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등경 위의 등불이 되는 방법)

누가복음 8:16

연합뉴스(2019.6.17)입니다. “경찰과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06년 20대 중반이었던 A(현39살) 씨는 강도상해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던 중 우연히 로또에 당첨됐다. 당첨금은 무려 19억원. 세금을 제외하고 14억원가량 수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확천금도 A 씨 인생을 바꾸지 못했다. 로또 당첨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해 강도상해 혐의를 벌금형으로 마무리한 뒤 본격적으로 당첨금을 쓰기 시작했다. A 씨는 처음에는 당첨금을 가족들에게 쓰며 새 인생을 사는 듯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랜드 등 도박장과 유흥시설을 드나들며 8개월 만에 돈을 모두 탕진했다. 로또 당첨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절도범으로 전락해 금은방에서 절도 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다. 1년을 복역하고 2008년 4월 초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로또 복권을 계속 샀지만, 행운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A 씨는 2008년 4월 중순부터 9월까지 또 금은방을 털다 경찰에 붙잡혔다. 2010년 계속되는 절도 행각으로 또 지명수배된 A 씨는 2014년에는 휴대전화를 상습적으로 훔쳐 장물업자에게 팔아넘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A 씨는 135차례에 걸쳐 무려 1억 3천만원 상당 휴대전화기를 훔쳤다. 경찰에 붙잡힌 A 씨 지갑에는 로또 복권과 스포츠토토 등 복권 10여장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5년 3년 형을 선고받고 2018년 복역한 A 씨는 또다시 조직폭력배 행세를 하며 영세 업주들 돈을 뜯어냈고 주점에서 절도까지 벌이다 올해 또다시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생활고에 시달려서 범행했다’고 진술했다”며 “로또 당첨이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는데 순식간에 돈을 탕진하고 다시 좀도둑으로 돌아간 A 씨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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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누가복음 4:16-21

(클레멘트코스의 철학)
다 아는 바와 같이 ‘클레멘트코스’는 미국의 얼 쇼리스 박사의 제안과 노력으로 탄생하였으며, 그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난을 벗어나게 하여 주려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인문학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을 공부하면 그들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보는 생각을 변화시키게 되고 그 결과 주체성 있는 사람으로서 서게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새로운 눈이 뜨게 되어 연구하고 생각함으로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며, 매사에 생각없이 단순 반응만을 반복합니다. 마치 외부자극에 조건반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클레멘트코스의 사례)
따라서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인문학은 틀에 박힌 사고에 갇힌 지루한 일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남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과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 시를 음미하는 법, 교향곡을 즐기는 법을 새롭게 배웁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미술작품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상황이 열 가지 라면 그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시작하는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시를 읽는 것 위대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 자체가 모두 시작하는 일이며 새로워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를 사업이나 학문을 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작하도록 가르칩니다. 지유로워지기, 우리가 맞닥드리는 일상을 새롭게 생각해 보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 되풀이하지 않기, 전통을 억압이 아닌 혁신의 동력으로 이해하기 같은 것들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치적인 삶을 페리클레스식으로, 즉 사람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삶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한없는 자유가 가능하게 하는 이 세상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가야 할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개혁하고 또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1995년경 장소와 교수진과 교과과정까지 준비가 다 끝났을 때 얼 쇼리스 박사는 본격적으로 학생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를 찾았습니다. 이 센터는 뉴욕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지역인 사우스 브롱크스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서 코카인 중독증을 치료하던 여자 두 명을 설득했습니다. 그중 한 명인 카르멘은 교도소에서 10년을 보냈으며, 버나데트라는 다른 한 명은 거리의 성매매 여성이자 약물중독자였습니다. 몇몇 곳에서는 학생을 단 한 명도 모집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인문학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직업을 구해 주겠다거나, 돈을 벌게 해 주겠다거나, 혹은 대학 학점을 주겠다는 등의 약속 대신 인문학을 가르쳐 주고 수업에 쓸 책 몇 권을 주겠다는 약속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더 도어’라는 곳에 갔을 때 (그곳은 끼니를 해결하려고 도시 전역에서 몰려든 열여섯 살에서 스물 한 살까지의 젊은이들에게 저녁식사를 무료로 제공한 곳임), 실무진의 도움으로 그중 몇 명을 모아 작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얼 쇼리스 박사는 “저는 여러분을 록펠러만큼 부자로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하자 록펠러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기에 다시 “빌 게이츠만큼이요”하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에 다들 웃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표정들이 진지해졌습니다. 그리고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1) 미술, 문학, 역사, 철학, 논리학 같은 것들로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2)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위대한 사상들을 접할 것이며 (3) 생각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 (4) 그 결과 여러분의 삶은 이런 것들로 풍성해져서 세상의 귀한 보배들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기관과 다른 몇 군데 기관을 통해 31명의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전과자였고, 몇 명은 노숙인이었으며, 외국인 학생들도 네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클레멘트코스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학생들의 단순한 반응(reaction)에서 반성적 사고(reflection)의 단계로, 무력(force)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계에서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단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졸업 후 학생들의 진로가 많은 경우 바뀌었습니다. 클레멘트코스에 와서 공부할 당시 노숙인을 위한 쉼터에서 살았던 한 친구는 강한 스페인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를 쓰는데다 읽기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드대학에 진학해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고 합니다. 첫해에 코스를 수료한 학생 두 명은 치과의사가 됐습니다. 또한 다른 한 명은 간호사가 됐습니다. 10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던 한 여성은 쇼리스 박사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에서 상담실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서맨사는 쇼리스 박사 부인의 충고에 따라 ‘패선기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또 첫해 수료생 가운데 또 다른 한 명은 영문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2006년에 벌써 전세계에서 4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 코스를 졸업하였습니다.(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거리의 인문학, 38-56)

