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묵상

누가복음 12: 22-34

공자는 전 중국을 주유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여 통치에 도움을 줄 나라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초기에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던 공자 일행이 광 땅을 지날 때였습니다. 당시 광 땅 사람들은 양호에게 피해를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양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공자를 보자 양호로 착각해 공자와 그 제자들을 포위하였습니다. 5일간 발이 묶인 일행은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하늘의 명이 주어졌음을 자부하고 의연하였습니다. 즉 요.순.우.탕에게 드러났던 도가 문왕에게 이어졌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이 도를 없애려 하였다면 어찌 후사자인 나를 두었겠는냐? 내게 하늘의 사명이 있는데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권경자 교수는 해설하기를 “이러한 확신과 자부심이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놓고 인류의 길을 만든 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권경자, 논어, 266-7).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은 지진의 영향으로 건물이 흔들리자 두려움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몹씨 부끄러워 하였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지 수십년 어찌 이런 지진에 동요할 수 있겠는가 라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받아들이기 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물을 조성하시며,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도록 명령하셨으며,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권능을 주셔서 이집트로 보내셨고, 거기서 9가지 이적을 행하하도록 하셨으며, 마침내 애굽의 장자를 죽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홍해를 가르시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이 백만 명에게 말씀하시며, 율법을 주신 바로 그분이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유대와 갈릴리 땅을 두루돌아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시다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주님이시자 머리이시며, 교회를 위하여 만물의 주님으로 등극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섬김과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주고 배려해 주며 남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에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유교와 모든 종교의 이상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는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회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이렇게 주님 나라를 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근거이며, 이런 삶의 자세 위에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위안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많은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필요한 양식과 집 그리고 돌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특권을 마음에 새기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주님의 권고를 삶에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을 위해 은행에 돈만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 역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에베소서 1:15 – 19

논어 옹야편에 보면 병에 걸린 백우에 관하여 적고 있습니다. 백우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백우가 병을 앓았다. 공자가 문병 가서 남쪽 창문을 통해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 아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백우는 덕행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병은 나병이었습니다. 온 몸이 썩어들고, 끊어지는 나병은 천형의 병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자의 마음은 찢어지는듯 했을 것입니다. 그의 투병 소식에 공자가 병문안을 가자 백우는 임금의 방문을 맞이하듯 남쪽 창문 아래 누웠습니다. 공자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우는 자신을 찾았지만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선생님을 위해 창문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죽음을 앞둔 제자의 손을 잡은 공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덕이 있는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를 거듭 읇조리는 공자의 탄식은 알 수 없는 하늘의 뜻에 대한 답답함이 담겨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백우의 병을 운명으로 돌리는 공자의 착잡한 심경이 느껴진다고 권경자 교수는 논어 주석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권경자, 논어, 168-69).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산상 설교를 마치시고 내려올 때 문둥병 걸린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나병 환자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 앞에 나타나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탄원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내장이 끊어질 듯한 긍휼함으로 가득차셔서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만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자 그 나병이 즉시 떠나고 그는 완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병환자를 불러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고”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물론 나병 환자는 주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알림으로 주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시지를 못하고 밖에 계시나 사람들이 주님을 보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공자와의 분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아니 그것은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공자는 나병을 대하여 어쩔줄 모르며 탄식할 뿐이었으나, 주님은 직접 손을 대시면서 고쳐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구약성경에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례는 오직 하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 엘리사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건입니다. 그 능력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전부 청산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사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낮에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사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이를 위해 잠시 9월 16일 광주에서 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연설에 대한 중앙일보의 보도를 들어보겠습니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에 대한 후속 조치와 관련해 “법원에 드러난 문제를 치유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결국 재판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관료제를 타파하기 위한 고법원장 승진제 폐지, 법원장 추천제 등 제도적 개혁안이 있지만, 그것은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투명한 절차를 통해 흔들리지 않고 정의로운 결론을 내는 바람직한 재판을 하는 것 말고는 (국민 신뢰를 얻을) 방법이 없다”며 “좋은 재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고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특강에 참여한 학생이 소신을 지킨 판결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묻자 김 대법원장은 법관으로 처음 임관했을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법관이 될 때 하루만 판사를 하게 해주면 다음 날 사표를 내겠다는 생각이었고, 출근 첫날 한 일이 사표를 쓰는 일이었다”며 “지금도 대법원장실 책상 서랍 왼쪽에는 사표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법관이 된 이유는 저의 소신에 따라 재판을 하라는 것인데 그 외 다른 이유로 좌고우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재판은 그럴 수 없다.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회개하게 하시고 당신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신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쫓아 살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고, 이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4:6-7

