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선 III

수직선 III – 에발산과 그리심산  (신명기 11:29)

여리고의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산지로 들어갈 관문을 얻게 하여주었다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어서 아이성에 대한 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가나안 정복의 길을 택하기 전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산과 그리심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명령한 대로 모세의 율법을 돌판에 기록하고 백성들 앞에서 크게 낭독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수8:30-35;신11:29).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정복 후 백성들을 이끌고 산능선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서  약 36킬로미터 떨어진 세겜이라는 도시에 이르렀습니다. 이 도시는 오른쪽으로 에발산(약1,000미터) 왼쪽으로 그리심산 (약 850미터) 을 두고 그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모세는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에발산에 세우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신27:1-28). 이 모든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간 것이었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수8:30-35).

여기서 우리는 세겜을 선택하여 이런 행사를 치루게 하신 이유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먼저, 세겜은 이런 행사를 치루기에 아주 좋은 지형이었습니다. 좌편에 그리심산 우편에 에발산을 가지고 그 계곡 사이에 있어 이런 지형들은 자연적인 원형극장을 형성하였고 세겜 지역은 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관람객이자 배우로서 수용하여 이 하나님의 계명을 외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다 이 행사에 참여를 하여 보고, 듣고,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지: http://m.blog.daum.net/avmania/848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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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그러나 이 지역은 이런 지형적인 중요성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왜냐하면 이 세겜지역은 약700년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여행하여 가나안을 들어올 때 여호와께서 최초로 나타나셔서 이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줄 것을 확정하신 바로 그 장소였던 것입니다.그래서 아브라함은 여기에 제단을 쌓았고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였던 것입니다(창12:6-7). 이후 약180년 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세겜에서 땅을 구입하였고, 우물을 파고 거기에 다른 기념제단을 쌓았으며(창33:18-20). 또한 모든 이방 신상과 귀고리등을 파묻은 장소였습니다(창35:1-4). 

셋째, 하나님과 그 약속의 신실하심과 그 뜻을 상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세겜이라는 유서깊은 도시에서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성취를 상기시킴으로 가나안 정복을 막 시작한 지금 앞으로 있을 전 가나안 민족들과의 험난한 전쟁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그 약속대로 애굽에서 400년만에 올라오게 하시고 드디어 가나안 땅을 주어 그 기업으로 삼게 하신다는 약속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악함 때문에 이루어진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한 번 되새겼던 장소입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60-61 참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씨는 단수명사이며 그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만민 중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 같이 행하여 세월을 복음의 관점에서 다시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요. 교회 생활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가지고 서로 화답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고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여야만 합니다.

Shechem1 오늘날의 세겜: http://stephencfchan.blogspot.com/

수직선 II

산상수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이는 비결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이들은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서 사해 밑을 거쳐 에돔 족속의 땅을 지나 왕의 대로를 타고 요단강 동쪽으로 진격할려고 계획하였으나 에돔의 반대에 부딪쳐 아라바 길로 하여 세일산지를 우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약 300킬로미터를 우회하여 에돔의 우편 경계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는 에돔땅을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않을 것이니 돈을 내서 양식과 물을 사서 먹고 마시고 에돔을 두렵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에돔땅을 이미 에서자손에게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 의하면 에서 자손은  이전에 세일에 거주하던 원주민 호리 족속을 멸하고 대신 차지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계속 북진을 하여 모압경계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명령하시기를 모압을 괴롭히지 말고 그와 싸우지도 말아라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모압 역시 이전에 거주하던 원주민 에밈 사람을 멸하고 거기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다고 합니다. 이어 계속 북진을 하니 모압 변경부터 시작되는 암몬 족속의 땅의 경계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의 땅 역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지 않았으니 다투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암몬 족속의 땅의 원주민은 르바임의 땅이라고 하였고 르바임 족속이 거주하였고(암몬 족속은 이들을 삼숨밈라 일컬었음) 이들은 아낙 족속과 같이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그들을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신2장).

