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룻

나오미와 룻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와 구원의 계획

룻기는 사사시대에 살았던 나오미와 룻이라는 평범한 백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 기근이라는 어려움은 나오미로 하여금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다가 10년 만에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떡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의 주 산업은 농업으로 이 농업은 적시에 내리는 적당한 양의 비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거나 시기에 맞게 내리지 않는다면 농작물은 수확할 수 없고 기근이 발생하게 되어있었다. 한편 나오미의 가족이 10년간 거주한 모압지역은 사해건너편에 위치하며 유다산지보다 높이 솟아오른 고원이어서 그 지역을 지나가는 공기로부터 보다 많은 습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가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을 때 베들레헴이 주지못하였던 밀밭과 정기적인 물의 공급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기근없는 삶에 대한 만족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그 지역에서 남편과 결혼한 두 아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당하였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자부 룻과 함께 보리 추수기에 접하여 돌아왔다. 그녀는 문안하는 동족들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부를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런 불행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나오미는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룻1:20-21).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나오미에게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룻과 보아스 그리고 다른 이웃들을 통하여 온유하면서도 강력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보여주셨다. 이런 은혜로우신 행동들을 통하여 나오미의 비통한 심정이 위로받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큰 회복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 당시의 모세 율법, 관습, 지역들 그리고 이 백성들의 배경을 서로 엮으셔서 인류역사상 가장 심오한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룻과 보아스를 통하여 다윗왕이 나왔고 이후 천년이 지나 더 큰 다윗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셨다.드디어 베들레헴은 단순한 떡집과 목자들의 고향이 아니라 생명의 떡과 선한 목자의 고향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러 오실 그 메시야께서는 상한심령을 가진 할머니, 이방여인, 그리고 친절한 농부를 통하여 오신 것이다. 선하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비, 땅, 굶주림, 사망, 비통한 마음, 사랑 그리고 아기를 서로 묶으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나가신 것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74-75 참조).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운 여로보암

유다 지파를 제외한 10지파의 지지를 받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세겜에 도읍을 세우고 국가체제를 정비한 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공포하고 자기 마음대로 날과 절기들 그리고 보통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정하였다(열상12:25-33).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히야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시어 만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여 다윗 같이 그의 율례와 명령을 지킨다면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그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었다(열상11:38). 그러나 여로보암이 열지파의 지지를 받아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따라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워 이스라엘 하나님과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여로보암의 국가는 인종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국가여서 종교적인 구심점이 필요하였다. 가나안 족속들은 바알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각각 섬겼으므로 여로보암은 혼합종교를 창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알같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우고 이를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고는 유다의 장막절과 비슷하게 팔월 십오일로 절기가 되게 하였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은 가나안 백성들이 동물을 자기들 신의 임재의 상징으로 한 것을 본받아 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여로보암은 자신의 영토 북쪽 끝 도시인 단과 남쪽으로 유다와 가까운 지역인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국가의 영역을 확고하게 지키고 국가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이들 도시들은 혼합적 우상숭배의 대명사로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본보기로서 일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열하10:29; 예레48:13; 호10:15). 결국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북이스라엘 국가를 참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북이스라엘로 하여금 멸망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106-107참조).

 

여로보암은 무엇 때문에 살았을까요? 그는 뜻하지 않게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자신이 왕이 된 목적을 망각하고 자신의 왕으로서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그것은 이세상만 바라보았을 때이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행동이고, 아히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항상 갈래길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가 무슨 근거로 어떤 길을 선택하시는지 하나님은 주의깊게 지켜보십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바로 그 의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목적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공중의 새가 하늘이 없으면 날 수없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존재 의의가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

 (마 16: 5-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위한 오병이어 기적과 이방인들을 위한 칠병이어의 기적이 이루어진 다음에 발생된 사건입니다. 이전에 오병이어를 통하여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남자만 사천명을 먹이신 뒤 무리를 흩어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은 땅에 속한 기적이라고 평가절하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떡을 가져 가기를 잊은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자 잘못 이해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당신에 믿음이 작다는 것입니다. 떡에 관해서는 이미 무리 수만명을 두 번이나 몇 개 되지 않는 떡과 생선으로 먹일 수 있었다면 하물며 12명의 제자들을 먹일 수가 없겠는가? 라는 논리를 가지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하며 이치를 따지는 신뢰입니다사람이 이 부분에 들어가서 이성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작을 수 밖에 없고 매일 매일이 불안의 연속이며 세상에 휘들려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하늘에서 들으면서도, 가나안 족속들의 신장이 거대함과 견고한 성벽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실족하여 60만명이 광야에서 죽은 이유는 듣는 자들이 생각하며 이치를 따지는 신뢰의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두려울 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따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반석 위에 염소새끼를 잡은 고기와 무교병을 놓으니 사자가 지팡이로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비로서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하신 말씀을 듣고 비로서 안심하고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마노아와 그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삼손을 낳을 것을 지시받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염소새끼와 소제물을 바위 위에 놓으매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갔습니다. 이를 보고 마노아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 그 아내는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으셨고, 이 모든 일과 이 모든 말씀을 이르셨으니 죽이실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믿음은 생각하며 이치를 따져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면, 하물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내가 봉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선물을 주시기 위한 전조인 것입니다.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어려움을 지나갈 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받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105991139972846삽화:(http://cfile229.uf.daum.net/image/27340D3955B6AF0B0B2A03)

