탄소 5개로 된 ‘리보스’의 2번 탄소에 ‘산소’가 있으면 RNA(리보스 핵산)을 구성하고, ‘산소’가 없으면 DNA(디옥시리보스 핵산)가 되어 전혀 다른 기능을 갖게 합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은총이나, 세상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합니다. 결과는 삶의 무의미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전도서1:18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본절은 지혜를 얻게 되면 근심 역시 수반된다는 점을 지적하여, 지혜도 허무하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1-11절은 세상에 사는 인간의 삶이 무의미함을, 12-18절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인 지혜와 그런 지혜의 추구조차 허무함을 선언하여, 해 아래 사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무의미함을 가르칩니다. 전도자의 선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낸 것이지, 신자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불신자를 위한 책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자신을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 밝히는데, 솔로몬은 성경의 전통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의 탐험 여정은 믿음 깊은 신자의 여정이므로, 성숙한 신자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면 방황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그 방황이 전도자와 같은 지적 방황이냐, 아니면 욥과 같은 고난의 방황인가의 차이 뿐입니다. 고난 중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롭게 살아온 자신에 대해 변호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어 괴로워 합니다. 시인 아삽은 악인은 잘 살고 건강하나, 매일 고난을 당하는 자신을 보고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보듯이 아무런 삶의 고난이 없고 풍족 하여도 방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삶의 의미나, 자아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적 방황 때문입니다. 좋은 예가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 입니다. 전도자에 따르면, 이 철학적, 신학적 주제는 해 아래 인간에게는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라고 토로합니다(13).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창세기 10:22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아르박삿, 아람 족속은 아람의 후손으로 모두 셈의 자손입니다만, 고대에 두 민족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지금 아사드 대통령이 물러난 시리아를 이스라엘은 맹폭하는데 시리아는 성경 시대의 아람 제국과 동일한 지역입니다. 갈등은 3천년이나 됐습니다. 전쟁은 아람 임금 하사엘 시대(BC842-796)에 심하였습니다. 주님은 북왕국을 징계하시려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그 후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히는 장면들이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한편,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병거용 말의 눈가리개들 중에는 아람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하다드 신께서 우리 주 하사엘에게 하사하신”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하사엘의 역사성을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텔 단 지역에서 발견된 석비이다. 여기에는 성경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역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다윗 집’이라는 유다 왕국의 호칭이 나온다’「아람 임금 하사엘,76쪽」. 주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자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셨고,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공격하고, 가드를 점령한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자(왕하12:17), 유다 왕(요아스)은 성전의 성물과 왕궁의 금을 모두 바쳐 공격을 면합니다. 하사엘이 쳐서 점령한 가드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하사엘의 공격진영과 파괴된 여러 흔적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며 유일하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록한 신앙 교훈의 보고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시편73: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예전에 본 드라마입니다. 매우 곤궁한 어느 가장이 정신 이상이 되어 방 한구석에서 종이에 백 만원, 천 만원 등의 숫자를 쓰고 돈이라고 하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치료를 받는 중 의사가 정신을 차려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침을 놓자 그는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퇴원하였으나 어려운 경제 현실에 직면하자 마음은 다시 무너졌고 이전과 같이 종이 돈을 만들어 공중에 뿌리는 장면과 함께 드라마는 끝납니다. 무너진 마음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는 아삽(다윗의 성가대장)으로, 자신은 경건하나 매일 고통 중에 살고 있는데, 악인들의 형통과 교만을 보자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아삽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고, 아삽은 늘 교훈하사 지혜롭고 바른 삶을 살게 하시면서,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계획이셨던 것이죠! 아삽은 하나님이 ‘마음의 반석’이요, ‘삶의 힘’이 되심을 깨닫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몫은 재산, 명예, 권력 등이지만, 아삽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임을 깨닫습니다. 실로 그분의 인자(신실한 사랑)는 생명 보다 낫습니다!(시편63:3). 믿음 생활은 즐겁게 주님의 뜻을 행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드린 기도가 응답받는 삶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 자신이 우리의 몫(재산, 유산)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삶은 단순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가 결합되어 선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73:28)