작년(2018)에 작고하셨던 미디어 사업 분야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그리스도인인 밥 버포드씨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중심에 위치시킨다는 것이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와  관련되어 만족스러운 물을 내 잔에 부어줌으로써 성공에 대한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이분은 40대 중반에 마이크 가미(Mike Kami)라는 무신론자이지만 유능한 컨설턴트를 만나 자신의 진로를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가미는 질문하기를 “당신의 박스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재물입니까?”하였고, 이에 대하여 밥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직후 밥은 엄청난 수익을 올릴 것처럼 보이는 사업기회를 만났습니다. 밥이 그 사업제안을 덥썩 받아들이는 여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밥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투자를 다룰 사무소장을 만났는데, 그는 중요한 연방 기관의 장이었습니다. 밥은 개인적으로 역시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워싱턴으로 가기 전에 밥의 변호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밥은 그에게 그 기회를 설명하여주었고, 동시에 시간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업가적 은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고자한다는 열정 역시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만약 그가 내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혹입니다.” 나는 그가 성경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물었고,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밥은 어쨌든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끌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밥이 한 첫 번째 일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기드온 성경을 철저히 찾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그 법률가가 이야기한 것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예수로 하여금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기는 하지만 굉장한 무엇인가를 하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자연법칙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입증할만 한 것이라고 믿고 실행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유혹자는 밥에게 말하기를 “시도해라. 이것은 너의 기회이다. 모든 너의 금지와 주의를 던져 버려라. 너는 이런 기회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밥이 바라보고 있는 그 거래는 몇 가지 비즈니스의 중력의 법칙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비록 그것이 작동한다면 엄청난 수익이 돌아오지만, 그 사업은 밥이 전혀 모르는 비즈니스에서 절세를 쫒는 시도였습니다. 밥의 속 사람의 목소리는 “인생은 진실로 그렇게 쉽지 않다. 네가 아는 것들에 붙어 있으라! 네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가지고 사업하거라. “ 다시 한 번 특별히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밥을 인도하여 성경이 우리 모두를 위해 가지고 있는 깊은 진리로 이끌었습니다. 밥은 하나님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가지도록 한다는 사실을 이전 보다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깨어있고 민감하여야만 하지만 말입니다. 그 법률과와의 대화를 통해 밥은 자신의 중심 가치로 돌아갔고 유혹을 받아 방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밥이 워싱턴으로 되돌아 갔을 때, 전화를 걸어 자신 없이 사업이 진행되도록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전반전에서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아쉬운 거래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후반전에서 나는 그것을 승리와 상실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초월적인 경험들 중 하나로서 받아들이고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만약 당신이 손실로 생각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후반전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위해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밥 버포드의 이와 같은 경험은 우리가 변화 무쌍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통찰이라고 판단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특징, 자기 희생과 신뢰