그러나 인문학을 통한 자유와 변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인문학을 통해 힘과 자유를 얻어 정상적인 직업을 갖게 되고 시민으로 살아가다가 남보다 월등한 힘이 생기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이것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복음을 통해 변화되는 사람들은 변화의 폭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남에게 줄 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두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입니다. 또한 인문학으로만 죄의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없으며, 더구나 인간의 삶에는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만 되지 않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고난과 사망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인문학은 또한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종과 섭리

창세기 22: 9- 14

어거스틴의 저서 “고백록”에는 어거스틴이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수사학을 가르치려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져 어머니 모니카에게 심한 근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모니카는 주야로 아들의 회심을 위해 주님께 간구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미 20대 초반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열린 시가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카르타고 총독으로부터 직접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카르타고에서 이름을 날렸을 것입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서 수사학을 가르칠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기 결심한 것은 더 좋은 보수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에 솔깃하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 대한 고려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가게 된 주된, 아니 유일한 동기는 로마에서는 학생들이 좀 더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고, 좀 더 엄격한 규율 가운데서 질서가 잘 잡혀 있어서 가르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교실을 들락날락하거나, 남의 교실에 함부로 불쑥 난입하기도 하고, 선생의 허락 없이도 자기가 등록하지 않은 수업에 들어가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카르타고는 관습에 의하여 그런 행동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기에 어거스틴은 매우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은 학생 때에도 그렇게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장담하였기 때문에, 로마에 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면 이는 어거스틴을 회심시키기 위해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로마에 가서 수사학 교사를 하다가 밀라노 시의 수사학 교수로 공채된 후 거기서 암브로우스 주교를 만나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하게 되는 결정적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록은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과부가 된 어머니 모니카는 작은 아들이 떠나는 것을 몹시 슬퍼하셔서 항구까지 따라 나오셨스며, 어거스틴을 꽉 붙으시고서는,다시 집에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애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셨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어렵사리 설득해서, 타고 갈 배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키르리아누스 기념 성당에서 그날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성당에서 울며 기도하시는 사이에, 어거스틴은 그곳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모니카가 밤새 기도하였던 내용은 아들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지 못하게 해 주시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가장 깊이 보시고 헤아리시는 분이셔서, 모니카가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지금까지 늘 눈물로 간구해 오셨던 바로 그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그 밤에 기도하신 것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순풍이 불어서 어거스틴은 배를 타고 해안을 떠나가는데 그날 아침 모니카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 가운데 바로 그 해안에 서서, 하소연과 탄식으로 주님의 귀를 가득 채웠지만, 주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끝내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한편으로는 어거스틴의 욕망을 끝장내시기 위해, 욕망에 이끌려 로마로 가는 것을 허락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아들에 대하여 육정으로 매달리신 부분에 대해서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으로 어머니를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어거스틴이 모니카를 떠나게 하심으로, 장차 모니카를 위해 더 큰 즐거움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니카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리 내어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자신을 속이고 모질게 대한 것에 대하여 어거스틴을 나무라신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셔서, 다시 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주님께 계속해서 드리셨으며 그것은 드디어 수 년 후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어거스틴 고백록, 박문재역148-52).

