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잠언 16: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평소 퇴계 이 황 선생은 집안 자제와 제자들에게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 貧當益可樂’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이 말은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사는 것’(貧而樂)에서 유래한 듯합니다. 당시 자공이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떠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기는 것보다는 못하다” 라고 답했습니다. 퇴계는 공자의 이 표현을 한층 더 강조해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퇴계는 아들 이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습니다.

“가난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찌 마음에 두겠느냐? 너의 아비는 평생을 이로 인해 남의 비웃음을 받아왔다. 다만 굿굿이 참고 순리대로 대처하면서 스스로를 수양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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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서울의 오래된 것’이라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YMCA는)1903년 미국인 질레트의 지도로 발족하였는데 신앙운동뿐 아니라 계몽운동과 토론, 체육, 농촌운동 등 민족운동에 앞장섰고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역사 속에 묵직한 페이지를 채워온 모임이다. 창설되던 때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란 이름으로 지금의 서울YMCA 자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황실의 협조와 미국인의 기부로 완공된 3층의 벽돌 건물은 종로의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인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패주하던 북한군에 의해 회관이 파괴되면서 지금의 건물이 다시 세워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다. 그렇게 새로 선 회관은 조금씩 변해가는 종로의 한복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남아 오늘날에 이른다……….. 1908년 만들어진 이전 회관의 모습.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 황현은 회관이 완공된 모습을 보자 “그 집의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의 천주교당(명동성당)과 함께 남가 북에 우뚝 마주서서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고 말했다. 완공된 이후 YMCA회관은 일제 강점기에 만남의 광장이었고, 동서 교류의 현장이었으며, 토론과 논단의 장소로 여러 운동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여기서 기부한 미국인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존 워너메이커입니다.

하루는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1838 – 1922)가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1889 – 1893)으로부터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주시오” 워너메이커는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장관직을 수행하는 일 때문에 주일성수와 교사 일을 못한다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헤리슨 대통령은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야 그는 체신부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기차를 타고 워싱턴에서 고향 필라델피아로 내려가 주일성수를 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으로 있었던 4년 동안 베다니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 기차로 여행한 거리만 해도 20만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기자들이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고 질문했을 때도 그는 주저함 없이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장관직은 몇 년 하다 말 부업이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워너메이커는 그가 말한 본업인 교사직을 위해 19살부터 생을 마감하는 85살까지 무려 67년이라는 세월을 쉬지 않고 충성스럽게 교사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생들만의 교사가 아니라 교사들의 영적 스승으로도 진정한 사표가 되었습니다.(성경이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172-173).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말년에 한 연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성경이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교육이 저의 일생에 기본적인 교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는 세상적인 공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평생 성경을 공부했고, 그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제 인생의 확고한 삶의 원칙과 기초를 세웠고, 성경의 바탕 위에 저의 인격과 사업을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받았던 이 주일학교 교육이 너무나 귀했기에 이 사역을 위하여 제 인생 전부를 투자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주님 안에서 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저의 힘과 능력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동행했을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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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5-23