이스라엘 역시 생존을 위해서는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부수어야만 하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 과정이 여호수아서에 자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신자이거나 비신자이거나 동일하게 일생에서는 극복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장애물들이 있으며 때로는 인생을 걸고 살아야만 하는 절박한 경우도 당한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를 당할 때 나만 당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미 길을 내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가 불신자와 달리 가지는 특권입니다. 이를 위한 좋은 모범은 바로 갈렙입니다. 갈렙은 자신에게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낙 자손 중 가장 큰 사람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고 세새, 아히만, 달매라는 아낙의 3 아들을 죽였습니다(수14:6-15; 삿1:10, 20).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이 모두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주할 땅들을 기업으로 받았으나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의 뜻이 담긴 율법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굳은 맹약을 맺고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키는 것은 모세 율법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침례 요한의 때까지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세 율법을 완성하시자 모세 율법은 더 이상 작동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모세 율법을 통한 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를 않는 구속사적인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니 아직도 모세 율법에 매달려 있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힘써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가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은 헛된 것이며 마술적 신앙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복음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열매의 핵심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가장 높은 차원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산상 수훈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Exodus – Mel Brigg

 

수직선 I

수직선: 무너진 여리고 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히브리서 11:30)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에 위치한 최초의 군사 목표물로서 쳐서 넘어가야만 하는 지정학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여리고는 사해에서 북서쪽으로 약 12킬로미터, 해저 250미터에 위치해 있고 (사해는 해저 418미터)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한 겨울에도 이곳으로 오면 따뜻하였습니다. 더우기 풍부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어 건조한 광야와 사해 지역에 매우 귀중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이스라엘의 군사 목표물로 삼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리적 군사적으로 여리고는 요단강을 건너는 중요한 나들목이고 가나안 중앙 산지 국가들에게 올라가는 입구입니다. 이 지정학적 위치는 여리고를 지배하는 자에게 부와 군사적 힘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문에 이 도시는 세워졌고 높게 성벽이 둘러졌고 또 세워진 바로 그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이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면 가나안 중앙 산지 국가들을 정복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우회하여 정복하러 간다고 하더라도 배후의 근심거리를 남겨두는 것이고 요단 동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연락 및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는 점령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편,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무너진 여리고성을 다시 세워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만 여호수아는 다시 세우지 말것을 저주로 명령하였습니다(수6:26). 그것은 여호수아의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기적적인 탈출을 경험하고,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며, 시내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광야의 40년간을 먹이신 그 하나님, 가까이는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신고 그 높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군사력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너진 여리고 성을 중수하여 성벽을 신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배후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전략이 그때 더 중요함을 알았던 것입니다.사실 성벽을 세우냐 세우지 않느냐 하는 것은 중립적인 문제로서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마음 상태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58-59 참조).

그러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잘못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푸는데 적용한 사례가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어떤 분이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데 하두 팔리지를 않아 고민 중 여리고 성에 대한 기사를 성경에서 읽고 자신도 그렇게 해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아파트가 팔리는 것을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과 동일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하루에 한 번씩 6일 동안 자신의 아파트 단지를 돌고 제 칠일 째는 7번 돌고는 이스라엘이 하던 대로 자신의 아파트에 대하여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니 자신의 아파트를 사려고 사람이 와서 2년간 팔리지 않던 아파트를 매각했다는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식으로 성경의 사건을 해석하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마법적 공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주시는 메시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며 마술적인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도대체 여리고가 무너진 것과 아파트가 팔리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니 아파트가 무너지도록 하였다면 무너졌다는 단어에 일맥상통하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파트를 무너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겠지요!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가니까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여리고 성에 대한 사건 뿐만 아니라 다른 성서의 사건에 대하여도 같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중심으로 성경 말씀과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태도는 종종 심각한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jericho Jericho, from Calvary Southampton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 계7:9-12