매일묵상(2024/12/9 – 13)


「참 기특한 실수」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켄디 챈드의 성탄절이야기입니다. “그 해 아들 니콜라스는 여섯 살 유치원생이었고 성탄절 학예발표회 최종 연습을 구경하러 갔다. 이윽고 담임 선생님들의 인솔에 따라 들어온 학생들은 모두 식당 바닥에 앉아 청중이 되었다가, 발표 순서가 되면 무대에 올라갔다. 예상 대로 아기 예수, 구유, 그리스도의 귀중한 생명의 선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니콜라스 반은 ‘크리스마스의 사랑, Christmas Love’이란 노래를 불렀다. 맨 앞줄에 서 있는 아이들은 각각 큰 글자를 갖고 있었고, 하나씩 들어서 노래 제목을 만들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C는 크리스마스의 C”라고 노래하면 한 아이가 글자 C를 들었고, 또 “H는 해피의 H”라고 노래하면 다른 아이가 글자 H를 들었다. 이렇게 계속하면 마지막에는 노래 제목인 “Christmas Love”라는 메시지가 연출되는 것이었다. 발표는 매끄럽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한 여학생이 글자 M을 거꾸로 들어 ‘W’자가 되었다. 실수였다. 게다가 그 학생은 조금씩 움직여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옆으로 서는 통에 글자 간격이 이상하게 벌어졌다. 청중석의 아이들은 그 실수에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지만, 순진한 아이는 당당하게 ‘W’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글자가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다함께 보았고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전체 글자와 메시지는 “Christ was Love”(그리스도는 사랑이셨습니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270-73쪽, 참조)

전도서 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본절은 속담체로, 인간의 무능력을 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구부러진 것’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고쳐지기 바라는 모든 잘못된 상태이나, 문맥상 도덕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특히, 유사한 구절인 7:13절(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과 비교할 때 자명합니다. ‘구부러진 것’의 예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요9:1)으로, 그는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인간은 마음대로 세상을 다룰 수 없음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또 ‘모자란 것’이란, ‘필요하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단은 ‘인간이 원하고 필요하지만 없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해석됩니다. 예로서, 모든 병을 치료하고, 죽지 않게 하는 ‘생명나무 열매’ 혹은 ‘생명의 떡’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본절에서 전도자는 이런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고 절망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복음의 전제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이제 만유를 회복하사, 사망을 철폐하실 것입니다(롬8:17-25). 그러므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즉 맹인, 귀먹은 사람, 말 못하는 사람, 절름발이, 중풍병자, 문둥병자 등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은 새 창조의 예표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생명나무’(요일5:13)와 ‘생명의 떡’(요6:35)이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전도서 1:16절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2-15절은 세상 모든 일의 허무함을 밝히나, 16,17절은 그런 지혜 추구 과정 자체도 허무하고 무의미함을 기술합니다. 본절은 두 번째 성찰의 문구로서, 전도자는 자신의 신임장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전대미문의 탁월한 지혜자’로 자칭하는 것 같아 다소 주제넘게 들리지만, 그것이 본절의 초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그런 지혜를 갖고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와 역대서를 보면,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 위에 등극하자 정적- 아도니야, 요압, 시므이-을 지혜롭고 과감하게 처단합니다. 나라가 자신의 손에 굳게 세워지자, 비로소 기브온에 갔고, 직접 일천번제를 드려 주님을 감동시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감동하신 주님이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맡은 왕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재판의 지혜(‘듣는 마음’)를 구합니다. 주님은 기뻐하사, 판결의 지혜는 물론, 지식과 재물까지 주십니다. 솔로몬은 정말 현명한 왕이 되었고, 그 지혜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우상숭배로 전락하였고, 이스라엘 왕국 분열의 모든 씨앗을 뿌립니다. 그는 단명은 아니지만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지혜가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솔로몬 같이, 사람은 주님에 대한 순종을 떠나면 행복도 또한 떠나버립니다. 행복은 주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만이 가지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시편84:1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람 사람들”
사도행전 17: 26절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온 인류의 조상은 노아이며,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그중 한 명이 ‘아람(=고지대)’으로, 적어도 BC1200년경부터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 유프라테스 강까지 펼쳐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셈의 아들 아르박삿의 후손이나, 신명기는 야곱을 ‘방랑하는 아람 사람’(신26:5)이라 하였는데, 리브가나 레아와 라헬이 아람 사람이고, 야곱 역시 20년을 아람에서 지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람 왕국은 다윗 시대 이후 적대적이 되었고, 특히 벤하닷과 하사엘 왕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왕상20:26;왕하6:24). 그러나 두 나라는 필요에 따라 무역을 하거나 왕래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말을 이집트에서 사서 아람 임금들에게 되팔았고(왕상10:29),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나병 치료를 위해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한 것이 그 예입니다(왕하5장). 아람이 고대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앗수르 왕 디슬랏 빌레셀1세(BC1114)의 연대기이며, 그는 아람 사람들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람은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BC720). 또한, 1966년 텔 단에서 출토된 석비는 다윗 가문과 하사엘 아람 왕에 관해 기록하여 성경을 뒷받침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특히 유다 왕국은 약소국이었습니다. 이들은 강대국의 침략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간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지금 비상계엄사태로 어지럽습니다. 적법절차를 따라 조속한 정국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잠언3:5절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새번역)