권순영박사는 전공이 식품영양학입니다.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85년 네슬레에 입사하였습니다. 거기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던 중 2003년 이른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봉사하러 간 지인이 전화로 이렇게 알려왔어요. ‘영양실조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달란트가 필요한 때입니다’라고요. 친한 이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두려웠습니다. 외국인들도 소리 소문 없이 죽어나가는 곳이니 말이지요.” 2003년 5월, 결국 휴가를 내고 아프간으로 갔다. 그리고 보았다. 암담, 처참, 속수무책…. 실상을 읊기엔 어떤 형용어도 빈곤했습니다.” 진단을 해 보았더니 그 원인은 단백질 부족이었습니다. 더구나 아프카니스탄 백성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여 외국의 도움과 원조를 받는 것을 내심 반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립할 수 있다는 끈질긴 권박사의 설득에 아프카니스탄 정부는 순응하여 콩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콩이 재배될 수록, 아프카니스탄의 백성들에게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일년에 5주정도 휴가를 내어 봉사하였으나, 도저히 수요를 당하지 못하여 2008년 사표를 낸 뒤 전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고, NEI라는 민간단체를 설립하여 여러군데서 기부를 받음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콩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 콩만 보급하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였습니다. “왜 콩을 심어야 하는지, 콩의 영양학적 가치는 무엇인지를 일일이 교육시킵니다.”라고 권순영 박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순영박사의 성공비결은 아프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데 있습니다. 콩 프로젝트가 아프간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 이유에 대하여 이곳의 수석 경제 고문인 자킬리월 씨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많은 선진 국가들이 우리를 도우러 와서는 ‘아프리카에서 성공한 모델’이라며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대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권 박사는 맨몸으로 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기르지도, 먹어보지도 않은 콩을 경작하다니요. 그런데 그는 우리와 똑같은 심정으로 고심했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창조했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때 권순영 박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우리도 한국전쟁을 경험해서 헐벗고 굶주리다가 죽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그 경험을 안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경계심을 풀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봉사의 정신은 어떻해야 함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아프가니스탄 백성들의 건강을 증진하고 영양을 보급하였다고 그들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들은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습니다. 아니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본래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셨지만 도성인신하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해결하신 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주가 끝날 때까지 다스리셔서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복종케 하는 중에 있습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엄청난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지문을 남겨라 – 태극문양을 남긴 일제시 건축가!

골로새서 3:17

1930년대 들어 태화여자관 사업은 더욱 확대되어 매일 500명이 넘는 이용회원을 수용하기엔 공간이 좁았고 조선식 기와집들이 서구적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하기에는 불편하였다. 결국 선교부와 태화 직원들 사이에 오랜 논란 끝에 ‘사업을 위해 유적을 허물기로’ 하였으며 2년 공사 끝에 1939년 11월 연건편 718평 규모의 3층짜리 석조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을 지으면서 백년 넘은 옛 건물과 정원이 헐렸고 유치원으로 사용되던 ‘별유천지 6호실도’ 헐렸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강윤(1899-1974)으로 그는 동서양 건축 양식을 절충한 건물을 설계했으며 숨겨진 아름다움은 3층 예배실에 있었다. 여기에 강윤은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다. 숨은 그림 찾기 처럼 눈여겨보야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일제 말기 상황에서 꺾이지 않는 민족의지를 보여주려는 건축자의 숨은 의도를 담고 있다. 강윤은 한국 근대 건축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3.1운동 당시 공주 영명학교 졸업반 때 공주지방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뒤 윌리엄즈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부리스라는 미국인 건축가를 만나 건축을 배웠다. 평신도 선교사로 일본에서 ‘오미형제사’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부리스는 강윤을 한국 대리인으로 내세워 한국에도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1933년 귀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강윤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신촌 이화여대 본관과 강당, 음악관, 공주 공제의원, 신세계백화점, 수유리 한신대학교 본관, 흑석동 중앙대학교 본관 건물, 세브란스 병원, 연희전문학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생 중학교, 철원제일교회등을 지었다. (이덕주, 종로 선교 이야기, 42-54). 건축가 강윤과 같이 우리는 말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각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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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패러다임은 토마스 쿤이 처음 사용한 말로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합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 즉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깨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는 모성형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모성형 리더십은 서비스 정신이 근간으로서, 그 바탕에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듯, 고객과 조직 구성원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최고경영자는 마치 엄마가 되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원의 신체건강은 물론 정신건강도 챙겨 주고, 또한 윽박지르며 목표 달성을 독촉하기보다 임직원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문 경영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명가의 초석을 쌓은 전통 사회의 아버지들은 통상 완고하고 권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오히려 배려하고 섬세하게 돌보는 모성형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자로 퇴계 이황과 청계 김진을 들고 있습니다.

퇴계는 대학자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서도 자녀뿐만 아니라 먼 친인척의 자제들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는 좋은 친구과 함께 지내며 학문을 닦는 것을 중시했기에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의 글공부와 어려움을 힘닿는 대로 보살폈습니다. 그가 돌본 후손은 모두 90여 명에 달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후손이 있으면 고기를 선물하면서까지 학문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퇴계가 맏형의 외손자 민응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시원한 밤 책 읽기 좋을 때다. 시간을 아껴라. 좋은 계절에 고요한 절에서 힘써 공부해 주기 바란다. 술 한 병, 닭 한마리, 생선 한 마리, 고기 한 덩어리를 보낸다.” 과연 큰형의 외손자까지 챙기는 자상한 할아버지입니다. 한편, 의성 김씨를 일으킨 청계 김진은 청운의 꿈을 접고 백년대계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한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적고 있습니다.

