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 11:7-15

이번에 한국에 상영된 “사도 바울”이라는 영화는 이미 미국에서는 4월경에 상영된 영화입니다. 내용은 사도 바울께서 네로 황제 말기인 AD 67년경 마지막으로 로마의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벌어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의원 누가는 열심히 바울을 간호하기 위해 감옥을 드나들고 있었고, 바울의 동료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의 구석진 곳에서 도피중인 그리스도인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네로가 불지른 로마시 화재의 책임을 지고 잡혀 화형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자 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의견대립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은 무력투쟁을 하자는 편이고, 다른 편은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이주를 하자는 편이었습니다. 무력투쟁을 하자는 청년들은 무리를 지어 경비병을 죽이고 로마 감옥으로 쳐들어가 사도 바울을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바울은 그들의 길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 예수의 가르침과 틀리다면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는 감옥에서 나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런 살벌한 순간에 로마 감옥을 관리하고 있던 로마 장군은 딸이 죽을 병에 들어 유명한 의원은 전부 초빙하여 진료를 받았지만 끝내는 치료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망연자실하여 집에 모시고 있던 우상에게 제물을 바쳐 딸을 회복시키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장군이 사도 바울을 면담하는 중에 바울은 그 장군의 딸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누가를 위대한 의원이라고 추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던 로마 장군은 딸의 병을 도저히 고칠 수 없자 누가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누가는 가자마다 장군의 딸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진단을 할 수 있었고 칼로 몸에 차오르는 피를 뽑아내 살려냈습니다. 그 와중에 로마당국의 수배를 받고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및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서 집단 생활하는 곳을 장군에게 알려주고 필요한 약재를 직접 받아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원수의 딸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이 은거한 장소를 노출시킨 누가 및 그런 장군을 받아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에 이 장군은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제에 의해 화재의 주모자로 이미 사형판결을 받은 바울을 구하여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 감옥에 있는 동안 바울은 계속해서 매를 맞는 등 고난을 당하였고,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자기가 그 옛날 박해하여 죽이던 그리스도인들 형제 자매의 얼굴이 환상 가운데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로마 병사들의 손에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나고 있습니다. 크게 볼 거리는 없지만 사도 바울의 일관된 믿음의 삶과 그를 도우는 의원 누가의 충실함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위해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자

마가복음 10:28-3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펴낸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라는 책을 보면 민영환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1906년 7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훈의 ‘혈죽도’가 ’‘혈죽기’와 함게 게재됐다. 을사조약의 폐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했던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자결 후, 혈흔이 묻은 옷가지 아래에서는 네 줄기의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당시 이 녹죽을 보기 위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민영환의 순국이 불러일으킨 항일의식과 대나무가 갖는 곧은 충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이 대나무는 혈죽이라 명명됐고, 양기훈이 이를 묘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혈죽도’는 목판화 각판을 붙여 『대한매일신보』 제4면에 전면 인쇄됐으며 “충절을 애모하시는 독자들은 이 대나무 판화를 감상하며 칭송할 것이다” 라고 그림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그리고 현채(1856-1925)가 1907년 저술되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폐간된 초등학교 아동용 교과서 “유년필독”의 제3권에는 “민영환 혈죽도”가 혈죽, 민영환 유상과 함께 수록됐으며 “놀랍고도 신기하다. 우리 민충정. 어리석고 불쌍하다. 우리 국민들”이라는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충정공 민영환은 오직 대한제국 혹은 조선만이 그의 인생의 전부여서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없자 목숨을 버림으로 민족의 혼을 깨우쳤고, 여기에 조선의 땅이 부응을 하였는지 푸른 대나무가 솟아났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살아도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영생을 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살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 질문을 던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산다는 답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녕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매우 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마지막 고난 주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가르치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와서 주님께 묻기를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한 가지를 묻겠다.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냐?” 라고 하자 이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만약 “하늘로부터다” 라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질타를 받을 것이요(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으로부터다 라고 하면 백성이 침례 요한을 선지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렵다 그러니 슬쩍 이를 묻어두고 “어디로서인지 모른다”라고 하자고 합의를 한 뒤 주님께 와서 “어디로서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 등은 전혀 진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이 중요하였고, 자신들의 입장이 수치와 해를 당한다고 여겨지자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이나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는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적용되는 경우로써, 주님과 복음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자신의 집, 형제, 자매, 부모, 자녀, 전토 등에 위험이 가해지는 어려운 경우를 당할 때입니다. 이때 과감하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혹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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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 -25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인간이 되시는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설명을 하여주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수태되셔서 인간이 되시는 과정에서 정혼한 약혼자 요셉의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를 안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할 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고 아들을 날 터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 왜냐하면 그분이야 말로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하시자, 요셉은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와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아기로 세상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의 수난을 견디시고 드디어 만백성의 구주가 되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분에게 순종하는 자들만 죄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이 명령에 순종하여 네팔의 척박한 땅에 복음을 전하고자 결심한 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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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 26-29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 과정 (평화의 열매, 사랑의 열매 – 이사야 11장 6절 이하의 성취)