즐겁게, 그리고 고된 노동 후에는 그 결과는 하나님 손에 맡겨야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맡겨주신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수고는 여기까지이며, 나머지는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후, 잠을 자야 합니다. 온갖 감정이 요동칠 수 있으나, 주님이 맡으셨음을 생각하고 근심을 몰아내는 연습은 경건의 훈련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모순어법 같지만, 온갖 염려·불안으로 마음은 무거우나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근거로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 정직하게 살고 염려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면 이렇게 해결되는구나!”는 삶의 경험은 우리에게 믿음의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롬8:32)이니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따라서, 신자는 주님을 본받아 안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으로 배에 물이 가득하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로 가득찼으나, 주님은 고물에서 깊히 주무셨습니다. 열심히 가르치신 날 저녁이라 피곤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 맡깁니다” 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죽음 이후의 일을 맡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눅23:46). 그 결과는 부활이었고, 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

매일묵상(2024/12/2-6)


요한복음 11:5,6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본문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의 배경으로, 주님은 2틀을 지체하심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드셨습니다. 낸시에게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5살 딸 사라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7월의 아침, 부러진 선풍기의 날개 소리에 잠을 깨자, 자신의 삶 중 부러진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사라의 심장 수술 등으로, 엄청난 병원 빚과 함께, 얼마 후면 남펀의 일자리도, 집도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학교에 갈 시간이 이르자 사라는 필요 없는 물건으로 채워진 가방을 메고 “짜잔”하면서 나타났습니다. 사라를 성경 학교에 데려다 주고 여러 가지 용무를 보았습니다. 낸시는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지?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까? 라는 질문에 다다르자 생각이 멈췄습니다. 이윽고 낸시는 교회에 다시 도착하였고, 사라가 있는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사라는 배낭을 메고 모자도 반바지도 윗도리도 모두 거꾸로 입고 있었습니다. “사라를 정말 사랑한다”는 마음이 스쳐 지나간 바로 그때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는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도 마치 사라의 거꾸로 입은 옷처럼 부조화에 엉망일 것입니다. ‘왜 너는 걱정과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쓸모없는 배낭을 메고 있니? 내가 그 배낭을 대신 메 주마”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낸시는 그날 밤 사라를 양육하는 특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11-14쪽, 참조)

