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걸으시는 그리스도

2015.07.29  | 물 위를 걸으시는 그리스도 (마14:22-33)

오늘은 2009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하던 중 방문한 갈릴리 호수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베드로가 함께 물 위로 걸었다고 알려진 장소에 대하여 사진을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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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갈릴리 호수 위를 배가 떠다니고 있으며 주님께서 물 위를 걸었다고 알려진 곳을 그 배 위에서 제가 직접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시고 저녁이 되어 무리를 흩어 보내시는 사이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그 지역을 떠나 갈릴리 호수 서편으로 가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났고 주님은 무리를 흩어 보내신 뒤 기도하시러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윽고 새벽 3시가 되자 주님은 호수가로 내려오셨습니다. 호수가에는 아무런 배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내 물 위로 한 걸음을 내딛고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거센 풍랑이 이는 호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의 배까지 가셨습니다. 바람과 풍랑으로 제자들은 저녁에 떠났지만 밤새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 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자 제자들은 유령으로 오인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두려워 하자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습니다. 베드로가 소리를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드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시매 바람이 그치고 배는 저희들이 가려고 한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배에 있던 제자들은 주님 앞에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풍파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자주 물 속에 빠져들어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늘 상 주님께서 계셔서 우리의 구원의 부르짖음에 손을 내밀어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 속에 빠진 베드로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거센 풍랑에 곤고를 당한 제자들이 주님이 진정 누구신지 깨달은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는 순간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가는 삶이 영생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어두움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을 때 여러분 더 많은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더 잘 알수록 우리는 그를 저 잘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하십시요. (CTS 방송설교).

mt-hermon-sea-of-galilee이미지 출처:  http://urantia-book.org/
삽화: Rambrant –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1633)

 

하나님의 백성의 삶

2015.07.22 | 하나님의 백성의 삶 (창21:22-23)

창세기 21장 22절 이하에 보면 블레셋의 땅에 거주하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브엘세바에 거주하는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목적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은 연 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직전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 할 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여 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취하여 들인 그 밤에 하나님께서 현몽하셔서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나도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창세기 20:3-7).

 그 후 아비멜렉은 몇 년동안 지켜보니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을 보고 그를 찾아와서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삶이 되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에 대하여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1800년대말과 1900년대 초엽에 전염병으로서 콜레라가 만연하였다고 합니다. 어느날 한 조선사람이 지나가다가 릴리아스가 전염병으로 죽은 부랑자를 가슴에 안고 슬퍼하고 있기에 호기심이 나서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외국여인이 죽어가는 한국사람을 돕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특히 이 쓸모 없는 부랑자를 말입니까? 그는 너무나 혼돈이 되어서 릴리아스를 따라 그녀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웃사람들에게 도애체 이 여인이 누구인지 물어 보게 되고 릴리아스가 새로운 종교의 선생과 결혼했으며 왕후의 의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를 들은 남자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집에서 나오는 선교사를 기다렸다가 따라가서 조그마한 교회로 가서 선교사가 예배를 집례하는 동안 그 사람은 큰 감동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즉시로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동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너무나 인정머리없는 동네로서 어떤 사람도 가기 싫어한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소식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이들은 친절한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이 변화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언더우드 부부에게 이것에 관해 물었고 그때서야 이 기적의 변화사건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이 행주로 가서 그 마을에 대하여 후속조치를 취했을 때 그는 그 마을의 변화의 진실한 이유는 자신의 아내가 죽은 거지를 그렇게 돌보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http://underwoodmemorialhall.blogspot.kr).

 여러분 날이 이를 것입니다. 즉, 죽은 자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올 것입니다. 아브라함 처럼 릴리아스 호튼 처럼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iedl/150059861893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15. 07. 15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11:11-12)

1999년 7월 17일 자 기독공보를 보면 언더우드 탄생 140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 묻혔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해를 83년만에 양화진 외인묘지로 옮겨 부인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과 함께 합장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이미 1916년 미국에서 돌아가신 바 되었고 부인은 그 다음해 아들 원한경박사와 자부와 함께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선교사역 및 의료사역을 하다가 1921년 죽어 양화진 외인묘지에 따로 묻힌 바 되었습니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는 1851년 태어나 시카고에서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1888년 37의 나이로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제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녀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매우 가난하고 길은 진흙으로 덮인 한국을 보았지만 선교사로서의 그녀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고 적고 있습니다(상투쟁이와 15년).한국에 와서 그녀는 두가지 일에 바빴습니다. 하나는 낯선 언어를 익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민비와 나이가 같았고 민비의 주치의였습니다. 서로 간에 친했다고 합니다. 1년 후 8살 연하인 언더우드 목사님과 결혼을 하여 1890년 외아들 원한경을 낳았습니다. 글도 잘쓰셔서 1904년 상투쟁이와 15년이라는 선교일화를 담은 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였고 1918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 이야기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들은 지금도 아마존에서 구입가능합니다. 한국에서도 킨들로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조선 선교에 발을 디뎠고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여 자신이 가진 의술을 가지고 섬기다가 이 땅에 온지 33년후에 70살인 1921년 조선에서 죽었고 양화진에 묻혀 지금도 우리에게 그녀의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응답되어 그녀의 남편이 세운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은 지금도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그녀의 후손들은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선교란 이런 것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c7cc5725_underwood이미지 출처: www.boazclub.com