네팔 선교에서도 요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주부들의 공동 관심사). 양승봉 의사는 부인 신경희 선교사와 함께 네팔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이분들이 네팔에 있을 때 부인 신경희 선교사는 달린 선교사와 함께 요리교실을 열어 네팔 여인들이 쉽게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요리를 가르치는 한편, 말씀을 나누고 함게 기도하는 모임을 오랫동안 인도하였다. 모임에 참가하는 식구들이 꾸준하였다. 양승봉 선교사는 2부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요리교실이 아니었다면 이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린 신앙이 성장하고 영글어가는 과정을 이처럼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곤 하였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새댁은 스리자나라는 네팔여성이었다. 어느새 신학과정까지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삶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확 변하였다. 스리자나는 마오이스트였다. 공산주의 세력이 강한 암피팔 산지에서 자라면서 영향을 받은 탓에 일찌감치 ‘투사의 길’로 들어섰다. 산골 소녀치고는 공부도 웬만큼 한데다 머리도 좋아서 무슨 일을 시키든 척척 해냈다. 충성심과 책임감이 강해서 중대한 일을 맡겨도 실수가 없었기에, 얼마지나지 않아서 조직의 세력을 확장하고 새 당원을 확보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당연히 스리자나는 정부군의 표적이 되었고 금방 수배대상에 올랐으며, 이웃들의 신상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시골마을에 은신처를 구할 수가 없자 스리자나는 서둘러 도망쳤다. 도피여정은 멀고도 험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최종 목적지인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있는 돈을 모두 털어 간신히 방을 얻고나자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때 친절한 외국인 선교사 부부(남편은 엔지니어, 부인은 파탄병원 소아과 의사)를 만나 일거리를 소개받아 그 어려움을 벗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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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1장 1-10

H.A. 아이언사이드 목사님은 밤마다 대도시 대형 홀에서 복음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종종 집회 장소 뒤편에 앉아 있는 청년을 바라보면서 집회가 끝나기 전 그와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이 청년이 늦게 도착하여 할 수 없이 앞자리에 앉았을 때 이야기 할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자신을 무신론자로 부르지는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가 어떻게 해서 무신론에서 벗어나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가까운 곳에 앉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바로 저쪽에 있는 사람 덕에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전에 술집 주인이면서 알코올 중독자였으나, 복음을 깨닫고 삶이 바뀐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은 여러해 동안 술집 주인인 그를 알았고,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술을 끊으려고 했던 많은 시도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술에서 놓여난 그를 보고 청년은 기독교가 진리일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신론에서 생각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 뒤 청년은 구약을 읽기 시작했고 신약은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아쉬워하고 하고 있던 차에 최근 들어 구약의 이사야서를 읽었으며 아름다운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이사야를 믿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사야 53장을 읽은 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습니다. 청년은 스스로 성경을 읽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모두 읽은 청년은 갑자기 성경을 목사님의 손에 떨어트리더니 말 한 마디 없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청년은 3일이 지난 뒤에야 집회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청년 얼굴에서 달라진 표정을 보았고 사람들의 개인 간증을 하는 시간이 돌아왔을 때 청년은 일어나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신자 가정에서 자란 그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시각에 노출되었고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어느날 이스라엘의 골고다를 여행할 때 그곳이 기독교가 시작된 사기극의 발원지라고 생각되어 분노와 저주를 터트린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여행 당시를 생각하며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지난 며칠 밤 동안 그때 골고다에서 저주한 이가 바로 내 허물로 생긴 상처를 치료하시려고 당하신 아픔을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데이비드 림보, 법정에서 만난예수, 60-61).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품성을 변하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도 화목하게 지내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 기초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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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1-6