 

믿음은 이치를 따지는 신뢰

로마서 8장 28절 -34절

믿음은 이치를 따지는 신뢰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34절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선언하시고는 다음 절에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일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짐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도는 담대함이 생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고는 그 근거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하고 확신에 차서 되묻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 막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라고 묻고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니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 막는 죄의 문제는 전혀 없다는 점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근거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이 나오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고 도리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완벽한 승리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성도들을 돌보시는 좋은 예가 열왕기 하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여인이 일어나 엘리사의 말을 따라 가족과 함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내려가서 칠 년을 우거하였습니다. 여인의 마음에는 별 생각이 다 지나갔을 것입니다. 칠 년이면 얼마나 오랜 동안이겠습니까? 그 여인의 집과 전토는 남에게 귀속되었을 것이고, 어떻게 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칠 년이 다하매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고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에게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 일을 설명하라고 하자,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 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게하시가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그 여인에게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매,여인이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왕이 그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고는“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 주라”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돌보시는 방법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이치를 따지는 신뢰이다.

성경말씀: 롬 4:17-22

어떤 기자가 유람선을 타고 남양군도를 지나다가 배가 파선을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 가운데도 나무조각을 붙잡고 여기저기 떠다니다가  천만다행으로 어느 무인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햇빛과 비를 피하고 안락하게 자기 위해서는 먼저 집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나뭇가지와 풀등을 가지고 며칠을 수고하여 원시적이나마 집을 지었습니다. 이후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살아갔는데 날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돌을 집어다가 서로 부딪혀서 불을 일으켰더니 그만 자리에 깔아놓은 나뭇잎에 옮겨 붙어 온 집을 불태웠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이 사람은하나님 너무나도 무심합니다. 얼마나 수고하여 만든 집인데요 하면서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멀리서 뚜-우하는 기선의 소리가 들여 왔습니다.구조를 받고 알고보니 이 지역은 무인도라 연기가 날리 없는데 연기가 나서 혹시나 하고 와 보았다고 하였습니다(이민우, 그냥 사랑하거라). 만약 집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평생 무인도에서 살았어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이치를 따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나 99세가 되었고 사라는 9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줄 것이라는 말씀을 듣었습니다. 그는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롬4:17-22)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치를 따졌던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나와 사라는 죽은 것 같아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능히 이 죽은 몸들로부터도 아이를 생산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대로 내년에 아이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는 믿음으로 늙은 사라와 함께 아이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현실을 직시하여 그 상황을 먼저 파악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에 굳건히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롬4:22).

수요예배

전도서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어느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공부를 더 하려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민되는 것은 유학을 갔다가 오면 한국에서 교수로서 가르치거나 연구원에 종사할 자리가 없을 것 같아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미리 자리를 준비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 자신을 붙들어 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자매가 유학을 갔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유학을 갔다 와서 과연 주님께서 자리를 준비하셨는지는 더더구나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여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고, 심지어는 점집에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은 불확실한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만이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확실성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불확실성을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고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불확실하나 하나님의 손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공자도 하늘과 천명을 믿고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송나라 대부인 환퇴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시점에도 태연하셨는데 제자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물으니 “하늘이 내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어찌하겠는가?” 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염려를 전부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아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로 살되 지혜를 다하여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받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중생과 계명