로마서 8:28-29

요새 아베 정부를 비롯한 일본 우익 인사들에 의한 일본의 우경화에 대하여 13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예견하였습니다. ““한국은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일궜습니다. 한국은 이제 민주주의의 튼튼한 뿌리 위에서 세계의 큰 봉우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일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군국주의에 사로잡혀 급격히 우경화되고 주변국과 큰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한국은 튼튼한 민주주의 국가를 국민이 스스로 일궜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국형 민주주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민주주의 자체가 국가발전의 근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백성이 주인이 돼 나라 운명을 결정하는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가치”라면서 “백성이 나라를 통치할 사람을 선출하고 잘못하면 바꾸는 것, 이 민주주의 원칙은 세계 공통”이라고 말하면서, 민주주의는 대가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김 전 대통령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고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튼튼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군부나 독재자도 이제는 민주주의를 안 하면 못 배기고 다신 군사쿠데타를 꿈꾸지 못한다”면서 “우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세 번이나 독재자를 극복했다.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반석에 올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없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최근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되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아 민주주의의 뿌리가 약하기 때문”이라면서 “전후 군국주의에 빠졌던 일본은 갑자기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고 난 뒤 맥아더의 요구에 따라 민주주의를 해야만 하였습니다. 즉 일본은 민주주의 주체세력이 없는 것”이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국민 전체가 희생을 감수하면서 민주화 과정을 겪은 한국과 달리 일본은 별다른 노력없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으니 군국주의 망령이 쉽게 부활했다는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논지입니다.

이런 진단은 폴케네디의 진단과 일치합니다. 폴 케네디는 21세기 아시아 태평양 시대의 중심국가는 일본도 중국도 아니고 한국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이유로 첫째, 사회적 도덕심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고, 둘째, 문화에 혼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고, 셋째,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나라이다 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도덕심은 기독교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은 잡신 국가이고,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제대로 종교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또한 문화에 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류로 표현되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자유민주주의는 오직 한국 뿐인데, 일본은 군국주의이고, 중국은 공산주의를 그 이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3 가지 요소를 가지고 아시아 태평양 시대를 리드할 국가는 오직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종교에 대하여 간디는 7가지 사회 악 중 하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희생은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희생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여 그것을 본받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 4:6-7

작년(2018)에 작고하셨던 미디어 사업 분야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그리스도인인 밥 버포드씨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중심에 위치시킨다는 것이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와  관련되어 만족스러운 물을 내 잔에 부어줌으로써 성공에 대한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이분은 40대 중반에 마이크 가미(Mike Kami)라는 무신론자이지만 유능한 컨설턴트를 만나 자신의 진로를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가미는 질문하기를 “당신의 박스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재물입니까?”하였고, 이에 대하여 밥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직후 밥은 엄청난 수익을 올릴 것처럼 보이는 사업기회를 만났습니다. 밥이 그 사업제안을 덥썩 받아들이는 여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밥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투자를 다룰 사무소장을 만났는데, 그는 중요한 연방 기관의 장이었습니다. 밥은 개인적으로 역시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워싱턴으로 가기 전에 밥의 변호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밥은 그에게 그 기회를 설명하여주었고, 동시에 시간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업가적 은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고자한다는 열정 역시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만약 그가 내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혹입니다.” 나는 그가 성경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물었고,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밥은 어쨌든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끌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밥이 한 첫 번째 일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기드온 성경을 철저히 찾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그 법률가가 이야기한 것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예수로 하여금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기는 하지만 굉장한 무엇인가를 하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자연법칙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입증할만 한 것이라고 믿고 실행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유혹자는 밥에게 말하기를 “시도해라. 이것은 너의 기회이다. 모든 너의 금지와 주의를 던져 버려라. 너는 이런 기회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밥이 바라보고 있는 그 거래는 몇 가지 비즈니스의 중력의 법칙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비록 그것이 작동한다면 엄청난 수익이 돌아오지만, 그 사업은 밥이 전혀 모르는 비즈니스에서 절세를 쫒는 시도였습니다. 밥의 속 사람의 목소리는 “인생은 진실로 그렇게 쉽지 않다. 네가 아는 것들에 붙어 있으라! 네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가지고 사업하거라. “ 다시 한 번 특별히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밥을 인도하여 성경이 우리 모두를 위해 가지고 있는 깊은 진리로 이끌었습니다. 밥은 하나님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가지도록 한다는 사실을 이전 보다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깨어있고 민감하여야만 하지만 말입니다. 그 법률과와의 대화를 통해 밥은 자신의 중심 가치로 돌아갔고 유혹을 받아 방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밥이 워싱턴으로 되돌아 갔을 때, 전화를 걸어 자신 없이 사업이 진행되도록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전반전에서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아쉬운 거래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후반전에서 나는 그것을 승리와 상실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초월적인 경험들 중 하나로서 받아들이고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안합니다. 만약 당신이 손실로 생각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후반전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위해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수요일터예배

