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8/5-9)


잠언31: 6,7 절
“ 독주는 죽을 사람에게나 주어라. 포도주는 상심한 사람에게나 주어라. 그것을 마시면 가난을 잊고 괴로움을 생각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6,7절의 진의는 술로 상징되는 향락이 왕에게 부적절하다는 교훈입니다. ‘죽을 사람’이란 ‘죽음을 방불하는 극한 상황에 이른 자’이며, ‘상심한(=마르) 사람’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말합니다. 극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은 술로 위로를 삼지만, 경건한 자는 그들의 반석이신 주님께 달려갑니다. 한나를 질투한 브닌나가 아들 없는 한나의 약점을 찔러 격동시키자, 한나는 너무나 마음이 ‘쓰라려’(마르)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삼상1:10).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사무엘을 주십니다. 한편, 왕은 정의를 확립하여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요구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모세 율법’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왕의 직무를 상기시켜 ‘모세 율법’을 잊지 말라는 어머니의 통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을 위해 논어를 애독하였는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과 삶을 기록한 성경은 인간 본성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승리의 입성 시, 수 많은 사람의 환호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찬양 소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5일 후 그 백성들은 주님의 원수로 바뀝니다. 형통할 때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을 생각하고 늘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시편37:30,새번역).

잠언31:8,9절
“너는 할 말 못하는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의 송사를 위해 입을 열어라.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세워 주어라.”(공동번역)

본문에서 어머니는, 왕 르무엘이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수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라고 가르칩니다. 재판은 공정해야만 합니다. 가난하다고 두둔하고 세력 있는 자라고 하여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됩니다(레19:15). 그러므로 ‘바른 판결’이란 대목이 중요합니다. 좋은 예가, 솔로몬 왕이 어린 아이에 대한 두 창녀의 상반된 주장을 듣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별하여 바른 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판단과 집행이 쉽지 않습니다. 세력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법의 헛점을 파고 들고, 소송 시에는 많은 돈을 주고 유능한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합법적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역사를 살펴 보면, 권력자들은 힘 있는 계층의 지지를 위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억울한 사정을 알았지만 유대 지도층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에 의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등극하셨습니다. 모든 통치권력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절차를 넘어 구제받지 못한 억울한 일은 더 이상 원수 갚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진노에 맡기시기 바랍니다(롬12:.19).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시편37:9,새번역)

누가복음 5: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 베드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 극적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라는 침례 요한의 거듭된 증언을 듣자 예수께 가서 대화를 갖습니다. 그리고 형 베드로를 찾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그의 인생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흘 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경험하고서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요2:11). 얼마 후 유월절이 이르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수 많은 이적 행하심과 존귀한 공회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등을 목격하였지만, 갈릴리로 내려 왔을 때는 다시 어부라는 생업에 종사하러 갔습니다. 이 즈음 주님은 수 많은 사람과 함께 갈릴리 호수 가에 이르자 시몬의 배에 오르사 군중들을 가르치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밤새 빈손이었던 어부 베드로는 많은 고기를 잡자, 거룩하신 분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깨닫고 두려워 합니다.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심으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눅5:10). 그 사명은 사람의 영혼을 낚아 예수 중심의 인간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이죠! 이 기사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거친 빅터 프랭클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내었습니다. 내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1).

요한복음 1: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예수께 부름 받자,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나섭니다(요1:45).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삶은 수행할 가치가 있는 사명을 발견하였을 때 변화될 수 있다” 하고, 나아가 그는 누구나 그러한 사명이 있고, 그런 임무가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정신분열증 직전의 어느 젊은 여류 화가에게 준 조언입니다. “당신은 삶에서 당신에게 부딪쳐 오고 도전해 오는 어떤 목표 없이 당신의 삶을 재건할 수 없습니다. 목표가 없을까요? 화가로서 당신이 해야할 일이 없단 말인가요? 당신 안에서 숙성 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들, 창조 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그림들 등 당신이 착수해 주기를 기다리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은 힐데가드라는 화가이고 힐데가르를 기다리는 일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은 당신이 창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창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인간이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수께 기대하였으나, 부활의 주님은 그것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행1:1-9).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성령님에 의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인간들의 탄생입니다(딛3:5). 빌립은 사도가 됩니다. 그러나 다 사도이겠습니까? 삶 혹은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기대할까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