찬송가 가사에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곡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글인데 왜 찬송가를 작사하신 분은 이런 가사를 썼을까요? 이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런 사고가 뒷받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시내산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려고 바란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 12명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40일동안 탐지한 후 와서 10명이 가나안 백성들은 신장이 장대하다느니 우리는 도저히 들어가서 얻을 수 없다니 하는 악평을 하는 통에 이스라엘은 울부짖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게 하시고 그 후의 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땅을 우회하여 사해 동쪽을 지나 이제 요단강 동쪽 모압평지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진격하려니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요단강이었습니다. 이 요단강을 넘으면 바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간다는 의미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부른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편, 이 요단강은 봄철 추수때에는 항상 강뚝을 넘칠 정도로 위세가 당당한 강이었고 물살이 급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요단강에 막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에 따르면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셔서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서면 창일하던 요단의 물이 멈춰서리라 그러면 그때 백성들로 하여금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 그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이 온전히 끊어졌고 백성은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수3:15-17).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첫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멀리 우회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였을까요?

최소한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됩니다. 비록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감으로 약속의 땅 밖에서 체류하게 되었지만, 주님께서 이들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어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내실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없었습니다 (창46:3-4).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출애굽한 불순종의 세대가 전부 죽자 비로서 그 때가 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 앞에 다시 요단강이라는 물의 장벽이 나타났습니다. 또 한번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흐르던 강물은 저 멀리에서 무더기로 쌓이고 진흙투성이던 물 밑바닥은 금새 말라붙어서 홍해를 건너듯이 마른 땅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두 개의 건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신다는 점을 늘 상 기억하도록 가견적 체험을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수4:23). 이 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홍해로부터 시작되어 40년을 보냈던 것처럼, 요단강을 건넘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양자 모두 유월절을 전후한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유월절 후 얼마 안되어 발생된 사건이고, 요단강을 건너자 마자 유월절을 가나안 땅에서 보냈던 것입니다(출12:3; 수5:10). 또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과 연결되어 일어났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여 당신의 뜻을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출발을 하게 하심으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려는 의도이신 것입니다(수4:24). 셋째,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 모두에게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단강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물 속을 걷는 방법이고 물이 범람할 시기에는 이 지역의 물 깊이는 3미터 60센티미터에 달하고 빠르고 격렬한 격류가 동반되므로 이는 어린아이들 까지 생각하면 이루기 어려운 현실인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제사장의 발들이 다시 땅을 밟자 끊어졌던 요단의 격류는 다시 흘러서 여전히 위협적이었을 것이다(수4:18).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런 난관을 돌파한 사실 그 자체는 엄청난 메시지를 피아에게 모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수4:23-24). 한편, 홍해를 건넌 사실은 주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한 좋은 증거였지만 이는 가나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세대 역시 바뀌었습니다. 이제 여리고 가까이에 있는 요단강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경계요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요단강 바닥에 있는 돌 12개를 날라 길갈에 유적지를 건축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항상 기억나게 하는 역사적 체험학습장을 만든 것입니다(수4:20-24).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56-57 참조)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삶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불평스럽고 불만족스러운 것들이 있어도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여러분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임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이 사건 역시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히브리어식 발음이고 이를 그리스어로 읽으면 예수가 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끌고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는 신약의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을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이 요단강을 건너면 바로 천국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갈 수 없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죄의 담이며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산출됩니다. 이것은 율법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의롭고 선하지만 율법의 수명자인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욕망 중심으로 살려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의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과 사망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서 33년간 사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로 가셔서 율법의 저주를 한 몸에 받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하셨습니다. 이제 요단강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율법의 문제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망의 문제도 그의 부활로 이기셨고 때가 오면 우리 모두를 부활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예수님은 그 피로 세우는 새언약을 하나님과 체결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우리 성도들을 이끌고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사 이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르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셨던 것입니다.