잠언 22:4

62년 전 한 살 터울의 남매가 있었습니다. 오빠는 다섯 살이고 여동생은 네 살이었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장에 간 사이에 여동생이 고구마를 먹던 중 고구마가 목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새파랗게 질식되는 아이를 보고 놀란 가정부가 어쩔 줄을 몰라 무작정 시장으로 뛰어갔습니다. 장을 보다가 가정부로부터 청천벽결 같은 소리를 들은 엄마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품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의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이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부는 예정에도 없던 아이를 한 명 더 갖기로 하였고, 이듬해 다시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나 25살이 되던 해 이재철 사장의 아내가 되었고, 1년 후 이재철 사장은 아내를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결국 신학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합니다(매듭짓기, 194). 이재철 목사님을 통해 주님의 교회와 100주년 기념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흐름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때 최고의 자산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잠언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냐?” 하는 문제는 그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경영하여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 전형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죄없이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넘겨져 십자가 형을 받고 죽으실 때도 주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옹호하실 것을 믿으시고, 천사들을 불러 그 검으로 로마군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억울한 희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지만, 주님은 굿굿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만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담당하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당신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음에서 다시 부활시키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당신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마치셨을 때 하나님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을 일으키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삶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루 하루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리 떡 일곱 개의 기적

마태복음 15장 29-39

절은풍은이라는 홍콩영화를 보면 이런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형사 두명이 주가 조작을 통해 일확천금을 하려는 범죄 조직의 활동을 도청하던 중 기가막힌 주가 정보를 입수합니다. 지금 형사 한 명은 얼마전에 병원에서 진찰을 한 결과 간암 판정을 받아 죽기전에 가족들에게 재산을 남겨주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다는 결론을 가졌으며 또 한 명은 형사월급이 뻔하니 한 탕하여 많은 돈을 벌고 인생을 편하게 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투자하였습니다. 그 정보는 진짜여서 이들은 많은 돈을 벌고 이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실을 감찰관실에서 알게 되고 해당 범죄조직도 알게 되어 이 두명은 먼저 경찰이 손을 대기전에 범죄조직에 의하여 타살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 때문에 여기에 말려든 형사반장은 자기 동료 두명을 해치운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 뒤 자신은 경찰에 자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인생에 돈이면 충분할까요? 이 영화에서조차 돈만 가지고는 안되는 병과 죽음의 문제가 나와있고, 빵의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요?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하여 자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충분히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수요일터예배