사도행전 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의 정점은 ‘자아실현’이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 발견’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아 실현에 있지 않고, 오히려 가치를 실현하고 의미의 가능성을 완성시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가치’ ‘의미’ 등과 같은 주관적 개념들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키에르케고가 도입한 실존주의 철학은 현대 인간을 합리주의 세계관에 가두어 버리고 의미·가치·하나님· 아름다움· 책임감 등 형이상학적 가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제거했다고 개탄합니다. 쉐퍼의 진단은 옳습니다. 현대인들은 생산성, 합리주의, 물질주의 등에는 탁월하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랭클은 ‘의미 요법’을 통해 사라진 사닥다리를 찾아왔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일층(합리주의, 기계적인 세상)에서 이층(의미, 하나님, 종교 등 가치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고, 무의미라는 정신병을 치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해야 할 I ought’ 것을 하려는 그 순간, 우리는 의미라는 객관적인 것을 통해 인간 실존, 곧 존재(being)의 주관적인 면을 보충하게 된다.’ 한편, ‘삶의 의미’는 종교로 가는 길입니다. 프랭클은 종교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하나님으로 가는 길인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일한 의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새번역)

매일큐티(2023/11/20-24)

(에서와 같은 유형의 사람)
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살아갔지만, 조상의 믿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도 좋은 편으로, 귀향하는 야곱과 싸우려고 400명과 함께 갔다는 것은 그의 위치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반면 절룩거리는 야곱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을 과감하게 떨친 통 큰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믿음의 눈이 없어 자신의 가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그 결과 (1) 창세기3:15절에 예언된 여인의 씨가 자신의 혈통을 타고 오신다는 약속을 무시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넘겼습니다. (2) 또한 부모의 뜻은 고려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가나안 땅 헷족속의 두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3)셋째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여, 그는 소떼, 양떼 등으로 큰 부를 형성하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서슴없이 떠나 안전하고 비옥한 세일 산 지역으로 이주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은 대대로 세일 부근에 살면서 에돔이라는 나라를 형성하고, 다른 이방 민족과 같이 풍요의 신을 섬겼다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시지 에서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지 않은 에서와 그 후손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란 없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생의 본질이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삶의 중심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엡1:4-5).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만민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성취하시고, 그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 이들은 언약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솔로몬의 지혜와 믿음의 문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를 구하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왕이어서, 형 아도니아 세력을 단 번에 제거하고 나라를 굳건하게 세웠습니다. 문제는 성전이 준공된 이후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는 백과사전적이었습니다. 지혜,풍요, 권력을 가진 솔로몬 왕국은 평화로웠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간구할 상황이 닥쳐오지 않자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를 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지혜의 원천이 하나님이란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를 근거한 지혜와 훈계를 무시한다”(잠1:7,새번역)고 가르친 바로 그 사람이 주님 경외하기를 그치니, 그의 모든 지혜는 방향을 잃고 세상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도 그를 여인의 손에 버려두셨습니다. 자연히 후궁들의 유혹으로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내에 성전을 세우고도, 그 앞 감람산에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몰렉, 시돈의 아스다롯의 신전을 또 세워 그것들에게 절하며 함께 분향하였습니다. 여기에 지혜로 살아가는 삶의 한계가 있습니다. 지혜가 그 방향을 잃으면 무서운 해악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끼치고 맙니다. 지혜는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솔로몬은 자신만이 중요하였고, 하나님은 장식이 되었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뒷전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란 최고의 지혜자가 일반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잠언27:11절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지혜’란 단지 높은 지능과 능한 임기응변 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올바르게 행동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1:7). 따라서. 본절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 안에서 바른 삶을 영위할 때 부모를 가장 기쁘게 하며, 가문을 비웃는 사람들에게조차 아버지는 당당하게 대할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솔로몬 왕국 당시는 농경과 목축이 주업이어서 인구의 수는 곧 국방과 노동력의 척도였고, 가정의 경제와 치안 역시 자체적 해결이 중요하여 많은 자녀는 든든한 울타리와 같았습니다(시편127:4,5). 그러나 자녀가 불량하면 오히려 지탄의 대상되고, 그의 부모에게는 큰 불행이었습니다. 이에, 잠언은 올바른 자녀와 미련한 자녀가 부모에게 어떠한 존재인가를 줄곧 교훈하여 왔습니다 (23:15,24). 한편, 본절이 내포한 영적 의미를 되새겨보면, 아들은 신자들을, 아버지는 하나님으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욥은 경건하여 악에서 떠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늘 하나님의 자랑거리였습니다(욥1:8). 이때 사단은 욥의 신앙의 약점을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 참소하였습니다. 시험을 당한 욥은 인내하였고 결국 훌륭하게 이김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분”이심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약5:11). 이런 욥의 삶은 우리 주님의 경건한 삶,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승천을 상징하며, 세상 가운데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늘 염두에 두고 시험을 이겨나갈 해답지로서 역할을 합니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잠언10:1)