구원하심은 항상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어린양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Salvation_Mountain 사진: Salvation Mountain, Niland CA  (http://proof.nationalgeographic.com)

두 가지의 길

두 가지의 길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톰이라는 분이 어느날 밤 결혼한 아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려고 진통 중에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아내와 이를 상의하니 당장 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땅이 커서 가까운 도시가 보통 3-4시간 걸립니다. 비행기도 이미 끊어졌고 차를 운전하고 이 밤에 가려니 쉬지 않고 달려도 9시간을 여러 산등성이를 넘어 가야하는 문제에 봉착하였습니다. 가려고 준비하는데도 여러시간 걸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중에 아내는 불과 20분만에 출발 준비를 마쳤고 당신이 운전하는 것이 힘이들면 자신이 운전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중간에 10분만 쉬고 내내 달려 9시간 걸려 도착을 하니 비로 이미 출산을 하였어도 그렇게 늦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톰의 아내를 채근하였을까요? 사명감입니다. 할머니로서의 사명감이 어머니로서의 사명감이 그녀를 몰아세운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길을 걷는데 무슨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최고의 사명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이에 대하여 상반된 예가 비스가 산과 관련된 두 사람의 이야기로써 민수기와 신명기에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산과 얽힌 일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모리아산과 아브라함이요, 호렙산과 모세, 그리고 갈멜산과 엘리야인 것입니다. 비스가 산은 사해 북쪽끝에서 동쪽으로 20킬로미터 지점에 서있는 느보산의 남서쪽 바로 밑에 위치되어 모압평지를 바라다보는 좋은 장소였습니다(신34:1). 모압평지는 사해의 북동쪽으로 요단강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 편에 위치한 땅이었으며(민22:1)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진공하기 직전에 여기서 캠프를 쳤던 것입니다. 여기 비슷한 시기에 비스가산에 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 하나는 발람이요 다른 이는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산에 오른 이유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발람은 모압왕 발락의 초청으로 모압을 방문하였습니다. 발람은 유브라테스 강 북쪽 갈그미스 밑에 위치한 브돌이 고향이었습니다 (비스가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650킬로 떨어짐). 모압 왕 발락이 하나님의 뜻과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을 정도였기에 그는 돈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 돈 때문에 발락의 요구대로 여기저기 장소를 옮겨가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중의 한 곳이 바로 비스가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을 축복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비스가산은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후 오래지 않아 모세가 비스가산에 올랐습니다(신34:1). 모세는 신광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땅에서 죽어야만 하였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산 위에서 가나안 온 땅을 볼 수 있었고 결국 여기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그의 일생을 마감하였던 것입니다(신34:1-7). 모세가 바라본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땅으로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하신 바로 그 땅인 것입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50-51 참조).

여러분 누구의 길을 따르겠습니까? 발람의 길입니까 아니면 모세의 길입니까? 모세의 길을 따라가야합니다.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좁은 길을 걷는 비법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상주시는 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비법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이 자신을 높이고 성공시키려는 것과 정반대의 마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 칭찬과 상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 역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던 것입니다.

삽화: 신예현 (www.lifeisyea.com)

천국백성의 표지 (마7:21-23)