오늘 본문에서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종들과 함께 사흘 길을 걸어가 드디어 모리아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번제할 나무를 이삭의 등에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러자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행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하는 행동을 저지하였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 보니 한 숫양 뒤에 있는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여호와 이레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섭리 가운데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를 믿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 14:22 – 33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생일 기념으로 열기구를 타기로 하였습니다. 두 분은 기구가 떠오르는 들판으로 가서 다른 부부 한 쌍과 작은 바구니에 올라탔습니다. 서로 이름과 직업을 소개하고 나니 조종사가 기구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명하고 상쾌하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그들은 바위 협곡에서부터 태평양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열기구에 달린 바구니의 높이는 겨우 무릎에 와 닿았기 때문에 한 번만 심하게 흔들려도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긴장했고 꽉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님뿐이 아니었습니다. 탄 모든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사모님은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긴장하여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열기구가 둥둥 떠가는 동안 사모님 바로 뒤편에 말 목장이 보였기에 말을 매우 좋아하는 사모님을 위해 그곳을 가리켰지만 사모님은 몸은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능한 최대로 눈동자를 뒤로 굴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고는 “아 멋지네요”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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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누가복음 5:1-11

기진맥진하고 실망한 베드로의 물고기를 잡은 이적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비범한 권위가 진실한 제자도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는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의인- 스스로 의로운 자 – 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예수가 필요함을 인정하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는, 산상수훈에서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급진적 가치들을 정의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원수까지 포용하는 사랑입니다. 이 가르침을 남기시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는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가치들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창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고통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충분하고 시간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고 건강과 평화를 구가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그것에 빠져 버립니다(남양유업 외조카 황하나의 경우). 그들은 너무 즐거운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 우리로 하여금 다시 지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깨닫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교훈적 유익을 줍니다.”(칼빈 – 김용규, 신, 641)

스티븐 라박기(Steven Lavaggi)는 자기 침실마루에 앉아서 열심히 성경을 찾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막 자신을 떠나 “The Rolling Stone Magazine” 잡지의 작가와 결혼하러 갔습니다. 열흘 뒤 스티브는 자신의 아들이 소아 당뇨에 걸린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그는 실직하였습니다. 그는 그래픽 아트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실직하였습니다. 버림받고 아들의 병에 대한 걱정 그리고 실직이라는 버거운 현실을 맞이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스티븐은 검은색 글씨는 건너 뛰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읽기를 원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런 가운데 스티븐을 만나주셨고 그는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실패의 동굴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야 비로서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새 신자가 된 그는 시편 91:11절을 붙잡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할 것이다” 그의 상실된 마음으로부터 창조하고 싶은 정열과 소망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스티븐의 열정은 순수미술(fine art)을 통해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헐리우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단지 순수미술을 하였고 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시편기자의 말에 영감을 받은 그는 4X5 피트의 천사를 그렸습니다. 친구가 그 이미지를 3차원으로 만들자고 권했을 때 그는 조각가와 함께 일해 결국 그 천사를 주조해 내었습니다. 그가 남아프리카 소웨토에서 3,500명의 원주민들에게 말할 때 그는 20피트짜리 검은 천사의 조각물을 만들었고 그 군중들은 열광하여 일어났으며 그는 다시 20피트짜리 흰 천사의 조각물을 만들었습니다. 이 두 천사를 “화해의 천사들” 이라고 명명한 뒤 이들은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 알칸소의 레이크 빌리지라는 도시에 두었습니다. 스티븐의 메시지는 그의 정열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낮에는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그의 정열은 밤에 잉태되었습니다. 이혼 당하고, 실직하고, 그의 아들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동안 마루바닥에서 잉태된 것입니다. 이런 투쟁을 통해 그는 정열을 얻었고 오늘날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패라고 부르는 동굴에서 하나님은 이런 정열을 우리 마음에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요일터예배