잠언27:12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본절(22:3절과 동일)에서 ‘슬기로운 자’의 원어는 ‘아룸’으로 지혜와 연관이 있고, ‘어리석은 자’의 원어 ‘페티’는 ‘단순한, 순진한’의 뜻으로 ‘미련함’과 관련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 항해는 지혜가 필수적인데,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제대로 항해할 지혜의 구비 여부입니다. 본 잠언은 분명히 닥칠 역경을 보고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혹은 미성숙한 사람)의 삶을 관찰 후 결론을 내렸습니다: 전자는 재앙과 그 가능성을 보면 숨거나 피하지만, 후자는 고집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당합니다. 잠언은 이미 7장에서 어리석은 젊은이가 문란한 여자를 만나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따라 가는 모습을 보고,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7:22)고 탄식하였습니다. 결과는 미련한 자의 범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의 종류도 다양해서 일일이 전부 열거하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 위험의 징조가 감지된다면 회피하거나, 미리 대비책을 세웁니다. 한편, 본 잠언이 경고하는 가장 큰 위험은 도덕의 위험이고, 교만한 자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련한 위험입니다. 다윗 왕은 전쟁에서는 늘 이겼으나, 도덕의 문제에서는 넘어짐으로 큰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날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잠언27:13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

본절은 20:16절과 동일합니다. 신명기는 가난한 자가 겉옷을 담보로 제공하더라도 해질녘까지는 돌려주라고 규정하였기에(신24:10-13), 이스라엘에서는 겉옷을 담보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외규정이 등장합니다. ‘취하라, 잡을지니라’는 명령형은 본 잠언의 메시지를 잘 살리고 있으며, 메시지의 방향은 채권자에게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잠언은 아무관계도 없으며 낯선 타인의 빚 보증을 서지 말라고 누차 경고하나, 이를 무시한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면 누운 침상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잘모르는 낯선 ‘타인’은 물론, 심지어 외국인(‘외인’)의 빚보증을 섰다면 철이 없거나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22:26,27). 잠언은 통상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하며, 그런 행위는 주님께 꾸어드리는 의로운 삶임을 밝힙니다(14:31;19:17). 그러나, 타인 혹은 외인의 빚의 보증물로 제공된 자의 의복이나 몸을 취할 경우는 아닙니다. 잘모르는 남이나 외국인을 위해 보증으로 제공된 의복이나 몸을 취하는 채권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대신 수행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리석게 보증을 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열렬히 그리고 부지런히 채권자에게 가서 자비를 호소하는 길이외에는 없습니다(잠언6:1-2).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채권자, 채무자, 보증인의 관계를 잘 규율하고 있습니다만, 본 잠언의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새겨야만 지혜롭게 비즈니스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잠언19:29,새번역)

매일묵상(고난주간 4/10 – 16)

2022년의 부활절은 4월17일입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2022.3. 21일 후  첫 만월은4/15일경(음력3/15)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17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4/10-4/16).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9)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낭비가 아니라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4.10), 주님은 감람산 동쪽 산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서쪽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만나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슥9:9성취).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나사로를 살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눅19:41-44). 성전에 들어가서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11)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 있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로 가셨습니다.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버림받을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셨고 이어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이 날 여러 논쟁과 교훈이 있었습니다.먼저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힐문하자,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막11:27-30). 이어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 대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상의 예를 들어 질문하였습니다. 모세율법은 한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경우 부활하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였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12:1-2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 계명의 순서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너무나도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28-37). 이어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성전의 웅장함을 감탄하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은 철지히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요한복음의 영광의 책 부분(13-21장)의 시작입니다. 큰 다락방에서 12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도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것을 축약해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 하려고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였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요 13장).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후에 믿어 제자가 될 사람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4장-17장). 이어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유다가 로마군인들을 데리고 오기를 기다리시면서,1시간 동안 큰 통곡과 함께 피 땀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서 곤욕을 당하셨고, 드디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 앞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잠잠하시다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바로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8-69).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8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사이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당신 세상에 온 이유는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이다고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다는 것과 당신이 인간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실 것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1/02/01 – 05)

2021/02/01
시편 6편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절)

이 다윗의 시는 초대교회에서 읊은 일곱 개의 참회 시 중 하나입니다. 사순절(부활주일 전 40일)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그 일곱 개의 시편들을 읽고 노래한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이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와 함께 이로 인한 감정적인 괴로움을 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합니다.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병과 근심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호소하는 탄원(1-5), 시편기자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묘사(6-7),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승리의 선언(8-10).