오늘은 중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의미로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나옵니다. 주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공적인 의미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정화 시키고 많은 표적들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오시리라고 예언된 그 메시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 않으셨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니고데모라 하는 산헤드린 멤버 중 하나가 비밀리에 주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 니고데모는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구성분자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영생을 가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을 가지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해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율법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 매년 드리는 황소와 양들의 피로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히10:3-4).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가르키는 것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희생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일을 행하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의 방법이 구약이 아니라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이 바뀔려면 자신이 죄인 것에 대한 회개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성령님께서 새겨주십니다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10:16-18). 그것은 마치 법들을 서판에 새겨 공포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치관 내지 생각들은 육신의 일들이 아니라 영의 일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전에는 알지 못하고 오직 먹고 마시고 본능대로 살고, 사람들 사이에 명예와 권력을 다투는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되자 우리 죄 값을 치룬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 특색은 영원한 소망을 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죽여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 중생이자 거듭남의 뜻이고 그렇게 거듭난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굳은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속죄는 이렇게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8-15).고 하심으로 중생의 문제 다음에 바로 예수님의 속죄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사랑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사랑없는 믿음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 사실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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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불확실성과 우리의 믿음의 삶

사무엘상 16:1, 8

사무엘 상 16장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을 치고 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소와 양과 나귀를 진멸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을 위하여 계속 슬퍼하니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르셔서,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다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군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는 양 라마에서 베들레헴으로 약 15킬로미터를 가서 베들레헴의 장로들을 만나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청하였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은 인상이 깊었으나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어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이렇게 초대한 7명을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초대받지 아니한 말째 아들인 어린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성취하시는데 어떻게 언제를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능력과 선하심을 굳게 붙잡도록 하십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사무엘이 어렸을 때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다윗입니다. 우리는 이 어린 다윗이 언제 어떻게 이스라엘 왕이 될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지고 계속 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지만 큰 일이 당장 일어난 것은 아니고 다윗은 계속 양을 쳤습니다. 그러나 때가 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남서쪽으로 25킬로 떨어진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어떤 누구도 당하지 못하였던 골리앗 장수를 물매돌로 이긴 다윗은 사울의 총애를 받아 부마도 되고 군대장관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으면 이제 곧 다윗이 왕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를 뒤엎고 다윗은  사울의 적이 되어 먼저 죽인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도망을 가고, 이어 다시 유대로 들어와 부모님은 모압 왕에게 부탁을 하고 자신은 유대 광야에서 약 10년을 도망다니면서 살게 됩니다. 그것은 사울이 계속 다윗을 수색하고 군대를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두 번 시험합니다. 만약 사울만 없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부하들의 기대를 뒤로 한 채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두 번을 만나 사울을 살려주고 회개하는 사울의 말을 믿지 않고 다시 도망을 다니다가 최후로 불레셋의 진영으로 도망을 갑니다. 거기서 약 1년 3개월을 지내면서 여러가지 위험을 무릎쓰고 유다를 위하여 전쟁을 합니다. 만약 블레셋 군주가 알았다면 다윗은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굳게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사울이 블레셋에게 패하여 길보아 산에 죽으니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되고 이어 수년이 지나자 나머지 지파도 복속되어 드디어 다윗은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 이야기사 사무엘 상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 이루시는 방법과 때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시기와 상황을 분별하는 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불확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가져다 주며, 삶을 신중하게 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며, 우리의 믿음의 순도를 재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성공하고 모든 것이 잘 이루어져야 자아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우리와 깊은 신뢰와 사랑의 하모니를 이루고자 하시며, 우리의 성품을 다듬어 가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불확실성을 만날 때 그때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주실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아시고 그 중심을 굳게 하나님에게 두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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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http://god.garrettcampagna.com/

 

길보아 산에서 왕 사울이 죽다

(삼상31:8-10)