이사야 40:31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새가 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날개를 퍼덕이는 방법입니다. 벌새는 일초에 무려 70번 이상을 퍼덕여서 몸을 공중에 고정시키고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벌새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공중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계속 날개짓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기류를 타고 활강하는 방법입니다. 활강하는 법은 아는 새는 기류를 타고 내려갔다가 올라가면서 별 힘 안들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즐깁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멀리 가지를 못합니다. 세 번째 방법은 기류를 타고 공중에 솟구치는 방법입니다. 독수리와 같이 오직 몇몇 새들만 이런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날개는 매우 강해서 따뜻한 기류가 땅에서 솟구치어 하늘로 올라갈 때 그 속에 들어가 함께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혀 날개짓을 하지 않고 솟구치어 매우 높이 올라가는데 그때의 순간 속도는 약 13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수리와 같이 공중에 솟구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독수리인 것이 밝혀져야만 합니다.

어떤 농부가 어린 독수리 새끼를 잡아 집에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뒷마당에 있는 닭장 안에 가두어 두고 날마다 먹이를 주면서 돌보고 있었는데 그 독수리 새끼는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행동거지가 꼭 닭을 닮아 가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땅만 쳐다보며 돌아다니는가 하면, 무엇인가를 쪼아 먹는 시늉을 하면서 노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독수리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지방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가 그 집을 방문하여 닭처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이 독수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독수리를 하도 많이 보고 산 사람이라 진짜 독수리라면 저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의논하여 한번 시험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독수리를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 큰 바위에다 내려놓았습니다. 푸른 하늘과 확트인 광활한 들판을 얼마 동안 쳐다보던 독수리는 거침없이 날개짓을 하면서 날아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새는 독수리이지 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옥한흠,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5).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계기가 닥칩니다. 그것이 회사의 바쁜 사정일 수도 있고, 아이들의 진학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많은 돈을 버는 시점이나, 직장에서 승진하는 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가 왔다고 느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붙잡아야만 합니다. 이런 갈림길에 왔을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그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다는 것을 아뢰고 주님의 뜻이라고 판단되는 길을 가야만 합니다. 주님의 길을 갈 경우, 때로는 솟구칠 때도 있지만, 뛰어갈 때도 있습니다. 이 정도도 좋습니다. 그러나 계속 걷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주시는 힘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계속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가 닥칠 때 우리는 달려가거나 아니면 공중으로 순식간에 솟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는 마음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14:27 – 평화

14: 27절 평화를 남겨두신다. 평화(eirēnē)는 히브리어 살롬을 반영한다. 살롬은 관례적으로 유대인들이 인사와 작별의 말이다. 여기서는 작별의 의미가 우선적으로 있다(참고 16:33). 그가 제자들에게 남겨두신 평화라는 작별의 단어는 부활 후에 인사의 말이 되어 버렸다((20:19, 21, 26). 여기서 평화라는 단어에 깔려있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이다. 평화는 구약에서 예기된 메시야 왕국의 근본적인 성격들 중 하나이다 (Nu. 6:26; Ps. 29:11; Is. 9:6–7; 52:7; 54:13; 57:19; Ezk. 37:26; Hg. 2:9) 그리고 신약 안에서 성취되었다(행10:36; 롬1:7;5:1;14:17).  새로운질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화인 것이다개인적인 차원에서  평화는 환난 중에 침착을 확보하게 해주고 그리고 두려움을 해소해 준다. 그런면은 이 구절의 마지막 명령에서 잘 드러난다(근심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말아라). 이것은 우리 마음과 생각들을 근심으로 침공할 때 파수해주는 바로 그 평화이며(빌4:7),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들 가운데서 다스리고 중재하여 그들 중에 조화를 유지하도록 한다.