시편 기자는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만약 주님의 구원이 없다면 자신은 죽어 ‘스올’에서 거처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려주시기를 절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도 없고, 어둡고 소망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를 가진 시편기자도 놀라고 있는데, 하물며 구약도 없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반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새 창조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맹인에게 빛이 돌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함과 고난을 당하는 분들 앞에서 함께 울고 기도해 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고통 그 자체는 인류의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2021/02/02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네 살 가량 되었을 때 가족이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미하이가 도중에 공중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기 책임자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에요. 사람들이 자기 집을 냄새나게 만들어도 가만 있어요.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린 미하이의 표현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미하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책임자에 대하여 오히려 좋은 말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실상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난한 사람, 세리와 죄인과 같이 멸시를 받는 사람,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존중하고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임금들은 사람들을 주관하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으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24-27). 우리로서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데 평생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범 되신 주님은 훌륭하게 이를 행하시고 속죄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고 본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만들어진 새로운 종(種)이요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2021/02/03
미하이가 다섯 살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를 심히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는 네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있다. 그 페이지에 하나님은 네 죄를 낱낱이 적어 놓으신다. 거기에 그저께도 하나 적혔고, 어제도 하나 적혔는데, 너는 오늘도 다시 죄를 지었다.”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내가 저지르는 나쁜 짓만 써 놓으신다고 생각하세요? 착한 일은 써 놓지 않나요?”

미하이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법을 어긴 사람만 단속하는 경찰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인 동시에 해로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잘 한 행위를 기록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바로 이 측면을 단단히 붙잡고 소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나그네 3명을 대접한 뒤 알고 보니 주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주님은 소돔을 심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심판자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드린 후, 의인의 수를 계속 낮추다가 10명까지 허락을 받았습니다. 즉, 10명의 의인만 있다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의인이 없던 소돔 성은 불과 유향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반면 어떤 성인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때, “주여, 제가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늘 유념하여야만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1/02/04
어떤 아이가 동전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쥐고 교회로 가다가 도중에 넘어져 동전들을 떨어 뜨렸는데, 하나는 도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하나님 미안합니다만 하나님의 동전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테스트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니엘입니다. 17살에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섭리 가운데 왕립학교에서 3년을 공부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 그런데, 학생들에게 주는 음식 특히, 고기와 포도주는 모세율법의 규정상 먹을 수 없어서 – 우상에게 미리 바쳐진 음식 등의 이유 –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고기를 먹지 않고 어떻게 튼튼하게 자라겠는가?”라는 환관장의 입장 역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로에 섰습니다.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를 무릅쓸 것이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고자 음식 담당자에 10흘만 채식을 주어 비교해 보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담당자의 입장에서 채식으로만 목적이 달성되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시험을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도록 만드셨고, 이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여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2021/02/05
잠언12장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6절은 15절의 서론적 교훈을 언어와 관련한 도덕과 신학을 다루는 부분들(17-22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중심적 교훈은 다양한 환경에서 가지게 되는 위험한 감정(분노 등)들을 잘 통제하라는 권위적 충고입니다. 랍비 일레아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컵, 지갑 그리고 근심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즉 마시는 동안, 돈 거래를 하는 동안, 내적으로 흥분상태에 있을 동안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fool)는 몸짓과 언어로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배우지 못하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분노 때문에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무시합니다. 여기서 무시한다는 히브리어 ‘코세’는 ‘덮어 보이지 않게 하다 혹은 보호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구경 거리가 되느니 참아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자를 못 본체 하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여러 구절(17-22절)에서 지혜자는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든 상황에 반응할 수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결국 그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인 자제력으로 인하여 선한 결과가 도래되어 그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벌주려고 광분 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인생성공방정식- 화평


