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오용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항을 성경은 명하시고 다른 모든 사항들은 상식 가운데 위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기 위해 삶을 해석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성경을 읽되 성경이 말씀하시는 뜻과 취지를 넘어 자의적으로 해석하다가 그리스도의 뜻을 잘못 알게 되면 상식만 가지고 사는 일반사람들보다도 못한 삶의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특히, 재물의 획득과 관련된 사고입니다. 성경에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기술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열심히 갈고 닦아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적당한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의 약속을 그리스도 중심이나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창출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소용되는 약속으로 이용할 경우 성경을 오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은 특히 성경에서 레에마를 듣겠다는 사람에게 많이 발생합니다.

 

김미진 씨가 지은 왕의 재정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내게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째, 성경 말씀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흐르거나 가슴이 뭉쿨해지거나 뭔가 깨달음이 오는 것은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둘째, 목사님의 설교 또는 강의를 듣다가 감동, 깨달음, 눈물, 도전, 소망이 충만해짐, 기쁨이 넘침,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레마로 내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누구나 들을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낼 수가 있다.(77)라고 하면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례를 많이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큰 문제가 상식적인 인간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자는 빚지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빚을 지지않고 사는 삶을 실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아들의 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옆집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병원에 가야하는 응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다급한 응급상황인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자는 이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몇 번이고 너는 더 이상 빚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믿음으로 결단하고 나무젓가락으로 부러진 손가락 마디를 고정한 뒤 통증 때문에 우는 아이를 겨우 재우고 밤새도록 고통가운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틑날 믿음으로 아들의 손에 흰 양말을 씌워 학교로 보내자 학교에 가는 도중에 선흘교회 사모님을 만나 병원에 가게 되었고 아들이 손가락이 다 나을 때까지 치료를 받게 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여호와 이레인양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왕의 재정 282-284). 여러분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상식은 이런 경우 빚을 내서라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빚지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식적인 행동을 이상한 음성을 들으므로 하지 못하고 결국 남의 도움을 받아 아들의 심각한 외상을 치료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위험수위에 다다른 믿음의 상태입니다. 

 

정당한 노력과 그에 따른 대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없이 기도하여 음성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거나, 성경을 읽고 무슨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려고 한다든지, 그런 일반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재물을 벌고자 하는 것은 마법적인 신앙과 욕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할수록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능력의 범위를 넘거나 노력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공식을 사용하여 주문을 외우듯이 살면 자신의 노력없이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고 복이 떨어진다는 믿음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요행으로 돈은 벌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삶 가운데 무엇이 그리스도의 뜻인지를 분별해 낼 수가 없어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관련하여 성경은 상식적인 원리이외에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재물 버는 법을 가르쳐 준 구절이 없습니다. 더구나 21세기의 지식기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재물을 버는지는 경영학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것을 도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도처에 재물을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잃는 법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재물을 버는 것에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없는 섬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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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James O’Brien

믿음은 무엇인가?

로마서 4장 16-17을 강해하는 중 존스토트 목사님은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하여지지 않고 (롬4:19) 도리어 강하여졌습니다 (롬4:20). 어떻게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따르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사용함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거나, 우리가 진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으려고 몸을 배배꼬면서 몸부림치거나, 우리의 정신을 바짝 긴장시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휘슬을 부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이치를 따지면서 하는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리를 직면하는 문제들에 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그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눈을 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몸은 죽은 자와 다름없었습니다. 또 사라의 사정 역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 역시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절). 이를 좀 더 낫게 말하면 아브라함은 그와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숙고하였던 것입니다(17). 그리고는 이런 약속들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였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움추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4:21).