예수님은 이 평화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평화를 주는데 무력하다. 평화를 향한 모든 노력은 재빨리 미움, 이기심, 쓴뿌리, 악의 걱정과 두려움에 의해 함몰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월적인 평화를 보여준다.이는 그 자신의 평화인 것이며 그의 고난과 죽음의 전 시간을 통해 존재한 평화인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그는 다른 사람의 악의와 세상의 죄를 그 스스로 안에 흡수하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방법으로 약속된 메시아적인 평화를 도입하였다. . 로마의 평화는 잔인한 검으로 달성되었다. 그러므로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적 평화는 더 강력한 검으로 확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것은 로마, 유대인 그리고 우리 모두의 손에서 고난당하고 죽은 죄없는 사람에 의해 확보되었다. 그의 죽으심으로 그는 당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발진시켰다. 그러므로 모든 지각(이해)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그 평화인 것이다(빌4:7)

예수의 가르침 속에 있는 그 평화는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만큼이나 동터오는 왕국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자들의 두려움들을 대처해 주기 위해 필수적인 모든 것을 완전히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1,27). 참고) 갈라디아서5장 22절 – 사랑과 희락과 화평

여기 ‘나가사키의 노래’라는 책으로 나온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의사 나가이는 불교에서 카톨릭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그의 아내는 결혼 전 몇 년 동안 그의 개종을 위하여 기도했다. 미국인 처크 스위니가 목표지점인 코쿠라에 도착했지만 흐린 날씨 때문에 폭탄 투하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향해 나가사키에 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의사 나가이는 방사선 연구소에 있었고, 그의 아내 미도리는 집에 있다가 순식간에 타 버려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두 아이와 할머니는 피폭 방지를 위해 언덕으로 옮겨 졌고 살아남았다. 그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 속에서 그의 직업은 하나님께 바치는 선물로, 그리고 우라카미 성당을 중심으로 한 교회 공동체에 바치는 선물로 변화되었다. 나가이는 그 자신도 방사능 피폭 때문에 야위어 가면서, 방사능 낙진과 죽음의 공포로 고통받던 환자들을 치료했다. 다음의 말은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의사들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한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함께한다. 환자가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다면 의사도 그렇다. … 환자 한 명 한 명이 당신의 형제,당신의 누이, 당신의 어머니가 된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 나는 의료가 소명, 즉 하나님에게서 온 개인적인 부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말은 환자를 검진하고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주사를 놓는 일이 모두 하나님 왕국의 일부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어느새 그동안 치료했던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의사 나가이는 자신의 생명보다 환자들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건강을 위험에 내던지면서도 봉사와 연민, 고통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의사 나가이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가르쳐 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에게 놓인 상황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정성을 쏟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은 대단히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런 삶을 살아가던 의사 나가이는 원자 폭탄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놓기 몇 달 전, 자신이 방사선으로 인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직 3년밖에 수명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그는 부인 미도리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 날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러자 그녀는 조용히 식탁에서 일어나 가족 제단 위에 있는 등을 켰다. 그리고 단아하게 정좌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250년이라는 핍박의 세월 동안 지켜왔던 십자가상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도 그녀를 따라가 그녀 뒤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제야 그녀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요동치는 감정이 가라않을 때까지 거기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나서 미도리가 의사 나가이에게 말했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 기억나요? 우리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삶도 죽음도 아름다울 것라건 이야기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일에 쏟아부었어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에요. 나는 당신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믿어요.” 의사 나가이는 이 말을 듣고 애써 눈물을 참았는데 그것은 연민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었고 그는 자신이 거룩함에 휩싸여 있다고 느꼈다.”

이렇게 의사 나가이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께 그들의 삶을 바쳤으며,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나가사키를 위한 한 그리스도인의 노래였다. 나가이 역시 몇 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스캇맥나이트, 산상수훈, 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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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24 -27

1966년 10월 21일, 웨일즈의 작은 마을 애버팬에 다시 눈부신 아침이 밝았다. 웨일즈 남부의 반짝이는 에메랄드 계곡에 먼동이 트자 탄광촌 산자락에 점점이 모여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가옥들 안에서 부락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수 부락을 탄생시킨 탄갱 속으로 잿빛 코트 차림의 사람들이 속속 줄지어 들어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열 살 난 소녀 딜리스 파월은 자갈길을 걸어 메리가에 있는 팬트글라스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급우들과 모였다. 위풍당당한 붉은 벽돌 건물은 평소 인근 250여 아이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갱도에서 평생의 흉터를 얻은 노련한 남녀들에게 이 마을은 그런데로 좋았다. 다만 동구 밖에 불길한 듯 서 있는 높다란 검은 산만이 예외였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모양이 특이한 덩치 큰 바위, 지표면을 뚫고서 전 지역의 기반 노릇을 하는 단일한 암석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버팬 사람들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애버팬을 고향 삼아 살아온 노동의 세월을 의미하는 기념비였다.