천국 백성으로 인정되는 사람 :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 자

천국백성이 아닌 사람 :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있는 자

 요사이 폭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사건이 신문에 떠들석하게 보도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폭스바겐 회사는 아우디, 벤틀리, 포르쉐, 스즈키등의 자동차 회사를 가진 공룡 자동차 회사로 세계를 군림하고 있습니다. 폭스바겐이 배출가스를 조작한 사실은 최근 미국에서 드러났습니다. 폭스바겐이 미국에 판 디젤차량에는 특수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 장치에 의해 실험실 테스트에선 차량의 배출가스가 실제 운행 시보다 적게 나오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미국의 배출가스 규제 조항은 유럽보다도 2배난 높기 때문에 이런 부정을 저지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스바겐이라는 회사의 차량은 중저가여서 배출가스를 줄여 규제를 통과하려면 자동차의 주행성능과 연비, 출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그 경우 차량의 매력이 감소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최대 20조원의 징벌적 배상금을 요구할 수 있으며 각국 정부도 자체 조사에 착수하였고 우리 나라 역시 최근에 수입한 차량을 기준으로 조사에 착수하였다고 합니다. 실상 폭스바겐은 운전대의 상태에 따라 장치가 작동하도록 꼼수를 쓴 것입니다.  통상 실험실에서는 운전대를 조작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리는 테스트만 하는데 운전대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배출가스를 줄이는 장치가 켜지고 운전대가 움직이면 배출가스가 정상치로 나오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니 실제 운행시에 비해 실험실에서 배출가스가 적게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정부의 규제를 피하고 구매자들을 속여 왔으니 이 회사의 작태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고 법적인 처벌이 주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폭스바겐 회사는 이 사태로 약 84조정도의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회사가 보유한 현금은82조정도로 현재 폭스바겐 회사의 파산도 가능하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분명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하고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정작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우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여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있어 이런 것들이 있어 흡족한즉 우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을 것이며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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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신예현-cars (www.lifeisyea.com)

 

우선순위 II

우선 순위를 바로 잡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첫 걸음입니다 (마태복음 6:33)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한 강연과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화심리학과 관련하여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지도교수가 “자네의 이론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받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가들의 이론을 달달 외워가지고는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독일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가를 유심히 지켜보니 이들은 자신들이 공부한 것을 다양한 크기의 카드에 잘 정리하고 이를 박스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 카드는 맨 위에 키워드를 적고 그 바로 밑에 연관된 개념과 출처, 날짜를 카드의 앞면과 뒷면에는 내용을 요약해 넣었고 그 후 이들은 정리한 카드들을 자신의 이론에 맞게 다시 재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기준에 따라 일관성 있게 자기만의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게 바로 창조적인 편집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여 그들에게서 편집의 가능성을 배운 거죠. 창조라는 게 어느 날 느닷없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새롭게 편집하는 거에요. 지금 갖고 있는 내 생각도 내 기억의 조각들이 편집된 결과예요.” 라고 김정운 교수는 이야기 하였습니다(명사들의 문장강화, 122-126).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두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우선순위를 먼저 세우고 이 세운 우선순위를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재편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뒤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재 편집하여 성막을 만들고, 열두지파의 사람들을 재배열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만들고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선순위를 정해줍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의가 산출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4개가 있습니다. 이 복음서들은 같은 주님의 사건들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 재배열함으로써 각각 독특한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삶을 재편집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산출되기 위해서입니다. 그 방법으로 성경은“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약속까지 주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까요? 제가 인생을 살면서 관찰하여 보니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살고 돈으로 교육시키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돈을 중심으로 만사를 결정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그 대신 삶의 지혜를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없는 모습 그 자체가 교육입니다. 그래서 없는 집에서 독립심이 강한 자녀들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놓으신 것입니다.우리 신자들은 물질의 문제에서 세금을 내고 먼저 하나님을 위해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작정합니다. 그 다음으로 부모님 봉양을 위해 일정금액을 할당합니다. 그러고 나면 자녀들의 교육비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데 이 가운데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매일 기도하니까요!).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끈기와 인내를 어떻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여러분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삶을 통해 자녀들은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둘째, 세워진 삶의 우선순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지혜). 이 세상을 볼 줄 아는 눈은 경험이 없으면 안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써 우리는 전문지식을 쌓고 전문지식을 쌓은 와중에 어떻게 살지를 잘 알게 됩니다. 치과의사가 의술을 배운 다음 가장 유익한 것은 자신의 이를 잘 관리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서가 필요합니다. 짐 콜린스의 “성공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스티브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이나 여덟가지 습관” 과 같은 책을 읽어 두어야 세상을 보는 눈이 생깁니다. 혼자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 모든 지혜를 모아 주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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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http://tbscene.com/