제자도는 바로 이 갈림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좁은 믿음의 길을 걸어갔으며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로보암 1세입니다 (열상 11-12장 특히 열상12:26). 그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10지파를 주겠으며 당신의 법도를 지키고 다윗과 같이 신실하면 그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약점이 공격받았을 때 그는 그만 그 약점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북이스라엘 왕국에는 예루살렘이 속하여 있지를 않아 자신의 백성들이 절기때면 남왕국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고 결국 백성들이 배반하여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 금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선전하였습니다. 또한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을 뽑지도 않고 절기도 자기마음대로 정한 8월 15일로 하여 유대의 절기와 비슷하게 함으로써 북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 되었고 20년 뒤 그 가문은 멸망당하였습니다.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미국에 시드니라는 앰프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이 있었습니다. 회사가 200대의 앰프를 주문 받자 그는 이를 전부 생산하였으나 앰프가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직원들이 설계도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분은 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는 예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에  2개의 특정전선을 서로 교차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엔지니어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앰프가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200대 모두 잘 납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엔지니어인 나보다 앰프를 더 알고 계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갈림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신뢰하십시요.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Chagall_56Bible_Abraham_SarMarc Chagall – Abraham and Sara (1956)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라

마태복음 5:43-48

 

복음의 열매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주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사랑하사 인간이 되시고 그 죄를 속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으며 그 죄인들을 의롭다하시려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 행동이 사랑의 실천이자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삶이 잘 나타난 것이 세리 마태와의 조우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의 길을 가시다가 세리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다가가사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태는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당시 세리는 많은 사회적인 차별과 비난은 매우 컸습니다. 이들은 유대법에 의해 회당 출입이 금지되었고 어떤 경우에도 증인의 위치에 서지 못하였고, 부정한 짐승들이나 부정한 것들에 포함되었으며, 강도들과 살인자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가사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시고 타부시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으나 그들의 잘못을 한 번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고 하시면서 유대인 사이에서 존재하였던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에 비난 받는 세리는 하나님의 왕국의 사도로 변화되었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례를 본받아 실천하신 분으로 일본의 나가노 목사님과 가가와 토요히코 목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나가노 라는 일본의 젊은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곳으로 가서 개척할 것인가를 기도하다가 동서남북 100킬로 이내에 단 한 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아 일본의 북부 가나사와 지방으로 갔고 여기서 천막을 치고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5년간 한 명의 교인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 첫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고 설교 후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밥을 먹다 말고 식탁 위에 검붉은 피를 쏟아내었습니다. 폐결액 환자였던 것입니다. 20세기 초엽인 이 당시의 폐결핵은 매우 무서운 전염병으로 이 청년은 다니던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쫓겨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내 진정하고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쓸어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청년에게 음식을 다시 가져다주며 함께 먹었습니다. 청년은 배웠습니다. 신앙은 사랑이라는 것을. 천막 교회에서 나가노 목사와 얼마동안을 지내는 동안 기적처럼 청년의 폐병은 나았고 이 청년은 신학교로 되돌아가 졸업하고는 일본 고베와 도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의 빈민 선교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분이 유명한 가가와 토요히코 목사님이었습니다. 종전 후 한국에 와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을 사죄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빈민구제 활동을 할 때는 심지어 변비가 걸린 환자의 항문을 혀로 녹여내어 변을 보게하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빈민구호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저는 배운 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 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사랑의 시작은 부족한 것이 보일 때입니다. 흠이 보일 때인 것입니다. 가가와 목사님은 사랑이란 남의 실수나 실패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부터 시작하십시요!

FullSizeRender삽화: 신예현 (www.lifeisyea.com)