잠언 3:21-35
우리 인생이 가지는 참된 지혜 중의 지혜는 세상에 심판자이시자 주인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에 근거하여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떻게 이웃과의 관계를 가지며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샬롬, 즉 화평입니다. 먼저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신실한 이웃 사랑을 늘 보여주어라는 3장3절의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여 실행하라고 다시 한 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런 원수도 생기지 않고 하나님은 너를 보호하여주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이웃의 어려움을 기꺼이 도와주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악인을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침을 따라 살아간 분으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조카 롯과 함께 벧엘에서 거주할 때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롯에게 먼저 갈 길을 택하여 가라고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롯이 좋은 땅을 선택하자 그 보다 못한 땅에서 거주하였으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조카 롯이 전쟁포로로 잡혀가자 목숨을 걸고 쫓아가서 적을 패배시키고 다시 구해오다가 살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자신이 얻은 물건의 일체의 십분의 일을 드렸고, 악한 소돔 왕에게 속한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돌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재물로 부자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에는 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이웃과의 화평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화평이 있을 때 우리의 인생성공방정식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01/11 – 15)

2021/1/15
잠언12장 13절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개역개정)
“악인은 입술을 잘못 놀려 덫에 걸리지만, 의인은 재난에서 벗어난다”(새번역)

13절은 14절(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과 함께 언어와 행위의 결과를 나타내면서 12장 첫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죄인의 언어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13절), 의인의 언어는 좋은 것들로 그를 채우게 됩니다(14절).
13절은 무죄한 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죄악된 말 때문에 악인 자신이 덫에 걸리게 됨으로, 언어 사용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즉, 모함이라는 ‘그물’은 악인 자신이 설치한 것이지만, 결국 말하고 있는 자신이 걸리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의로운 다니엘을 모함한 페르샤 제국 신하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에스더서입니다. 하만에게 모함 당한 의로운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죽을 운명에 놓여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결국 섭리 가운데 거꾸로 하만과 그 일족은 멸망하고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구출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주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불평이 있을 경우 입술로 죄를 범하기 쉬우니, 기도하고 심중에 말하며 잠잠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의인도 악인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3:16-17, 새번역).


2021/1/14
어떤 가족이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가족의 어린 아들은 새 집에 감탄하여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집 너무 멋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부활의 몸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실제로 상속을 받을 때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다가 드디어는 이 아이와 같은 탄성을 질러댈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세상을 우리는 약속받았고, 그 보증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을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시는 분(엡1:14)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약속의 충분한 성취를 기다리기 때문에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진실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있는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법적인 신분은 죄인으로부터 약속의 자녀들이요 도래할 유업의 상속자들로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새집에 부모님을 따라 들어간 아이처럼, 우리가 이 사실에 너무나 감격하여 상속자처럼 살아가는가의 여부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 – 돈, 명예, 권력, 지식, 지위 등 -은 이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먼저 이것들은 순리대로 와야만 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청지기의 지위에서 생각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부요하게 만들 줄 알아야만 합니다. 청지기의 직분을 잘하면 주님의 축복을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모두 받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1/13
과거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서 침례교인 피터즈는 비밀리에 인쇄된 성경을 옳기다가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슬피 울자 그의 네 살된 아들이 물었습니다.

“엄마 천국은 아주 더럽고 나쁜 곳이에요?”

“너는 어째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니?”

“엄마 아빠는 늘 나에게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아빠가 천국에 갔는데 왜 엄마가 자꾸 우시는지 모르겠어요.”

예리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어는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옳겨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는 더 좋은 나라가 올 때까지 평안히 주님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 손녀 아멜리는 여덟 살 때 많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뒤 사도 바울의 안녕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멜리 왈.

“바울은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라는 말로 편지를 끝내곤 했는데, ‘우리’란 말 속엔 다른 사도들도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게 아니예요? 성경에는 그들이 죽으면 더 이상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써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어린아이다운 생각이나, 배울 점이 있습니다. 어린 아멜리도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사는데는 남 못지 않지만 과연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와 가족을 위해, 곤란에 빠진 친지와 성도들을 위해, 시험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만 합니다. 심판 때 주님은 우리의 변명에 “왜 기도하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으실 것이 뻔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


2021/1/12
최근 경기도 7급 공무원 채용시험 한 합격생이 인터넷에 올린 저속한 글과 그 내용이 문제가 되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철저히 조사해서 필요할 경우 합격을 취소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또 대전광역시 9급 공무원 합격생 중 한 명은 품행문제로 직접 고발까지 당하여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실은 있으나 그 내용대로 행한 적은 없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KBS 열린토론에 나온 한 토론자는 자신이 낸 세금이 그런 분들에게 사용될 수는 없다고 하고, 어떤 청취자는 사기업에서조차 채용될 수 없다는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문제되는 두 분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자신들이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였습니다. 그저 안정되고 보수도 괜찮고, 연금이 보장된 직장으로만 접근하였지, ‘봉사’라는 공무원으로서의 사명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오직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려는 권리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혹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습니까? 신앙은 말이 아니라 인격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언어의 사용에서부터 ‘사랑의 열매’가 있는지 반추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마7:24, 새번역).