전도서1:13절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3-15절까지는 전도자 자신의 지혜 추구의 결과의 허무를 선언힙니다. ‘지혜를 써서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는 고백은 솔로몬의 최고의 지혜가 결집된 책이 전도서로서(참조 왕하4:29-34), 그가 살핀 인생은 한 마디로 “괴롭다”로 정의되는데, 고통을 수반하지만 아무런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스러운 노역”이라 직역됩니다. 불교에 “인생은 고해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나, 전도서는 인간의 모든 일이 무의미를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였기 때문임을 밝혔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철학자들은 지혜 탐구의 삶의 고귀성을 주장하나, 본절은 오히려 ‘괴로운 일’(혹은 ‘지저분한 일’)로 묘사합니다. 인간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사 수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3:17-19). 마치 하데스에게 벌 받아 영원히 돌을 굴려올리는 시지푸스와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절은 이런 ‘괴로운 일들’이 왜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할까요? 지식과 지혜를 포함한 모든 삶이 주권자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타락한 인간은 이를 무시하고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자들의 작업을 어리석게 하십니다. 대표자가 니이체입니다. 그는 평생 가족을 의심하며 초인을 부르짖고 혼자 살려고 하였지만, 정신병에 걸린 말년의 10년은 어머니와 누이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절대 강자가 정한 구조를 인간은 넘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지혜자입니다.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20).

전도서 1: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모든 일이 시간과 죽음 앞에서 사라질 운명이라, ‘지적 노동’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절대 잡을 수 없고, 설령 잡는다 해도 아무것도 없다”는 함의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13)를 ‘해 아래’로 바꾸었지만, 둘 다 인간 세상을 의미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과 삶을 성찰하면서 얻은 깊은 지혜를 주려 합니다. 먼저, 13절은 세상사를 ‘괴로운 것’이라 결론 짓고, 14절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토로하여 괴로움을 강조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선풍기 앞에서 바람을 쐬다가 바람을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잡지 못한 것에 비유됩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는 시도하다 안 되면 화를 내고 결국 절망하여 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삶의 의미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또한, 바람은 표식이나 경고없이 진로를 변경하고, 이리저리 불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현상이,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과 매우 흡사합니다. 1920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 명, 그 후 100년이 지난 2020년의 코로나 19로 7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돌연 사망이 닥치매 악인· 의인· 지혜자· 우매자 모두 동일하게 죽어 자취가 남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돌보시며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편37:24,새번역)

「라기스」
역대하 32:19절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


본절은 앗수르 왕 산헤립(BC705-681)이 라기스를 공격하는 중 신하들을 예루살렘에 보내 수행한 심리전을 묘사합니다. 산헤립의 일대기는 그가 46개의 도시를 치고 예루살렘을 향했으며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얻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열왕기하 18:14-17과 역대기하 32:9 의 히스기야의 조공 기록과 부합합니다. 라기스 전쟁은 니느웨의 산헤립 궁전 벽 부조에도 새겨졌습니다. 라기스 주변은 대추야자나무와 포도나무로 둘러싸였고, 이중 성벽이며, 성문의 탑과 성문으로 향하는 경사진 비탈길도 보입니다. 또한, 그 당시 남왕국 유다의 의복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앗수르 군사들과 다른 헬멧과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라기스 성벽을 향한 공성퇴를 매단 병거가 보여, 언덕을 쌓아 공성퇴를 사용하였는 산헤립의 일대기 내용과 일치합니다. 전쟁의 극심함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화재의 흔적과 함께 수백 개의 무기들, 즉 물맷돌, 화살촉, 창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벽 부조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무너진 라기스는 80년 뒤 재건돼 요새로 쓰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됩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믿고 앗수르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앗수르 제국과 유다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왕하18: 7,8). 전쟁을 대비한 히스기야 같이 주님을 신뢰하면서도 뱀 같은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히스기야 왕조차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교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시편20:7)

시편128: 2절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경건한 삶의 두 번째는 ‘고된 노동’입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후 인류에게 선고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면서 즐겁게 노동을 하던 아담이 범죄하자 쫓아내시면서 고된 노동을 명령하셨는데, 여섯 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① 징계의 의미 : 땅은 저주를 받아 계속해서 가시와 엉겅퀴를 냄으로, 생존과 가족 부양을 위해 남자는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9). ② 지혜의 수단: 일을 통해 하나님이 숨겨둔 지혜를 체득하며, 고된 수고를 통해 그 열매의 가치를 깨닫게 하십니다.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단: 수고를 통해 양식과 재물을 얻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곡식이 영글지 못함을, 상인 역시 노력만 한다고 재물을 얻지 못하고 때와 기회가 와야 함을 깨닫는 것처럼, 일에 착수하여 성과를 얻기까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여러 변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교만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④ 성례전적 시각: 그리스도인은 일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에, 고된 노동 가운데 즐거움을 찾습니다. ⑤ 왕 같은 제사장: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수고를 해야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와 줄 수 있습니다. ⑥주님의 심판 : 최후의 심판 시 주님은 우리의 수고가 들어가 있지 않는 열매들은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와 탐욕을 버리고 주님만 의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16:1).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매일묵상(2024/11/25-29)