이동하는 여호와의 언약궤

삼상4장-7장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실로에서 기럇여아림까지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실로에서 아벡으로 이동하는데 그 이유는 에벤에셀에서 블레셋에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담보하기 위해 실로에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중에 놓게 하였던 것이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함께 갔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패를 하였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7개월동안 블레셋의 수중에 들어갔다. 블레셋은 먼저 에벤에셀에서 남서쪽 약 46킬로 떨어진 해변가에 위치한 아스돗의 다곤 신당으로 이 언약궤를 가져갔으나, 다곤신상의 파괴와 독종 재앙의 발생으로 언약궤를 다시 아스돗에서 동쪽으로 약 20킬로 떨어진  가드로 가져갔으나 독종의 재앙은 여기에도 발생하였고 그 궤를 다시 가드에서 북쪽으로 약 9킬로 떨어진  에그론에 보냈지만 에그론에 이르러서는 불레셋 백성들은 더 이상 독종의 재앙을 견디다 못하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도 돌려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이들은 에그론에서 동쪽으로 약7킬로떨어진 이스라엘 영지인 벧세메스로 보내게 된다(삼상6:12-13). 벧세메스 지역은 여호수아가 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할당한 제사장 도시였다(수21:16). 그러나 이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궤를 적절히 다루지를 못하여 벧세메스의 백성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본 순간 70명이 죽임을 당하였기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다시 북동쪽으로 약 15킬로 떨어진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어 여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을 지내게 되었다(삼상7:1-2). 

하나님은 이런 언약궤의 이동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 백성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는데, 그 첫째가 아벡의 전투에서 가르쳐주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 심지어 하나님의 언약궤로도 하나님을 조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둘째, 하나님은 다곤신보다 강하시고 이방 블레셋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셋째, 블레셋의 영토에서 언약궤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영지에 들어오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그 어떤 도우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넷째, 벳세메스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 어떤 행동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0-81 참조).

제자도를 실천시 경계해야 할 점

제자도를 실천시 무엇을 경계하여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5:24-30)

 

1달란트를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가 작아서 불평하다가 숨겨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여 원금도 못건지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하늘 나라의 일에 대한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늘나라의 일은 절대로 재물을 늘리고, 권력을 쟁취하며,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부흥전략은 재 검토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부, 권력, 안락한 생활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무인도에 떨어졌습니다. 비행기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갈 수단이 아주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매우 걱정을 하고는 여기 저기 섬을 둘러보면서 살아갈 궁리를 하는데 크리스찬인 다른 한 사람은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걱정을 하지 않는가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일주일에 100,000불을 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신이 일주일에 십만불을 버는 것과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였더니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기를 자신이 일주일에 십만불을 번다고 강조하면서 그중 십일조를 만불이나 교회에 한다는 것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동료에게 설명하기를 자신이 일주일에 그 많은 돈을 십일조하므로 반드시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가 수색을 하여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교인들을 양산하면 그야말로 주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자도를 실천시 두가지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첫째, 주님을 따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일은 바로 제자도를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패란 없습니다. 여기1달란트를 받은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도의 관점에서 악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밖에 평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있습니다.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빚을 통하여 무리하게 기업을 확장하다가 그만 전 그룹이 붕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본인은 해외에서 오랜 세월을 도피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재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붕괴되기 약 1년 전에 한 그 분의 안 사람되시는 분이 TV에 나와서 한 이야기는 참 시사하는 면이 많습니다. 자기를 본 어느 점쟁이가 자신와 같은 관상은 처음본다고 굉장한 재물을 가지고 있는 상이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이분은 남편과 함께 해외를 10년 정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게 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제자도를 실천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주님께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전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이를 주시고 원하지 않으시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도의 핵심은 이런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의 근본적인 이유 역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동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간, 돈, 명예, 권력, 건강, 재능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달란트로 묘사된 것들은 이런 재료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둘째,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제자도를 실패하게 만듭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께 명을 받아 왕 사울에게 아말렉을 가서 진멸하라고 전달합니다. 사울은 순종하였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두려워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품질이 좋은 우양을 끌고 와서 소유로 삼았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수지 맞는 일이 어디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불순종한 것입니다. 엄청난 손실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다윗을 찾아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일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을 모아도, 명예와 권력을 잡아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천이 안된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남긴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도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가 사는 일상의  삶에서 천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달란트를 남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II 제자도를 통하여 어떻게 달란트를 남길 수 있을까요?