논어 선진편을 보면 공자께서 제자 안연과 자공에 대하여 평가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는 도에 가까웠으나 자주 끼니를 굶었다. 사는 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렸으나 예측하면 자주 맞았다” 이에 대하여 논평을 하는 논어 주석책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좋은 뜻을 지녔다 해도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없다면 흔들리기 쉽다. 하지만 안연은 단사표음의 가난에도 도를 추구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공은 달랐다. 가난한 장사꾼 출신인 그는 재주가 있고 명민했으며 재화에 밝고 헤아림이 뛰어났다. 그 때문에 명을 평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화 증식에 마음을 두었다. 앞을 내다 보고 정확하게 투자했기에 예측이 자주 맞아 부유해질 수 있었다. 자공이 명을 받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범조우는 “부귀재천인데 자공은 재화 늘리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기에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 보았다. 자공의 능력은 드문 것이지만 안연이 천명을 편안하게 여긴 것과 달리 자공은 천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안연과 자공의 차이다” 논어 전체는 어떻게 학문을 하고, 어떻게 의를 행하고,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이며, 어떻게 사람들을 분별하는가, 군자는 어떤 사람이고 소인은 어떤 사람인가 등의 문제를 다루지 여러분 논어의 어디를 읽어도 축복을 받는 비결 등은 써있지 않습니다. 다만 신실하게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는 방법만이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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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을 입자