2021/1/11
시편4장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4장의 저자는 다윗으로 주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다윗의 심정을 토로 한 것입니다. 오늘은 ‘실용적 신앙의 유혹’을 다루는 6절을 묵상하겠습니다.

신앙의 실용주의라 함은 믿음을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누릴 혜택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실용적인 믿음이 불러오는 교묘한 유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신앙의 핵심에는 “개인적 이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사나 예배의 목적은 현실의 이익입니다: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내게 그 점을 보여주어라!” 실용주의 신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종교나 설교 등을 찾아 쇼핑하게 됩니다. 다윗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의 종식과 풍부한 소출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만 해결되면 거짓 신들에게라도 달려가 안도감을 가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봉자들은 바알이 이 가뭄에 비를 내려 풍부한 농업의 산출물들을 줄 권능이 있으니, 바알에게 제물을 드려 어려움을 빠져나가라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음과 여러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조작하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하여 순전한 믿음‘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는 단호한 결의를 갖고 있습니다. 욥이 그 대표로서, 극한 절망 중에서도조차 주님을 굳게 붙잡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것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2020/12/24
잠언 12장 10절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12:8절의 주제는 재물이나 명예 등 인생 전반에 걸쳐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9절은 이것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할망정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어 10절은 일꾼을 착취하지 말고 돌보아야만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인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인은 당연히  자신이 부리는 짐승들의 욕구들조차 알아서 돌보아 줍니다. 하나님은 가축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 때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물론, 짐승들도 쉬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0; 23:11–12; 레 25:1–7). 또한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는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가축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열등한 가축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진 종과 하인을 비롯한 인간에게는 더욱 자비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가축의 필요를 느끼고 돌보라는 말은 자신의 일꾼들을 돌보라는 잠언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산다면 그분이 우리의 부엌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은 성경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9:9-10).


2020/12/23
열살된 손녀 아멜리가 방 구석에서 놀고 있을 때, 목사님은 방문한 손님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견해를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견해에 대하여는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견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천장을 보면 바닥은 볼 수 없게 되고, 바닥을 보면 천장을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전체를 파악하는 직관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고 있던 아멜리가 껴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하였습니다.

“전체만 보는 것도 역시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전체만 보면 전체 외에도 전체를 이루는 각기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 라는 말도 실재의 일부에 불과한 추상에 불과해요. 진리는 모든 부분과 그들의 합인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예요”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멜리는 다시 인형놀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어릴 때의 정약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철학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인식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는 진리가 아닙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이 창조주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14:6). 이 진리의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와 사망의 굴레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2020/12/22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손을 구하는 어느 농장을 찾아 추천장을 그 농장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농장 주인이 추천장을 뜯어 보니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일손이 필요하였기에 그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에 강력한 폭풍이 농장이 있는 계곡을 흩어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비와 윙윙 거리는 바람소리에 놀라 농장 주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구한 일꾼을 불렀지만 그 사람은 아주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헛간으로 뛰어가 가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았더니 놀랍게도 먹을 것이 넉넉히 준비되어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다시 밭으로 뛰어가니 밀 곡식단들이 잘 묶여져 방수천으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곡식 창고로 뛰어가니 문들은 잘 잠겨 있었고 곡식은 아무 염려 없이 건조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주인은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하는 말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말은 항상 신실하고, 우리의 사랑은 항상 따뜻하고 우리의 포옹은 단단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내가 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였어야만 했는데”라는 고뇌 속에서 뒹굴면 안됩니다. 이것은 인생을 떠나는 마지막에 더 절박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늘 감사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12:35-36).