1870년부터 계곡 바닥에 탄 부스러기가 점차 높은 더미로 쌓여갔다. 공중 케이블로 대형 통들을 운반하여 근 1세기가 다 되도록 계속 석탄 찌꺼기를 쏟아내온 것이다. 긴 세월 동안 부락민들이 으레 그러려니 하며 안심하고 있는 사이 석탄 더미는 점차 자연스런 풍광의 일부가 되었고 이제 높이가 수십미터에 달했다. 시월 들어 계곡에 이상 폭우가 쏟아져 석탄 더미와 주변의 흙은 거대한 스펀지로 변했다. 10월21일 아침, 인근 탄갱의 정비 노동자 데이빗 존 에반스는 거대한 덩이가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확인하려 쓰레기 더미 근처의 언덕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상 최악의 탄광 사고 가운데 하나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오전 9시 반, 딜리스 파월은 친구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후에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출석 부르기를 기다리며 우리끼리 웃으며 놀고 있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나더니 교실이 붕 뜬 것 같았다. 책상들이 넘어졌고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다.” 펄 크로우 여사는 길 건너에서 묵직한 굉음을 듣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까만 쓰레기 더미가 움직이며 조금씩 학교 쪽으로 쏟아지더니 학교가 일부 붕괴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고 하였다. 귀네스 데이비스 여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산이 학교를 덮쳐버렸다”

불과 몇 초만에 애버팬의 얼굴이 영원히 바뀌었다. 2백만 톤의 석탄과 돌과 진흙이 폭우에 녹아 산비탈과 계곡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학교는 모여 있던 가옥들과 함께 무너졌다. 사망자만 2백 명이 넘었으며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애버팬의 한 세대 전체가 사실상 사라진 셈이었다. 모두가 산같지 않은 산 때문이었다. 애버팬 사람들은 오랜 수고로 마을을 세웠다. 거대한 석탄 산은 긴 세월 부지런히 일하여 웨일즈의 풍광에 새겨낸 그 고장의 명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세대를 타고 이어지던 살아 있는 유산이었다. 그러나 단 하루만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 하루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 (.(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13-15)

우리의 믿음도 같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성서 해석으로 인한 잘못된 가르침이나, 잘못된 생각은 우리 주위에 건강에도 좋지 않고, 위험한 석탄 더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괜찮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계속될수록 위험은 점점 더 커지고 급기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와 부딪치면 그 믿음의 집은 무너져 무너짐이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반석 위에 세워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반석은 삶의 목표를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히 세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면 지혜와 지식을 얻게 되어 하나님을 알게 될 뿐더러, 우리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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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4:6-10

지구 상공 610km에서 지구 주위를 돌면서 천체의 측광관측과 분광관측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허블우주망원경은 궤도에 오른 지 29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도 우주 탐사에 앞장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우주왕복선을 타고 지구궤도 위로 올라간 허블 천체망원경에 얽힌 비화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마땅히 그 일은 천문학 역사상 최대의 위업이 되어야 했다. 비용이 근 40억 달러나 들었고, 6천 명 이상의 사람이 거의10년 간 매달린 일이었다. 명칭도 천문학의 가장 유명한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에드윈 허블 박사의 이름을 땄다. 그는 인류의 우주관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다. 우주가 정상상태로 존재한다는 과학이론이 주된 학설이었을 때 허블 박사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정상상태의 우주에서 팽창하는 우주로 우주관을 바꾼 사람이다. 개념은 고성능 망원경을 궤도에 올려놓아 지구 대기권의 일그러짐 효과가 없는 먼 상공에서 데이터를 수집하자는 것이었다.과학자들은 138억 광년 이상의 거리에서 빛을 받아 해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전국의 전문가들이 도급을 맡아 수천의 중요한 부품 개발을 감독했다. 섬세하게 작동할 1.2톤 망원경의 동력원으로 대양 전지판이 설계되었다. 무한대 거리의 우주에서 대물(對物)에 정