디모데후서3:15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제 책장에는 한자가 섞인 선친의 성경이 있습니다. 한자는 뜻이 명료하고, 깨달으셨던 글귀들도 적혀 있어 은혜가 되었습니다. 겉표지는 낡아 가죽으로 바꾸어서 틈틈히 읽고 있습니다. 짐 킴스탁은 240km 떨어진 딸의 대학을 다녀온 그날 밤 자신의 대학 때가 떠올랐습니다. 짐을 데려주신 후, 아버지는 오랫동안 침묵하시다가, “나도 네 형들도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단다. 대학에서는 모든 것이 다를 테고 어떤 일이 생길지 나로선 알 수 없으니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마라는 말은 못하겠다. 돈도 넉넉하게 보내 줄 수 없지만 모든 일이 다 잘되리라고 믿는다. 아주 힘들 때 이 수표를 사용하거라. 그런 후 내게 편지로 얼마를 썼는지 알려다오” 이어 아버지는 낡은 당신의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너만 원한다면 이 성경 말씀이 너를 도와줄 거다.” 짐은 대학 내내 고학 하였지만, 졸업 후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딸 생각이 났습니다. 이틑날 짐은 딸에게 다시 갔고, “너만 원한다면 이 성경 말씀이 너를 도와줄 거야”라는 편지와 함께 아버지의 성경책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입니다(눅11:28). “하나님의 말씀”이란 보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다만, 읽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94-97쪽, 참조)

전도서1:11절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헤롯 대왕은 유대인의 환심도 살겸, 자신의 치적을 남기고자 호화스러운 유대성전을 지었으나 주님의 말씀과 같이 AD66년 경 완성되자 마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또, 기부자 세브란스를 기념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 명명되었지만, 인간의 선행이나 업적 등의 기념이 하나님 없는 삶의 무의미를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인생은 “바다를 가는 것 같다”는 어떤 작가의 말 대로 자취조차 남지 않습니다. 따라서, 11절은 “업적을 남기려는 노력의 무의미”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의 반복이나, 오래된 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잊었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본질은 미래에도 동일하여, 현 세대 역시 장래 세대에 기억받지 못할 것입니다. 좀 우울하지만, 3천년 전 전도자의 말은 사실입니다. 본절은 서론을 매듭지으면서, 과거나 미래 보다, 현재가 중요함을 교훈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인간의 역사 보다도, 영원하신 하나님께 기억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창조된 세상이 애써 부인하고 무시하는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만민을 심판하실 분입니다(전12:14). 따라서, 무의미한 인생 가운데 의미있고, 참으로 기억되는 삶이란, 그분의 뜻을 행하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2:1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전도서1:12절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12절은 본론(1:12-12:8)의 시작이며, 전도자의 충고는 12:8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에서 서술 방식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됩니다. ‘나 전도자’와 같은 자전적 도입은 이집트, 시리아,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형식을 따른 표현이나, ‘되어’로 번역된 동사 ‘하이티’가 완료형이기 때문에 세 가지 견해가 주장 되었습니다. (1) ‘되어’의 완료형은 “전에는 왕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기에 본문의 전도자는 솔로몬이 아니다. 솔로몬은 죽기까지 왕으로 통치하였다. (2)솔로몬이 저자이나, 이를 통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솔로몬의 생애를 추측케 한다. 죄를 지은 솔로몬은 회개하고 다시 왕 위에 오를 때까지 왕이 아니었던 기간이 있었다. (3) 솔로몬이 저자이나, 솔로몬은 삶의 마지막에 왕위에서 쫓겨났고, 회한에 잠긴 솔로몬이 남긴 글이라는 탈무드의 전승을 따른다. 그러나 히브리 동사의 완료시제는 과거에 행동이 완료되어서 그 효과가 현재까지 미치는 모습을 묘사하므로, 저자는 솔로몬이고, 죽을 때까지 왕 위에 있으면서 이 글을 남겼다는 전통적 견해가 옳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왕’이라는 표현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으로, 솔로몬만이 가능합니다. 그 아들 르호보암 이후 왕국은 분열 되었습니다(BC930). 권력, 부, 지혜를 극한까지 누린 왕 솔로몬은 인생이 그토록 원하는 부, 권력, 명예, 지식 추구의 허무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의 해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이 비결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