2020/12/21
때로 아이들은 예사스럽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8살된 소녀의 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 체험도 없어요. 그분이 나에게 오라고 하셔서 나는 왔어요. 그분이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셨고, 그것을 나에게 주셨어요. 나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으면, 그들도 그분에게 안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께 초청하고 계십니다. 위의 소녀는 이 구절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식을 주셨다는 귀절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도여행을 다니실 때 막달라 마리아 등 여러 여인들이 섬겼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실 때까지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 승천하셨어도 만유의 주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소녀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안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매우 큰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매일말씀나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야 할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많은 방법 중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섰을 때 강물의 흐름이 그치고 땅 역시 말려서 백성들이 건너가는 방법을 채택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목격하여 큰 담력을 가질 것이고, 적들은 간담이 서늘해 질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이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나아갔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 자기들의 장막을 떠났습니다. 곡식을 거두는 시기라 요단 강의 물은 언덕에 넘칠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믿음으로 요단 강에 들어갔고 그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곧 그쳐 매우 멀리, 즉 여리고 북방 약 22킬로미터 떨어진 요단강과 얍복강이 합쳐지는 지역에 있는 아담 성읍 근처에서 일어나 한 곳에 쌓였습니다. 그리고 강 바닥은 바로 말라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여리고 앞으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경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첫걸음을 떼라고 요구하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한계가 놓여져 있습니다. 무엇이 믿음이고 무엇이 시험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매우 중요한 지혜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모세는 하나님이 배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을 때, 즉 파라오에게 맞서라고 하셨을 때 뒷걸음질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의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발을 조금만 떼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자 지팡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뱀은 이집트에서 숭배의 대상이었고 독이 있다고 여겨지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는 명령을 듣고 겁이 났을 것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말합니다: “만일 내가 독사를 잡아야만 한다면, 나는 머리 바로 뒤를 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꼬리를 잡으면 뱀에게 물릴 확률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첫걸음의 원리를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뱀을 집었고 그것은 다시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뱀을 집어야 했습니다. 즉 모세는 첫걸음을 내딛어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패턴이 거듭 반복됩니다. 나아만은 문둥병을 치료받기 전에 물속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어야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작은 도시락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씨앗은 더 위대하고 풍성한 열매로 부활하기 전에 먼저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경험하고 싶다면 첫걸음의 원리를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듣고 읽어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직접 우리의 발을 적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작년(2018)에 작고하셨던 미디어 사업 분야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그리스도인인 밥 버포드씨의 일화입니다. 밥은 엄청난 수익을 올릴 것처럼 보이는 사업기회를 40대 중반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밥이 그 사업제안을 덥썩 받아들이는 여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과거 자신의 법률고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밥에게 제기된 사업제안을 다루는 팀장이었습니다. 밥은 그에게 그 투자문제를 언급하는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업가적 은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고자한다는 열정 역시 알려 주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혹입니다.” 밥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성경을 펼치고 그 대목을 찾아 묵상을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유혹자는 밥에게 말하기를 “시도해라. 이것은 너의 기회이다. 모든 너의 조심성을 던져 버려라. 너는 이런 기회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 거래는 제대로 작동한다면 엄청난 수익이 돌아오지만 몇 가지 비즈니스의 중력의 법칙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밥은 그 사업분야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밥의 속 사람의 목소리는 “인생은 진실로 그렇게 쉽지 않다. 네가 아는 것들에 붙어 있으라! 네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가지고 사업하거라.” 밥은 곧 중심가치를 붙뜰고 워싱턴으로 되돌아 갔을 때, 전화를 걸어 자신 없이 사업이 진행되도록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첫걸음의 원리는 이런 한계를 제대로 평가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마르틴 루터에게 한 가엾은 작은 여인이 와서 말했습니다. “오, 박사님, 저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이며,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루터는 묻기를 “부인, 당신은 사도신경을 믿습니까?” 그녀는 손을 맞잡고 대답했습니다. “예, 믿습니다. 그것은 가장 분명한 진실입니다.!” 그 말에 루터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안히 가십시오. 당신은 나보다 믿음이 좋습니다.” 그리고는 루터가 쓰기를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는 더 잘 믿어야 해. 너는 더 많이 믿어야 해. 너의 믿음은 강하지 않고 부족해”라는 생각을 집어 넣는 것은 마귀다. 마귀는 이렇게 하여 사람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다” 하였습니다. 의심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믿음을 갖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더 열심히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더 가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저 하나님을 더 잘 알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 알수록, 여러분은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성장에 필요한 모험심, 인내, 지혜, 신뢰, 사랑 등 모든 요소들이 다 담겨 있는 A급 종합비타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5-6).