제자도라는 하나님의 일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곳에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도는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시고 업적을 재는 잣대이시며 우리 삶의 지표이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우리가 마디마디 힘을 얻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는 열매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의 열매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는 의의 열매인 것입니다.  

 여기 두 종은 즉시로 가서 장사하여 각각 100%의 이익을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을 위하여 일하여 달란트를 남기는 방식은 물론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익을 내는 것과는 질적인 면에서 분명 다릅니다.이는 단순히 천국과 세상의 사업과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정부에서 연말에 국민이 낸 혈세를 너무 아까워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보고를 한다면 국민으로부터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정부의 일과 기업의 일은 본질적으로 틀린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성과 측정은 돈으로 측정되는 것이며, 정부에 대한 기준은 바로 국민의 이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같습니다. 그 이익은 결코 물질로 권력으로 명예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계산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이익이 측정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로 이 기준이 세상의 잣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는 많은 이익이 남겨졌다고 잘 한 일이라고 이야기 되어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있고, 세상에서는 파산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고 이야기 하여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는 그 만한 이익이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우 이른바 다섯달란트를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머리와 능력과 기회를 하나님을 섬기는 곳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과부가 생겼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아가 생겼습니까? 유럽 전역이 전쟁으로 뒤덮여지지 않았습니까? 그 자신이야 프랑스의 영광을 빛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상의 기준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그 뛰어난 머리로 상대성 이론을 창출하므로 세계의 과학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사생활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아내에게 아주 인정머리없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1986년경 발견된 그의 편지는 1919년에 보낸 편지로 남편과 함께 외출하는 것도 남편과 집에 함께 앉는 것도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선언하고는 남편이 말하면 즉각 대답하고, 남편이 방에서 나가라면 군말없이 즉각 나갈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아내의 확답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를 받은 아내는 자녀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가서 다시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하며 아인슈타인은 그 해 사촌과 재혼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아이를 키울 수가 없어 고아원에 맡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잣대로 보면 하나님을 위하여 달란트를 남겼다고 자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을 믿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암 말기에 이르시자 누구보다도 열심히 간호하고 여러 병원을 찾은 결과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났고 성공적인 수술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정성어린 노력의 결과 아버지는 쾌유하게 되고 암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자 이 아버지는 딸을 무시하고 딸이 어려움에 빠졌어도 별로 돌아보지 않는 등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딸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 아버지는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비록 부모였지만 배신감을 많이 느낀 이 딸은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과 세상의 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이 자매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먼저 떠 올려야 할 것입니다. 부모 공경의 계명도 좋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도 좋습니다. 자기 마음과 틀리지만 주님의 이 가르침을 실행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열매를 맺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자매에게는 이런 일의 수행이 어려울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께 기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그리스도의 열매인 것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맺는 성령님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실행에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습니다. 자기가 당한 불공정한 처우는 하나님께서 충분히 갚아 주실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도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현되는 삶이 바로 달란트를 맺는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안전하게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종이 책망과 함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때 경계하여야 할 요소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7 Rembrandt Der faule Diener vor seinem Herrn; Federzeichnung; 17,3 x 21,8 cm; um 1652; Paris Museé du Louvre    Religiöse Bilder und Kunstgestaltung im Unterricht Religiöse Bilder und Kunstgestaltung im Unterricht http://www.uni-leipzig.de/~rp/ Prof. Dr. H. Hanisch und Dr. M. Sander-Gaiser am Institut für Religionspädagogik / Universität Leipzig. t

Rembrandt – The Parable of the Talents (1652)