신앙유산을 흘려보내라

2015.7.1 수요일 | 신앙유산을 흘려보내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출애굽기 3:6)

잘 아는 목사께서 아들이 국내 굴지의 회사 인턴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그 청년은 열심히 노력하여 인턴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기뻐해야할 일이지요.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과 배우자를 가지는 것은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중요한 일이나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신앙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자식농사는 50대 후반이 되면 결정납니다.그러나 신앙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동참이 있어야만 합니다. 개인적 경건은 성경읽기 기도로 되지만 교회적 경건은 서로간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유산을 흘려보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참고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세운 제단의 의미
아브라함은 3 군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세웠다.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 확인한 세겜(창12:6-7)에서  최초로, 곧 이어 남쪽으로 33킬로 떨어진 벧엘 동쪽(창12:8), 롯이 떠난 뒤 헤브론으로 내려와서 제단을 쌓았다(창13:18).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한 번 제단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자기에게 나타난 여호와를 기리기 위해서이다(창26:24). 한편, 야곱은 70대 중반 헤브론에서 밧단 아람으로 도피할 때 벧엘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에 기름을 부었고(창28:18-19), 20여년이 지나 밧단 아람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브라함을 본받아 세겜에 제단을(창33:20) 그리고 다시 벧엘에 이르러 제단을 쌓았다(창35:6-7). 세겜, 베델, 헤브론,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주요 능선도로의 거점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후손들이 목축을 하러 이동할 때는 이 능선도로를 따라 이동할 것이고 그 경우 정기적으로 이 제단에 와서 여호와께서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하신 가나안 땅을 상속하고 강대한 나라가 되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늘상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성서에 쓰여진 하나님의 약속들을 묵상하듯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신의 후손들이 제단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되새기도록 한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24-25 참조).

marc-chagall-sacrifice-of-isaac-figure-1삽화: Marc Chagall – The Sacrifice of Isaac (1960)

시험의 순간

2015. 6. 24  | 시험의 순간: 아브라함과 롯의 결별

네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16:3)

기근시에 어쩔 수 없이 관개시설이 잘 되있어 물의 공급이 풍부한 이집트로 가게 된 아브라함은 당시 최강대국이던 이집트 파라오의 손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라를 구출하고 덤으로 재물까지 얻어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 왔다. 가나안 땅은 이집트에 비하여 흠이 있었다. 그 흠은 물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위로 부터 비의 공급을 제 때에 받지 못하면 흉년이 들 수 밖에 없는 그런 땅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거기에 머무르게 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는가 여부가 문제였다.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답을 주어야 했다. 롯과의 사건은 바로 이를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정말 풍부하게 이 두사람을 축복하셔서 더 이상 두 사람은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의 목자간에 목초지에 대한 분쟁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런 축복이 그 배경이 된 것이다. 여기서 각 사람이 가족과 재물을 이끌고 어디로 가야하며 그렇게 한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롯으로 하여금 먼저 선택하도록 하고 롯은 이 기회를 잡아 가장 물이 넉넉한 평야를 찿고는 소알, 소돔 그리고 고모라 지역을 선택하였다.  성서 기자에 따르면 이 지역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할 정도였다(창13:10).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집트의 시련 가운데서 배운 것은  신선하고 풍부한 물보다도 하나님의 약속들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경험이었다.  그는 100년 만에 일어나는 기근을 만났었고 물을 찾아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물은 찾았지만 자기 목슴을 위하여 거짓말하다가 사라가 붙잡히는 수치를 당하였다. 이제 다시 물의 문제로 조카와 다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최소한 생존의 문제에서는 충분하시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도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신다는 신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롯은 물을 찿아 점점 요단 강 넘어 남방 소알, 소돔, 고모라 지역으로 갔고, 아브라함은 목축을 위하여 벧엘로부터 약 50킬로 떨어진 남방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롯은 또 다시 동쪽으로 갔다. 반역 후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에서 동쪽으로(창3:24),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 동쪽으로(창4:16), 바벨탑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들 역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창11:1-2). 그러므로 이런 롯의 이동이 물을 찿아 가는 논리적인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물이 풍부한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너무나 악하여 하나님께서 얼마 안있어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도시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과 롯이 결별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롯은 오직 육신의 필요를 따라서만 결정하였으며 그 결과 소알, 소돔, 그리고 고모라 지역이 물이 풍부하므로 자기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돌이킬 수 없는 여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걸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물이 적고 목축이 힘든 지역인 헤브론 산지와 남방 네게브지역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다. 이 헤브론 지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거쳐 약 210년 동안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정착지가 되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20-21 참조).