우선 순위 I

우선 순위를 바로 잡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첫 걸음입니다(마태복음 6:33)

 지난 8월 14일 밤 자정을 넘긴 0시 5분에 의정부 교도소를 나온 최태원 SK 회장의 왼 손에는 갈색 가죽의 표지의 성경책이 꼮 쥐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로 4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을 복역중 8.15 특사로 출옥한 뒤 46조원의 투자계획을 밝히는 등 의욕적인 행보를 펼치고 있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대학에서 물리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 경제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마쳤다고 합니다. 영어와 회계로 무장한 최회장의 판단은 상당히 정확한 것 같습니다. 하이닉스를 2011년 인수할 때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적자투성이였던 하이닉스를 인수하여 회생시킨 전력도 있습니다. 지금 하이닉스는 사상최대의 실적행진을 이어가고 있어 에너지를 대표하는 SK 이노베이션과 통신사를 대표하는 SK 텔레콤의 부진한 실적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왼 손에 든 갈색 표지 성경책은 최태원 회장에게 무엇을 줄 것입니까? 성경이 주는 효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알다시피 최태원회장의 일가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성경은 한 이름없는 교계의 인사가 옥고를 치루고 있는 최태원회장에게 주면서 매일 1-2장씩 읽어보라고 권유하였고 시간이 남아돌아가자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최태원회장은 왜 성경을 꼭 쥐고 있었을까요? 저는 최태원 회장이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눈이 떠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재의 나를 보아야할 것이다.

이 경우 최회장은 우선순위를 바꾸는 작업을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바꾼다고 해서 기존에 주어진 삶의 환경이나 자원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선순위를 바꾸면 창조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되며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생과 관련이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져야할 자기 십자가는 대부분 우선순위를 세우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이를 실천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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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http://news.tf.co.kr/

자기 부정의 삶

2015.9.2 | 자기 부정의 삶: 에돔 땅을 우회하여 가는 이스라엘의 고충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죽은 뒤 신 광야 가데스 바네아 근처의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달라고 모세에게 불평을 하며 다투었을 때 모세와 아론은 반역하는 백성들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 후 모세는 에돔 왕에게 에돔 땅을 통과하여 여리고 맞은 편에 있는 요단강 동편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두 번이나 간절히 청원하나 거절당하는 장면이 나온다(민수기 20:14-21). 왜 모세는 이런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어 에돔땅을 지나가기를 청원하였을까? 그것은 지리적인 이유와 하나님의 명령때문이었다.

 첫째,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에돔에 속한 푸논지역을 통과하면 바로(약12킬로) 왕의 대로가 나오고 이 왕의 대로를 타고 북상하면(약130킬로) 목표한 지역인 요단강 동쪽 (헤스본)이 나온다. 그러나 만약 에돔지역을 뚫고 가지 못하면 험준한 산이 가로막아 있어 이 에돔 지역을 돌아가야만 하였다. 그 길은 남쪽으로 내려가 아카바만에서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사막의 길을 타고 목적지에 가야 하므로 무려 300킬로미터 이상의 광야 길을 우회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여자와 어린아이 및 짐승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쉽지 않은 노정인 것이다. 실제로 에돔이 거부하여 이 길을 택하였고 노중에 길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민21:4-6).

 두번째, 하나님의 명령때문이었다.  
모세가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단 한 발자국도 에돔 땅을 주시지 않겠다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육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에돔과 전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이 주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에돔 땅을 우회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하였다(신2:5). 여기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의 길을 택하였다. 40년간의 광야의 학습이 헛되지 않은 순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00킬로미터를 우회하여 에돔땅을 돌아가면서 심적, 육체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하나님과 모세를 대하여 불평하였다. 불평의 소재는 늘 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뒤 보이는 것은 광야 아니냐? 주는 음식은 오직 만나뿐이고 우리는 이 만나에 질렸다. 결국 속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 뱀을 보내어 이들을 물어 많이 죽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였으며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불 뱀 모양의 장대를 만들어 백성들을 고치셨는데 그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에돔 땅을 통과하지 못하고 우회를 한 때문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46-47 참조).