제자도를 위해 주신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그는 각각 그 능력을 따라, 하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측면에서 볼 때 다섯탈란트를 받은 사람으로 정치가로서는 징기스칸, 시이저, 나폴레옹등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고, 기업가로서는 록펠로나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 학자로서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등등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전에 SKT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그 사장이 신문에 인터뷰하기를 “나는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다. 다섯 탈란트라면 빌게이츠와 같이 세상을 바꾸고 주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나는 이 사람들에 의하여 창출된 것을 따라가는 정도의 사람이다”라고 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의 경우 다섯탈란트라면 어느 정도의 일을 하여야 그렇다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신학적으로는 마틴 루터나, 칼빈 정도는 되어야 하고, 목회적으로는 존 웨슬레나, 조지 화이트필드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조지 화이트필드는 한 번 즉석 설교에 수천명이나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며, 존 웨슬레는 감리교를 시작하신 분으로 그럴만 하다고 생각되고 루터나 칼빈은 그 영향력이 말할 것도 없이 다섯탈란트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영향력을 평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달란트를 재면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은 외적인 것이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그 목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영광을 많이 드러냈는가?” 의 측면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평생 소아마비를 앓게 된 휴유증으로 한 쪽 다리를 절면서 살고, 맡겨진 일이라고는 가정을 돌보고 자기가 운영하는 소규모 사업체를 돌보는 정도라고 하여도 이 분에게 주신 탈란트는 다섯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 분은 다섯 탈란트를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뜻을 중심으로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욥입니다. 욥이야 말로 다섯탈란트를 받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욥은 매우 정직하게 살았으나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하나님과 사탄과의 내기로 인하여 전재산이 없어졌고,, 10명의 아들 딸들은 전부 하루 아침에 집이 무너져 죽었고, 갑자기 전신에 악창이 났습니다. 아내 역시 욥을 버렸습니다. 이에 집에서 쫒겨났고 재에 앉아 몸을 긁을 수 밖에 없는 철저히 패망한 사람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런 자세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패배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과 대화를 나누시고  곤경을 돌이키게 하셨고 나중에는 갑절이나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할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흔한 부자 중의 하나로 생각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순교자의 삶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서 숨죽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핍박자들에게 잡혔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리스도의 길을 충성스럽게 견디어 갔던 것입니다. 전도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세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알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천사들의 세계에서는 주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 제가 CBS의 새롭게 하소서의 간증 프로그램에서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신이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여러 병원에 가도 안되고 절망하던 중에 전도관 박태선 장로가 기적을 행한다고 하여 거기에 참석하고 여러 사람이 병을 고친 것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영 비 성경적이라 이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다리를 낫게 하여준다고 해도 싫다라고 생각하고는 거기서 나와 버렸다고 합니다. 사회자는 “허 대단한 영분별력이십니다”라고 감탄을 한 것이 생각납니다.그 후 이 자매님은 평생 다리를 절면서 살았습니다. 다리 대신 그리스도를 선택한 분이죠! 그리스도의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달란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실패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달란트를 맡은 종들 중 하나였다면 주인은 예수님을 부르셔서 야단을 치셨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네게 기적을 행할 달란트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묻어두고 너 자신이 죽도록 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오래 살았어야지?”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조롱과 천대를 받으실 때도 무한히 참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류의 대속과 새로운 생명인 부활을 소망하시면서 십자가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 아담의 후손들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길을 거쳐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정의 길을 가지 않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이런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의 백성을 낳고 기르는일, 즉, 제자도가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먼저 제자가 되고 다음으로 제자를 만드는 것 이것이 주님의 일이며 그 나머지는(부자, 돈, 지위, 지식등) 이를 위한 재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던 어떤 일을 성취하였던간에 제자도를 이루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시작도 안된 것이며 따라서 달란트를 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 나오미