요한일서 3장 1-3

“매듭짓기”라는 책을 보면 이재철 목사님의 젊은 시절 홍성사를 운영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배우 고은아의 동생으로1949년 생입니다. 그분이 쓴 책 매듭짓기에는 자신의 젊은 날의 소신을 적고 있습니다. 외대 불어과를 졸업한 1971년 봄 수 개월 째 신입사원으로 어느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상사가 불러 첫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것은 세무 공무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는 이중 장부를 사용하면서 엄청난 매출을 누락하였다가 세무조사에 의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건네 준 봉투에는 10만원권 수표가 15장으로 총 15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변두리 국민주택이 60-70만원 할 때니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서 술 자리를 마련하고 봉투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세무 공무원은 자신을 불러 봉투를 주었습니다. 그 봉투에는 어제 주었던 수표 중 3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달자에게 통상 30%를 주는데 이재철 사원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20%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공범을 만들어 입을 막자는 계산이었습니다. 완강하게 거부하자,그러면 받은 돈을 전부 돌려주고 엄청난 세금을 물리겠다고 협박하여 할 수 없이 받고 회사에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회사에 돌려주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자신이 사업을 시작하면 결코 탈세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하였다고 합니다.  홍성사를 1974년 설립하고는 외국항공회사 총 대리점을 하면서 정직하게 세무신고를 하였으며, 여기서 그분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20대에 벤츠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1977년 출판업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출판업은 그 당시 복마전이었습니다. 모든 서점이나 출판사가 세금문제 때문에 자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결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재철 사장은 철저하게 자료를 발생시키자, 많은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한 거래업체 사장이 오더니 거래 자료를 그렇게 100% 발행하면 홍성사의 책을 사갈 서점들이 줄 터인데 그러면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공급한다는 출판사 본래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관행에 맞추어 홍성사도 처신하였으면 한다는 권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재철 사장은 생각하기를 헌법에 기재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더 높은 의무가 아닌가 하고 판단하고 그 거래처 사장의 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분 일어나서 “네가 이 바닥에서 일년 이내에 망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소리치고는 나가버렸습니다. 이후 홍성사는 무역업에서 번 돈으로 최고의 필진을 동원하여 “홍성신서”를 출간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젊은 층에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일년쯤 지났을 때 그 도매상 사장님이 다시와서 거래 자료를 백 프로 받을 터이니 자신에게도 홍성신서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홍성사는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세무당국의 인정과세로 위기를 맞았고 1980년대에 결국 두 번이나 부도를 맞았으며, 이재철 사장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홍성사의 이런 노력은 출판업계를 자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부정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자기부정의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실로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으며,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님의 증거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겉사람이 후패하며, 썪어질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여러 환난과 고난을 당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숨겨져 있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 옛날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간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무려 7년을 노력하였지만 그것을 수일이 지난 것처럼 생각한 것은 외삼촌 라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분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과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하며 즐거이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도록 만드는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29:25

본문말씀: 누가복음 12:4-12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7월 초에 우리나라 주력 상품인 반도체 생산을 위한 소재 중 3가지 품목을 규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8월 2일에는 화이트 리스트 즉, 일본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 편의를 보아주는 국가들 중 한국을 제외시켰습니다. 많은 걱정과 논의가 한국에서 진행 중입니다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분간은 우리 국가의 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시 똘똘 뭉쳐서 나가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이며,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은 일본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을 주도 국가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은 뒤쳐저 2류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맞이하여 두려워 하며 주저앉냐 아니면 긍정적인 자세로 맞서 나가냐 하는 것은 한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도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미국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 댄 잰슨(Dan Jansen)은 두려움 때문에 스케이트 경기에서 여러 번 실패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1988년 캐나다 캘러리에서 있었던 동계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그 동계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누나의 죽음이 있었고 그는 슬픔을 안고 경기에 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 단거리 스피드 스케이트 챔피언이었던 잰슨은 당연히 500미터 혹은 1000미터 경주에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나간 그 두 경기에서 경기도중 넘어지는 통에 메달을 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경기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경험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그 다음 동계 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력한 메달 후보였지만, 그가 나간 단 거리 경기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의 경기에 관하여 댄 잰슨은 “경기 도중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하자면 나는 컨디션은 좋았다.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가 나를 붙들어 전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라고 심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에서 온 두려움 때문에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했는지 그는 드디어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10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존 맥아더, 고난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121-122)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 역시 마치 댄 존슨이 두려움과 투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좌절을 겪을 때 먼저 두려움이 솟아 오르고 그런 두려움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련을 예상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그런 두려움이 마음에 팽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들어올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치를 따지는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12은 이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 하라: 가장 두려운 존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죽음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둘째,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생각하라 : 주님은 가장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참새와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 역시 하나님은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릴 때에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한 마리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당 머리카락은 통상 140,000개라고 추정되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을 전부 세신다는 그 전지하심을 늘 고려하고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치를 따져보는 신앙에 이르지 못하면 그 신자는 제대로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유일한 수단인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기억하라: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우리의 삶 범사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시인하고 기꺼히 그의 멍에를 우리 생각에 두고, 우리의 의지 위에 두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믿어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셔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시고 지혜를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환란 가운데 얻는 지혜와 안전

조선일보 5월 15일자 기사입니다.