The_Phillip_Medhurst_Picture_Torah_80._Abraham_and_Lot_separating._Genesis_cap_13_v_17._Borcht삽화: Phillip Medhurst Picture – Abraham and Lot Separating 

믿음의 삶

2015.06.03 | 믿음의 삶 (히 11:8)

제가 수요일터예배에 참석한 직장인들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현재 자신이 몸 담고 있는 회사에 입사하여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분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십시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갈 때 그리고 하란을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히11:8). 여기서 알지 못하고의 원어는μὴ ἐπιστάμενος메 에피스타메노스로서 μὴ 부정을 나타내고ἐπιστάμενος 에피스타메노스정보를 가지고 있다 뜻을 가진 분사로서정보를 소유하는 이유는 그러한 정보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문은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 이유는 정보의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뉘앙스의 뜻으로 이해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장소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정보없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정확히 어디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정보를 가지지 못한 것이지자신이 갈려고 목적지를 모르고 떠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를 믿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목적지를 알려고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그런 정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로 가려고 하였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날 가나안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상세히 조사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최종 목표로 잡았는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드러낼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지는 아래의 글을 보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선택하여 참되신 유일한 하나님의 전달자가 되도록 하였고,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그 하나님의 계획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 지역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 대륙이 만나는 장소로서 일종의 허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상인들이 자신의 상품을 가지고 이 지역을 통로로 물건을 사고 팔면서 여행한 것 처럼, 아브라함의 자손들 역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모든 민족에 대한 좋은 소식을 세계만방에 신속하게 전파하도록 선택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되어야만 하였고 이 목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이 주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어야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명을 망각하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버려 우상숭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가나안 땅에 살 수 있는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16-17 참조).  

 우리가 살아갈 때 정확히 어떤 학교, 어떤 직업과 회사, 어떤 배우자가 하나님의 뜻인가에 관한 정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모릅니다. 다만 아브라함과 같이 어떤 목적 하에 학교, 직업, 배우자를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물색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몫을 주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삶에는 철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표를 가지고 선택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겸손: 구세군의 장화 닦는 일

2015.05.20 | 겸손-구세군의 장화 닦는 일 (빌2:5-8/ 요13장)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크신 뜻 중 하나는 우리의 겸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일하실 수 있는지 궁금해 하십니다. 이것은 곧 섬김입니다. 희생적인 섬김의 삶의 인상적인 예는 미국태생으로 처음 구세군 최고 책임자가 된 사무엘 로간 브렝글(Samuel Logan Brengle)입니다. 이 분은 미국에서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를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는 그는 감리교의 젊은 목사로서 감독이되어 성공하려는 은밀한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부스를 만나고 생각이 변화되어 1887년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가서 구세군에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스는 처음에는 그를 수상쩍게 생각했습니다. 부스는 그에게 말하기를 브렝글 자네는 위험한 계층(성직자라는 의미였다)에 속해 있네. 자네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네 자신의 보스가 되어 왔기 때문에 구세군의 훈련에는 복종할 것 같지가 않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세군 내에서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브렝글을 시험적으로 써보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구세군은 브렝글에게 필요한 겸손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 리밍턴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사관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처음 주어진 임무는 동료 사관 후보생들의 장화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어둡고 조그만 지하실에서 진흙으로 엉망이된 열여덟 켤레의 구두와 구두약 한 통을 놓고 그는 심하게 갈등하였습니다. 내가 겨우 구두나 닦으려고 오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왔단 말인가? 라고 자문 하고 있을 때 그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상상 속에서 그는 하나의 그림을 보았다. 예수님이 주인공이셨고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계셨다. 하늘의 영광과 천군 천사의 숭배를 받으셨던 그 주님이.투박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들의 발 앞에 몸을 굽혀 발을 씻기시고 자신을 낮추사 종의 형체를 지니고 계셨다! 브렝글의 마음은 낮아졌다. 주여. 그는 속삭였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으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어떤 구두닦이보다도 열심히 자기 일에 매달렸으며, 입술에는 노래가, 마음에는 평화가 있었다.

 브렝글은 이렇게 자신의 교만이 꺾였던 것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그의 전기 작가는 썼습니다. (존스토트,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정옥배 역, IVP), 202-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