룻기는 사사시대에 살았던 나오미와 룻이라는 평범한 백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 기근이라는 어려움은 나오미로 하여금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다가 10년 만에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떡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의 주 산업은 농업으로 이 농업은 적시에 내리는 적당한 양의 비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거나 시기에 맞게 내리지 않는다면 농작물은 수확할 수 없고 기근이 발생하게 되어있었다. 한편 나오미의 가족이 10년간 거주한 모압지역은 사해건너편에 위치하며 유다산지보다 높이 솟아오른 고원이어서 그 지역을 지나가는 공기로부터 보다 많은 습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가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을 때 베들레헴이 주지못하였던 밀밭과 정기적인 물의 공급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기근없는 삶에 대한 만족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그 지역에서 남편과 결혼한 두 아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당하였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자부 룻과 함께 보리 추수기에 접하여 돌아왔다. 그녀는 문안하는 동족들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부를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런 불행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나오미는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룻1:20-21).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나오미에게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룻과 보아스 그리고 다른 이웃들을 통하여 온유하면서도 강력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보여주셨다

이런 은혜로우신 행동들을 통하여 나오미의 비통한 심정이 위로받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큰 회복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 당시의 모세 율법, 관습, 지역들 그리고 이 백성들의 배경을 서로 엮으셔서 인류역사상 가장 심오한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룻과 보아스를 통하여 다윗왕이 나왔고 이후 천년이 지나 더 큰 다윗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드디어 베들레헴은 단순한 떡집과 목자들의 고향이 아니라 생명의 떡과 선한 목자의 고향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러 오실 그 메시야께서는 상한심령을 가진 할머니, 이방여인, 그리고 친절한 농부를 통하여 오신 것이다. 선하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비, 땅, 굶주림, 사망, 비통한 마음, 사랑 그리고 아기를 서로 묶으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나가신 것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74-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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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chagall – ruth and boaz (1960)

부자청년과 그리스도

오늘 본문은 한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한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십계명 중 두 번째 돌판에 적힌 계명들과 이 계명들을 요약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행하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영생이란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계십니까? 이에 따라 여러가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영생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생명 나무 과실이나 이른바 진시황이 찾고자 한 불로초만 있으면 됩니다. 굳이 하나님이 필요없고 주님의 죽으심도 필요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생명나무과실이나 불로초조차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부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자신들이 살았을 때 저지른 죄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만 차이가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다면 아무도 생명 나무 과실이나 불로초를 찾아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모두 다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면 부자청년이 묻고 주님이 대답한 것처럼 선한 일을 하여 심판받을 여지를 만들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율법 하에 있습니다. 율법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에 규정된 온갖일을 항상 하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은 전형적인 모습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 매달리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율법의 저주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율법의 잣대를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을 통해서는 죄에 대한 지식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이 영생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보물을 찾듯 혹은 영생으로 가는 마법적인 문구나 논리나 예언의 성취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거기서 영생의 방법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헛되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전형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젖혀놓고 성경이 규정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정죄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법 아래 살지 않으면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의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영생입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말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나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신 자마다 영생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사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이를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소유한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인 삼는 대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계명을 굳게 지키며, 지금도 그렇지만 부활하여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이것이야말로 영생의 삶의 중핵입니다.

Hoffman-ChristAndTheRichYoungRulerHeinrich Hofmann – Christ and the Young Rich Ruler (1889)

수요일터예배

수요일터예배 – 중생의 과정과 모습 (마태복음 5ㅣ17-20)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건들로 변화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기서 발견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쓰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당신 사이에 놓여있는 율법의 정죄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외치는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질서는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느니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예전에 바티칸에서 성서를 간행하였는데 “Do not commit adultery 간음하지 말라” 라고 써야 할 것을 그만 “not”를 빼먹고 인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연히 급히 전량을 회수하여 소각하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면 율법의 명령이 바뀌므로 간행하였던 성경 전부를 회수하여 소각한 것과 같이 창조된 천지를 바꾸시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의 삯을 다 청산하셔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모든 자에게 보여주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역시 의롭다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지고 죽으셨다는 소식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을 바꾼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자신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물론 후에 우리가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만, 그러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중생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두시고, 우리의 생각 속에 당신의 법들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정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빌트인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 뜻을 이루고자 오늘 우리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건들로 변화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기서 발견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쓰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IMG_8873 일러스트: 신예현 – 아침 Q.T.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