에베소서 4:21-24

평양 남산현 교회의 전설적인 전도왕 김세지(1865-월남?) 전도부인은 1865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한 뒤 우여곡절 끝에 1888년 재산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이자 관청에도 출입한 김종겸(金宗謙)과 재혼하였다. 한편 홀은 1893년 한국인 조사 김창식과 함께 평양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열매가 오석형이었다. 오석형은 평양에 들어와 노름꾼으로 지내다가 전도를 받고 새사람이 된 사람으로 김종겸의 팔촌 아우뻘이었다. 그 오석형으로부터 ‘예수 믿으면 남편의 외도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나가 말씀을 듣는 동안 기독교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영생’을 사모하는 동시에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믿지 않던 남편도 신비체험을 한 뒤 1895년경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갔다. 이후 김세지는 1896년 미감리회 선교사 노블(W. A. Noble)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지(世智, Sadie)라는 이름을 얻었다. 1899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소속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보호여회(保護女會, Ladies Aid Society)를 조직하였고, 1916년에는 과부회(寡婦會, Widows Relief Association)를 창설하였다. 1919년 11월 장로교와 감리교 여성들이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재무부 부부장 직책을 맡았다. 1920년 일제 경찰에 의해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921년 석방 후 보호여회를 재건하여 70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보호여회 기금으로 1923년 평양 칠성문 밖에 교회를 세웠다. 1925년 전도부인직에서 은퇴하였으며 광복 후 월남하였다. 말년에는 사위 변홍규 목사의 집에 기거하다 별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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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6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선교사 캠벨 부인에 대한 기념비에는 “배화여학교, 종교교회, 자교교회의 설립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캠벨 부인은 44세인 1897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후 1898년 고간동으로 선교부를 이전하자 여기서 여학생 6명으로 기숙학교를 시작했으며 점점 성장하여 1903년 학부의 인가를 받아 윤치호를 통해 “배화”란 이름을 받았는데 이것이 배화여학교이다. 이와 동시에 1900년 4월 15일 부활 주일을 기해 잣골교회를 시작했고 이어 1901년 가을 벽돌로 ‘루이스워커예배당’이 건축되었으며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그러다가 1908년 4월 종침교 건너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나가면서 종교교회라고 불렀으나, 고간동에 그대로 남아 있던 교인도 상당수 있었다. 그래서 종침교 다리 아래로 나온 교인들은 ‘종교교회’를 만들었고, 남은 교인들은 여전히 고간동에서 ‘잣골교회’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일부 교인들이 옮겨가지 않고 ‘잣골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계층간 문제’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종교교회로 나간 교인들 중에는 양반과 지식인이 많았고, 잣골교회에 남아 있던 교인들은 대부분 하류층 사람들이었다. 선교부에서도 1908년 연회부터 이 두 교회를 별개 교회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던 잣골교회는 1910년 어간에 통인과 내시들이 주로 살던 일종의 소외 계층 지역이었던 창성동의 작은 한옥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12년 커다런 ‘내시 집’을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자교교회’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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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조선 성종 때(1469 – 1494) 서울 사직동에 허종과 허침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우의정, 동생은 좌의정까지 지냈고 형제가 모두 청백리로 녹선될 만큼 청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 형제에겐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던 나이 많은 누이가 있었는데 지혜롭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말년에 성종은 왕비 문제로 골치를 썩었습니다. 왕세자 연산군의 생모이지만 성질이 포악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킨 윤비를 폐출하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습니다. 신하들은 폐비 문제에 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졌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고위직에 있던 허씨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정 중신들이 폐비 문제로 결정을 내리던 날, 마침 할머니가 별세하여 동생을 장례집에 보내 회의에 나가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형마저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걱정하고 있는 허종에게 누이가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왕비는 세자의 생모이며 지금 왕은 연로하니 오래지 않아 세자가 보위에 오를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새 왕은 생모의 억울함을 가리려 할 것이다. 너는 이 일에 가담하지 말라” 사직동 집에서 나와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허종은 누이가 가르쳐준 대로 말을 타고 가다가 짐짓 굴러 떨어져 팔을 다쳤습니다. 부상을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날 회의는 예정대로 폐비를 결정했습니다. 과연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기 어머니의 ‘폐비사사’에 관련된 신하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했지만 그때 ‘폐비 모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허종, 허침 형제는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허씨 형제의 집 앞에 있던 그 다리를 ‘종침교’라 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종침교’를 줄여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지 ‘종’ 자도 ‘옥구슬’ 종(琮) 자에서 ‘마루’ 종(宗)으로 바뀌어 종교교회가 설립될 즈음엔 이미 ‘마루 다리’란 뜻의 ‘宗矯’로 표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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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지금 AI 컴퓨터 내지 로봇의 등장으로 앞으로의 세상을 진단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화물차 및 특수 차량운전원은 향후 10년 안에 85.73%가 로봇으로 대체된다는 소식에 어느 중년 여성은 우울해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표를 받는 직원으로 일하다가 그것이 자동화되어 일자리를 잃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후 대형차 운전 면허를 따고 조선소의 물동량을 나르고 있지만 화물차 운전을 할 수 없게 되면 생계수단이 막막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영국에도 같습니다. 영국의 택시인 블랙캡의 운전자들은 요사이 우울합니다. 그것은 우버택시가 등장해서 이전처럼 수익을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버택시는 3년후 전면 자동화된 택시를 준비하고 있어 우버택시운전자 역시 위태롭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철저히 대비하고 계산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기준은 영원한 운명의 관점에서 따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섬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섬김 중 하나가 제대로된 세계관을 가지도록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보는 관점은 철저히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을 배제하고 세상만사를 보는 관점이 이른바 세속주의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이 세상이 전부이지 하나님도 없고, 내세도 없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신들이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는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보여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천지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자녀로서 영원한 운명의 관점에 모든 사물과 사건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천천히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는 이 관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영원의 관점을 기반으로 철저히 계산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다루어나가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