 이스라엘 여정: 가데스 바네아 호르(Jebel Maduar – 22킬로 북동쪽) 약 120킬로 남쪽으로 내려옴 엘랏(에시온 게벨) 다시 북쪽으로 사막의 길을 타고 에돔을 우회함. 원래 사해남쪽 끝 소알부터 에시온 게벨 까지 약 170킬로미터이다.

 여러분 신자의 삶이란 이런 경우를 종종 당합니다. 이 때 빠른 길로 가려고 애를 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런 것이 자기 부정의 삶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만유의 주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만을 생각하셨더라면 왜 고초를 당하셨겠습니까? 그러나 만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짐을 대신 걸머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의 원형입니다. 자기 부정의 삶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삶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Scan 12일러스트: 신예현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

2015.08.12 |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계12:17)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라는 영화는 1933년 김구선생을 만나 3명의 암살특공대를 선발한 뒤 이들이 특정인을 암살하러 경성에 도착하자 이 정보를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한 변절자 염석진(가공의 인물로 이정재가 역을 맡음)으로 시작하여 해방 후인 1949년 특공대중의 한명인 안옥윤(전지연)에 의해 염석진이 암살당하고 마는 것으로 영화를 끝내고 있습니다. 안옥연이 왜 밀정이 됬냐고 물으니 해방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당 서정주의 말을 인용하여 영화에 도입한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가는 이렇게 매국노와 애국자로 분류가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같습니다. 

 이집트로부터 극적인 탈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속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나 실제로는 호렙산을 먼저 들려 약 일년간 머무른 뒤 가나안을 정복하러 갔었습니다.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목마름과 배고품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거친 3개월의 여행끝에 모세는 백성들을 이끌고 호렙산 앞에서 진을 쳤습니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렙산(2,642미터)으로 먼저 이끄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만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출19:17). 그러므로 이들은 호렙산에서 불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같은 율법을 받고 언약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관계없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내사 이집트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시키셨다는 증거는 모세의 지팡이나 기적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는 그가 야훼를 만난 바로 그 호렙산으로 백성을 이끌고 되돌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출3:12).

 그러나 시내 산에 머물던 중 모세가 십계명이 기록된 돌 판을 받으러 산 위로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임재없이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목표인 것은 애굽 당시부터였습니다 (출13:11).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목적 자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출6:6-8).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얻는 것은 중요하였으나 만약 모세가 그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 없이 갔더라면 레위기와 민수기는 결코 작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무 준비없이 즉, 장막도 없이 제사장제도도 없이, 계명들도 없이 갔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들은 경건하지 못하게 가서 세속국가로서 가나안으로 들어갔거나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이는 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준비가 왜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들이 시내산을 떠났을 때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위함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을 모든 다른 국가들과 구별하도록 만든 요소인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 없이 시내산을 떠났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저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되었을 것이어서 진노의 대상들이었을 것이고 세상에서 소망이나 하나님 없이 되었을 것입니다(엡2:3, 12).( Carson, D. A., R. T. France, et al., eds. New Bible Commentary: 21st Century Edition. 4th ed. Leicester, Englan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Print )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모인 장소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실 때를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별세라는 단어를 누가는 엑소더스 즉 출애굽에 썼던 탈출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주님은 이 죄와 마귀와 사망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주님이 다스리는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죄와 사망이 없는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탈출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떨어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인됨을 거부하고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 한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가 미묘한 상황에서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을 모셔야만 합니다.그것은 바로 복음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무엇으로 증거하겠습니까? 바로 산상수훈으로 대변되는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우리가 그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20150727165323577734 이미지 출처: www.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