확한 조준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자들은 정교한 회전의(回轉儀) 시스템을 개발했다. 예술의 극치는 망원경의 본 렌즈였다. 지금 3미터의 오목 렌즈를 정확한 사양대로 갈아 걸작으로 만드는 데 6년이 걸렸다. 그 긴 과정에는 렌즈 전체의 경도를 똑같이 유지하면서 매번 극미하게 정도를 높여가며 렌즈면을 닦는 일도 포함되었다. 드디어 1990년 4월24일, 로켓 엔진의 굉음이 나사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의 발사를 알리며 플로리다 주 중부를 뒤흔들었다. 왕복선 우주 비행사들은 허블 우주 망원경을 지구 500킬로미터 상공의 궤도에 올려놓아야 했다.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우주 망원경 과학 연구소에서는 사람들이 컴퓨 화면 앞에 우르르 모여 세계 최초의 궤도 관측소에서 보내올 첫 영상을 기다리도 있었다. 그러나 데이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기대의 분위기는 점차 당황으로, 당시 불신으로 그리고 마침내 극도의 경악으로 바뀌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 터졌다.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행성들도 흐릿한 덩어리로 보였다. 잘 알려진 별들은 지상에서 볼 때만큼이나 가물가물했다. 조사해 보니 본 렌즈의 초점이 사람 머리털 지름의 50분의 1만큼 비켜나 있었던 것이다. 망원경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오차를 교정하려면 4년의 세월과 수억 달러의 돈이 필요했다. 대담한 우주 유영을 통해 우주 비행사들은 망원경 안에 정교한 교정 렌즈 시스템을 장착했다. 우주 프로그램의 최대 과오 중 하나는 이렇게 폐기물 신세를 면했다. 모두가 작은 실수 하나 때문이었다. 가장 민감한 기계 장치로만 탐지될 수 있을 만큼 작은 실수였다”.(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

자연법칙에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사경들에 비취어서 모인 빛을 한 초점에 모아 이를 사진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약간의 실수로 수십억 달라가 든 허블 망원경은 고철덩어리가 될 뻔하였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같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세상적인 삶에 투자를 하여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가져도,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그의 삶은 흐릿하여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좋은 방법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먼저 공고히 하여야 합니다.이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섬기는 삶, 즉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간절히 기도하게 되어 있고 이에 따라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 삶 역시 은혜로워지는 것입니다.(잠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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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4:16-19 ; 17:3

연합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습니다. “복수의 미국 매체에 따르면 지난 23일(현지시간) 마누엘 프랑코(24)씨가 미국 복권 ‘파워볼’ 사상 두 번째로 높은 당첨금인 7억6800만달러(약 8천800억원)를 위스콘신 주 매디슨 소재 복권국에서 청구했다. 이날 프랑코씨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난 행운아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프랑코씨는 “(내가) 당첨자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면서 “이후 5분~10분 정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고 회상했다. 프랑코씨는 향후 계획을 묻는 말에 직답은 피했다. 다만 “복권 당첨 사실을 안 다음 날 출근했으나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다음 날로 일을 그만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단 시간을 갖고 앞으로의 인생을 설계한 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가능한 한 평범하게 살아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현금 일시불 수령 방식을 선택한 프랑코씨에게는4억7700만달러(약 5560억원)가 지급되는데, 각종 세금을 제하고 나면 3억2600만 달러(약 3730억원)를 실수령하게 된다.”

복권에 당첨된 이 청년이 어떻게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갈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나 돈의 유혹을 이기면서 겸손하게, 가능한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계획은 쉽지 않습니다. 벌써 복권에 당첨될 경우 밟게 되는 절차 중 첫 단계로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금과 같이 단련시켜 당신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요셉이라는 성경의 아주 좋은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잡혀 17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렸고, 힘든 노예생활을 견디고 주인에게 인정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지만,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대가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억울한 감옥 생활 중에 감옥에 갇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여 앞날을 알려주었지만 출옥한 그는 잊어버렸습니다. 그후 다시 2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견디고 난 후 비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다룰 수 있는 총리로 승격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과 그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시키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크게 쓰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통상 신자들이 거쳐가는 단련 코스입니다.이후에야 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은사가 충분히 연마되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