“문장이 뛰어난 청계선생은 생원이 된 후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해 대과를 포기하고 자손들의 학문 장려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섯 아들인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청계선생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어 이 집을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1882yh&logNo=30124803945&parentCategoryNo=&categoryNo=99).

청계는 퇴계에게 자신의 다섯 아들을 제자로 보내 그의 학문뿐만 아니라 넉넉한 마음을 흡수하도록 했습니다. 퇴계의 리더십으로 회자되는 게 ‘너그러움’입니다. 그래서 퇴계 문하에는 늘 제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청계는 8남매를 남겨 두고 그의 아내가 죽자 새장가도 가지 않고 자녀 양육과 함께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청계의 노력으로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 가문의 기초를 내리기 시작해 500년이 흐른 지금도 영남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과 그 후손들이 남긴 종택은 무려 여섯 곳에 이릅니다. 종택은 동학혁명이나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로 인해 불에 타 없어진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종택은 단 한 곳도 불에 타지 않고 6곳 모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청계가문이 그만큼 지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가문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최효찬,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172-75).

여러분 어떻게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청계 가문이 그런 명예를 남겼더라도 거기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이야말로 참다운 진리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 주겠습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는 말씀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게이트웨이 침례신학대학원 총장인 제프 욜즈 박사는 이런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암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교회를 다니는 노인부부 세쌍이 새벽에 병원에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 거죠?” 라고 욜즈 박사는 물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그들의 대답은 욜즈 박사의 영혼을 불태웠고 그분의 눈에 눈물을 쏟게 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의미 있는 관계가 붕괴될 때, 비록 여러분이 그 사람의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이때가 우리의 사랑의 섬김이 필요할 때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그들은 당신의 인도를 필요하고 있는 것입니다.(뱁티스티 151권,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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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10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62살의 나이로 1999년 5월 6일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2003년까지 4년 동안 걸어서 중국의 시안에 도착했습니다. 도합 12,000킬로미터의 실크로드 전 구간을 도보여행했습니다. 한 번의 도보여행으로 전 구간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 하였습니다. 이런 도보여행은 용기와 의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저자 역시 장염에 걸쳐 죽다 살아난 경험, 여러 번이나 도적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우, 탈수 증세로 여행을 일시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들을 포함해서 결코 쉽지 않은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걷는 즐거움 못지않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열망이 자신에게 길을 떠나라고 부추긴다”라면서 도보여행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는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 등에서 30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60살에 정년퇴직했지만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들이 독립해 떠나가면서 극도의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자살에 실패한 뒤 파리를 떠나고 싶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300킬로미터를 걸었고, 이어서 이 거리의 십 배에 해당하는 실크로드를 걸어 종단하기로 목표를 세웠습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간을 정해 단 1킬로미터도 빼먹지 않고 걸어서 실크로드를 여행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의 삶을 도보여행을 통해 재활한 것입니다. 올리비에는 10대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달리기와 걷기를 시작해 결국 건강을 되찾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자 생활을 할 때도 틈나면 걷기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뉴욕 마라톤 대회를 포함하여 마라톤 대회에 20번 넘게 참가했고, 100킬로 행군도 수차례 참가했다고 합니다. 도보여행을 통해 “그 길에는 지식과 문화와 토양이 된 육체와 정신, 근육과 머리를 위한 양식이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는 실크로드 도보여행을 하면서 원칙을 하나 세웠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걷기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도보여행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포기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도중에 포기하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요, 자신과의 약속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도보여행은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고, 그렇게함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고, 자신에게 무한한 자긍심과 함께 감동을 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원천이 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힘에 착안한 올리비에는 ‘쇠이유’라는 비행 청소년의 사회복귀를 돕는 협회를 창설했습니다. 걷기를 통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년 소녀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협회의 목적입니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희망 없는 젊은이들은 범죄에 빠져 들기 쉽습니다. 쇠이유는 교도소나 수용 시설에서 생활한 청소년들이 낯선 나라를 도보여행하면서 재활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도보를 통해 자신을 치유하는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짝을 이뤄 한 명의 인솔자와 함께 떠나 2,000-2,500킬로미터를 4개월 동안 걷는 과정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 사항은 단 한 가지로써 MP3와 같이 녹음된 형태의 음악을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텐트를 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합니다. 그리고 걷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목적없이 범죄로 빠져든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도보여행을 통한 치유의 힘입니다. 올리비에는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기에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그것은 아름다운 노년의 도전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최효찬,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285-91).