「라기스」
열왕기하18:17절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라기스 골짜기는 평지에 위치한 다섯 개 골짜기 중 가장 남쪽에 있습니다. 드넓은 남방지역과 해안 평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이 골짜기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며 해발 천 미터 산지에 자리잡은 헤브론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텔 라기스’는 이미 여호수아의 정복 이전에 가나안 족속들의 요새였고, 왕 르호보암에 이르면 이중 성벽을 갖춘 견고한 성으로 세워져 유다 왕국의 남방 지역을 통제하는 요새가 됩니다(대하11:5-12; 23). 따라서, 라기스 성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보루여서, 열왕기, 역대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등의 전쟁 기록에 적혀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유물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되었습니다. 산헤립 연대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주전 701년 경 유다 왕국과 앗시리아 사이에 일어난 라기스 전투는 열왕기18장, 19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 천리 떨어진 앗시리아 수도 니느웨 성의 산헤립 궁전에서 같은 내용이 적힌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이것이 ‘라삼 실린더’로 불리워지는 원통형 돌인 산헤립 연대기로서, 높이 약 38cm, 직경 약 15cm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치열하였던 전투는 27미터의 부조에 상세히 조각되어 있습니다. 근동 최 강대국 앗시리아와 충돌한 왕 히스기야가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국운을 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천사 한 명을 보내어 앗시리아 군대 185,000 명을 죽여 구원하십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새번역).

시편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리스도인은 성례전적 시각- ‘주어진 모든 일과 사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해리 블레마이어). 그런 삶은, 삶의 즐거움, 고된 노동, 그리고 근심 없는 휴식이란 3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삶의 즐거움’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을 때, 둘째 딸 라헬을 보자 사랑에 빠집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이나 고된 노동을 하였지만, 수 일(a few days)처럼 여겼습니다(창29:20). 라헬을 아내로 얻어 가정을 세울 기쁨과 소망 때문에 즐거웠던 것이죠! 우리의 계획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이를 믿고 기뻐하십시요!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걷되, ‘하나님의 뜻’ 행함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시편119:16).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여러 번 결혼하고 이혼하여 사생활은 좋지 않습니다만, 그의 재담이나 지성은 놀랍습니다.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할 때 유명세가 싫어 거부하려고 하자, 그러면 더 유명하게 된다는 말에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에 BBC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미 상을 받았으며 그것은 “발견하는 즐거움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물리학 연구의 즐거움이 예상치 못한 노벨상까지 이끈 것입니다. 파인만은 “저도 공부를 열심히 한 평범한 사람이에요. 기적은 없어요, 여러분.”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물리학은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그 안에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편119:14)

매일묵상(2024/11/18-22)

전도서1:9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5-8절에서, 전도자는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는 자연에 비유하면서 인생의 허무성을 지적합니다. 특히 8절은 기계적 순환을 거듭하는 해 아래에서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고통과 무의미를 탄식하나, 9-11절은 새로운 것이 없는 무의미한 세상에, 인간은 왔다가는 사라져 기억조차 없는 허무한 존재임을 밝힙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과거에 있었던 바로 그것이 (장래에) 있을 그것이다”, 중단은, “그리고 (과거에) 행해진 바로 그것이 (장래에) 행해질 바로 그것이다”로 직역됩니다. 미래는 과거의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그러므로 해 아래에서는 새로운 그 어떤 것도 없다”라고 직역됩니다. ‘새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욕망은 삶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습니다. 자동차, 컴퓨터, 비행기, 냉장고, 에어콘 등이 그 좋은 예로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탄생, 결혼, 직업, 사망 등으로 이어지는 인간 존재의 기본구조는 물론, 명예, 권력, 돈,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역시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것’은 없습니다. 고대 아카디아인도 “과거의 삶은 곧 모든 날들의 삶과 같다”는 격언을 남긴 바 있지만, 전도서는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긍정적 명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무의미성’을 직시케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복음은 선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전도서1:10절
“”보라, 이것은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새번역)