“정치 계산따라 脫원전한 벨기에, 만성 전력난”

“”에너지 전환 정책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팩트와 숫자’를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정치적으로 탈(脫)원전을 결정했던 벨기에는 에너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14일 ALC ‘에너지정책과 민주주의 원칙’ 세션에서 연설한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가 각국의 에너지 정책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는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엔 발전 효율이 낮기 때문에 원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션 후 인터뷰에서는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 정부가 벨기에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벨기에처럼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생산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다.…..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대기오염의 주범인 석탄과 천연가스를 무한정 뗄 수 없다면 대안은 원전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에 대해서는 “부디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둔 다음, 탈원전에 착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우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누구의 경험도 배우지 않는다.” 라는 경귀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 민국은 마땅히 벨기에가 20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원전의 정책을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현명한 국가가 될 수 있고, 그 국민은 지혜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이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설정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지키면서 삶을 영위하고, 진로를 개척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거나,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모두 패가하는 형제(잠18:8-9)라고 잠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지혜나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이 양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태로울 때, 환난을 당할 때 아주 안전한 망대가 있습니다. 그 망대는 주님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타개하여 나갈 지혜가 부족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때 당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거나,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주님께 바로 달려가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또 구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그리고 그 가장 어려울 때가 주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대적이 능히 당할 수도 없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 여러분은 먼저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 훌륭하게 약속을 지키신 주님을 증거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루마니아에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59년 1월 재차 체포되어 두 번째 감옥에 갇힌 지 4년이 지난1963년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이때 병이 악화되어 병감에 이송되었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모든 죄수들은 큰 마당에 모였습니다.거기서 한 시간 동안 서서 몇몇 죄수들의 연극을 구경하였습니다. 그 연극은 기독교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으로, 사령관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교들이 손뼉을 치거나 웃을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하였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사령관 알렉산드레스쿠는 거칠고 큰 목소리로 연극에 대해 가부간의 논평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서 종교를 비판하는 표어들을 외워댔으며, 그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 몇 사람은 범브란트 목사님을 껴안고 “이것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분위기는 엄중하였습니다. 사령관은 드디어 목사님의 이름을 불렀고, 목사님은 10여년 전에 열렸던 종교 회의에서 아내가 자신에게 “가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이 수치를 씻어 주세요”라고 하던 말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때도 목사님은 연단에 올라가 체포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목사님의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백의 눈동자들은 모두 목사님에게 집중하여 “저 사람도 공산주의를 찬양할 것인가?”하고 묻는 듯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 중령이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 아내들과 가족들이 교회나 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이 연극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의 눈에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고였습니다. “ 여기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쁘게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이 그분을 나쁘게 말할 무슨 건덕지가 있습니까? 예수님 역시 무산층으로 목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벌써 몇 백 년 전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유층들을 비난하셨는데, 예수님도 돈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회초리로 쫓아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를 원한다면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같이 나누어 쓰는 공동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이 가난한 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성처녀 마리아가 부른 성모가에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부자보다 높이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모든 무산층이 단결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산층 중에서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인데 우리가 서로를 조롱한다면 우리들은 단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이어 목사님은 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재생시키는 데는 기독교가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문을 인용한 다음, 누구든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에 대해 죄를 지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스 중령은 의자에서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이고 구두발로 땅을 차기는 했어도,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죄수들 역시 조용했으며, 감동을 받고 있음을 알아채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도 잊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이 없는 학교나, 만들어 낸 물건을 자세히 검사 하지 않는 공장이 있다는 소리를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리 동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뒤 중령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레스쿠 중령님 당신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가에 대해 언급하고는 말을 마치자,죄수들에게서 갑자기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항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죄로 목사님은 병감이라고 하는 성역에서 쫓겨나, 다시 신부들의 감방으로 옮겨졌을 뿐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습니다.(리챠드 범브란트, 하나님의 지하운동(하), 16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