여러분은 삶의 목적으로 무엇을 정하거나 정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 사실 것입니까?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정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목표로 정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은 어려움과 변수가 작용하고 있어 믿음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 가운데서 일하여야만 합니다. 이 사랑은 에로스적이 아니고 아가페적입니다. 에로스적은 사랑하는 대상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하는 짓이 귀엽기 때문에 사랑하고, 남자가 보기에 상대방 여성의 외모가 아름답기 때문에 끌리며,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하여 주기 때문에 나도 친절히 대해 주는 것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적 사랑은 사랑할 가치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히 대해주고, 도와 주며, 선한 말로 위로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이 아가페적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창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가페적 사랑의 목적은 단순히 선한 대우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바꾸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행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분을 따라가면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돌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를 행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평양과기대 설립과 김진경 총장의 “사랑주의”

마태복음 5:38-48

조선족 허련순 작가가 쓴 김진경 총장의 『Loveism 사랑주의』 345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김 총장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에서 국제대학을 성공시킨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것이 실현된다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루어 내고야 말았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결코 우연도 필연도 아니다. 이는 오로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섬기는 ‘사랑주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결실일 뿐이다.”

김진경 총장은 1987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북한을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왔다. 쌀 천 톤을 북한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을 위시로 20여년 동안 북한 어린이들을 도와 주는 일을 계속 이어 왔다. 그러나 북한의 문을 열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김진경 총장은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 이른바 ‘연금 사건’이 그것이다. 북한 주민과 어린들을 도와주는 일을 조심스럽게 이어 가던 1998년 9월 12일 김진경 총장은 북한 당국에 구속되었다. 그 발단은 김 총장과 함께 북한을 돕던 조선족 학자 이명숙 사장이 북한에 연금된 사건이다. 북한 당국은 이명숙 사장을 잡아들여 이 행위의 배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자, 김 총장은 죽음을 불사하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결단을 내렸다. “나를 잡기 위해 모두들 잡아들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가야겠네”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김 총장은 북한에 들어가서 체포되었다. 북한 당국은 북한 체제 전복 음모죄’를 적용하여 김 총장을 구속했다. 즉, 김 총장이 그동안 제공한 식량을 비롯한 많은 지원 물자가 한국과 미국 정보부의 자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김 총장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하려던 죄, 중국식 개혁개방을 유도한 죄, 북한 인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죄’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다가 당한 일인 만큼 그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김 총장은 유서 4통을 썼다. 하나는 학교에 보내는 편지로서 “총장이 죽었다고 절대 곡이나 장례식을 하지 말고 천국으로 가는 송별식을 하고 풍악을 울리라”는 당부, 두 번째로 아내에게 쓴 편지로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과 정리할 부분들에 대하여 썼다. 세 번째로 미국 정부에 나는 오해로 죽지만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천국으로 갔으니 보복하지 말라는 편지를 썼고, 마지막으로 북한 당국에 자신의 육신을 평양의과대학에 기증하여 사용하고, 장기는 필요로 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이식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서는 김진경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던 같았다. 결국 김 종장은 연금된지 42일 되는 날에 석방되고 중국 베이징 공항에 내릴 때 어떤 기자회견도 하지 않은 채 비밀 출구로 가만히 빠져 나왔다. “내 조국, 내 민족의 일”을 언론에 나서서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대학의 한 집회에서 김 총장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했다 “나를 억류하고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마저도 용서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이런 김 총장의 한결 같은 사랑의 행보가 드디어 결실을 맺게되는데 2001년 1월 북한이 먼저 김 총장에게 연변과학기술대학과 똑 같은 대학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고 8년이라는 우여곡절 끝에 2009년 9월 16일, 마침내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준공식 및 총장 임명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 25일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이 강의를 시작했다. 김 총장은 자신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며 사랑주의자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복음에 그 기초를 둔 이 사랑주의가 두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에 각각 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여 많은 혜택을 줄 수 있었다.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가?”