9-11절은 “해 아래 인간의 삶의 무의미’가 주제입니다. 9절은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10절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합니다. 먼저, 자연계에는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태양은 계속 떴다 지고, 강물은 계속 흘러 왔고, 바람도 쉬지 않고 이리 불고 저리 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늙은 뒤 죽는 반복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왜 태어나서, 왜 살고, 왜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우리가 던지는 이 질문은, 이전의 세대도 가졌고, 장래 세대도 같은 질문을 가질 것이나 아무도 해답을 갖지 못했고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한편, 자연 현상의 반복과 인간 역사의 반복은 차이가 있습니다. “태양이 내일 떠오를 것이다”고 믿지만, “내가 내일 살아서 그것을 볼 것이다”고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우연히 내던져진 자신의 삶 또한 무의미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더 고민해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예수의 복음은 이 양자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합니다. 삶에는 의미를 부여하고(영생), 죽음과 심판과 관해서는 죄사함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새 것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버려진 포도밭」
이사야5:3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엘라 골짜기에서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라기스 골짜기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평지의 나지막한 산들과 들녘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김상목 작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포도밭’을 찾곤 합니다: “그 포도밭은 울타리가 무너지고 잡초가 무성하며 가지가 부러지고 헝클어진 머리 같아 보기에도 흉측하다.” 김작가의 경험담입니다. 작가가 오래 전 이스라엘에 유학할 당시 이 지역을 답사하던 교수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이사야서 5장을 읽도록 부탁했습니다. 이윽고 교수는 ‘버려진 포도밭’을 손으로 가리키며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라 말하였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버려진 포도밭’은 두려움이고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서 이스라엘 평지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드렸고, 이 후 그 현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뜻인, 도덕법을 빌트인시키셨습니다(마5:17,18). 동물 중 오직 인간만이 만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예입니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와 가깝다”며 물을 도(道)에 비유하였지만, 이 도를 성취하신 분은 도성인신하여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걱정은 주님께 맡기시고, 들포도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를 맺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잠언12: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행위가 옳은 줄로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를 듣는다”(현대인의성경)

스티브는 정기검진을 받은 지 며칠 후 전화가 옵니다. “오늘 오후에 병원에 오셔야 하겠습니다.” 스티브는 다소 당황해서 의사에게 갑니다. “앉아주세요, 스티브.”라고 말한 뒤, 의사는 말합니다: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는데요, 췌장암 초기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혈압도 낮고 콜레스테롤도 낮은 데요!” 놀란 스티브의 말에, 의사는 대답합니다. “아직 초기이지만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합시다.” 스티브는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철학으로 암치료를 거부하면 안 됩니다. 찰스 다윈(1809-1882)이 “생물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다”는 내용의 「종의 기원」을 냈고, 불가지론과 믿음 사이를 고민하다 말년에 성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립니다. 진화론은 그것이 전제하는 태양, 공간. 시간의 존재를 설명 못하며, 과학임을 자인한다면 종교는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위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불가지론자 다윈은 성경의 충고를 듣고,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어야 합니다. 유전학을 모르는 다윈의 진화론은 형체의 비교를 통한 추측에 근거하여 이론을 전개하였고, 진화 방향의 예측이나, 검증 방법도 없어 진화 철학에 가깝습니다. 다만, 자연선택, 생명나무의 개념을 남겨 유전학을 근거한 후세의 신다윈주의자들의 출현에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반면, 성경은 발생한 사실에 관한 증언이 기록된 문서들의 집합으로 그 역사적 신빙성과 영감을 담은 가르침은 유일무이합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