다윗이 블레셋 다섯 방백 중 하나인 가드로 망명하자 더 이상 왕 사울이 쫒기를 그쳤으나 이제는 블레셋과의 마지막이자 아주 중요한 전투를 맞이하게 되었다. 블레셋은 모여서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아벡으로 군사력을 집결하여 수넴(길보아산 북서쪽 15킬로미터)에 진쳤고 사울은 길보아산(갈리리바다 남서쪽45킬로에 위치)에 진 쳤다(삼상28:4). 결국 이들은 이스르엘 평원에서 접전을 하여 사울은 패배하고 길보아산으로 퇴각하다가 이 산에서 아들 셋이 죽고 본인은 자살하고 만다(삼상31:1-6). 사울이 패배한 이스르엘 계곡은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는 가나안인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진을 쳤다가 훈련받지도 못하였고 무장도 불충분한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한 곳이었다(삿4). 또한, 기드온은 길보아산 기슭에 있는 하롯샘에,  상대방  미디안은 북편의 모레산 앞 이스르엘 계곡(길보아산에서 약10킬로) 에 진을 쳤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불과 300명의 군사로 수 많은 미디안 군대를 이겼던 곳이다. 이스르엘 계곡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물론 국가 안보의 면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비옥하고 충분한 습기로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평야였고, 넓은 평원내에 높낮이가 심하지를 않아 여행하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하였기에 고대 상인들이 동서 남북에서 와 집결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제간선도로가 이지역을 통과하였고  이 계곡을 지배하는 자가 이 주변의 국가들의 경제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과 무역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국방의 문제였다. 만약 이 지역을 상실한다면 사울 왕국의 북쪽 삼분의 일은 차단될 것이고 블레셋은 계속하여 이 계곡을 타고 남진하여 사울 왕의 다른 지역도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사울왕은 엔돌의 무당에게 묻는 등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한 불신앙과 반역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결국 그는 죽고 그 시체는 길보아 산에서 동쪽으로 약 10킬로 떨어진 벧산이라는 이스라엘 경내 블레셋 점령지 성벽에 못박혔던 것이다(삼상31:8-10). 이런 것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동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끌 능력있는 왕을 원했지만, 여호와께서는 당신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를 원하였다. 사울은 이 두 요구에 적합하지 못하였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8-89 참조).

tumblr_lrk8v8GykH1qcg3zwo1_r1_1280Pieter Bruegel the Elder, The Suicide of Saul, 1562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한계 내에서 만족

(빌립보서 4:11-14)

여러분 무엇을 위해 일하십니까? 돈을 위해 일하면 돈이 왔을 때 그만 삶의 목적도 잃어버리고 돈을 우선시하게 되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경기도에서 일용노동자로 일하다가 40억원 로또에 당첨된 경남 양산의 B씨(60)는 세금을 제외하고 27억 3천만원을 수령하였습니다.  B씨는 이미 이혼을 한 상태이고 1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로또를 수령한 지 며칠 지나 여동생등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모여 어머니 A씨(79)를 비씨가 모시라고 성화였지만 이미 혼자된 몸으로 남자 혼자 어머니를 모시기 어려우니 양로원으로 모시자고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이들 간에 표면적으로는 노모 봉양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변에서는 B씨가 이혼한 뒤 A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돌봐주었는데도 아들이 당첨금을 제대로 나눠주지 않은 게 갈등의 원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봉양과 로또 등이 얽혀 심한 갈등을 빚자 B씨는 형제들ㅇ게 행방을 알리지 않은채 양산시 물금읍에 있는 아파크 두 채를 사서 이사를 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A할머니는 딸 사위 5명과 함께 수소문 끝에 지난 5일 오전 10시 40분쯤 B씨의 아파트를 찾아내 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 당하였습니다. 화가 난 할머니와 사위는 열쇠수리공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시도했으나 B씨 측이 112로 신고를 하여 경찰이 출동하였습니다.아들의 집안에 발조차 들여놓지 못한 A 할머니는 결국 5일 양산시청을 찾아가 공개적으로 아들을 패륜아라고 비난하는 피켓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할머니와 두 딸, 사위등은 지난 7일(2016년 8월 7일) 오후 2시쯤에도 아들 아파트를 다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들 측은 이번에도 소란을 피운다며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출동하여 할머니 등을 설득하여 겨우 해산시켰습니다. 이웃들은 이에 대해서 “결국은 당첨금 배분 문제 때문에 생긴 갈등 아니겠느냐” 추정했습니다. 또 다른 이웃은 “큰 돈이 생기지 않았으면 이런 극한적 갈등은 없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대조적으로 사신 분이 있습니다. 제임스 레이니 전 에모리 대학교 총장이었고 1990년대 주한 미국 대사를 역임한 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분은 1977년 총장으로 부임하여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중 벤치에 쓸쓸히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고 함께 집에 가서 커피도 끓여 마시고 잔디로 깎아 주는 등 친구로 2년 동안 지냈습니다. 어느날 출근 길에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자 노인의 집을 방문하니 노인이 전 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하자 유족은 유서 한통을 주었으며 그 유서를 받고 레이니 총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노인은 코카콜라 회사의 회장인 우드러프씨였는데 자기에게 1.5억 달라를 유산으로 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살다가 갔다는 사실, 전혀 회장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은 사실, 자그마한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도 자신에게 거액을 희사한 사실에 또한 놀랐습니다. 그는 이 돈을 전부 에모리 대학의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1990년 총장을 마치자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하여 한국과 미국의 관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낮고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높은 지위나 형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최상의 것을 주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숙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생축과 같이 십자가에서 버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우리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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