고린도전서 13:13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가?” – 사랑을 실천할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1990년은 반도환경㈜의 이승율 회장은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이해에 교회를 처음 출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0월 초에 베이징 아시안 게임 기간에는 존경할만한 크리스천 지도자를 한 분 만났다. 이 당시 그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골프장 사업을 하기 위해 오가던 때였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고 해봐야 베이징과 상하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두 곳뿐이었다. 칭다오시와의 협상이 농민들 토지보상 문제로 난관에 부닥쳤다. 수소문 끝에 국가주석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에 갔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돼 있었기에, 이 회장은 먼저 면담하시라고 양보하고는 옆자리에서 경청했다. 이때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이 회장을 세차게 흔들었다.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 옌지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 교육을 통해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으니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0년 넘게 생활한 시민권자였다. 대학교수를 지내고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했다. 그는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 초빙교수로 베이징에 와 있는 동안 조선족들이 사는 옌지·지린·창춘·하얼빈 지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언어와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농업학교를 설립·운영했던 선친의 유업을 쫓아 이 지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 계획을 갖게 됐다.

이미 그는 1989년 5월 지린성과 옌지시 정부의 협력하에 중외 합작 형태로 ‘옌볜조선족기술전문대학’ (1년 후 옌볜과학기술대로 승격) 설립을 허가받고 학교 부지까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는 한·중 수교전이라 중국에 외국인이 대학을 세우기 어려운 여건에도 기차로 30여시간 되는 거리인 북경과 연길을 수십차례 오가며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김총장의 열정이 이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 회장에게 비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지만 이 회장에겐 그와 같은 멋진 꿈이 없었다. 그 점이 이 회장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비참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때 이회장의 나이 대략 45세정도였다. 서울에 돌아온 뒤 이 회장은 잠시 자신의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살고 있는가.’ 그러다 2주 후 서울에 출장 온 김진경 총장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대학 설립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생애 처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도 좋다고 느낀 순간이었다고 한다. 김 총장은 서울에서 옌볜과기대 건립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 활동에 들어갔으며, 이때 이 회장은 김 총장의 요청으로 남서울교회 당회장실에서 열린 후원기도회에 참석했다. 홍정길 목사를 그때 처음 만났다. 이어 고 옥한흠 목사, 곽선희 목사가 이 일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열심히 추진한 결과 1993년 9월 드디어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1995년 7월 전문과 2년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국민일보, 이승율의 간증- 연변과기대김진경총장과의 만남).

지금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부하게 하여 줄려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야만 합니다.

믿음의 씨앗을 심자!

(요 12:23 – 33)

한국의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20년 남짓 되었던 1903년 5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4백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부인 글짓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공개적 여성 글짓기대회라 사회적인 관심도 적지 않았다. 그때까지 글을 읽거나 시를 짓는 것은 양반 남성선비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여성들이 공개적인 자리 그것도 남성들을 방청객으로 놓고 글을 짓고 발표한 것이다. 이날 시제는 ‘화덕’이었고 운은 ‘게 네 세’였다. 그날 지은 많은 시 중에 네 작품이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회중 앞에서 낭송되었다(신학월보 1903.11). 그 중 전씨 삼덕의 시이다

