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31: 6,7 절
“ 독주는 죽을 사람에게나 주어라. 포도주는 상심한 사람에게나 주어라. 그것을 마시면 가난을 잊고 괴로움을 생각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6,7절의 진의는 술로 상징되는 향락이 왕에게 부적절하다는 교훈입니다. ‘죽을 사람’이란 ‘죽음을 방불하는 극한 상황에 이른 자’이며, ‘상심한(=마르) 사람’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말합니다. 극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은 술로 위로를 삼지만, 경건한 자는 그들의 반석이신 주님께 달려갑니다. 한나를 질투한 브닌나가 아들 없는 한나의 약점을 찔러 격동시키자, 한나는 너무나 마음이 ‘쓰라려’(마르)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삼상1:10).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사무엘을 주십니다. 한편, 왕은 정의를 확립하여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요구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모세 율법’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왕의 직무를 상기시켜 ‘모세 율법’을 잊지 말라는 어머니의 통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을 위해 논어를 애독하였는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과 삶을 기록한 성경은 인간 본성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승리의 입성 시, 수 많은 사람의 환호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찬양 소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5일 후 그 백성들은 주님의 원수로 바뀝니다. 형통할 때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을 생각하고 늘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시편37:30,새번역).
잠언31:8,9절
“너는 할 말 못하는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의 송사를 위해 입을 열어라.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세워 주어라.”(공동번역)
본문에서 어머니는, 왕 르무엘이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수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라고 가르칩니다. 재판은 공정해야만 합니다. 가난하다고 두둔하고 세력 있는 자라고 하여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됩니다(레19:15). 그러므로 ‘바른 판결’이란 대목이 중요합니다. 좋은 예가, 솔로몬 왕이 어린 아이에 대한 두 창녀의 상반된 주장을 듣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별하여 바른 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판단과 집행이 쉽지 않습니다. 세력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법의 헛점을 파고 들고, 소송 시에는 많은 돈을 주고 유능한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합법적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역사를 살펴 보면, 권력자들은 힘 있는 계층의 지지를 위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억울한 사정을 알았지만 유대 지도층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에 의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등극하셨습니다. 모든 통치권력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절차를 넘어 구제받지 못한 억울한 일은 더 이상 원수 갚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진노에 맡기시기 바랍니다(롬12:.19).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시편37:9,새번역)
누가복음 5: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 베드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 극적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라는 침례 요한의 거듭된 증언을 듣자 예수께 가서 대화를 갖습니다. 그리고 형 베드로를 찾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그의 인생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흘 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경험하고서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요2:11). 얼마 후 유월절이 이르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수 많은 이적 행하심과 존귀한 공회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등을 목격하였지만, 갈릴리로 내려 왔을 때는 다시 어부라는 생업에 종사하러 갔습니다. 이 즈음 주님은 수 많은 사람과 함께 갈릴리 호수 가에 이르자 시몬의 배에 오르사 군중들을 가르치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밤새 빈손이었던 어부 베드로는 많은 고기를 잡자, 거룩하신 분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깨닫고 두려워 합니다.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심으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눅5:10). 그 사명은 사람의 영혼을 낚아 예수 중심의 인간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이죠! 이 기사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거친 빅터 프랭클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내었습니다. 내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1).
요한복음 1: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예수께 부름 받자,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나섭니다(요1:45).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삶은 수행할 가치가 있는 사명을 발견하였을 때 변화될 수 있다” 하고, 나아가 그는 누구나 그러한 사명이 있고, 그런 임무가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정신분열증 직전의 어느 젊은 여류 화가에게 준 조언입니다. “당신은 삶에서 당신에게 부딪쳐 오고 도전해 오는 어떤 목표 없이 당신의 삶을 재건할 수 없습니다. 목표가 없을까요? 화가로서 당신이 해야할 일이 없단 말인가요? 당신 안에서 숙성 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들, 창조 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그림들 등 당신이 착수해 주기를 기다리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은 힐데가드라는 화가이고 힐데가르를 기다리는 일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은 당신이 창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창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인간이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수께 기대하였으나, 부활의 주님은 그것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행1:1-9).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성령님에 의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인간들의 탄생입니다(딛3:5). 빌립은 사도가 됩니다. 그러나 다 사도이겠습니까? 삶 혹은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기대할까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
사도행전 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의 정점은 ‘자아실현’이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 발견’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아 실현에 있지 않고, 오히려 가치를 실현하고 의미의 가능성을 완성시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가치’ ‘의미’ 등과 같은 주관적 개념들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키에르케고가 도입한 실존주의 철학은 현대 인간을 합리주의 세계관에 가두어 버리고 의미·가치·하나님· 아름다움· 책임감 등 형이상학적 가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제거했다고 개탄합니다. 쉐퍼의 진단은 옳습니다. 현대인들은 생산성, 합리주의, 물질주의 등에는 탁월하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랭클은 ‘의미 요법’을 통해 사라진 사닥다리를 찾아왔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일층(합리주의, 기계적인 세상)에서 이층(의미, 하나님, 종교 등 가치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고, 무의미라는 정신병을 치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해야 할 I ought’ 것을 하려는 그 순간, 우리는 의미라는 객관적인 것을 통해 인간 실존, 곧 존재(being)의 주관적인 면을 보충하게 된다.’ 한편, ‘삶의 의미’는 종교로 가는 길입니다. 프랭클은 종교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하나님으로 가는 길인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일한 의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