우리에게는 ‘영적 안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가장 편안하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안전 지대를 넘어서라고 부르시면 불안하고 불편해집니다. 우리는 교회 친구들과 편안하게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믿지 않는 직장 동료에게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불편해 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편안하지만 하나님이 내 직업을 재조정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불안해집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쉽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에 관해서는 훌륭하게 토론할 수 있지만,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친구에게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이런 우리의 영적 안전 지대를 넓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직접 나서는 것입니다. 매일 조금씩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어디서 발을 물에 적셔야 하는지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요. 두려워서 피해 다녔던 사람에게 전화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의 신앙을 표현하며, 다가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우정을 보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배우자, 부모, 친구에게 진실을 말하고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모험을 감수하십시요. 그 모든 걸음이 여러분이 원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게 되고 실패하였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믿음이 성장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3,24).

매일말씀나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지급받은 세 번째 종은 그 엄청난 선물을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대학 시절, 한 친구는 자신의 어떤 면이 그와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지 지적해 주었습니다.그러나 자신은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도움을 구하는 대신, 오히려 그와 멀어지려고 뒷걸음질쳤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흥, 그렇게 말한다 이거지…. 난 너와 더 거리를 두고 의례적으로 대할 테니까. 네가 그 애기를 꺼낸 것을 후회하길 바래”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오토버그 목사님은 좋은 친구가 될 뻔한 사람도, 성장할 기회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진실을 직면하길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자신은 진실을 묻어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 번째 종은 마음 속에 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수탁받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였고 그래서 그 당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땅 속에 묻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두 가지의 동기로 자신의 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합니다.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전자는 우상숭배와 같으므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노력하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그분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스’라는 말씀을 붙잡고 현실을 직면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6-7).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두 번째 원칙은 “그분은 회계 결산을 하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바로 이 원칙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선물을 준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라는 말로 주님은 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묘하게 발뺌하여 자기 잘못의 결과를 벗어나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교통 벌칙금을 내지 않으려고 경찰에게 변명한 적은 없습니까? 선생님을, 상사를, 혹은 배우자를 서툰 변명으로 속이려 한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만 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거짓말도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지만, 결산 보고에 대해서는 칼 같으십니다. 우리는 그 보좌 앞에서 잔꾀를 부릴 수 없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사실을 잊는지 모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괜히 외부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오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회계하실 것입니다. “내가 준 것으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 그분은 각 개인에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종은 이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은사를 묻어 버린 것을 합리화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9-10)

달란트 비유에서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을 등장시켜 이야기 하신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응과 기쁘시게 못하는 반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은 두 명만 등장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즉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의 양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적인 삶에서 은사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은사라고 하여도 그 양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돋보이고 칭찬받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십니다. 그것은 달란트 비유에서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보다 훨씬 큰 은사를 받았지만, 주인이 둘을 똑같이 대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달란트가 다섯이냐, 둘이냐, 아니면 한 개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마음을 단호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앞설 때는 교만과 거짓된 우월감에 빠지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뒤질 때는 비참함에 빠지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내게 주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가치 절하하여 땅에 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십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은사를 주셔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파악하고, 개발하고, 투자하고, 귀하게 여기고, 누려야 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은 주인에게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보물을 땅에 묻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주인의 부름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 한 친구가 자신의 생활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진실을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그에게 다시 가서 거짓말을 밝혔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그 일을 돌이켜 보면서 목사님은 자문을 했습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지?” 그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일으키는 것은 거짓말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할 때 우리는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담합니다. 왜냐하면 나만 소외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그렇게 난리법썩을 떨었던 것 아닙니까? 리빙스턴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는 중에 조용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리빙스턴은 마음에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가장 엄숙하신 신사께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하면서 안전하게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세 번째 종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가장 일깨우는 측면입니다. 그는 훔치거나 횡령하거나 착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은사를 땅에 묻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악하고 게으르다”고 심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나태’를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악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솔로몬 슈멜은 나태가 영적인 죄이며, 일곱 죄악 중 그리스나 로마의 악의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영적 죄악으로서의 나태는 신체적 게으름과 다릅니다. 그것은 분주함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나태는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미, 목적, 희망의 상실이 타인의 복리에 대한 무관심과 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길 때의 열심과 기쁨의 반대말입니다. 세 번째 종의 두려움은 결국 나태로 이끌어 그의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게 만들고,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최소한 은행에라도 맡겨 원금과 이자가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관리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나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종은 그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데 던져졌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 대한 비유입니다.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나중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매우 중요한 심판 대상이 됨을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