찬화덕에 불씨두게
석탄불노 덥게하네
우리마암 차고차나
성신불노 덥게하세

김씨 또라의 시 역시 다음과 같다

맘이찬자 이리오게
천국화덕 여기잇네
예수천하 화덕되니
온화하고 더움일세

교회 여성들은 조선시대 민중가사의 전형인 4.4조로 시를 지었으며 시제로 주어진 화덕은 단지 방안의 공기를 데우는 기구로 끝나지 않고 마음과 영혼을 덮혀주는 ‘성신 불’을 담은 ‘천국화덕’ ‘예수 화덕’이 되었다. 교회 여성들은 이런 식으로 교회에 다니며 얻은 은총을 노래하였다. 이런 은총을 노래하는 것은 초기 교회 여성들의 신앙고백이 되어 전도의 가장 큰 동기가 되었었다. 상기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여 ‘찬 화덕에 불씨’를 노래함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전통 봉건사회의 여성 한계를 깨친 데 성공한 인물이 ‘전삼덕(1843-1932)’이다. 그는 평안도에서 여자로서는 제일 처음 예수를 믿은 분이다. 평양에 들어온 예수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남편의 외도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 때 ‘한 번 믿어 볼까’ 하며 팔십리 길을 교자를 타고 교회(제임스 홀이 개척한 남산현교회)에 간 것이 신앙여정의 첫 걸음이었다. 그 뒤 매 주일 마다 빠지지 않고 그 먼거리를 교자를 타고 혹은 때로는 걸어서 교회를 나갔다. 드디어 스크랜턴 선교사의 권유로 한국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휘장 세례로 선교 역사에 기록되었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 사회에서 남자에게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 방 안에 휘장을 치고 구멍을 뚫어 머리만 내밀고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남편이 승지 벼슬까지 하였던 부유한 양반집 부인 출신으로 예수를 영접한 후, 남편을 비롯한 전 가족을 전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하였고 환갑의 나이에도 교회의 부름을 받아 전도부인으로 함종에 파견, 심한 핍박 중에도 많은 열매를 맺었다. 세월이 지나 몸이 더 늙자 본 집에 돌아왔으나 역시 본동교회를 세우고 전도에 힘쓴 결과 이백여명의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인도되었다. 일생 그를 통하여 믿은 전도의 열매가 6백여명이나 되었다. 전삼덕의 회고록 “내 생활의 약력”은 노블 부인이 편집한 “승리의 생활”(1927년)에 실려 있다.(이덕주, 한국영성새로보기)

주님을 의로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잠3:5-10)

‘일터 행전’을 쓴 방선오 형제의 간증입니다. “내가 교육팀장을 맡고 있을 때 모시던 부사장님은 회사 내에서 실세로 통하던 분이었다. 그 분에게 잘 보인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있기에 모두들 실세 부사장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같이 점심식사 하는 자리에 부름 받아 가는 것조차 뿌듯하게 생각했다. 나 역시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을 때여서 그분에게 잘 보이긴 해야겠는데, 별로 친하지 않아 걱정이었다. 원래 손을 비비거나 아부하는 데 달란트가 없어 겉으로는 안달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뭘 해서라도 잘 보여 연말 인사 발령에는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그 부사장님께 의지하려는 이런 방선오 형제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 큐티 시간을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는데 부사장님께 복음을 전하라는 생각이 난데없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잘 보여야 하는 부사장님께 뜬 구름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사장님은 청년시절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지금은 교회와 담을 쌓고 살면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분이기에 신앙 이야기를 잘못 꺼내면 그나마 갖고 있던 그 분과의 얄팍한 관계마저 흔들릴 것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몇날 며칠을 이러 저러한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결단했습니다. 자신이 쓴 책을 포함해 몇 권의 기독교 서적을 사 들고 부사장님 방에 들어갔습니다. 업무 보고를 할 일도 별로 없었기에 그냥 책 선물 좀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다시 교회 다니시면 좋겠다고 권면했습니다. 다행히 부사장님은 좋다 싫다 내색 없이 무표정하게 자신의 선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방선오 형제는 복음은 전해 후련하였으나 괜한(?) 짓으로 연말 승진은 물 건너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찜찜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말, 방선오 형제는 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 얼마 후 실세였던 부사장님은 어떤 문제로 갑작스레 회사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모든 인사 발령의 권한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심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몇 년 후 그 부사장님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좀 더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전했으면 하는 자책감과 동시에, 유한한 사람의 빽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빽을 믿고 살아야 함을 다시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일터 행전, 119-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